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10. 착한 목자이신 예수 (10.1.-10.5.)

[요한복음] 10. 착한 목자이신 예수 (10.1.-10.5.)

 

저녁노을의 글

2022-09-09 18:27:21 조회(407)

  이 게시글이 좋아요 싫어요

 

요한 복음사가는 제6장에서 제9장까지에서 「사건-가르침」의 이중구도로 하느님의 표징에 대해 보도함으로써 예수님의 신원을 밝혔으나, 이런 흐름과 달리 이제 제10장에서는 ‘양 우리 문의 비유’(10,1-6), ‘착한 목자와 삯꾼의 비유’(10,7-13), ‘착한 목자와 양의 비유’(10,14-21) 등 비유의 가르침이 먼저 등장한 다음에 이미 6장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흐름대로 그분의 신원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유다인들과 벌이는 지루한 논쟁과 그로 인한 갈등(10,22-42)의 상황이 이어진다.  

 

  요한의 목자론(牧者論)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제10장에서 비유의 소재로 갑자기 목자론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이 전통적으로 유목 문화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정착한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농사에 적합한 기후와 토양을 지닌 갈릴래아 호수 근처와 그 남쪽의 이즈르엘 평원지역을 빼면 대부분의 지역이 농사보다는 유목 생활에 적합한 곳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등 도시생활이 자리를 잡은 후에도 대부분의 백성들에게는 양을 기르는 목축업이 주된 산업이 되었고 따라서 양을 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목자라고 불렀다. 

 

  ‘목자’라는 소재는 매우 일상적이고 익숙한 소재였다. 그래서 자연히 구약성경에서도 목자라는 직업이 대단히 많이 등장하는데, 하느님의 대표적인 표상으로도 쓰이게 되어서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라는 표현까지 등장하였다(시편 23,1; 28,9; 49,15; 80,2). 시편에서뿐만 아니라 이 ‘목자 표상’을 통하여 하느님과 메시아의 역할을 일깨운 대목들이 성경에 대단히 많이 나온다(에제 34장 전체; 민수 27,17; 2사무 5,2; 1열왕 22,17; 1역대 11,2; 1역대 18,16; 유딧 11,19; 아가 6; 집회 18,13; 이사 40,11; 44,28; 63,11; 예레 3,15; 미카 5,3; 즈카 10,2; 11,16). 이 대목들 가운데 메시아의 역할을 뚜렷하게 표현하는 대표적인 두 구절을 들면 이러하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 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미카 5,3).”

 

  요한은 이 ‘목자 표상’ 들 중에서 특히 에제키엘 예언서 34장의 목자론을 참조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착한 목자의 가르침’을 편집하였다. 그리하여 ‘생명의 빵’(6장), ‘생명의 물’(7장), ‘자유와 해방의 빛’(8장), ‘빛을 보도록 눈을 뜨게 해 주시러 파견되신 분’(9장)에 이어서, 제10장에서 이 목자론을 통해 밝혀지는 예수님의 신원은 ‘착한 목자’이시다. 양들을 먹이고 돌보아 하느님께로 이끄는, 그런 착한 목자로서 예수님이 소개되는 것이다. 

 

10.1. 양 우리 문의 비유(10,1-6)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10,1ㄴ-3).

 

  가축을 기르는 방식은 종류에 따라서 다르다. 양은 아침이 되면 데리고 나와 풀밭에서 풀을 뜯어 먹이고 저녁이 되면 양 우리로 데리고 들어와 잠을 재운다. 양 우리는 울타리와 문으로 되어 있고, 양 떼와 목자는 당연히 문으로 드나든다. 목자는 자기 양 떼를 잘 알고 있어서 이름을 붙여서 불러주는데, 양들은 음색으로 그 이름을 구별하여 따른다. 여러 목자의 양 떼가 한 우리에서 섞여서 잠을 자기도 하지만, 이 음색으로 양 떼는 자기 목자를 알아 듣고 따른다. 이러한 유목 관행과 양의 습성에 빗대어 교부들은 예수님의 삶을 이렇게 풀이하였다. 

 

  “목자는 양들을 따라가기보다 인도하며, 양들이 헤매게 두지 않고 그들을 모아들인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목자는 그리스도의 양 떼로 들어가는 문인 성경을 이용해 양들을 가르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참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들은 그 문으로 들어간다(아우구스티누스). 도둑들은 옆문이나 틈만 있으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들어오지만(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목자들은 문으로 들어간다(테오도루스). 참된 목자가 문으로 들어갈 때,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가며(아우구스티누스), 성실하게 양 떼를 가르치고,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갈지 모를 교의에서 그들을 지켜 자신이 자격 있는 목자임을 입증한다(테오도루스). 모세는 그리스도와 성령과 함께(아우구스티누스) 성경의 문지기 가운데 하나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문지기’는 교회의 일을 맡아 다루는 계시의 천사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성경의 문은 기도와 공부로 열린다(오리게네스).”

 

   목자의 역할과 임무를 예수님의 생애 안에서 바라보는 교부들의 통찰이 돋보인다. 목자는 양들을 인도해야 하며 헤매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모아 들여야 하고(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문을 통해 양 떼를 모아들이듯이 성경을 통해 가르쳐야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것이다. 나머지 다른 교부들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목자의 역할을 기준으로 역사상의 목자들이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역할과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다. 사실, 목자와 양에 관한 구약성경의 그 어떤 표현보다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장차 오실 메시아의 역할을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는 대목이 요한 10,1-2인데, 이 짧은 두 문장 속에 목자의 관점에서 해석된 이스라엘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이 대목을 잘 이해하자면 유목생활의 한 가지 상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유목 문화에서 발견되는 양들의 우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양 떼를 주인 집에서  재우는 경우에는 울타리가 고정되어 있는 본 우리가 있고, 풀밭을 찾아서 주인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잠을 재워야 할 경우에는 양 떼 주위에 임시로 울타리를 쳐서 마련하는 임시 우리가 있다. 그 어느 경우에나 양들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을 만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문을 거치지 않고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는 자가 있으면 그들은 양을 훔치러 들어온 도둑이거나 강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은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계시를 뜻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야곱의 대에까지 이끌어 주신 예비 과정을 비롯하여 모세를 부르시어 히브리 노예들을 선택하여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로 삼고 판관들을 거쳐 역대 임금 대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주신 본 과정이 하느님의 계시로서 기록되어 있다. 예비 과정과 본 과정에서 모두, 장차 온 인류를 하느님께로 이끌 수 있는 도구와 빛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개방성을 지녀야 하도록 목자들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계시대로 하느님께로 백성을 이끌었던 목자들은 여럿이 있었다. 모세와 그 후계자인 여호수아, 또 그 후 사무엘에 이르는 여러 판관들,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 등 통일왕국을 다스렸던 임금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 우상을 앞세워 백성을 잘못 이끌었던 임금들과 궁정 예언자들과 사제들은 도둑이며 강도라는 것이다. 남과 북을 막론하고 왕정이 초기를 지나면서부터 많은 예언자들이 출현하게 된 까닭도 이 도둑과 강도로 전락한 거짓 목자들을 경고함으로써 참 목자의 길로 회개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거짓 목자들은 그예 하느님께로 돌아서지 않았고 결국 나라가 멸망당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두 번째로 종살이를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백성은 참 목자로서 이끌어 주실 메시아를 기다리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Messiahnism)으로서 목자론의 이스라엘 역사 해석이다. 그러므로 목자론에서 볼 때 가장 큰 죄악은 백성을 하느님께로 이끌지 않고 우상에게로 이끌었던 우상숭배이다. 십계명의 1,2계 위반이기 때문이다. 

 

  백성의 오랜 기도에 응답하시려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참 목자요 메시아로서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태어나게 하셨으니 이제부터 문은 예수님이시다. 이후의 목자들은 그분을 문으로 삼아서 백성인 양 떼에게 드나들어야 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이제부터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인 것이다. 이 새로운 ‘계시’를 기록하고 있는 문이 신약성경이다. 

 

  요한 10,3에는 문지기가 나온다. 주석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유목 문화에서는 문지기에 관한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김근수). 첫째는 소규모 양 떼를 소유한 여러 주인이 고용한 문지기 하나가 밤에 양 떼를 담으로 둘러싸인 곳에 모아놓고 지키는 경우이다. 둘째는 밤에 야외에 있는 앙 떼에게 목자들이 다가가 양 떼 주변에 울타리를 친다. 목자들은 근처에서 천막을 쳐 놓고 쉬며, 목자 중 하나가 문지기로 뽑혀 밤새 양 떼를 지킨다. 이렇게 목자와 문지기는 구분되는 역할이었다. 

 

  교부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모세도 성경의 문지기 가운데 하나이며(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여호수아에서 솔로몬에 이르는 ‘목자들’도 사실은 목자가 아니라 문지기들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시는 목자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목자로서 오신 예수님 이후에는 문지기란 교회의 일을 맡아 다루는 계시의 천사들이고(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따라서 이들은 기도와 공부로 하느님의 계시가 기록되어 있는 성경의 문을 열어서(오리게네스) 교회에 모인 백성을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이끄시도록 해야 한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어야”(10,3ㄱ)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의 목자론은 하느님의 계시를 보전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문으로서의 교회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론과 맥이 닿아 있다. 교회가 하느님 계시의 문이다. 

 

  이 문을 예수님께서 하나 세우셨는데, 역사가 흐르는 동안 여러 개로 늘어났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갈라진데다가 서방 교회 안에서도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로 또 다시 갈라진 뼈아픈 분열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신앙고백 상의 기준으로 구원의 방주라고 고백되는 ‘교회는 여전히 하나’인데, 현실에서는 ‘여러 교회들’이 저마다 참된 문임을 자처하며 경쟁 중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갈라진 교회들의 재일치를 위해 노력할 것을 천명했고, 지금껏 대화와 협력으로 그 길을 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교회들이 함께 받아들여야 할 중간 목표는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여러 교회들이 저마다 목자이신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계시를 보전하고 있는지, 또한 백성들을 이 계시에로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는지에 대한 선의의 경쟁이 현재 진행 중이다. 분열 직후에는 가톨릭교회와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참되고 유일한 문임을 자처하던 시절도 있었다. 적어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는 그러했다. 하지만 공의회 이후 지금은 여러 문들 가운데 하나로 자처하기로 선언하고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겸손한 처신을 유지하는 가운데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성과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하느님 백성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계시에로 이끌려는 충실한 노력을 앞장서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 역시 교황과 주교 그리고 신부 등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모든 문지기들의 역할이다. 

 

  그렇게 문지기들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되면,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10,3ㄴ).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10,4-5).

 

  “양들은 자기들 목자의 소리만 들을 뿐 낯선 이의 소리엔 귀 기울이지 않는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그리스도께서는 이리 떼 가운데에서 당신 양들을 인도하여(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자유로이 데려가신다(아우구스티누스). 우리의 세상이 이러하므로 양들에겐 목자가 필요하다(클레멘스). 양들을 따라가는 일부 목자들과 달리 우리의 목자 그리스도께서는 양들을 인도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께서는 양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대는 목자의 목소리를 분간할 수 있는가?(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착한 목자는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며, 알기 쉬운 말로 그들을 먹이고 알기 어려운 말로는 그들을 훈련시킨다(아우구스티누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 듣고 그를 따른다”(10,4)고 할 때, 실질적으로 양들을 이끌어 주시는 주체는 예수님의 현존을 보증하는 성령이시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현존하시며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고”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아 듣고 그를 따르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의 목자론은 성령론이기도 하다. 다만 양들이 “낯선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그를 피해 달아나는 것”(10,5)은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의 계시에 충실하려는 양 떼, 즉 신자들의 믿음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낯선 사람의 낯선 목소리에 속아서 따라다니는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에, 양 떼인 신자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낯선 목소리에는 달아나야 하는 의무도 생겨난다. 그래서 문지기가 기도와 공부로 성경의 문을 열 듯이, 양 떼에 해당되는 신자들 역시 기도와 공부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 들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목자론이 목자의 역할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역할까지 규정한다. 성직자의 직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의 신도론 내지 사도직 직무론을 포함하는 셈이다. 

 

  목자는 양 떼를 잘 안다. 하느님께서도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당신 백성을 잘 아신다. 이를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주님께서 흠 없는 이들의 나날을 아시니 그들의 소유는 길이길이 남으리라(시편 37,18).” 일반 목자들도 양들 하나하나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부를 정도로 잘 안다. 양들은 마치 사람처럼 목자의 목소리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동물의 귀가 감지할 수 있는 음색의 차이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양 떼를 얼마나 잘 알고 계시는지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내가 어둠 속에 있는 보화와 숨겨진 보물을 너에게 주리니 내가 바로 너를 지명하여 부르는 주님임을, 이스라엘의 하느님임을 네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45,3).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49,1).

 

  양 떼는 목자의 음성을 잘 알고 있어서 목자를 따라 간다. 하지만 목자의 음성을 알지 못하는 양 떼는 따라가지 않는다. 그런 경우가 바로 바리사이 유다인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양 우리 문의 비유’를 바리사이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는데(요한 10,6ㄱ), 이들은 실로암 못에서 예수님께서 태생소경이 눈을 뜨고 볼 수 있게 해 주신 기적을 목격하고도 그 기적에 담긴 표징의 뜻을 알아 듣지 못하여 그분이 ‘눈뜬 소경’이라고 규정하셨던 이들이다(9,40-41).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10,6ㄴ). 진실을 보는 눈이 없으니 진리도 깨닫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러면서도 그들 바리사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정신적으로 이끌던 목자들로서 자처해 왔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목자인 체 했을 뿐 삯꾼이나 다름없던 거짓 목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양 우리 문의 비유’는 ‘착한 목자와 삯꾼의 비유’로 넘어간다. 

 

10.2. 착한 목자와 삯꾼의 비유(10.7-13)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10,7ㄷ.10ㄴ.12-13).

 

  비유의 소재가 ‘양 우리’에서 양 우리 안의 ‘문’으로 좁혀졌고, 목자와 문지기의 역할이 구분되던 것에서 목자나 문지기와는 전혀 다른 삯꾼이 등장하였다. 이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모세를 비롯한 문지기들은 성경을 문으로 삼고 양 떼를 지켜왔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다가 예언자들에 의하여 성경이 담고 있는 계시, 즉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상이 지속되어 오다가 드디어 약속된 대로 세상에 오신 메시아께서 양들의 문이심을 자처하시고 스스로 고백하신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처음 밝히신 데(4,26ㄴ) 이어, 태생소경이 눈을 뜨고 신앙을 고백하자 두 번째로 밝히셨고(9,37ㄴㄷ), 이번에는 세 번째로 유다인들 앞에서 직접 밝히신 것이다.  

 

  교부들은 메시아께서는 “양의 옷을 입은 착한 목자”(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인 반면에 나쁜 목자들은 “양들을 버려두고 제 잇속만 챙기는 삯꾼”(테르툴리아누스)임을 대조적으로 비교하였는데, 여기서 양들이 목자와 삯꾼을 구분하는 기준은 목소리였다. 

 

  “문을 통하여 양 우리에 들어가는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는 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은, 양들을 인도하고(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 지도자의 자격을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부르신 것은 나쁜 목자들이 있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나쁜 목자들은 이리들과 같아서 순진한 이들을 이용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믿음과 삶에서 복음의 영향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다른 이들을 인도하겠다고 나서는 자들은 복음을 이용하기만 하는 도둑이요 강도들이다(오리게네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끌어 주는 아버지의 문이다(이그나티우스). 목자의 궁극적 관심사는 언제나 양들이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사도들은 풀밭을 찾기 위해 양 우리를 드나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 풀밭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충만한 믿음의 삶으로 양들을 배불려 주며(아우구스티누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도둑들은 파멸을 가져오지만 그리스도는 파멸에서 구해 주신다. 그분은 양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시기 때문이다(테오도루스). 그리스도는 당신의 양들을 먹이기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大 그레고리우스) 목자들 가운데 목자이시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는 당신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얻으신다(셀레우키아의 바실리우스). 예수님은 당신의 길 잃은 양들인 우리를 생명으로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양의 옷을 입은 목자이시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그러나 삯꾼은 양들을 버려두고 달아난다. 삯꾼이 달아나면 계약도 끝나고 주인에게 손해를 보상해야 해 품삯도 빼앗긴다(테르툴리아누스). 삯꾼은 양들보다 고위직의 영예에만 관심이 있으며(大 그레고리우스), 그리스도보다 자신의 안녕만 생각하고(아우구스티누스), 악마인 이리들에게 양들이 공격을 받든 말든 마음 쓰지 않는다. 양 떼가 사납고 잔인한 이리들 가운데에서 살게 되는 환난(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은 누가 삯꾼인지 드러내 줄 것이다(大 그레고리우스). 이리들이 공격해올 때 사목자가 침묵하거나(아우구스티누스) 회개하는 양들을 위로해 주지 않는다면, 그 목자는 자신의 임무를 저버린 것이다(大 그레고리우스). 양들은 삯꾼들이 그들 가운데 있더라도 그자의 목소리를 듣지 말고, 삯꾼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는 ‘목자’의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아우구스티누스).”

 

  여기서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10,8).”는 표현은 무슨 뜻일까?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예수님 이전에 목자 역할을 했던 모세와 엘리야, 다윗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뜻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착한 목자는 이른 아침에 양 떼를 찾아보지만 도둑과 강도는 어두운 밤에 양을 훔치러 오는 습속을 빗댄 것뿐이다(김근수). 예수님 당시에 도둑이나 강도가 양들을 훔쳐가듯이 백성을 괴롭힌 자들은 유다교 권력층과 로마 군대를 들 수 있다. 

 

  따라서 10,8의 말씀은 10,9의 말씀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자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10,9-10).” 요한의 목자론은 이렇게 하여 구원론으로 귀결된다. 

 

  단, 현세적 차원에서도 내세적 차원에서도 모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 이 ‘생명’은 현세적 차원에서도 현세적 기준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기준에서 풍요로움을 살펴야 할 것이요, 그래야 죽음 이후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질 것이다. 생명에 관한 한, 착한 목자와 그의 양 떼들은, 나쁜 목자가 현세적 생명 위주로 퍼뜨리는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 넘어 가지 말아야 한다. “나는 문(10,9ㄱ)”이라는 선언을 통하여, 이제 생명은 참 목자와 거짓 목자를 갈라놓는 경계선이 되고 있으며, 양 떼의 구원과 비구원을 결정짓는 전선(戰線)이 되고 있다.  

 

  이 전선 앞에서, 이제 착한 목자에 관한 본격적인 계시가 펼쳐진다. 요한의 목자론이 교회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교회론적인 의미에서 문은 공간을 둘로 나누지만 나뉘어진 두 공간을 연결해 주기도 한다. “나는 문이다(10,9ㄱ).” 하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자의식 속에는 “내게 열어라, 정의의 문을. 그리로 들어가서 나 주님을 찬송하리라. 이것이 주님의 문이니 의인들이 이리로 들어가네(시편 118,19-20).”는 시편의 기도가 연상되었을 수 있다(김근수). 

 

  그렇다면 나쁜 목자는 어떤 자들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에제키엘 예언자가  가장 자세하게 고발해 놓았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에제 34,2-6). 이스라엘의 목자로 자처했던 임금들, 예언자들, 사제들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다. 

 

  이들 나쁜 목자들 탓에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지며 고통 받았다. 하느님께서는 이 나쁜 목자들을 어떻게 심판하실 지를 에제키엘은 이렇게 내다보았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그들을 민족들에게서 데려 내오고 여러 나라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의 산과 시냇가에서, 그리고 그 땅의 모든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에제 34,10-12). 그러니까 나쁜 목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대책은 이스라엘의 역사 해석이 담겨 나온 내용으로서, 당연히 착한 목자를 보내시는 것이었다. 

 

10.3. 착한 목자와 양의 비유(10,14-21)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10,14.15ㄴ-16).

 

  비유 소재가 ‘양 우리’에서 ‘문’으로 이제는 드디어 ‘목자’에게로 더 좁혀져 이 비유 본래의 초점인 ‘착한 목자’에게로 선명하게 맞추어졌다. 착한 목자의 역할은 세 가지로 규정된다. 첫째, 양들을 알고 양들로 하여금 목자를 알게 하는 것. 둘째, 양들을 위하여 목자가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 셋째, 삯꾼에게로 넘어가 우리 바깥으로 나가 있는 양들을 데려오는 것. 그리하여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선 첫째 역할인 양들을 알고 양들로 하여금 목자를 알게 하는 것에 대하여; 

  “착한 목자의 약속은 에제키엘서에서 이미 계시된 바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예수님은 당신 아버지와 가까우신 듯 당신 양들과도 가까우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속속들이 아신다는 사실에서 그분과 아버지가 한 실체임이 분명히 드러난다(테오도루스). 아들이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다는 사실은 그의 사랑이 거저 주어진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것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바칠 만큼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목자는 이리들과 자신의 양 떼 사이에 자신의 생명을 놓는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이래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의 목자들은 ‘양의 옷을 입은 목자’(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여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교황 프란치스코)여야 한다. 양떼를 기르는 목자도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 대해서는 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목자가 양들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투신하는 노력이 이른바 사회적 강생의 신비에 속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에 해당되는 덕목이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γινωσκειν’(ginoskein)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합리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행위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깨닫고 인정하며 함께 책임을 느끼고 행동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김근수). 이 말의 뜻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찾아온 이들이나 찾아가시어 만나게 된 이들에게 그저 형식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데에 그치지 않으시고,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그들의 애환에 함께 하셨으며,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시려 애를 쓰셨다. 비록 그러한 노력 때문에 중상과 비방을 다하고 끝내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에 이를지언정 당신 양 떼를 ‘알고자’ 노력하셨던 것이다. 

 

  그 다음 양들을 위하여 목자가 자기 목숨을 바치는 둘째 역할에 대하여; 

  “아들은 우리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을 얻는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무도 그분의 생명을 빼앗지 않았지만,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내주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자신의 신성을 증명한다(디오니시우스).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셨으며, 당신의 육을 죽음에 내주고 그런 다음 그것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가 당신의 불사를 함께 나누게 될 것임을 확실히 알려 주셨다(아타나시우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께서 죄를 지으셨기 때문이 아니다(아우구스티누스). 생명과 죽음에 대한 참된 권한을 가진 이는 그리스도뿐이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거룩한 말씀께서 신이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면, 어떻게 당신의 생명, 곧 영혼을 내놓을 수 있는가?(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죽음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아무런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죽음은 잠일 뿐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다. 이 헌신적인 사랑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분이 마귀가 들렸다며 비난한다. 그러나 그분께서 하신 일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 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 역할이 참 목자와 거짓 목자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역할이다. 거짓 목자는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하여 양들을 잡아먹지만, 참 목자는 양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다. 이러한 목자의 자기희생은 양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목자를 파견하신 하느님의 뜻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되시는 근거가 된다. 목자의 목숨을 바치도록 명하신 하느님의 뜻은, 양들이 비단 육신 생명만을 풍요롭게 누리기 위한 것에 그치지 않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목자가 양들의 처지를 알기 위한 삼 단계 처방을 가르치고 있다. 첫째는 관찰로서, 양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개관적으로 파악하되 어떠한 사회악 현상이 양들을 괴롭히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둘째는 판단으로서, 무릇 모든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가톨릭 윤리신학의 관점에 따라서 양떼에게 결핍된 공동선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셋째는, 이 공동선을 근본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사도직을 행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역사상 출현한 신심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사도직 활동들이 이런 삼 단계 처방에 따라 시작되었고 전개되었다. 

 

  마지막으로, 삯꾼에게로 넘어가 우리 바깥으로 나가 있는 양들을 데려와서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되게 하는 셋째 역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육에 따른 이스라엘인 유대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당신 양 떼에 속한 다른 양들, 곧 믿음에 따른 이스라엘인 다른 민족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테오도루스). 한 앙 떼가 되기 바라는 소망은 모든 목자가 한 목자의 한 목소리로 말하여 하나의 양 떼가 있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아우구스티누스).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 안에서 당신 자신의 사랑이 생생히 작용하고 있음을 보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교부들은 양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이란 이방 민족들을 뜻한다고 보았다(테오도루스). 그런데 동·서방 교회의 분열 사태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교파 분열 사태를 겪고 난 지금의 과제는, 모든 목자가 한 목자의 한 목소리로 말하여 하나의 양 떼가 되어야 한다는 것(아우구스티누스)은 동·서방 교회 사이에 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파 사이에 재일치를 위한 대화와 협력의 과제를 포함하게 되었다. 이 두 번의 분열 사태가 어느 날 갑자기 우연하게 생겨난 일이 아닌 만큼, 재일치를 위한 여정 역시 그 분열 원인이 해소되기까지 기나긴 세월과 인내로운 노력을 요구할 것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일치의 노력과 과정 자체가 각 교회는 물론 각 교파들이 더욱 예수님을 닮은 목자상을 구현해 가는 노력과 과정이어야 하고, 이를 통해서 각 교회와 각 교파에 속한 양 떼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더욱 생생히 작용하게 될 것임을 믿어야 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다만 각 교회와 각 교파들이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과정이 무효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현실적 처방을 내놓은 바 있다. 즉, 

“복음의 메시지로 전 세계를 비추고 온갖 민족과 인종과 문화의 모든 사람을 한 분이신 성령 안으로 모아들여야 할 자기사명의 힘으로, 교회는 성실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촉진하는 저 형제애의 상징이 된다. 그것은 먼저 바로 교회 안에서 사목자들이든 그 밖의 그리스도인들이든 하나인 하느님 백성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람 사이에서 언제나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정당한 모든 다양성을 인정하고 상호 존중과 존경과 화합을 증진하도록 요구한다. 신자들을 갈라놓는 것보다 일치시키는 것들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일에는 일치가, 불확실한 일에는 자유가, 모든 일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사목헌장, 92항).” 

 

  이렇게 하여 요한의 목자론은 교회일치론으로까지 뻗어나간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10,17ㄱ).”는 말씀처럼 십자가 수난을 자원하여 받아들이셨고,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10,17ㄴ).”는 말씀처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과연 그분의 운명은 그렇게 정해졌는데, 그 경위에는 거짓 목자의 대명사 같은 인물도 한 몫을 하였다. 즉, 대사제 카야파는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사형 판결로 유도하기 위한 발언으로서,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11,49-50) 하고 말하였고, 요한 복음사가는 이를 해석하기를,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11,51-52)” 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운명을 이미 일찌감치 예견하고 계셨고, 이 비극적 운명조차도 기꺼이 순명하고자 하셨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10,18).

 

  ‘착한 목자와 양의 비유’는 이렇게 끝난다. 그런데 이 말씀 때문에 유다인들 사이에서 다시 논란이 일어났다(10,19). 이 비유에 담긴 예수님의 심오한 예언을 알아 듣지 못한 많은 유다인들은 ‘마귀 들린 자의 미친 소리’라고 험하게 쏘아붙인 반면에(10,20),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 한 기적 안에 담긴 하느님의 표징을 인정하는 유다인들은 이 험한 반박을 재반박하였기 때문이다(10,21). 이렇게 하여 이미 제6장에서부터 이어져 온 바, 그분의 신원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유다인들과 벌이는 논쟁과 그로 인한 갈등(10,22-42)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10. 4.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유다인 지도자들(10,22-3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된 운명에 대하여, 유다교 최고의회에서 대사제가 주재한 재판에서 판결나게 된 결말이 공관복음서에 다 나오지만(마르 14,53-64; 마태 26,57-66; 루카 22,66-71), 요한복음서에는 이 최고의회 재판이 생략되어 있다. 그 대신에 요한은 이 재판 보도를 여기저기에 조금씩 나누어 보도하고 있다. 어찌 보면 요한복음서 전체가 예수님께 대한 재판 기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피고인 예수님과 유다인 증인들이 법정에서 논쟁하듯이 여기저기서 논쟁을 벌인다. 예루살렘 성전정화사건(요한 2,13-22)에서부터 그분에 대한 재판이 사실상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대신에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 받는 장면을 공관복음서들보다 자세히 다루었다(김근수). 

 

  그리고 이 논쟁의 장이 열린 때에 대하여 요한은 겨울에 열린 성전 봉헌 축제 기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축제는, 기원 전 2세기경에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고 통치한 그리스계 셀레우코스 왕조의 8대 왕이었던 안티오쿠스 4세(재위: 기원 전 175~164)가 극심한 유다인 탄압정책의 일환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였고, 이를 기원 전 164년에 유다 마카베오가 무장봉기를 일으켜 성전을 복원한 데에서 유래하였다(1마카 4,36-51). 8일간 계속되는 봉헌절(2마카 10,1-8)은 이 기쁨을 기념하는 축제였다. 마카베오 하권은 ‘성전 정화’만을 주제로 하여 쓰여졌으며, 이를 이렇게 요약하였다. “유다 마카베오와 그 형제들의 이야기, 대성전의 정화와 제단의 봉헌,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와 그의 아들 에우파토르와 치른 여러 전쟁, 유다교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운 영웅들에게 하늘에서 내린 현시들, 그리고 그 덕분에 그들이 얼마 되지 않은 수로 이 땅 전체를 차지하고 야만스러운 무리를 몰아내어, 온 세상에 이름난 성전을 되찾고 이 도성을 해방시켰으며, 폐기되어 가던 법을 다시 확립한 이야기, 이렇게 주님께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그들을 대해 주신 이야기”(2마카 2,19-23).

 

  “예루살렘에서 거행되는 성전 봉헌 축제는 유다 마카베오가 제정한 것으로서(베다),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돌아와 새로 성전을 세워 봉헌한 것을 기리는 축제였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그리스도께서는 이 축제에 참석하셨는데, 당신의 수난이 가까웠으므로 유대아에 남아 계셨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 복음사가가 그때가 겨울이었다고 언급하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날씨에 대한 언급은 예수에 대한 냉담한 반응과 차가운 불신을 나타내는 데 더없이 적절하다(아우구스티누스). 유대인들은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에게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대답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이신다(오리게네스). 이에 관하여 이미 충분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것은 그들이 자기들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음을 알려 준다(아우구스티누스).”

 

  이 축제에서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시던 예수님께 유다인들이  결정적인 질문을 하였다: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4ㄷ). 최고의회에서 열린 재판에서라면 재판장을 맡은 대사제가 했을 법한 질문을 던진 셈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요한 10,25ㄴ)고 전제하셨다. 사실 그분은 이미 사마리아 여인에게, 또 눈을 뜨게 된 태생소경에게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밝히신 바 있었고, 양 우리 문과 삯꾼의 소재를 동원해서 말씀하신 ‘착한 목자의 비유’(요한 10,1-18)에서는 에제키엘 예언서 34장을 인용하여 유다인 군중에게 직접 밝히시기도 하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유다인 군중 앞에서 당신이 하고 계신 하느님의 일을 당신이 메시아이신 증거로 대셨다(요한 10,25ㄷ). 하느님의 일, 즉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기적과 같은 그 일은 하느님께서 당신과 하나로서(요한 10,30), 당신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요한 10,38ㄴ). 사실 역사상 어떤 사람도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준 적은 없었다. 이에 대해 교부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 듣는 양의 처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른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심으로써 당신은 본성에 따라 생명이심을 보여 주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들이 발견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풀밭이다(아우구스티누스). 아무도 그리스도의 손에서 그분의 양들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손이 비록 힘 있고(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분께서는 당신 양들을 지키기 위해 당신께서 무엇을 포기하셨는지 알고 계시지만(아우구스티누스), 양들이 그분의 손에서 떨어지기로 스스로 선택할 수는 있다(오리게네스). 수만 명의 적수도 그리스도의 양들을 그들의 목자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그리스도께서는 태어나실 때 그곳에 있던 목자들과 함께 당신의 양들을 받으셨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당신 아버지의 손에서 양들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덧붙이심으로써, 양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힘과 권능의 근원으로 아버지(몹수에스티에의 테오도루스)와 아버지의 손(아우구스티누스)을 드신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를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하느님’이라는 말이다(오리게네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어떤 인간에게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의 위격은 구별하면서 일치 개념은 유지하는 표현이다(노바티아누스). 이는 ‘이다’라는 동사를 단수가 아닌 복수로 사용한데서도 드러난다(노바티아누스, 히폴리투스, 아우구스티누스). 신성의 일치는 교회의 일치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키프리아누스). 이 일치는 수가 하나라는 뜻보다 본질의 일치를 나타낸다(테르툴리아누스). 그리스도는 둘째 목자와 같다. 그러나 아버지보다 지위가 낮다는 의미의 둘째는 아니다. 그분은 신성에서는 아버지와 동등하시나 육화로 인하여 아버지에게 종속되어 계시다(아우구스티누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의 본질을 나누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관계에서 하나가 아니라 본질에서 하나이시다(아우구스티누스). 아들은 위격에 따라서가 아니라 본질에 따라서 아버지와 하나이시다(헤라클레아의 테오도루스). 두 분은 이렇게 일치되어 계시기에 뜻도 같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삼위일체 계시가 확립되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할, 성부와 성자 간의 일치에 관해 명쾌하게 해설한 교부들의 주해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어서 깔끔한 느낌을 준다. 요한복음서에서 계시 사상이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 문장이다(김근수). 

 

10.5.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비난(10,31-42)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면서,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라고 반박하였다. 말하자면 신성모독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저 말로만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이유가 하느님과 함께 있기 때문이라는 예수님의 논지는 전혀 수용되고 있지 않았다. 그분의 신성을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테오도레투스). 이렇듯 유다인들이 도무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 듣지 못하고 믿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요한 10,26).

 

  “유대인들의 비난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돌 맞을 짓을 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입증해 줄 많은 일을 하셨다고 말씀하신다(테르툴리아누스). 그러나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분의 인성만 보았다(테오도레투스). 그러나 유대인들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그들의 말로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을 인정하고 만다(아우구스티누스). 요컨대, 아리우스파와 유대인들은 공통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라고 자처했다고 주장했으며(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에서 ‘神들’로 불린 이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는 유일하게 참된 하느님이신 ‘말씀’에 참여함으로써만 ‘神들’이 된다(아타나시우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신 이를 비난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 거룩하게 되셨다는 말씀을, 마치 그분께서 거룩하지 않으신 때가 있었다는 듯이 해석하는 억측을 해서는 안 된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비난을 신성모독이라고 단정하지 않으시지만, 당신께서 하느님을 자처하신다는 그들의 진술은 확인해 주신다(노바티아누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 자들을 ‘神들’로 부른 율법을 제시하시면서, 그러니 당신께는 이 칭호가 얼마나 더 합당한지 보여 주셨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들이 당신의 실체ousia를 보지 못하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일에 그들의 주의를 돌리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버지는 아들의 일을 통해 아들 안에 계시다(테르툴리아누스). 이는 아들의 신성과, 아들이 아버지와 동등함을 입증해 준다(아타나시우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아버지 안에 머무르지만 아버지와 동등하지 못한 우리와 달리, 아들은 동등한 이 안에 동등한 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아버지 안에 계시다(아우구스티누스).” 

 

  유다인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거침없이 논쟁의 핵심을 파고 들어 밝히셨다. “내가 그 일(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이 말씀이 요한복음서 전반부(제1장-제10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계시이다. 삼위일체론의 기반이 되는 계시이기 때문이다. 

 

  이제 후반부에 가서는, 예수님께서 성령과의 일치를 계시하신다. 사실은 이미 공생활 초기부터 그분은 성령과 함께 활동하셨다. 니코데모에게 이르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그리고 세족례 이후 제자들에게 행하신 가르침 중에 당신의 청원으로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실 것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이렇듯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일치를 밝힌 요한복음의 계시는 훗날 교회의 교부들로 하여금 삼위일체 교리를 정식화하여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담은 신앙고백문(信經.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과 사도신경)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런데 후대의 신학자들은 고대 교회의 교부들이 확립해 놓은 삼위일체론을 두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간의 관계를 형이상학적으로 해설하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간추려 놓은 「상해 천주교 요리」의 삼위일체를 해설한 장에 보면 이런 문답이 나온다. 

 

문: 천주 몇이 계시뇨?

답: 천주 다만 하나 계시니라.

문: 하나이신 천주 몇 위(位)를 포함하여 계시뇨?

답: 하나이신 천주 세 위를 포함하여 계시니 곧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이시니라.

문: 세 위 서로 관계가 어떠하시뇨?

답: 세 위 서로 관계가 실로 오묘하니,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는 성부께 낳음을 받으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느니라.

문: 세 위 서로 높고 낮음과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신 분별이 있느뇨?

답: 높고 낮음도 없고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심도 없이 도무지 온전히 같으사 한가지로 다만 한 천주시니라.

 

  이렇듯 역사성이 결여된 사변적인 해설로 치중한 탓에 요한복음이 계시하고자 했던 바, 성부와 성자의 일치성과 성자와 성령의 일치성이 의미하던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이 해설을 듣는 신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 어떠한 관련성도 찾기가 어려워졌다. 하느님의 신비인 삼위일체를 사실상 수수께끼로 바꾸어버린 그리스도교 신학의 현실이 아쉽고 안타깝다(김근수). 

 

  유다교에 삼위일체 교리는 없다. 그리스도교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왜 생겼을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현실적으로 맞닥뜨린 문제가 생겼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역사에 어떻게 관여하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복음사가들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이미 예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셨음을 상기시켰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과 역사 안에 계속해서 현존하시며 이끄신다는 확고한 신앙을 강조했다. 이에 대한 교리적 해답이 삼위일체 교리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해설은 철학적이고 수학적이기보다는 성서적이고 역사적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이끄심을 받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는 이 확고한 계시를 계승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다. 나자렛 예수님께서 직접 복음을 선포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이제와 항상 영원히 하느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신다. 그리하여 나자렛 예수님의 역사적 현존 역시 이제와 항상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약자들을 자유와 해방에로 이끄시는 파스카 과업 역시 이제와 항상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철학적이고 수학적인 삼위일체 교리 해설 탓으로 삼위일체 교리 자체가 신앙인들의 관심사에서 밀려나 버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예수님을 보내셨던 성령의 이끄심도 아울러 역사의 무대에서 밀려나 버렸던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담화를 마치신 뒤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신다. 이는 당신께서 다른 민족들의 교회로 어떻게 건너가시는지를 예형으로 보여 주신 것이며, 이들의 교회에는 세례의 샘이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을 출발점으로 선택하신 것은 세례자 요한이 당신의 활동이 정당함을 확인해 준 일을 유대인들에게 떠올려 주시려는 것이기도 하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0. 착한 목자이신 예수 (10.1.-10.5.) - Daum 카페

  

카카오톡에서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에서 공유하기 페이스북에서 공유하기 네이버 밴드에서 공유하기 트위터에서 공유하기 구글+에서 공유하기 Blogger에서 공유하기

 

 

댓글 쓰기

 
로그인 하셔야 댓글쓰기가 가능합니다. 여기를 눌러 로그인하세요.
 

이전 글 글쓰기  목록보기 다음 글

 
PC버전 홈 |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마리아사랑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