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

천당

 

나눔지기~♡의 글

2012-04-09 22:22:42 조회(161)

  이 게시글이 좋아요 싫어요

 

천당

 

[1] 천당

* 우선, 천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당이라는 말은 두 가지를 나타낸다. 즉 천당은 현재 세상과 다른 상태를 뜻하고 하느님이 계시는 곳에 우리가 있게 될 것이라는 인간의 희망을 표현하는 말이다.

물론 천당은 공간이나 장소가 아니지만 공간 개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구원의 대상은 인간인데인간은 부활한 몸으로 새로워진 우주 속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복락을 누릴 인간은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천당이란 말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 천당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전인적인 구원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구원받을 때 영혼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당은 결코 영혼만이 행복을 누리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말 번역 장례 예식서에는 영혼이라는 단어가 수십 번나오지만 , 라틴어 원문의 장례 예식서에는 영혼(anima)이라는 단어가 한번도 사용되지 않는다.로마 장례 예식서는 영혼과 육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때문에 육체와 분리된 영혼만이 천당에간다는 통념을 애써 피하려 한 것 같다.

 

* 특별히 천당이라는 말은 인간의 희망을 잘 드러낸다.

죽은 다음에 하느님과 영원히 떨어져서 사는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하느님을 안 믿겠다고 버티는 사람도 지옥보다는 천당에 가고 싶어한다. 결국 천당은 인간이 가야할 최후 목적지로 생각되는 셈이다.

 

* 신학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천당은 없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덕분에 우리가 천당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없다면 천당도 없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천당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구약성서에는 후세에 대한 계시가 결여되어 있다. 구약성서는 후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고 현세의 삶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려는 열망, 하느님과 화해하려는 염원, 하느님의 나라를 애타게 기다리던 마음, 하느님의 영광을 받들어 모시려는 노력 등이 종종 나타난다. 이런 것들은 결국 신약성서에 와서 후세의 삶에 대한 희망으로 연결되었다.

신약성서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을 곧 영생이라고 한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신약성서는 '하느님을 안다' 혹은 '하느님을 뵙는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고린토 전서 13장 12절의 말씀처럼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옵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처럼 신약성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워진 관계를 하느님을 직접 뵈옵는 지복직관으로 생각한다. 또한 영생을 묘사하기 위해서 혼인과 식사라는 표상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영생이란 함께 기쁨을 누리는 인격적인 행복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2] 천당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천당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천당의 성인들은 하느님께 대한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인식을 갖는다. 천당에 있는 사람들은 매개체 없이 하느님을 계신 그대로 선명하고 명백하게 뵙는다. 이것을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고 부른다.

우선, 천당의 의인들은 부활하신 성자의 인간성을 뵙게 되고,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일치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게 된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고 사람이라는 사실의 파악은 지복직관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이다. 왜냐하면 성자의 인성은 일시적으로 취한 가면이 아니라 성자께서 존재하시는 새로운 양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당에 가게 되면, 인간이 되신 성자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신비를 알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본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복직관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본성 전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다 보여 주시지만 피조물의 제한성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2) 의인들은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의인의 행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을 직접 뵈옵는 것 그 자체를 말한다. 이러한 지복직관은 없어지거나 감소되지 않고 영원히 간다. 그러나 이러한 영복(永福)은 각 사람의 공로에 따라 차등이 있다.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마태 16,27) 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고,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방이 많다." (요한 14,2)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역시 영복의 차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복의 불공평성은 우리가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영복이 우리에게 그냥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교리이다. 저 사람이 이만큼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똑같은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은총의 무상성(無償性)을 모르는 유치한 생각이다. 성모 마리아가 받은 은총과 똑같은 은총을 달라고 주장할 권리가 우리에게 과연 있겠는가?

 

3) 지복직관은 죽는 순간에 즉시 시작된다. (베네딕도 12세 교황)

그렇지만 소죄 없이 죽는 의인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결국 직천당(直天堂)하는 사람은 순교자들뿐이라고 초대교회때부터 생각해 왔다. 순교자들은 죽는 순간부터 즉시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또한 죄가 없고 죄에 해당하는 벌이 없이 죽는 의인들도 죽는 순간에 지복직관을 누린다.

그런데 교회의 가르침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교회의 공식 문헌에는 사심판(私審判)이라는 용어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 사심판을 받고 영원한 상태가 결정된다고 하는데, 이 사심판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간이 심판을 받지 않고 사후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인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 밖에 없는 심판 즉 공심판(公審判)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심판은 공심판 하나뿐이다. 그러니까 이 유일한 공심판에 각자가 참여하는 과정이 사심판인 셈이다.

카카오톡에서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에서 공유하기 페이스북에서 공유하기 네이버 밴드에서 공유하기 트위터에서 공유하기 Blogger에서 공유하기

댓글 쓰기

 
로그인 하셔야 댓글쓰기가 가능합니다. 여기를 눌러 로그인하세요.
 

이전 글 글쓰기  목록보기 다음 글

 
PC버전 홈 |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마리아사랑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