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 사제였던 비오 신부님은 50년동안 손과 발, 옆구리에 오상(예수님의 못박히신 다섯 상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1968년 9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81년동안의 그의 생애동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치유의 기적들이 나타났으며, 그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했습니다.
비오신부님에 대한 반응은 항상 두 가지로 극명하게 나뉘었습니다. '사기꾼' 혹은 '세기의 성자'그 중간지대는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뚜렷한 오상과 불치병의 치유, 정확한 예언, 그 모든 표적과 삶의 열매에도 불구하고 '사기꾼'이라는 오명은 비오신부님이 돌아가신지 4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그분을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비오신부님 생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여러가지 제재가 가해졌습니다. 처음에는 그분이 대중앞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비롯한 사람들과의 모든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나중에 대중 앞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은 허락되었지만, 조건은 미사시간을 30분으로 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기도에 몰입하시기 때문에 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시간이 얼마나 가는지 난 몰라요. 시간을 의식하지 못합니다."하고 그분은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1923년과 24년에는 신부님에게 수도원을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이탈리아의 다른 지방이나, 스페인으로 심지어 뉴욕으로 이동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핍박은 계속되어 비오 신부님에게 온갖 법규와 규칙을 내놓아서 미사 스케쥴을 바꾸라고 할 정도 였습니다. 그분의 미사가 하루는 5시에있고 다음날은 다섯시 반, 그 다음날은 6시 이런식이었습니다. 또 비오신부님은 고해소에서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거나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안되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이러한 압박과 엄격한 명령하에 있으면서도 모든 일을 하라는대로 마음편하게 따르셨습니다. 한번도 불평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황청의 의뢰하에 많은 의사들이 비오신부님을 검진하였습니다. 그것은 '오상' 자체가 사기일 것이라는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검진했던 모든 의사들이 오상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진짜 상처라는데 동의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상이 히스테리에 의한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억지의견을 내놓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비오 신부님 사후에도 비오신부님의 시성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추기경 20명과 주교 200명, 수십만명의 평신도가 비오신부를 성인으로 선언해주기를 청원하였으며, 속칭 '악마의 변호사'라고 불리는 교황청의 검열관들이 비오 신부님의 글 3,300 페이지를 검열하였습니다. 또한 추기경 1명과 주교 20명, 그외 증인 93명이 비오 신부님의 시성을 위한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9년 11월 9일에 시작된 비오신부님의 시성은 2002년 6월 16일이 되어서야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비오신부님은 많은 논란에 휩싸여 있었고, 아직까지도 논란의대상입니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비오신부님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비오신부님 사후 전세계에 20만명의 회원들이 '비오신부기도모임'의 영성운동에 가입되어 있으며, 고통의 구제를 위한 집이라는 병원등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업등은 비오신부님의 영적 열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항상 예수님만을 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영혼들을 사랑한 비오신부님은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큰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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