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5. 한국교회에 대한 박해와 순교

저녁노을의 글
2022-10-03 19:38:19 조회(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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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신자들도 사실상 무신론적 성리학을 국교처럼 떠받들던 조정과 특히 노론을 중심으로 한 유림들에 의해서 하느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수난당하고 치명해야 했다. 그런데 나라에서 금하는 교를 믿었다는 죄목치고는 그 형벌이 매우 혹독했으니, 때로는 능지처참을 당하기도 했고, 주로 참수형을 당했으며, 때려서 죽이거나 아예 생매장하여 죽이기도 했다. 이는 조선 조정에서 볼 때 체제 전복을 꾀했다는 역모죄(逆謀罪)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근 백 년 동안 박해로 1만여 명 이상의 천주교 신자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다. 이 중 기록상으로 이름과 행적이 남아 있는 이들만 2천여 명 가운데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 복자품에 오른 순교자들이 124위이며, 성인품에 오른 순교자들이 103위이다. 이들이 천주교를 박해하는 조선 조정과 유림에 맞서 자신들의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한 장본인들이었다. 

 

  신자들은 죽임을 당하기 전에 신앙 여부를 확인하는 신문과 배교를 강요하는 고문을 당해야 했다. 고문은 일곱 가지인데, 주리, 치도곤, 주장질, 학춤, 삼모장, 톱질, 형장이다. 주리에는 가위주리, 줄주리, 팔주리가 있다. 가위주리는 양 무릎과 발목을 단단히 묶고 그 사이에 나무 막대기를 끼워 틀어 올려서 고통을 주는 고문이다. 막대기 대신에 줄을 잡아당겨 고통을 주면 줄주리, 팔을 비틀어 고통을 주면 팔주리라고 했다. 치도곤은 눞여 놓고 엉덩이에 곤장을 쳐서 고통을 주는 고문방식이며, 주장질은 사금파리 위에 무릎을 꿇려 놓고는 몽둥이로 허벅지를 마꾸 때리는 고문방식이다. 학춤은 양팔을 뒤로 하여 나무에 매달아 놓고 때리는 고문방식이며, 삼모장은 칼이나 도끼로 다리 살점을 떼 내는 고문방식이다. 또 톱질은 굵은 실을 정강이에 대고 양쪽에서 쓸어 당겨 살을 베는 고문방식이다. 그리고 형장은 막대기로 정강이를 때리는 고문방식이다(김대건, 마카오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리부아 신부에게 보낸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1845). 어느 것 하나 괴롭지 않은 것이 없다. 조선 형벌사를 알려면 천주교회사를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 중에 당한 고문은 다양하고 혹독했다. 이런 모진 고통을 거친 후에야 순교할 수 있었다. 

 

  고문 이외에도 감옥살이는 그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첫째는 형틀의 고통이요, 둘째는 토색질(돈이나 물건 따위를 억지로 달라고 하는 것)당하는 고통이요, 셋째는 질병의 고통이요, 넷째는 춥고 배고픈 고통이요, 다섯째는 오래 갇혀 있는 고통이다. 이 다섯 가지가 줄기가 되어 천만 가지 고통이 나온다. 사형수는 곧 죽을 것인데도 이 고통을 당하니 그 정상이 불쌍하고, 죄가 가벼운 죄수가 무거운 죄수와 똑같이 고통을 당하며, 억울한 죄수가 엉뚱하게 모함에 걸려 이 고통을 당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슬픈 일이다”(정약용, “감옥은 이승의 지옥이다”, 『목민심서』). 이렇게 잔인하고 원시적인 방식으로 조선 왕조는 임금을 향해 칼끝 한 번 겨눈 적이 없었던 자기 백성을 죽였다. 

 

  피지배층이 지배층과 다른 독자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니고 대항하면서도 창이나 칼 한 자루 없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그것도 백 년 동안이나 저항한 이 천주교 박해는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이 사태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자면, 조선시대 후기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천주교 박해의 원인 중 하나는 성리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은 조선의 신분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원인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 전래의 전통적인 하느님 신앙에서 비롯된 천손의식 덕분에 서양에서 전래된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상적이고 종교적인 원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원인과 관련해서 보면 이러하다. 천주교 교리에서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고 가르치며, 실제 천주교 신자들은 서로를 교우(敎友)라고 부르면서 양반이든 중인이든, 상민이나 천민이나 신분상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영위하였다.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 국정의 기초로 삼은 경국대전에서는 엄격한 신분제도를 규정해 놓고 사회적 신분에 의한 차별을 기본 질서로 삼고 있었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신앙에 따라 이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조정과 노론 중심의 유림들은 이들에게 할 수 있는 한 가혹한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즉 천주교인들을 취조한 관변(官邊)측 기록에 따르면, 죽은 조상을 위한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임금보다 더 높은 천주를 믿는다는 뜻에서 ‘무부무군지도’(無父無君之徒. ‘아버지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는 무리’)라거나, ‘금수지도’(禽獸之徒. ‘짐승과도 같이 윤리를 모르는 무리’)라고 비난했으며, 천주교인들의 모임에서 남녀는 물론 양반과 상민과 천민이 다 함께 모인다고 하여 ‘패륜난상지도’(悖倫亂常之徒) 같은 죄목을 뒤집어 씌웠던 것이다(斥邪上疏文, 斥邪綸音). 

 

  앞서(17.6.1. 사회악에 대한 인식) 최양업의 편지에서 진술된 증언은 하급 벼슬아치들의 부패상과 도탄에 빠진 민중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깔려 있는 구조적인 근본원인 역시, 그것은 폐쇄적이었던 조선시대 특유의 사상 통제와 신분차별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주자학적 경전 해석을 거의 종교적 교리 수준으로 강요했으니 자유로이 사상을 비판하거나 새로운 사상을 탐구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또한 양반과 중인과 상민 그리고 천민 등으로 나누어 놓은 신분제도 하에서 오직 양반 계층만이 인간다운 권리를 누렸을 뿐 나머지 계층은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천민 계급은 노비들은 각종 규제 등으로 인해 세월이 거듭될수록 그 수가 늘어서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인구의 거의 절반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천주교 교리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았고, 그들이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 죄악에 빠졌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음을 가르쳤다. 인간의 신적 기원을 밝혀 그 존엄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특히 그리스도 신앙으로 그 귀한 존엄성을 실현시킬 수 있음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평등과 존귀함은 그 당연한 결론인 것이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이벽의 ‘성교요지’를 참고하여 정약종이 순한글로 지은 ‘주교요지’에서는 이렇게 가르쳤다.

 

사람은 반드시 천주로 말미암아 생겼느니라

어떤 사람이 묻기를, “처음으로 난 사람은 천주로 말미암아 났거니와, 지금 사람은 부모의 속으로조차 나니, 천주가 아니 계신들 어찌 나지 못하리오?” 대답하기를, 처음 사람을 천주가 아니 내셨다면, 지금 사람이 어디로조차 났으리오? 또 부모의 능(能)으로는 자식을 낳지 못하니, 이를테면 장인(匠人)이 그릇을 제 재주로 만들기를 임의대로 해서, 만들려고 하면 만들고, 말려고 하면 말고, 크게 하려면 크게 하고, 작게 하려면 작게 하는데, 사람이 자식 낳기를 장인들이 그릇 만들듯이 제 재주로 할 것 같으면, 어찌하여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하며, 아들을 낳고 싶어도 딸을 낳고, 잘 낳고 싶어도 못 나게 낳는 일이 있느냐? 이를 보면 사람의 능이 아니라, 천주의 조화(造化)로 하시는 것을 알 것이요, 또 장인은 그릇을 제 재주로 만들기에 그릇 만드는 묘리(妙理)를 알거니와, 사람은 자식을 낳아도 그 이목구비와 오장육부가 되는 묘리를 뉘 능히 알리오? 오직 천주의 신령하신 슬기로 마련하시고 아시느니라(주교요지, 5항).

 

  그러니까 천주교 신자들이 받아들인 평등 사상은 인간의 신적 기원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존엄성을 실천한 귀결이었다. 

 

천하 사람이 한 몸 같아서 아담의 죄를 만민이 다 갈라 받고, 예수의 공을 만민이 다 가히 입을 것이니라

어떤 사람이 묻기를, “원조 한 사람의 죄를 어찌하여 만민이 갈라받고, 예수 한 분의 공을 어찌하여 만민이 입는고?” 대답하되, 아담은 만민의 조상이 되므로 그 죄의 해(害)는 만대의 자손이 다 받고, 예수는 만민의 구세주가 되시기 때문에 그 공의 은택(恩澤)을 만세 사람이 다 입는 것이니 비유컨대, 사람의 오장육부(五臟六腑)와 사지백체(四肢百體)가 한 몸에 붙었으므로, 오장에 병이 들면 온 몸이 그 해를 입어 머리도 아프고 입맛도 변하고 얼굴빛도 상(傷)하는 것이라. 만일, 신통한 약을 먹어 오장의 병을 고치면, 머리도 시원하고 팔다리도 가볍고 입맛도 돌아오고 얼굴빛도 좋아진다. 천하 고금 사람이 모두 아담 한 몸에서 생겨나 한 혈맥이 되니, 아담의 죄는 오장의 병 같아서 뭇사람이 다 그 해를 입고, 예수의 구속하신 공은 신통한 약 같아서 뭇사람이 다 그 효험을 입느니라(주교요지, 41항).

 

  요컨대, 하느님을 닮도록 존엄하게 지어진 인간이 원죄에 물들어 죄악에 빠지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 공로로 말미암아 인류 전체가 구원될 수 있게 되었으니, 인간은 그 본디 존엄한 품위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도 평등 사랑은 자연스런 귀결이라 할 것인데, 사람은 그냥 평등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평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둘째 원인과 관련해서 보면 이러하다. 조선 시대 후기인 18세기 말에 천주교 신자들이 받아들인 그리스도 신앙은 비록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저술해 놓은 한역서학서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면서도 사실은 고려조의 불교와 조선조의 유학에 억눌렸던 민간의 하느님 신앙의 저류에 힘입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적들에 의해서만 신앙이 새로이 생겨나기는 어려운 일이고, 더욱이 한문으로 쓰여진 이 서적들을 읽을 수도 없었던 서민들이 한글로 풀이한 번역본이나 구어체 전승으로만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신앙을 목숨 바쳐 증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그 신앙이 박해를 받게 되었는데도 무려 백 년이나 신앙을 지키며 증거한다는 일 역시 기적적인 일이다. 더욱이 끔찍한 박해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천주교를 믿겠다는 신자들은 갈수록 늘어났다. 1784년경에 1천여 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가 1790년에는 4천 명, 1796년에는 1만 명을 넘더니, 박해시기를 거치면서는 1859년 1만 6천7백 명, 1865년에는 2만 3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한국 천주교회 총람 2013~201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 박해 기간 동안 양반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이탈하면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20% 대를 유지하던 양반 신자 비율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5%대로 급감하였다. 반면 상민과 천민 등 하층민에 속하는 신자 비율은 70%대에서 90%대로 급증하여 천주교 신자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김선필). 

 

  사실 한국 천주교의 전반기 역사는, 한민족 역사 초기부터 전해 내려오던 하느님 신앙을 고구려에 불교가 도입된 이래로 천시해 오던 지배층과 지식층의 종교적 억압에 저항한 역사였다. 조선의 조정과 노론 중심의 유림들은 하느님을 믿는 자유와 백성이 평등한 나라를 꿈꾸던 천주교 신자들을 증오한 나머지 아예 씨를 말리려 들었다. 사실 한민족 역사에서 지배층에 피지배층이 집단으로 항거하는 경우는 많았으나, 천주교인들처럼 지배층과는 확연히 다른 독자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한 채 평화적인 방식으로 백 년 이상이나 항거한 경우는 없었다(정병설). 

 

  조선 왕조에서는 주자학에서 확립해 놓은 유학 경전의 주석에 조금이라도 다른 해석을 내놓으면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죽여 버렸고, 가족들까지도 노비로 만들어 버린 예가 허다했다. 이런 저런 정치적 상황에 휩쓸려 경전 해석의 차이로 사화(士禍)를 입은 선비들은 아주 많았다. 대개 이런 사화들의 경우에는 역모의 혐의를 뒤집어 씌웠고, 당사자만이 아니라 일가족을 모두 몰살시켜 후환을 아예 없애 버렸다. 이런 판국에 천주교를 조선에 들여온 선비들은 공자의 저술인 시경과 서경을 해석하면서 주자가 해 놓은 해석대로 ‘하늘 天’으로 알아듣지 않고, 마테오 리치를 따라서 ‘하느님 天’으로 알아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마테오 리치는 시경과 서경에 기록된 ‘천’(天)의 개념을 ‘상제(上帝)’ 즉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으로 해석하여 천주실의를 저술하였고, 이벽은 서양 선비인 마테오 리치의 권위를 빌어 사문난적(斯文亂賊) 논쟁을 돌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동기에 대해서 천진암 강학회에 모인 선비들도 찬동하였기에 그 모임의 성격이 처음에는 실학 강학회였다가 천주학 강학회로, 다시 천주교 신앙 공동체로 전환될 수 있었다. 하느님 신앙에 대한 이 같은 인식 전환은 아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푸른 하늘이 천주 아니니라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세상 사람이 매양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면 절로 공경하는 마음이 나니, 저 푸른 하늘이 천주가 아니시냐?” 대답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니, 하늘을 보고 공경함은 이 하늘을 공경함이 아니라, 하늘 위에 계신 임금을 공경함이라. 비유컨대, 백성이 대궐을 바라보면 절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그것을 어찌 대궐을 두려워한다 하리오? 대궐 안에 계시는 임금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저 푸른 하늘은 대궐 같고, 하늘 위에 계시는 천주는 대궐 안에 계시는 임금 같으시니, 만일 푸른 하늘을 천주라 하여 절하면, 이는 대궐을 보고 임금이라 하여 절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그르지 아니하리오? 하늘은 천주의 전능으로 만드신 것이니, 비유컨대, 사람이 집을 지었다면 그 집을 가리켜 임자라 하겠는가? 집을 지은 사람이 임자임과 같이, 천주가 하늘을 지으셨으니 천주가 하늘의 임자이시니라. 또 하늘이 넓고 푸르러 큰 유리덩이 같아, 귀와 눈이 없고 손과 발도 없으며, 지각도 없고 영신(靈神)도 없으니, 어찌 천지 만물의 임자가 되리오? 천지의 큰 임자는 오직 하나뿐이시니, 곧 전능(全能) 전지(全知) 전선(全善)하신 천주시니라(주교요지, 15). 

 

  천주교 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진산 사건(1791)은 북경 교구에서 전해온 제사금지령에 따라 양반 신자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신앙을 포기하거나 하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던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에 따라 명례방을 비롯한 여러 집회소에서 이벽과 동료 선비들이 운영한 임시성사조직의 활동 결과로 늘어났던 한양 선비 천여 명 중 대부분이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정약종을 비롯한 극소수 양반 신자들과 중인 이하 신자들은 박해를 감수하고 천주교식으로 제사를 지내거나, 어차피 제사를 드릴 자격이 없었던 중인 이하 신분의 천주교 신자들은 천주교식으로 기도를 바쳤다. 사실 기도야말로 제물 없는 제사였다. 기도의 대상이 하느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양반들이 행하던 조상제사는 양반 계층에게만 독점적으로 허용되었던 특권으로서, 신분 차별이라는 사회악을 공고히 만들어주어서 평등의 가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제도였다. 그래서 조선 조정과 노론 중심의 유림들은 조상제사를 거부한 양반 신자들을 무참히 죽였을 뿐만 아니라, 조상제사를 드릴 수 있는 신분상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던 중인 이하 상민이나 천민 출신의 천주교 신자들도 잔인한 방식으로 고문하고 죽였다. 특히 병인박해(1866) 때에는 당시 정치적 실권자였던 대원군의 명령으로 “먼저 목을 베고 나서 나중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이 떨어지는 바람에 천주교 신자임이 발각되면 아무데서나 먼저 죽이고 나서 사후에 보고하게 허용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래서 백 년 간의 박해 중 이 때의 희생자들이 제일 많다. 

 

  조선사회에 들어온 천주교 교리를 통해 한민족이 오래 전부터 믿어온 하느님 신앙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 신자들은 조정과 유림으로부터 박해가 닥치자 목숨을 바쳐 이 신앙 진리를 수호하는 한편, 고려조 이래 권력으로부터 천시를 받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탄압을 받아온 민간 신앙이 잡신을 불러들이는 미신으로 전락한 데 대해서는 분명한 태도로 배척하였다. 이를테면 그리스도 신앙 진리에 의해서 영적 위계질서를 식별한 결과였다. 하늘에 제사를 드리며 전통적인 하느님 신앙을 섬겨온 무교(巫敎)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지만 이를 잡신숭배로 여기는 무속(巫俗)에 대해서는 우상숭배에 속하는 미신으로 규정하여 배척한 것이다. ‘주교요지’에서도 이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잡귀신을 위하는 것이 큰 죄니라

한 고을에 관장이 하나이요 한 도에 감사가 하나이요 한 나라에 임금이 하나이니, 한 고을 사람이 두 관장을 섬기고 한 도내 백성이 두 감사를 섬기고 한 나라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기면 그 죄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아니하리라. 이제 천지간에 한 임자 계신 줄을 이미 알고 또 한편으로 잡귀신을 위하여 소위 군왕과 말명과 제장과 제석과 성주와 영등과 성황 등 잡귀를 섬겨 굿도 하고 제사도 하여 복을 빌고 화를 면코자 하는 사람이 어찌 두 임금 섬기는 죄를 당치 아니하리오. 또 인간의 생사와 화복이 다 천주께 매여 있는지라, 잡귀신은 도무지 화복(禍福)의 권(權)을 잡지 못하였느니 어찌 사람의 화복을 능히 임의대로 하리오(주교요지, 27).

 

  그리하여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배워 익혀 신앙생활의 지침으로 삼던 교리문답(詳解 天主敎 要理)에서도 미신 행사에 대해 십계명의 첫 번째 항목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113. 제1계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제1계에 명하시는 것은 흠숭지례(欽崇之禮)로, 하느님을 만유 위에 공경하여 높임이니라.

 

114. 제1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제1계에 금하시는 것은 천주께만 드릴 공경을 다른 이에게 드림이니라.

 

115. 천주께만 드릴 공경을 어떻게 다른 이에게 드리게 되느뇨?

이는 온갖 미신을 숭상함으로 되느니, 곧 마귀와 사신(邪神)을 섬기거나, 마술과 마법을 쓰거나, 헛 징험으로 길흉을 믿는 것 등이니라.

 

  이 115번 문답의 해설에서는 각종 점술(占術)을 “바른 이치를 거스르는 믿음”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점술은 사람의 지능으로는 알 수 없는 타인의 자유 의사에 달린 미래사, 또는 자연적으로는 알 수 없는 비밀을 알기 위하여 직접 또는 간접으로 악마의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서, 사주(四柱) · 관상(觀相) · 토정비결(土亭秘訣) · 정감록(鄭鑑錄) ·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등도 다 이와 같은 것이다. 

 

  무속에 속하는 이런 주술과 역술 행위에 대해서는 미신 행사로 판단하는 바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통용된다. 그러나 이밖에 사사로운 길흉화복을 점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선에 기여하려던 무교 본연의 종교 행사들, 예를 들면 하늘에 제사를 드려 민족 공동체로서의 나라나 지역 공동체로서의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천제(天祭)나 산신제(山神祭)와 부락제(部落祭), 억울한 이들의 원한을 풀어 주는 해원(解冤)굿 등은 미신 행사로 볼 수 없다. 그런데 일제 식민 치하에서는 이런 무교 종교 행사들이 공동선을 위해 거행되든지 사사로이 길흉화복을 다스리고자 하든지 상관없이 모조리 무속으로 천시되거나 금지되었다. 따라서 무교의 종교적 현실에 대한 영적 식별이 필요하다고 할 것인데, 성령의 역할에 속하는 영의 움직임조차 귀신이라거나 미신이라고 단정지을 것은 아니다. 최고선과 공동선의 기준에 따라서 식별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8.5. 한국교회에 대한 박해와 순교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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