성인 성녀 이인덕 마리아 (李仁德 Mary)
축일 9월 20일
활동년도 1818-1840년
신분 동정순교자
지역 한국(Korea)
같은이름 메리,미리암,이마리아,이마리아
첨부자료 이인덕_마리아.hwp 이인덕_마리아.hwp (14 KB)
자료등록 나눔지기~♡님이 2011/04/03에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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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이인덕 마리아(Maria)는 183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이영덕 막달레나(Magdalena)의 동생으로 할머니 조 바르바라(Barbara)에게서 천주교의 진리를 배워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입교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그녀의 부친이 너무나 완고하고 또 천주교를 적대시했기 때문에, 부친이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이 사실을 안 부친은 더욱 엄해졌고, 더욱이 언니 이 막달레나의 혼인 문제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자,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집을 뛰쳐나와 어느 신자 집에 숨어 살게 되었다.

처음에 이 소식을 들은 주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으나, 양반집 주인과 처녀들이 도망을 쳤다가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고 회장들에게 부탁하여 그들을 보살펴 주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조금마한 집 한 칸을 얻어 거기서 살게 되었으나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 놓고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므로 곤궁과 고통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수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또 그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하는 한결같은 마음과 원의로 주교가 체포되면 함께 자수키로 하였으나, 자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기해년 7월 어느 날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붙잡혔기 때문이다.

포청에 잡혀온 이 마리아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무척 고생하였음은 물론이요, 잔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 후 또다시 그녀의 항구심을 꺾어보려고 새로운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가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교우요, 죽는 날까지 교우로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형조판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언니인 이 막달레나가 사형선고를 받고 순교한 1개월 후인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여 언니와 함께 동정과 순교의 두 가지 영광을 얻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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