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10.6. 문명의 리더십

[요한복음] 10.6. 문명의 리더십

 

저녁노을의 글

2022-09-11 17:48:31 조회(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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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 눈을 뜨고 예수의 빛으로 진리를 알아보기

  제9장에서 복음사가 요한이 우리에게 알려준 바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사물을 올바로 보게 하심은 물론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께서 지으신 온갖 영적 질서까지도 제대로 보게 하는 눈을 뜨게 해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물질 세계와 영적 현실을 아울러 보게 되는 이 눈뜸을 두고 진리에 대한 개명(開明)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명의 단계에서는 태생소경이 하느님께 대해 신앙을 갖게 되고 바리사이들의 불신앙을 눈치챌 수 있었던 것처럼, 영적 현실까지도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빛을 통해서 보게 되는 현실일 뿐이다. 만일 빛이 없으면 눈을 뜰 수 있다 할지라도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존재하는 그 어떠한 현실도 식별할 수 없다. 그렇듯이, 예수님께서 빛이심을 알아보는 일이 우리가 진리를 알아보는 일과 영적인 눈을 뜨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도 예수님을 빛으로서 알아보아야 제대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인간이 개인의 실존으로 성숙해지는 것(실존적 구원)이나, 사람들이 이룩하는 문명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것(사회적 구원)도 모두 여기서 시작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의미요 또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9장의 본문을 풀이하는 말미에서는 그리스도 신앙이야말로 문명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섭리대로 문명답게 하는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라는 관점에서 히브리 문명과 고조선 문명을 비평하였다. 

 

  그에 이어서 제10장에서 요한이 우리에게 전해준 바는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시는 목자이시라는 계시였다. 이 목자론(牧者論)을 교회에서 통용되는 신학 용어로는 선교론이라 이해할 수 있겠다. 교회 내부의 신자들을 상대로 하는 사목론보다는 사회적이고 문명적인 차원에서 훨씬 더 넓은 의미로 통용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목자론을 일반 사회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풀어 말하자면 지도력 또는 리더십(Leadership)에 관한 비평이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빛으로 알아보고 이를 세상에 알린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이름을 알리고 그를 추종하는 조직의 교세를 확장하는 종교적인 선교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는 그분이 비추어주신 빛에 따라서 개인들이 인격적으로 성숙하며 또 성숙해진 개인들이 이룩하는 문명이 문명다워지고 이 문명이 발하는 빛을 다른 세속적인 문명의 사람들에게 비추어 모든 문명이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만들어 주는 일을 뜻하기 때문이다.  

 

10.6.2. 히브리 문명의 목자론

  히브리 문명에 있어서는 목자론의 기준이 하느님이시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시편 23,1)이시라는 신앙이 히브리 문명의 토대요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브리 문명이 정착되어 가면 갈수록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러한 신앙은 희미해졌고 약해졌다. 그래서 왕정 초기에는 나타나지 않던 예언자들이 중반 이후에 출현하여 이렇게 외쳤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읊었다.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는 보편적 선교 전망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를 ‘고난받는 주님의 종’으로서 예언한 것이다. 이 예언 자체가 이스라엘 민족이 이룩한 히브리 문명 자체가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는 하느님의 빛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히브리 문명의 역사에서 목자론은 에제키엘 예언서 제34장에 집약되어 있고 그 결론이 요한복음 제10장이다. 에제키엘의 회고적 예언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들의 젖을 짜 먹고 양털로는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들은 잡아먹기까지 하면서도 양 떼는 먹이지 않았다”(에제 34,3).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았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도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주지 않았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양 떼를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에제 34,4).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던 양 떼가 되어 들짐승 (같은 주변 강대국)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에제 34,8). 이 예언 말씀에 담긴 목자론 속에 통일 왕국이 수립된 이후 목자 역할을 해야 했던 모든 지도자들 즉, 역대 왕이나 신하 같은 정치 지도자들과, 예언자와 사제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담겨 있다. 즉,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하느님 신앙에 충실하지 못하고 우상 숭배에 물드는 바람에, 하느님의 뜻이 담긴 최고선과 백성을 위한 공동선에 위배되는 죄악을 저지르다가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왕국에게 멸망당한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다. 에제키엘은 이렇게 신랄한 표현으로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심판하는 한편, 장차 오실 참 목자를 예고하였다(에제 34,11-16). 

 

  그리고 이를 이어 복음사가 요한은 예수님의 입으로 그 참 목자상을 이렇게 밝혔던 것이다. 그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으며”(요한10,10),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리는 이리”(요한 10,12)로부터 “양 떼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는 것이다. 과연 에제키엘이 밝힌 참 목자상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오셔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과 착한 목자로서의 삶을 실천하시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런데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등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착한 목자로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이 사건,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 자체가 히브리 문명이 수행했어야 할 목자적 역할이 종식되었음을 알리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그분은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교회를 세우셨고, 사도들을 통하여 착한 목자의 모범을 따르게 하셨다. 그리스도교 문명에게 새로운 목자적 사명이 부여된 것이다. 이를 통해 히브리 문명의 특질이었던 바,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기 위한 자세로서 이집트의 악에 대한 저항을 보편화시키고 승화시키는 파스카 신비를 믿는 이들이 기본적으로 하느님께 바쳐야 할 제사로서 미사에 구현하도록 유언을 남기시기까지 하셨다. 

 

10.6.3. 한겨레 문명의 목자론

  그렇다면 고조선 문명에서는 어떠했던가? 한겨레가 이룩한 문명의 시원인 고조선 문명에서 목자론 내지 리더십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천손의식이었다. 이는 지도자뿐만 아니라 백성 모두가 하느님의 자손, 즉 천손임을 일깨워주고 모두 다 평등하게 하느님 앞에 나아와서 제사를 바치는 한편, 제사에서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함에 있어서도 똑같이 책임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홍익인간 이념과 재세이화를 표방했던 고조선 문명은 인간세상의 삼라만상을 널리 이롭게 하고 인간세계에 머물러 살면서 모두가 천손임을 의식하는 이타적 세계관을 실천함을 지향함으로써 온 인류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세계관이었다. 단군왕검은 종교적 사제이자 정치적 군장을 겸하여 이러한 대의를 고조선 문명에서 구현하였으며,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계승해야 할 삶의 양식이자 바람직한 미래 구상의 문화적 자산을 제공해 주었다”(신용하). 고조선 문명의 대의가 집약된 천손의식을 예수의 빛으로 식별하자면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구현하는 최고선과 인간의 존엄성 가치를 구현하는 공동선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고조선 문명 초기에 그토록 찬란했던 천손의식의 고귀한 뜻은 세월이 흐를수록 빛이 바랬으니, 고조선에서도 백성을 차별하는 신분제도가 생겨났고(신용하), 귀족과 평민 그리고 천민으로 백성을 가르는 이 사회적 신분제도는 고조선이 여러 나라들(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와 가야, 통일신라와 발해)로 분열되었던 열국 시대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사회적 신분을 제도적으로 규정해 놓았으며, 특히 그 중에서도 천민 신분은 양반 신분처럼 세습시켜 놓았기 때문에 조선 중기에 가서는 인구의 절반이 천민으로 채워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이러한 차별에 저항하는 민란도 그치지 않았으니, 고려 시대에 일어났던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의 난(1176~1177)과 만적(萬積, ?~1198)의 난(1198)에 이어서,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일어난 홍경래(洪景來, 1771~1812)의 난(1811~1812)과  장길산(張吉山)의 난(1692~1696) 그리고 동학란(東學亂, 1892~1895) 등이 일어났다(출처: 한국의 반란목록, 위키백과). 고조선의 문명이 고조선이라는 하나의 정치적 체제로부터 고구려를 비롯한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대립하게 된 일이나, 각 나라 안에서 신분을 나누여 사회적으로 차별하게 된 일이 모두 천손의식의 후퇴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천손의식의 후퇴 현상에 대해 무교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사상적으로 분석한 이대근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민족의 사상이 반만년을 흘러온 역사에서 천손의식이 침체되거나 왜곡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불교와 유학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와 불교가 국교로까지 숭앙되던 고려시대에 이 땅의 문화를 불교가 지배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밖으로 드러난 표피층의 겉모습일 뿐이요, 심층부의 속 모습은 불교 이전에 이 땅에 자리 잡은 하느님 신앙에 토대를 둔 고유종교(巫敎)가 있었다. 그 고유한 영성의 틀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도 계속 불교와 섞이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며 유지되어 왔고, 오히려 이 땅에 수용된 불교의 성격과 형태를 규정하였다. 우리 민족의 의식구조와 생활양식의 원형을 이루는 그 고유한 종교사상을 심성 깊이 받아들인 민중은, 지배층이 도입한 외래 종교마저도 받아들여 용해하고 새로운 형태로 주조해 내었다”. 

 

  “더욱이 하느님과 같은 절대자를 용인하지 않는 불교의 영성은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인간의 고뇌에서 출발하여 비인격적인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상향적이고 자력수행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의 심성과 영성의 원형구조와는 동질화되기 어려운 구조였다. 이것이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 무려 1,500년 동안이나 이 땅에서 유일한 절대종교처럼 군림하면서도 우리 민족 심성 속에 온전히 토착화되지 못한 이유이다”. 

 

  “그 이후에 고려 왕조가 조선에 의해 멸망하면서 이 땅에서는 불교 대신 유학을 숭상하는 기풍이 진작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국교가 불교라고는 해도 다종교가 공존하는 전통이 유지되었으나, 조선 시대에는 유학 중에서도 성리학(性理學)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으면서, 조금이라도 이에 어긋나는 사상들 즉 불교·도교·무교는 물론 명나라 시대에 일어난 유학의 신사조(新思潮)인 양명학까지도 모조리 배척하였다. 이는 조선조에서 성리학을 종교 수준으로 국교화했음을 뜻한다. 조선 왕조 초기에 주자의 가르침을 따라서 편찬된 경국대전은 통치이념을 성리학으로 고정시켜 버렸다. 또한 정치적으로나 일반 백성의 윤리도덕에 대해서까지 모든 측면에서 조선은 성리학적 유교 일색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종교 신앙적 측면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고조선 문명의 특질이었던 진리와 의로움이 민족의 심성 안에서 도도한 흐름으로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표면상으로는 유교국가인 듯 했지만, 그것은 지배층의 남성 집단에 국한된 표층현상에서 그랬을 뿐이고, 조선 시대 한겨레의 심층에 흐르는 사회 현상에는 유교 대신 무(巫)·불(佛)·선(仙)으로 불리는 전통 종교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특히 서민들과 여성 집단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유학은 민중의 영적 욕구를 채워줄 만한 종교적 요소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랜 세월 동안 유학 경전을 읽어야 하고 그 중에서도 극소수만 과거를 통해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등 그 학문적 문턱이 높았기 때문에 일부 지배층과 지식층에 의해 독점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일반 민중은 접근할 수 없었다”. 

 

  “(조선조에서 종교도 아닌 학문을, 그것도 유학의 한 분파에 불과한)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부작용은 막대하였다. 조정과 유림에 의한 지속적인 억압과 배척 속에서 무교와 불교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변질되어 갔다. 고려조까지 민중의 존경을 받는 신분이었던 승려와 무당은 조선조에 이르러 그 신분이 천민으로 격하되었고 점차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갔다. 불교는 억불정책으로 인한 타격을 회복하지 못하고 깊은 산속으로 은둔하거나 무교와 절충한 형태로 종교적 명맥을 이어 갔는데, 무교 역시 금압(禁壓) 정책으로 인하여 하느님을 섬기며 천손의식을 천명하던 전통을 상실하고 잡신을 섬기는 주술(呪術)과 기복(祈福) 신앙으로 변형되어 갔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천신제(天神祭)였던 부락제(部落祭, 마을굿)가 위축되고 변질된 것이 그 사례이다. 그 결과, 조선 왕조의 유교적 사대주의(事大主義)·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 등으로 역사 이래 천손으로서 지녀왔던 민족의 자존심은 철저히 뭉개져 있었고, 백성의 제천이 금압되고 오로지 조상제사만 허용되는 유교적 예제로 인해 민족 의식구조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아 왔던 하느님께 대한 종교적 욕구들이 왜곡 억압되어 있었다. 이것이 조선 후기 천주교 전래 시기의 상황이었다”(이대근, 巫敎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 종교사상사). 

 

  요컨대,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되어 우리 민족의 문화 전통과 섞이면서 고조선 문명에서 추구하던 대의가 빛바래더니 급기야 고려 말에 유학이 전래된 이래 조선조는 유학의 한 분파인 성리학을 유교로 삼아 고조선 문명의 대의(大義)인 천손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조선조가 멸망한 이유들을 살펴보자면 이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들이 철저하게 짓밟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히브리 문명의 목자론을 설파하던 예언자들도 이스라엘의 두 왕국이 멸망한 가장 큰 원인으로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정의와 공정의 가치가 실종된 사태를 들었는데, 이 진단은 최고선과 공동선 파괴와 정확하게 대입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신앙은 천손의식을 회복하기 위한 방향에서 성리학적 유교의 한계를 꿰뚫어본 선비들이나 그에 억눌려 살아왔으나 하느님 신앙을 심성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민중 안에서 새로운 목자상을 갈망하게 되었다. 천주학을 논하는 천진암 강학회에 함께 참가했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세례를 받고 나서 몇몇 관직에 종사하다가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취조를 받은 후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는 형을 받았는데, 그 유배지에서 1818년에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지었으니, 이 책은 조선의 목민관 현실을 비판하고 바람직한 목민관상을 제시한 저술이다. 이 책은 그가 18년의 유배 기간 동안 이밖에도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조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지향으로 펴낸 500여 권에 이르는 ‘여유당 전서’ 가운데 한 저술이었다. 이 저술들에는 성리학 이데올로기로 국정이 운영되던 조선 사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 담겨 있어서, 천진암 강학회에서 학습한 천주학의 신앙적 기준이 폭넓게 적용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목민심서’에서 정약용은 목민관으로 불리는 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指針)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하였다. 수령이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부임하는 일에서 시작해서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법,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는 법,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법, 백성을 사랑하는 것, 아전들을 단속하는 법, 세금, 예절, 군사, 재판, 그리고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법, 그리고 퇴임하는 일이 어떠해야 하는지 등을 소상하게 기술하였다. 또한 부패의 극에 달한 조선 후기 지방의 사회 상태와 정치의 실제를 민생 문제 및 수령의 본무(本務)와 결부시켜 소상하게 밝혔다. 

 

  그러자니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는 농민의 생산과 경제 문제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는데, 수령 직무 54개 조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전정(田政)으로 보고 양전에서의 각종 폐해를 지적하면서 그 개혁 방안을 전론(田論)에서 결론지었다. 정약용은 조세 관리에서 농민과 국가의 중간에서 이루어지는 협잡을 제거하자는 방향에서 개혁을 논하였다. 그와 함께 그 시정책의 하나로 공물(貢物) 제한을 들고 대동법의 모순 확대를 지적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모순을 제거하는 데 제도적 개혁과 법으로의 구속을 기본으로 하지만, 국가 재정의 정비, 관료들의 절약과 청백리(淸白吏) 사상에 따른 윤리적 제약과 함께 관리의 합리화에서도 그것을 찾고자 하였다(출전: 위키백과).

 

  하지만 목민관의 개혁을 촉구하는 이런 저서의 출간에도 불구하고 유배 중인 선비가 쓴 저술로써는 조선의 행정이 개선될 수 없었으며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달았다. 광범위하게 삼정(三政: 田政·軍政·換穀)이 문란해졌고, 이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민심이 요동쳤으나 조정의 응답이 미흡하자 동학교도들이 1894년에 봉기했으니,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이다. 신분제의 타파를 비롯한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왜양이(斥倭攘夷) 등 폐정개혁 12개조를 내걸고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무기력한 관군 대신에 청(淸)나라 군대를 끌어 들였으나,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청군의 진주를 이유로 자국 군대도 조선에 보내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한편 조선의 내정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는 빌미로 삼았다. 결국 그 10여 년 후 조선은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해당되는 요한복음서 제10장의 본문이 이것이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요한 10,12). 또한 에제키엘 예언자의 경고가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서만이 아니라 조선조의 목자들에게서도 현실이 되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적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 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었다.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에제 34,2-6).

  

10.6.4. 조선이 망한 이유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조가 멸망한 가장 큰 이유는 근본적으로 천손의식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지만, 제10장의 주제인 목자론과 관련한 리더십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 교훈을 끌어낼 만한 이유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적어도 여섯 가지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조선의 지배층이 천손의식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한 나머지 지나인들의 정신적 속국을 자처하여 송나라 주자가 공자와 맹자의 저술들을 나름대로 해석해 놓은 ‘성리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고, 둘째는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겼던 조선 조정에서 지식을 독점함으로써 그나마 보편적 지식을 획득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했으며, 셋째는 주자학을 종교처럼 섬긴 지배층 사이에서도 정치적 실패에 따른 책임을 묻지 않음으로써 개혁의 여지를 봉쇄했고, 넷째는 이러한 지배층의 실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원천이 민심인데도 위민정치(爲民政治)를 내세운 유가적 이상도 저버리고 민심을 배반했으며 그 결과 일어난 민란을 막무가내로 진압하려고만 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중의 움직임으로서 천주교도를 박해하고 동학교도들을 탄압했으며, 다섯째는 지배층이 무능했던 데다가 관료들의 기강도 심각하게 해이(解弛)되었고, 결정적으로는 여섯째 이런 이유들로 국력이 쇠약해진 조선을 일제가 무력으로 침략했기 때문이다. 이상 간추린 여섯 가지 이유들을 조목별로 살펴보겠다. 

 

- 첫째는 조선의 지배층이 건국 초기부터 성리학과 소중화주의를 경국대전에 기록하여 통치이념으로 천명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스스로 상실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오류로 배격하고, 성리학만을 독점적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다 보니 성리학의 본산인 중국 문명에 대한 지나친 사대주의와 우리 고유의 문명을 얕잡아보는 폐단이 생겨났다. 게다가 중국에서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당하자 민족의 정체성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주류인 여진족이 한족(漢族)이 멸시하던 오랑캐라는 이유로 한족인 명나라의 이념과 명분을 조선에서 계승하겠다는 시대착오적 ‘소중화의식’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청나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 질서를 거부함으로써 병자호란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조선을 제외한 다른 나라를 오랑캐로 간주해 스스로 폐쇄적인 벽을 쌓는 국제적 고립까지 자초했다.  그리하여 조선조가 지배하던 시대 내내 해외 유학과 해외 무역은 물론 국제 왕래는 모두 금지되었다. 

 

  사실 중화문명의 영향은 조선 시대에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지나인들에게 선진 문물을 전해준 고조선이 멸망하고 나서부터 그들은 고조선의 앞선 역사를 신화와 전설로 만들어 역사에서 몰아내었으며, 고조선이 전해준 문물을 가져가서는 신성을 삭제한 채 유물론적으로 해석하고는 자신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거꾸로 한민족에게 전래하였다. 이러한 지나사관으로 포장된 중화문명은 근 2천 년 동안이나 한반도에 들어선 나라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오다가 조선조에 이르러 극성기에 달했기에 조선 왕조는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자처한 중국의 역대 왕조를 상국으로 떠받들며 ‘소중화’(小中華)로 자처했으며 유림들도 중국을 ‘공자의 나라’라며 우러러보는 모화 사대주의 풍조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이 지나사관에 세뇌된 이들은 최근까지도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동아시아 모든 문명은 물론 한민족 문명의 원조라고 인정해 버리는 우매한 역사의식에 휘둘려 왔던 것이다. 

 

  모화 사대주의의 대표적 사례로서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유림의 반응을 들 수 있다. 한자는 뜻을 담은 표의문자(表意文字)였으므로 추상적 개념을 표기하는 데 편리한 점은 있으나 말을 소리나는 대로 기록할 수는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백성이 쓰는 말과 글이 달랐고 또 일반 백성은 한문을 배울 기회가 없으니 한문을 공용문자로 쓰는 조정과 백성 사이에 의사소통할 수단이 마땅치 않아서 정책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4대 임금 세종이 1443년 고조선의 천손의식을 반영한 천지인 삼재사상을 계승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는데, 이 조차도 당시 신하들은 대국(大國)인 명나라의 문자를 쓰지 않고 독자적인 문자를 쓰면 대국이 싫어할 것이라며 극구 반대했으며 유림들도 훈민정음을 무시하면서 쓰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한문에 담긴 지식과 정보를 독점해 온 양반 유림들의 기득권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결과였다. 따라서 우리 문자 훈민정음이 공식적으로 창제된 이후에도 조정과 나라의 공식 문자는 한문이었으며 한글은 부녀자들이나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이 쓰는 문자로 취급하였다. 이를 두고 훈민정음을 천시하기 위한 언문(諺文)정책의 탓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이는 언문정책 탓이 아니라 조선 지식층의 한문우대 체질 때문이었다. 사실 언문은 훈민정음의 초중종성을 모아쓴 음절(音節)문자를 말하는 것으로서 훈민정음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 아니다. 훈민정음은 음소(音素)문자인데, 이를 초중종성으로 음절 단위로 모아야 의미를 지닌 발음을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글 천시 태도는 그 후에도 지속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당시에 마침내 한글을 ‘국문’(國文. 나랏글)이라 하여, 국문을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혼용하게 하였다. 이처럼 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만든 제 나라 문자도 450여 년 간이나 공용화되지 못할 정도로 문화적 사대주의는 심각했다. 이렇게 조선의 지배층이 건국 초기부터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소중화의식에 사로잡혀 지나인들의 성리학을 견지한 사태는 끝내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 둘째, 조선의 조정에서 지식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유학을 배울 수 있는 특권을 누렸던 양반 계층의 선비들도 과거 시험에 필요한 과목에 대해서만 통달할 수 있었을 뿐 폭넓은 지식을 알 수 없었으며, 그나마 한문과 유학을 배울 길이 없었던 백성들은 지식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막혀있었다. 

 

  주자학이 학문의 전부라고 간주한 조정에서 지식을 독점하고자 했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은 서점이 발달하지 않았다. 책에 대한 수요는 분명히 있었지만, 주자학 이외의 지식을 널리 퍼뜨리려는 의지가 없었다. 지배층은 권력의 원천인 지식을 독점하길 희망했으며 책이 필요한 관리들은 나라로부터 책을 하사 받으면 그뿐이었다. 

 

  그 한 예로, ‘반계수록(磻溪隨錄)’은 실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반계(磻溪) 유형원의 역작으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드러난 조선사회의 문제점을 분석해서, 토지 및 조세제도, 인재 선발과 교육제도, 노비제도, 군사 및 행정제도 등 정치 및 경제의 핵심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정책제안을 담고 있던 서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조선 사회의 핵심적인 공동선을 논하는 서책 하나가 세상에 발간되어 나올 때까지 100년이 걸렸다. 지식을 독점해 오던 지배층 선비들에게서는 지식 유통의 의지는 물론 나라의 공동선에 대한 책임의식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천손의식을 담고 있는 옛 사서들은 세조 이래로 조정에서 수거하여 민간 유통을 아예 금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중국의 정치와 사상을 모방하고자 했으므로 중국의 문명을 배우는 지식 이외에는 다른 교육적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중국의 여러 왕조들 가운데에서도 주자가 활동했던 송나라를 본받고자 하였으므로 문약(文弱)에 치우쳤다. 따라서 관리가 되고자 하는 선비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의 시험 과목을 서당에서 가르치는 교육이 일반적이었다. 

 

  서당교육의 내용은 강독(講讀), 제술(製述), 습자(習字)의 세 가지였다. 강독은 한문을 읽는 연습으로서, 천자문 – 동몽선습 – 명심보감 – 소학 등의 순서로 가르치기 시작하여, 한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통감절요로부터 사서삼경(대학, 논어, 맹자, 중용 그리고 시경, 서경, 역경)을 위주로 가르치면서 사기, 당송팔가문, 당률 등을 가르쳤다. 

 

- 천자문(千字文. 모든 다른 한자 1000자로 1句4字로 지은 古詩 250句로서, 중국의 자연 현상부터 인륜 도덕에 이르는 내용을 다룬 한문의 입문서) 

- 동몽선습(童蒙先習.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등 중국의 유교적 윤리와 역사를 아동들에게 가르치는 교재) 

- 명심보감(明心寶鑑. 아동들에게 자신을 수양하고 인격을 수양시키기 위해 가르친 중국 고전 箴言모음) 

- 소학(小學. 주자의 가르침에 따라 유교의 기본적인 도덕규범을 가려 뽑은 유학입문서) 

- 통감절요(通鑑節要. 중국 역사의 역대 인물을 중심으로 편찬된 역사서로서 선비들의 필독서였음) 

- 대학(大學. 인격 수양과 국가 통치에 관한 戰國시대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 

- 논어(論語. 공자의 삶과 행동과 사상을 기록한 언행록) 

- 맹자(孟子. 맹자가 군주들에게 유세하거나 당대 사상가들과 논쟁한 내용) 

- 중용(中庸. 堯舜임금이 통치한 정신을 性, 道, 敎의 개념으로 설명한 책) 

- 시경(詩經. 공자가 제자들에게 주나라 왕조의 정치적 행태와 민중의 수용태도를 가르치고 문학과 교육에 힘쓰기 위하여 주나라 이전의 시들을 편집하여 모은 책) 

- 서경(書經. 夏殷周 왕조 등 고대 중국 왕조들의 정치를 공자가 편찬한 역사서) 

- 주역(周易. 太極, 陰陽, 四象, 八卦, 大成卦 등의 기본 개념으로 太皞伏羲氏가 저술한 세상의 변화에 대한 원리를 주자가 번역한 책) 

- 사기(史記. 前漢시대에 사마천이 춘추필법으로 기록한 중국의 역사서) 

-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 당나라와 송나라의 이름난 문장가 8인의 글) 

- 당률(唐律. 당나라의 형법) 

 

  제술이란 서(書)·기(記)·발(跋)·제문(祭文)·소첩(訴諜)·시(詩)·부(賦) 등을 저술하는 것으로 광범위하지만 주로 시문(詩文)을 짓는 연습으로서, 주제와 격식에 따라 한문으로 써서 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리고 습자는 서당 교육의 중요한 과목의 하나로서, 해서체(楷書體)를 위주로 하되 학습 정도의 진전에 따라 행서체(行書體)나 초서체(草書體)도 익히는 등 붓글씨를 쓰는 연습을 말한다. 편지글을 익히게 하려는 실용적인 의도에서 행해졌다. 

 

  이상 언급한 서당식 교육은 한민족의 옛 역사나 홍익인간 등의 이념, 홍범9주에 담긴 사상과 8조법금 같은 법률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한 채로, 오로지 중국의 정치와 역사, 문학과 사상과 형법 등 지나인 선비들의 교양을 학습하도록 되어 있었다. 역사와 사상의 주체가 한민족에서 지나민족으로 뒤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한민족 역사 초기에 담긴 신성(神性)이 완전히 부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 나라 제 민족의 근본도 모른 채로, 제 조상들이 전해준 문물을 기원을 감추고 자기 것인 것 마냥 포장하여 지나인들이 전해준 것들을 감지덕지(感之德之)하여 받아들이고는 중국을 상전으로 섬긴 배경이 이러한 교육과정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왕조가 존속한 518년 동안, 나라의 인재들을 ‘선비’로 키우고 ‘사대부’(士大夫)로 뽑아 나라의 엘리트로 삼는 교육과정이 마치 중국의 한 성(省)이나 그렇지 않으면 속국(屬國) 내지 식민지의 교육과정을 방불케 했다. 

 

  더구나 이에 관한 지식을 제한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선비들이 배웠던 지식마저도 송나라의 주자가 해석해 놓은 틀 안에서만 습득할 수 있었다. 만일 이 틀을 벗어나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 되어 멸문지화를 감수해야 했다. 이 주자의 해석학이 성리학(性理學)으로 불리다가 아예 주자의 이름을 딴 ‘주자학’(朱子學)으로 불리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사상을 넘어 종교가 된 ‘유교’의 경전이 된 것이요 사상 통제의 이데올로기로 작동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조선 시대 사문난적으로 몰려 화를 입은 사례만 해도 윤휴(尹鑴), 박세당(朴世堂) 등이 있는데, 조선조의 노론과 소론의 당쟁을 불러온 이 사문난적 논란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였고, 실제로는 정치적인 이유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주자의 권위를 끌어들인 것이지만 부작용으로 조선의 학풍을 더욱 수구적(守舊的)으로 만들었다. 

 

- 셋째, 지배층 사이에서도 정치적 책임을 묻지 않는 풍조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무책임했다. 위정자들의 준비 부족으로 임진왜란을 겪어 국토와 백성에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그 누구도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로를 세운 자에 대한 보상도 엉망이고, 법률과 군율을 위반한 자에 대한 벌도 멋대로였다. 이 당시 수군통제사로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역적 혐의로 감옥에 가두고 매질까지 가했던 당시 임금 선조의 치졸한 행적이 이 한심한 현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이런 제도 하에서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었다. 파당끼리 관직을 나누고 매관매직을 일삼았으며, 최하급 관리들에게는 녹봉도 지급하지 않아서 백성들을 착취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나라의 최고선이 땅에 떨어진 당연한 결과로 공동선을 위해 헌신할 위민정신은커녕 서로의 입신양명을 위한 당쟁만이 격화되었으며, 책임 정치 대신에 사문난적을 몰아내려는 동기와 조정의 주도권을 움켜쥐려는 동기로 벌어진 당쟁으로 인해 정적을 모함하여 죽이는 사화(士禍. 1498년의 戊午士禍, 1504년의 甲子士禍, 1519년의 己卯士禍, 1545년의 乙巳士禍)가 벌어진 결과 조정의 정치는 난장판이 되어 사회적 신뢰는 사라지고 조선은 점차 수렁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 넷째, 조선의 지배층과 유림들이 임진왜란 이후에도 정치를 개혁하지 않음은 물론 연이어 일어난 민란을 통해서도 이반(離叛)된 민심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특히 피지배층으로서 광범위하게 저항했던 천주교를 박해하고 동학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조선 정치의  폐단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던 조선 후기에 성리학에 경도된 지배층의 지식 독점망을 뚫고 중국에서 편찬된 한역서학서들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가 조선에 들어왔는데, 지배층은 천주교도들이 지적한 폐단을 개혁하거나 자체적으로 교우촌에서 실시한 사회 개혁 시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즉,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교리를 믿던 신자들은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만민평등과 남녀동등을 실천하였는데, 이는 조선조를 지탱해 오던 근간인 사회신분제도를 철폐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나라를 개혁하고 정책을 혁신해도 모자랄 터에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의 씨를 말릴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 기간이 첫 순교자 김범우를 유배시킨 1789년 추조적발사건에서 시작하여 선교의 자유를 허용한 1896년 조불통상수호조약에 이르기까지 무려 백 년이 넘는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던 18년 동안 천주교 교리에 입각한 국가 개혁 과제를 여유당 전서 5백여 권으로 정리해서 민간에 전파했다. 그 영향을 받아 동학혁명이 일어났는데, 특히 경제개혁의 청사진을 저술한 ‘경세유표’는 동학혁명의 교과서처럼 활용되었다. 그런데 조선 조정에서는 엉뚱하게도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서 진압하고자 했지만,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맺은 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조선에 들어와서는, 이 일본군대가 동학교도들을 전멸시키는 웃지못할 촌극이 조선 말기의 상황이었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 다섯째, 국력이 쇠퇴하여 나라가 넘어갈 위급한 상황에서도 지배층의 무능과 해이한 기강이 심각했다.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의 제5조는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는 내용인데, 애초에 이토 히로부미가 갖고 온 것은 4개조뿐이었다. 마지막에 덧붙여진 이 제5조는 대한제국의 대신들 쪽에서 요구하여 들어간 내용이었다. 국가의 주권을 빼앗겨도 황실만 안녕하고 존엄을 유지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망해가는 나라의 대신들 생각이었다.

 

  1910년에 체결된 ‘병합조약’도 다르지 않다. 8개조 중 제1조와 제2조는 한국에 관한 통치권을 양여한다는 것과 양여를 수락한다는 내용이고, 제8조는 공포일로부터 시행된다는 형식적인 내용이다. 제3조부터 제7조까지의 나머지 5개 조항은 황제·태황제·황태자를 비롯한 황실, 그리고 전·현직 대신들에게 그 직위에 맞는 대우와 세비 등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황실과 대신들은 자신들의 신분보장과 대가를 받고, 5백 년 넘게 지탱해온 나라를 일본에 넘긴 것이다. 구한말 조선 왕조의 최상위급 관료들이라 할 대신들의 리더십이 이런 수준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 교부가 경고한 대로, 이들은 “양들을 버려두고 제 잇속만 챙기는 삯꾼”들이었다. 

 

- 여섯째 결정적으로는 이렇게 허약해진 조선왕국을 일제가 무력으로 침략했기 때문이다. 정한론을 퍼뜨린 이래 호시탐탐 노려 오던 조선의 정치권력을 빼앗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주안점을 둔 통치 행각은 한민족 리더십의 근간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일제는 처음에 조선의 통상권을 요구하다가(1876, 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 조약), 외교권(1905, 韓日協商條約. 일명 을사늑약)과 군권(1907, 韓日新協約. 일명 정미7조약)을 빼앗더니 나중에는 국가 주권을 통째로 빼앗음 다음 총독을 두어 일본 천황 직할로 조선을 다스리게 했다.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조선의 조정 대신에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외교 협상을 벌여 안봉선(奉天-安東 간 철도)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여 만주를 지배하려는 야심으로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넘겨주고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북간도와 서간도 등 지금도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만주 벌판은 중국의 영토가 되어 있다. 

 

  정미7조약으로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킨 일제에 맞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1907년과 1910년 사이의 의병 투쟁은 매우 격렬하였으므로, 일본 측의 공식통계로 볼 때에도 15만여 명의 봉기, 2851회의 충돌에 1만 6700명 사망, 부상 3만 6770명으로 총 5만 3천여명의 의병 사상자가 발생하였다(조선총독부, 日韓合邦秘史). 이로써 구식 군대 출신 군인들과 포수들 그리고 민간 의병들이 연합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일본군에 비해 무기가 빈약하고 병력도 열세였으므로 한일병합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그 후 만주와 연해주로 흩어져 무장투쟁한 독립군의 원류가 되었다가 광복군의 뿌리가 되었다. 

 

  또한 역대 조선 총독들은 한민족의 역사를 지우고, 말과 글과 문화와 종교 등에 담겨 있는 한민족의 얼을 지우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야마구찌현(山口縣) - 조슈번(長州藩) - 출신으로서, 이들의 배후에는 메이지 유신(1868. 明治維新)을 일으키고 정한론(征韓論)을 주도하여 일제의 조선 침략과 이를 위한 역사 말살 계략을 세운, 같은 고향 출신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신용우). 

 

10.6.5.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0,14)

  일찍이 문명사학자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으로 문명의 흥망성쇠를 진단한 바 있었다.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도전을 인식하는 역량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에 응하기 위해 구성원들의 능력을 모아내는 역량과 실제로 이 능력으로써 응전하는 역량까지 공직자들의 정치적 리더십은 백성들이 이에 호응하는 공동체 의식과 함께 문명의 운명을 결정짓는 주요 변수였다. 이것이 토인비가 이룩한 문명 비평의 골자였다. 

 

  문명은 물론 나라와 사회의 번영과 진보, 쇠퇴와 몰락 등 그 운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목자론의 주제인 지배층들의 정치적 리더십과 그 대상인 일반 백성들의 공동체 의식이 모두 공동선의 구성요소로서 독립변수로 기능한다. 그에 의해 좌우되는 영토와 인구 그리고 이를 주요 구성요소로 하는 국력과 국운은 종속변수이다. 

 

  그런데 이는 세속의 나라와 문명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이치가 아니다. 사탄의 나라조차도 베엘제불 같은 그 나라의 우두머리와 나머지가 갈라져 싸우면 무너진다고 하였다(루카 11,18). 하느님 나라가 먼저 심부름을 맡은 민족들이 세운 나라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본시 원하시는 대로 온 인류의 모든 나라들에게로 퍼져나가서 사탄의 세력에 의해 도전을 받더라도 무너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겨레의 리더십이라든가, 한민족의 문명론은 이 대전제 하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천손의식의 발로이며 홍익인간의 목표일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 신앙 진리에 따르면, 온 인류는 모두 천손이다. 이는 혈통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자의식인 것이요,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으로는 문명의 질과 개인으로는 삶의 질과 관련된 것이다.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인간이 그 하느님의 뜻과 기운을 문명에 담아 온 누리에 비추는 일이야말로 천손의식의 구현이요 홍익인간의 실현이다. 

 

  조선조의 리더십이 무너지는 바람에 국권을 왜인들에게 빼앗겼지만 한일강제병합 이전부터 살기가 어려워서 국외로 탈출한 백성들이 주로 찾아간 곳이 간도였다. 이주민의 존재와 이주 사태는 리더십의 수준을 반증(反證)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북 아메리카의 원주민들도 고조선 말기와 고구려 시대 내내, 도합 천여 년 동안 꾸준히 만주 벌판을 탈출하여 이주한 한겨레였다. 그 수가 천만여 명이나 된다. 같은 시기 신라와 백제, 중국의 인구 변동 추이를 비교할 때 그렇다(손성태, 우리 민족의 대이동, 2014). 이는 고조선이 존속했던 이천여 년 가운데, 초기에는 환웅과 단군의 리더십이 받들었던 계시적 진리, 즉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고귀한 천명과 그 결과로 받아들인 찬란한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에도 불구하고, 고조선 문명이 이천 년 가까이 흐르는 동안 그 말기에 이르면 리더십이 약화된 결과로 기강이 해이해지고 백성의 삶의 질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고조선의 뒤를 이어 그 뜻을 계승한 고구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고조선 문명으로부터 문물을 전해 받은 지나인들과 왜인들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깨뜨리고 배은망덕하게도 지나사관과 식민사관으로 역사를 날조하면서까지 지배의 야욕을 드러내게 된 데에는, 한민족의 내부에서 촉발된 분열 요인이 먼저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나라의 최고선과 공동선 질서가 튼튼하면 사탄의 기운이 스며들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지나인들과 왜인들이 역사를 왜곡하거나 심지어 날조한 행태를 탓하거나, 그로 인해 겪어야 했던 겨레의 비극과 특히 그 중에서도 민중의 고통, 그리고 잃어버린 강역에 대해 비분강개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를 사전에 예방하지 못했던 우리 겨레의 정치적 리더십과 공동체 의식을 치열하게 반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나인들은 자기 민족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며 나라 이름을 ‘중국’(中國)이라고 짓고 주변 다른 민족들은 야만적인 오랑캐라고 비하하였다. 여진족, 거란족, 한(韓)족, 왜족 등 동쪽에 살던 민족들에 대해서는 동이(東夷), 토번, 위구르 등 서쪽에 살던 민족들에 대해서는 서융(西戎), 베트남족, 부난족, 오족, 월족 등 남쪽에 살던 민족들에 대해서는 남만(南蠻), 흉노족, 몽골족 등 북쪽에 살던 민족들에 대해서는 북적(北狄)이라 불렀다. 

 

  지나인들이 ‘중국’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한민족의 문명 정통성을 자신들의 것으로 탈취했다면, 왜인들은 ‘천황’(天皇)과 ‘신도’(神道)를 내세워 한민족의 신성을 탈취하였다. 6~7세기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따라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던 열도의 정복자들이 국가를 만들며 ‘일본’(日本) - 본시 이 이름은 수나라 시대에 고대 백제의 영향권이던 산동반도에서 백제를 바라볼 때 ‘해가 떠오르는 땅’이라는 뜻에서 ‘일본’이라고 부르던 백제의 지명이었다(도노 하루유끼, ‘예군’(禰軍:613~678)의 묘지명, 한겨레21, 2013.5.13.) - 이라 이름짓고 그 당시까지 없던 열도의 역사를 일황가(日皇家)의 가계로 채워 신격화시키면서 천세일계(千歲一系)로 포장한 일본사를 만들어냈다(서희건). 이 최초의 일본사의 기록이 백제서기를 모방한 일본서기이다. 일황가는 백제 멸망으로 끊어진 백제 왕실을 계승하는 것이다(아키히토 일왕의 기자회견, 2001.12.) 그런데도 왜인들은 천황제도를 운영하고 일본을 ‘신의 나라’로 포장하고자 신도가 '일본 고래의 카미(神)에 대한 신앙' 혹은 '일본인의 고유한 신앙'으로 규정해 왔다(야나기다 구니오 柳田國男, 1875-1962). 자신들의 인종적 기원을 고대 한반도로 주장하는(강상파부, 기마민족정복설) 그들은 신도의 신사(神社)에 고조선 문명에서 유래된 솟대(고조선에서 제사를 지내던 蘇塗에서 유래) 위에 삼족오(三足烏)의 문양을 고유의 것으로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신성을 담은 이념, 즉 홍익인간이라든가 재세이화 같은 사상은 신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첫 민족국가로 형성했고 동아시아 최초의 문명을 이룩했던 고조선 이래로 이 위대한 뜻은 세월이 흐를수록 빛이 바래고 바라는 바람에,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에는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겨 식민지로 전락했다. 35년의 노예살이를 마치게 된 계기도 자력으로가 아니라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연합한 국가들에 의해서 종전되었을 뿐 아니라 그 연합국 중 가장 국력이 강했던 미국이 그어버린 삼팔선으로 한반도가 분단되었다. 민족의 불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전범국가인 일본은 전후 미국의 최우방으로 대우를 받게 된 반면에 식민지였던 한국은 분단이 되어 버린 것도 모자라서 전후 세계 질서를 양분한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으로 동족상잔의 내전을 치루어야 했다. 그로 인해 형성된 냉전 구도는 1990년 무렵에 소련방이 해체되어 종식되었고 그 이후 40년이 넘게 흘러가고 있어도, 유독 한반도만은 내전 상태로 남아 있다. 한민족은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고 평화를 회복하고 싶어도 6 25 전쟁 당시 남한 대통령 이승만이 미군에게 넘겨주어 버린 전시작전통제권을 아직도 받아오지 못하고 있어서, 대한민국 정부의 대통령은 결정권이 없다. 자국이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누리는 패권이 극대화되기를 원하는 미국이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지 않고 있어서, 휴전협정이 발효 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두 동강난 한반도, 갈라진 겨레, 자주권 없는 정부, 전시작전통제권 없는 군대, 이것이 단군 이래 5천 년 역사상 한민족의 국력과 강토가 가장 위축된 현재의 처지를 지속해야 할 것인가? 천손의식을 망각한 거짓 목자들을 둔 못난 민족의 불행은 언제 그칠 것이며, 본시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바대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이끌 수 있는 참된 목자들이 나타날 때는 언제인가? 한민족의 운이 이토록 험한가? 

 

  그런데 ‘운’(運)이란 출전시에 전차들을 빙 둘려 세워놓고 승리를 다짐하며 독전하던 전투대형에서 비롯된 상형문자로서, 돌고 도는 기운을 뜻한다. 고대 동아시아인들과 이들의 지성을 대표한 동이족 출신 태호복희씨는 우주만물에서 비롯되는 세상 역사의 변화를 관찰하고는 그 원리를 알아내고자 ‘역’(易)을 창안하였다.  한민족의 운은 조선조의 임진왜란 이후 내내 가라앉다가 20세기 초 한일강제병합(1910)부터 6 25 남북전쟁(1950~1953)을 거쳐 20세기 말 외환위기(1997~1999)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근 백 년 동안 바닥을 쳤다. 역의 이치에 따라서 이제 한겨레의 국운은 상승할 것이다. 이미 그런 조짐이 많이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력이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고 민주화도 진척됨에 따라 남북 간의 국력 격차가 확연히 벌어지는가 하면, 남북 간에 또 다시 내전이 재발할 위험성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가까운 장래에 남북 교류가 재개되고 상호 신뢰를 점진적으로 쌓음으로써 사회 전반에 걸쳐서 평화적인 협력이 일상화되면, 머지않아 남북이 통일될 수도 있으리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고조선 이래 강역이 줄어들고, 그 뒤를 이은 나라들이 고조선처럼 연맹체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갈라져서 전쟁을 벌이다가 외세인 당나라 군대를 끌여들인 결과로 만주 영토를 상실하였다. 고구려의 인구가 감소하는 바람에 이를 발해(渤海)가 세워지기는 했으나 말갈족을 비롯한 여러 북방민족과의 연합으로 2백여 년 간 유지되다가 거란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고 나서는 한민족의 역사에서 만주 지역은 제외되었으므로, 만주 상실의 역사적 원인으로는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신라의 패착(敗着)을 들어야 한다. 고려조와 조선조에는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불교와 유교를 국시로 삼아 통치하면서 국력이 쇠약해지는 바람에 또 다른 외세인 일제에 국권을 빼앗겼다. 식민통치 기간에 치열한 독립운동을 벌였다고는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또 다른 외세인 미군에 의해 해방과 분단이 되었고 동족 간에 전쟁까지 치르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은 자주적으로 나라를 세울 수 없었다. 자주적 역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구한말 이후 자주성을 부인당했기 때문이다. 이 서글픈 현실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남북한의 정상이 만나서 평화 교류를 합의해도 실현할 수도 없는 기막힌 상황이 그 결과이다. 제천신앙이 약화된 결과로 천손의식을 상실하니 백성의 역량이 차단되고, 지배층은 백성의 역량보다 외세에 기대었던 신라 이래의 패착이 지금껏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의 원인 중에는 지배층의 리더십 역량이 부족했던 까닭이 가장 커 보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홍익인간과 재세이화,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의 본령을 되찾는 일이 우리의 독립변수적 관심사여야 함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민족의 현안들 – 對 미국 자주성 회복, 남북의 화해와 교류, 남북 통일 등 - 은 종속변수로서 독립변수에 의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최고선과 공동선을 확립하는 일이며 여기에 공직자들과 일반 시민들이 다 함께 연대하는 일이다. 여기서 리더십의 주역은 옛 ‘지배층’에 해당하는 정치권이 아니게 되었다. 조선조 건국의 주역이었던 사대부들과 왕실의 위엄과 권위는 임진왜란 직후부터 추락하더니 한일강제병합으로 땅에 떨어졌고,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의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분단된 대한민국에서 재연된 민간 및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각성된 민중을 필두로 한 일반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강인한 민족적 정체성과 주체의식을 형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주권재민의 원리가 헌법에 규정된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는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정치권을 주권자들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게 되어 있으니 만큼 최고선과 공동선에 충실할 수 있는 정치 일꾼들을 잘 식별하여 선택하는 민주 역량이 리더십의 관건이라 하겠다. 여기에 우리 민족의 정통적 역사의식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이 더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겨레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에 따름으로써 회복해야 할 리더십이다.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는 일이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신성의 내용인 최고선과 그 결과인 공동선을 존중하는 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최고선을 확립하고 공동선을 수호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뜻과 실제 역량이 문명 단위에서 보편적인 진리로 가득 차 있어야 갈라진 민족이 다시 통합하고 잃어버린 강역을 뒤찾는 일에 있어서도 대의명분을 갖출 수 있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0.6. 문명의 리더십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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