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미사 강론 :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시성 400주년 기념 미사[2022년 3월 12일 토요일(사순 제1주간 토요일,사순 제2주일 전례 미사)]

 

[미사 강론&심쿵소리강론]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시성 400주년 기념 미사[2022년 3월 12일 토요일(사순 제1주간 토요일,사순 제2주일 전례 미사)]

 

Fran.의 글

2022-03-29 18:48:13 조회(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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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1.index.html

                                                                           htps://www.vaticannews.va/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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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 2022년 3월 12일 토요일[사순 제1주간 토요일(사순 제2주일 전례 미사)]

[독서와 복음 말씀] 제1독서 : 창세기 15,5-12.17-18

                        화답송 : 시편 27(26),1.7-8.9.13-14(◎ 1ㄱ)

                        제2독서 : 필리피서 3,17―4,1

                        복음 : 루카 복음 9,28ㄴ-36

                   https://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13273&gomonth=2022-03-13&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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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예수의 성녀 데레사,

                                성 이시도르 라브라도, 성 필립보 네리 

시성 400주년 기념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로마, 제수 교회(Church of the Gesù)

2022년 3월 12일 토요일

 

오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네 가지 행동을 보여 줍니다. 이 모습들 안에서 그분의 제자들과 같이 우리 자신의 여정을 위한 분명한 방향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마땅히 그것들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첫 째 동사, 예수님의 이 행동들 중 첫 번째는 “데리고”입니다. 루카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9,28)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서 “그분과 함께”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모든 것이 선택과 그리고 “뽑으심” 은총의 신비로 시작됩니다. 첫 번째 결정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는 공로가 없지만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선물로 만드는 사람이 되기 전에 우리는 거저 주어지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이라는 거저 받은 선물.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여정은 이 처음 은총으로부터 매일 새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셨고 당신과 함께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손을 잡으셨습니다.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시기 위해서 입니까? 그분의 거룩한 산으로, 그곳에서 지금도 그분께서는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는 우리를 바라보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변모되는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은총, 이 첫 은총이 우리를 그곳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통함이나 실망을 느낄 때 우리가 하찮게 느껴지거나 오해 받는다고 느낄 때, 지나간 시간에 대한 향수와 불평들 속에서 헤매지 맙시다. 이것들은 우리의 전진을 막는 유혹들이고 우리를 그 어느 곳으로도 이끌지 못하는 유혹들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명에 충실하게 은총으로 새로 시작하면서 우리 스스로 살아갑시다. 우리의 마지막 목표를 향한 길을 따라 가는 한 걸음으로 매일 매일을 바라보는 선물을 받아들입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십니다. 그분께서 그들을 공동체로 데리고 가십니다. 우리의 소명은 친교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를 뽑으심의 신비와 교회 안에서 살아감의 은총과 우리 교회 어머니의 은총을 우리의 정배 우리의 교회를 위해서 다시 한 번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 하나의 사회로 속해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형제애의 누룩이 되기 위해서 친교를 만들고 강화하는 힘을 간구하기에 지치지 맙시다. 우리는 청중을 찾는 솔로 연주자가 아니라 합창으로 연주할 형제들입니다. 교회와 함께 생각하고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성공이나 이득들을 걱정하는 유혹을 거부합시다. 완고함으로 이어지는 성직자 주의나 분열로 이어지는 이데올로기에 우리 자신이 삼켜지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 자신이 우리가 오늘 기리는 성인들은 친교의 기둥들입니다. 그들이 우리가 우리의 성격과 관점의 모든 차이들 안에서 함께 부름 받아 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히 하나가 될 것이라면 왜 여기서 시작하지 않습니까? 함께 “데리고” 가는 아름다움을, 예수님께 함께 부름 받는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깁시다. 이것이 첫 번째 동사 “데리고”입니다.

 

두 번째 동사는 오르다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셨다.”(루카 복음 9,28). 예수님의 길은 오르막 길입니다. 내리막 길이 아닙니다. 변모하심의 빛은 평지에서 보여지지 않고 오로지 힘든 올라감 후에 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는 또한 평범함의 평지와 관습의 작은 언덕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안심시키는 늘 하던 일들을 그만두고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신 후에 모세와 엘리야에게 바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복음 9,31)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사막에서 두 가지 세상 떠남을 경험한 후에 시나이 또는 호렙을 올라갔습니다(탈출기 19, 열왕기 1권19). 이제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최종적인 세상 떠남, 파스카에 대해서 말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로지 십자가의 오르막 길만이 영광의 목적지에 이릅니다. 이것이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영광으로. 세상의 유혹은 십자가를 지나치면서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익숙하고 직행하는 매끈한 길을 더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하고 그분을 따라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들은 대로 주님께서는 먼저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는 분께서 우리를 밖으로 그리고 위로 가자고 초대하십니다.

 

우리 에수회 사람들에게는 밖으로 그리고 위로 가는 이 여정이 특별한 길, 산으로 잘 상징되는 길을 따라 갑니다. 성경에서 산 꼭대기는 맨 끝, 가장 높은 곳, 하늘과 땅의 경계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곳으로 가라고 오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남자와 여자들이 그들의 어려움들을 갖고 하느님과 “마주 대하는” 그곳 하늘과 땅의 경계로, 그래서 그들이 끝없이 찾고 그들이 신앙적으로 의심할 때 우리가 그들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곳이 우리가 있어야 하는 곳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밖으로 나가고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인간적인 본성이라는 적은 우리를 공허하고 반복되는 일들과 익숙한 풍경들의 길로 계속 가라고 설득할 것이지만 그러나 반면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려 두지 않으시고 평화 안에서 평화로부터  열려 있으라고 속삭이시고 극도의 한계까지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대해서 생각합시다.

 

이 여정에서, 이 길을 따르면서 나는 싸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의 희생 제물들과 함께 그것들을 먹어 치우려고 날아드는 맹금들을 쫓아내면서 그곳에 있는 가난하고 늙은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창세기 15,7-11). 그는 막대기로 그것들을 쫓아냅니다. 가난하고 늙은 남자. 이것에 대해서 생각합시다. 이 길과 이 여정과 이것, 주님께 바친 우리의 봉헌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는.

 

모든 시대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러한 기로에 서 있는 그들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행동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루카 복음 9, 33). 이것이 정지된 신앙, “깔끔하게 주차해 놓는 신앙”의 위험입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주차된” 신앙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훌륭한” 제자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우리는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고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졸고 있습니다. 또한 바로 이 제자들이 겟세마니에서 잠들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지금은 우리의 영혼들이 진정되도록, 오늘날의 소비주의와 개인주의적 문화에 마취되도록 “인생은 나한테 좋으면 다 좋은 거야.”라는 자세에 마취되려고 잠을 잘 때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살아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잃어버리면서 그리고 복음의 구체성을 잃어버리면서 계속해서 말하고 이론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큰 비극들 중에 하나는 현실에 우리의 눈을 뜨기를 거부하고 그 대신 다른 방법을 향하는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넘어서 가도록 그리고 주님과 함께 산에 오르도록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의 상처들을 통해서 그분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인류의 고단함과 시대의 징표들을 깨닫도록 도와 줍니다. 그 상처들을 어루만지기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것들이 주님의 상처들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루카복음 9, 28) 산에 오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세 번째 동사입니다. 기도하시러.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복음 9, 29). 거룩하게 변모하심은 기도에서 왔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의 사목 활동 이후조차도 오늘날 우리에게 나에게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마도 습관의 힘이나 매일 매일의 정해진 의식이 우리를 기도는 개인이나 역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은 현실을 바꾸는 것입니다. 기도는 능동적인 소명이고 끊임없는 중재입니다. 그것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분의 눈빛이 역사 위에 비추도록 현재 일어나는 일들의 고동치는 심장을 하느님의 현존에 가져다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기도가 이 변모시킴에 몰두하게 하는지 묻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도이 새로운 빛을 다른 이들을 비추고 그들의 상황들을 변화시킵니까? 기도가 살아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서 내면의 “빗장을 열어 젖히고”, 소명의 불을 다시 일으키고 우리의 기쁨을 다시 밝히고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가 스스로를 세상에서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의 탄원으로 고생스럽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또한 이렇게 물어봅시다. 우리가 어떻게 현재의 전쟁을 우리의 기도로 가져오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 Philip Neri의 기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기도는 그의 마음을 확장시켜 주었고 그가 그의 시대의 거리 아이들에게 그의 문을 열어주도록 만들었습니다. 또는 Isidore 성인의 기도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들판에서 기도했고 그의 목장 일을 그의 기도로 가져 왔습니다.

 

매일 매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소명과 우리 공동체의 역사를 받아 드는 것. 즉 그러고 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르키신 높은 곳을 향하여 오르는 것.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

 

그러나 또한 네 번째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 구절의 마지막 “예수님만 보였다.”(루카 복음 9, 36)입니다. 그분께서는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밖의 모든 것이 지나가는 동안 오로지 성부 하느님 아버지의 “증언”, 즉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복음 9, 35).의 울림을 위해서. 복음은 우리를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이끌어 주면서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의 영성과 우리의 사회 안에서 많은 부차적인 필요성들에 가장 중점을 두도록 자주 유혹 받습니다. 부차적인 필요성들을 우선으로 두는 유혹이 매일 매일 있습니다. 즉, 우리는 관습들과 습관들과 우리 마음을 사라지는 것들에 우리 마음을 두게 하고 남아 존재하는 것들을 잊어 버리게 만드는 전통들에 중점을 둘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존재하는 하느님의 것들과 사라지는 세상의 것들을 구별할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 마음을 갈고 닦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거룩한 사부 이냐시오는 교회와 세상에 부어진 가장 적절한 보물로서 식별, 우리의 소중한 유산을 보존하도록 도와 줍니다. 식별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식별은 본질적으로 중요합니다. 성 바오로 파벨이 쓴 것처럼 “성취되거나 생각되거나 조직될 수 있는 좋은 것은 악한 영이 아니라 선한 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참조. Memorial, Paris, 1959, n. 51). 아멘.

 

 (번역 2022. 3. 29. 화요일 11:47 / 번역 수정 날짜 2022. 4. 9. 토요일 17:37 )

 

강론영어원문->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2/documents/20220312-omelia-400-ignazio-loyola.html

강론 이탈리아어 원문->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homilies/2022/documents/20220312-omelia-400-ignazio-loyola.html

강론 미사 사진 동영상(영어)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events/event.dir.html/content/vaticanevents/en/2022/3/12/messa-400-ignazio-loyola.html

 

 

<소리로 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심쿵 미사 강론>

1. 마리아 사랑넷 https://m.mariasarang.net/bbs/bbs.asp?index=bbs_sermon_pope (->신앙생활->교황님 미사 강론)

2. 팟빵 http://www.podbbang.com/ch/1771273(->교황님의 심쿵 미사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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