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다(11.1-11.7)

저녁노을의 글
2022-09-12 20:03:52 조회(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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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에서 복음사가 요한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표징을 일곱 째로 보도하는데, 그것이 라자로의 소생 사건이다. 이 장에서는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 소생 사건의 여파로 예수님의 운명까지 결정되어 버리는 줄거리가 긴박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키시는 사건은 그분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것 같아도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당신의 부활을 믿게 하기 위한 표징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때마침 파스카 축제에 참가하려고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다인들 사이에서 그분의 명성이 더욱 치솟았기 때문에 사두가이 유다인들은 그분을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라자로의 집이 있었던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도 아주 가까웠으니, 소문이 퍼지기에도 좋은 사정이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이런 낌새를 미리 눈치채고 계셨고, 제자들 중에서는 오직 토마스만이 눈치채고 죽을 각오를 하자고 동료들에게 권유하였다. 그러니 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당신 부활의 영광을 제자들과 유다인들에게 미리 알리기 위해서는 일으키셔야 했던 기적이 바로 라자로의 소생 사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부 교부들이 이 사건의 이름을 ‘라자로 부활 사건’이라고 부르고 있으나(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테오도루스 등), ‘라자로 소생(蘇生) 사건’이라고 불러야 맞다. 부활은 예수님을 필두로 하여 비로소 가능해 진 것으로서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소생은 다시 살아났더라도 수명이 다하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 라자로처럼 죽은 사람을 다시 살아나게 하신 기적 사건이 공관복음서에서도(나인 과부의 외아들 소생 기적에 관하여, 루카 7,11-17; 야이로 회당장의 딸의 소생 기적에 관하여는, 마르 5,21-43; 마태 9,18-26; 루카 8,40-56), 요한복음에서도(왕실 관리의 아들의 소생 기적에 관하여, 요한4,46-54) 소개되었는데 모두 다 소생 기적이라고 부르지 부활 사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다만 모든 소생 기적 사건들이 예수님께서 생명의 권능을 지니신 분임을 증명함으로써 당신 부활을 일깨워주는 표징이지만 이들 가운데 이 라자로의 소생 사건이야말로 가장 의미있고 위험한 상황에서 실제로도 그분의 죽음을 가져온 중대 사건으로서 그만큼 그분 부활의 영광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어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도하기에 앞서서 제11장에 자세하게 보도하였다. 그러므로 교부들이 이 사건을 두고 굳이 ‘라자로 부활’이라고 부르고 있는 의도도 소생 사건임을 몰라서라기보다는 이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예표임을 강조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11.1. 라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시다(11,1-5)

  라자로([그] Λαζαροσ. [영] Lazaros)는 ‘하느님께서 도우셨다’는 뜻이 있는 엘르아잘(El-azar)에서 유래한 히브리어 이름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에 사제 아론의 아들도 엘르아잘이었고(탈출 6,23), 후기 역사에서도 마카베오 전쟁 당시 박해에 용감하게 맞섰던 구십 노인 엘르아잘이 있다(2마카 6,24). 그만큼 흔한 이름이어서 라자로라는 이름은 루카 복음사가가 인색한 부자의 비유를 소개할 때 등장하기도 한다(루카 16,19-31). 그리고 라자로의 여동생 중 언니인 마르타는 ‘주인’이란 뜻이 있는 아람어 마르(Mar)의 여성명사이고, 그 동생인 마리아는 히브리어 미리암(Mirjam)의 그리스어 표현이다(김근수). 

 

  이들 가족이 살던 베타니아는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와는 이름이 같지만 다른 곳이다(요한 1,28; 10,40). 유다 지방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겨우 2-3 km 떨어진 동네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보내신 최후의 일주일 동안에도 낮에는 도성 안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다가 밤에는 나와 머무셨던 곳이었다(마르 11,11ㄴ). 베드로가 살던 카파르나움이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시던 갈릴래아 지방에서의 거점이었다면, 라자로가 살던 베타니아는 그분이 생의 마지막 주간에 성전 활동을 위한 예루살렘 지방에서의 거점이었던 셈이다. 아래는 이 라자로 소생 기적 사건을 바라보는 교부들의 전반적인 소묘(素描)이다. 

 

  “‘라자로’라는 이름은 ‘도움 받은 이’라는 뜻이다(이시도루스). 라자로의 부활은 주님께서 창조주로서 당신의 피조물을 일으키셨다는 점에서 그분의 기적 가운데에서도 특기할 만한 사건이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은 라자로만 아니라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름도 밝힌다. 라자로를 애도하는 두 자매의 슬픔은 동방 정교회 전례에서 성지주일 바로 전날인 ‘라자로 토요일’ 전례의 핵심이다(로마누스). 요한은 라자로 이야기를 시작하며,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일을 마리아의 신심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증거로 강조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세부 사항에서 요한과 루카의 기록이 일치하는 점이 많지만(아우구스티누스), 이 마리아가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 나오는 창녀 마리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두어야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라자로와 그의 누이들 곁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이 질병이라는 수단을 이용하여 제 뜻을 펼칠 수 있었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마리아와 마르타가 예수님께 자신들의 오빠요 예수님의 친구가 병들었음을 알린 일은 그리스도의 친구라도 고난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라자로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되살리셨다고 복음서가 전하는 일들 가운데에서도 특기할 만한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라자로 누이들의 청을 받으시고 곧바로 그리고 가시는 대신 부활의 표징이 충만하게 빛나도록 하시고자 죽음이 라자로를 완전히 지배하도록 두셨기 때문이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그러나 라자로의 누이들은 라자로를 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하는 큰 믿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한때 사랑하고 마는, 다시 말해, 사랑하는 이를 버리는 분이 아니라고 믿었다(아우구스티누스). 라자로의 죽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었지만, 그를 병들게 한 것은 하느님이 아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라자로의 부활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을 위한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라자로의 죽음에서 예수님의 영광은 그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리아와 마르타, 라자로는 참된 위로와 치유를 가져다주시는 분께 사랑받은 이들이다(아우구스티누스).”

 

  라자로 소생 사건에 대한 교부들이 묘사한 밑그림에 남은 여백을 보충하자면 이러하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에서 복음선포 일정을 바삐 다니시다가 지치실 때면 제자 일행과 함께 베타니아의 라자로 집에 들러서 쉬실 만큼 라자로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 그가 중병에 걸려 앓아 누웠으니, 두 자매가 예수님께 ‘사랑하시는 이’(요한 11,3)라는 표현을 써 가며 하며 바삐 인편으로 전갈을 보낸 것은 당연하다. 

 

  다른 소생 사건의 경우라면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도  예수님께는 어렵지 않았으련만(요한 4,43-54,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심), 이번에는 그분의 반응이 달랐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1,4ㄴㄷ) 하고 왕진(往診)하여 치유해 주시기를 사양하신 것이다. 그러시며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11,6). 이 머무르심에 이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의도가 묻어난다. 

 

  특기할 만한 것은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견해이다. 루카복음서에서는 자기 죄를 씻기 위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가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는다는 대목이 나와서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와 혼동하기 쉬운데(루카 7,36-50), 이 두 사람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일 뿐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워낙 흔했다. 예수님의 어머니의 이름도 마리아였고, 막달라 출신으로 일곱 마귀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나중에는 부활의 첫 증인까지 된 여인도 마리아였으며, 사도 야고보의 어머니도 마리아로 불리었다(루카 24,10). 

 

  그런데 요한 복음사가는 루카가 동명이인인 마리아가 보여준 이 행동을 라자로의 여동생인 마리아가 한 것으로 보도하였다(요한 12,1-8). 그런데 행동 동기가 판이하게 다르다. 루카복음서에서는 마리아가 자기 죄를 용서받기 위해 향유를 부어 드렸다면, 요한복음서에서는 오빠 라자로를 살려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는 한편 그로 인해 죽을 수도 있는 곤경에 빠지게 된 예수님의 장례를 향유 부음의 행위로써 미리 치루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교부는 두 마리아가 동명이인으로서 다르다고 보고 있으나, 요한 복음사가는 사람은 같은데 동기가 다르다고 설명하였다. 즉, 향유 부음의 행동동기가 죄를 용서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빠를 살려주신 데 대한 감사와 이로 인해 박해를 받아 죽음을 맞이하게 된 메시아의 장례를 미리 치루는 것이라는 것으로 바로 잡은 것이다. 

 

  교부들의 주해는 후대의 어느 성서주석가들의 해석보다 더 권위가 있지만, 복음사가의 기록보다 더 권위가 있을 수는 없다. 또한 복음사가들 가운데에서도 루카는 사도 바오로의 제자 출신이지만 요한은 예수님의 직제자 출신으로서 공생활 초기부터 끝까지 목격한 최측근이다. 그러니 향유를 부은 이야기의 출처에 대해서도 우리는 루카의 본문보다 요한의 본문에 더 우선순위를 두어 해석하는 게 좋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또 다른 죄녀 마리아가 있을 수도 있으므로 루카의 편집이 의미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동명이인인 또 다른 마리아가 같은 행위를 다른 동기로 했을 개연성도 있기 때문이다. 

 

11.2. 라자로에게 가는 일을 미루시다(11,6-16)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라자로가 죽은 날짜는 예수님께 그의 동생 자매가 오빠가 위중하니 와서 고쳐 주십사 하고 전갈을 보내온 바로 그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후에도 이틀을 더 지체하셨고 베타니아까지 가는 데 또 하루가 걸렸을테니 라자로를 되살리는데 나흘이 걸린 것이다(11,17). 이렇게 나흘이나 미루신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라자로가 죽기 전에 고쳐 주는 일이야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예수님으로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앞두고 이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제자들에게 심어주시려고, 라자로가 죽기를 일부러 기다리셨다가 되살리신 것으로 볼 수 있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말하자면 라자로 소생 사건은 예수 부활의 성사 기능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라자로가 위중하다는 전갈을 받으시고도 베타니아로 가시기를 미룬 이유이다. 

 

  “예수님께서는 왜 곧바로 유대아로 가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나? 라자로가 참으로 죽었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당신께서 죽음을 정복하시기 전에 죽음이 전권을 행사하도록 두시려는 뜻이 아니겠는가?(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예수님께서는 이틀이 지나서야 당신 제자들에게 바로 얼마 전에 유대인들이 당신께 돌을 던지려고 한 유대아로 돌아가자고 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자신들과 예수님의 안전에 대한 걱정이었다. 아직 주님께 대한 믿음이 모자랐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감히 하느님께 충고하는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된다는 말씀으로 꾸짖으신다. 이는 깊은 상징을 담은 말씀으로서, 낮은 그리스도를, 열두 시간은 열두 제자를 가리킨다(아우구스티누스). 또는 열두 시간은 ‘해’, 곧 영적 낮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열두 성조나 열두 사도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오리게네스). 그리스도께서는 낮 동안에는 그들이 아직 빛을 받을 시간이 있으므로, 지금은 ‘해’가/‘아들’이 유대인들에게서 물러날 때가 아님을 알리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리스도의 빛이 없으면 우리는 악마의 어둠 속에서 걸려 넘어질 뿐이다(아타나시우스). 그러나 곧바르게 서서 걷는 이들은 낮에 다니는 이들처럼, 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 이틀이 지나서야 예수님께서는 “다시 유다로 가자.”고 제자들에게 제안하셨다(요한 11,7). 그러자 제자들은,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고 말리려 들었다(요한 11,8). 그런데 토마스는 스승을 말리려던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되려 독촉하였다. 

 

  이같은 제자들 사이이 불협화음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교부도, 스승과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것이고 주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좀 더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가 더 숨겨져 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져 죽이려고 든 것은 두 번이었고(요한 8,59; 10,31), 두 번 다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였다. 그런데 이 무렵이 바로 파스카 축제가 열리기 직전이었고,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유다인들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모여 드는 때였다. 평소에는 시리아의 카이사리아에 머물던 유대 총독도 이 파스카 축제 때만큼은 군대를 거느리고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군중 봉기에 대비하러 예루살렘에 와 있곤 했다. 

 

  그러니까 토마스가 눈치를 챈 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근처의 베타니아로 가서 라자로를 다시 살렸을 경우 그 소문은 순식간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온 유다인 군중에게로 퍼져나갈 것이고, 그분을 메시아로 믿게 된 군중은 그분을 앞세워 로마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킬 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로마 군대가 진압하려 들 것이 뻔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나머지 다른 제자들이 걱정한 대로, 얼마 전에 그분의 가르침 때문에 유다인들이 돌을 던지려 해서 위험할 뻔 했던 상황과는 급이 다른 위험이라 하겠고 훨씬 더 위태로운 상황으로 보였던 것이다. 스승의 목숨이 한낱 돌을 던지려고 했던 유다인 군중으로부터가 아니라 중무장한 로마 군대로부터 위태로울 수 있는 위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의 말이,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세게(?) 나왔던 것이다. 또 실제로 일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 최고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사두가이 유다인들이 예수님은 물론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결의했는가 하면(요한 12,9-11), 사형집행권을 행사하던 로마 총독의 권세를 빌려 사형을 언도하게 만들었으며 이런 음험한 음모를 알면서도 총독 빌라도는 비겁하게도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유다인들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요한 18,16).

 

  이런 전후 사정을 파악한 연후에라야 예수님께서 마치 선문답(禪問答)하듯이 하신 말씀이 이해될 수 있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요한 11,9ㄴ-10). 이에 대해 교부들은 빛이시며 따라서 낮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탓이며, 적대적인 유다인들로부터 물러설 때가 아니며 그래서 라자로에게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주해하였다. 

 

  하지만 이 말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서 낮과 밤에 관한 말씀은 유다인들에 대해서라기보다는 라자로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즉, 예수님께서 라자로와 함께 계셨더라면 영적인 낮이기 때문에 라자로가 죽을 병에 걸릴 일도 없었을텐데, 그렇지 못하여 라자로가 밤을 지내야 했으므로 죽을 병에 걸린 것이고, 그런 라자로를 두고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이제 자고 있던 그를 깨우러 가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인다. 이런 깊은 뜻을 알아 듣지 못한 제자들이 엉뚱하게도,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요한 11,12) 하는 대꾸를 한 것으로 보인다. 요한 11,11 이하의 본문에 대한 교부들의 주해에서 이런 의미들이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자고 있을 뿐이라고 하신 것은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약속이다.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라자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되살리기 위해 그리고 가실 필요가 없었지만, 당신께서 그 기적을 행하신 사실을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직접 가시기로 하셨다(히뽈리투스). 제자들은 이 말씀도 예수님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 가운데 하나라고 여겼으며(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라자로가 자고 있다는 말의 뜻을 잘못 이해했다. 그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잠’인지 깨닫지 못했다(로마누스). 그들은 곧, 라자로가 죽어서 본디 상태인 흙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는다(포타미우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되살리러 가시려 한다는 말씀을 아직 제자들에게 하지 않으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당신께서 받은 것은 치유 요청이지만, 당신 앞에서 숨어 있지 못하고 쫓겨날 것은 죽음임을 아시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 보통 의사들과 달리, 라자로의 의사는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확실히 하고자 라자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시리아인 에프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기 위해 라자로의 죽음을 이용하신다(히뽈리투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에게 가기를 미루신 것은 그의 죽음이 확실히 일어나도록 하신 것이며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미리 가셨더라면 당신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라자로를 치유하셨을 테고, 그러면 더 큰 부활의 기적이 일어날 기회가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은 것을 아시자 그에게로 가시기로 결정하고, 토마스는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큰소리치며 따라나서려 한다. 토마스가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참된 권능을 알았을 수도 있지만, 그의 이 말은 멋모르는 대담함에서 나온 발언(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이거나, 나중에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열정적이 되지만, 지금은 소심한 이의 말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어쩌면 토마스는, 예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기도 모르게 깨달았을 수도 있다(오리게네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했던 토마스 발언의 진의에 대한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멋모르는 대담함에서 나온 발언”이라거나(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소심한 이의 말”(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이라고도 하고, “예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기도 모르게 깨달았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기도(오리게네스) 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할까? 우리는 이미 조금 앞에서 그 발언의 배경을 파스카 축제를 앞둔 예루살렘의 긴박한 정세에서 찾았고, 또 인과관계로 따져 보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라자로를 소생시킨 행위로 말미암아 앞당겨졌다. 물론 예수님은 이 흐름을 알고 처신하셨으며, 토마스가 제자들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이 흐름에 대한 감을 잡고 이 발언을 했다고 본다. 

 

11.3. 마르타가 부활 신앙을 고백하다(11,17-27)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던 베타니아의 돌무덤에 가셨다(11,17). 이미 라자로의 빈소에는 많은 유다인 문상객들이 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스카 축제가 임박한 때여서 예루살렘에 이미 많은 축제 순례자들이 운집해 있던 터에,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이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음을 알려 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나흘이 지났으면, 라자로의 시신은 이미 무덤 안에서 썩기 시작하는 비참한 상황에 있으며, 이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게 하는 증거다(포타미우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3킬로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뜻하셨다면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그분께서 오시지 않은 까닭에, 많은 사람 – 그리스도의 적수들까지 – 이 그분의 친구인 마리아와 마르타를 위로하러 왔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을 맞이한 사람은 마르타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에서 마르타가 지닌 신앙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마리아는 그분을 맞으러 나가지 않았는데, 다른 곳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여기서 마리아는 관상생활을 상징하는 반면 마르타는 행동하는 삶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오리게네스). 그렇지만 단순히 마르타가 그리스도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리스도께 위로받고 나서야 자기 동생을 떠올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았던 사실에 낙담했음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실로 그곳에 계셨다(크레타의 안드레아스). 마르타가 그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이런 무지가 믿음이 모자람을 뜻하지는 않는다(크레타의 안드레아스). 마르타는 예수님은 무엇이 최선의 길인지 아신다고 믿으며(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르타를 더 높은 진리로 이끄시고(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르타는 믿음의 투쟁을 한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당신께서 뜻하시기만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오빠가 되살아날 수 있음을 아시는(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약속에 대한 마르타의 믿음을 시험하신다(테오도루스).”

 

  억척스럽게 봉사 활동에만 수완이 있을 것 같은 마르타도 깊은 신앙심을 지니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계셨더라면 오빠 라자로가 죽지 않았으리라고 믿었으며, 무엇이라도 그분이 청하시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도 믿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요한 11,21ㄴ-22). 하지만 정작 자신의 오빠가 살아날 수 있는 때는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 부활 때라고 믿고 있었다(요한 11,24).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전통적으로 신심깊은 유다인들이 지니고 있던 바로 그 신심을 마르타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한계는 바로 거기까지였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 유명한 예수님의 선언이 나왔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ㄴㄷ) 이 말씀에, 라자로 소생 사건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께서 때로 지체하고 때로 제자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감행하신 이유이자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전통적인 부활 신심에 머물러 있던 마르타가 즉시 이 말씀을 알아 듣고 이제껏 간직하고 있었던 한계를 뛰어 넘어 새로운 신앙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ㄴ). 이 신앙고백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던 바이기도 했거니와, 또한 요한 복음사가가 이 제11장을 주도면밀하게 편집하여 보도하고 있는 의도가 담겨 있는 메시지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하고 말씀하신 문장은, 부활을 마지막 날 일어날 사건으로 인식하고 고백한 마르타의 미래형 시제 문장과는 달리, 현재형 시제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부활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이라는 막연한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현재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뜻이 된다. 마르타의 신앙고백은 당시 유다인들에게 일반적으로 퍼져 있던 바였고, 이는 육신이 죽은 다음에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는 마지막 날에 그것도 영혼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막연한 상상이라서 굳이 신앙이랄 것도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습적 부활신앙을 넘어서서 라자로 소생 기적으로 현재에 일어나는 생생한 사건으로 부활신앙을 일깨워주려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는 이러한 일깨움이 얼마나 중요하셨던지, 그 사건이 당신의 죽임을 불러 올 것임을 충분히 예감하셨으면서도 감행하셨다. 

 

11.4. 마리아도 예수를 맞으러 나오다(11,28-37)

  루카복음서에 소개된 대목(루카 10,38-42)에서는 언니인 마르타가 동생 마리아더러 자신이 하던 시중드는 일을 함께 하도록 예수님께 조르는 모양새로 나오지만, 여기서는 동생인 마리아도 예수님을 마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모양새를 보였다(요한 11,28). 이래서 마르타와 마리아, 이 자매의 본 모습을 파악하려면 두 본문을 다 같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맞이한 마리아는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관상까지 하던 그 깊이는 어디로 갔는지,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32) 라고 언니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친오빠의 상중이라 경황이 없음을 감안하면 이해하지 못할 반응은 물론 아니다. 이 반응에 대해 예수님도 언짢아하시기는커녕 함께 우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신 예수님의 반응에서, 라자로에 대한 우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교부들도 이에 대해 일반적인 주해를 전해 주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부르셨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온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그분에 대한 마리아의 뜨거운 사랑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테오도루스). 마치 섭리에 따른 일인 듯 유대인들이 마리아를 따라가고, 그리하여 그들도 바로 일어날 기적의 증인이 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마리아와 예수님과 함께 그곳에 있는 모든 이가 울지만 오빠를 잃은 마리아는 더욱 애절하게 운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예수님을 뵌 마리아의 첫 반응은 마르타와 같았지만,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림으로써 더욱 격렬한 감정을 드러낸다(테오도루스).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예수님도 라자로의 죽음에 마음이 산란해지셨다(히폴리투스). 요한은 무덤에 도착하여 탄식하는 예수님을 묘사하며 그분의 슬픔 – 어쩌면 죽음에 대한 분노(디아도쿠스) –을 강조한다. 그러나 요한의 수난 기사에서는 예수님의 인성보다 신성이 훨씬 뚜렷하게 드러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으로 가실 때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고 물으신다.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무덤으로 따라오게 하여 증인으로 만드시려는 의도였다(크로마티우스). 군중은 예수님께서 애도하러 오셨다고 생각했지만, 그분은 눈물 흘리는 마리아와 마르타를 가엾이 여겨 오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분은 죄인인 우리도 이처럼 가엾이 여기신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지만 탄식하지는 않으셨다(히폴리투스). 어쩌면 그 눈물은 라자로가 되돌아올 것을 알기에 흘린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을까?(포타미우스). 또는 죽을 운명으로 창조된 이들의 유한성이 안타까워 하느님께서 눈물 흘리신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주님은 우리가 눈물 흘리도록 가르치시고자 눈물을 흘리셨다(아우구스티누스). 우리가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고자 눈물을 흘리셨다. 부활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애도는 도가 넘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셀레우키아의 바실리우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본성 덕분이다(이레네우스). 그분의 눈물은 라자로의 육체라는 씨앗이 다시 생명으로 싹트게 하는 빗물이다(시리아인 에프렘).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을 가엾이 여겨 우셨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직 라자로를 되살리지 않으신 까닭에 예수님의 눈물에서 동정심이나 권능이 아니라 나약함만을 보는 이들도 있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11.5.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다(11,38-44); 일곱째 표징

  드디어 이 제11장 라자로 이야기의 정점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어서 묻힌 무덤 앞에 서신 것이다. 그 첫 마디는, “돌을 치워라!”(요한 11,39)였다. 죽은 시신을 가두었던 그 돌은 이제 소생의 현장을 가리키는 표지돌이 될 것이었다. 이 말씀을 들은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 하고 말리듯이 만류를 하고 나섰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믿는다고 고백은 했지만, 설마 그 능력으로 이미 죽어 나흘이나 지난 자신의 오빠를 되살려주실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ㄴ) 하고 마르타를 나무라듯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마르타의 모습에서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본다. 

 

  “병이나 죽음 같은 불행한 일은 우리 주님까지도 탄식하게 한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 멀리 계실 때는 탄식하셨지만, 무덤에 오셔서는 감정을 억누르셨다(오리게네스). 예수님의 탄식은 당신께서 속으로 힘든 싸움을 하고 계시다는 표시였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 탄식하신 것은 무엇이 잘못되어 옳지 않을 때 믿음이 탄식하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무덤, 곧 라자로가 풀려날 감옥에 도착하신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동굴 입구의 돌과 시신의 냄새는 모두 그 죽음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말해 주는 증거다(히폴리투스). 라자로의 시신에서 냄새가 났다는 사실은 그 부활의 놀라움을 더욱 드러낸다(테오도루스). 라자로 시신의 냄새를 우의적으로 해석할 때 – 우의적 해석이 역사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 죄와 죽음, 회개와 부활이 서로 대응한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돌을 치우라고 명령하신다. 마르타가 끼어들어 말리지만(오리게네스) 곧바로 믿음에 굴복하고 만다. 그 믿음은 살아 있는 마르타가 죽은 라자로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사람들이 돌을 치우자 ‘생명의 곳간’에서 죽음의 무덤으로 다가가신다(아타나시우스).”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이 치워지자, 예수님께서 가슴에 묻어 두셨던 기도를 올리셨다. 먼저 하느님께 청원하는 대신 감사하는 지향으로 시작하시고는 이어서 청원의 지향도 분명하게 말씀드리셨다(11,41ㄷ-42). 그 지향이란 군중으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신 것이다. 즉 생명을 되살릴 수 있는 권능이란 사람에게서는 올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서만 행사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하느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려주시면 장차 당신도 죽임을 당한 후에 부활하실 것임도 믿을 수 있기를 바라는 지향이셨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예수님으로서는 당신이나 우리의 부활을 믿게 하는 일이 그렇게도 중요했다. 그래서 이에 관한 교부들의 주해가 길고 자세하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심으로써 우리의 눈길을 나날의 관심사에서 저 위에 있는 것으로 옮겨 놓으신다(오리게네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기도를 바칠지 아버지께서 이미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아시기에 청원의 기도가 아니라 감사 기도를 바치신다(오리게네스). 주님의 기도는 당신이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을 군중에게 분명히 보여 주며(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정성을 다하여 기도드리는 이들은 청하는 것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오리게네스)”.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사람들의 비난 때문에 무덤은 예수님의 의로움을 입증하는 정의의 법정이 된다(히폴리투스). 예수님의 기도는 저승의 손아귀에서 라자로를 풀어 줄 것을 요구하며 지옥의 문을 두드린다. 저승은 하늘에 대고 호소하지만 삼위일체께서 라자로를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심에 따라 그 호소는 헛일이 된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라자로의 친구인 주님께서 그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신다(안드레아스). 라자로를 간절히 부르는 목소리가 그를 감옥에서 풀어 준다(헤시키우스). 그것은 자기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크고 비범한 목소리다(아폴리나리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지명하여 부르지 않으셨으면, 예수님의 위대한 권능이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이를 일어나게 했을 것이다(막시마누스). 그 목소리는 창조 때 말씀하신 목소리이며(아타나시우스), 만인 부활 때 무덤 속의 우리를 부르실 목소리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 기도로 라자로를 되살리신 것은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임을 보여 주는 한편 당신 자신의 권능을 보여 주신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라자로가 들은 ‘이리 나오라’는 명령을, 죄를 지은 이들의 양심도 듣는다(大 그레고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라자로를 감싼 아마포가 풀리는 것은 우리가 죽음의 상태인 죄에서 풀려나는 것과 같으며(이레네우스, 오리게네스), 교회와 성직자들은 죄인들을 죄에서 풀어 주는 임무를 받았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의 말씀으로 풀려날 때까지 자기 무덤에 갇혀 있는 라자로 같은 사람이 많다(오리게네스). 라자로의 부활은 죽음이 자신의 나라를 영원히 잃어버렸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셀레우키아의 바실리우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돌아오심을 라자로와 함께 축하하는 부활 잔치 때 라자로가 자신이 이미 맛본 것을 위해 건배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예수님은 죽은 이를 깨우는 생명과 기쁨의 목소리다(아타나시우스). 그분은 예나 지금이나 죽은 이들이 아닌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이레네우스). 그분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고한 바 있는 우리 부활의 보증이시다(『사도 헌장』).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이들은 무덤 앞에서 울 필요가 없다(로마누스). 믿는 이들은 비록 그 육체는 죽을지라도 결코 죽지 않는다(메토디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세상과 마찬가지로 슬픔에 정복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기쁜 희망과 안전을 보장해 주신다(키프리아누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되살리신 일에서 우리는 만인 부활을 엿볼 수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믿는다면, 비록 죽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아우구스티누스). 이런 믿음 고백이 바로 예수님께서 마리아와(오리게네스) 우리에게서(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듣고 싶어 하시는 고백이다. 마르타가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슬픔 때문일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대신 마르타는 베드로와 나타나엘이 그랬듯이 그분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며(테르툴리아누스) 아들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부활에 대한 믿음이다(아우구스티누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외치셨다. 죽어 천으로 꽁꽁 감겨 있는 라자로는 물론 이를 지켜보던 군중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다소 흥분되신 어조로 아주 큰 소리로 외치셨을 것 같다. 그러자 죽어 무덤에 묻혀 있던 라자로가 걸어 나왔다! 손과 발이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로 나왔다. 그가 되살아났음을 사람들에게 확인시키시려는 듯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요한 11,14ㄴ).

 

  루카복음서에서도 라자로의 여동생 자매인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온다(루카 10,38-42). 그런데 루카가 전한 이 이야기 안에는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봉사 시중에는 편을 안 들어주시고 마리아의 말씀 시중에만 편을 들어주시는 것처럼 알아들을 수 있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 루카의 보도만 읽으면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보다 마리아를 더 편애하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와 나누신 대화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언급한 루카의 보도는 요한 11,1-44에 나오는 두 자매의 이야기를 같이 읽어야 균형있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마리아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느라 울기만 하고 있었으나(요한 11,32), 마르타는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부활과 메시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어서 마르타의 신앙 수준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요한 11,24.27). 단지 그는 그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는 몰랐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때를 앞당기시고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요한 11,25-26)을 새삼스럽게 말씀하시며 마르타에게 이를 믿느냐고 물으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대화에서 나타나는 바는 적어도 마르타가 말씀을 통한 이해도 없이 봉사 활동에만 몰두했던 인물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교회 전승에서는 언니 마르타는 예수님과 제자 일행을 수발하는 봉사활동에 탁월했던 여인으로,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드리면서 관상에도 능하게 된 여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교회 전례력에서 성녀 마르타의 기념일이 배치되어 있는 반면에 마리아의 기념일은 따로 정하지 않았다. 마리아에 치우친 듯한 성경의 보도와 균형을 맞추려는 교회의 배려가 아닐까. 그래서 두 자매의 삶과 신앙을 종합해 보면, 봉사 활동과 관상 기도, 이 두 가지는 예수님의 삶에서도 그러하듯이, 양자택일할 문제가 아니라 그 균형과 순환의 리듬으로 보아서 신앙인들 누구나 본받아야 할 ‘실상 필요한 한 가지’ 질서(루카 10,42)라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과 마르타의 대화는 마르타가 지닌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다. 라자로 소생 사건에 담긴 깊은 의미와 성격까지도 드러내어 준다. 절친했던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으시고도 즉시 움직이지 않으셨던 이유, 또 죽었다는 전갈을 받자마자 즉시 움직이신 이유가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드러나고 있다. 라자로 소생은 예수님께서 당신 부활과 또 이를 믿는 이들의 부활을 선포하시기 위해 일으키셨던 것이다. 워낙 중요한 메시지이다보니 평소와 같은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선포하시고자 일으키신 ‘사건의 비유’라는 뜻이다. 평소의 비유 이야기들은 과거에 이미 일으키신 기적 사건들을 소재로 삼아 말씀하셨다면, 이 라자로 소생 사건은 바야흐로  일어나려고 하는 생생한 사건을 소재로 하여 말씀하신 ‘현장의 비유’라는 뜻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 사건에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이 초래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으시켰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남다르다. 

 

11.6. 최고 의회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다(11,45-53)

  죽었던 라자로를 예수님께서 살리셨다는 소문은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군중들에게 삽시간에 퍼졌다. 그러자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 중 최고의회 의원들도 긴급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그분을 적대적으로 사찰해 오던 이 유다인들로서는 그전에 그분이 보여준 여러 기적들보다 죽은 이를 다시 살렸다는 이 기적 사건이 군중 안에서 파급될 폭발력이 두려웠던 것이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불씨가 당겨지기만 하면 금새 마른 풀로 가득 찬 들판 전체로 그 불이 번질 듯하게, 반로마 정서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결정적으로 확인한 군중이 그분을 앞장세워 이 파스카 축제 기간 동안에 무장 봉기라도 일으키면 어찌될 것인가? 이것이 최고 의회 의원들의 초미의 걱정스런 관심사였다. 군중에게서 그런 불길한 조짐을 읽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도 그런 정치적 계산에 따라서 이 일을 결행했을 것으로 간주하고는 벌써 반역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라자로가 되살아난 뒤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여전히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테오도루스). 이들이 이 기적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시샘이나 불신 때문(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이거나, 유대 신앙을 버리고 ‘변절’하면 로마인들의 공격을 불러올까 두려워해서다(오리게네스). 이런 행동은 그들의 건방짐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 주신 표징에 눈멀었음을 드러낸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권한을 지닌 분과 자신들이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분의 권능이 입증한 것에 눈감았다(오리게네스). 그들은 로마 체제 안에서 유지되는 자기들 나라의 한시적인 권한과 성전에 의지하며(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이 반역을 꾸민다는 터무니없는 고발을 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거룩한 곳과 나라를 파괴할지 모른다는 그들의 두려움은 그들의 대비책에도 불구하고 결국 현실이 되었다(오리게네스)”.  

 

  “카야파의 예언에 관해서는 따져 볼 점이 많다. 율법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지명하신 세습 대사제가 있어야 했는데, 어째서 카야파가 그해의 대사제였던가?(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 시절에는 대사제의 직책을 로마인들이 맡아 다룰 만큼 선정 과정이 썩어 있었다(아우구스티누스). 예언자의 공적 직무를 맡고 있던 카야파는 구약시대 발라암의 소행과 매우 비슷하게,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와 전혀 다른 악의적인 의도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올 좋은 점들을 선포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이는, 자신이 하는 말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이가 과연 영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더 근본적인 의문을 낳는다(오리게네스). 그러나 그가 예언한 것은 자신의 덕 때문이 아니라(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가 대사제의 직책에 있었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복음사가는 이어, 카야파의 예언이 카야파의 뜻과 달리 유대 민족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참조 요한 10장),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잃어버린 양 떼인 다른 민족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라고 풀이한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 예언이 이루어졌다(大 그레고리우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기대했던 식이 아니었다(오리게네스).”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요한 11,48). 최고의회가 소집한 긴급회의에서 대사제 카야파가 행한 이 발언은, 예수님은 군중이 봉기를 일으킬 계기를 제공했고, 만일 실제로 군중이 소요라도 일으키게 되면, 이미 파스카 축제 때에 맞추어 군대를 몰고 예루살렘에 와 있는 총독은 계엄령을 발동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나마 최고의회가 위임받고 있는 제한된 권한마저 박탈당하게 될 것이 카야파는 몹시 두려웠다는 뜻이다. 

 

  여기서 가능한 두 가지 해석이 다 소개되고 있다. 카야파는 이런 방향으로 일이 커지기 전에 예수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사태가 계엄령으로 번지는 것보다 민족의 안전 더 정확하게는 사두가이들의 안전에 더 낫다고 본 것이고(요한 11,50), 요한 복음사가는 그런 카야파의 의도와 상관없이 – 또는 그런 그의 악의적인 음모까지도 하느님께서 당신 섭리를 일으키실 도구로 쓰심으로써 - 그렇게 해서 일어나게 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부활로 이어지게 되면 유다 민족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시게 되리라는 것이었다(요한 11,51ㄴ-52). 아무튼 예수님께 적대적인 유다인들은 그동안의 갈등이 이제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진 상황에서 그분을 로마 총독의 사형집행권을 빌려서 죽일 결의를 할 반역 혐의를 찾아낸 것이다(요한 11,53). 토마스는 로마 군대에 의한 위험을 예상했었을 것 같은데, 실제로 다가온 위험은 동족인 사두가이 유다인에 의한 위험이었다. 그 당시까지 군중 봉기의 아무런 낌새도 없었고, 예수가 봉기를 기도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카야파의 머릿속에서 생겨난 사악한 상상 속 가능성을 근거로 하여 선제적으로 감행하려던 일종의 예비 검속(檢束)이었다. 

 

11.7. 광야로 물러가시다(11,54-57)

  하지만 이런 카야파의 얄팍한 술수를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요한 11,54). 에프라임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0여 km 떨어진, 유다 광야의 경계에 있던 고을을 가리키는 것 같다. 광야는 사람들의 소란을 피해 숨어 있기 좋은 장소였다(1열왕 19,4; 묵시 12,6). 머지않아 때가 되면(요한 12,12-1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될 터인데, 그때까지는 사악한 음모와 살벌한 경계의 눈초리가 번득이는 상황을 잠시라도 피해 있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예루살렘 도성 안에는 사방에 첩자들이 깔려 있었다. 이들이 조성하는 살벌함과 긴박함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미리부터 올라와 있던 유다인들을 더욱 긴장스럽게 만들었다. 이래저래 예루살렘 사람들은 더욱 예수님께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군중은 군중대로(요한 11,56),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또 그들대로 그분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요한 11,57).

 

  “요한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적대하는 자들 때문에 더 이상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셨다고 기록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나 불필요한 대립이라는 상황에 처했을 때, 때로는 적대 세력과의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는 편이 더 나은 방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에프라임이라는 고을로 물러가신다. 에프라임은 ‘풍요로움’이라는 뜻으로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임박한 죽음으로 교회에 가져다주실 열매를 상징한다(오리게네스)”. 

 

  “유대인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파스카는 세상의 죄를 없애심으로써 우리를 깨끗이 하시고(오리게네스) 우리가 먹도록 당신의 살을 내주시는(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참된 파스카 양 그리스도라는 실체의 그림자일 뿐이다(아우구스티누스).  군중은 예수님께서 축제 때 예루살렘에 오시기를 기다린다(테오도루스). 그러나 예수님을 잡으려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분을 찾지 못한다(오리게네스). 예수님을 기다리던 이들의 후손만이 지금도 그분을 찾을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에게 그리스도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만이라도 알려 줌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바를 하자(아우구스티누스).”

 

 

  이렇게 하여 제11장 라자로를 되살리신 이야기가 끝났다. 그리고 이 사건이 제1부 <표징의 책>을 마감하는 일곱 째 표징이니만큼 요한 복음사가가 제2장에서부터 이제까지 소개해 온 일곱 가지 표징 모두에 대한 정리를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표징 ⓵: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다(요한 2,1-11).

표징 ⓶: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시다(요한 4,43-54)

표징 ⓷: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요한 5,1-9)

표징 ⓸: 오천 명을 먹이시다(요한 6,1-15) 

표징 ⓹: 물 위를 걸으시다(요한 6,16-24) 

표징 ⓺: 태생소경을 고쳐 주시다(요한 9,1-12)

표징 ⓻: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다(요한 11,38-44) 

 

  이 표징들은 예수님께서 신적 능력을 발휘하신 기적들로서, 요한복음 제1장 서문에서 “어둠 속에서 비친 빛”(요한 1,4)이었으며,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이었다. 따라서 이 기적들은 별다른 설명이 붙지 않아도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어 오신 존재라는 메시지를 담은 표징이 되는 것이다. 이 표징들은 저마다 고유한 상황과 사연을 지니고 당사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 주었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일들은 자연법칙을 넘어서서 일어났다는 의미에서만 기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 효과가 당사자들은 물론이려니와 이 사건들을 함께 목격했던 많은 가난한 이들이 바라마지 않았으나 이제까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소식이라는 의미에서도 기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기적들은 자연법칙을 기준해서 볼 때에 기적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섭리를 기준으로 해서 보더라도 영원한 생명에로 향하는 파스카 여정의 기적이었다는 뜻이다. 각 표징들이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는 정서적인 기쁨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해방도 안겨 주었다. 오늘날에도 보편적으로 소망스러운 표징은 자연법칙상의 기적이라기보다는 신앙섭리상의 요청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기적일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사회적으로 증거하는 모든 활동에서 해방적인 성격이 담겨야 하고, 또한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해방 사건이 파스카 과업으로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기적처럼!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1.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다(11.1-11.7)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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