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미사 강론 : 성유 축성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강론[2021년 4월 1일 목요일 [성주간 목요일 - 성유 축성 미사]]

[미사 강론&심쿵소리강론] 성유 축성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강론[2021년 4월 1일 목요일 [성주간 목요일 - 성유 축성 미사]]

 

Fran.의 글

2021-04-28 23:36:49 조회(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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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1.index.html

htps://www.vaticannews.va/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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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2021년 4월 1일 목요일 [성주간 목요일 - 성유 축성 미사]

[독서와 복음 말씀] 제1독서 : 이사야서 61,1-3ㄹ.6ㄱㄴ.8ㄷ-9

                         화답송 : 시편 89(88),21-22.25와 27(◎ 2ㄱ 참조)

                         제2독서 : 요한 묵시록 1,5-8

                         복음 : 루카 복음 4,16-21

https://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12543&gomonth=2021-04-01&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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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 축성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성 베드로 대성당

2021년 4월 1일 성목요일

 

오늘의 복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마음의 변화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 변화는 극적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박해와 십자가가 복음의 선포와 연결되어 있는 범위를 드러냅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으로 불러일으켜진 존경은 나자렛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중얼거렸던 세간의 평가 하나가 은밀하게 바이러스처럼 떠돌았습니다. 즉,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복음 4,22)

 

그것은 지난 가는 말로 불쑥 튀어나온 저 애매한 표현들 중 하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좋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하려고 쓸 수 있습니다. 즉 “저렇게 비천한 출신의 사람이 이런 권위로 말하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다른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렇게 거만하게 쓸 수 있습니다. 즉 “그런데 이 사람, 그가 어디 출신이었지? 그는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면 우리는 사도들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던 오순절의 날에 이야기되었던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사도행전 2,7).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그 사도들이 술 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나자렛에서 이야기된 그 말씀들은 양쪽 의미로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뒤따르는 일들을 살펴 본다면 그들이 그러고 나서 예수님에 반하여 폭발시킬 폭력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명백합니다.

 

그것들은 “정당화의 말들”[1]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때처럼 그렇습니다. “저건 너무 과해!” 그러고 나서 각각 그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떠나 버립니다.

 

이번에는 주님께서, 때때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거나 그저 떠나셨던 분께서 그 말을 지나가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그분께서는 단순한 마을 뒷담화의 겉모습으로 숨겨진 악의를 발가벗기셨습니다. “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루카 복음 4,23). “네 병이나 고쳐라…”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거기에 독이 있습니다! 같은 말이 십자가의 주님에게 따릅니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복음 23,35 참조).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도둑들 중 한 명이 덧붙여 말한 것입니다(루카 복음 23, 39). 

 

언제나 그렇듯이 주님께서는 악령과 대화하는 것을 거절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성경의 말씀 안에서 대답하십니다.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샤 그들은 자기 나라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페니키아의 과부와 나병을 앓고 있었던 시리아 사람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두 외국인들, 다른 지역의 두 민족. 이것 자체가 놀랍고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반대를 받는 표징(semeion antilegomenon)”(루카 복음 2,34)[2]이 될 것이라고 했던 나이든 시메온의 영감을 받은 예언이 얼마나 진실한지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자주 밀과 가라지처럼 뒤섞여있는 우리의 마음의 깊은 곳에 우리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빛을 가져다 주시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적인 충돌을 일으킵니다. 너무나도 풍성한 주님 자비의 표징들을 보면서 그리고 복음에서 찾아지는 “여덟 가지 참 행복들”을 들으면서 그러나 또한 “불행들”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분별하고 결심하도록 강하게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경우에 예수님의 말씀이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이것이 화가 잔뜩 난 군중들이 그분을 죽이려고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분의 “때”가 아니었고 그리고 주님께서, 그렇게 복음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복음 4, 30).

 

그분의 때가 아니었지만 그러나 군중들의 분노가 폭발되는 신속함 그리고 주님을 벼랑에서 죽이려고 했던 격분의 흉포함이 언제나 그분의 때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내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제 여러분. 기쁨에 찬 선포의 때와 박해의 때와 십자가의 때는 같이 옵니다.

 

복음의 선포는 언제나 어떤 특정한 십자가를 껴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온유한 빛은 잘 정돈된 마음들을 밝게 비춥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마음들에는 혼란과 거부를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에서 반복해서 봅니다.

 

밭에 뿌려진 좋은 씨는 열매를 맺습니다 – 백배, 예순 배, 서른 배 –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원수의 질투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 원수는 밤에 가라지를 뿌리는 자입니다(마태오 복음 13,24-30, 36-43 참조).

 

자비하신 아버지의 다정한 사랑은 거부할 수 없게탕자를 집으로 끌어 당기지만 그러나 또한 큰아들 편에서의 분노와 원한으로 이어집니다(루카 복음 15,11-32 참조).

 

포도밭 주인의 후함은 맨 나중에 부름 받은 일꾼들 사이에서는 감사함의 이유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맨 먼저 온 이-그는 자기를 고용한 이의 후함 때문에 기분이 상합니다-의 억울해 하는 반응을 불러 일으킵니다(마태오 복음 20,1-16참조).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친밀하심은 자캐오와 마태오와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처럼 마음을 얻으시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기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이들 안에서는 비웃음도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의 아들은 소작인들에게 존중 받으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보내는 왕의 관대함은 그들 안에서 헤아릴 수도 없는 횡포함을 불러일으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로우신 한 분을 죽이는데 까지 이르는 죄악의 신비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마태오 복음 21, 33-46 참조).

 

이 모든 것이, 사랑하는 형제 사제 여러분, 복음의 선포가 박해와 십자가와 신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합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 “가족 광고”를 용서하십시오 –는 복음의 이 진실을 주님의 성탄에 대한 묵상 안에서 표현합니다. 거기에서 그는 “성 요셉과 우리의 성모님께서 주님께서 극빈 속에서 그리고 많은 고생들 – 배고픔과 갈증과 더위와 추위와 수모들과 치욕들 후에 태어나실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도록 그 모든 일들을 나를 위해서 하실 수 있도록 하시려고 그들의 여정을 떠나면서 했던 일들을 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는 그렇게  “이것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큰 영적 이득을 길어 올리라고”(영성 수련, 116) 우리를 초대합니다. 주님 탄생의 기쁨, 즉 십자가의 고통, 즉 박해.

 

복음 선포의 시작에서 그리고 중심에서 이 십자가–오해와 거부와 박해의 십자가–가 일찍이 나타남을 관상함으로써 우리의 사제 생활을 위한 “큰 영적인 이득을 길어 올리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묵상을 할 수 있습니까?

 

두 가지 생각이 나에게 떠오릅니다.

 

첫 째 : 우리는 그분의 전도 시작 바로 그때에 심지어 그분의 탄생 전조차도 주님의 삶에 존재했던 십자가를 보고 놀랍니다. 그것은 천사의 메시지에 대한 마리아님의 그 처음 당황스러움 안에 이미 거기에 있습니다. 요셉이 어쩔 수 없이 마리아를 조용히 떠나 보내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그의 잠 못 이루는 불면 속에 그것은 거기에 있습니다. 헤로데의 박해 속에 그리고 자신의 고향에서 떠나 귀양살이를 해야만 하는 많은 다른 가정들이 그렇게 견디는 고난처럼 성가정이 견디어냈던 고난들 속에 그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십자가의 신비는 “처음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나중에 생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 주님의 삶에서 우연히 일어난 어떤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줍니다. 역사를 통틀어 다른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모든 이들이 십자가를 부차적인 피해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연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류의 크고 작은 십자가들, 우리 각자의 십자가들은 우연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왜 십자가를 완전히 그리고 끝까지 껴안으셨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 모두를 받아들이셨을까요? 최후의 만찬 이후에 그분의 친구들에게 당하신 그분의 배신과 버려짐, 그분의 불법적인 붙잡히심, 그분의 약식 재판 그리고 부당한 선고, 그분께서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는 불필요하고 부당한 폭력까지…? 만약 그저 상황들이 십자가의 구원 능력을 좌우한다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왔을 때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완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서는 모호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두 번째 생각 :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조건, 우리의 한계들과 우리 나약함의 통합적인 요소로서의 십자가 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어떤 일은 인간적인 약함이 아니라 뱀 -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께서 무방비하신 것을 보면서 그분의 모든 일을 독으로 망치고 파괴하려는 시도로 그분을 무는 뱀 -이 무는 것과 관련이 있는 십자가 위에서 일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충격을 주고 분개하게 하려고 무는 것 – 그리고 이 시대는 추문의 시대입니다 – 다른 이들을 위한 모든 봉사와 사랑의 희생을 망가뜨리고 쓸모 없고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려고 무는 것. 그것이 이렇게 계속 주장하는 악마의 독입니다. 즉,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바로 이 죽음을 가져오려고 시도하는 고통스럽고 가혹한 “물어 뜯음“ 안에서 하느님의 승리가 궁극적으로 보여집니다. 성 막시모 고해자(Saint Maximus the Confessor)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안에서 반전이 일어났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살을 물었을 때 악마는 그분을 독으로 해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분 안에서 오로지 성부 하느님의 뜻을 향한 무한한 온유하심과 순종만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십자가라는 갈고리에 걸려 그는 주님의 살을 게걸스럽게 먹어 댔고 그것은 그분에게 악의에 찬 것으로 드러났지만 반면에 우리에게는 악마의 힘을 없애는 해독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3]

 

이것들이 나의 묵상들입니다. 이 가르침에서 이득을 얻는 은총을 주님께 간구합시다. 십자가는 우리들의 복음 선포 안에 현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화해하게 하시는 피 덕분에 그리스도 승리의 힘을 담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그 그리스도 승리의 힘은 악을 이기고 우리를 악마로부터 구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껴안는 것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앞에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밖으로 나가 선포하는 것이 우리가 추문의 독을 식별하고 쫓아 내도록 해 줄 것입니다. 십자가가 예기치 못하게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날 때는 언제나 그 추문과 분노의 독으로 악마가 우리를 독으로 해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hypostoles)” (히브리서 10, 39), 라고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의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 저자가 우리에게 주는 충고입니다. 우리는 충격을 받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기쁜 구원의 선포가 전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거나 그것을 윤리주의나 성직자주의 같은 율법주의로 축소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위협들 안에 있다는 것을 보시는 것으로 예수님 당신께서 충격을 받거나 분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격을 받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분께서 어떤 좋은 일을 하실 때마다 언제나 일어났던 윤리주의와 율법주의와 성직자 주의의 입씨름들 속에서 병자들을 고쳐야 했고 갇힌 이들을 해방시켜야 했던 것에 충격을 받거나 분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격을 받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보지 않으려고 또는 다르게 보려고 자기 눈을 감은 사람들 속에서 눈 먼 이들을 보게 하셔야 했던 것에 충격을 받거나 분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격을 받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심–역사의 모든 것을 껴안으시는 해 –이 오늘날에는 좀처럼 지역 신문의 삼면을 만들지도 못할 문제들로 공적인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에 충격을 받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충격을 받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선포는 우리의 유창한 말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의 힘 때문에 유효하기 때문입니다(고린토 1서 1, 17 참조). 

 

우리가 복음을 - 행동으로 그리고 필요할 때 말로 - 전할 때 우리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두 가지를 명료하게 만듭니다. 복음에서 비롯되는 고난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고린토 2서 1,5 참조 )이고 그리고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고린토 2서 4,5)

 

나는 나의 기억들 중 한가지를 나누면서 끝마치려고 합니다. “한 때, 내 인생에서 어둠의 때에 나는 주님께 어렵고 복잡한 상황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 주실 은총을 간구했습니다. 어둠의 때. 나는 어떤 수녀님들에게 영신수련을 전해야 했고 그리고 마지막 날 그 당시의 관례대로 그들은 모두 고해소로 갔습니다. 한 나이든 수녀님이 왔습니다. 그녀는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고 빛으로 가득 찬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여인. 고해의 끝에 나는 그녀에게 부탁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수녀님, 당신의 보속으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왜냐하면 저는 특별한 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그것을 청해 주세요. 당신이 주님께 청한다면 틀림없이 그분께서 그것을 저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녀는 잠시 동안 침묵 속에 멈추어 있었고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고나서 그녀는 나를 보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당신에게 그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꼭 알아 두세요. 그분께서는 그분 자신의 하느님 방법으로 그것을 당신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많은 유익함을 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우리가 간청한 것을 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분 하느님의 방법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을 들으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간청한 것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분 하느님의 방법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 방법은 십자가를 포함합니다. 그것은 자기 학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 끝까지 하시는 사랑을 위해서 입니다.[4] 

 

(번역 2021. 4. 28. 수요일 23:40)

 

 

강론영어원문 -> http://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1/documents/papa-francesco_20210401_omelia-crisma.html#_ftn3

강론 미사 사진 동영상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events/event.dir.html/content/vaticanevents/en/2021/4/1/crisma.html

 

<소리로 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심쿵 미사 강론>

1. 마리아 사랑넷 https://m.mariasarang.net/bbs/bbs.asp?index=bbs_sermon_pope (->신앙생활->교황님 미사 강론)

2. 팟빵 http://www.podbbang.com/ch/1771273(->교황님의 심쿵 미사 강론)

 

[1] 영성생활의 스승인 Claude Judde 신부는 우리의 결심들에 동행하고 “최종 결정”을 포함하는 표현들, 그리고 결심을 촉구하고 한 사람이나 한 모임을 행동하도록 움직이는 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C. Judde, Oeuvres spirituelles, II, 1883 (Instruction sur la connaissance de soi-même), pp. 313-319), in M. Á. FIORITO, Buscar y hallar la voluntad de Dios, Buenos Aires, Paulinas, 2000, 248 s. 참조.

[2] “안틸레고메온(antilegomenon)”은 그분에 관하여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사람은 좋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나쁘게 말합니다. 

[3] Cent. I, 8-13 참조.

[4] 2013년 5월 29일 산타 마르타 미사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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