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1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유다인들의 음모(12.1-12.7.)

[요한복음] 1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유다인들의 음모(12.1-12.7.)

 

저녁노을의 글

2022-09-16 19:59:39 조회(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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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부터는 요한복음서의 제2부가 시작된다. 

제1부는 <증언의 책>이었다. 제1장 서문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이시라고 증언했고 제2장 이후에는 예수님께서 여러 사건들, 즉 직접 일으키시기도 하셨던 기적 사건들이나 우연히 맞닥뜨린 사건들을 하느님의 표징으로 삼아 스스로 당신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언하셨던 제1부는 지난 제11장으로 마치고, 이제 제12장을 시작으로 제2부가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나게 될 <영광의 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증언의 책>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이 표징과 증언으로 드러났다면, <영광의 책>에서는 말씀과 사건으로 그분의 신성이 어떻게 영광으로 나타날지가 밝혀진다. 그 경위는 이미 공관복음사가들이 알려준 대로 십자가의 길이지만 이는 부활을 위한 통과의례만이 아니다.  즉, 부활을 위한 믿음의 증거 능력으로서 십자가가 자리잡고 있고, 또한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이 믿음으로 공동체를 위한 십자가를 짊어질 기운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부활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는 점에 요한복음사가의 독보적인 안목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성의 계시가 「예수-존재」에서 「상황-세계」에로 구현되는 것으로서, 강생의 신비가 보편화되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예수님의 신원을 증언하고자 하는 제1부와 그분의 영광을 예고하고자 하는 제2부를 이어주는 고리는 라자로의 소생 사건이다. 제1부의 마지막에 수록된 이 소생 기적 사건 보도는 예수님께서 당신 부활의 성사로 삼으시고자 이 사건에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임하셨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사건이 유다인들에게 미칠 사후 파급 효과가 얼마나 크고 살벌하면서도 심각했는지도 알려주었다. 

 

  그런데 제2부의 시작인 제12장은 예수님의 그토록 깊은 마음씀씀이와 그에 담긴 진실의 어마어마한 무게 그리고 엄청난 파급 효과 등에 대해서, 평소의 관상적 생활태도로 인해 알아차린 라자로 동생 마리아가 머지않아 닥칠 예수님의 죽음을 내다보고 아주 귀한 향유를 마련해서는 미리 장사를 치러드리는 예 -  이것이 장례(葬禮)이다 - 를 갖춤으로써 애틋한 감사를 표하는 한편 죽음 이후 일어날 그분의 부활에 담긴 영광을 미리 경축하는 행동을 기록함으로써 시작한다(요한 12,1-8). 

 

  이 영광은 부활로 말미암아 비로소 드러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선을 위한 고난의 가치를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십자가의 영광이기도 하다. 최고선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업이든, 공동선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든 또는 개인이나 작은 공동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도직이든지 간에, 파스카의 십자가로 드러나는 영원한 생명의 영광이 요한복음의 목표인 것이요, 영원한 생명을 향한 파스카 신학이 요한복음의 메시지이다.

 

  요한복음사가의 의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게 된 경위에 대한 정보만을 우리에게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부활 신앙에 이르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질 만한 믿음을 지니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2부의 본문을 통해서 드러나는 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향한 이러한 십자가의 구원적 의미를 추구하는 한편, 각 장의 말미에는 제1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실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계속하고자 한다. 우리는 제1부에서 예수님의 표징들을 통해 아시아의 복음화를 향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알아보았으니, 이제 제2부에서는 십자가의 파스카적 의미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그 경로를 알아볼 차례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아시아 주교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요한 바오로 2세가 아시아 가톨릭 신앙인들에게 권고한 문헌 「아시아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최고선과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사명과 복음화 전망을 살피면서 사회적 애덕의 진리인 가톨릭 사회교리를 전개하게 될 것이다. 

 

12.1. 마리아가 드러내려는 예수의 영광(12,1-8)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긴장이 더 커져가고 있었고 예수님께는  마지막 결단의 시각이 긴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에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에 깊이 젖어들곤 했던 마리아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관상의 경지에 일가견(一家見)이 있었다. 죽은 오빠를 다시 살려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 일지만, 그로 인해 당신의 죽음까지 각오하셔야 했으면서도 내색조차 하지 않으셨던 정황을 생각하면 더욱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단지 각오만 해야 했던 것을 넘어서 실제로 조만간 돌아가시게 생겼다고 하지 않는가! 아마 그 불행한 일이 닥치면 정상적으로는 장례조차 치루지 못할 판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한갓진 시간에 장사의 예를 정성껏 갖추어 드리고 싶어, 조촐한 잔치를 준비하여 손님들도 모시고는 성전 제사 때나 쓰이는 귀한 나르드 향유를 마련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는 마르코도, 마태오도 기록해 두기는 했지만 모두 예루살렘 도성 안에서 최후 주간의 시작 부분에 배치해 놓았다(마르 14,39; 마태 26,6-13). 그런데 요한은 직제자답게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이 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 베타니아의 라자로 집에서 있었다고 바로 잡았다. 그것이 이 본문이다.

 

12.1.1.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다(12,1-3)

  “요한이 그때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이라고 밝힌 것은 유대인들이 미리 사서 열나흗날까지 보관하던 파스카 양처럼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실 흠 없는 어린 양이시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으로 가시고, 그 둘이 다 예수님의 시중을 든다(아타나시우스). 마르타는 식사를 준비하고, 마리아는 더욱 영적인 방식으로 시중을 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런 다음 복음사가는 라자로가 예수님과 함께 식사한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그의 부활에 관한 더 확실한 증거를 댄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전하는 마리아는 루카 복음과 요한 복음에서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가 아니다(오리게네스). 복음사가들의 기록을 종합할 때, 향유가 부어진 곳은 머리와 발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렇다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그의 겸손을 보여 준다. 먼저 머리에 향유를 붓지 않고 겸손하게 시중을 든 다음에야 그렇게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교회도 그렇게 하도록 불렸다(크로마티우스). 그분의 몸, 곧 교회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죄의 그물에 걸린 이들만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치유를 가져다주는 용서의 기름을 부어주라고 우리를 가르치신다(암브로시우스). 향유와 마리아의 머리카락도 자기에게 남는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줌으로써 예수님의 발을 닦는 이들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성사적 상징이다(아우구스티누스). 집 안이 온통 향유 냄새로 가득했듯이, 세상도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이 내뿜는 향기로 가득해질 것이다(오리게네스). 기름부음받으신 분은 기름 붓는 이를 용서하시므로, 많은 향유는 많은 죄를 덮는다(시리아인 에프렘).” 

 

  마리아가 귀한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한 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3).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아직 살아계실 때 미리 치러 드리는 장례이니만큼 그분 부활의 영광을 미리 드러낼 수 있는 향기로운 자리로 꾸미고자 한 것이다. 나르드의 향내는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부활의 향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그 부활의 향기가 복음을 선포하러 다니신 그분의 발이 행한 수고와 봉사에서 나온 것임을 알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들이고 예우를 표하느라고 그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나르드는 냄새도 향기로왔지만 그 가치도 어마어마했다. 이스카리옷 유다의 계산으로는 그 향유 한 리트라가 3백 데나리온 어치가 넘었다. 노동자의 일 년 연봉에 해당되는 값비싼 향유를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 한 번에 다 썼다. 하지만 오리게네스의 바람대로, 이 특별한 장례의 의미를 기억하는 숱한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선행을 실천하여 세상에 내뿜게 될 향기는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의 백 배, 천 배 또는 만 배 이상으로 퍼져나가리라. 또한 에프렘의 소망대로라면, 그 향기가 이미 저질러진 숱한 죄의 악취도 능히 덮지 않겠는가. 

 

12.1.2. 가난한 이들과 예수의 영광 사이(12,4-8)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셨으면서도 그가 제자들과 함께하도록 두신다(아우구스티누스). 유다는 신심을 가장하여(아우덴티우스), 자신이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 그분 목숨에 매긴 값보다 향유를 더 값진 것으로 판단한다(암브로시우스). 다른 복음서 기사들을 함께 살펴보면, 유다의 말은 제자들 전체의 의견이었을 수도 있지만 요한은 유다의 탐욕을 강조한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돈주머니를 맡김으로써 그의 탐욕을 제어하기를 바라셨다(시리아인 에프렘). 제자들 사이에서 돈주머니를 맡는 것은 높은 직책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암브로시우스). 그러나 탐욕스러운 자는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유다의 마음은 이미 탐욕의 얼룩으로 더러워졌다(베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에 관해 넌지시 말씀하셨지만 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나중에 당신의 시신에 기름을 바를 수 없을 것이기에 그녀에게 그 일을 허락하셨다(베다). 이 기름부음으로 죽음과 탐욕의 무력함이 드러났다(시리아인 에프렘)”. 

 

  “마리아의 사랑 행위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과 대립되는 행동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곧 그들 곁에 오래 계시지 않을 주님을 영광스럽게 한 행위로 보아야 한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유다의 관심사도 아니었다(테오도루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셨지만, 당신을 섬기는 일을 제쳐 놓기를 바라지는 않으셨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것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늘 그들 곁에 계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시며, 유다와 그곳에 있는 모든 이에게, 육화하신 당신은 곧 떠나시겠지만 당신의 신적인 현존은 믿음을 통하여 언제나 그들과 함께할 것임을 알려 주신다(아우구스티누스). 지금도 그분은 성사들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러나 유다로 상징되는 사악한 자들은 그분께서 늘 곁에 계시지는 않을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그날  밤 예수님께서 하신 많은 사랑의 행위와 말씀은 물론 이 말씀조차도 유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 12,5). 제자 공동체의 돈 주머니를 맡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임무를 하던 이스카리옷 유다의 항변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상황에 맞는 말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나누어지자면 예수의 삶과 믿음이 이런 장례 절차를 통해서 기념되어야 하고 계승되어야 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되면 삼백 데나리온 어치보다 백 배, 천 배, 만 배의 나눔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전례와 사도직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이 둘의 상관관계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전례에서는 사도직을 지향하게 되어 있고, 사도직은 전례로 귀결되게 되어 있다. 전례와 사도직 사이의 이 순환적 관계가 ‘예수의 나눔’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위한 파스카 과업’을 영속화시키게 만들어주는 구조인 것이다. 예수님을 기억하지 않으면 가난한 이들과도 나눌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해대로,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그들의 필요를 돌보는 것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일과 같다.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으로써 예수님께 대한 기억이 강화된다. 더욱이 지금은 그분의 장례가 진행 중인데, 어찌 그런 단견으로 예를 훼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6)고 증언해 주었다. 때로는 우문(愚問) 덕분에 현답(賢答)이 나와서 후대에도 유용한 교훈이 되곤 한다. 

 

  여기서 요한이 동료인 유다에 대해 조심성 있게 언급하고 있는 바를 짚고 넘어가자(김근수). 요한은 유다를 루카처럼 ‘배신자’([그]προδοτης. prodotes)라고 부르는 대신에 스승을 ‘내어줄’([그]παραδιδοναι. paradidonai.) 사람이라는 정도로  소개했다(요한 12,4). 윤리적으로 단죄하기를 보류한 것이다. 또, 마태오가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마태 26,14-15)는 이야기도 빼버렸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유다가 돈을 적극적으로 요구한 것이 아니라, 수석 사제들이 유다에게 돈을 주겠다고 제안하자 소극적으로 이에 응한 것으로 보도하는 마르코와 루카의 입장을 채택한 것이다(마르 14,11; 루카 22,3-6). 게다가, “유다는 그 은전을 성소에 내동이치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마태 27,5)는 마태오의 끔찍한 보도나, “유다는 부정한 삯으로 밭을 산 뒤, 거꾸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내장이 모조리 쏟아졌습니다.”(사도 1,18)는 흉악스럽게 저주어린 사도행전의 보도도 채택하지 않았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의 장례가 치루어지는 이 거룩한 마당에 유다의 행각 따위로 독자의 시선을 조금이나마 또는 잠시나마 돌리게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12.2. 유다인들이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음모를 꾸미다(12,9-11)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만 아니라 라자로도 보려고 왔다. 아마도 그에게서 특별한 이야기를 듣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라자로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은 라자로를 위험인물로 여겼다. 라자로가 유명해지자 유대인 지도자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도 결의한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는데, 라자로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또다시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베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질투심에 휩싸이고(암브로시우스) 격앙된 상태였으며(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라자로를 죽임으로써 그가 생명으로 돌아온 기억도 동시에 지워 버릴 수 있다고 믿는 광기에 빠져 있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마리아가 나르드 향유로 예수님의 장례를 치루는 동안에 예루살렘의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큰 소동이 났다. 즉, 죽은 라자로가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를 보려는 무리들이 베타니아로 몰려오는가 하면, 도성 안에서도 이 소문을 전해 듣고 라자로를 소생시킨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무리들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전 내밀한 구석에서 이 난리통 소식을 듣고 있던 수석 사제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김에 이 골치아픈 말썽거리의 화근이 되어 버린 라자로도 죽여야겠다고 결의하였다. 제11장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내다보셨던 불길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었다. 

 

12.3.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12,12-1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군중이 그분을 맞은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진실을 그들의 지도자들보다 백성이 더 잘 알았음을 보여 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군중 가운데는 라자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한 이가 많았으며, 그들이 예수님을 맞으러 그곳에 온 것은 그분께서 일으키신 위대한 표징 때문이었다(아타나시우스). 그들은 라자로의 무덤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우리와 함께) 죄와 죽음의 무덤에 대한 승리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로마누스, 아우구스티누스)”. 

 

  “군중은 성경 말씀과 ‘호산나’라는 외침으로 예수님을 찬미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호산나’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이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그들은 주님, 곧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의 축복을 고대한다(베다). 전에 예수님 입에서 이 말이 나왔을 때는 찬반 논란이 인 바 있으며(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런 이해는 시편이 예언하는 바이기도 하다(베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는 임금님으로 받아들여진다(이레네우스). 그러나 우주의 주님께 인간 세상의 임금이라는 칭호는 사실 승진이 아니라 좌천인 셈이다(아우구스티누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주님 대신 군주들과 말을 신뢰하는 로마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빌린 나귀를 타신다(테르툴리아누스)”.  

 

  “이 기사에는 암나귀와 어린 나귀가 같이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제자들이 나귀를 끌고 오는 동안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발견하고 그 위에 올라앉으셨기 때문일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을 나타내는 어린 나귀 위에 앉으심으로써, 그들이 미래에 새 백성으로서 당신께 복종하게 될 것임을 나타내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즈카르야는 임금이 돌아옴을 예언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말고 유대인들의 임금들 가운데 그 일을 이룬 자가 있다는 기록은 없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평화의 임금님이신 그분은 이스라엘의 사악한 임금들과 대비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시온의 딸은 자신이 찬미하는 분을 받아들인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그분은 당신의 피로 그들의 죄를 씻어 주실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드러내 주시지는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활 후 영광스럽게 되셨을 때 제자들이 변화하는 데서 우리가 성령의 권능을 깨닫게 하려고 이 사실을 기록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라자로가 부활할 때 그의 무덤 앞에 있은 이들의 증언 덕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군중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분(테오도루스)임을 쉽게 믿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좋게 생각하는 바리사이들도 더러 있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실 예수님이 너무 널리 알려져, 지도자들은 일찍 손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군중의 외침은 ‘온 세상’, 곧 다른 민족들이 그분 뒤를 따라가고 있다는(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확실한 증거였다(프로클루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보도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온다. 그리고 그분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최후의 일주일을 전하는 이 보도에 대하여 주목하면서, 네 복음사가들의 이 보도를 비교 연구한 성서학자들이 많다(김근수). 그 가운데 호스킨스(E. C. Hoskyns)에 따르면, 요한은 큰 줄거리에 있어서는 마르코를 따랐다. 마르코는 대사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정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 보도하면서(마르 11,1-11), 이때가 파스카와 무교절 이틀 전이었는데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다.”고 보도하였다(마르 14,1). 요한도 대사제들이 그분을 죽이려고 결정한 뒤에 그분이 입성하신다고 보도함으로써 마르코를 따랐다. 다만 요한은 그분의 운명을 둘러싼 상황을 더 긴장스럽고 심각한 양상으로 바로 잡았으며, 라자로 이야기와 연결하였다(요한 12,17-19). 이 라자로 이야기를 삽입하여 예루살렘 입성 사건과 연결시킴으로써, 요한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러 오신 분임을 암시하려 하였다, 라자로가 살아났듯이. 그래서 예루살렘 도성 안에서 그분이 보내신 일주일의 분위기는 고난의 기간인데도 슬프기보다 기뻐 보인다. 죽음의 슬픔보다 부활의 기쁨이 더 강조되어서이다. 즉, 고난을 받지만 그분은 메시아요 왕이신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보도 내용의 해설에 있어서 요한은 마태오나 루카를 많이 참조하였다. 마태오는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마태 21,5)고 즈카르야의 예언(즈카 9,9)을 인용했는데, 요한도 이를 따랐다(요한 12,15). 그리고  루카는 군중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 19,38)이라고 외치는 환호 안에 ‘임금님’을 집어넣어 보도했는데, 요한도 이를 따랐다(요한 12,15). 아마도 그 근거는, 군중이 예수님을 열렬하고 성대하게 환영하는 배경에는 적어도 라자로 소생 기적을 알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루카 19,37). 이렇게 요한은 공관복음서의 보도들 가운데에서 취사선택하여 이어 받을 것은 이어 받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았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상황에 대한 보도의 흐름을 사실에 가깝도록 훨씬 매끄럽게 가다듬었다. 공관복음사가들은 군중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예수님의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고 보도했으나(마르 11,8-10; 마태 21,8-9; 루카 19,36), 요한은 예루살렘에 와 있던 군중이 도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맞이하였다고 보도하였다(요한 12,12-13). 그리고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된 보도들은 다 빼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놓거나 들에서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거나(마르 11,8), 나귀를 끌고 와서 그 등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고 그분을 모셨다는(루카 19,35-36) 보도는 생략해버렸다. 그 대신에 미리 준비한 종려나무 가지들을 들고서 그분을 임금님처럼 맞이했다고 보도하였다(요한 12,13). 

 

  또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불필요해 보이는 사항은 가지를 치듯이 과감하게 생략하면서, 요한은 전체적으로 예수님께서 구원자로서 당당하게 입성하시는 모습으로 보도하였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정복자의 이미지로 그리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제자들을 보내어 어린 나귀를 구해서 데려오는 이야기처럼(마르 11,2; 마태 21,2; 루카 19,30), 입성에 필요한 준비사항을 치밀하게 지시하셨던 일들은 비록 사실이라 하더라도 보도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즈카 9,9; 이사 40,9) 라는 예언자의 유명한 예언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바야흐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구원이 성취되고 있는 그 장엄한 의미를  상기시킨다(요한 12,14). 

 

  이 의미를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다른 제자들의 반응도 요한은 보태 넣었다. 즉,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다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요한 12,16)는 기록은 네 복음서 중 요한만 기록하고 있다. 매우 섬세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대사건이 되고 말았다. 라자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희귀한 기적 사건도 본데다가 예언자들이 메시아에 관하여 기록해 놓은 성경 말씀까지 성취되는가 싶어 잔뜩 기대하게 된 군중이 성대하게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영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요한 12,18), 적대자들로서는 기왕에 자신들이 음모한 살해 결의를 더 굳히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신 예수님은 유다교 지배층에게는 현실적으로 공포스러운 위험인물이 되어 버렸다. 기득권 계층의 영향력이 크게 흔들려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고, 지난 공생활 삼년 동안 우매한 군중의 말문을 막아보려고 무진 애를 써왔는데 군중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을 메시아로 알고 따라 다녔기 때문이다.  “이제 다 글렀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소”(요한 12,19) 하면서 로마 제국이 식민통치를 하던 그 엄혹한 시절에도 당당하게 처신해온 그 영민한 바리사이 원로들이, 내세울만한 배경도 없고 일정한 직업도 없이 세리나 창녀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던, 시골 나자렛 출신으로 이제 갓 서른 넘은 애숭이 젊은이의 출현에 대해 전전긍긍하며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12.4. 그리스인들이 예수를 찾아오다(12,20-26)

  “유대인들의 관습과 성전에 감명받은 그리스인들도 한 분이신 최고신께 경배를 바치기 위해 축제를 지내러 와 있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은 유대인과 그리스인이 함께 자신들의 임금임을 찬미한 일을 알려 준다(아우구스티누스). 사실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님이 임금님이시라는 군중의 선포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프로클루스). 다른 민족들의 맏물이 예수님께 온 것(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다른 민족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되실 시간, 곧 수난이 가까이 왔음이 분명하다(아우구스티누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영광에 대해 말씀하시듯이, 이제 다른 민족들도 십자가의 영광을 받아들일 것이다(프로클루스).”

 

  이 그리스인들은 누구인가?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12,20) 이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소아시아 지역에 살면서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유다교 신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 복음서 중  이 그리스인들을 소개하는 대목은 여기가 유일한데, 요한은 일찍이 메시아가 오시는 그 날에 이스라엘의 범주를 넘어서서 유다교를 신봉해 온 그리스인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이 광경이 장차 본격적으로 이사야가 내다본 환시가 보편적으로 실현되리라는 좋은 징조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만방은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리라. 이런 일은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 귀로 들어본 사람도 없다”(이사 52,15).

 

  그들은 예의를 갖추어 찾아왔다. 그리고는 그리스 이름을 가진 필립보에게 청했고, 필립보는 다시 안드레아에게 이 청을 전하고 함께 스승에게 말씀드렸다. 아마 이 두 제자는 대외적인 섭외 임무를 맡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인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이 만남에서 나온 가르침은 밀알을 비유로 한 생명에 대한 말씀이었다(요한 12,23ㄴ-26). 이제껏 유다인들을 상대로 한 자리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가르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찍이 인간 이성에 의한 합리적 사유를 발달시켜온 그리스인들에게, 메시아를 통해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이라는 신앙적 사유로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다인들처럼 성경에 담겨 있는 히브리 사유에 익숙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그리스 사유에 의한 사고습관을 완전히 던져버린 것도 아닌 어중간한 처지여서, 두 가지 길에 다 끌리는 중도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는 이들이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복음 주해』8). 

 

  사변적 사유로만 살아온 이 그리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살아온 삼 년의 공생활을 주제로 삼고, 밀알을 소재로 삼아 인격적 진리를 선보여주셨다. 예수님으로서도, 이 그리스인들로서도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수난을 앞둔 이 결정적 상황(요한 12,23ㄴ)에서 만났으므로, 이 말씀은 만남의 성격에 참으로 어울리는 제격의 가르침이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인위적 논리에만 젖어 있던 그리스인들에게, 메시아의 생애에 담긴 역설 – 십자가를 통해서 이룩하는 부활 - 을 자연의 섭리를 소재로 풀어낸 진리의 가르침이었다. 

 

  그분의 가르침은 메시아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섭리에서 출발하여, 생명이 영위되는 두 차원 즉 현세와 내세를 관통하는 영원한 생명에로 펼쳐진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자, 그런데 요한복음 제5장부터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유다인들은 어떠했던가? 그들은 그분 말씀을 알아 들으려고 하기는커녕  트집을 잡기 바빴고 서로 간에 갈등이 심해지자 무례하게도 돌을 던져 죽이려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보라! 이 그리스인들은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청해 듣고 있다. 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는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민족적이고 혈통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진리를 찾는 이들과 우상을 섬기는 이들 사이에 나타나는 대조성이라고 조금은 더 보편화시켜서 승화시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김근수). 위 두 말씀은 마르코가 이미 기록해 놓은 것을 그대로 옮겨놓았다(마르 8,34-35). 

 

  메시아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섭리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공생활을 설명하신 존재의 계시라면, 현세와 내세의 두 차원을 의식해야 하고 내세에로 열린 영원한 생명은 현세의 생명인 ‘목숨’을 상대화시키는 결정에서 비롯된다는 두 번째 가르침은 메시아이신 예수님만이 아니라 메시아를 따르려는 제자들도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의 진리로서 본질의 계시이며 활동의 지침이다. 만일 인간이 내세의 현실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현세에서 태어나 죽어 사라지는 모든 피조물들과 본질적으로는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메시아이신 예수님, 또 그 제자들의 기본 운명의 단계 그리고  메시아적 백성을 이루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로 더욱 널리 진리가 퍼져나가는 마지막 단계의 가르침까지 나온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ㄱㄴ). 메시아의 삶이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썩었다가, 제자들에 의한 메시아니즘이라는 열매로 맺어지고, 다시 메시아의 제자들이 밀알이 되어 땅에 묻혀 썩었다가 많은 열매가 되어서는 세상에 흩어져 있다가 불리어 모이는 메시아적 백성이라는 열매로 되어 가는 단계로 나아가는 구도가 그려진다. 이러한 구도 이해는 아래에 인용해 놓은 교부들의 주해에 바탕하여 얻어진 사색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뵈러 온 그리스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것은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땅에서 새 생명으로 싹이 터, 본디 그것을 낳은 식물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비유였다(암브로시우스). 그리스도께서 해골 터에 떨어져 돌아가시자 교회가 무수한 밀알로 싹이 터서(테오도루스) 성체라는 생명의 빵으로 구워졌으며, 그 빵은 그것을 받아 모시는 우리 안에서 몇 곱으로 늘어난다(이레네우스). 그리스도는 많은 개별 줄기가 모여 이루어진 곡식 단이다. 그분께서 모든 신자를 품고 계시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이처럼 이레네우스 교부와 함께 우리는 메시아니즘이 형성되어 메시아적 백성으로 나아가는 단계의 고리를 성체성사의 거행과 실천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실천의 행동에서 밀알의 떨어짐과 썩음 그리고 열매 맺음이라는 성사적 죽음이 감행되어야 한다. 생명의 잃고 얻음이 육신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일회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신앙과 자유 그리고 투신의 배합에 의해서 매일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섬김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메시아의 운명이 메시아적 백성의 운명에서 보편적으로 확대 재생산될 수 있게 된다. 그러자면 메시아적 백성의 자의식 안에서 섬김의 수난이 영광의 부활로 전환되는 리듬이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요한 12,26ㄷ)이라는 예수님의 보증 덕분이다. 영광은 스스로 높일 수 없고, 세상이 주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수 있고, 영광스럽게 하실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이 생명을 잃고 얻음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그리스어에서 ‘생명’이라는 낱말은 영혼을 가리킨다.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옳은 방법과 그른 방법이 있다(아우구스티누스). 우리가 죄 안에서 자기 영혼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른 방법이고, 하느님의 모습 안에 있는 영혼을 사랑한다면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다(카이사리우스).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은 괴로운 일이며, 그 대상이 나 자신일 때는 더욱 그렇다(아우구스티누스). 그대의 영혼을 영원히 안전하게 지키고 싶거든 한때 그것을 미워해야 한다(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그것이 시련을 거치게 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장차 그것을 잃을지도 모른다(테오도루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순교자들처럼 이승에 생명을 뿌리는 대신 왕관을 얻을 수 있도록(아우구스티누스), 악을 미워하고 그것에서 돌아서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의 동료 인간을 섬기는 일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그분을 섬기는 또 다른 방식이며(아우구스티누스) 이승과 영원한 세상에서 그분의 동료가 되는 것이다(요한 카시아누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섬김의 길은 영광의 길에 이르게 되어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이가 받는 영예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하시는데, 이는 그때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청중이 예수님보다 아버지를 더 높이 여겼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렇게 하여 그리스인들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진리 자체가 보편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지만, 외형적으로나 규모와 범주에 있어서도 보편적인 진리의 선포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12.5. 예수께서 죽을 각오를 다지시다(12,27,36)

  그리스인 제자들을 돌려보내신 다음, 상황도 혼란스럽거니와 마음도 산란한 상태이지만 머지않아 다가올 중대한 순간을 예비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를 올리셨다. 영광을 위한 수난을 감당할 각오를 다지는 기도였다. 영광의 열매는 수난의 씨앗으로 시작되므로 자유와 선택이라는 인간 고유의 행위로 그 각오를 다져야 한다. 그리고 아들이 받을 영광도 역시 다시 하느님께로 되돌려질 영광임을 그분은 알고 계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요한 12,28ㄱ). 

 

  그런데 바로 하늘에서 응답이 내렸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요한 12,28ㄷ). 이 응답의 말씀은 오직 예수님께서만 들으셨고 알아들을 수 있으셨다. 바로 옆에 있던 군중은 천둥 소리로 들은 이도 있고, 천사의 소리로 들은 이도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응답으로 내려주신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풀어 주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요한 12,30ㄴ). 이처럼, 메시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물론이요, 메시아적 백성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도 영광을 구하기 전에 수난의 가치를 몸소 깨달아야 한다. 수난의 가치를 깨달음에서 나온 믿음이라야 부활 신앙과 직결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따라오는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산란해진 것은, 그분도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셨다는 점에서 그분의 인성을 드러내 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산란하신 그분을 보며 위로를 받는다. 그분께서 결국 두려움을 이겨 내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은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고민을 모두 겪으셨다. 이는 그것들이 더 이상 당신이나 우리를 압도하지 못하도록 바꾸어 놓기 위해서였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시는 것을 본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죽음에 맞닥쳐도 당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택하는 그분의 본보기도 본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을 당신 자신의 안전과 위안보다 위에 두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버지의 이름 자체가 본질적으로 더 영광스럽게 되지는 않는다. 인간이 그분 아들의 행위를 통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의식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즉 하늘에서 들려 오는 소리는 예수님에게가 아니라(아폴리나리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암브로시우스) 예수님의 신성을 확인해 준다. 아버지의 이름은 세상 창조 이전에 영광스럽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탄생과 동방 박사들의 방문부터 그분의 거룩한 변모와 기적들을 통하여 그분의 생애 내내 영광스럽게 되었고, 십자가와 부활 때에도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때에 들려온 소리는 천사의 목소리가 분명하다(大 그레고리우스). 천둥이 울렸다는 유대인들의 말은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한 것이다(암브로시우스).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울린 이 소리로 군중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우리는 지각으로 확인되는 이런 종류의 계시를 계속 간절히 구하기보다 경외심과 흠숭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섬겨야 한다(힐라리우스)”.

 

  메시아적 백성이 파스카의 과업이나 과제 그리고 사도직을 행하면서 겪게 되는 수난의 전모는 하느님과의 지평이 열린 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심판의 과정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심판은 말 그대로 행한 바를 심사하여 상이나 벌을 판단하는 절차  과정이다. 그런데 마태오가 최후의 심판 기사를 종말설교의 일부로 기록하면서 쓴 용례와, 요한이 파스카의 과업이나 과제 또는 사도직을 행하느라 받는 심판의 용례를 비교해 보면 관점과 강조점 그리고 목표가 똑같지 않다.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는 누구나 심판을 받고, 상급을 받거나 벌을 받기 때문에 심판이라는 용어도 가치중립적이며 최종 순간에 받는 심판이 가장 중요하다는 방점이 찍혀 있다. 그리하여 살아온 생애에 대하여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최종 운명은 누구나에게 공평하지만, 이웃 사랑 특히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베푼 사랑의 행업 여부에 따라서 사랑의 기준에 따라서 심판을 받아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천당으로 올라가거나, 영원한 벌이 기다리고 있는 지옥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살아온 전 생애에 대해서라기보다는 파스카 과업이나 과제 또는 사도직 같은 행동에 대해서 심판이 적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파스카적 생애를 선택하고 감당하는 이들에게는 굳이 심판도 필요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파스카적 행동에 참여한 그 공로만으로도 심판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판을 받는 대상은 그 파스카적 선택을 반대하고 훼방을 놓고 공격을 일삼는 이들, 즉 악마의 조종을 받는 이 세상 세력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요한 12,31ㄱ)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실제적 의미로는,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요한 12,31ㄴ)이라는 의미이며 그 졸개 노릇을 한 악인이나 죄인들도 파스카적 선택을 거절한 데 대한 심판의 결과로 덩달아 쫓겨나게 될 것이다. 즉, 파스카적 생애의 상급으로 주어질 영원한 생명을 거절당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모든 사람을 이끌어 들이는”(요한 12,32) 파스카적 과업과 과제와 사도직 행동은 예수님께 중요하다. 파스카적 선택의 시작으로서, 또한 후대의 제자들도 계승할 파스카 행적을 위한 격려와 모범의 의미로서, “땅에서 높이 들어 올려지면”(요한 12,32), 즉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죽으면, 하느님께로부터 이 세상으로 파견되신 메시아의 임무가 일단 완성된다. 이어서 소개하는 교부들의 주해도 이런 맥락이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심판은 악마가 받는 심판이다(아우구스티누스). 악마는 왕좌에서 쫓겨날 것이다(테오도루스). 그분의 ‘들어 올려지심’은 그분께서 높아지시는 것이며(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때가 되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이끌어 들이실 것이다(이레네우스). 그분께서 땅에서 순교의 나무 위로 들어 올려지는 때가 그때다(이레네우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손을 뻗으시어, 한 손으로는 옛 계약의 오래된 백성을, 다른 한 손으로는 새 계약의 다른 민족들을 이끌어 들여 당신 안에서 하나 되게 하셨다(아타나시우스). 예수님께서 전에도 당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적 있어서 군중은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들어 올려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또는 그들의 양심이 그들이 지금 하려는 일의 그릇됨을 그들에게 선고할 것일 수도 있다(아우구스티누스).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은 어둠 속에 산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그들은 곧 떠나셨다가 다시 오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의 빛 안에 살지 않는다(암브로시우스). 그러나 그분께서 함께 계시는 동안, 그들은 그분이 아버지의 광채로서 빛나는 빛이심을 믿어야 한다(오리게네스). 그 빛을 받으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 아버지의 빛의 자녀가 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런데 그리스인으로서 유다교를 통해 인격적인 하느님을 알게 되어 섬기게 된 이들이 생명의 진리를 찾는 구도적 행태를 보였던 것과는 아주 다르게, 라자로 소생 기적으로 메시아적 기대를 걸게 된 유다인 군중은 이 대목에서도 또 다시 걸림돌이 되고 만다. 엉뚱한 소리로 눈이 멀고 귀도 먼 반응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율법에서 메시아는 영원히 사실 것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선생님은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그 사람의 아들이 누구입니까?”(요한 12,34ㄴㄷ) 

 

  이쯤 되면 말을 섞으며 대화를 하는 그 자체가 의미 없어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요한 12,35ㄴ-36ㄱ) 하는 정도로 서둘러 마무리하시고는 “그들을 떠나 몸을 숨기셨다”(요한 12,36ㄴ). 그 유다인 군중이 성대하게 환영해 주었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설사 그 환영의 동기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되어서라 할지라도 그렇다. 그따위 한심스런 현세적 메시아니즘의 태도로서는 그분이 선포하시던 영원한 생명과 파스카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적대자들의 음모에 휘말려 이용당하기 십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12.6. 예수의 영광이 유다인들의 불신과 음모로 가려지다(12,37-43)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12,37).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잠시 몸을 숨기시는 사이에,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요한 2,13-22) 이래 예루살렘 입성 사건(요한 12,12-19)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적대적인 태도로 그분의 복음을 불신해 온 유다인 백성들과 좁게는 사두가이 내지 바리사이 유다인들에 의해 그분의 영광이 가려지게 된 사연을 되돌아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하자면, 요한이 이미 서문에서 밝혀놓은 대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다수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요한 2,10) 또 그중에서도 지배층 - 사두가이들 - 은 그분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했을 뿐만 아니라(요한 2,11) 십자가 죽임이라는 극단적 방식으로 그분을 거부했지만, 소수는 그분을 맞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았다(요한 2,12). 최고의회 의원 중에서도 니코데모나 아리마태아의 요셉 같은 유다인 원로는 의원 다수를 차지하던 바리사이들이 특히 심하게 적대하는 분위기 때문에 내쫓길까 두려워서 나서지 않았을 뿐이지 숨어 있는 지지자였다. 

 

  어쨌거나 이런 속사정을 무시하고 볼 때 이스라엘 전체적으로는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표징들을 일으켜 보여주고 가르치기도 했는데 알아보지 못하고 적대시하기까지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분 당시에만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 혹은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수수께끼라고 할만하다. 그토록 오랫동안 하느님께서 공을 들이셨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사악과 야곱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과 솔로몬 등 탁월하고 충성스런 지도자들에다가, 남북에서 걸출한 예언자들까지 보내셔서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타일렀는데, 왜 정작 메시아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이 결정적 상황에서 그들은 메시아를 몰라보고 죽여 버리기까지 하는 뼈아픈 실수를 했을까? 요한은 이 대목에서 그 이유를 성경의 말씀으로 풀어보려 한다. 요한의 이 노력을 교부들은 이렇게 본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유대인들의 반항에 대해 예고했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테오도루스). 그는 유대인들의 불신을 고치지 못할 병으로 표현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사야가 말하는 주님의 팔은 하느님의 아들을 가리키며, 그분께서 만물을 만드셨다(아우구스티누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으니, 그들의 불신은 하느님 때문인가?(아우구스티누스). 아니면,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하느님께서 사람을 눈멀게 하시고 마음을 무디게 하실 때는, 감추어진 심판을 통하여 당신의 도움을 거두심으로써 의로움 안에서 그렇게 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이스라엘이 교만에 빠져 스스로 눈멀게 되었다는 말도 맞고(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 사악한 악마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을 허락하신다는 말도 맞다(테르툴리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거룩한 영광 안에 당신 아버지의 옥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보고, 먼저 그분의 오심에 대해 예고했으며 그다음에는 그분에 관한 지식과 찬미가 어떻게 온 땅을 뒤덮을 것인지 예고했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예수님을 믿으러 온 사람들은 실로 신앙 안에서 자랐으며,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아버지께 대한 복종의 말로 그것을 확인해 주고자 하신다(테오도루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칭찬을 좇는, 인간의 의견에 매인 노예가 되어 버렸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이 소환한 예언자는 이사야였다. 그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를 자신의 예언서에 무려 네 꼭지나 선보였다(이사 42,1-9; 49,1-7; 50,4-11; 52,13-15). 다른 어느 예언서들에도 없는 독보적 예언 텍스트이다. 이사야처럼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에 대해서 이토록 선명하고 구체적인 예언을 한 예언자는 없다. 마치 눈 앞에서 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예수님께서도 어려서부터 이 이사야 예언서를 암송하다시피 배우며 자라셨다. 이 예언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기대해온 메시아는 뜻밖에도 고난을 받으시리라는 예언이었다. 이는 다윗 같이 혈통도 능력도 뛰어난 화려한 이미지로 메시아를 기다려온 백성의 기대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이사야는 백성의 기대와는 딴판인 이미지로 메시아에 대해 예언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 요한은 이사야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요한 12,41)이라고 해석하였다. 아마도 이 뜻은 ‘수난을 통한 영광’일 것이다. 

 

  이집트 탈출 이래로 이스라엘의 주변 민족들은 하나같이 우상을 숭배하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나 백성 역시 신앙이 약화될 때쯤에는 여지없이 우상숭배로 기울었다. 주변 나라들이 모두 이스라엘보다 강대국이었고 종교와 문화도 화려해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우상숭배 풍조에 물들자 이제는 인간 예언자 정도로는 안 되고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 백성을 찾아오셔야 한다는 메시아 대망 사상이 예언 사상 속으로 들어온 것이기도 하려니와, 그렇게 해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메시아라도 이미 백성 안에 폭넓고 뿌리 깊게 자리잡은 우상숭배 사조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는 오히려 정면으로 돌파해야 할 문제였으니까 그러하다. 그래서 이 우상숭배 사조에 영향을 받아서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요한 12,43)에 메시아가 고난받는 운명에 처한 것이라고 요한은 해석하였다. 우상숭배에 눈이 멀고 마음이 무디어진 그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이사야는 반어법 어조로 한껏 풍자한 것이다(이사 6,9-10; 요한 12,40). 예언자의 해학(諧謔)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다음 단락의 본문에서 요한은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참모습을 소개한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이 돋보이듯이, 우상숭배가 극성을 부리는 상황에서라야 고난까지 당하시며 하느님의 참모습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기도와 가르침이 돋보인다. 

 

12.7. 영광의 길: 아들을 믿는 것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12,44-50)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46.47ㄴ50).”

 

  이것이 제12장의 결론이자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영광을 청하시는 근거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일체가 되어 계신 존재로서, 그 일치에서 나오는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비추어주신다. 그 빛의 비추임은 세상에 대한 심판일 수도 구원일 수도 있다. 그분을 받아들이면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요 거부하면 들어갈 수 없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존재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길, 이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 질서이다. 

 

  “사람은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믿는다(테르툴리아누스). 아들을 모르면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암브로시우스). 아버지에게서 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으라고 부르시면서도 모든 영예를 당신을 낳으신 분께 돌리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당신에게서, 신성 안에서 당신과 같은 본질을 나누시며(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적어도 육적인 의미에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아버지께로 사람들의 눈길을 천천히 돌려놓고자 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로 아버지와 구별하시는가 하면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당신과 아버지를 동일시하신다(테오도루스). 역시 파견받은 자들인 사도들과 예수님의 관계는 이와 대조적이다. 사도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과 예수님을 동일시할 수도 없었고,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분을 바라보는 것의 차이를 신비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오리게네스).”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존재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길이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 질서라면, 그분의 존재를 닮고자 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길은 그리스도 신앙의 필수 질서에 속한다. 말하자면, 그분이 비추시는 빛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일이 기본일 뿐만 아니라 그 빛을 세상에로 반사하는 거울이 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야 어두운 세상이 밝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본 질서에 머무르고 필수 질서에로는 나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요한 12,47)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단죄를 하지는 않으시겠지만 상급을 주지도 않으시겠다는 말씀으로도 들리고, 기다려주시겠다는 말씀으로도 들린다. 신앙에 냉담한 개별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역시 복음선포에 소극적이고 무능한 교회 공동체를 겨냥한 말씀이겠다.  

 

  마지막으로, 더욱이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한 12,48). 이 말씀은 그러니까, 마냥 기다려주실 수는 없다는 뜻이겠다. 마지막 날이 되면, 이미 심판의 잣대로 제시된 그분의 말씀 즉 ‘영원한 생명을 향한 파스카’를 얼마나 이룰 수 있었는지에 따라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기본과 필수를 완성하는 이 충분질서의 심판에 있어서 키릴루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주해가 친절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빛을 가져다주기 위해 당신 신성의 눈부신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신다(오리게네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물러나는 것은 어둠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께서 당신은 심판하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왜 심판하는가?(암브로시우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이 믿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이며, 그 판결에 대해 하느님을 탓할 수 없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말씀께서는 당신 아버지의 말씀과 뜻을 우리에게 드러내심으로써(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大 바실리우스) 결국 심판자의 역할을 하실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아버지와 아들의 목적은 같으며, 그것은 곧 모든 이의  화구원이다(테오도루스). 그러나 아들은 당신이 마치 지시가 필요한 존재라는 듯이 아버지의  지시를 기다리시는 않는다. 아들의 뜻은 아버지와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大 바실리우스). 아들은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함으로써(아우구스티누스) 겸손과, 당신께서 아버지와 하나임을 나타내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로써 요한은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의 공식 활동에 대한 보도를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이제 제13장에서 제17장까지에서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고별사를 제자들에게 남기시는 대목을 보도하였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유다인들의 음모(12.1-12.7.)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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