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창조와 관련한 여러 이슈들
a. 서
1) 성경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혹은 모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그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인 창세 1:26-27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라고 말한다.
2) 그런데, 위의 성경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 ‘모습’, ‘비슷함’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한다.
3) 이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함에 따라 이단도 생겨났다. 즉, 이런 오류에 빠진 이단은 하느님께서 ‘영’이시고 ‘성’(性)을 초월해 계신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창세 1:26의 ‘우리’와 창세 1:27b의 ‘남자와 여자로’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남성 모습의 하느님”과 “여성 모습의 하느님”으로 구분하고, 그러한 구분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4) 아래에서는 ‘우리’, ‘모습’, ‘비슷함’의 개념을 포함하여,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의미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b. 창세 1:26의 ‘우리’의 의미
1) 고대 근동, 특히 메소포타미아 신화
a) 고대 근동에서는 다신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수메르 신화를 포함하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아누(Anu, An), 엔릴(Enlil), 엔키(Enki), 닌후르삭(Ninhursag), 우투(Uttu), 난나(Nanna, Sin), 므로닥(마르둑, Merodach, Marduk), 이난나(Inanna), 느보(Nebo) 등의 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b) 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므로닥(마르둑), 엔키, 엔릴 등의 여러 신들이 개입하여 인간이 창조된다. 여러 신들은 엔키와 므로닥의 제안에 따라 자신들의 피와 살을 섞어 인간을 만들고, 인간이 신들을 위해 신들을 대신해서 일하도록 한다.
c) 므로닥(Merodach) 혹은 마르둑(Marduk)
(1) 므로닥은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숭배된 주신(主神), 수호신, 창조의 신, 세계의 질서를 세운 신으로 여겨졌다.
(2) 신들 중에서 므로닥이 차지하는 비중은 수메르 신화에서보다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더욱 커진다.
(3) 므로닥은 성경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바빌론의 우상 벨(Bel) 혹은 므로닥으로 등장한다(예레 50:2; 51:44).
d)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창세기 1:26-27에서의 ‘우리’라는 표현은 인간 창조에 여러 신들이 개입했다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영향을 창세기 집필자들이 받았을 개연성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2) 삼위일체 하느님
a) 창세 1:26에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우리’를 삼위일체 하느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입장도 있다.
b) 그러나, 구약성경을 집필할 때에는, 하느님께서 인간 저자들에게 “삼위일체 하느님”이라는 생각을 분명하게 불어넣지 않으신 상태였고, 이 관념은 신약에 가서야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c) 따라서, 창세 1:26의 ‘우리’를 삼위일체 하느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구약성경에서 살펴보는 ‘우리’
a)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을 복수형으로 묘사하거나, 하느님은 하늘의 모든 영적 존재들(온 군대, 아들들, 천사들 등)의 모임을 주재하며 땅의 일들을 심의하고 결정하는 분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b)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하늘의 모든 영적 존재들보다 항상 “지극히 높으신”(Most High) 분으로 여겨졌고, 창세기에는 4번의 “지극히 높으신”이라는 호칭이 나온다. 구약성경 중에서 집회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45번이나 언급하고 있고, 시편은 23번이나 언급하고 있으며, 다니엘서가 13번을 언급하고 있다.
c)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성경구절로서는 창세 3:22; 11:7; 1열왕 22:19-22; 욥 1:6; 2:1; 38:7; 시편 82:1; 89:6-7; 이사 6:1-2 등을 들 수 있다. 심지어, 욥기에는 이 모임에 사탄이 등장하기도 한다.(욥 1:6-9.12; 2:1-4.6-7 참조)
(1)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창세 3:22)
(2)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창세 11:7)
(3) “내가 보니, 주님께서 어좌에 앉으시고 하늘의 온 군대가 그분 오른쪽과 왼쪽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누가 아합을 꾀어내어, 그를 라못 길앗으로 올라가 쓰러지게 하겠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저마다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는데, 어떤 영이 주님 앞에 나서서 ‘제가 아합을 꾀어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 영에게 ‘어떻게 그를 꾀어내겠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제가 나가 아합의 모든 예언자의 입에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그를 꾀어내어라. 성공할 것이다.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1열왕 22:19-22)
(4)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여 와 주님 앞에 섰다.”(욥 1:6; 2:1)
(5)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두 환호할 때에 말이다.”(욥 38:7)
(6) “하느님께서 신들의 모임에서 일어서시어 그 신들 가운데에서 심판하신다.”(시편 82:1)
(7) “거룩한 이들의 모임은 당신의 성실을 찬송합니다. 정녕 구름 위에서 누가 주님과 견줄 수 있으며 신들 가운데 누가 주님과 비슷하겠습니까?”(시편 89:6-7)
(8)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이사 6:1-2)
d) 따라서, 창세기 1:26의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표현하거나 하느님을 복수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포함하여, 천상 어전에서의 모임에 등장하는 모든 영적 존재들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 창세 1:26-27을 다시 살펴보면, 하느님께서 천상 모임에서 다른 영적 존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창세 1:26에서는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실제로 인간을 창조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춘 창세 1:27에서는, ‘당신의’라는 단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c. 창세 1:26-27의 ‘모습’(image), ‘비슷함’(likeness)의 의미: 창세 1:26-27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라고 말한다.
1) 서
a) 창세 1:27은,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모습’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b) 또한, 창세 1:26-27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비슷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c) 이하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창세 1:26-27의 ‘모습’(히브리어로는 첼렘. 영어로는 image)의 의미
a) 성경에서 말하는 ‘모습’
(1) ‘모습’을 뜻하는 히브리어 ‘첼렘’은 ‘새기다’(to carve) 혹은 ‘자르다’(to cut off)라는 뜻이지만, 창세 1:26-27에 표현된 ‘모습’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다.
(2) 성경 전체의 맥락과 고대 근동의 문화를 고려할 때, ‘모습’이라는 말은 ‘반영, 반사, 대표, 아들권 혹은 아들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모습’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특징이나 동일성을 제시하기보다는 비교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3) 그리고, ‘모습’이라는 단어가 임금에게만 국한되었던 고대 세계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모습’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다른 창조물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는 놀라운 진리를 전달한다.
b) ‘모습’의 의미에 대한 전통적인 세 가지 관점
(1) 전통적인 세 가지 관점의 내용
(a) 실체적 관점: 이 관점은 아우구스티노,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틴 루터, 잔 칼뱅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다.
① 이 관점은 “모습”을 사람 안에 있는 특정한 자질, 능력, 또는 속성, 즉, 일반적으로 사람의 이성, 의지, 그리고/또는 도덕적 능력과 동일시한다. 또한 앞에서 열거한 모든 것은 사람의 영혼 안에 존재한다.
②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이러한 공통적인 “속성”을 고려할 때, 인류라는 종(種)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공통 종류-본성이 존재한다. 또한 타락 이후, 우리는 죄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속성들을 유지한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여전히 ‘모습’을 지닌 존재이지만, 이제는 죄로 인해 타락했다.
③ 또한, 이 관점은 하느님이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하느님의 ‘모습’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드물며, 따라서 지성, 의지, 그리고 도덕적 능력을 ‘모습’과 동일시하는데, 이러한 속성들이 신과 가장 유사하기 때문이다.
(b) 기능적 관점: 이 관점은 게르하르트 폰 라트, 데이비드 클라인스, 그리고 J. 리처드 미들턴 등이 지지하고 있다.
① 이 관점은 ‘모습’을 우리가 행하는 것, 특히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땅을 “지배”하도록 하신 것과 동일시하며, 우리가 소유한 속성과 동일시한다.
② 이 관점은 창조 명령이 창조 기록(창세 1:26-28)과 밀접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 “안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물을 다스리는 자로서 기능하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③ 이 관점을 뒷받침하는 현대적 추진력은 인간에 대한 보다 “전체론적”인 이해와 “모습”을 특정 속성과 동일시하는 것을 꺼리는 데 있다. 오히려 “모습”은 하느님의 대리자이자 부통령으로서 인간의 기능이다.
(c) 관계적 관점: 이 관점은 칼 바르트, 에밀 브루너, G. C. 버크하우어, 로버트 젠슨, 토마스 토런스, 스탠리 그렌츠 등이 지지하고 있다.
① 이 관점은 ‘모습’을 인간 안의 특정 속성이나 기능이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과 동일시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비슷함’은 주로 타인을 향한 자유로움의 경험에 있다.
② 원형으로서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로우시다.
③ 비유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하느님, 이웃, 그리고 나머지 피조물과 관계를 맺을 자유를 가지고 있다.
(2) 전통적인 세 가지 관점의 문제점
(a) 환원주의(還元主義)의 위험성
① 세 가지 관점론은 환원주의로 치우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세 가지 관점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자질, 능력 등의 측면 중에서 인간의 한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그 측면을 ‘모습’과 동일시할 수 있다.
② 그 결과 인간의 다른 많은 측면들은 무시 혹은 경시 등에 의해 희생시키게 되어, 결국 환원주의에 빠질 수 있다. 즉,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인간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즉, 실체적 관점)이 기능적 관점보다 더 중요해야 하고, 선행되어야만, 인간이 다른 창조물을 지배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③ 따라서, 실체는 기능보다 선행되어야 하고, 양자가 서로 동일한 것도 아니며, 실체가 기능보다 더 중요해야 한다.
(b) 성경 안에서 찾기에는 희소한 ‘모습’의 의미
① 위의 세 가지 관점론에 따라 ‘모습’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그 근거를 성경에서 많이 찾을 수 있어야 한다.
② 그러나, 위의 세 가지 관점론에 따라 ‘모습’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성경 본문에서 충분히 작동하지 않는다. 즉, 세 가지 관점에 따라 ‘모습’을 설명하려는 것을 성경에서 찾기는 매우 어렵다.
③ 창세 9:6의 언급도,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3) ‘모습’의 의미와 한계
(a) 하느님의 ‘모습’(archetype)이 표상적인 인간의 ‘모습’(ectype)으로 복사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즉,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가졌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 그 자체를 표상적 복사본(ectype)으로 가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선물”이다.
(b) 하느님은 육신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영적인 분이시다. 따라서,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외적인 유사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이 하느님의 내면의 본질적 ‘모습’을 반영하고 표현할 뿐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따를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c) 한편,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전능성, 지혜, 의로움, 완전성, 신성 등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3) 창세 1:26-27의 ‘비슷함’(히브리어로는 데무트. 영어로는 likeness)의 의미
a) ‘모습’과 ‘비슷함’은 유사하기도 하지만, 약간의 차이도 있다. ‘비슷함’은 그 ‘모습’의 정확한 세부 사항을 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너무 분명하게 구분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이 단어들은 같은 현실의 다른 측면들을 가리킨다.
b) 인간은 하느님의 특별한 종 혹은 하인(servant)으로 창조되었고, ‘모습’과 ‘비슷함’은 인간이 하느님과 맺는 이중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먼저 맺어지고, 그다음에는 창조물에 대한 인간의 통치 혹은 관리와 맺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선물을 바탕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먼저 맺어야 한다. 그 다음에, ‘비슷함’을 통해, 인간은 창조물에 대한 통치 혹은 관리를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시켜 가야 하는 과제를 진다고 할 수 있다.
c) 이처럼,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과 ‘비슷함’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계약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닮도록 창조되었으며, 하느님의 종으로서 창조물을 통치 혹은 관리하도록 창조되었다.
d) ‘모습’과 ‘아들됨’의 연결은 우리가 성경과 그리스도와의 성경적 계약들을 살펴볼 때 또한 중요하다. 창세 1-2장에서는 아담이 “하느님의 아들”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명시된다(루카 3:38). 이는 “아들/아들됨”이 강력한 표상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 아담은 하느님을 표상하기 때문에 ‘모습/비슷함/아들’의 특성을 가지며, 이는 확장하여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물론 아담의 ‘머리됨’ 또한 계약으로 인해 독특하다. 아담과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하느님의 ‘모습-비슷함’으로서 그분과 유사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새 계약의 머리이시고, 하느님의 참된 ‘모습’이시며,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하신 예수께서는 아담, 이스라엘, 다윗의 원형적 성취를 보여준다.
f) 임시적인 것이지만, 구약의 계약 후반부에서 “아들”이 이스라엘(탈출 4:22; 호세 11:1 참조)과 다윗 왕조의 임금(들)(2사무 7:14; 시편 2)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 이스라엘과 다윗과 그의 아들들은 하느님처럼 행하고, 아담이 그들보다 앞서 행했던 것처럼 그분의 대리자로서 세상에서 그분의 통치를 수행해야 한다.
g) 이러한 성경적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다(콜로 1:15). 그분은 아버지의 신성한 아들이시며, 아버지와 성령과 하나이고 나뉘지 않은 신성한 본질을 영원히 존재하시고 동등하고 온전히 공유하신다.
(2)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이는 인간이 신성한 아들을 본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들과 관련하여, 그는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의미에서 ‘모습’인 반면, 인간은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모습’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사람의 동일성은 주장될 수도 없고 주장되어서도 안 되며, 오직 ‘비슷함’만 주장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3) 즉, 유한한 수준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체적 관점에서 하는 것처럼 ‘모습’을 단지 이런저런 속성과 동일시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은 온전한 개체로서 존재론적으로 “하느님의 모습과 비슷하며”, 본질적인 존엄성과 가치를 지닌 존재이다.
h) 요컨대, ‘모습’과 ‘비슷함’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독특성과 존엄성, 그리고 하느님의 종 혹은 하인(servant)으로서의 사제-임금으로 온 창조물에서 우리가 수행하는 대표적인 역할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이 용어들은 인간 전체를 지칭하는 전체론적 용어로서, 순종하는 아들됨으로 묘사될 수 있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수직적 관계와 종으로서의 임금됨으로 이해되는 인간과 세상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나타낸다.
4) 창세 1:26-27의 ‘모습’과 ‘비슷함’에 대한 종합적 검토
a) ‘모습’과 ‘비슷함’은 다른 것인가?
(1) 초대교회 이래 ‘모습’은 인간 안의 이성과 같은 자연적인 특성을 가리키고, ‘비슷함’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초자연적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 이후로 ‘비슷함’은 상실되었으나, ‘모습’은 여전히 남아서 인간의 주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이레네오(Irenaeus), 아우구스티노(Augustine), 아퀴나스(Aquinas) 등의 교부들은 물론, 그 뒤의 종교개혁자들과 그 이후의 여러 신학자들도 서로 다른 주장을 하여 혼란스러운 면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볼 때 ‘모습’과 ‘비슷함’이라는 두 단어가 각기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두 단어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보는 측면에서 이루어져 왔다. 특히, 언어학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이런 경향을 띤다.
(2) 중세기까지의 가톨릭에서도 ‘모습’과 ‘비슷함’을 구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적인 관점에서의 연구가 진행될수록, 두 단어 사이에 큰 차이가 없거나, 혹은 차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 차이는 크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 특히, 근래에 와서는 두 단어 사이에 거의 구분이 없고, 두 단어가 상호 교환가능하다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b) 두 단어의 상호 교환가능성의 근거
(1) 전치사의 교호 사용: 히브리어 원문 ‘모습으로’의 전치사 ‘Be’(according to)와 ‘비슷하게’의 전치사 ‘Ke’(in)에 근거하여, 두 단어를 구별된 것으로 보아, ‘모습’과 ‘비슷함’을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치사 ‘Ke’(in)와 ‘Be’(according to)는 두 단어 사이에서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창세 5:3에서 사용된 전치사 ‘Be’(according to)가 창세 1:26에서는 전치사 ‘Ke’(in)으로 바뀌어 사용된 것이 그 예의 하나이다.
(2) 히브리어 원문 번역의 문제: 히브리어 본문에는 두 표현 사이에 접속사가 없이 기술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모습으로’는 ‘우리와 비슷하게’를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일 뿐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image’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갖추었음을 강조하고, ‘likeness’는 중요한 측면에서 인간이 원본(하느님)과 ‘비슷함’을 강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칠십인역과 불가타역 모두 히브리어 원문을 번역하면서, ‘모습’과 ‘비슷함’이라는 두 표현 사이에 ‘and’를 삽입하여, 마치 ‘모습’과 ‘비슷함’이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3) 한 단어의 사용
(a) 창세 1:27; 9:6; 콜로 3:10에서는 ‘모습’만 사용
(b) 창세 5:1에서는 ‘비슷함’만 사용
(c) 야고 3:9에서는 ‘비슷함’을 ‘모습’의 의미로 사용
(4) 순서가 바뀐 두 단어의 사용: 영어성경에서는 창세 5:3이 ‘비슷함’과 ‘모습’의 순서로 기술되어 있다.(그러나, 한글성경에서는 창세 5:3이 창세 1:26과 같이 ‘모습’과 ‘비슷함’의 순서로 기술되어 있다)
d. 인간이 드러내고 있는 하느님의 성품
1)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 본성의 일부를 드러낸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느님의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간의 하느님 모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하느님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커다란 어려움과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성경은 인간론의 핵심에 하느님의 ‘모습’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파악하고 확인해야 한다.
2) 지금까지의 이루어진 다른 연구들의 요약 및 이 글의 제언
a) 하느님의 ‘모습’에 대한 성경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는 앞에서 언급했던 실체적, 기능적, 관계적 관점들을 통합한 관점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사람이 영혼과 지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진리와 사랑과 의와 같은 속성을 갖춘 존재라는 말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과 함께 하느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기능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b) 주요 측면: 하느님의 ‘모습’의 의미에 대해서는 크게 나누어 살펴보아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견해, 루터파의 견해, 신정통주의 교회의 견해, 일부 개혁주의 및 복음주의의 견해 등 논자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주장하여 혼란스럽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 중 주요한 측면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1) 영(spirit)
(a) 영이란 ‘초자연적인 존재 또는 본질’을 말한다. 나아가, 인간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활력이나 생명의 원리를 뜻하기도 한다.
(b) 본질이 사랑이시고 “영”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셔서, 인간은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참조)
(c) 이처럼,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이라는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2) 혼(soul)
(a) 지성
①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지성을 통해 영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② 또한 세상 속 인간 존재의 진정한 본질을 숙고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이기적인 동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지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③ 인간은 지성을 통해 놀라운 기술 발전을 창조하고 발명해 왔다. 우주 로켓, 비행기, 컴퓨터, 휴대폰, 정교한 차량, 로봇, 드론 등은 모두 인간 지성의 산물이다.
(b) 자유 의지
①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 의지를 통해 자유롭게 선택하고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본받을 수 있다.
② 인간의 선택은 성격 등을 형성하고, 심지어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간은 이 자유를 사용하여 하느님을 경배하거나 저주할 수 있으며, 은혜로운 삶을 살거나 끔찍스러운 불의한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원수를 용서할 수도 있고 저주할 수도 있다. 한편, 하느님은 인간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고 인간을 초대하시지만,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c)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셨다. 즉, 인간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을 갈망하며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도록 만들어졌다. 즉, 인간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의 관계를 반영하여 서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② 나아가,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동등한 존재인 하와를 창조하시어, 그들이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셨다.
e. 결론
1) 인간은 세상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느님의 ‘모습’과 ‘비슷함’으로 창조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히 하느님의 임재를 닮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2) 인간은 하느님과 서로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a) 인간의 지성과 자유 의지는 하느님의 선물인 진리를 받을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그분의 사랑, 진리, 그리고 선하심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으신다.
b) 하느님은 우리가 받은 것을 주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사회적 속성과, 사랑에 대한 욕구를 갖도록 창조하셨다. 즉, 인간은 예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것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의미에서 ‘모습’인 반면, 인간은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모습’이다. 즉, 인간은 성자의 ‘모습’을 본받은 유한한 피조물로 창조되었고, 유한한 수준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다.
4)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확립하고, 생명의 신성함을 확립하며, 인간 구원의 필요성을 확립하고, 인간을 모든 자연 위에 올려놓는 것이 된다.
5) 기쁜 소식은 하느님께서 개인을 구원하실 때, 하느님의 본래 형상을 회복하기 시작하셔서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페 4:24)을 창조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을 하느님과 분리하는 죄로부터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의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에페 2:8-9 참조)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다.”(2코린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