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6. 박해의 근본 원인과 순교의 의미

저녁노을의 글
2022-10-07 20:35:01 조회(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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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고 그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았으며 오직 하느님을 믿을 자유와 백성이 평등한 나라를 원했던 무고한 백성을 단지 나라에서 금하는 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대살육 사태를 무려 백 년 동안이나 저지른 이 사태야말로 성리학 질서의 우상숭배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주는 것이다. 결국 천주교 신자들은 백 년 간에 걸친 이 사상 초유의 박해에 치명으로 저항함으로써,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와 백성 사이의 평등의 가치를 쟁취해 내었다.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에 치명으로써 맞선 천주교 신자들의 저항은 하느님과는 물론 백성들 사이에서도 소통하고 일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도라는 개인 제사로써 하느님과 소통하고, 신분 차별이 아닌 평등으로써 백성들 상호 간에 서로의 존엄성을 존중하려 했던 것이다. 이 소통과 존중이 하느님과는 물론 백성들 사이의 일치를 보증함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소통과 존중 그리고 일치가 그 혹독한 박해에서 그토록 많은 희생자를 배출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의미였다. 교우촌에서 서로를 ‘믿음의 벗’이라는 뜻으로 부르던 이 ‘교우’는 사회적 신분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는 이름이었다. 박해 속에서도 신자 수가 늘어갔던 배경에는 그리고 특히 여성과 천민들이 압도적이었던 배경에는 교우촌에서 실천했던 신분 평등의 현실이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복음이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는 백 년 동안 크게 네 번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그 중 대규모로 천주교인들을 죽인 1801년 신유박해의 원인을 설명하는 논리 가운데 당시 집권당인 노론 벽파가 남인의 벼슬길을 막고자 벌였다는 설이 있다. 이 때 박해를 받은 지도자급을 포함한 천주교인들이 3백 명 이상 죽어야 했고 또 그만한 수가 유배를 당해야 했으며, 그 가운데 노론 박해의 칼끝은 정조가 총애했던 정약용을 노리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당쟁을 근 일 세기를 끌어온 천주교 박해의 주 원인으로 보기는 어려운 듯하다(정병설). 남인 시파에 속한 천주교 신자 선비들이 궤멸된 후에도 여전히 박해는 지속되었으며 너무도 많은 일반 백성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들은 왜 그렇게 모질고 엄청난 박해를 받았을까?

 

  한민족이 천주교를 수용하게 된 유학적 배경뿐만 아니라 무교적 배경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 종교사상의 흐름을 체계화시키고 있는 이대근은 18세기 조선 시대 후기에 조선 조정과 유림들이 천주교를 박해한 근본 원인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무교(巫敎, Shamanism)는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오래 전부터 한국인의 문화와 심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면서 존속한 종교이다. 한국 무교는 4세기경 불교·유교·도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 민족에게 전해 내려온 고유종교로서, 외래종교들에 의해 밀려난 듯이 보이지만 그 근저에서 보이지 않게 한국의 종교문화를 지배해 오고 있었으며, 18세기경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올 때에도 낯선 서양 신학에 담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바탕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교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국 종교사상사의 핵심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나서 이대근은 본격적으로 고대 무교에서 하느님을 믿어 온 실태를 신화(神話)와 제의(祭儀)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신화는 신앙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의식(意識)을 뜻하고, 제의는 그 메시지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동 세대와 공유하고 후세대에 전수하려는 의식(儀式)이라는 것이다. 

 

  외래종교가 유입되기 전 한국의 고대 원초적 신앙형태는 고신도(古神道) · 신교(神敎) · 선도(仙道) · 무교(巫敎)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왔다. 그 실체를 무엇이라 부르든 그 핵심에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신앙의식(信仰意識)과 종교의례(宗敎儀禮)가 있다. ‘하느님’은 태곳적부터 한민족의 의식 속에서 가장 깊이 새겨져 있는 최고신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한국인의 건국신화나 고대 제의(祭儀)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유(儒)·불(佛)·도(道)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본래 가지고 있던 가장 원초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신화에서 하느님은 환인(桓因)·천제(天帝)·천신(天神)·천(天)·신(神)으로 표기된다. 이 하느님은 유교·불교·도교·그리스도교 등 새로운 사상이 소개될 때마다 제거되거나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유교의 상제(上帝), 도교의 옥황상제(玉皇上帝), 불교의 제석천(帝釋天) 관념과 습합되면서 여전히 한국인들의 종교 신앙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고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민족이라면 모두 다 건국신화를 기억하고 있기 마련이고 또 일정한 제의도 갖추고 있으나, 이대근은 이 대목에서 다른 민족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한민족의 의식상 특징을 지적한다. 그것이 천손의식(天孫意識)인데 천주교를 통해 그리스도 신앙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데 이 천손의식이 가장 큰 동인(動因)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한민족은 시조(始祖)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천손이요 하느님의 백성이며 밝 백성이라는 의식으로 스스로를 가리켜 백의 민족, 밝달 민족, 배달 민족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사는 땅을 하느님이 직접 내려다보고 점지해 준 땅이요 성스러운 땅이라고 믿고, 그 땅에 자신들이 세운 나라를 아침땅(아사달, 朝鮮), 불(ᄇᆞᆰ)의 나라(夫餘), (新羅)이라 불렀다. (새)는 신(新)이요 동(東)이다. ᄇᆞᆯ은 ᄇᆞᆰ 또는 벌(平野)을 뜻한다. 

 

  예수에 의해 시작된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었다. 신약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스스로를 ‘성도’(聖徒)라 하고 ‘빛의 자녀들’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의식이 조선에 전래되면서 천주교 교리는 지식층과 민중에게 종교적, 윤리적, 문화적으로 해방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천주교를 통해 만인이 하느님의 자손이라 불리는 천손의식과 만민이 제천의례에 주인공으로 참여했던 종교성의 회복을 맛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조선 후기에 종교사상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또는 사회사적으로 조선사회에 일으킨 충격과 파문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 천손의식이야말로 한민족의 정체성을 담은 본질인데, 이대근은 바로 이 정체성 덕분에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신분제도로써 왕조 질서를 유지하려던 권력에 의해서 박해를 받았다고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조선 후기 유교사회는 철저하게 제천의례를 금지시켰고, 모든 제사는 오직 조상제사에 제한되어 있었으며, 그나마도 양반계층에게만 허용된 독점적 신분적 특권이었고, 더욱이 지식층에 있어서는 무신론적인 성리학이 주 학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종교의식과 종교의례, 심층의 무의식적 차원과 의식적 차원 사이에 큰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초기 조선천주교회가 조선 왕조로부터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사교(邪敎)’라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박해를 받아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키고 전파했던 것은 밝, 빛, 구원을 향한 열망, 그들 자신이 스스로 하느님을 섬기는 천손이라는 새로운 자각과 확신 덕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을 ‘대군대부’(大君大父), ‘대부모’(大父母)로 고백하며 흔연히 순교하였던 것이다. 

 

  이대근의 연구와 성찰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무군무부’와 ‘대군대부’로 날카롭게 대비되었던 박해의 양상은, 조선시대의 천주교 박해는 무신론적 세력에 의해 자행된 ‘어둠’이었으며 동시에 이 박해에 치명으로 저항한 천주교 신자들의 존재는 “생명이요 빛이신”(요한 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손의 새 역사를 창조하기 전에 떠 오른 여명(黎明)이었다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리스도교가 수용되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 민족의 심성과 의식구조 속에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 후기에 이 땅의 선각자들과 민중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데 원초적 토대가 되었다. 수용된 지 2백여 년 정도밖에 안 된 그리스도교가 이 민족의 역사를 주도하는 종교로 성장하게 된 데에는 이 같은 필연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이대근은 박해의 배경에 이어서 밝혀낸 무교의 ‘최고선’ 신앙과 천주교의 4대 교리에 담긴 윤리가 한민족이 정체성을 찾고 이에 바탕한 새 역사를 창조하는 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성부 하느님의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기존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문화에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른 종교에 없는 유일신 사상과 삼위일체의 하느님, 강생육화하신 예수 그리스도 등 그리스도교의 많은 교리는 신과 천 등 보이지 않는 종교적 관념을 지니지 않던 이들에게는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초대 교회에서는 그 성격을 달리 하였다. 바로 한국의 전통적 무교신앙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 충분한 상황을 조성하고 토착화 작업을 가능하게 하였다. 특히 한국 무교에 전해 내려오는 ‘최고선’ 신앙은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신앙과 무교의 하느님 신앙 사이에는 그 신학적인 내용과 깊이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한국인들은 전통적인 무교의 하느님 관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관념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천주교 교리의 특징을 보여 주는 네 가지 기본교리는 천주존재(天主存在), 강생구속(降生救贖), 삼위일체(三位一體), 상선벌악(賞善罰惡)이다. 이 중 상선벌악이 매우 보편적인 윤리 개념이고 보면, 앞의 나머지 세 가지는 천주교 교리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고유 신앙의 원형 속에는 놀랍게도 이것을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원초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세례와 거듭남, 광명신앙을 통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각 등에서도 상당 부분 서로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두는 천주교가 이 땅에 정착하는 데 중요한 영성적 지반이 되고 매개적 요소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요컨대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들이 종교적 심성 속에 지녀온 하느님 신앙과 천손의식 덕분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발견했으나 무신론적 성리학을 숭상하던 조정과 유림은 이를 배척했기 때문에 박해가 일어났으니, 결국 조선 왕조의 천주교 박해의 근본 원인은 신관의 충돌 때문이며 그로 인해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새로운 신관과 그에 대한 믿음이 생겨날 수 있었다. 이것이 조선시대 치명자들이 신앙을 위해 순교한 의미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8.6. 박해의 근본 원인과 순교의 의미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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