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성유축성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2015년 4월 2일 성주간 목요일]

[미사 강론&심쿵소리강론] 2015 성유축성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2015년 4월 2일 성주간 목요일]

 

Fran.의 글

2019-08-15 17:17:25 조회(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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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5_2015년_성유축성미사_프란치스코_교황_성하의_강론[20.mp3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9.index.html

https://www.vaticannews.va/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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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2015년 4월 2일 목요일[성주간 목요일 - 성유 축성 미사]

[독서와 복음 말씀] 제1독서 : 이사야서 61,1-3ㄹ.6ㄱㄴ.8ㄷ-9

                           화답송 : 시편 89(88),21-22.25와 27(◎ 2ㄱ 참조)

                            제2독서 : 요한 묵시록 1,5-8

                            복음 : 루카 복음 4,16-21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6479&gomonth=2015-04-02&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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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 축성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성 베드로 대성당

2015년 4월 2일 성목요일

“내 손이 그를 붙잡아 주고 내 팔도 그를 굳세게 하리니”(시편 89,22)[1]

이것이 주님께서 “나의 종 다윗을 찾아내어 그에게 나의 거룩한 기름을 부었노라”(시편 89, 21)[2]. 라고 말씀하실 때 뜻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제를 “만날” 때마다 하시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성실과 자애가 그와 함께 있어…… 그는 나를 불러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이십니다.’ 하리라”(시편 89, 25.27)[3]

시편의 작가 다윗과 함께 우리 하느님의 이 독백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들, 그분의 사제들, 그분의 사목자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독백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유일한 분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친구들,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나에게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요한 복음 14,21 참조)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우리를 도우시는 일에 대해 주님께서 그토록 염려하신다면 그것은 당신의 성실한 백성에게 기름 부어 주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 그것이 힘든 일이라는 것을 그분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고단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방식으로 이것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사도직에 의해 일어나는 평범한 피곤함에서 질병, 죽음, 심지어 순교의 지쳐버림.

사제들의 피곤함! 내가 얼마나 자주 여러분 모두가 경험하는 이 지쳐 버림에 대해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나는 자주 특히 나 자신이 지쳐 버릴 때 그것에 대해 기도합니다. 여러분, 외롭고 위험한 곳에 계신 많은 여러분의 보살핌에 맡겨진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서 여러분이 고생할 때 나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지치는 것은, 사랑하는 사제 여러분, 하느님 나라로 올라가는 분향 같습니다(시편 141,2. 요한묵시록 8,3-4 참조). 우리의 지침은 곧바로 성부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갑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이 피곤함에 대해 잘 알고 계시고 성모님께서 그 피곤함을 곧장 주님께 전하신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우리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언제 지쳐 있는지 알고 계시고 그리고 이것은 어머니의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오너라! 얘야, 쉬어라. 우리는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우리가 어머니께 가까이 다가갈 때는 언제나 마리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어머니인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 (복음의 기쁨 286 참조). 그리고 마리아께서 가나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당신의 아드님께 말씀하실 것입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요한 복음 2,3)

우리가 사목 업무로 짓눌린다고 느낄 때 언제나 우리는 마치 휴식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라는 듯이 어떤 방식이든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쉬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유혹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고단함은 우리를 안으시고 우리를 들어 올리시는 예수님의 눈에 소중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오 복음 11,28). 사제가 몹시 피곤하다고 느끼면서 아직 경배하고 절하면서 “주님 오늘로 충분합니다”라고 말하고 자기 자신을 성부께 맡길 때마다 그는 자신이 쓰러지지 않을 것이고 다시 새로워질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의 성실한 백성에게 기름 붓는 이는 또한 자기 자신이 주님께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습니다.”(이사야서 61,3 참조)

열매를 맺는 사제직의 열쇠는 우리가 어떻게 쉬는지에 있고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의 고단함을 다루시는 방법을 우리가 어떻게 보는지에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요! 이것이 우리의 신뢰와 우리도 양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목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에 관해서 몇 가지 질문들이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성실한 백성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감사와 애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쉬는 법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사목 업무가 일단 끝나면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휴식이 아니라 소비 사회가 제공하는 더 세련된 휴식을 찾는가? 성령께서는 진실로 나를 위한 “지친 때에 휴식”이신가 아니면 그분께서는 그저 나를 계속 바쁘게 하는 어떤 이인가? 나는 지혜로운 사제에게서 도움을 구할 줄 아는가?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나 자신에게 내가 하는 요구들로부터, 나의 자아 추구로부터 그리고 나의 자아 도취로부터 벗어나 휴식을 취할 줄 아는가? 나는 예수님과 성부 하느님 아버지와 동정 마리아님과 그리고 요셉 성인과 나의 수호 성인과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아는가? 그리고 그분들이 바라시는 것들-그것은 쉽고 가볍다- 안에서 그리고 그분들은 기꺼이 내 친구로 계시는 분들이니 그분들의 기쁨 안에서 그분들의 관심사와 기쁨들-그것들은 오로지 하느님의 더 큰 영광과 관련이 있다- 안에서 시간을 보낼 줄 아는가? 나는 주님의 보호 아래서 나의 원수들로부터 벗어나 쉴 줄 아는가? 나는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사로잡혀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성령께 – 그분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나를 가르치실 것인데- 맡기는가? 내가 쓸데 없이 걱정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바오로 같이 나는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티모테오 2서 1,12)라고 말함으로써 휴식을 찾는가?

우리 잠시 오늘의 전례에서 사제의 일로 묘사한 내용으로 돌아 갑시다. 즉,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 것. 이사야는 또한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일도 말합니다.

이것들은 쉽지도 않고 사무실을 운영하거나 교구 강당을 짓거나 교구의 젊은이들을 위해서 축구장을 설계하는 것 같이 그저 기계적인 일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임무는 가엾어 하는 마음을 보이는 능력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뭉클하고 아플” 것이고 그 일들을 해 나가는 데 온전히 몰두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하는 부부들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대 성수통으로 오는 아이들과 함께 웃을 것입니다. 우리는 젊은 약혼자들과 가정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병원 침대에서 병자 성사를 받는 사람들과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할 것입니다…… 이 모든 감정들은……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목자의 마음을 지쳐 버리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제들에게 우리 사람들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뉴스 방송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람들을 알고 있고 우리는 그들의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차립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은, 그들의 고통을 나누면서, 뭉클하고 그리고 심지어 사람들에 의해 “소모되기”까지 합니다. 받아라, 먹어라… 이것이 사제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성실한 백성들을 보살필 때 반복해서 속삭이신 말씀입니다. 받아 먹어라, 받아 마셔라… 이러한 방식으로 일하는 동안 하느님 백성과의 친교 안에서 우리 사제로서의 삶이 내주어 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우리를 지치게 고단하게 합니다.

나는 내가 묵상해 왔던 지쳐 버림의 형태들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 대해 지쳐버림, 군중에 대해 지쳐버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 그리고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소진시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그래서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그러나 그것은 선한 고단함 열매 맺고 기쁨에 넘치는 지쳐 버림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자신의 아이들을 그분께 축복받도록 데리고 온 가정들,치유 받았던 사람들, 자기 친구들과 온 사람들, 스승님에게 너무나 흥분한 젊은이들…… 그들은 그분께 먹을 시간 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과 있는 것에 결코 싫증을 내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그분께서는 그들의 존재로 거듭 새로워지는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복음의 기쁨 11 참조). 활동 가운데 이렇게 지쳐 버리는 것은은 모든 사제들이 끌어 낼 수 있는 은총입니다(복음의 기쁨 279 참조).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사람들은 그들의 사제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목자들을 원하고 필요로 합니다! 믿는 이들은 결코 우리를 할 일 없이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사무실에 숨거나 선글라스를 끼고 우리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선하고 건강한 피곤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양들의 냄새 나는 사제의 고단함입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의 자녀들 또는 손자 손녀들 안에서 기뻐하는 아버지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것은 비싼 향수를 뿌리고 다른 사람들을 높고 먼데서 바라보는 사람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97 참조). 우리는 신랑의 친구입니다. 즉 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양떼들을 보살피고 계신다면 우리는 침울하거나 푸념을 하거나 훨씬 더 나쁘게는 지루해 하는 목자들일 수 없습니다. 양들의 냄새와 아버지의 미소…… 지쳐 있는 그러나 주님께서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마태오 복음 25,34)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사람들의 기쁨을 가진.

또한 우리가 “원수들에 대해 지쳐 버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종류의 지쳐 버림도 있습니다. 악마와 그 수하들은 결코 잠을 자지 않습니다. 그들의 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견디어 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지치지 않고 그 말씀을 침묵시키려고 그 말씀을 왜곡하려고 일합니다. 그들과 맞서는 것은 더 지치는 일입니다. 그것은 이것이 필요로 하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선을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양떼들과 자신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복음의 기쁨 83 참조). 악마는 우리보다 훨씬 더 영악하고 그리고 악마는 우리가 수년 동안의 인내로 쌓아 올린 것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프셋”하는 방법을 배우는 은총을 간구해야 합니다(그리고 그것은 가져야 할 중요한 습관입니다). 좋은 밀을 뽑지 않고 악마를 좌절시키는 방법, 또는 외람되지만 주님만이 홀로 보호하실 수 있는 것을 초인처럼 보호하는 방법.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사악함의 깊이 앞에서 그리고 악한 것들의 조롱 앞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도록 도울 것입니다. 지쳐 버림의 이 상황들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복음 16,33).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나는 마지막으로 이 강론 자체로 여러분이 너무 지치지 않도록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 “우리 자신에 대한 지쳐 버림[고단함]”도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277 참조). 이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위험한 지쳐 버림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두 가지 종류의 지쳐버림은 노출됨에서 비롯되고 기름 붓고 싸우기 위해서(우리의 일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 밖으로 나가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종류의 지쳐버림은 더 “자기 지시적”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고 직접 자신을 대면하고 차분하게 그의 죄 많음과 하느님 자비와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어떤 이에 대한 불만족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계속해서 이집트의 고기 냄비를 갈망하고 다른 어떤 것이 되는 환상을 만지작거리면서 “원하지만 원하지 않음”과 관련된 지쳐 버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지쳐 버림을 “경솔한 영적인 세속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가 혼자일 때 우리는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영역이 이 세속성에 둘러싸여 있는지 깨닫고 너무나 많아서 우리는 그것이 결코 완전히 씻길 수 없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위험한 종류의 지쳐 버림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이 지쳐 버림의 이유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요한 묵시록 2,3-4). 오로지 사랑만이 휴식을 줍니다 사랑 받지 않는 것이 피곤해 지고 그리고 결국 해로운 지쳐버림을 일으킵니다.

주님께서 우리 사목의 피곤함을 어떻게 다루시는지에 관한 가장 심오하고 신비한 이미지는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복음 13,1)입니다. 즉, 그분께서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장면. 나는 이것이 제자됨의 씻김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됨의 길 그 자체를 정화시켜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뛰어 들고”(복음의 기쁨 25 참조), 그분의 이름 안에서 하는 여정에서 우리에게 달라붙은 모든 얼룩과 때 묻은 모든 것들, 세속적인 스모그를 없애시는 것을 직접 책임지십니다.

우리의 발을 보면 우리는 우리 몸의 다른 부분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방법이 우리 마음이 어떻게 해나가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우리 발의 상처들, 우리가 접질림들, 그리고 우리의 고단함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따라 왔는가에 대한 징표이고 우리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며 그리고 양떼들을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이끌면서 우리가 걸어온 길들에 대한 징표입니다(복음의 기쁨 270 참조). 주님께서 우리를 씻으시고 그분을 따르면서 우리 발에 쌓인 모든 더러운 것들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발을 더러운 채로 두지 마십시오. 전장의 상처처럼 주님께서 그것들에 입을 맞추시고 우리 세상사 수고의 더께를 씻어 내십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기쁘고”, “충만하고”, “두려움과 죄”에서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도록 우리의 제자됨 그 자체가 예수님에 의해서 씻겨지고 그리고 “이 땅의 끝까지, 모든 주변부로” 나가도록 다그쳐집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그분께서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복음을 가장 버림받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디 지치지만 가장 좋은 방법들로 지칠 줄 아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강론영어원문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5/documents/papa-francesco_20150402_omelia-crisma.html

미사 동영상 & 사진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events/event.dir.html/content/vaticanevents/en/2015/4/2/crisma.html

소리로 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심쿵 소리 미사 강론 ->

마리아 사랑넷 https://www.mariasarang.net/ (->신앙생활->교황님 미사 강론)

팟빵 http://www.podbbang.com/ch/1771273 (“소리로 전하는 심쿵 미사 강론”)

*P.S. 오늘 성모승천대축일에 마리아 우리 어머니께 봉헌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성유축성미사 강론을 2015년에 처음 읽었습니다. 그때 저는 많이 지쳐 있었는데 그 신선한 첫 감동을 늘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강론을 번역하여 봉헌하기까지 4년 4개월이 걸렸으니 저는 참으로 굼뜬 딸입니다. 올 여름 지난 5년 간의 성유축성미사 강론을 번역하면서 신부님들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시는 일이 얼마나 깊고 어려운 일인지 저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께서 그 사랑 제게 부어 주시려고 성령님을 맞으시어 성령님과 함께 저를 흔들어 깨우시어 제 손을 잡고 다 마치도록 오늘까지 이끌어 주셨습니다. 어머니께 감사합니다.

마리아 우리 어머니를 주신 하느님을 영원히 찬미합니다!

 

 

 

[1] (역주) 영어 원문에는 ‘시편 89,21’로 표기되어 있으나 성경 구절의 내용이 한국어 성경 시편 89,22이므로 수정하여 표기하였습니다.  

[2] (역주) 영어 원문에는 ‘시편 89,20’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성경 구절의 내용이 한국어 성경 시편 89,21이므로 수정하여 표기하였습니다.

[3] (역주) 영어 원문에는 ‘시편 89,24.46’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성경 구절의 내용이 한국어 성경 시편 89,25.27이므로 수정하여 표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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