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11.8. 메시아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요한복음] 11.8. 메시아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저녁노을의 글

2022-09-13 18:42:24 조회(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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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 예수의 표징 종합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예고한 이 말씀에 따라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으로서 표징들을 보여주셨음을  제2장에서 제11장까지 보도하였다. 이 표징들은 모든 사람에게 ‘은총과 진리’로서 계시된 것임이 역시 서문에서 진술된 바 있다(요한 1,17).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은총과 진리’로서 보여주신 표징들에 담긴 은총의 내용이 무엇이고 진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과 의미가 보편적으로 뜻하는 바에 더해서 우리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뜻하는 바도 아울러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의 전반부(제1장-제11장)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일곱 가지의 표징에 관한 보도에 접하면서, 이 표징들에 담긴 의미를 식별하는 작업을 통하여 아시아의 복음화와 토착화를 주제로 하여 우리 민족의 복음화 역사와 정체성을 추적해 온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육화의 신비가 복음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말씀이 토착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당신의 신원과 역할에 관하여 보여주신 일곱 가지 표징들은 이러하였다. 

표징 ⓵: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다(요한 2,1-11).

표징 ⓶: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시다(요한 4,43-54)

표징 ⓷: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요한 5,1-9)

표징 ⓸: 오천 명을 먹이시다(요한 6,1-15) 

표징 ⓹: 물 위를 걸으시다(요한 6,16-24) 

표징 ⓺: 태생소경을 고쳐 주시다(요한 9,1-12)

표징 ⓻: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다(요한 11,38-44) 

이 표징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볼 수 있도록 신적 능력을 발휘하신 기적들로서, 그분이야말로 “어둠 속에서 비친 빛”(요한 1,5)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이심을 알려주었다. 따라서 이 기적들은 별다른 설명이 붙지 않아도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어 오신 메시아이시라는 복음을 담은 표징이 되는 것이다. 이 표징들은 저마다 고유한 상황과 사연을 지닌 당사자들에게 당면한 고난이나 역경을 이겨낼 수 있게 해 주는 기쁜 소식이 되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까지 간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이 일들은 자연법칙을 넘어서서 일어났다는 의미에서만 기적이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기적의 혜택을 입은 당사자들은 물론이려니와 이 사건들을 함께 목격했던 많은 가난한 이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이었다. 왜냐하면 이제껏 그들이 바라마지 않았으나 그 누구도 가져다주지 못했던 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이 기적들은 자연법칙상의 기적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섭리를 기준으로 해서 보더라도 가난한 이들을 포함하되 그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그래서 사회적이고 또한 영적으로 보편화될 수 있는 기적이었다는 뜻이다. 영원한 생명에로 향하는 파스카 여정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곱 가지 각 표징들이 모두, 당사자들에게는 물론 가난한 이들에게도 정서적인 기쁨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메시아를 기다려온 이들에게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해방도 안겨 주었다. 이것이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한 말씀의 기점(基點)이다. 

 

11.8.2.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한 시사점   

  그리하여 우리는 이 일곱 가지 표징 보도를 바탕으로 하여 아시아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길을 추적하였다. 우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고 증언하는 요한복음 서문에 근거하여 살펴보았던 바는, “말씀의 탄생지가 바로 아시아”(요한 바오로 2세, 교황권고 「아시아 교회」, 1항, 5항, 1999)임을 새삼 상기시키며 대희년을 준비하자고 권고한 보편교회의 가르침이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아시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이제부터는 아시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아시아 교회, 4항, 7항). 아시아의 복음화를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언듯 듣기엔 너무 당연한 메시지가 굳이 나와야 했던 배경에는 그동안 아시아 복음화를 주도해 온 서구 라틴 교회의 선교 실패를 자인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니까 이전에 서구 라틴 교회가 아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수행하면서 일으킨 시행착오를 반성한 바탕 위에서 새로운 선교적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는 교세를 확장하고 신자의 수를 늘리려는 전투적 선교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역사와 전통을 보유하고 이미 아시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종교들과 대결하려 들어서는 서구 교회의 아시아 선교 실패의 전철을 밟을 뿐이며 그보다는 오히려 아시아인들과 아시아 종교들을 위한 말씀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아시아 교회, 9항). 그래서 아시아 종교들이 보전해 온 신성의 진정한 면모를 말씀으로 증거해야 한다. 그래서 「아시아 교회」 문헌이 주는 핵심 메시지는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한 말씀의 토착화였다(심상태). 

 

  이러한 흐름에 따라서, 또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당신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신 표징을 근거로 하여, 제2장에서는 토착화 선교를 위하여 아시아에 뿌리 내려야 할 말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표징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기적을 통해 그분의 신적 권능을 알아본 첫 제자들이 그분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지난 세기들 동안에 서구 라틴 교회가 선교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아시아인들에게도 그리스도교의 존재는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아시아인들과 아시아 종교에서는 예수를 부처나 공자와 같은 성현으로는 인정하지만 하느님으로는 믿지 않는다(아시아 교회, 20항)서양 선교사들이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기보다는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신관에 따른 교회 모델을 그대로 아시아에 옮겨 심으려고만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알려지는 표징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표징은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처럼, 전통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서구에서나 또는 서구화된 아시아에서나 지녀온 인습적인 기복 신앙으로부터 십자가로 부활하는 성서적 신앙으로 변화되는 데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말씀이 지니신 신성은 최고선의 가치로 증거되어야 하고,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투신해야 할 십자가는 아시아인들의 공동선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일이다. 이것이 포도주로 변한 물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믿게 된 변화처럼, 아시아인들과 아시아 종교를 변화시키고자 하기에 앞서서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요청받고 있는 변화이다(아시아 교회, 21-23항).

 

  아시아 선교의 역사를 반성적으로 회고해 보건대, 서구 라틴 교회의 선교사들은 아시아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면서 자신들이 몸담은 서구 문명의 옷을 입혀 소개하였다. 그러니 자연히 아시아에서 태어나 자라셨고 활동하시고 돌아가신 아시아인 예수도 서양인의 이미지로 소개하였다(아시아 교회, 20항)이렇게 서구 문명과 구분될 수 없이 들어온 그리스도교에 대해 아시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는 박해를 하며 저항하면서도 서구인들이 이룩한 물질문명의 혜택은 받아들이려 하였다. - 아시아 선교 상황은 16~17세기의 전반 상황과 18~19세기의 후반 상황에 차이가 있다. 초반에는 선교사들이 전하고자 했던 종교적 진리보다 그들이 부수적으로 가져온 서양의 발달된 과학 기술을 더 선호했으나, 서양이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삼으려 침략하던 후반에는 그리스도교를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 세력과 동일시하였다. 물질적이고 현세적 성향이 가속화되었을 뿐 예수의 신성이 가려지기는 동일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동아시아에서 고대 국가가 형성될 무렵에 전래된 불교와 유교가 문명에 필수적인 사상 체계를 제공함으로써 충돌없이 전래되었던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 그러다 보니 말씀이 기록된 성경의 진정한 의미가 서구화의 물결에 휩쓸려 버렸다. 게다가 이 물결 속에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권에 만연한 세속화와 무신론의 파도가 함께 밀려와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도 아시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알려지는 표징을 일으키는 일은 서구화된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나, 또는 세속화된 아시아인들을 위해서나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예수의 신성을 알지 못하는 선의의 아시아인들을 위해서나 모두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지나간 역사를 기록할 때 개인이든 집단이든 치욕을 숨기고 명예를 드높이려는 경향을 벗어날 수 없다. 특히 민족들의 역사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왜냐하면 역사는 패자가 아니라 승자가 기록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역사 기록이든 객관적 사실로 입증되기 위해서는 교차 검증 절차가 필요하다. 그런데 성서는 성령께서 감도하시어 쓰여진 역사 기록이어서 기록자가 속한 주체인 이스라엘 민족의 죄상까지도 낱낱이 고발되어 있을 만큼 신빙성이 있다. 지구상에 존속하고 있는 어느 민족도 자기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그토록 신랄하게 자기 민족의 죄상을 고백하고 있는 역사 기록은 없다. 그래서 어차피 자기 민족 중심으로 기록되게 마련인, 한낱 인간 역사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민족들이 행한 역사의 명암이 공정하게 반영되어 있는 성경의 기록이 진지하게 조명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이른바 성경의 진리성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런 관점에서 주목해 보니, 성경의 창세기에는 온 인류는 물론 아시아인들을 향한 메시지가 진작에 쓰여져 있었다. 

 

  창세기의 기자들은 노아가 겪은 대홍수(창세 6-9장)노아 후손 중 펠렉계 니므롯이 세운 바벨탑(창세 11장)과 역시 펠렉계 아브라함 후손이 이룩한 히브리 문명(창세 11,26; 12,1-9) 그리고 욕탄계 후손들의 동방 진출(창세 10,25.30) 등 인류의 초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들을 기록해 놓았다. 지리적으로 보면, 인류의 운명을 결정 지은 이 모든 일들이 모두 아시아에서 일어난 일들이었고 특히 동방으로 진출한 욕탄계 후손들은 아시아의 동방에서 한민족의 문명을 개척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창세기의 기록을 고고학적으로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통해서 보더라도, 대홍수 이후에 욕탄이 활동한 연대가 고조선 문명이 시작된 무렵과 일치하며, 욕탄과 그 후손들이 이주한 동방 지역 ‘스파르’는 시베리아가 위치한 동북아시아 지역과 부합한다. 그런데 창세기 기록 외에도 대홍수의 전설을 간직한 무리들이 다수 있었다는 문화인류적 연구 성과로 인하여 놀랍게도 대홍수를 피해 살아남은 이들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유전학적 분석 방식으로 현재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이들의 유전자를 추적해 보니 이들이 남방을 통해서 한반도로 이주해 와서 북방계와 남방계 이주민이 섞여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북방계 주류인 욕탄과 그 후손들이 이 남방계 이주민들과 연합하여 평화로이 부족연맹체로서 고조선을 성립시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욕탄이 우리 민족의 시조가 된 환웅이며, 욕탄과 곰 토템 부족 여군장이 혼인하여 부족 간 동맹을 맺은 결과 태어난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다스린 최초의 종교 정치 지도자임을 확인하였다. 

 

  노아의 후손으로서 동방으로 이주한 욕탄이 가장 중요시한 것은 창조주 하느님을 흠숭하는 일이었으므로, 욕탄은 노아의 유훈대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의식을 으뜸으로 행했으며 이는 단군왕검에 의하여 고조선에서도 널리 행해졌음을 입증해 주는 증거가 고조선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고인돌 유적이다. 고인돌은 국가는 물론 씨족이나 부족 단위로 제천의식을 행할 때 쓰이는 제단으로서, 제사 공동체의 구성원들 수백 혹은 수천 명이 함께 힘을 모으고 엄청난 기술과 공력을 들여서 세워 놓은 거석(巨石)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모든 백성이 하느님의 자손임을 자각하는 천손의식이 나라와 문명의 으뜸가는 최고선이 되었다. 그리고 이 최고선을 다른 주변 민족들에게도 퍼뜨려 널리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려는 ‘홍익인간’ 이념과 이를 위한 ‘재세이화’의 이념도 최고선에 버금가는 목표로 자리잡았다. 이것이 마치 예수님께서 벳짜타 못에서 고질적인 중풍으로 고생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것처럼(요한 5장), 이렇듯이 한민족 역사의 초기에 나타난 제천의식과 천손의식 그리고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이념이야말로 한민족을 이끄신 하느님의 손길이라 볼 수 있으며 이로써 한민족에게 신성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성이 깃든 거룩한 문명이어서 여타의 문명에 비해 위대하고 돋보이기는 했지만, 메시아 이전의 히브리 문명이 그러했듯이 이 신성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격적인 빛이 드러나기 전에 나타나는 여명의 빛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아시아인들에게 드러내야 할 사명은 이러한 여명의 빛을 받아 준비된 한민족의 몫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뜻을 하늘에서 받은 계시 진리로 받들어 모든 백성이 알고 지키며  공유하기 위한 공동선이 필요했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게 노래와 문양, 말과 글 등으로 표현된 겨레의 으뜸 얼로서 겨레의 문화가 되었다. 여기에다가 겨레가 천손의식과 홍익인간 그리고 재세이화의 최고선을 담을 수 있으려면 이 으뜸 얼에 이어 공동선을 실천하기 위한 법과 질서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8조법금과 홍범9주로 나타났고, 제천의식을 통해 알아내어 받들고자 했던 하늘의 뜻 즉 최고선과 공동선에 대해 사색하고자 했던 노력은 천부경에 담겨 있었으니, 이 모두가 겨레의 문화를 형성하는 노래와 문양, 말과 글 등 으뜸가는 겨레 얼에 버금가는 얼이었다. 

 

  우리는 이 으뜸 얼과 버금 얼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을 생명의 빵과 물로 보여주신 표징(요한 6-7장)에 대한 실천으로 해석하였다. 빵과 물은 생명의 음식인데,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기운을 담은 이 음식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받아서 먹고 마시라고 분부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얼이시다. 그분을 보면 하느님을 보는 것(요한 14,9)이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야 할 우리 겨레의 얼이 으뜸으로는 천손의식과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최고 가치를 담은 문화요, 버금가기로는 이 최고 가치들을 실현하기 위한 법과 질서와 사상으로 해석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시는(요한 8장) 분으로서 인간의 눈멀음을 치유해 주시는 빛이시며(요한 9장) 또한 착한 목자로서(요한 10장) 하느님의 얼이시다. 하느님의 얼이 영(靈)이시라면 인간의 얼은 혼(魂)이다. 무릇 인간의 얼인 혼은 하느님의 얼이신 영을 받아야 생기를 얻는다. 그래서 인간 생명의 본질이 영혼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겨레의 생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빛이시며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특히 겨레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여  생기를 얻기 위해서는 공동선의 보호와 증진을 책임지는 공직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 점에서 고조선 말기 이래 역대 왕조들, 특히 조선조의 지배층들이 보여준 무책임하고 무능력했던 시행착오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이제는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주권자인 국민들이 공직자들을 선출하게 되어 있으니 나라의 최고선과 공동선을 위해 복무할 인물을 뽑는 주권자들의 책임이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11.8.3. 부활하는 천손의식

  이상 여섯 가지 표징에 담긴 은총의 내용과 진리의 의미를 간추려 살펴보았다. 그런데 가장 결정적인 내용과 의미는 일곱째 표징에 담겨 있었으니(요한 11장)그것이 바로 라자로의 소생 표징으로 새겨보는 ‘부활하는 천손의식’이다. 왜냐하면 최고선과 공동선 가치에 충실한 공직자를 뽑기 위해서는 주권자들 역시 이 가치에 각성되어야 할 뿐 아니라 민주적으로 조직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 체제의 요체라 할 수 있는 보편의식으로 각성된 주권자들의 민주적 조직화야말로 고조선 문명의 언어로 계시된 ‘천손의식’과 통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일곱째 표징은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라자로를 소생시키심으로써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는 동시에 당신을 믿는 이들이 지녀야 할 부활 신앙을 매우 인상깊게 깨우쳐 주시고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이었다. 그만큼 중요하고 중요한 만큼 비장하게 임하신 일이었다. 이 표징을 빛으로 삼아 우리네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의미를 새기자면,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에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각성되었을 뿐 아니라 백 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저항했을 만큼 조직되어 있었던 박해시대 천주교 교우촌의 신자들을 그 모범적 사례로 들 수 있다.

 

  박해시대 교우촌의 실상을 소개하기 전에, 이전 주제들을 다루면서 히브리 문명과 한겨레 문명을 비교해 왔던 것처럼, 펠렉계 아브라함의 후손들 안에서 천손이라 부를 만한 ‘아나빔’들에 대해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4.3.1.)를 다시 상기하자면, 대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이 태어난 족보를 전해주는 창세기는 그 4대손 에베르에 이르러서는 다른 후손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에베르에게서는 아들 둘이 태어났는데, 한 아들의 이름은 펠렉이다. 그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기 때문이다. 그 동생의 이름은 욕탄이다”(창세 10,25). 이는 노아의 세 아들인 함과 야펫과 셈의 후손들 가운데에서 함과 야펫의 후손들에게서는 물론 셋의 다른 후손들의 기록과도 다를 뿐만 아니라 유난히 돋보이는 내용이었다. 하느님의 축복이 실현되는 계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대로, 대홍수를 겪은 노아의 유훈은 그 5대손인 펠렉과 욕탄에 의해서 아시아의 서방과 동방에서 전개되고 실현되었다. 서방 가나안 땅에서 펠렉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룬 히브리 문명과 동방 스파르 땅에서 욕탄계 단군왕검의 후손들이 이룬 한겨레 문명은 둘 다 노아의 직계 후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므로, 이 두 문명이 이주 방향은 정반대였으나 내용상으로는 마치 짝을 이룬 것처럼 창조주 하느님 신앙을 바탕이 된 문명을 세웠다. 이 점에서 노아의 방계 후손들이 이룬 다른 문명들, 예컨대 바벨탑 이래의 수메르 문명과 지나 문명 등이 하느님의 뜻 대신에 자신들의 힘을 추구한 것과 대조된다. 실로 천손의식을 지닌 두 문명과 나머지 다른 문명들이 보여준 차이는 진리를 추구하는가, 패권을 추구하는가로 나타났다. 

 

  펠렉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룬 히브리 문명이 구약성경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비해, 욕탄계 단군왕검의 후손들이 이룬 한겨레 문명은 성경상으로는 욕탄이 동방으로 이주해 갔다는 기록만으로 그치고 있다(창세 10,30). 게다가 지나인들에 의해 고조선의 옛 기록이 불태워지거나 약탈당한 결과 겨우 남아 있는 사서가 빈약하고 또 그나마 남아 있던 귀중한 사서들도 왜인들에게 빼앗겼지만, 그래도 극소수의 가장 중요한 사서들이 전해지고 있는 덕분에 이제껏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연구 성과에 힘입어 추적해 오고 있거니와, 하나의 짝인 히브리 문명의 성경 기록을 거울 삼아 다른 짝인 한겨레 문명을 비추어 보는 일은 필요하고도 유용한 일이다. 

 

 

11.8.4.히브리 문명의 천손: 아나빔

히브리 문명의 천손들은 아나빔이었고, 이들은 예언자들의 존재와 활약에 힘입어 그들과 매우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열두 소예언서와 4대 예언서에 수록되어 부각되어 있으나, 사실 이 예언을 형성하게 해 준 저변이라 볼 수 있는 아나빔들의 기도는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는 다수 민중의 목소리로서 시편에 다수 수록되어 있다. 

 

민중을 대변한 예언자들

  다윗 임금의 죄상을 매서운 어조로 질타했던 예언자 나탄은 궁정 예언자였다(2사무 12,1-12). 그런데 구약의 예언서들은 모두 궁정이 아니라 재야에서 활약했던 예언자들의 외침이었다. 이러한 예언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는 왕정시대의 초기가 지나서부터였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백성을 보살피라는 뜻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메시아 예식으로 즉위한 역대 임금들이 – 궁정 예언자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 그 기대를 저버리고 타락했기 때문에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사울과 다윗 이후에 솔로몬의 아들들은 왕좌를 놓고 경쟁하다가 솔로몬이 죽자 끝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갈라진 것도 모자라서 열 지파가 갈라져 나간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은 두 지파가 연합한 남 유다 왕국이 경쟁적으로 우상을 들여와 숭배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뜻은 가려지고 대신들은 향락을 일삼았으며 백성들은 억압받고 착취당하였다. 가난한 이들도 부쩍 늘어나기 시작한 이 무렵부터 남북 양국에서 예언자들이 출현하였다. 

 

각성된 백성, 아나빔

  예언자들이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목자들을 비판하는 동안에 지배층의 억압과 착취를 당해야 했던 백성 중에서는 그로 말미암은 가난 속에서도 하느님께 탄원하며 참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시편에 들어있는 탄원의 기도 시들은 모두 이들의 작품이다. 그중에 대표적인 탄원이 시편 137편에 나온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들은 땅을 차지하리니.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악인은 없어지리라. 그가 있던 자리를 살펴보아도 그는 이미 없으리라.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땅을 차지하고 큰 평화로 즐거움을 누리리라”(시편 137,9-11)

 

  주님께 탄원하는 이 ‘가난한 이들’의 원 이름이 ‘아나빔’(anawim)이다. 아나빔은 ‘아니’(עָנִי, ani)의 복수형이고 “압제하다, 남을 힘들게 하다”는 뜻의 동사 ‘아나’(עָנָה, ana)에서 온 수동형 명사이다(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그러니까 ‘아나빔’이란 ‘억압당하는 자들’이란 뜻이다. 여기에서 억압을 당하고 시련을 겪으면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태도가 나오는데 모세가 온유하였다고 적고 있다(민수 12,3). 그러니까 이 ‘온유함’은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해서 지니는 태도로서의 ‘온유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신심이 두텁고 경건한 태도와 통한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마태 5,5)이라고 말씀하신 진복팔단의 예수님 말씀도 마찬가지 뜻이다. 

 

  이 온유한 사람들 즉 억압과 착취를 당해 가난하고 힘은 없지만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신심이 두터웠던 이들은 흔히 ‘야훼의 가난한 이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아나빔들의 기도를 받아 예언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 희망을 두도록 예언 활동을 하는 한편, 이 메시아를 맞아들일 소수의 아나빔들(시편 149,4; 예레 20,13)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라고 불렀다(이사 6,13; 37,31; 미카 7,18; 즈카 13,8-9). 그래서 예언자들이 대중화시킨 메시아 대망 사상은 본시 이름 없는 아나빔의 탄원을 대변한 것이었다. 재야의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탄원하는 아나빔들의 기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적나라한 현실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다시 아나빔들은 예언자들의 예언을 통해 하느님의 응답을 들었다. 그 결과 메시아를 기다리던 아나빔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가장 기쁘고 반갑게 맞이해 주었던 청중이었다. 요한복음 서문에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는 말씀이 바로 이들을 두고 예고된 말씀이다.

 

  신약성서에서 이 아나빔에 대해 직접적으로 노래한 대표적인 대목은 성모 찬송이다. 여기에서 마리아는 스스로 비천한 아나빔으로 자처하면서, 주님께서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음”을 찬송한다(루카 1,52). 또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행복선언에 대해서 마태오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마태 5,3), 루카는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이라고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두 표현 사이에 미묘한 차이 -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 가 발견되는 이유는 복음을 들은 시간의 선후에서 오는 차이가 나기 때문이고, 또한 복음을 들었거나 아직 듣지 못한 처지의 상이함 때문이다. 즉, 마태오는 메시아로부터 복음을 이미 들은 아나빔들을 표현한 것이었고, 루카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미래의 아나빔을 표현하였다. 즉, 억압과 착취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많은 가난한 이들이 메시아의 복음을 듣고 아나빔이 될 사람들을 표현한 것이다. 복음을 먼저 들은 이들이 메시아의 백성으로서 아직 남아 있는 더 많은 수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 전자가 마태오의 표현이고, 후자가 루카의 표현이다. 

 

  이 두 복음사가의 진술이 주는 의미는 이러하다. 메시아의 복음은 물질적인 축복으로 부유하게 해 주겠다는 소식이 아니라 가난해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던 이들이 위로를 받고 구원되리라는 소식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진복팔단이야말로 아나빔들의 처지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다(마태 5,3-12)열두 제자를 비롯하여 그분의 청중들 모두 아나빔의 처지에로 초대되고 있었고, 이미 마리아는 물론 그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 세례자 요한과 그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모두 아나빔이었다. 이들은 말씀으로 오신 메시아를 맞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 백성이었으며(요한 1,12), 이들 가운데로 오신 말씀의 영광을 보고 그 은총과 진리를 체험한 사람들이었다(요한 1,14)는 점에서 히브리 문명의 천손들이라 할 만하다. 

       

11.8.5. 한겨레 문명의 아나빔: 박해시대 교우촌

 

천손의식의 전통을 계승한 선각자들

  한처음에 계셨던 하느님의 말씀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시면(요한 1,1. 4)“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이사 55,10). 예언자들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말씀을 전해 주었던 하느님 말씀의 종이었다. 히브리 문명의 예언자들도 남북으로 갈라진 두 왕국으로 나뉘어져 활약했고 또 활동 시기도 저마다 달랐지만, 공통적으로는 아브라함과 모세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 활약하였으며, 이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하느님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기시켜주는 역할이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처럼 한겨레가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예언자 역할을 한 천진암 강학회의 선비들도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진리를 발견하여 전해준 이들이었다. 이 과정은 수천 년 전에 한민족의 선조들이 독창적으로 받아들인 홍익인간과 천손의식이라는 계시 진리를 히브리 문명의 정수를 담은 가톨릭 선교사들이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동아시아의 문화로 번역해 놓은 저술을 통해 재발견했다는 점에서 세계 문화사에서나 가톨릭 교회사에서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16세기 유럽에서 마르틴 루터에 의해 프로테스탄트들이 서방 가톨릭교회에서 갈라져나간 후 어수선해진 가톨릭교회의 내부 개혁을 위한 지향으로 예수회가 창설되었다. 곧 이어 예수회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아시아 선교를 개척하였다. 이에 따라 16세기 말에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원 마테오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는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노선에 맞추어 중국의 고전을 연구한 다음 유학적인 용어와 유가적 사유로 천주교 교리를 해설한 ‘천주실의’를 펴냈다. 

 

  당시 명나라의 선비들에게 천주교를 소개한 이 책이 조선에도 전래되어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성리학 일변도의 학풍에 젖어 있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천주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특히 조선 사회의 개혁을 갈구하던 많은 선비들에게 선풍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는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이벽 등과 함께 적극적인 선교 노력을 벌였고,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결성한 결과 한양에 살던 선비들을 비롯한 입교자가 천여 명에 이르렀다는 사실로 뒷받침된다(조현범, 이승훈이 북경 선교사에게 보낸 서한, 1789). 이 당시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명말청초에 전래한 과학 기술과 수리 천문에 관한 서적들이 유입되어 이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를 접한 조선 유학자들은,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일삼던 성리학과 달리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학문이라 하여 ‘실학’(實學)이라 일컬었다. 

 

  18세기 말에 남인 학자 권철신과 그 문하 선비들이 천진암에서 실학 강학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5대조 이경상이 청나라에서 아담 샬 신부로부터 받아서 가져온 천주학 서적을 어려서부터 읽은 덕분에 남달리 천주교 교리에 해박했던 이벽(李蘗, 1754~1785)이 합류하여 ‘천주실의’에 대해 강학하면서 천주학 강학회로 전환되었다(변기영). 이 때 이벽이 주목했던 개념이 마테오리치가 소개한 ‘천’(天)에 관한 인격적 관념이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천’은 송대의 주자가 해석해 놓은 자연적 관념으로서만 이해가 허용되었고, 만일 이 해석에서 벗어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패가망신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서사’(西士) 즉 서양에서 온 선비로 자처한 마테오리치가 가톨릭 신학의 권위로써 주자 이전에 공자가 본시 이해했던 인격적 천 관념으로 ‘천주실의’를 저술하였고, 이벽이 이를 알아보고 천주교 교리로서 강학을 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벽에게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천손의식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주자학의 권위와 사문난적의 위협을 돌파하는 일종의 방아쇠 효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자 천진암 강학회에 모였던 선비들도 사문난적으로 몰릴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던 주자의 성리학을 넘어 공맹(公孟)이 본시 펼쳤던 본원유학(本源儒學)의 옛 관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게다가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에는 창조주이시고 인격신이신 천의 개념뿐만 아니라 강생구속과 삼위일체 교리, 상선벌악 등의 종교적 가르침과 성사와 기도의 교리를 비롯한 영혼과 천신의 존재까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천손의식을 더욱 구체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천주교 교리가 유학의 이치를 따라 보유론적으로 서술되어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는 마치 마른 땅이 하늘에서 내린 빗물에 적셔지듯이, 주자학 일색으로 획일화된 풍조와 신분차별에 따른 사회적 모순과 민중을 억압하는 질곡에 숨이 막혀있던 이벽과 그 동료 선비들의 의식 속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주자가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해석해 놓은 유학의 원본은 공자의 사상이다. 그런데 사실은 공자 자신도 조상들로부터 전해 받은 내용을 후대에 전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공자는 자신이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편찬한 지향에 대해서, “述而不作, 信而好古”(論語 述而篇)이라 하였는데, 이 말은 “자신이 편찬했으되 창작한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승을 진리라 믿어 편찬했다”는 뜻이다. 『시경』은 주나라 초기인 기원전 1100년경부터 춘추시대 중기인 기원전 600년경까지 약 500년 동안의 가사들을 공자가 모아 놓은 것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詩歌集)이요,  『서경』은 중국 고대의 요순(堯舜)시대부터 주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왕(聖王)· 명군(明君)· 현신(賢臣)이 남긴 어록이자 선언들을 공자가 모아 놓은 책이다. 오경 중에서도 이 『시경』과 『서경』에는 천(天)에 대한 고대 중국인들의 관념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공자의 천관 역시 『시경』과 『서경』의 인격적 천관을 계승하여 그 기초 위에 형성된 것이다. 

 

  요순은 물론 공자도 동이족이었는데, 동이족이란 고조선 문명을 이룩한 한민족을 지나인들이 부르던 명칭이었다. 그러니까 한민족이 시조들이 계시 진리로 깨닫고 물려준 인격적 천 관념에 담긴 창조주 하느님 신앙이 요순을 비롯한 여러 성왕과 명군들과 현신들을 통해 지나인들에게 전해졌고, 다시 공자에 의해 본원유학의 경전 속에 담긴 것이다. 그러다가 주자 이래로 물리적인 차원에서 자연의 하늘로서만 해석해 오던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천 관념이 마테오리치와 이벽에 의해 창조적이고 인격적인 차원에서 제 자리를 찾은 셈이었고, 이로써 천진암 강학회에 모였던 선비들은 천주교 신앙에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 말씀이 아시아의 한민족에게 오묘한 섭리로 전해진 과정이었다. 

 

백성의 소리와 민중의 염원을 듣고 대변한 선각자들

  예언자는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하늘의 뜻에 충실하지만 동시대의 민중으로부터 들려오는 하늘의 뜻에도 민감하다. 히브리 문명의 예언자들이 아나빔들의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듯이, 한겨레 문명의 예언자들도 그러했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역사의식이자 사회의식이었으니, 천주교 신앙의 선각자들도 조선조 성리학의 폐해를 겪으면서 도탄에 빠진 백성의 울부짖음도 들었거니와, 오랜 옛날부터 알아왔으되 무속이라고 멸시받던 하느님 신앙을 갈망하는 민중의 염원도 들었다. 

 

  그래서 이벽은 천주교 신앙을 좀더 많은 양반들에게 전하고자, 천주실의의 배경이 된 신구약성경의 내용까지 함축적으로 간추린 ‘성교요지’를 한문으로 짓고, 이를 더 많은 백성에게 전하고자 순 한글로 대폭 간추리고 풀어 쓴 ‘천주공경가’도 지었다. 그리고 강학회에 함께 참가했던 정약종(丁若鍾, 1760 ~1801)은 ‘천주실의’와 이벽의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참고하되 아예 처음부터 한문을 배우지 못한 부녀자나 어린이까지도 읽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평이하게 한글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지어 배포하였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교우촌에서 만난 백정 출신 황일광 시몬과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교우로서 교분을 나누며 익힌 서민층 언어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덕분에 초기 교회 발전에 끼친 ‘주교요지’의 공헌은 절대적이었다. 이로써 조선의 천주교는 유학을 보완한다는 보유론을 넘어 독자적인 호교론으로 자신의 신앙 의식을 내세우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민간에서는 여전히 무교를 통하여 하느님 신앙이 도도히 흐르고 있던 터에 순 한글로 쓰인 주교요지가 배포되자 이 책에 담긴 천주교 교리가 마치 마중물처럼, 민간 의식과 정서의 저변에 흐르던 하느님 신앙의 저류(底流)를 공개적으로 분출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느님 신앙을 천시하고 제사는 조상들에게만 허용하며 그것도 양반 계층에게만 특권으로 부여되던 조선조의 정신적 상황에서 아침 저녁으로 천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모든 사람이 사회적 신분과 상관없이 천주의 자녀라고 가르치는 천주교는 천손의식을 회복시켜주는 ‘사회적 복음’이었던 것이다. 

 

  역시 강학회에 참가했던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어 있던 중에 ‘목민심서’에 이어 ‘경세유표’(經世遺表)도 지었다. 이는 행정기구의 개편을 비롯한 관제·토지제도·부세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원리를 제시하여 48권으로 저술한 정책서이다. 

 

  예를 들어, 호조(戶曹)는 재정 담당 기능과 더불어 토지제도의 개혁을 주관하고 국민에 대한 교육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으며, 예조(禮曹)는 제례(祭禮)를 담당하는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였고, 병조(兵曹)는 중앙 군영을 직접 통할하여 실질적인 군사 담당 기구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형조(刑曹)는 향리 통제·거래 질서 확립 등의 업무를 추가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공조(工曹)는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도록 국가의 자원을 관리하고 수레·선박·벽돌·도자기 등의 제작과 기술 보급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관제(官制)에 있어서도 관직 체계의 운영을 개선하여 중인기술직을 우대하고 서얼 출신의 승진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전국 8도를 12성(省)으로 재편하고 민호와 전결을 기준으로 군현의 등급을 합리적으로 재조정할 것을 강조하였고, 토지제도와 조세제도의 개혁 방안에 대해서도 서술하였는데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하여 9분의 1만을 세금으로 거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수확량을 기준으로 양전하는 결부법(結負法)을 고쳐 토지의 실제 면적을 기준으로 하는 양전법(量田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농민과 토지에만 국가의 부세가 집중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광업·공업·어업·상업·임업 등 모든 산업에 과세하여 국민의 평균 부담을 줄이는 한편, 국가의 재정 수입 증대를 도모하는 부세제도(賦稅制度)의 개혁 방안도 제시하였다. 과거제도 역시 문과·무과 모두 3년마다 1회씩만 시험을 실시하고 별시 등 각종 특별 시험을 없애되, 특히 서얼 출신이나 서북지방 출신들이 과거시험에 차별을 받지 않게 하고 관직에 들어선 뒤에도 순조롭게 승진할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이 책은 이른바 1표2서(一表二書)라 하여 ‘목민심서’, ‘흠흠신서’(欽欽新書)와 함께 정약용의 경세사상을 대표하는 저술의 하나이다. 이 가운데 ‘목민심서’나 ‘흠흠신서’가 당시의 법률 체계나 사회 구성원리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지방 행정이나 형사 사건 등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상세하고 세부적인 실무 지침을 규정하고 있는 책들임에 비해, ‘경세유표’는 국가와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위한 원칙이 보다 근본적으로 제시된 저술이다(한국민족문화대사전). 이는 그가 벼슬길에 들어선 이후 여러 목민관을 거치는 동안 백성의 현실을 몸소 겪은 체험을 반영하여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시무책(時務策)이요 새 나라 건설을 위해 제시한 정치사상으로서, 그 당시 사회 개혁을 열망하는 민중의 염원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담았는지 1894년에 봉기한 동학교도들이 혁명의 교과서로 삼았다(기세춘). 

 

  그는 ‘경세유표’를 펴내는 서문에서,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낡은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려는 뜻”으로 썼다고 밝혔다.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기 전에 이 책을 제자 이청과 초의선사에게 주면서 이를 비밀리에 배포할 것을 부탁했는데, 먼저 강진의 선비들에게 유포되다가 전봉준, 김개남에게도 전해져 혁명의 불씨가 되었으니 정약용이 1817년에 저술을 끝낸 지 67년만이요 1836년에 선종한 후로는 24년이었다(이이화). 동학혁명이 끝난 후 관군은 “다산의 비결(祕訣)이 녹두(綠豆) 일파의 비적(匪賊)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다산 유배지 부근의 민가와 고성사, 백련사, 대둔사 등의 사찰을 수색했다(강진읍지, 명승 초의전).

 

박해시대 교우촌의 실상

  조상제사금지령에 따라 일어난 진산사건과 신해박해(1791) 이후에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반국가집단으로 규정짓고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진산사건의 주인공인 윤지충이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주교 신앙을 배웠고, 이 강학회의 주된 참가자들이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 선비들이 정적으로 삼고 있었던 남인이었으며, 권철신의 문하 선비들과 이벽의 문중 선비들이 전국에서 모여든 처지였기 때문에 천주교 박해는 전국으로 번졌다(이하 출전: 최선혜, “교우촌의 형성과 확산”, 한국천주교회사). 

 

  박해가 닥치자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가옥과 전답을 버리고 가족과 친척 또는 다른 신자들과 더불어 박해로부터 더 안전한 전국의 심산유곡을 찾아 흩어졌다. 그로 인해 구석진 시골에까지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신자들이 모여 형성된 마을을 ‘교우촌’(敎友村)이라 불렀다. 이 교우촌이야말로 박해시대에 천주교회가 이어지는 구체적 신앙의 현장이자 터전이 되었다. 박해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신자들도 고향을 떠나 본래부터 교세를 유지했던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방에서 상대적으로 박해가 드문 다른 지방의 산간벽지로 흩어져 갔다. 이렇게 하여 교우촌은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에 따라 교세도 조금씩 커졌다. “박해의 폭풍이 오히려 복음의 씨를 더 멀리 날렸던 것이다”(Ch. Dallet, 조선천주교회사). 

 

  한국가톨릭대사전에 의하면, 박해시대에 전국에 형성된 주요 교우촌들은 다음과 같다. 배론(충북 봉양), 미리내(경기 양성), 수리산(경기 만안), 구산(경기 하남), 손골(경기 수지), 골배마실(경기 양지), 왕림(경기 봉담), 단내(경기 호법), 하우현(경기 청계), 시리티(경기 용인), 배티(충북 백곡), 천호(전북 비봉), 수청리(전북 칠보), 되재(전북 화사), 어두재(전북 고산), 배재(전북 운주), 성지동(전북 소양), 넓은바위(전북 동상), 대성리(전북 소양), 솔뫼(충남 송산), 배나드리(충남 삽교), 다락골(충남 화성), 신리(충남 합덕), 여사울(충남 신암), 원머리(충남 신평), 수리치골(충남 신풍), 소학골(충남 천안), 진밭들(충남 진산), 승법리(전남 곡성), 마원(경북 문경), 여우목(경북 중평), 노래산(경북 청송), 머루산(경북 석보), 신나무골(경북 지천), 한티(경북 동명), 진목정(경남 옥포), 살티(경남 덕현), 간월(경남 등억).  

 

  박해시대의 이 교우촌들은 그 지역 신앙생활의 중심지였으며, 성직자들의 피난처요 활동 근거지였고, 순교의 터전이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앙생활의 바탕이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였다. 첫째는 교회 서적이었다. 한문을 익힌 양반이나 중인 출신의 지도자급 신자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서와 한역서학서 등을 바탕으로 신앙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 교회 서적들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고 번역한 다음에는 필사하여 나누어주거나 돌려보았다. 둘째, 대부분의 교우들은 구전(口傳)에 의해 교리를 배우고 실천하였다. 주로 외진 산간벽지에 자리한 교우촌에서 교회 서적을 접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던 데다가 박해시대에는 한문을 배울 기회가 차단되었으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교리를 배우고 익히며 신앙생활을 이어 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를 위해 최양업 신부는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4·4조 운율에 맞추어 한글로 된 많은 천주가사를 지었는데, 사향가(思鄕歌)영세가, 천당가, 지옥가, 십계강론, 삼세대의(三世大義), 견진, 고해, 성체, 종부, 신품, 칠극, 혼배, 제성(提醒=잊어버렸던 것을 생각하여 깨우치게 함), 행선(行善), 애덕, 선종가, 사심판가 그리고 공심판가 등이 그것이다(김옥희). 이밖에도 교우촌에서 불리워진 천주가사들은 한역서학서에서 주요 천주교 교리를 발췌하여 지어졌는데, 특히 죄악의 근원이 되는 칠죄종(七罪宗)을 극복하기 위한 ‘칠극’(七德)을 비롯하여, 양심성찰을 돕는 ‘성찰기략’(省察記略), 참회기도서인 ‘회죄직지’(悔罪直旨), 영성생활 지침서인 ‘신명초행’(神明初行), 칠성사의 교리서 해설서인 ‘성교절요’(聖敎切要), 사후묵상서인 ‘사말론’(四末論) 등이 그것이다(김창환). 셋째, 성화와 성물이었다. 대표적인 성물로는 묵주와 십자고상이나 성모상 등을 들 수 있다. 넷째, 드문 경우이지만 순교자의 자취를 간직하는 것이었다. 순교자 유해의 일부나 두발 등을 간직하기도 하였고, 그들이 남긴 성물, 서적 등을 간직함으로써 순교자의 신심을 본받으려 노력하였다. 다섯째, 공동체였다. 이들의 신앙생활은 교우촌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지내는 가운데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었다. 

 

  교우촌의 공동체 생활은 신앙만이 아니라 일상생활까지 대부분 회장이 중심이 되어 공동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들을 위해 서로 도왔다. 교우촌 신자들은 숨어 사는 피난생활이었기에 생활 형편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교우촌은 언제든지 포졸의 습격을 피해 달아날 수 있도록 궁벽한 지역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생업을 유지하는 일도 지속적인 계획 아래 이루어지기 힘들어서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짓거나, 조, 밀, 채소 또는 담배 등을 재배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공간조차 없는 산간 지대에서는 서로 협력하여 옹기나 숯을 구었다. 옹기나 숯을 구워 팔자면 이곳저곳을 다녀야하는데, 다른 신자들이나 흩어진 가족을 수소문하여 만나기에도 적당하였으며, 교우촌 사이의 연락을 도모하기에도 적합하였고, 큰 밑천이 필요없을 뿐만 아니라 이익이 많이 남는다는 이점까지 있었고,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직업이어서 주목을 덜 받는다는 이점도 작용하였다. 

 

  교우촌의 생활을 통해 신자들에게는 공동체 정신이 피어났다. 신앙을 위해 모여든 교우촌에서는 신분이나 재산 학식 등은 문제되지 않았으며, 공동 작업과 공동 분배의 방식을 취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로 살았다. 그래서 비록 신자가 아니더라도 도움이 필요한 고아나 과부 같은 이들도 교우촌에 찾아오면 반가이 맞아들여 주었다. 게다가 교우촌 신자들은 신자들끼리 혼인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서로 간에 혼인을 맺었으므로 계층 간 구별이 자연스럽게 흐려졌고, 천주교 교리에 입각한 평등 의식을 한층 실천하고 의식하며 살아갔다.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생활에서는 회장을 중심으로 한 평신도의 역할이 큰 몫을 담당하였다. 회장들은 신자들을 보호하고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을 이끌어 나갔다. 회장이라는 직책은 선교사를 대신하여 교우촌의 모든 일을 주관하고, 선교사가 순방하며 성사를 집전할 때 이와 관련된 모든 준비와 진행을 맡아서 처리하였다. 또한 회장은 선교사의 지시 사항이나 가르침 등을 신자들에게 전달해 주었으며, 혼인과 장례, 주일과 축일의 기도 모임, 교우 간 소송의 중재 등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회장은 교리교사로서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이를 위해서는 한글도 가르쳐야 했다(會長規條)

 

  한국의 천주교회는 세계 교회역사상 유례없는 전통을 세 가지 지니고 있는 바, 하나는 진리에 대한 구도적 열의로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교회를 창립했다는 진리 추구의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창립된 이 교회가 박해를 백 년 동안이나 받았으나 이 기간 동안 역시 자발적인 신앙 공동체로서 교우촌을 세워서 저항하여 끝내 신앙의 자유를 얻어냈다는 불의에 대한 저항의 전통이다. 전자의 전통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양반 신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저작(이벽의 聖敎要旨)에서는 보유론(補儒論)적인 입장이 강한 반면, 후자의 전통에서 천주교 신앙을 지키기로 작정한 중인 이하 계층 신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저작(정약종의 主敎要旨)에서는 호교론(護敎論)적인 입장이 강하다. 그러므로 전자의 전통은 선교사 없이 남인 계통 선비들이 능동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교회를 자생적으로 창립하기는 했으나 유교를 보완하는 입장에 머물렀던 반면에, 후자의 전통은 전면적인 박해를 당하여 보유론을 과감하게 버리고 호교론을 취하면서 교우촌을 건설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신앙 가치를 수호하고자 했다는 차이가 있다. 전자의 저작은 한문으로 쓰여져서 주로 양반들을 겨냥한 것이나, 후자의 저작은 순 한글로 쓰여진 데다가 서민들의 구어체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도 이 둘의 차이를 잘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세 번째는 불의에 저항하며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발휘한 자발성과 창의성을 들어야 한다. 성사교리에 무지한 상태에서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가성직제도’는 북경 교구 구베아 주교가 그 불법성을 안 즉시 내린 지시로 해체되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당시 초창기 조선 천주교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이벽의 빈 자리를 이승훈으로 채우고, 권일신을 주교로 하며 나머지 10여 명의 선비들로 신부로 삼아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거행함으로써 불과 5 년여 만에 한양 선비를 포함하여 천여 명의 새 입교자를 배출함으로써 기적적인 성장을 일구어 냈던 것이다. 신앙과 의지가 있는 평신도들에게 자발성과 창의성이 발휘된다면 선교에 있어서도 놀라운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 사례이다. 교우촌 역시 평신도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발휘된 사례이다. 그 누구도 이런 형태의 신앙 생활을 꿈꾸어 보지 못했고 나서서 권할 수도 없었던 박해 상황에서, 그야말로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역사의 진행 상황으로 전국 곳곳에 교우촌이 세워져서 그들이 믿는 바의 천주교 진리를 봉행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독보적 전통 못지 않게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정체성의 이정표를 세운 중요한 전통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천주교 교우촌의 신자들은 양반이나 중인, 상민이나 천민 같은 사회적 신분을 넘어서서 평등한 '교우’(敎友)로서, 양반 위주로 신분 제도를 운영하던 조선조 지배층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생활했던 적극적 실천가들이었다. 또한 박해가 시작되고 전면적으로 확대되어가자, 가족의 기도생활과 성사생활을 영위하고자 가옥과 전답,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모두 버리고 심산유곡으로 숨어 들어가 세운 신앙 공동체가 교우촌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들은 제천의식을 잊어버린 조선조의 왕실과 유림이 가하는 박해에 맞서 민간 차원에서 제천의식을 생활화한 천손들이었다. 박해상황에서 행한 이 모든 실천은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면 치명할 것을 각오하고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제사금지령이 알려지자 진리에 대한 호기심으로 신앙을 받아들였던 초기 양반 신자들이 대부분 신앙을 포기하고 탈락한 반면, 중인 신분 이하로서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던 대부분의 신자들은 방방곡곡의 심산유곡으로 찾아들어 교우촌을 세워 신앙의 진리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들에게 천주교는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삶이었고 실천이었으며 살아 움직이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었다(황인경). 그러니까 이 교우촌의 신자들은 고조선 이래 조상대대로 민간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온 하느님 신앙에 따라서, 중국에까지 온 선교사들이 서적으로나마 복음을 전해준 덕분에, 빛이시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 겨레의 영혼이 생기를 얻도록 목숨이나 일생을 바친 이들로서, 한겨레 문명의 최고선으로 계시된 천손의식으로 충만한 이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히브리 문명에서 예언자들이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아나빔들에게 전해주어 그들이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었고 또 아나빔들의 탄원 속에서 이들의 신앙 감각을 경청하고 식별한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소리를 들어 자신들의 소명을 실현할 수 있었듯이, 한겨레 문명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던 천주교 전래 과정에서도 천진암 강학회의 선비들이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신앙의 길을 본격적으로 열어주었고 그 중 주교요지나 천주가사를 지어 신자들이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게 해 주었으며 또한 조상제사 금지령으로 양반 출신 신자들이 떨어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중인 이하 신분 출신이 신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전국에 교우촌을 이루어 박해에 저항하고 신앙 진리를 증거해 나갔던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욕탄/환웅과 단군왕검이 전해준 천손의식의 여명을 이어 받아 메시아와 그 복음을 받아들인 아나빔들이었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1.8. 메시아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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