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미사 강론 :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사목 방문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산타코스 공원 미사 강론[2018년 9월 23일 주일(연중 제25주일)]

 

[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사목 방문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산타코스 공원 미사 강론[2018년 9월 23일 주일(연중 제25주일)]

 

Fran.의 글

2018-10-02 12:42:34 조회(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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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s://www.vaticannews.va/en.html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8.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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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 2018년 9월 23일 주일[연중 제25주일]

[강론 당일 독서와 복음 말씀] 제1독서 : 지혜서 2,12.17-20

화답송 : 시편 54(53),3-4.5.6과 8(◎ 6ㄴ)

 제2독서 : 야고보서 3,16─4,3

 복음 : 마르코 복음 9,30-37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8871&gomonth=2018-09-23&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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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사목 방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2018년 9월 22-25일]

 

장엄미사

 

교황 성하의 강론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산타코스 공원

2018년 9월 23일 주일

 

 

성 마르코는 그의 복음 말씀의 전체 부분을 주님의 제자들의 가르침에 바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여정의 중간 지점에서 제자들이 그분을 따르는 일에는 시련과 슬픔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분을 따르겠다는 그들의 선택을 새롭게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세 번 알리셨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예수님 인생의 이 시기를 묘사합니다. 이 세 번 모두 제자들은 당황스러움과 반대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 번의 각각의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르침을 남겨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는 방금 이 세가지 상황 중에서 두 번째 상황에 대해 들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9,30-37 참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십자가의 체험을 수반합니다. 때로는 그것은 끝없이 지루하게 계속되는 것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초기의 세대들은 아직도 점령기의 상처들을 견디고 있고 추방당한 사람들에 대한 고뇌를 견디고 있고 결코 다시 되돌아오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불확실성을 견디고 있고 밀고자와 배반자들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치욕을 견디고 있습니다. 지혜서는 우리에게 박해 받는 의인들에 대해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의인들은 오로지 그들의 선행 때문에 모욕과 벌로 고통을 받습니다(지혜서 2,10-12 참고). 여러분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직접 또는 어떤 가족들의 역사 안에서 우리가 방금 읽은 저 구절에 동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의 편을 들어주시는 것 같지 않았다고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린다고 느껴 왔습니까? 카우나스는 이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다른 것들 가운데에서 시베리아나 빌뉴스와 카우나스의 빈민가에 대한 언급에 대해 아직도 몸서리치면서 리투아니아 전체가 그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 야고보 서간의 구절에서 야고보 사도가 말한 심판의 말을 반복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욕심을 불리고, 그들은 살인까지 하며, 그들은 다투고 싸웁니다.(야고보 서간 4,2 참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슬픔과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역경에 관한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성 마르코는 제자들이 다른 것들에 관심이 있었고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권력과 영광에 대한 갈망은 과거의 기억들을 치유하지 못한 사람들,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재의 임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표징입니다. 그들은 차라리 누가 더 큰 사람인지 논쟁하고 싶어할 것이고 누가 과거에 더 진정성 있게 행동했었는지 그리고 누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특권을 갖고 있는지 논쟁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를 부인합니다. “그것은 희생과 희망과 일상적 투쟁의 역사이고 봉사에 헌신하고 부단한 노고도 마다하지 않은 삶의 역사이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96)”. 그것은 우리의 믿는 이들과의 접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현실을 구축하는 것에 관여하기를 거부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헛된 자세입니다. 우리는 멀리서 판단만 하고 끊임없이 “되어져야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저 영적 ‘지도자들”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96 참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무엇에 관해 논쟁하고 있었는지 알면서 권력을 향한 그들의 싸움과 희생을 향한 그들의 거부에 대한 해독제를 그들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더 엄중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셨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푼돈을 버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오늘 여기에 이 주일 아침에 예수님께서 누구를 우리 가운데 세우시겠습니까? 누가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 가장 가난한 사람이겠습니까? 독립 후 100년 우리가 누구를 따뜻하게 맞이해야 합니까? 누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고 우리의 노력과 희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줄 사람입니까? 아마도 우리 도시의 소수 민족들일 것입니다. 또는 다른 나라로 이주해야 하는 실업자들일 것입니다. 어쩌면 노인들과 외로운 사람들 또는 자신의 뿌리를 잃어버려서 삶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는 청년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동시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박수 받기를 원하거나 뽑혀서 칭찬 받기를 원하면서 아무도 몰랐다고 주장할 수 없도록, 아무도 “내가 그를 못봤어”라거나 “나는 멀리 있으니까”라는 이유로 그건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논쟁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곳 빌뉴스의 도시에서 빌니아 강은 물을 가져다 주었고 네리스 강에 기원을 둔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여기 네리스 강 그 자체도 네만 강에 물을 끌어 오면서 그 이름을 잃어 버립니다. 이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전진하는 교회가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약한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 인생의 변방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면서 우리 자신을 쏟아 부어야 할 것 같은 때조차도, 우리 자신을 잃어야 할 것 같은 때조차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개입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또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때때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우리의 근심과 걱정들을 한 옆에 놓아 두는 것을, 그리고 알아차리는 것을, 듣는 것을, 그리고 길거리에 버려진 사람들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알고 있기도 합니다. 때때로 그것은 탕자의 아버지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오자 마자 문을 활짝 열기 위해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가에서 기다렸습니다(복음의 기쁨 46 참고). 평소에 제자들처럼 우리는 어린 아이를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예수님 당신을 맞이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 안에서 성체 안에서 그분의 작은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맞이하기를 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기억을 치유하실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에게 가슴 설레는 도전들과 이정표들을 우리에게 주는 이 현실에서 우리와 동행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그분을 그분의 제자로서 따를 수 있도록 그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가슴 안에 있는 울림을 발견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것, 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우리 자신의 기쁨과 희망으로 느낍니다.( SECOND VATICAN ECUMENICAL COUNCIL, Gaudium et Spes, 1 참고) 이러한 이유로 그리고 공동체로서 우리는 모든 인류와 진정한 그리고 깊은 연대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 여기 이 도시에서 리투아니아를 통해서 –그리고 그 역사를 통해서 (SECOND VATICAN ECUMENICAL COUNCIL, Gaudium et Spes, 1 참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기쁜 봉사를 하며 살고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하나된 희망이라는 것을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를 바랍니다.

 

강론 영어 원문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8/documents/papa-francesco_20180923_omelia-lituania-kauna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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