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8. 자비와 진리, 자유와 해방의 빛이신 예수 (8.1. -8.6.)

[요한복음] 8. 자비와 진리, 자유와 해방의 빛이신 예수 (8.1. -8.6.)

 

저녁노을의 글

2022-09-03 19:42:57 조회(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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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장에서부터 요한은 각 장마다 주요한 사건들을 소개하고 나서 이 사건들의 성격과 관련하여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신성 즉, 메시아로서의 정체를 밝히는 가르침을 이어서 소개하는 방식으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즉, 예수님께서 제6장에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사건에 이은 ‘생명의 빵’ 가르침으로, 그 다음 제7장에서는 초막절 축제와 ‘생명의 물’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당신의 신원을 밝히셨는데, 이제 제8장에서는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나서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내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당신의 신원을 밝히시는 식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죄인을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고 계시던 곳으로 함부로 데려와서는 마치 인민재판 하듯이 우격다짐으로 재판하는 광경을 연출하고는, 예수님께 판결해 달라고 요구한 일종의 올가미였다. 음모를 꾸며 놓고 나서 거짓으로 꾸며낸 고발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기지를 발휘하여 살기등등했던 고발자들을 꼼짝 못하게 제압하시고 나서 그 여인을 자비롭게 용서해 주셨다. 

 

  자칫하면 무고한 한 여인을 죽일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위험한 재판이 끝나고 그녀를 돌려보낸 후 남아있던 고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그 논점은 죄인을 용서해 줄 수 있는 그분의 권위와 관련하여 과연 그 권위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을 바탕으로 신원을 밝히시고자 하셨지만, 어차피 발단부터 거짓으로 꾸며낸 음모였으므로 고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도무지 알아들으려 하지 않는 지루한 논쟁이 제8장 내내 계속되었다. 

 

  논쟁의 초점은 예수의 신성이었고, 요지는 진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이고, 핵심은 예수님께서 용서의 행동을 통해서 자비라는 진리의 빛으로 비추시어 그 여인을 자유롭게 해방하신 사건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알려주는 표징이 된 다른 기적 사건들과는 다르지만, 무고하게 고발당한 여인에 대한 재판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시고, 이러한 자비가 진리이며, 이 진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메시지를 드러내어 주셨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표징이라 볼 수 있으며, 그것도 매우 중요한 표징이다. 

 

8.1. 용서와 자비의 심판(7,53; 8,1-11)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이라는 주제에서 용서와 자비로 넘어가는 데 등장한 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으나 맥락으로 보아도 그렇고 '무죄추정원칙'에 따라 보더라도 ‘간음 혐의를 받았던 무고한 여인에게 자비를 베푸신 예수’ 이야기로 제목을 바꾸는 것이 옳다. 소재에 담긴 자비와 용서라는 주제로만 보면 공관복음서에서도 익숙할 것 같은 소재이지만 오직 요한복음서에만 나오고 있다. 요한복음서에서도 가장 오래된 사본에는 이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성서주석학자들은 이 주제가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와 다소 거리가 있다거나, 전혀 나타나지 않던 율법 학자가 갑자기 등장했다거나 하는 등의 근거로 이 본문의 의미와 가치를 중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김근수). 

 

  하지만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도 이 본문이 성서 정경에 포함된다고 선언하였고(DS 1504), 최초 요한복음서의 독자들도 익히 듣고 있었을, 이 주제의 공관복음서 본문들이 많이 있다. 마태오만 해도 주님의 기도를 이 주제로 결론짓고 있고(마태 6,14-15),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에서도 탈렌트와 데나리온의 비유로 매우 인상깊은 교훈을 남기고 있는데다가, 루카는 비슷한 소재로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신 이야기’(루카 7,36-50)를 비롯해서 되찾은 비유 시리즈(되찾은 양의 비유, 루카 15,1-7; 되찾은 은전의 비유, 15,8-10; 되찾은 아들의 비유, 15,11-32)로써 이 주제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핵심에 속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 본문에 대해서 교부들은 어떻게 주해하고 있을까?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초기 수사본들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많은 그리스어 수사본에 나오며 라틴어 수사본도 마찬가지다(히에로니무스). 옛 사본들에 이 이야기가 빠져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 이야기가 간음을 조장할지 모른다 여긴 믿음 약한 이들이 빼 버린 때문인 듯하다(아우구스티누스)”. 

 

  “올리브 산으로 가시는 것은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리스도께 어울리는 일이다. 기름부음엔 올리브기름이 사용되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또 이 산은 우리 주님의 호의와 자애가 드높음을 말해 주며, 그 호의와 자애는 신자들이 모여 있는 성전으로도 내려온다(베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 하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마주치신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곤혹스러운 문제에 부딪히신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율법 준수 여부를 시험하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베다). 예수님의 대답은 의로움과 온유함을 둘 다 지킨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고발한 자들을 아무 말씀 없이 다만 행동으로 단죄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땅에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신 예수님의 행동이 여자를 고발한 자들의 돌 심장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아우구스티누스). 그들은 그들이 고발의 근거로 삼은 바로 그 율법에 의해 유죄 선고를 받는다. 율법을 쓰신 하느님의 바로 그 손가락이 지금 그들 눈앞에서 땅에 무언가를 쓰신다(베다, 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먼저 돌을 던져라’라는 말로, 그들이 따르지 않을 수 있고 결국엔 따르지 않아야 할 명령을 하신다. 자기 자신부터 의로움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그 명령(大 그레고리우스, 베다)을 듣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지 않는데도 다들  대담함을 잃고(아우구스티누스)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떴다. 아마 가장 죄 많은 자가 가장 먼저 떠났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들처럼 자신의 죄를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편 예수님께서는 남자나 여자나 간음의 죄는 똑같이 크다는 것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인가 쓰시다 그만 두셨을 때는 다들 떠나가고 가엾은 여자와 그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만 남아 있었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이처럼 자비로우셨듯이, 주교와 사제들도 죄인을 다룰 때 자비로워야 한다(『디다스칼리아』).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여자의 대답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말이며, 그로써 여자는 예수님의 단죄가 아니라 자비를 얻는다(아우구스티누스).”

 

  이상을 보면 교부들도 이 본문을 중시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가 초기 수사본에서  빠진 이유도 나중에 꾸며낸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그 주제가 주는 윤리적 충격(?) 때문일 것으로 보고 있는데(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이 본문이 후대에 첨가되었다 하여 폄훼한 후대의 주석학자들의 설명보다 교부들의 주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초막절 축제에 모였다가 ‘생명의 물’에 관한 가르침을 들은 군중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고(요한 7,53)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올라 가셨다(8,1). 올리브는 지중해변의 지형에서 흔히 자라는 나무로서 음식이나 약으로도 쓰였지만 성전에서 예식을 할 때에도 쓰였다. 왕이나 예언자 등을 메시아로서 내세우는 기름부음 예식에 쓰이던  기름이 올리브 기름이었다. 올리브에는 ‘주님의 호의와 자비의 드높음’을 나타내는 뜻이 들어 있어서 메시아 예식에 어울린다. 이 올리브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올리브 산으로 불러온 그 산은  해발고도 820m에 자리잡고 있어서 이미 예루살렘 도성이 700~750m 정도인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지라 상대적으로 동네 야산처럼 낮게 보이지만, 맞은편에 있는 성전을 쉽게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제 베다 교부가 묘사한 대로, 올리브의 말뜻대로 호의와 자애의 드높음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신자들이 모여 있는 성전으로 내려가셨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성전에 가신 예수님께서 모여든 백성에게 가르치고 계셨는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는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물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명령하였는데, 스승님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8,4ㄴ). 이렇듯  가르침의 자리에 느닷없이 끼어 들어와서 무례하게도 질문을 들이대는 상황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바대로의 율법을 준수하는지를 시험하려는 올가미였다. 올리브의 뜻만큼이나 드높은 호의와 자애를 지니신 예수님께서 평소의 가르침대로 그 여자를 용서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요구대로 돌로 쳐 죽여야 하는지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이셨기 때문이다. 돌로 치라고 하면 평소에 가르치던 자비를 스스로 어기는 것이 되어 예수님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 되고,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어 예수님을 고발할 수 있는 그럴 듯한 명분을 얻게 되기 때문에, 양수겸장(兩手兼將)의 올가미 꼼수였던 것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이 난입 소동은 초막절 논쟁의 연장선 상에서 보아야 한다. 생명의 물을 당신 자신임을 밝히시며 논쟁하시던 예수님을 이겨내지 못한 그들이 그분을 올가미에 몰아넣으려고 꾸민 수작인 것이다. 그들은 치밀하게 움직인 것 같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에서 성전으로 내려와 군중에게 가르치시는 시각에 맞추어서 여인을 고발을 하자면 타이밍이 중요하고 이 타이밍을 맞추자면 작전을 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연을 가장했겠지만 전후맥락을 보건대 작전을 짜서 수행한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 그 결정적 단서가 간음한 여자의 상대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상대는 그들이 고용한 끄나풀이었는지도 모른다. 간음 행위가 여자 혼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 그들의 고발이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자면 상대 남자도 데려왔어야 했을 것이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개미떼를 내려다보는 사람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네들의 얕은 수를 다 읽고 계셨던 듯하다. 몰려든 바리사이들이 던진 질문 때문에 더 이상 백성을 가르치실 수 없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는데, 어쩌면 아무 의미 없는 그림을 그리셨는지 아니면 살기등등한 그 고발자들의 죄상을 일일이 쓰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당장이라도 돌을 던질 듯이 기세등등하던 그들이 예수님의 이런 차분한 반응을 보고서는 더욱 약이 올랐던 것 같다. 그래서 독촉하듯이 줄곧 물어댔다(요한 8,7ㄱ). 

 

  그제서야 아주 잠시동안, 겨우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입을 여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ㄴ). 이는 너희도 간음하다가 붙잡혀 왔다는 이 여자가 지은 죄만큼 죄를 지으며 살고 있지 않느냐 하는 말씀이었고, 이는 비수처럼 그들의 양심에 꽂혔다. 그러자 이 말씀 한 마디에 상황이 반전되어 버렸다. 살기등등했던 고발자들이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언가를 쓰고 계시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르는 동안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고발자들은 다 돌아가고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았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그분이 자비를 베푸시는 독특한 심판의 방식이 펼쳐진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달라진 이 상황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물어보셨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요한 8,10). 

이는 몰라서 던지신 물음이 아니었고 최소한의 인권도 보호받지 못한 채로 수치심으로 온 몸이 떨고 있었을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인격적인 대우를 하신 것이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 여인을 막무가내로 붙잡아 오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었다. 그저 죄인 취급만 했을 뿐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아무런 자기방어권도 주어지지 않았던 그 여인에 대해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하지 않으셨다. 이름도 묻지 않으셨고, 정말 간음 행위를 했느냐고 확인하지도 않으셨다. 단지 고발자들이 꽁무니를 뺀 상황을 확인시키고 안도감을 주시려던 것뿐이었다. 이것이 죄를 지었다고 의심받는 피의자(被疑者)의 인권을 존중하는 자세이다. 

 

  당연히, 그 여자는 “아무도 없습니다.”(요한 8,11ㄱ) 하고 대답했고, 이 대답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엄하게 단죄하는 대신 자비를 베푸는 사죄 선언을 하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마라”(요한 8,11ㄴ).  흔한 의미의 보속(補贖)조차도 요구하지 않고 흔쾌하게 보내셨다.  예수님의 고해성사였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죄인을 어떻게 심판하시는지, 또 장차 어떻게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지, 더 나아가서는 최후의 심판 때에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심판하실 것인지까지 다 드러났으며, 하느님의 자비가 예수님을 통하여 어떻게 베풀어지는지도 밝혀졌다. 심판에 대한 계시라 할 것이다. 

논쟁의 핵심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죄인으로 단죄하려고 여인을 데려다 놓은 사건에서 촉발된 죄와 자비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유다인들의 음모를 파악하신 예수님께서는 과감하게 이 여인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심으로써 당신께서 현재와 최후 순간에 어떻게 죄와 죄인을 심판하실 지에 대한 원칙을 세우셨다. 그리고 이 자비는 진리에서 나오는 것임을 밝히셨으며, 이 진리가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킬 것이고, 이 자비와 진리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야말로 인류의 영적 어둠을 비추는 하느님의 빛이라고 가르치셨다. 또 다시 예수님께서 신성에 입각하여 당신의 신원을 밝히신 내용이다. 

 

8.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20)

  “예수님은 갈릴래아나 팔레스티나, 유대아만의 빛이 아니라 온 세상의 빛이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분은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빛에서 나신 빛이시나, 당신의 빛을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육(肉)이라는 구름으로 빛의 세기를 낮추셨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의 비추심은 세례의 물을 통해(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우리를 불사(不死)로 인도한다. 그분은 갈릴래아에 나타나리라고 이사야가 예언한(테오도루스) 영원한 빛의 광채를 드러내는 빛이시다(고백자 막시무스). 그분은 빛 안에 계시며(암모니우스) 또한 본성에 따라 빛이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해의 빛과 달리 이 빛은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는다. 믿음의 눈으로 이 빛을 따라가면, 마침내 우리는 결코 밤이 오지 않는 미래의 세계를 보게 된다(아우구스티누스).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불기둥의 빛을 따라갔을 때는 길을 잃지 않았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우리 주님께서는 동료 바리사이들과 달리 어둠을 좇지 않은 니코데모를 빛을 따르는 이로 넌지시 칭찬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빛으로서 모든 이를 비추시는 예수님을 바리사이들은 부정하게 고발하지만, 그 빛은 본성상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존재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한 증인으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계시며(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빛으로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곧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아시지만, 그들은 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인간(의 모습만)을 볼 뿐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보지 못하며(아우구스티누스), 그래서 육에 따라 그릇된 판단을 한다(요한 크리소소토무스). 바리사이들이 자꾸 싸움을 걸어오지만 예수님께서는 심판을 미루신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면 아버지와 함께 심판하실 것이므로, 그분의 판단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테르툴리아누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며, 이는 결코 아들이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심판과 관련하여 율법을 언급하신 것은, 판결에는 둘이나 세 증인이 필요하다는 율법 조항을 존중하셨음을 말해 준다(테오도루스). 삼위일체는 실로 증인의 요건을 갖추었으며, 예수님의 증언을 확인해 준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의 행위도 그분께서 아버지와 동등하심을 증언해 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들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며, 이것이 예수님께서 ‘아들을 알면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뜻이다(아우구스티누스). 이단들은 이 말씀을 이용해,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입증하려 한다. 그들은 고대의 유대인들도 지금의 바리사이들도 아버지를 모른다고 주장하며, 그들이 섬기는 창조주는 아버지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이 아버지 – 창조주이기도 한 – 를 모르는 진짜 이유는 그들이 창조주의 뜻에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대충은 알았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나 그분의 아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성전 헌금함 곁에서 하셨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는데, 아마도 예수님께서 영적 보물 창고를 열어 헌금함에 당신의 봉헌물을 넣으셨다고 암시하는 듯하다(오리게네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스스로 바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느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결코 아니다(아우구스티누스).”

 

  무고한 간음 혐의로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던 여인을 용서하여 자비를 베푸심으로써 위험에서 구하신 예수님께서 이에 빗대어 당신 자신의 신원을 밝히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8,12ㄴ). 이 말씀의 뜻을 풀면 이러하다. 죄는 마귀의 것이고, 자비는 하느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귀의 간계에 빠져 자신의 자유의지로 죄를 짓게 된 경우, 하느님께서는 죄와 사람을 떼어 놓으려고 하신다. 이를 단죄(斷罪)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을 죄에서 떼어 놓기 위해서라도 죄를 지었던 그 사람을 받아들이고자 하신다. 이를 용서라고 한다. 이 단죄와 용서가 자비인 것이고, 이것이 하느님께서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시고자 하는 생명의 빛이었다. 그러니까 억울하게 죄인 취급을 받는 이를 용서해 주고 그럼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일이야말로 생명을 구하는 세상의 빛이라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세상은 죄악으로 인해 어둡다. 본시 하느님께서 뜻하신 세상은 어둡지 않았으나, 하느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마귀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꼬여 죄를 짓게 함으로써 세상이 어두워졌다. 하느님 창조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시기하는 마귀의 힘 즉 원죄의 영향력이 이토록 크고 끈질긴 것이다. 이 어두워진 세상을 비출 수 있는 빛은 사랑이요 자비를 속성으로 한다. 그래서 마귀의 힘과 원죄의 영향력을 능가할 수 있도록 사랑의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자비의 영역이 넓어져야 한다. 그래서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사람들은 빛으로 나아와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이로써 해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제8장에서 요한이 소개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신원 진리이다. 결국 예수님은 자유와 해방의 빛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담아서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대적하고자 버티고 있는 바리사이들이 어둠 속을 걷고 있는 무리임을 에둘러 암시한 셈이었는데도 그들은 눈치도 없이 그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 들었다. 즉, “당신이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으니, 당신의 증언은 유효하지 않소.”(8,13) 하고 반박한 것이다.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메시지에 흠집을 내고 싶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빛과 어둠에 대한 이치야 무슨 수로 논박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러한 이치를 논하는 메신저, 즉 예수님의 태도에서 흠을 찾으려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동원한 논리가 ‘복수 증인에 의한 증언의 유효성 조건’이다. 이는 신명기에 기록된 율법에 근거한다. “어떤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잘못과 관련하여, 그의 어떤 죄나 잘못이든지, 증인 한 사람만으로는 그 증언이 성립되지 못하고, 증인 둘이나 셋의 증언이 있어야 유죄가 성립된다”(신명 19,15). 이 논리는 타당하고 합리적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여도 나의 증언은 유효하다.”(요한 8,14ㄴ)고 반박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자의식 속에는 당신의 신성과 더불어 일체를 이루고 계신 하느님과 성령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다. 성부와 성령께서 성자이신 당신을 함께 증언해 주고 계신다는 것이다(요한 8,16ㄴ; 15,26). 그러니 증언과 증인에 관한 율법 규정(신명 19,15)을 충분히 채우고 있다는 생각에서, “바로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관하여 증언하신다”(8,18)고 자신 있게 대답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구절에서는 인성적 존재로서의 예수님을 신성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증언하고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바리사이들이 지적한 바 ‘자기증언을 하고 있다는 율법적 모순’을 넘어서고자 하셨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도 삼위일체적 자의식과 더불어 당신 자신의 신성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계신 현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신성을 전제한 예수님의 자의식과 존재를 전혀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증언에 대해서 수긍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상의 빛’과 ‘생명의 빛’에 대한 가르침 역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소?”(8,19) 하고 되묻고 있었던 태도가 그 증거이다. 그리하여 꽉 막힌 그들의 태도가 무지에서 나오는 것임을 단정 짓고 더 이상 무익한 이 논쟁을 중지시키신 것은 그분의 이 말씀이었다. “너희는 나를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8,19ㄴ). 

 

  요한은 이 논쟁을 보도하면서, 그 장소가 헌금함 곁이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 이 장소는 성전에 예배하러 와서 헌금하는 유다인들이 빈번하게 오가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성전 경비병들을 동원하여 체포하기에도 손쉬운 자리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을 붙잡지 못했다고 요한은 전한다. 그 이유가,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8,20ㄷ)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사악한 음모는 시작되었으나 죄의 어둠이 더 짙어져야 새벽 동이 터 올 것이다. 요한의 깊은 묵상이 서려 있는 이 해석을 실제적인 이유로 풀이하자면, 바리사이들이 아직은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은 후반부에 가서도 카야파의 장인이었던 대사제 한나스가 예수님을 신문한 대목만을 간략히 보도할 뿐 정작 그 해의 대사제였던 대사제 카야파가 주관했던 재판 과정을 거의 생략하고 있다(18,12-14.19-24). 아마 바리사이들이 동원한 증인에 대한 보도가 거짓이어서 별 의미가 없다고 간주한 것 같다. 실제로 마태오가 보도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바리사이들은 거짓 증인 두 사람을 억지로 확보하여 성전모독 혐의와 신성모독 혐의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결론을 겨우 이끌어냈다(마태 26,60-66).

 

8.3. 예수의 신원(身元)(8,21-30)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적대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표현할 수 있는가?(오리게네스). 그리스도의 생명을 찾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고 하나는 그분을 죽이기 위해서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없음을 보시고 떠나시겠다고 엄포를 놓으신다(오리게네스). 이 만남은, 거룩한 지혜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며 아래에 있는 이들은 위에서 온 이들에게서만 배울 수 있음을 보여 준다(클레멘스). 아래에 있는 이들이란 지상에 보물을 쌓는 이들이다(오리게네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그들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계셨으며 세상을 창조하신 분은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시며(아우구스티누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또한 그 어느 것에도 속한 분이 아니시기(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때문이다. 믿는 이들도 이 세상에 속한 이들이 아니며, 그들은 자기 죄 속에서 죽을 이들이 아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자신이 죽도록 내버려 둔다(오리게네스). 그러나 믿는다고 해서 ‘있는 나’이신 분을 언제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믿는 이들이 ‘나는 안다’고 하지 않고 ‘나는 믿는다’고 표현하는 것은 옳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께서는 처음부터 한결같이 계시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어쩌면 이 단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처음’은 언제나 계셨던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그분은 ‘한처음에’ 계셨던 말씀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서 시작하여 ‘끝’으로 옮겨 가며 미래의 심판에 관해 예언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그들이 당신께 보인 경멸을 제어하시는(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한편 아버지의 말씀이 아들 안에서 발설되기에 당신의 심판은 참됨을 보여 주신다(테르툴리아누스). 예수님께서는 심판에 대해 예언하시며, 당신을 죽일 이들의 회개에 대해서도 예고하시는데, 그들은 그제서야 당신이 누구신지 알게 되리라고 하신다. 당신의 ‘들어 올려짐’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은 그분께서 영광스럽게 되는 일이 아니라 십자가 수난에 관한 말씀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더불어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 줄 십자가에 관해 다시 말씀하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아버지께서 아들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낳으셨다. 그 낳음을 통해 아버지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지식도 주셨다. 그러나 아들은 어떤 점에서도 아버지보다 못하지 않다. 아버지께서는 육화의 사명을 이행하도록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으며(아우구스티누스), 아들이 한 일 가운데 그 사명이나 당신 아버지의 뜻과 어긋나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군중은 아버지께 완전히 복종하는 그분의 겸손에 마음을 열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렇게 바리사이들과 예수님 사이에 한 치도 양보 없는 치열한 논쟁을 한바탕 치루고 났는데, 그 때문에 불편해졌을 텐데도 계속 남아있던 이들이 있었다. 적대자들의 한 패는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다가 자신의 죄를 생각해서 양심이 찔려 돌아간 사람들은 일찌감치 돌아가 버렸고, 그래도 분이 덜 풀렸는지 남아서 성전 헌금함 곁에서 예수님과 증언의 유효성을 놓고 논쟁을 벌여 보려던 적대자들 중 나머지 패들이 이들이었는데, 이들도 그분께서 뜻밖에도 하느님을 증인으로 대시자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그분을 믿지도 못하겠고 더 이상 대들 용기도 내지 못하는 어정쩡한 분위기에서 엉거주춤하고 남은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펼치셨던 가르침을 전제로 본격적으로 당신의 신적 존재에 관한 가르침을 펴기 시작하셨다. 

 

  즉, 바리사이들이 그분에게 요구하고 기대했던 것은 그 여인을 단죄하라는 것이었지만 그분은 그 대신에 용서를 베풀어 돌려보내셨는데, 이렇게 자비를 베푸는 행동이야말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가르침이 그 첫 번째였다. 행동으로 나타난 이 무언의 가르침의 뜻을 풀이하시느라고 그 자비가 바로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빛임을 설파하는 말씀을 이어서 하셨는데 이것이 그 두 번째 가르침이었다.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처하면서 율법의 정의를 내세워 온 바리사이들이야말로 정작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모르는 자들이며, 따라서 세상을 살리지 못하고 가로막고 있는 죄인들이라는 말이 된다. 유다인들 앞에서 의로운 척 해 온 그들이 예수님 앞에서는 위선자로 전락해 버린 꼴이다. 이렇게 되자 매우 어색한 분위기가 생겨났을 터인데, 사납게 대들던 유다인 논객들은 여인을 겁박하던 패들처럼 돌아가 버리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피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가르침을 꺼내어 놓으셨다. 그러니, 예수님을 지지하는 군중 앞에서 그분을 죄인처럼 체포할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진리를 설파하시는 그분의 가르침을 아예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릴 정도로 양심이 살아있지도 못한 이 어중치기 유다인들을 설득하시려는 예수님의 노력이 눈물겨울 지경이다. 

 

  이제 세 번째 가르침은 단지 당신 자신의 신원에 대한 설명으로 그치는 일회성 말씀이 아니었다. 함께 있던 제자들과 듣고 있던 유다인 군중은 물론 요한복음서를 통해 이 대목을 읽고 있는 독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을 믿든 믿지 않든 모든 사람들을 두루두루 다 포함하는, 즉 인간의 구원과 직결된 보편적 진리를 선언하는 계시 내용이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 가르침은 예수님과 유다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대화 부분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러하다. 

 

예수: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8,21ㄴ).

군중: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8,22).

예수: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8,23ㄴ-24).

군중: “당신이 누구요?”(8,25ㄱ).

예수: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8,25ㄷ-26.28ㄴ-29).

 

  이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핵심은 당신의 신원과 역할이다. 당신의 신원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기 때문에 만일 당신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께로 구원되기를 거부하는  죄일 수밖에 없으며 그 죄 속에서 살다가 죽으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이 명제가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에 해당되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이 진리를 모를 뿐만 아니라 무시하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유다인들은 그 행동이 되레 진리를 드높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데, 그때라야 비로소 당신이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시는 분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이 궁금해 하던 바, 당신의 신원과 역할에 대한 본격적인 말씀까지 마치시자 남아있던 군중 가운데에서 많은 유다인들이 그분을 믿게 되었다(8,30). 하지만 그들 중에서 그분을 죽이려는 자들은 아직 여전히 남아 있었다(8,37.40ㄱ).

 

  이렇듯이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한 이들과 죽일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한데 섞여 있는 상태에서 이 군중을 상대로 예수님께서는 논쟁을 벌이셨다. 복음선포의 치열한 면모를 보여주는 이 논쟁 역시 선교의 또 다른 국면이었다. 진정한 아버지가 누구이신지(8,31-41ㄱ), 또한 그분과 군중은 누구의 자손인지(8,41ㄴ-47) 하는 혈통 논쟁이었다. 이는 육신의 혈통이 아니라 진정한 정체성에 관한 논쟁이었다. 먼저 아버지 논쟁에 대해 살펴보자.

 

8.4. 논쟁 1: 아버지가 누구인가?(8,31-41ㄱ)

  “주님께서는 믿는 이들의 신앙을 시험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 안에 계속 머무르기가 그분께로 오는 것보다 어렵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진리를 알게 된다. 진리는 곧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당신에 대한 믿음으로 의로움을 인정받은 이들에게 자유를 주신다(키프리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이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며, 우리는 이 약속을 완전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알기 위해 믿는다. 진리는, 우리의 방황으로 그 흔적이 많이 지워졌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새겨져 있다. 우리의 자유는 우리가 진리에 자기 자신을 복속시킬 때 온다. 영혼은 평화 안에서 진리를 누리지 못하는 한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죽음과 부패와 가변성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를 가져다준다(아우구스티누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종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들이 종이라는 예수님의 언명을 입증해 주는 역사적 사실이 숱하다(아우구스티누스, 테오도루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실 때는 당신 말씀이 참되다고 맹세하시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그때나 이제나 하느님을 섬기면서 죄를 지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신다(이레네우스). 죄는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우리는 참회로 죄의 굴레를 끊고 눈물로 죄를 씻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죄를 따른다면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된다(大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과 딸들의 참된 자유를 주신다(테오도루스). 그래서 우리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죄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자유로울 뿐이다(아우구스티누스). 참된 자유를 가져다줄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뿐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자유롭게 되었다고 해서 그 자유를 남용하여 죄를 짓는 방종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아우구스티누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내세우는 대신 그보다 더 고귀한 것 – 만유의 임금님의 존귀함 – 에 눈을 돌렸어야 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러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삼기만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누구나 아브라함의 자녀는 아니다(오리게네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지금 당신을 두고 꾸미는 짓이 죄임을 떠올려 주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었더라면, 말씀께서 그들의 마음 안에 가라앉아 그들을 구원으로 건져 올리셨을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말씀께서는 그들 안에서 머무르실 곳을 발견하지 못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에게서 오며, 예수님은 아버지와 신적 본질만 아니라 진리도 똑같이 지니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이해함으로써 진리를 깨닫기 바라신다. 그분은 진리이시며(아우구스티누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직접 보신 증인(오리게네스)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누구의 자손이라고 미처 말씀하시기 전에도 그들은 행동으로 자신들이 누구의 자손인지 보여 준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하느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이야기하고 계시는데, 그들은 오히려 더 낮게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내세운다(오리게네스). 아브라함을 거슬러 무슨 말을 감히 할 수 있느냐는 투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신다(오리게네스). 그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태도가 아브라함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진정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고 싶다면 그들은 아브라함이 한 모든 일을 해야 한다(오리게네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녀도 아니며 진리에 다가가지도 못함을 보여 준다(에우세비우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인성을 단언하며 진리를 말한 ‘인간’을 죽이려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오리게네스). 그분은 당신의 인성만 단언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은 아버지께 이 진리를 들었으므로 아버지와 동등하시다는 점도 단언하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한 것과 정반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는 모르나, 그들이 맺는 열매가 그들이 진짜 누구의 자손인지 보여 준다(오리게네스).”

 

  예수님을 믿는 유다인들까지도 자신들의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라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아브라함이야말로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족보를 내미는 식으로 형식적 답변만 늘어놓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육신의 혈통에 관한 족보 논쟁이 아니라 믿음에 입각한 영적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임을 일깨워 주시려고 진리와 자유에 관한 담론으로 이어가셨다. 그래도 군중은 우이독경(牛耳讀經) 하는 격으로 동문서답으로 받았다. 

 

예수: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1). 

군중: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8,33ㄴ).

예수: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8,34ㄷ-36.38). 

군중: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8,39).

예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8,39ㄴ-41ㄱ).

 

  그러니까 이 마이동풍(馬耳東風)식으로 진행된 아버지 논쟁의 요지는 이렇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들은 진리를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군중도 이를 인정하고 깨달으면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인데, 유다인 군중은 이를 인정하기는커녕 그분을 죽이려는 죄를 저지르고 있으니 죄를 짓게 하는 악마의 꼬임에 빠져 있는 것이어서 그들의 아비는 악마라는 암시를 강하게 주고 계시다. 

 

  이 논쟁의 부산물로 생겨나서, 후대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구절이 바로,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8,32)는 말씀이다. 여기서 진리란 당연히,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시켜 하신 말씀이며 또한 그래서 빚어지는 상태로서의 자유란 자연히,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인생이다. 

 

8.5. 논쟁 2: 누구의 자손인가?(8,41ㄴ-47)

 

  이 대목은 마치 병목현상을 보여주는 강물의 흐름처럼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쌍방이 주고 받는 논쟁을 벌이고 있어서 이 대화를 읽기가 매우 지루한데, 교부들은 이 팽팽한 대화를 일일이 따라가면서 풀이를 남겨 주었기 때문에 그 의도를 짐작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선, 아버지 논쟁이 마무리되지 못하고 자손 논쟁으로 이어져야 했던 이유는 그들이 ‘사생아(私生兒)’라는 표현을 꺼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이려는 군중의 음모를 두고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는커녕 죄를 짓게 하는 악마의 자손이라서 그렇다고 정곡을 찌르시자(8,40), 그들은 자신들이 사생아가 아니라고 응수하였다(8,41ㄷ). 아우구스티누스 교부는 이 대답에 대해 풀이하기를, 그들이 생각 없이 무책임하게 사생아를 낳는 간음행위를 저지르는 자들이며 영적으로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공격받고 있음을 눈치챘다고 보았다. 그들이 굳이 이 표현을 쓴 것은 키릴루스 교부의 풀이대로, 예수님께 따라다녔던 사생아 소문을 상기시켜서 도덕성에 타격을 입히려고 그들이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사생아가 아니라고 대답했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활 태도를 공격함으로써 영적 간음의 죄를 묻고 계시다는 것을 눈치챘다(아우구스티누스). 그들은 앙심이 담긴 말로 대답하기로 선택했다(아우구스티누스). 그들의 대답에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이 아니라 출생이 의심스럽다는 뜻이 들어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와 마찬가지로 인간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들과 달리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의 아버지시다. 그런 다음 아들께서는 하느님께서 왜 당신 아버지이신지에 대해 말씀하신다. 당신이 태어나게 된 경위와 아버지에게서 오신 일에 대해 말씀하신다(오리게네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사악한 의도에 말려들지 않으셨다. 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우기던 태도에서 이제는 자신들의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가자, 예수님께서도 내친 김에 당신의 신원과 관련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셨다. 하느님께로부터 낳음을 받았고 파견을 받은 아들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운을 떼신 것이다(8,42ㄴ-43). 교부들은 이에 대해 풀이를 하면서, ‘나심’과 ‘오심’과 ‘들음’의 뜻에 대해 상기시켜준다.

 

  “아버지에게서 나심과 아버지에게서 오심은 의미가 다르다. ‘나심’은 그분의 영원한 나심을 가리키고 ‘오심’은 육화를 가리킨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음을 강조하신다. 이는 아버지께서 보내지 않으신 이들은 누구인가를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하다(오리게네스). 그런 자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듣지 못한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런 ‘들음’은 귀먹은 이들을 고쳐 주시는 ‘말씀’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오리게네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악마의 욕망대로 하려는  군중에게 그들의 아비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인 악마이기 때문에 그들은 악마의 자식이라고 서슴없이 폭로하셨다(8,44). 이로써 예수님과 유다인 군중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비가 누구인지 말씀하시는데, 곧 그들의 아비는 악마라는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 창조된 이는 누구나 본성에 따라서 악마의 아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악마의 아들이었던 자도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인지는 사랑의 삶을 사는 데서 드러난다. 불순종을 갈망하는 아비인 악마는 참된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서 기대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바란다. 우리의 행실처럼 욕망도 우리의 아비가 누구인지 드러내 준다(오리게네스)". 

 

  "동산의 뱀이었던 악마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였음을 보여 주었다(이레네우스). 그 자는 영혼을 살해했고(아우구스티누스) 아담에게 주어졌던 하느님의 모상을 살해하여 온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다. 거짓말쟁이인 그 자는 자기 자신조차 속였다(오리게네스). 그러나 악마가 죄많은 본성으로 창조되어 ‘처음부터’ 거짓말하고 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주님께서 말씀하시듯이, 그자는 ‘진리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 말은 그가 적어도 어느 한때는 진리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아우구스티누스). 악마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다. 따라서 그자를 따르는 이들이 거짓말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만 특별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오리게네스). 악마는 처음으로 거짓말을 만들어 낸 자일 뿐 아니라 처음으로 거짓말을 들여오고 사용한 자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이 대목은 다분히 영적이며 매우 근본적인 통찰을 담고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을 겪어 보고 나서 지니시게 된 생각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폭로하셨음을 보도함으로써, 머리글에서 이미 암시했던 유다인들의 배척 이유를 비로소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즉,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1,5)는 증언이라든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1,9-10)는 증언 그리고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1,11)고 증언했던 바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교부들은 그분을 배척하고 있는 유다인들이,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창조 때부터 악으로 유혹하여 죄를 저지르게 하고 있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임을 간파하고, 이를 주해로 남김으로써 요한 복음사가의 증언과 보도를 보충하고 있다. 이는 사도 바오로에게서도 나타나는 통찰이다. 그는 영적 투쟁을 권고하면서,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에페 6,12)이라고 통찰하면서,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평화의 신을 신으며, 믿음의 방패를 잡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쥐라.”(6,14-17)고 권고하고 있다.   

 

  그 다음 말씀(8,45-47)은 당신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유다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대로 그들의 아버지가 하느님이 아니신 증거를 입증하시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 증거는 두 가지로서, 첫째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나와 진리를 말씀하고 계신 그분을 믿지 않았고 둘째 그분의 말씀도 듣지 않았다. 

 

  “앞에서 요한이 ‘믿는’ 이들이라고 한 이들을 예수님께서 여기서 ‘믿지 않는’ 이들이라며 꾸짖으시는 사실은 그들이 기적은 믿었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믿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너희 가운데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고 입증할 수 있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온 인류에게 하신 말씀이다(오리게네스). 예수님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고 싶어 하는 자들은 진리의 원수들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하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말씀’을 제대로 듣는다는 말에는 순종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헤라클레아의 테오도루스). 우리는 마음의 귀로 들으라는 부르심을 받았다(大 그레고리우스).” 

 

  조상 대대로 하느님의 계시를 전해 받고 그분을 믿고 섬겨온 유다인들이 막상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찾아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믿지도 않고 있는 이 기막힌 현실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수수께끼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얼마든지 되풀이될 수 있는 걸림돌이다. ‘기적은 믿으면서도 진리는 믿지 않는’(교부 오리게네스) 행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따라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함부로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고 보신 것처럼,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을 면전에서 박대하는 유다인들에게 ‘기적이라도 일어난다면 믿어 주겠지만 진리를 믿지도 않고 오히려 배척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함부로 돌을 던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현실은, “너희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요한 8,47ㄴ)이라는 예수님의 경고이다. 하느님에게서 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그분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8,47ㄱ). 

 

8.6. 예수,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분*8,48-59)

  자신들에 대해 ‘악마의 자식’이라는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난 유다인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사마리아인’이며, ‘마귀 들린 자’라고 응수하고 나왔다(8,48). 이 명백한 모욕적 언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그들은 평소에 적대적이고 경멸적으로 대하던 ‘사마리아인’이라는 호칭을 그분의 면전에서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을 모욕하려 들었지만,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오히려 그분은 이웃 사랑의 모범으로 유다인들에게 제시하셨던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9-37) 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셨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정작 예수님께서 반응을 보이신 것은, 이 호칭보다 더 모욕적인 언사 즉 ‘마귀 들린 자’라고 그분을 부른 일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욕설에 가까운 이 멸칭(蔑稱)을 들으시고도,  “너희가 나를 ‘마귀 들린 자’라고 모욕하지만 나는 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요한 8,49)이라고 담담하게 대답하셨다. 이를 두고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하느님께 대한 모욕은 참아서는 안 되지만 우리에 대한 모욕은 참으라는 뜻이라고 풀이하였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를 모욕하는 자에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가르치시는 방식이다(大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만 에둘러 언급하셨지만(8,50),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교부는 이런 모욕죄를 범하면 하느님 앞에서 심판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풀이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당신을 모욕하고 있는 유다인 군중에게 전하고자 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8,51). 이상 8,48-51에서 보도된 논쟁에 대해 교부들이 주해한 내용을 보자.  

 

  “유대인 지도자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을 구원하시고 마귀들과 싸워 이기신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약한 이들을 지켜 주시는 이로서,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는,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바친 칭호를 받아들이신다(아우구스티누스). 실로 그분은 루카 복음서의 비유에 나오는 모든 일을 다 하시기 때문이다(오리게네스). 우리 주님은 당신을 비난하는 이들에게도 인내로 대하시며, 우리에게도 똑같이 행동하라고 촉구하신다. 하느님에 대한 모욕은 참아서는 안 되지만 우리에 대한 모욕은 참으라고 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당신에게 굴욕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은 그분의 명예를 더럽히는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오리게네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욕에 대응하는 방법을 가르치신다(大 그레고리우스). 그러나 아버지의 자녀를 능욕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결국 아버지와 셈을 치러야 한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분은 당신 아들의 영광과 평범한 인간의 영광을 구별하여 판단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같은 영광을 구하신다(오리게네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결정적 가르침을 들려주셨는데도, 이것이 도리어 이 가르침을 듣고 있던 유다인 군중을 격분시켰다. 그들이,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8,52ㄷ-53ㄱ) 라고 대들면서,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8,52ㄴ) 하고 마치 재판장이 선고하듯이 결론을 내려 버렸기 때문이다. 이 결론 같이 단정하는 언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이들은 죽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셨는데, 죽음을 초월한 듯한 이 말씀을 듣고 유다인들은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졌다. 이렇듯 대화를 시작했던 처음보다 훨씬 더 간격이 벌어져 버린 이유에 대해서 교부들은 아래와 같이 풀이하였다. 죽음에 대한 이해의 수준 차이에서 비롯된 이 간격은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물음으로 되돌아왔다(8,53ㄷ). 8,52-53에 보도된 유다인 군중의 발언과 질문에 대한 교부들의 풀이는 이렇다. 

 

  “예수님께서 선포, 곧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는 그분께서 지금 목격하시는 것과 같은 사악함과 심술이 날로 늘어 가는 때엔 더욱 중요하다(大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에게 약속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들은 마지막 원수인 죽음에서조차 자유롭다(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시므로 그분의 원수들은 그분께 아무 짓도 할 수 없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예수님께 대적하는 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죽음에 매달린다(大 그레고리우스). 그들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 암시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그분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이들의 영적 죽음이 아니라 모든 이가 겪는 육체의 죽음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고 바꾸어 말한다(오리게네스)". 

 

  "그들이 그리스도께 당신이 아브라함보다 위대하냐고 물은 것은 당신이 하느님보다 위대하냐고 물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을 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들은 아브라함과 예언자들은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당신을 보았고 당신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살아 있음을 아신다(오리게네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찾는다고 비난한다. 아브라함과 예언자들에 관한 그분의 말씀이 당신께서 불사(不死)라는 선물을 주실 수 있다는 뜻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찾고 계시지 않았으며, 그분께서 그 선물을 주셨어도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테오도루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당신의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신다. 그들은 그분의 아버지를 모른다. 아들을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당신 인성에 따라서는 아버지께 영광을 받으셨을지 몰라도 그 영광은 그분의 신성에 따라서는 언제나 그분의 것이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이렇듯 험악하게 변해버린 논쟁 판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인 군중이 제발 알아듣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끈질기게 설득하시려는 모양새였다. 즉, 유다인들이 섬겨온 하느님께서 바로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그분을 알고 있는 당신은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있으며 지키고 있고 아브라함도 당신의 날을 보리라고 기뻐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8,54ㄴ-56). 그런데 이는 당신의 신성을 전제하고 꺼낸 말씀이셨는데, 유다인들은 그 말씀을 듣고도 그분의 신성을 도무지 알아보지 못한 소치에서 질문하고 있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8,57ㄴ) 하고 묻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하듯 말씀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8,58ㄷ). 이렇듯 유다인들이 혼란스럽게 느끼기까지 했던 와중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차분하게 당신의 신원을 밝히고 계시는 대화(8,54-58)에 대해 교부들이 주해한 풀이도 보도록 하자. 

 

  “구약의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아우구스티누스).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아실 뿐 아니라 삼위일체 전체와 긴밀한 관계에 계시다는 사실로 입증된다(암모니우스). 아들은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분이시다(테르툴리아누스). 아브라함은 영 안에서 그분을 알아보았으며, 장차 그리스도의 날이 와서 자신을 비롯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가 구원받는 것을 보았다(이레네우스). 아브라함은 세 사람에게서 거룩한 삼위일체의 예시를 보았기에 그들을 한 사람으로 대했다(大 그레고리우스). 아브라함이 당신의 날을 보기를 고대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세상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칠(이레네우스) 자신의 후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실 일을 고대했음을 뜻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들 이사악을 희생 제물로 바쳤을 때, 아브라함은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한 양의 모습으로(에프렘) 제물로 바쳐진 날을 예고했다(테오도루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날 이사악과 그의 후손들만 지켜지도록 되어 있은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다른 민족들에게서도 완성될 것이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라는 유대인들의 말을 고려할 때, 당시 그리스도의 나이가 쉰 가까이였다고 볼 수 있을까? 다른 나이도 많은데 하필 ‘쉰’에 견준 것을 생각할 때 의문이 든다(이레네우스). 그러나 거룩하신 분에게 나이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大 그레고리우스). 그분의 적수들은 당신과 아버지의 동등함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곧 자신이 신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그래서 그분께 던지려고 돌을 주워 든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시듯 그들 사이를 지나가셨다.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실로 그들은 눈먼 자들이었다(테오도루스).” 

 

  결국 이 평행선 대화와 논쟁은 성과 없이 끝났다. 유다인 군중이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기 때문이다(8,59ㄱ). 이 행위는 실제로 그분을 해치려고 했다기보다는 설득당하기를 거절하고 대화를 중단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보인다. 어쨌거나 예수님께서는 평소에도 늘 그러셨듯이 아주 가뿐하게,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8,59ㄴ). 

 

  이러한 일은 기적이라고까지 볼 수는 없고 복음사가들도 기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물리적 정황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없다. 이런 사례를 더  들자면, 그분이 공생활을 시작하신 나자렛 회당에서 일어난 일을 들 수 있다. 사십 주야에 걸친 단식을 마치고 돌아온 고향에서 이사야 예언서 61장의 말씀을 봉독하시던 그분을  처음에는 대견하게 여기던 고향 사람들이 그 예언 말씀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갑자기 화가 잔뜩 난 일이 있었다. 그래서 돌변한 그들이 그분을 고을 밖으로 내몬 다음 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뜨리려고 했으나, 그분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이처럼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분이 보여주신 이러한 장면들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간음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보호해 주시고 자비로이 용서해 주신 사건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용서와 자비로 세상에 비추어주시는 이 빛이 사람들에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해방을 안겨주고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생명을 안겨주는데, 그 과정은 때로 험악하고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곤 하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자유를 가로막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 복음서의 머리말에서 암시했던 복선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3-5). 

 

  어둠과도 같은 사람들의 악한 분위기 속에서 자유자재로 발휘되었던 예수님의 행동은 부활 후에 본격화되었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던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의 일이다. 문을 열어 드리지 않았는데도 나타나신 그분은 두 손과 옆구리에 입은 상처를 지니신 채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를 하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 이렇게 물리적 제약을 넘어서서 자유자재로 행동하시는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은총을 사기지은(四奇之恩)의 하나인 ‘사무침’(Subtilitas)의 은총이라고 한다. 광선이 유리창을 통과하듯이 무엇이든지 꿰뚫을 수 있다는 이 은총은 죽은 후에 의인들의 영적인 몸에게서 나타나게 될 현실이거니와, 살아있는 동안에도 믿음으로 충만한 공동체에서도 현실적 제약을 ‘꿰뚫고’ 사랑의 기적을 이루어내는 현실은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다. 그 이유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하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8. 자비와 진리, 자유와 해방의 빛이신 예수 (8.1. -8.6.)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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