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미사 강론 : 비오 성인의 선종 50주년 피에트렐치나 산 조반니 로톤도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사목 방문 미사 강론[2018년 3월 17일 토요일(사순 제4주간 토요일)]

[미사 강론] 비오 성인의 선종 50주년 피에트렐치나 산 조반니 로톤도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사목 방문 미사 강론[2018년 3월 17일 토요일(사순 제4주간 토요일)]

 

Fran.의 글

2018-08-13 10:19:17 조회(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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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s://www.vaticannews.va/en.html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8.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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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 2018년 3월 17일 토요일[사순 제4주간 토요일]

[강론 당일 독서와 복음 말씀] 제1독서 : 아모스 예언서 8,4-6.9-12

화답송 : 시편 119(118),2.10.20.30.40.131(◎ 마태 4,4ㄷ)

 복음 : 마태오 복음 9,9-13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8790&gomonth=2018-07-06&missatype=DA

  교황님께서 집전하신 미사의 말씀 전례의 독서와 복음 말씀이 한국 교회의 말씀 전례와 다릅니다.

  강론 당일의 말씀 전례 말씀은 강론 번역문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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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선종 50주년

피에트렐치나 산 조반니 로톤도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사목 방문

 

감사 미사 공동집전

 

교황 성하의 강론

 

피에트렐치나(산 조반니 로톤도)의 성 비오” 교회 광장

2018년 3월 17일 토요일

 

우리가 들은 성서의 독서 말씀에서 나는 세 가지 단어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기도, 작음, 지혜.

 

기도. 오늘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그분의 마음에서 이 말씀이 흘러 나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오 복음 11,25). 예수님께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선택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자주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마르코 복음 1,35 참고) 하느님 아버지와의 대화가 가장 먼저였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기도의 중요성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느 날 제자들이 그분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복음 11,1)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함께 그분께서 시작하셨던 곳, 바로 기도로부터 시작합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충분히 기도합니까? 자주 기도의 시간에 많은 구실들이 생각합니다, 많은 시급히 할 일들이… 때로는 그래서 결론도 나지 않는 행동주의에 사로 잡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제쳐둡니다. 우리가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복음 10,42)라는 것을 잊을 때, 그분이 없이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잊을 때 (요한 복음 15,5 참고) 그래서 이렇게 기도를 포기합니다. 하늘나라로 가신지 50년이 지난 비오 성인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왜냐하면 비오 성인은 우리에게 기도의 유산을 남겨 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권고합니다. “많이 기도하십시오, 나의 자녀들이여, 결코 지치지 말고 항상 기도하십시오.” (1966년 5월 5일, 기도 모임의 제 2차 국제 대회에서 한 말)

 

복음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분께서 하신 모든 기도의 처음은 “아버지 당신을 찬미합니다”입니다. 그분께서는 “나는 이것과 저것이 필요해요”라고 기도하면서 시작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찬미에 자기 자신을 열지 않고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릅니다. 오로지 그분께 시간을 드리고 흠숭을 드리지 않고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흠숭의 기도, 찬미의 기도를 잊어 버립니까! 우리는 이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각자 자기 자신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경배하는가? 나는 언제 경배하는가? 나는 언제 하느님을 찬미하는가? 흠숭과 찬미의 기도를 회복하십시오. 그것은 인격적인 접촉이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는 것이고 주님 앞에서 침묵 속에서 머무르면서 그분과의 친교 안으로 더욱 더 들어가는 비밀입니다. 기도가 청원으로 심지어 성급한 청원으로 시작될지 모르지만 기도는 흠숭과 찬미 안에서 익어갑니다. 성숙한 기도. 예수님에게, 성부 하느님 아버지와 자유롭게 대화하시는 예수님에게 그렇게 기도는 진정으로 인격적인 것이 됩니다. 예수님에게 그렇게 기도는 진정으로 인격적인 것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오 복음 11, 26) 그리고 나서 자유롭고 진실한 대화 안에서 기도는 삶의 짐을 지고 하느님 앞에 그것을 내려 놓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 닮았는가, 아니면 우리의 기도는 임시적인 긴급 콜인가? “나는 이것이 필요해요” 그렇게 나는 지체 없이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이 필요 없어질 때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 아니면 우리는 기도를 정량으로 먹는 스트레스에서 약간의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신경안정제로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기도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느님과 머무르는 행위이고 이 세상의 삶을 그분 앞에 놓는 행위입니다. 기도는 꼭 필요한 영적인 자비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 상황들을 주님께 맡기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습니까? 누가 대신 기도를 하겠습니까? 누가 삼가 하느님의 마음을 두드려서 어려움에 처한 인류에게 자비의 문을 여시도록 할 것입니까? 이 때문에 비오 신부님은 우리에게 기도 모임을 남겨 주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기도, 모든 선한 영혼들의 일치된 힘, 그것은 세상을 바꾸고 양심을 다시 새롭게 합니다. 아픈 사람들을 고치고 일을 신성하게 하고 의료를 증진시키고 윤리적인 힘을 주는 것이… 하느님의 미소와 축복을 모든 무기력함과 약함에 확산시키는 것(ibid)이 기도입니다. 이 말들을 보호합시다. 우리 자신에게 다시 물읍시다. 나는 기도하는가? 그리고 내가 기도할 때 나는 기도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경배하는지 경배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나는 내 생명을,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하느님께 가져가는 방법을 나는 알고 있는가?

 

두 번째 말은 작음.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기에 하느님을 찬미하십니다. 누가 이 철부지들입니까, 누가 하느님의 비밀을 환영하며 받아들일 줄 압니까? 철부지들은 위대한 분이 필요한 사람들이고 오만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자기 자신만을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철부지들은 겸손하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고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며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길 줄 알고 자신이 함께 가도록 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철부지들의 마음은 안테나와 같습니다. 다시 말해 그 마음은 하느님의 신호를 즉시 받아 들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즉시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모든 이들과와 접촉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엄청난 방해물을 만듭니다. 그리고 자기자신으로 가득 차 있을 때 하느님의 지향이 닿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철부지들을 더 좋아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낮춤으로써입니다. 마음 속으로 더 작아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는 작음의 신비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멸하셨습니다. 우리가 매번 미사에서 성체 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의 신비는 작음의 신비, 겸손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작아짐으로써만 그리고 철부지들에 동참함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계시는 곳에서 하느님을 찾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여기에 그분께서 현존하시는 특별한 성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 뽑힌 많은 철부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오 성인은 그것을 “기도와 과학의 성전”이라고 불렀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의 예비”가 되도록 부름 받습니다.(1957년 5월 5일, 취임 1주년 기념을 위한 연설). 즉, 그곳은 '고통을 더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병원 : 역자 주)입니다. 병든 이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자기 이웃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보살핌 안에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 있습니다. 철부지들을 돌보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편이고 버림의 문화를 쳐 이깁니다. 그 반대는 힘 있는 자들을 더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쓸모 없다고 여깁니다. 철부지들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든 시대 심지어 오늘날의 어둠의 예언자들에 반하여 생명의 예언을 선포합니다. 사람들을 버리고 아이들과 노인들을 버리는 사람들을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버리는 사람들에 반하여 생명의 예언을 선포합니다. 어렸을 때 스파르타인들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를 가르쳤습니다. 나는 언제나 선생님이 우리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형아가 태어나면 그들은 남자 아기 또는 여자 아기를 산 꼭대기에 데리고 가서 던져 버립니다. 이 보잘것없는 이들이 살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잔인해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더한 잔인함으로 더한 과학으로 같은 일을 합니다. 필요치 않은 것, 생산적이지 않은 것은 버려져야 합니다. 이것이 버림의 문화입니다. 보잘것없는 이들은 오늘날 원하여 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이 버려지는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어.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혜로운 이는 제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예레미아서 9,22). 진정한 지혜는 훌륭한 자질을 갖는 것에 있지 않으며 진정한 힘도 권능에 있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보이는 사람들은 지혜롭지 않으며 악을 악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강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지혜와 모든 것을 이기는 무기는 믿음에 영감을 얻은 자선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악의 군대를 무장해제시키기 때문입니다. 비오 성인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악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겸손함으로, 순명으로, 십자가로, 사랑을 위한 고통을 봉헌하면서, 지혜롭게 악과 싸웠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비오 성인을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일을 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을 잘 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오 성인의 모범을 따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성인들의 페이지에 “좋아요”를 누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누가 성인들과 같이 행동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좋아요”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의 봉헌”입니다. 삶은 그것이 선물로서 바쳐질 때 향기가 납니다. 삶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유지될 때 맛을 잃습니다.

 

그리고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또한 생명의 지혜를 끌어 내는 곳에서부터 설명을 합니다. “자랑하려는 이는 이런 일을, 곧 나를 이해하고 알아 모시는 일을 자랑하여라.”(예레미아서 9,23) 그분을 안다는 것, 즉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서 그분을 만난다는 것. 즉 이것은 지혜의 길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마태오 복음 11,28)” 우리 중에 누가 그 초대에서 배제된다고 느낄 수 있습니까? 누가 “나는 그거 필요 없는데?”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비오 성인은 그의 삶을 내어 주었고 그의 형제 자매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내어 바쳤습니다. 비오 성인을 만나는 확실한 방법은 고해성사, 그 화해의 성사를 통해서였습니다. 그 곳에서 사랑 받고 용서 받으면서 지혜로운 삶이 시작되고 새롭게 출발합니다. 그곳에서 마음의 치유가 시작됩니다. 비오 신부님은 고해소의 사도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비오 성인은 우리를 그 곳으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 어디 가니? 예수님께로 가니 아니면 너의 슬픔 가니? 너 어디로 돌아가고 있니? 너를 구원하신 한 분이신 그분에게 가니 아니면 너의 낙담, 너의 후회, 너의 죄로 가니? 오너라, 오너라. 주님께서 너를 기다리고 계신다. 용기를 내렴. 그분의 자비에서 너를 배제할 만큼 중대한 이유는 전혀 없단다.”

 

기도 모임들, 고통을 더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의 아픈 사람들, 고해소. 이 눈에 보이는 세가지 표지들. 이것이 우리에게 세 가지 귀중한 유산을 기억하게 합니다. 기도, 작음 그리고 삶의 지혜. 매일 그것들을 가꾸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강론 영어 원문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8/documents/papa-francesco_20180317_omelia-sangiovannirotondo.html

교황님 방문 동영상 -> https://www.vaticannews.va/en/pope/news/2018-03/pope-francis-padre-pio-tomb-s-giovanni-rotondo-0.html#play

https://www.vaticannews.va/en/pope/news/2018-03/pope-francis-padre-pio-s-giovanni-rotondo-children-cancer-ward.html#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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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사랑합시다! (2018/08/14 14:4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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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와 찬미를 받으소서. (F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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