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묵상 : 우상숭배에 대해서 ...

우상숭배에 대해서 ...

 

아메림노스 클라라의 글

2021-07-09 23:58:42 조회(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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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숭배에 대해서



송봉모 토마스 모어 신부님 /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두 사도는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합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14,14-15)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처음에는 리스트라 주민들이 무슨 연유로 황소와 꽃들을 자기들 앞에 갖고 왔는지 몰랐다. 그들이 자기 방언으로 서로 얘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늦게 상황을 깨달으면서, 곧 그들이 자기들을 신으로 경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옷을 찢으며 만류하였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사람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옷을 찢는다는 것은 신성모독에 대한 강력한 반대 표시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사람입니다." 라고 말한 다음 즉시 복음을 전한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곧 우상숭배를 버리고 창조주이신 참된 하느님을 경배하도곡 복음을 전한다.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해 주셨으니,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와 열매를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사도 14,16-17)



이 복음 선포는 순전히 이방인들을 향해 주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앞서 주어진 복음 선포들은 하나같이 유다교 회당에서 이루어졌다. 유일신 하느님을 믿고 있고 성경을 읽는 이들, 곧 유다인들과 하느님 경외자들을 위해서 복음이 선포되었기에, 바오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언서와 율법을 이용해서 복음을 선포했다. 그 예로 바오로가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의 유다교 회당에서 했던 복음 선포를 다시금 보자.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그들을 탈출시켰고, 약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배회하게 한 다음 가나안 땅을 그들의 상속 재산으로 주셨는데 ··· 그 뒤에 사무엘 예언자 때까지 판관들을 세워 주시고 ···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최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사도 13,17-39)



한편 리스트라 사람들은 다신교를 믿고 있고, 율법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이다. 바오로를 신으로 간주해 황소를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이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바오로는 이스라엘의 역사나 성경이 그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익숙한 자연 세계를 이용해 복음을 전한다. 곧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을 선포한다. 우리는 바오로가 선교 여정 중 복음을 전하는 접근법에서 참으로 유연했음을 본다. 복음을 듣는 이들이 율법을 알고 있는 유다인이냐 또는 율법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이냐에 따라 다른 접근법을 사용했음을 보게 된다.



바오로가 리스트라 사람들에게 선포한 하느님은 창조주 하느님이시다. 우리 인간이 만나는 하느님은 크게 얘기해서 구속주 하느님과 창조주 하느님이다. 구속주 하느님은 우리가 죄스런 삶 소망 없는 삶을 살다가 하느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용서와 자비 그리고 받아들여짐을 체험할 때 만나는 하느님이시다. 한편 창조주 하느님은 자연 세계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이시다. 예로서 우리가 설악산의 절경(絶景)에 취해서 감동할 때, 우리는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어떤 하느님을 만나든지, 구속주 하느님을 만나든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수령하게 된다.



하느님의 피조물들 중에서

보기에, 즐겁고 마음을 끄는 것이 있거든

그것에만 관심을 쏟지 말고

그것을 넘어 하느님께로 생각을 옮겨 이렇게 외쳐라.

"오, 나의 하느님,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에는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합니다.

이 모든 것을 지으신 당신은 무한한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기쁨으로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성산의 니코데모)



대지는 그대의 맨발을 느끼기를 좋아하고

바람은 그대의 머리칼을 만지며 놀고 싶어함을

잊지마세요.

칼릴 지브란, <예언자>



이 설교는 매우 간략하지만 후에 서술되는 17장의 아레오파고 연설의 전조가 된다. 1) "왜 이런 짓을 합니까?" 하는 외침은 답을 얻기 위한 물음이라기보다 군중들에게 멈출 것을 요구하는 말이다. 2) 사도들은 이 외침 뒤에 '우리들도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이다.'라며 자신들 역시 같은 성정, 본성을 가진 사람이고 신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3) 루카는 여기서 '우리도'라는 말로 강조된 같은 성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사도들과 리스트라인들 사이에 형성된 거리감을 없애고 있다.4)



1) 17장 아레파고 연설에서 청중은 지금의 리스트라 청중보다 덜 순박한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17장에서는 비슷한 내용의 연설이 좀 더 지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14 ,17장 연설 모두 공통적으로 창조물, 자연적 신학, 이교인들의 무지에 대한 하느님의 인내 등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Ben Witheringtom, 앞의 책, 425.

2) E. 헨헨, 앞의 책 65.

3) 이는 사도행전 10,26에서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에게 한 말과 유사하다. Ben Witheringtom, 앞의 책, 426

4) 유상현, 앞의 책, 164.



15절 하반부에서부터 본격적인 설교가 시작된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지금까지 해왔던 복음 선포는 하느님을 믿는 유다인들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방인, 유다인이 아니더라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그들에게 헛된 것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권고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순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상황이므로 이방인들이 우상으로부터 살아계신 창조주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 되었다. 5)



5) 유상섭, 앞의 책, 479.



순수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리스트라의 군중들을 향한 복음 선포는 유다인들에게 한 설교와 분명 다른 전달방법이 필요했다.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한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13,16-41) 그러나 리스트라의 이방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우선되어야 했다.



바오로는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하여 하느님의 존재를 모르는 이방인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자연에 초점을 맞추어 '창조주이신 살아계신 하느님'을 이야기하였다. 6)



6) 이는 신약에서 사도행전 4,24, 구약성경에서는 탈출기 20,11; 느헤미야 9,6; 이사야 37,16; 시편 145,6에서의 진술과 유사하다. Luke T. Johnson, 앞의 책, 249.



이 '살아있는 신' 개념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신'으로 추앙받을 뻔한 일로 보았을 때 리스트라 주민들에게 생소한 개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하는 하느님은 그러한 다신적 전통 속의 신이 아닌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다. '살아계신 하느님'만으로는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의 개념에 전환을 가져올 수 없으므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창조주 하느님'이라는 하느님의 속성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7)



7) 유상현, 앞의 책, 166.



16-17절은 살아계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16절에서 '지난날에는 다른 민족들이 제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과 17절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에 대한 증거를 드러내 보이셨다.'는 것이다. '지난날'은 예수 이전의 시대, 즉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 전을 의미한다. 여기서 '길'은 관습, 생활 방식, 윤리적 행위의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8)



8) Luke T. Johnson, 앞의 책, 249.



'제 길을 가다.'는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사도들의 표현은 과거에 이교도들이 한 행위에 대한 잘못을 묻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바로 전 12-13절에서 리스트라인들이 사도들을 신으로 여기고 제사를 지내려고 한 행위에 대해서도 탓하지 않는다는 호의의 표현으로도 볼 수도 있다. 9)



9) 유상현, 앞의 책, 167.



하느님께서 지난날에 민족들을 제 갈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셨으나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적이 결코 없었다. 하늘에서 비를 내리고 절기를 내려주어 양식을 마련해주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와 함께 계신다는 하느님 현존의 증거이다. 10)



10) 이러한 증거의 내용은 사도행전 17,27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Ben Witheringtom, 앞의 책, 427.



15-17절은 연설에 관련된 배경이나 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 서둘러 바오로의 말을 마무리 짓고 있다. 11) 바오로의 설교는 군중들이 제물을 바치는 것을 못하도록 겨우 막았다. 이는 앉은뱅이가 걷게 된 기적의 인상이 매우 강했으며 리스트라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려는 의지 또한 강했음을 전해준다. 이 단락의 다듬어지지 않고 서두른 듯한 마무리를 보충하기 위하여 초기 사본들 일부는 "각기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라는 말을 삽입하기도 하였다. 12)



11) 15-17절이 매우 간결하기 때문에 폴힐이 이 연설이 메시지가 짧게 잘렸다고 주장한다. 한편 예르벨은 15-17절이 설교가 아니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을 멈추게 한 논쟁적인 반응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Bock Darrel, 앞의 책, 478.

12) E. 헨헨, 앞의 책 67.



우상숭배에 대해서



우상숭배가 단순히 신에 대한 형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 절하는 것으로 끝나는가? 상상해보자. 이웃 사람이 자기 집 뜰에다 서낭당을 만들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그 앞에서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틀림없이 그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보거나 또라이로 볼 것이다. 현대 최첨단 과학 문명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더 이상 우리 조상들처럼 서낭당에서 나무나 돌로 만든 신 앞에 절하지 않는다. 13) 대신에 새로운 신상 주변을 빙빙 돌려 춤을 추고 있다. 14) 그중 하나가 물질만능주의다. 다시 말하면 재물에 대한 집착이다. 재물만큼 우리 마음을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떼어놓는 것도 없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재물에 대한 특별한 경고를 했을까?



13) 이동원,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317.

14) 그륜델, 앞의 책 39.



"어느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사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편을 받들고 다른 편을 업신여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마몬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루카 16,13)



재물 말고도 현대인들에게 하느님을 대신하는 우상들은 많다. 쾌락과 섹스, 권력과 지위, 섹시한 몸과 아름다운 얼굴을 절대적인 가치처럼 섬기고 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은 하나의 우상숭배이다. 만일 우리가 대통령이나 기업의 회장을 섬기는 마음의 반半만큼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면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무척 깊어질 것이다.



특별히 이 나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몸짱 얼짱의 우상이다. 스포츠 잡지에서는 반라半裸의 젊은 여자들을 여신이라 부르고 있다. 여성 속옷 판매 업체인 Victorias Secret에서도 모델들을 여신이라 부르고 있다. 가장 섹시한 인물들에게 신과 같은 지위를 부여하고는 그들의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관심을 갖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섹시한 인물의 신체 치수를 외우고 다닌다. 섹시함은 더 이상 외적인 매력이 아니라 신적인 대접을 받고 있다.



1961년 흐루시초프는 "지금 나의 경고는 진심입니다. 동무들이여, 공산주의는 신성합니다."란 말과 함께 공산주의를 신의 자리에다 놓았다. 그 후 10년 뒤 그의 후계자인 브레즈네프는 "레닌의 생애와 활동, 그 이름과 관련된 모든 것은 신성하다."고 강조했고, 그로 인해 수천 개의 레닌 동상이 공공장소에 세워졌고, 레닌의 시신은 붉은 광장에 전시되었다. 다음은 1950년에 발행된 잡지 <프라우다>에 실린 글이다.



"일하다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거나 불현듯 자신이 너무 무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 그분(스탈린)을 생각하라. 어려움을 헤쳐 나갈 자신감을 얻게 될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피로감이 몰려올 때는 그분(스탈린)을 생각하라. 금방 멀쩡해질 것이다. 어떻게든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싶다면 그분(스탈린)을 생각하라. 바른 길을 찾게 될 것이다." 15)



15) 다음 책에서 재인용 됨. 필립 얀시, 기도 (서울 : 성림출판), 15.



바오로는 리스트라에서 극과 극을 달리는 대접을 받는다. 앉은뱅이를 고쳐주고 나서는 신과 같은 극진한 대접을 받더니, 얼마 안 되어 초죽음이 될 정도로 돌에 맞는다. ●



* 출처 : 예수회 후원회, 이냐시오의 벗들 2121.7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요즘 TV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용어가 바로 '신神'이라는 단어입니다. 노래를 잘하면 갓이라 칭하고, 요리를 잘한다고 갓이라고 칭하고 아무튼 보통 사람보다 조금 뭔가를 잘하면 그 사람 이름 앞에 갓이나 이름 뒤에 神이라는 단어를 붙여 부르고 있다는 점이 저도 좀 마음이 불편했었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뭔가 조금만 잘하면 신으로 추앙받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 무섭기도 합니다. ㅠㅠ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하시니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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