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성유축성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2018년 3월 29일 (성주간 목요일)]

[미사 강론&심쿵소리강론] 2018년 성유축성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2018년 3월 29일 (성주간 목요일)]

 

Fran.의 글

2019-08-01 10:23:08 조회(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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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1_2018년_성유축성미사_프란치스코_교황_성하의_강론[20.mp3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9.index.html

https://www.vaticannews.va/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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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2018년 3월 29일 목요일[성주간 목요일 - 성유 축성 미사]

[독서와 복음 말씀] 제1독서 : 이사야서 61,1-3ㄹ.6ㄱㄴ.8ㄷ-9

                           화답송 : 시편 89(88),21-22.25와 27(◎ 2ㄱ 참조)

                           제2독서 : 요한 묵시록 1,5-8

                           복음 : 루카 복음 4,16-21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8684&gomonth=2018-03-29&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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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 축성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성 베드로 대성당

2018년 3월 29일 성목요일

 

로마 교구와 전세계 다른 교구들의 사랑하는 형제 사제 여러분!

나는 오늘 전례의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 신명기의 이 구절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4,7). 하느님의 가까이 계심… 우리 사도들의 가까이 있음.

이사야 예언자의 독서 말씀에서 우리는 그분 백성 가운데 “기름을 부어 주시니…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과 갇힌 이들과 가까이 있는 하느님의 종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내린” 하느님의 영, 그분께서는 그를 강하게 하시고 그의 여정에서 그와 함께 하십니다.

시편 88장에서 다윗 왕이 어렸을 때 손을 잡아 그를 이끄셨고 그리고 그가 나이 들어갈 때 그를 떠받치신 하느님의 가까이 계심이 어떻게 진실이라는 이름을 취하는지 우리가 봅니다. 즉, 시간의 흐름 속에 지속되는 가까이 계심이 진실이라고 불리웁니다.

요한 묵시록은 항상 갇힌 이들에게 “오실(come)” – erchómenos – 주님께 우리를 가까이 데리고 갑니다. 항상.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라는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처들이 항상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임을 우리가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그분께 “이웃”으로서 가까이 다가가기를 선택하고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의 몸, 특히 어린이들의 몸에 가까이 다가가겠다고 선택하면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의 핵심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예수님을 주시하였”(루카 복음 4,20)던 당신 자신의 백성들의 눈을 통해서 주님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 있는 회당에서 봉독하려고 일어서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습니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거의 그 끝에 있는 시종에 대한 이러한 말씀을 찾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이사야서 61,1).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들은 이들에게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가까이 계심을 깨달으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마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복음 4,21).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대해 정통한 사람의 능력으로 그 말씀을 찾아 그것을 읽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율법학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복음 전도자”, 거리의 선포자, 그분 백성을 위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이사야가 말한 대로 그 발이 아름다운 선포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선포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선택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과 가까이 계시기를 선택하셨습니다. 30년 간의 숨은 생활! 그 다음에서야 그분께서는 선포하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강생의 교육법, 다른 문화 안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적용되는 모습을 봅니다. 외국의 문화 안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교구 안에서,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 안에서……

가까이 있음은 특정 덕목의 이름을 넘어선 것입니다. 즉 그것은 전인적인 사람에게 다가가는 자세이고 관계를 맺는 우리의 방법, 우리 자신과 그리고 타인 모두에게 주의 깊게 마음을 쓰는 우리의 방법에 임하는 자세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사제에 대해 “그분은 우리랑 가까워”라고 말할 때 그들은 보통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그분은 항상 거기에 계셔”(거기에 항상 안 계셔의 반대말. 즉, 그런 경우 항상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시작합니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이 매우 바쁘시다는 걸 알아요…”). 또 다른 의미는 그 분은 모든 이들을 위해 해줄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과 이야기하셔” 어른과 아이들과 똑같이, 가난한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는” 사제들, 사람을 만날 시간이 있는 사제들, 사람들을 위해서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사제들…… 거리의 사제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거리의 선포자가 되는 법을 배운 사제들 중 한 사람이 필리포스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그가 모든 고을에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기쁨에 찼다고 읽었습니다(사도행전 8,4. 5-8 참고). 필리포스는 어떤 순간에 성령께서 “붙잡으셔서” 복음을 전하도록 할 수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와 같은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세례까지 줄 수 있는 사람, 길가에서 바로 거기에서 그렇게 세례를 줄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사도행전 8,5.36-40 참고).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가까이 있음은 복음 전도자에게 결정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에서 핵심적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주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그 말을 쓰셨습니다). 우리는 가까이 있음이 자비의 열쇠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같이 거리를 좁힐 방법들을 찾지 않으면 자비는 자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우리가 가까이 있음이 진리의 열쇠이기도 하다는 것을 더 많이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비의 열쇠일 뿐만 아니라 진리의 열쇠입니다. 진리가 연관된 곳에서 정말로 거리가 좁혀질 수 있을까요? 네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단지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서 어떤 거리를 두고 오는 상황과 사물들에 대해 정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그것 이상의 것입니다. 진리는 항상 진실함(émeth)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름을 주신 것처럼 여러분이 사람들을 분류하거나 “그들의 상황”을 정의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이름을 주도록 만듭니다. “형용사의 문화”를 따르는 싫은 습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래, 이 사람은 그렇고 그래, 이 사람은 이런 것 같아….. 아닙니다! 이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게 덕목들이나 결점들이 옵니다. 그러나 (먼저) 그 사람에 대한 진실한 진리 그리고 실체인 듯이 간주되는 형용사가 아닌.

우리는 어떤 추상적인 진리들로 이루어진 우상들을 만드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들은 항상 쉽게 닿을 수 범위 안에 있는 편리한 우상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어떤 특권과 권위를 내놓아서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우상”은 모방하고 있어서 그것이 복음의 말씀으로 스스로 변장하고 있지만 그 말씀들이 마음을 감동시키게 하지 못합니다. 더 나쁜 것은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을 예수님 말씀과 성사의 치유하는 그 가까이 있음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리아, 사제들의 어머니에게 의지합시다. 우리는 “가까이 계시는 어머니”로서 어머니께 청할 수 있습니다. “참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우리 옆에서 함께 걸어가시고 우리와 함께 싸우시며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아무도 버려졌다고 느끼지 않는 방법으로(복음의 기쁨, 286). 우리의 어머니께서는 다른 이들을 도우시고자 “서둘러” 떠나실 때만 가까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가까이 계심의 한가지 방법이고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어머니의 방법으로도 가까이 계십니다(복음의 기쁨, 288). 카나의 바로 그 순간에 어머니께서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씀하신 그 어조가 그 말씀을 모든 교회 언어의 모성적 모범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하신 대로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는 마리아님께 그렇게 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할 뿐 아니라 그 중요한 상황이 일어나는 곳에는 어디든지 우리가 있어야 합니다. 각자의 마음, 각 가정, 각 문화의 중요한 상황들. 오로지 이러한 방식의 가까이 있음을 통해서만 – 부엌에서 식사가 요리되고 준비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 우리는 포도주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고 무엇이 주님께서 주고 싶어 하시는 최고의 포도주인지 식별할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 천 가지 다른 방식으로 말하지만 어머니의 같은 어조로 –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는 말이 들려야 하는 곳에 사제답게 가까이 있음의 그 세가지 영역에 대해서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그 말은 “영적인 동행”, “고해” 그리고 “선포”입니다.

영적인 대화 안에 가까이 있음. 사마리아 여인과 주님과의 만남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이것에 대해 묵상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어떻게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인지 식별하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께서는 부드럽게 마음 상하지 않게 그녀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전도자의 영으로 그녀를 감화시켜 그녀와 함께 그녀의 마을로 복음을 전하러 가십니다. 주님께서는 영적 대화의 모범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녀의 흠숭 기도에 그늘을 드리우지 않고 또는 그녀의 전도자 소명에 의심을 던지지 않으시면서 사마리아 여인의 죄를 드러나게 하는 방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고해 안에서 가까이 있음.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의 구절을 생각하면서 이것에 대해 묵상합시다. 예수님의 진실은 언제나 다가가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가까이 있음이 모든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 집니다. 주님과 같은 눈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것. 주님께서는 막 돌이 던져지려는 간음 앞에서 무릎을 꿇으신 후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요한 복음 8,11)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덧붙여 말할 수 있습니다. 정의를 내리는 진리에 대한 율법주의적인 말투– 하느님 자비의 한도를 그들이 정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말투-가 아닙니다. 반대로 이 말들은 죄인들이 뒤가 아니라 앞을 내다볼 수 있도록 진실함의 진리에 대한 어조로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는 말의 올바른 어조는 그 말을 하되 일흔 일곱 번이라도 되풀이해서 말하려고 하는 고해 신부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포 안에서 가까이 있음. 멀리 있는 이들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그리고 오순절 사건의 일부인 베드로의 첫 번째 연설을 들음으로써 이것에 대해 묵상합시다. 베드로는 말씀이 “멀리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는 케리그마로 사람들이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는 그런 방식으로 선포합니다. 그것은 그들을 이렇게 묻도록 이끕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행전 2,37).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질문을 언제나 마리아님과 교회의 어조로 던지고 대답해야 합니다. 강론은 “사목자가 자신의 백성에게 다가가고 대화하는 능력을 가늠하는” 시금석입니다”(복음의 기쁨, 135). 강론에서 우리가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얼마나 가까운지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일상 생활 안에서 우리의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운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이 두 가지 형태의 가까이 있음이 자라날 때 그리고 서로를 지탱해 줄 때 현존합니다. 당신이 하느님과 멀리 있다면 부디 당신의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십시오. 그들은 당신의 열정을 식게 하는 이데올로기들로부터 당신을 치유할 것입니다. 작은 이들이 당신을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가르쳐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 예수님이라는 사람은 매력적이고 그분의 선한 모범은 윤리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고 그분의 가르침은 우리가 우리 삶을 살아 가는 방법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사람들과 멀리 있다고 느낀다면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다가가십시오. 복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 것이고 그분의 눈에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당신 피를 흘리신 이유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가운데 말씀은 당신 안에서 살이 되고 당신은 모든 이들의 살과 가까운 사제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백성과 가까이 있음을 통해서, 그들의 고통스러운 몸은 당신의 마음에 말할 것이고 당신은 감동되어 하느님께 말씀드릴 것입니다. 당신은 다시 한번 중재하는 사제가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사람들과 가까이 있는 사제는 착한 목자의 친근함과 다정함으로 그들 가운데에서 걷습니다. 즉, 그들을 돌보면서 사제는 때때로 그들 앞에서 가고 때때로 그들 가운데 머물고 또 다른 어떤 때에는 그들 뒤에서 걷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제를 단지 흘륭하다고만 평가하지 않습니다. 더욱 그들은 그 사제에 대해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느낍니다. 그들이 오로지 예수님의 현존 안에서만 느끼는 어떤 것. 그래서 그들과 우리가 가까이 있음을 식별하는 것이 단순한 하나의 할 일 이상인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삶 안에 현존하도록 만들거나 아니면 그분을 관념이나 한 페이지의 문자들이거나 기껏해야 점점 판에 박히는 어떤 좋은 습관 안에서 구현되도록 만듭니다.

사랑하는 형제 사제 여러분, “가까이 계시는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님께 우리를 서로에게 더 가까이 데려가시도록 간청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하신 모든 것을 하라”고 말해야 할 때 우리 의견의 다양성 안에서 성모님의 모성적인 친근함이 현존하도록 하나의 어조의 목소리로 말하게 해 주시도록 간청합시다. 왜냐하면 마리아님께서는 그분의 “네”로 우리를 영원히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가신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강론영어원문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8/documents/papa-francesco_20180329_omelia-crisma.html

미사 동영상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events/event.dir.html/content/vaticanevents/en/2018/3/29/crisma.html

소리로 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심쿵 소리 미사 강론 ->

                                      마리아 사랑넷 https://www.mariasarang.net/ (->신앙생활->교황님 미사 강론)

                                     팟빵 http://www.podbbang.com/ch/1771273  (소리로 전하는 심쿵 미사 강론)

*P.S. 안녕하세요. 더운 여름 주님 안에서 평안하신지요?

통상 매년 7월 8월에는 교황님께서 여러 일정이 있으시고 여름 휴가를 가시기도 하셔서 새로운 강론이 나오지 않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올해 여름에는 지난 5년동안의 성주간 목요일 교황님의 성유축성미사 강론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다음 달 8월 성모승천대축일까지 마리아 우리 어머니께 봉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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