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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하느님의 모상을 닮고 태어난 인간은 창조의 정점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은 과연 선하고 아름답고 보기에 좋은가? 병든 육체와 정신의 고통, 미움과 증오, 싸움, 전쟁, 죽음... 한 많은 이 세상의 모습이다. 참으로 세상은 알 수 없는 모순덩어리다. 악하고 부정직한 사람은 잘 먹고 잘 살지만, 착하고 양심적인 사람은 가난하고 힘들게 산다.
•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 악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그러고 보니 악이란 무엇인가? 나쁜 것? 무엇을 보고 나쁘다고 말하는가? 글쎄, 좋지 않은 것?
악은 선의 반대 개념이다. 그러니까 선하지 않으면 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선하지 않을 뿐이라는 거다. 그래서 철학에서는 악을 ‘선의 결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어떤 질서가 깨어질 때 거기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의 질서는 크게 3가지가 있다. 그래서 악이라는 것도 크게 3가지가 있다.
1) 자연 질서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이것이 정상이고, 그래야 아름답고 좋다. 그래서 한강 물은 서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다.
그런데 어떤 못된 사람이 밤중에 몰래 서울의 한강 물을 서해 바다로 내려가지 못하게 강물을 막아버렸다고 하자.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서울이 물바다가 될 것이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서울의 모습, 이것이 자연 악이다.
2) 형이상학적 질서
형이상학은 본질과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래서 숫자를 가지고 예를 들어보자.
2 + 3 = 5다. 그러니까 ‘2’라는 어떤 숫자가 ‘3’이라는 어떤 숫자와 합쳐지면 ‘5’라는 숫자가 되는 것이 정상적인 질서라는 거다. 그런데 2 + 3 = 10이라면, 이것은 분명 올바른, 정상적인 답이 아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무엇인가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하는 잘못을 말한다.
3) 윤리 질서
예컨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윤리, 도덕적인 질서가 있다. 그런데 이 질서를 무시하고 어기게 되면, 그것이 곧 윤리, 도덕적 죄악이다.
결론적으로, 본래부터 창조된 모습 그대로 제자리, 제 모양대로 있어야 ‘보시기에 좋았을 텐데’ 그 본래의 질서가 깨지고 파괴되어 ‘보기에 안 좋게’ 되어 버린 이 세상, 이렇게 ‘보기에 안 좋은 것’, 한마디로 이 ‘나쁜 것’을 ‘악’이라고 말한다.
○ 원죄에 대하여
• 하느님께서 맨 처음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던’ 이 세상, 그리고 죽지 않고 아무런 고통도 없이 오래오래 영원히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된 인간, 그런데 그 인간이 왜 죽어야만 하고, 병들고 굶주리고 온갖 고통을 당하며 불행해야만 하는가? 이 역시, 뭔지는 몰라도 뭔가 큰 사고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3가지 질서 가운데 어느 것이 잘못된 것일까?
• 앞에서 말한 3가지 질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윤리 질서다. 윤리 질서란 사람이 자연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창조주 하느님에 대해서 지켜야 할 질서를 말한다. 이 질서를 잘 지켜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큰 질서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질서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사회의 온갖 죄악이나 현재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되는데, 이 뭔가는 바로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께 대하여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질서를 깨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최초의 윤리 죄악을 일컬어서 우리는 그것을 ‘원죄’라고 말한다.
• 원죄는 어떤 것인가?
원죄는 최초의 조상인 원조들, 곧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를 말한다. 성경에 의하면, 그들이 지은 죄는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선악과를 따먹은 것, 그것이 그들의 죄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의 죄인가?
<교리서> 397항은 원죄를 ‘인간의 첫 범죄’라고 규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악마에게 유혹을 받은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창조주를 향한 신뢰가 죽게 버려두었으며, 자신의 자유를 남용함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첫 범죄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 뒤의 모든 죄는 하느님에 대한 하나의 불순종이 되고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첫 범죄는 한마디로 ‘불순종’(로마 5,19) 때문인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고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한 죄, 그리고 그 이유는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 창세기는 이렇게 말한다.
(창세 3,4-6)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왜 하느님은 죄짓는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처음부터 아예 죄를 짓지 않도록 창조했더라면 좋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선악과라는 나무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그런다.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인간을 모욕하는 말이다. 인간을 동물과 똑같이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으며, 판단 능력, 자유의지가 없으므로 그들이 하는 행동에는 선도, 악도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다. 그래서 생각하고 판단해서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안 따먹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따 먹는 쪽을 선택했다. 하느님의 뜻을 어긴 것, 이것이 죄다.
그래서 <교리서> 396항에서는 원죄를 ‘자유에 대한 시험’이라고 규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고 당신과 친교를 이루게 하셨다. 영적 피조물인 인간은 하느님께 자유롭게 순명함으로써만 이 친교를 누리며 살 수 있다.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는 금지령은 이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
• 그렇다면 원죄는 어떤 결과들을 가져오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가톨릭 교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399항) “성경은 이러한 첫 불순종의 비극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는 곧 원초적 거룩함의 은총을 잃는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특권에 집착하시는 분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400항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원초적 의로움으로 누리던 조화는 파괴되었으며, 육체에 대한 영혼의 영적 지배력이 손상을 입게 되고,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갈등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들의 관계는 탐욕과 지배욕으로 얼룩지게 되었다. 피조물들과 이루는 조화는 깨졌다. ...... 이 불순종의 사건을 두고 인간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분명히 예고한 결과가 마침내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죽음이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원죄의 결과는 원조들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다. 원죄로 인해 인류는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잃어버림으로써 죄와 죽음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나아가 인간 본성이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지만, 죄로 기우는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이를 ‘탐욕’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교리서> 401항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첫 범죄 이후로 이 세상에는 죄가 범람하게 된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형제 살해를 비롯하여, 죄로 말미암은 전반적인 타락이 이어진다. ......”
이렇게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하느님의 원초적인 의로움과 거룩함을 상실한 상태로 태어나게 됨으로써 또다시 죄를 짓게 되는, 그리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원죄는 우리가 ‘범한’ 죄가 아니라 ‘짊어진’ 죄이며,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죄의 ‘상태’라고 말한다. 그리고 원죄는 모방이 아닌 번식으로 인간 본성과 함께 인류에게 대대로 전해진다.
※ 모방이 아닌 번식으로 :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짓는 죄가 아니라, 전염되듯이 죄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 원죄 이후에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창조 작품을 망쳐버린 인간을 어떻게 하셨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하여 상처를 받게 된 인간을 위하여 무언가를 시작하셨는데, <교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410항) “인간이 타락한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버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를 부르시어 악을 이기고, 타락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리라는 것을 신비로운 방법으로 말씀하셨다. ......”
그것이 창세기 3,15의 말씀이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하느님께서 유혹자에게 하신 이 말씀을 교회는 인류에게 구세주를 약속하신 것으로 이해하여 ‘원복음’原福音이라고 부른다.”
※ 원복음 : 악마와의 싸움에서 인류가 승리할 것임을 처음 예고한 것이어서 이렇게 부른다.
○ 인간에게 복음은 무엇인가?
우리말 복음福音은 ‘복된 말씀’이라는 뜻이고, 서양말 복음euangelion이라는 말은 원래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교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보내 주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며,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해 주신 그분의 구원 은총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복음 선포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선포”,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며, 그분이 이루신 구원을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우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세상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앞으로 살펴보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창조 업적과 구원 업적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았으면 한다.
○ 창조 업적과 구원 업적은 어떤 관계인가?
이에 대해 <교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창조 업적은 구원 업적으로 완성된다.”
무슨 말인가?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통해 창조의 완전한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성자의 파스카로 이룩된 구원 업적을 ‘새로운 창조’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새로운 창조 안에서 만물은 그 충만한 의미, 그 완전한 의미를 찾게 된다.
※ 창조 업적 : 흔히 창조 사업이라고도 하는데, 하느님께서 한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신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 구원 업적 : 흔히 구원 사업이라고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서는 창조와 구원이 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당신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렇게 창조하신 이 세상이 그 목적을 다 이루지 못했으니 새로운 창조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창조가 바로 구원 업적이니 이 구원 사업을 통해 원래 목적하던 창조를 완성하게 된 거라는 뜻에서 창조와 구원은 한 사건이 분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