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9장 태생소경을 고쳐주신 예수 (9.1. - 9. 4.)

[요한복음] 9장 태생소경을 고쳐주신 예수 (9.1. - 9. 4.)

 

저녁노을의 글

2022-09-05 19:26:25 조회(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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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사가는 제6장에서 제8장에 이르기까지 「사건과 가르침」이라는 이중 구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누구이시며 어떤 역할로 인간을 도우시는지를 보도해 왔다. 예수님께서는 특정한 사건을 통해서 동시대인들과 만나셨으며 이 사건에 담긴 뜻을 보편화시켜서 그 사건을 지켜본 유다인들에게 가르치셨는데,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신원과 경륜에 관한 이 계시를 복음서에 기록함으로써 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초대하였다. 

 

  이러한 「표징의 신학화」 흐름에 따라서 제9장에서는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 보게 해 주신 기적 사건을 보도하는데, 이 보도가 우선은 “예수님이야말로 빛”이시라는 신원 계시의 메시지와 함께 “그분은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를 보는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경륜 계시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한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 이미 제7장에서 보도한 바 있는 초막절 축제에서의 메시지, 즉 ‘그분이 생명을 주는 물이신 분‘이시라는 메시지까지도 보충하여 뒷받침해 준다. 왜냐하면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기 위해 침으로 진흙을 개어 그 눈에 발라 주신 예수님께서 그로 하여금 실로암 못으로 가서 그 물로 씻으라고 분부하셨는데 실제로 그 물로 씻음으로써 그가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물에 생명의 치유력을 부여하신 분은 바로 빛이신 예수님이셨다. 그래서 이 제9장의 주제는 생명의 물로 눈을 뜨게 하심으로써 세상의 피조물은 물론 창조주이신 하느님까지도 보게 해 주시는 진리의 빛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 생명의 물로 세상에로 파견되신 분, 즉 ‘실로암’(이는 히브리어로 ‘파견되신 분’이라는 뜻이다)이신 분이 진리의 빛을 보게 하신다. 특히 제8장에서 요한이 계시로서 밝힌 바는 예수님께서 자비와 진리로서 오시어 자유와 해방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 분이라는 진리였는데, 이 빛을 보는 눈을 뜨게 해 주시는 분도 역시 예수님이시라는 계시가 제9장의 주제이다. 

 

 이 주제를 담은 제9장의 진술에서 나타나는 형식적 흐름은 이러하다. 이 장은 예루살렘 도성에 머무는 동안 소경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활동에 대하여 보도하는데, 육신의 눈을 뜨게 된 그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으로 영혼의 눈까지도 뜨게 되는 반면에, 정작 눈을 뜨고 있던 유다인들과는 갈등이 더 커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유다인들은 그분이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을 보고서도 그것이 기적임을 아예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요한 9,16.24.29), 기적을 통해 믿음으로 얻을 수 있었던 깨달음도 거절하였다(요한 9,30-34). 이렇듯 유다인들의 태도는 갈수록 완고해져 가기만 했는데, 이는 십자가 사건에 이르기까지 더욱 점증되어갈 적대적 분위기의 예고판에 불과했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는 소생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요한 11,47-53), 그것도 모자라서 그분이 기적적으로 소생시키신 라자로까지도 죽이려고 들만큼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명하게 되기에 이른다(요한 12,10).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들이야말로 육신의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임을 토로하시는 말씀을 하시게 되는데, 이것이 제9장의 마지막 말씀(요한 9,41)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 들어 있는 형식적 구조는 이러하다. 등장인물에 따라 장면이 일곱 번 바뀌고, 네 그룹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의 태도는 서로 다르다.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사람들(시각장애인의 이웃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질문은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있으며, 믿지만 증언하지 않는 사람들(시각장애인의 부모)도 있고, 질문을 하고 믿기도 하며 증언까지 하는 사람(치유된 시각장애인)도 있다. 요한이 복음사가로서 이러한 구조로 본문을 편집한 의도는 분명하다. 독자는 어떤 유형에 속하고 싶은지 생각하게 함으로써 질문과 믿음과 증언에로 초대하는 것이다(김근수).

 

  그러니까 ‘빛-눈뜸-봄’이라는 제9장 말씀의 초점과 맥락에 있어서, 빛은 예수님이신데 이 빛을 보는 눈을 뜰 것인지 말 것인지, 또 그 눈으로 과연 빛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가 제9장 말씀 이해의 관건이다. 

 

9.1. 태생소경을 고쳐주시다(9,1-12): 여섯째 표징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주는 여섯째 표징을 보도하는 제9장의 첫 본문인 9,1-12에서 이 9장 전체의 맥락을 짐작하게 해 주는 정황과 사건이 다 나온다. 주요한 표지들은 네 가지인데, 우선 첫 번째 표지는, 길을 가다가 태생 소경을 만나자 던진 예수님의 시선이다. 이 시선을 의식한 제자들이 그 장애인의 처지를 슬퍼하기에 앞서 그가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처지가 되었느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드렸다. 이 제자들의 질문이 두 번째 표지가 된다. 당대의 여론과 사상을 주도하던 바리사이들이 신체적 장애마저도 선대(先代)의 죄로 말미암은 벌이라고 세뇌시켜 놓은 탓에 이런 엉뚱한 질문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답답함을 참고, 선천적 시각 장애마저도 극복하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일이라는 대답으로 제자들의 입을 막고 나서 그를 치유해 주셨다. 제자들의 우문(愚問)에 대한 스승의 현답(賢答)이었다.  세 번째 표지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바로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명하심으로써 실로암 못의 물에 대해 영험하다고 여겨온 그들의 정서를 존중해 주셨다. 네 번째 표지였다. 그래서 이 여섯째 표징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해 주는 네 가지 표지를 추려낼 수 있다: 예수님의 시선, 제자들의 물음, 태생소경을 치유하심 그리고 실로암의 물로 눈을 씻고 보게 하심이다. 

 

9.1.1. 표지 1: 예수의 시선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9,1).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그래야 한다(암브로시우스). 눈먼 이가 먼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를 먼저 찾으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자연이 만든 결함을 회복시키시려고 그를 찾으셨다(카이사리우스).” 

 

  교부들이 주해한 ‘예수님의 시선’에 대해 묵상해 보자면 이렇다. 태생 소경의 시각 장애를 바라보던 예수님의 시선은 마치 풍경을 바라보듯이 무심코 바라보는 시선이라거나 죄를 지어 받는 벌이라고 장애자를 단죄하는 바리사이들이 싸늘하게 바라보는 시선과는 사뭇 달랐다.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던 그가 겪었을 온갖 풍상을 미루어 짐작해서 바라보는 동정어린 시선이었고, 고통과 소외로 점철되었을 불행한 처지에 공감하면서 바라보는 인격적인 시선이었다. 여기서 그분의 시선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무 것도 보지 못했던 그 눈먼 사람의 시각 장애로 인한 고통에 공감하는 연민의 정을 담아 바라보는 것이며, 이 연민의 정으로부터 그 고통을 덜어주려는 사랑의 의지로 나타났다. 

 

9.1.2. 표지 2: 제자들의 물음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9,2ㄴ) 

“제자들은 그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까닭을 알고 싶어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가 태어나기 전에는 죄를 지을 수 없었다는 것과, 때때로 어린아이들이 아파서 부모에게 슬픔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아폴리나리스). 그들은 그가 고난을 겪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그러나 그가 눈먼 것은 죄 때문이 아니었다(아우구스티누스). 그나 그의 부모가 잘못을 저질러서도 아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시련과 병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大 그레고리우스). 목적 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그렇다면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제자들의 주의를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으로 돌리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교부들은 제자들이 다소 엉뚱하게 질문을 해 온 데 대해서 비판하기보다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실 제자들의 물음은 당시 세태를 반영하는 현실적인 물음이라서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있는 우매함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이 스승이신 예수님과는 아주 동떨어진 시선으로 태생 소경을 바라보고 있어서 마음까지도 동떨어져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스승은 그가 얼마나 고달프게 살았을까를 생각하며 보고 있는데, 제자들은 그가 왜 저런 불행에 빠졌을까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율법 학자들은 죄는 벌을 초래한다는 기계적 숙명론을 전제하고 나서 그 태생 소경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질병과 장애의 고통 속에서 소외되어 살던 숱한 사람들이 죄다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조상들이 지은 죄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이라는 식으로 함부로 낙인을 찍고 있었다. 율법 지식의 폭력이었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이 불공정한 처사에 반대해 왔다. 하느님 대신에 우상을 숭배하려는 죄의 근본적인 성향은 보편성을 띠기에 조상의 죄가 자손들에게 미치지만 개별 행위로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은 당사자가 져야 하는 것이며 그에 대한 벌도 당사자와 당대에 국한된다는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었다. 이것이 공정한 판단이다. 제자들도 예언자들의 사상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의 지식 폭력에 초연할 만한 신념은 지니지 못했던지, 그 태생 소경이 지닌 장애가 당사자의 탓인지, 그 부모의 탓인지 확신을 하지 못해서 질문한 것 같다. 

 

9.1.3. 표지 3: 예수의 치유

“하느님의 일(을) … 해야 한다.”(9.3ㄷ.4ㄱ)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아버지께서 같은 일을 하실 참임을 드러내신다. 그 일은 긴급한 일인데, 이 삶 이후에는 선행도 믿음도 회개도 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우리는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대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명령을 완수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이용해야 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부활 이후에 불신자들에게는 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당신을 빛이라고 하시는 것은 당신께서 영혼들을 비추실 뿐 아니라 눈먼 이의 눈을 열어 주실 참이었기 때문이다(헤라클레아의 테오도루스). 예수님께서는 한처음에 창조하실 때 그러셨던 것처럼 흙을 이용하여 그의 눈을 열어 주신다(에프렘). 그리스도께서 세상 안에 계시는 한 세상에는 빛이 남아 있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의 광채는 어둠을 압도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물음에 답변하신 말씀은,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한다”(요한 9,3-4)였다. 이 답변에 대해 풀이한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우문(愚問)에 휘말려들지 않으셨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원래 초점이 빗나간 질문에 대해서는 그 잘못된 전제 자체를 피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잘못 설정된 프레임(frame. 생각의 틀)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런 질문에 답변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 즉 눈먼 소경을 보게 해 주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고통과 불행이 누군가의 책임으로 다 귀결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공동체가 껴안고 보살펴야 할 공동선의 몫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데, 이 태생 소경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9,3ㄴㄷ)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미 당사자가 심한 고통과 커다란 불행을 겪고 있는 판에 누구의 죄로 인한 책임인가를 따지고 있는 태도는 공동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무책임한 소행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는 그 사람을 돕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태생 소경에게서 드러나야 할 하느님의 일을 당신이 몸소 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분은 무지의 어둠을 밝히시는 진리의 빛이셨으며 또한 무책임으로 인한 어둠의 고통도 밝히시는 사랑의 빛이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4-5). 

 

  여기서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주체가 ‘우리’라고 표현되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의 낮과 밤은 물리적인 시간 구분이 아니라 가치적인 시간 구분이다. 즉,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면 물론 시간상으로 밤이 와도 진리에 밝은 낮과 같거니와 그분이 부활-승천하신 후에라도 제자들에게 보내주신 성령께서 함께 계시면 무지한 오류의 밤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우리’는 제자들을 포함시켜서 하시는 말씀으로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느님을 하시는 것을 보고 배운 제자들이 그분의 뒤를 이어 그분의 성령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다. 그래서 ‘우리’라고 굳이 표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9,6) …

  “예수님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를 치유해 주심으로써 창조주로서의 일을 마무리하신다(이레네우스). 시력을 회복시키는 추가 창조 활동을 수행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창조 때 사용하신 것과 같은 진흙을 이용하신다(오리게네스, 암모니우스). 은총이 함께하지 않는 율법은 침에 개지 않은 진흙과 같다. 치유가 이루어질 수 없다(카이사리우스). 예수님께서는 이 치유가 샘이 아니라 당신에게서 왔음을 모든 이가 알도록 물 대신 침을 이용하셨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침으로 개신 흙이 치유를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그에게 못으로 가 씻으라고 명령하기도 하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실제 치유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상당히 먼 곳에 있는 실로암 못에서 일어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기적을 목격할 수 있었다(오리게네스). 우리도 새로 나는 씻음의 예형인 실로암 못으로 올 수 있다(이레네우스). 세례의 물을 통해 치유를 받을 때가 그때다(암브로시우스). 그러나 치유를 일으키는 것은 물과 관계된 주님의 말씀과 명령이다(에프렘). 못에서 씻은 남자는 은총을 만난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예수님께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거지를 치유해 주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여기서 교부들도 당연히 전제하고 있는 사항은 성경의 중의적 표현 수법이다. 즉, 복음사가들이 눈먼 사람을 치유해 주신 이야기를 보도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육신의 현실과 영혼의 현실이라는 이중의 차원을 담아 표현한다. 마르코의 경우에, 예수님께서 두 번 눈먼 이를 보게 해 주신 기적 기사를 보도하는데, 벳사이다와 예리코에서였다. 벳사이다의 소경은 이름도 밝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데리고 와서 눈을 뜨게 해 주시기를 청했고 눈을 뜨는 과정도 두 단계로 나뉘어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마르 8,22-26). 하지만 예리코의 소경은 ‘바르티매오’라는 이름도 밝히고 있고, 소문을 듣고는 제 발로 찾아왔을 뿐만 아니라 주목을 끌지 못하자 두 번씩이나 큰 소리로 외치기까지 하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치유를 청원하였다. 그리고 단번에 그는 눈을 뜰 수 있었다(마르 10,46-52). 이렇게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이 두 치유 이야기 사이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8,27-30). 이러한 구도로 복음서를 편집한 마르코의 의도는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아보는 신앙이 있고 이를 고백하기 전에라면 눈을 뜨는 일조차도 쉽지 않지만, 신앙이 있고 이를 고백하고 난 다음에라면 단번에 눈을 뜰 수 있다는 점을 알리려는 것이다. 더욱이 육신의 눈을 뜨는 일에서 이런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신원을 알아차림으로써 영혼의 눈으로 겪게 되는 현실, 즉 부활의 현실을 보는 데 있어서도 이런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리려는 데 마르코의 편집 의도가 숨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 복음사가 역시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는 일과, 그 치유의 능력이 그분의 신적 능력에서 비롯된 것인 이상 영원한 생명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아보는 눈을 뜨는 일이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보고 제9장을 편집하였다. 그래서 이 장의 말미에는 멀쩡하게 두 눈을 뜨고 있으면서 이 모든 치유 사건을 목격하고서도 그분을 알아보지는 못하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의 현실에도 눈이 먼 바리사이들의 딱한 처지가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요한 9,40). 

 

  침은 고대에 눈병에 효험 있는 재료로 여겨져 왔다(김근수).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창조 설화에서,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교부들의 주해대로, 예수님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머는 바람에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던 소경을 보게 해 주심으로써 사람 노릇을 하게 하시고, 결과적으로 인간답게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 

 

9.1.4. 실로암의 물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9,7ㄱ) 

  “그 남자는 눈에 진흙을 바른 채 못까지 먼 길을 걸어가는데, 그것은 치유 과정의 일부였다. 사람들 눈에 퍽 볼 만한 광경이었음에 틀림없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고 있다(에프렘). 그는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며(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눈먼 이가 할 법한 말로 그 기적을 묘사하며 자기가 아는 만큼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는 눈먼 이들에게 눈먼 복음 전도사가 된다(아우구스티누스). 그들이 눈먼 이에게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었을 때, 그가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참되게 말한 것이다. 그는 치유를 받을 때 예수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예수님께서 당신 침으로 열어 주신 보지 못하는 눈들은 나중에,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는 눈멂을 꾸짖는 증언을 하게 될 것이다(에프렘).”

 

  복음서 본문과 교부들의 주해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실로암 못에 관한 구약성경의 기록들에 의하면, 이 못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있는 기혼 샘(‘윗못’. 해발 636m)과 연결되어 있는데(2열왕 18,17), 유다 임금 히즈키야가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도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여’(2열왕 20,20), ‘옛 저수지의 물을 받아 놓으려고 두 성벽 사이에 저장소를 만들었다.’(이사 22,11). 윗못에서 물이 나오는 곳의 바위를 파서 저수 시설을 만든 다음, 수로를 이용해서 성전 남쪽 언덕 오벨을 거쳐 성 안에 있는 두 개의 못(해발 634m)으로 물이 유입되게 한 것인데, 실로암은 이 두 못 가운데 한 곳을 말한다. 그러니까 2m의 높낮이 차이를 이용하여 수로를 만든 것이었다. 

 

  이 수로는 기원전 700년경 히즈키야가 아시리아의 임금 산헤립이 침략해 들어오자 성안의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서 약 533m 길이의 S자 형태로 이루어진 긴 터널이다(2열왕 20:20). 한편, 실로암 못은 기혼 샘보다 낮은 곳에 위치했다 하여 ‘아랫못’(Lower Pool, 이사 22,9), 또 히즈키야 왕의 공적을 기린다는 측면에서 ‘임금못’(King’s Pool, 느헤 2,14)으로 불리기도 했다. 실로암의 물은 아주 정결한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초막절 축제가 벌어지는 한 주간 동안 참가자들을 위한 제사에 사용되는 물은 이곳에서 금주전자에 담아 옮겨졌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서 보면, 예루살렘 도성의 방위에 있어서는 물론 주민들의 식수 공급에도 실로암 못은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차지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의 눈을 치유해 주시고도, 굳이 유다인들이 신성하게 여겨온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요한 9,7) 하고 이르신 말씀의 배경이다. 

 

  그러나 그가 눈을 뜨고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영험하다는 실로암 물로 씻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침과 진흙을 개어 발라주시고 실로암 물로 씻으라고 시키셨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파견된 이’라는 뜻으로 불리어온 ‘실로암’이라는 이름이 비로소 예수님 자신을 뜻하는 이름으로 제 의미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실로암’이신 예수님께서 태생소경을 만나서 그 이름에 걸맞는 기적 행위를 제대로 연출하신 셈이라 하겠고,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보는 영혼의 눈을 뜨게 되는 후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는 더욱 절묘한 연출 행동이었다.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께로부터 세상으로 파견되신 ‘실로암’이셨으며,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그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미 제7장에서 소개된 바대로, 초막절 축제 중에 이미 이 실로암 못의 물보다도 더 영험한 생명력으로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수 있다고 선언하신 바 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그래서 이 태생소경이 치유된 기적 사건 역시 그분이 진리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빛이시라는 메시지의 근거로서만이 아니라 그분이 실로암 못의 물에도 생명력을 부여하실 만큼 생명 그 자체이신 분이시라는 이 말씀(7,37-38)도 믿을 수 있게 하는 이중의 근거로 작용한다. 이러한 사실들이 당연한 사실로서 교부들의 주해에 전제되어 있다. 

 

  이 요한 9,1-7의 본문 말씀으로써, 빛으로서 세상에 파견되어 오신 예수님의 존재가 드러났고 진리를 일깨워주는 여섯 째 표징의 전모가 담겼다. 이어지는 요한 9,8-12의 본문은 이를 뒷받침하는 후속 보도인데,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는” 역설적인 흐름으로 이어진다. 

 

  태생소경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받고 실로암 못에 가서 물로 씻고 눈을 떴다. 이 과정을 지켜본 유다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요한 9,8ㄴ) 이 말을 듣고 있던 나머지 유다인들이 “맞다”, “아니다” 하면서 왁자지껄 소동이 벌어졌을 때, 눈을 뜬 이가 말하였다: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요한 9,9ㄴ). 

 

  예수님께 적대적으로 악화되어 가던 군중의 분위기를 알았더라면 그가 그토록 용감하게 나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를 까맣게 모르다가 이제 눈을 뜬 그 사람은 그분께 호의적이지 않은 그 많은 유다인들 앞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진실을 숨김없이 당당하게 말한 것이다. 이 증언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는 그분께 대해서 처음에는 ‘예수님이라는 분’(요한 9,11ㄴ)이라는 존칭으로 시작하더니, ‘예언자’(요한 9,17ㄹ)라는 면모를 인정하기에 이르고, 아예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요한 9,33)이라는 신성 고백으로 발전하다가, 결국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일컫는 말, ‘사람의 아들’이라고 신원을 드러내시면서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요한 9,35)는 물음에 “주님, 저는 믿습니다.”(9,38)라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과정으로 나타났다. 즉, 태생소경으로 구걸을 하며 살던 그가 눈을 뜨게 된 다음 육신의 눈에 이어 영혼의 눈까지 뜨게 되는 기적의 과정을 점진적으로 보여준 것이고, 이 과정 자체가 복음의 선포가 되었다(김근수). 이로써 앞서 제기했던 세 가지 중요한 질문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고, 누가 일으켰으며, 그는 누구인지 - 에 대한 답도 자연히 나오게 되었다. 

 

 요컨대, 그분의 ‘봄’은 시각 장애라는 육신의 상태만을 쳐다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눈을 뜨고자 하는 영혼의 원의까지 알아보는 시선이었다. 세상의 빛이신 그분이 그저 밤의 어둠만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악의 어둠을 몰아내는 선의 빛이셨듯이 그러하였고, 생명이신 그분이 육신 생명만을 창조하신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도 부여하실 생명이시듯이 그러하였으며, 말씀이신 그분이 다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실현하고야 마는 말씀이듯이 그러하였다. 이러한 의지를 담아 눈먼 사람을 고쳐 주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당신 신원을 이렇게 밝히셨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5).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요한 9,1)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태생소경 치유 기적 사건 보도에서 열쇠가 되는 말은 ‘보셨다’는 동사였다. 여기서 그분이 ‘보셨다’는 동사 술어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그 눈먼 사람의 모습이 그분의 눈동자에 비쳤다는 뜻을 넘어선다. 그분의 ‘’은 그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고통에 공감하는 연민의 정으로 이어지고 곧바로 그 선천적 시각장애를 치유해 주려는 의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분의 ‘’은 피상적이고 생리적인 ‘행위’를 넘어서, 연민과 의지를 담아서 바라보는 인격적이고 주관적인 ‘행동’이며 그래서 그냥 지나치지 않고 치유 기적을 일으켜서 당대와 후대의 더 많은 이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선포’이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동사 술어가 단지 말을 하셨다는 뜻을 넘어서 하느님의 창조 의지를 담아서 표현하셨다는 뜻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이 소리와 다른 점이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면, 말씀이 말과 다른 점은 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사가가 복음서 머리글에서 예수님을 ‘말씀’으로 소개한 취지도 여기에 있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이셨으며,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날 만큼 창조 의지가 충만해 계신 분이셨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그 창조 의지를 완성하기 위해 세상을 비추는 사람들의 빛이기도 하였다. 이제 그 ‘빛’이 눈먼 사람을 ‘보셨다’. 

 

  구약성경에는 눈먼 사람을 눈 뜨게 해서 치유해 준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유일하게 토빗서에 토빗이 새똥을 눈에 맞아 눈이 멀게 되었다가 라파엘 천사의 도움으로 멀었던 눈으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는데, 이 책은 기원전 2세기경에 유다인 동족에게 교훈을 주고자 창작된 것이지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어떤 예언자도 그런 기적의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말 못하는 사람을 말하게 하실 수 있고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실 수 있다(탈출 4,11; 시편 146,8). 이 당연한 이치를 전하고자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인류 역사를 하느님의 나라로 완성하심을 알리기 위하여 앞 못 보는 자들을 눈뜨게 하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 주시며, 벙어리의 혀를 풀어 주실 것을 내다보면서 자신의 예언서 두 군데에서 기록해 놓았다(이사 29,18; 35,4-5). 

 

  이렇게 빛이신 예수의 신원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해 주는 네 가지 표지를 알려준 제9장의 첫 꼭지(9,1-12)에서, 예수님이 눈앞에 계시고 그분이 당신 신성의 표징을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기적으로 드러내보이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영적 소경들이, 바야흐로 실로암 못의 물로 눈을 씻고 나서 보게 된 태생소경에게 따지고 있으니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질 리 없다. 그러자 그 유다인들은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요한 9,13). 그래서 두 번째 꼭지는 바리사이들이 이 사건에 개입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9.2. 바리사이들이 개입하다(9,13-34)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규정을 어기고 안식일에 이 치유를 행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겉으로 보기에는 율법을 어긴 것이지만, 치유받은 이는 치유자의 힘이 헛되이 발휘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마음이 확고하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만 물고 늘어진다. 그들은 안식일 준수에 육적인 방법과 영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 보인다(아우구스티누스). 예를 들면, 여호수아가 예리코에서 안식일에 일한 선례가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이번 사건에선 예수님이 안식일에 기적을 행해도 되었는가를 놓고 집중적으로 논쟁이 벌어져, 고발 소동에 기적의 위대함이 가려져 버렸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눈멀었던 남자마저 바리사이들의 논쟁에 조정자로 끌려 들어갔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그는 논쟁의 한가운데서 자기 나름의 믿음 고백을 한다. 그 고백은 진실한 고백이긴 하지만 불완전하다(아우구스티누스).” 

 

  유다인들이 눈을 뜨게 된 태생소경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간 까닭은 바리사이들은 일반 유다인들에 비해 율법을 더 잘 알고 있으니 이 일에 개입해서 과연 이 기적 사건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표징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아닌지 그 여부를 조사해 달라는 뜻이었다. 바리사이들도 소경이 눈을 뜬 것이 확실한 사실인 이상,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다. 영민한 그들은 그 기적을 일으켰다는 예수님의 자격과 이 기적 행위가 안식일 율법을 위반하여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각시켜서 그분이 죄인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 기적이 그분을 하느님에게서 온 분으로 알게 해 주는 표징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는 억지 주장을 전개하였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의뢰받은 조사의 초점을 기적은 기적이되 하느님의 표징은 아니라는 식으로 바꾸려 들었던 것이다. 즉, 태생소경이 눈을 떴으므로 이는 기적이지만 이 일이 안식일에 일어난 이상 율법을 어긴 것이며, 하느님의 율법을 어기고 행한 일이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표징이 될 수는 없다는 논리로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죄인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요한 9,16). 

 

  예수님으로서는 의도적으로 그 태생소경을 안식일에 만나려 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안식일 규정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해석이 지닌 문제점도 밝히실 겸해서 치유를 행하셨던 것인데, 과연 그들 바리사이들 사이에서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요한 9,16) 하는 반론이 일어났다. 이 논란에서 쟁점은 첫째,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죄인이다. 따라서 죄인이 일으킨 기적은 하느님의 표징이 될 수 없다. 둘째, 하지만 죄인은 표징을 일으킬 수 없으니 표징을 일으킨 그는 죄인이 아니다 하는 것으로 압축되었다. 그러자 난감해진 그들이 다시 그 태생소경에게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시 물었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요한 9,17ㄹ). 

 

  예언자가 누구인가. 이 호칭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각별한 역사적 정서가 묻어나는 용어이다. 즉, ‘죄인’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불경스러움과는 거리가 한참 먼, 거룩한 무게가 있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일찍이 북 이스라엘 왕국 시대에 엘리사는 시리아 임금인 아람의 군사령관이었던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었던 적이 있다. 이때 나병을 고치겠다고 찾아온 나아만에게 엘리사는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려주었다(2열왕 5,8-15). 이로써 예언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힘을 받아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으며, 그 기적의 수혜를 받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 또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 기적을 표징으로 삼을 수도 있는 그런 존재임을 증거하였다. 

 

  그런데 ‘예언자가 없는 시대’로 불리었던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시대에 엘리사 이래의 ‘예언자’가 있다는, 폭탄선언과도 같은 말을 눈을 뜨게 된 사람이 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사실 안에 담긴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결국 이 진실선언으로 말미암아 논점을 뒤틀어보려던 바리사이들의 영민함은 허사가 되어버렸다.  

 

  눈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에 빠진다(마태 15,14). 영적으로 눈이 먼 바리사이들이나 그들에게 물어보고 있는 유다인들도 이 태생소경의 기적을 눈앞에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또한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위의 대화에서 안식일까지 들먹여 죄인 운운하는 대목은 눈먼 자들끼리 나누는 ‘까막눈들의 대화’일 수밖에 없었다. 사태의 본질이 이럴진대 안식일을 준수하는 방식이 두 가지로서 육적인 방식과 영적인 방식이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의 주해는 주해 대상의 격에 비해 과분한 대우를 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그 기적을 목격한 이들은 눈 멀었던 이의 부모에게 이것저것 물음으로써 그것이 기적이 아니라는 말을 끌어내려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의 부모도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자기들 아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대답만 하며(오리게네스), 자신들은 어른인 아들을 대신해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거듭 주장한다(아우구스티누스). 유대인 지도자들의 불신은 눈 멀었던 남자의 부모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그들 때문에 이들의 구원까지 위험에 처한다(헤라클레아의 테오도루스). 그러나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무엇이든 부당하게 쫓겨난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공격에 종교라는 허울을 씌우지만(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결국 하느님을 모독하는 데 이르고 만다(아우구스티누스).”

 

  이상 교부들의 주해에서도 확인되거니와, ‘예언자’ 발언 때문에 궁지에 몰린 유다인들과 바리사이들은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다그쳤다. 하지만 그 부모도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려 할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메시아로 믿는 군중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분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이 율법 지식을 무기로 하여 여론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두려워(요한 9,22) 당장의 궁지만 모면하려고 바리사이들의 물음에 답변하지 않고 당사자인 자신들의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것 아니냐고 둘러댔다(요한 9,20-23). 

 

  이렇게 되니까 바리사이들은 눈을 뜨게 된 그 태생소경을 다시 불러서 다그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그 소경은 육신의 눈을 뜨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알아보는 눈까지 뜨게 되었으므로, 그분을 죄인으로 몰아가려는 바리사이들의 약은 꾀에 넘어가지 않고 슬기롭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요한 9,25).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0-33).

 

  그러자 할 말이 없어진 바리사이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나서(요한 9,28) 그를 회당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요한 9,34). 눈먼 인도자들의 전형적인 횡포인데, 이 모습이 그들의 진심을 보여주는 민낯이다. 그들은 진리에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로 인해 눈을 뜨게 된 이의 진실에 대해서도 눈이 멀었던 것이다. 교부 요한 크리스소스토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해대로, 그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9.3. 무엇이 죄인가(9,35-41)

‘실로암’이신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서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셔도 그 본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자들은 영적으로 눈 뜨기를 거절한 죄인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눈 멀었던 그 남자를 만나시자 그에게서 믿음의 고백을 이끌어 내신다. 그 고백은 치유의 조건이 아니라 생명의 선물이었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에게 예수님은 ‘실로암’(‘파견된 이’)이시다.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해 주심으로써,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눈 멀었던 남자에게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그것이 자기를 치유해 주신 분의 목소리임을 알았지만(테오도루스) 아직 믿음과 불신의 경계선에 서 있는 상태였다(오리게네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시자 그는 믿음을 고백하고, 그 고백에 맞갖게 주님을 섬긴다(大 바실리우스)”. 

 

  “이 기적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또다시 빛과 어둠, 믿음의 눈뜸과 눈멂을 나누시는 것을 본다(아우구스티누스).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소망은 그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명백하게 드러내 준다(테오도루스).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보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여전히 죄 안에 남아 있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눈멂과 영적 눈멂을 다 치유해 주시는 것이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제 예루살렘 성전 실로암 못 근처에서 여섯 번째 표징으로서 일어난 태생소경의 치유 기적에 관하여, 제9장의 결말이 이 세 번째 꼭지(9,35-41)에서 전개된다. 그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고, 누가 그 기적을 일으켰으며,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은 눈을 뜨게 된 그 태생소경의 말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이 말을 하는 적극적 태도와 이 말을 하면서 풍기는 인품을 통해서도 확실하게 나왔다. 그리고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교부의 주해대로, 육체의 눈멀음과 영적 눈멀음을 다 치유받아서 완전히 딴판으로 달라진 그의 인품에서는 영혼의 향기까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눈을 뜬 직후부터 그는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요한 9,9ㄴ) 하며 당당한 주체로서 거듭 태어났던 그는 바리사이 유다인들이 물어대는 유치하고 끈질긴 질문 공세를 받고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으며, 성서를 전혀 읽을 수 없었던 그가 성서 전문가로 자처해 온 그들과 맞장 토론까지 벌였다. 

 

  그러다가 그가 밖으로 내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그를 일부러 찾아다니신 모양이었다.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요한 9,35) 하고 물으신 것을 보면 그렇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일컬은 ‘사람의 아들’은 겸손하게 낮추시는 호칭으로 쓰셨지만, 성경에서 이 호칭이 쓰이는 용례를 보면, 이는 말뜻 그대로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들, 즉 보통 남자를 뜻하는 말에 그치는 말이 아니다.

 

  “‘사람의 아들’을 예부터 ‘인자(人子)’라는 한자어로 통용해 왔는데, 성서에서 예수가 친히 자기를 이 말로 불렀다. 따라서 ‘인자’란 그리스도의 칭호를 말한다. 완전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갖추었던 예수가 이런 말로 자신을 표시한 이유는, 당시의 완고한 일신교(一神敎)를 고려해서였다. 신약성서 가운데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그리스도의 칭호는 82회나 쓰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한 번(사도 7,56)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복음서 가운데에 들어 있다. 메사아의 한 칭호가 바로 이 ‘인자’이며(다니 7,2-14), 이는 구세주의 초월성과 동시에 그 인간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이에 대하여 ‘하느님의 아들’(son of God)이라는 표현은 구세주의 신성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가 인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여 그 신성에까지 이끌었음에 견주어, 이와는 달리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서술함에 있어 그 신성에서부터 출발하여 로고스 개념을 가지고서 이를 표현하였다”<‘인자’, 가톨릭 대사전>. 

 

  그러니까 다니엘 예언자 이래로 이 ‘사람의 아들’(人子)이라는 이름은 예언자 정도를 넘어서 ‘메시아’를 일컫는 호칭이었다. 그래서 그분을 예언자 정도로만 알았던 그는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강력히 암시하는 이 물음을 듣자마자 다시 예수님께 청했다. “선생님, 그분이 누구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요한 9,36) 하고 매우 적극적으로 청원하였다. 여기까지의 대화로 미루어볼 때 그는 자신 눈을 뜨게 해 준 그분이 예언자들도 해 내지 못한 기적을 해 낸 특별한 예언자로는 생각할 수 있었지만, 정작 그분이 메시아이시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도달할 수 있었던 영적 지점은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예수님께서 몸소 이끌어주셔야 했다. 

 

  매우 적극적으로 메시아를 믿으려는 그의 마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9,37ㄴ) 예수님께서 못내 바라시던 대답을 이끌어내신 셈이라 하겠는데, 이를 인정하시는 말씀도 참 멋드러진다. 그리고 대단히 극적인 이 장면을 소개하는 요한은 매우 담담한 표현으로 소개하고 있다. 상상해 보자면 뜻밖에 메시아를 눈앞에서 뵙고 있음을 알게 된 그 사람도 가슴이 벅차올랐겠지만, 눈은 뜨고 있어도 영혼은 소경 같은 사람들에게 시달리시던 예수님께서 메시아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셨으니 매우 반가우셨을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고맙기까지 하셨을 것 같다. 복음을 선포하시던 입장에서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극적인 장면은 줄탁동시(啐啄同時.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오려면, 병아리는 안에서 그리고 어미 닭은 밖에서 동시에 껍질을 쪼아서 깨야 함을 이르는 말)의 상황이다. 

 

  그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라는 말씀을 직접 듣게 되자,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 하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가 참으로 은총스럽게 예수님을 만나서 육신의 눈을 뜨게 된 그가 이제 영혼의 눈까지 뜨게 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로써 애초에 범상치 않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시며 눈을 뜨게 해 주시려던 예수님의 뜻과 기대가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그가 구걸하여 다른 이들의 동정과 적선을 기다리던 수동적 인간에서 벗어나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 생각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능동적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유다인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고백이었다. 태생소경이던 시절에 구걸하며 남들의 동정으로 살아가야 했던 자신의 과거 처지를 우연히 만난 예수님께서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시고 눈을 뜨게 해 주어 감사하다는 식의 수동적인 자세를 훨씬 넘어선 것이다. 오히려 인간으로서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서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보고 그분을 믿으며 살아가겠다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요청을 하고 만 것이었다. 제9장을 기록하고 편집하여 보도한 복음사가의 의도가 읽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실은 태생소경이었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고 신앙을 고백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이 실로암형 인간이야말로 그분께서 바라시는 인간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 자리에는 그분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유다인들과 특히 바리사이들도 함께 있었다. 좀처럼 당신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던 이들의 처지를 염두에 두신 예수님께서 신앙을 고백하는 그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ㄴ). 그리고 바리사이들에게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이 말씀으로 태생소경을 선택하셔서 눈을 뜨게 해 주셨던 의중을 예수님께서 몸소 밝히신 셈이다. 그래서 이 치유 사건이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태생소경을 보게 해 주셨다는 단순한 기적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이를 지켜본 일반 유다인들이나 바리사이들은 물론 이를 이 복음서를 통하여 알게 되는 후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써 신성을 지니신 당신 존재를 계시하시고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려는 의지를 계시하신 표징이 되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여러 교부들의 주해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거니와,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파견되신 ‘실로암’이시다. 

 

9.4. 태생소경 치유 표징에 담긴 신학적 의미

  이상과 같이 제9장에서 선포된 영원한 생명의 복음은 ‘실로암’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것, 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은 진리이며, 그 진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반대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거나 만나도 알아보지 못해서 눈을 뜨지 못하면 그 상태가 바로 죄의 처지로 남아 있는 것이며, – 아무런 죄의 행위가 저질러지지 않았어도 그렇다 – 이런 무명(無明)의 처지에서 진리를 보지 못하면 행위로서의 죄는 무시로 저질러질 수밖에 없고, 설사 그렇게 죄가 저질러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를 수 밖에 없다. 영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태생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더도 이를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영혼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표징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바리사이 유다인들의 처지가 바로 그러했던 것이다. 

 

  바리사이들이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눈먼 존재라면, 태생소경은 눈을 떠서 세상을 자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서 그분의 신성까지도 볼 수 있는 영혼의 눈까지 뜨게 되었다. 죄에서 벗어나 생명에로 들어간 그의 존재야말로, 제9장이 제시하는 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인간형이었다! 그는, 죄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감사의 정으로 다른 이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보속으로 바칠 수 있게 되었으며 – 모든 사도직의 근거가 되는 원동력이 이런 영성이요 깨달음이다 -, 더 나아가서는 다른 이들도 자신처럼 육신과 영혼의 눈을 모두 뜨고 하느님을 바라보며 세상과 다른 이웃도 바라볼 수 있도록 권고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예수님의 봄으로써 가능해 진 이 눈뜸으로부터 인간이 인간다운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눈을 뜨고 바라보아야 할, 하느님이라는 진리가 비로소 우리 시야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눈뜸과 눈멀음 사이에서 기로(岐路)에 서 있는 존재이다. 눈먼 죄인의 처지로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눈뜬 인간이 되어 생명을 바라볼 수 있는 은총스런 처지로 도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육신의 차원과 영혼의 차원에서 다 볼 수 있는 처지가 되어야 참으로 자유로운 생명을 누리는 처지라 말할 수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 하신 예수님 말씀대로, 하느님이신 진리가 우리의 처지를 자유롭게 하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두 차원 사이에 놓여 있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부조리와 불의한 현실도 비로소 볼 수 있게 된다. 현대 사회에 나타나는 부조리와 불의한 현실의 대표적인 모습은 실존적 불안과 사회적 불평등이며 이 두 현상은 서로 상호인과관계에 놓여 있다. 불평등해서 불안해 지는가 하면, 불안한 나머지 불평등을 초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9장의 본문이 이런 실존적 명제를 제기해 주었다. 이제는 이 명제로부터 태생소경의 치유라는 표징이 뜻하는 신학적 분석을 통해 눈뜸의 실존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혜를 추구할 차례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 제9장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하시는 여섯째 표징을 보도하였다. 이 표징은 태어날 때부터 볼 수 없었던 이를 보게 해 주시는 치유 기적이었는데, 간음한 여인의 죄도 너그러이 용서하신 행동이 파격적인 것만큼이나 태생소경의 시력을 찾아주신 이 행동도 상징적이라는 점에서 예언자적인 행동이었다. 즉, 이 두 사건은 일회적인 사건이거나 우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메시지를 담은 표징이요 예언자적인 행동으로서 보아야 하는데, 하느님의 자비가 간음한 여인에게만이 아니라 죄에 물든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이나, 태생소경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계시이기 때문이다. 

 

  제6장 이래의 흐름에서 보면 생명의 빵인 동시에 생명의 물이기도 하신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이기도 하고 눈을 뜨고 보게 하시는 하느님의 빛이기도 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태생소경이 본 것은 세상 사물만이 아니었다. 육신의 눈을 뜨고도 예수님을 몰라본 바리사이 유다인들과 달리 그는 그분의 참된 모습도 알아보았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뜨지 못했던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해 주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요한 9,38). 이 믿음은 당연히, 제8장에서 보도한 대로, 자비와 진리로서 오시어 자유와 해방의 빛을 주시는 존재가 예수님이심을 알아보는 눈이기도 하다. 그러자 그분을 통해서 창조주 하느님까지도 보게 되었으니, 믿음으로 영혼의 눈까지 뜨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육신과 영혼의 눈을 동시에 뜨게 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셨다. 따라서 이 여섯째 표징인 눈뜸의 과정에서 나타난 ⓵ 예수의 시선, ⓶ 제자들의 물음, ⓷ 태생소경을 치유하심 ⓸ 실로암의 물로 눈을 씻고 보게 하심은 물질 세계와 영적 현실을 함께 볼 수 있는 표지가 된다. 

 

  그런데 태생소경이 눈을 뜨게 된 데 대해 바리사이들이 개입하면서 육신의 눈이 멀쩡한 그들이 오히려 영적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 까닭은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완고하게 고수하며 예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믿음의 눈이 멀었음을 스스로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이란 안식일에는 그 어떠한 경우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따라서 그 대상이 태생소경이라 할지라도 눈을 뜨게 해 주어서는 죄를 짓는 것이며, 안식일 계명을 어기는 큰 죄를 짓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렇게 하여 파견되신 분, 즉 ‘실로암’이신 예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고, 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은 세상 사물의 실체뿐만 아니라 영적 현실까지도 감싸고 있는 진리 그 자체이며, 그 진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이심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 빛이 드러남과 동시에 이 빛을 거절하는 어둠도 자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빛이 진리를 드러나게 하듯이 어둠은 죄를 드러나게 한다. 이리하여 바리사이들의 이 반응이 눈뜸의 표징에 대한 반대 표지로서 검증의 기능을 지닌다. 즉, 죄를 드러냄으로써 진리와 하느님께 대해 눈이 먼 불신자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표지들을 종합하면, ⓵ 예수의 시선 ⓶ 제자들의 물음 ⓷ 태생소경을 치유하심 ⓸ 실로암의 물로 눈을 씻고 보게 하심 ⓹ 불신자의 눈멀음과 죄를 드러내심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9장 태생소경을 고쳐주신 예수 (9.1. - 9. 4.)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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