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7. 생명의 물, 영원한 생명의 성사 (7.1. - 7.5.)

[요한복음] 7. 생명의 물, 영원한 생명의 성사 (7.1. - 7.5.)

 

저녁노을의 글

2022-08-30 15:58:38 조회(405)

  이 게시글이 좋아요 싫어요

 

제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삼으신 소재는 빵이었다. 그분은 배고픈 군중에게 빵의 기적을 일으켜주시면서 앞으로는 먹어도 다시 배고파지는 빵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빵’을  주시겠노라고 약속하신 바 있다. 이 빵을 ‘생명의 빵’이라고 부르신 이유는 생명을 주시는 당신 자신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공생활에서 펼치실 활동의 목표가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임을 밝히신 셈이다. 그 복음이 다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아니라 기쁜 삶을 약속하는 말씀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복음선포의 일과 그 일을 하는 기쁜 삶으로써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겠다는 뜻도 된다. 

 

  이제 제7장에서는 그 소재가 빵이 아니라 물이다. 생명의 빵을 약속하신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물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음식을 먹는 일에 있어 빵과 물이 한 짝이어야 하듯이, 생명의 빵도 생명의 물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겠다. 물론 생명의 빵이 그러하듯이 생명의 물도 영원한 생명의 성사로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백성에게 소개하는 탁월한 비유인 것은 똑같다. 다만 생명의 빵 이야기의 배경이 갈릴래아 지방의 카파르나움에 있는 평원과 회당이었던 데 비해서 생명의 물에 관한 이 이야기의 배경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초막절 축제였는데, 이 축제에 관한 교부들의 주해가 이러하다. 

 

  “군중을 먹이신 기적 이후로 다섯 달이 지나 유대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초막절이면 사람들은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 도성 주변에 천막을 치고서, 이스라엘이 천막에 살며 광야를 헤매던 때를 기념했다(아우구스티누스). 초막절은 온 세상에서 거두어들여진 모든 성도가 천상 예루살렘으로 와, 일시적 거처에 지나지 않는 그들의 육체를 초막처럼 세우고 영원한 육체를 받을 때를 상징하는 예형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약속의 땅을 향해 가면서 살았던 거처는 정식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임시로 쳤던 초막이었다. 드넓은 시나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향해 가면서 이리저리 옮겨가며 살아야했기에, 초막을 저녁에 쳤다가 밤에 자고 일어나 생활을 영위하다가 장소를 이동해야 할 때는 다시 걷고 하기를 되풀이하면서 사십 년을 지냈던 것이다. 얼마나 지겹게 되풀이했을 것인가? 하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한 지금은 튼튼하게 지은 집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불편한 초막에서 살던 시절에는 그 불편함이 개선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라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절박했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은 그 초막의 불편함을 한 시도 잊지 않게 해 주는 희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땅에 들어와 막상 안정된 거처에서 살게 된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그 주거의 불편함에서는 겨우 벗어났으나 이 거처에서는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았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만 그들은 영원히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초막절은 바로 그 점을 잊지 않기 위해 제정되었다. 그래서 이 초막절은, 지었다가 허물고 다시 짓기를 되풀이해야 하는 임시 거처에서 벗어나서 약속된 땅에 들어가 안정된 거처에서 살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며 지내는 민족 축제였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집을 지어 안정된 주거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는, - 이것이 더 중요해 진 초막절의 뜻이었거니와 - 자칫 안이해 질 수도 있는 신앙을 다잡아 주는 한편, 언젠가 들어가 영원히 살게 해 줄 하느님의 집을 희망하며 지내는 종교적 성격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 하느님의 집은 건물이 아니라 부활된 육신을 뜻하고 있었다. 사람의 육신은 기껏해야 백 년을 넘기기 어려운 인생을 담는 ‘초막’과 같은 허접한 집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생명을 주는 빵과 물로 생기를 얻은 ‘부활한 육신’은 영원한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새로운 몸이자 집이었다

 

  이 축제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의 지향대로 백성이 바라마지 않는 하느님의 집 즉 부활한 육신을 당신이 몸소 마련해 주실 것을 전제로, 그 새로운 몸이 반드시 마셔야 할 생명의 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마실 물이 없던 시나이 광야에서도 모세는 하느님께 기도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위에서 샘솟는 물이 나오게 해 주었던 고사(古事)를 염두에 두신 말씀이었다(민수 20,11; 신명 8,15). 

 

  생각해 보면,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널 수 있었던 일이야말로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히브리인들이 체험한 하느님의 기적이었다. 이 체험을 바탕으로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음을 모세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고 따라서 하느님 백성이 되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십계명을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받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정만도 60여 만 명이요 전체 규모로는 그 몇 배에 이르렀을 대규모 군중이(탈출 12,37;38,26) 그 넓은 시나이 광야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먹을 빵과 마실 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백성은 모세에게 줄기차게 요구했고 모세는 하느님께 청했던 결과,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왔고 바위에서 샘솟는 물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백성은 광야 생활을 버틸 수 있었는데  이것이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할 수 있었던 비결로서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었다. 이 생생한 현존 체험이야말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에서 필리스티아족을 비롯한 토착 원주민들로부터 부대껴야 했던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이제 하늘로부터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역할을 넘어서는 역할을 하고자 하셨다. 즉, 시나이 광야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그저 육신 생명이 먹고 마실 수 있는 대책을 넘어 영적인 몸이 먹고 마실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주시려 하고 계셨다. 여기서 생명의 빵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물이란, 당신 자신을 세상에 현존케 하시는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음에 대한 탁월한 비유였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의 빵에 관한 제6장과 생명의 물에 관한 제7장은 성령의 비유로서 짝지어 병행하는 장이라 볼 수 있다. 성체성사의 성서적 근거로서도 이 두 꼭지는 빵과 포도주라는 두 재료의 배경으로서 함께 취급되어야 옳다. 

 

  카파르나움 근처의 평원에서 며칠 동안 진행된 하느님 나라의 가르침을 듣는 동안 굶주리게 된 군중에게는 빵의 기적을 일으켜 당장의 배고픔도 면하게 해 주는 한편 카파르나움 회당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생명의 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기적으로 열리곤 했던 초막절 축제에 가셔서는 그 불편했던 주거 사정에다가 마실 물도 얻기가 힘들어 고초를 겪었던 그 시절을 연상시키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생명의 물을 약속하신 것이었다. 

 

  그러니까 요한 복음사가는 이 두 장을 연이어 배치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밝히신 당신 자신의 정확한 신원과 역할 – 당신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 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한편, 이스라엘에 이어 장차 새로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후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분의 현존을 누리게 해 주실 성령 – 성체와 성혈로 받아 모시는 생명의 빵과 물 - 을 소개해 주고 있는 셈이다.  

 

7.1. 예수와 그 형제들 이야기(7,1-9)

 

  제7장의 서막은 본격적으로 초막절 행사가 열린 예루살렘에서 열리는데,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르침을 보도하기에 앞서 갈릴래아에서 그분의 형제들과 빚으셔야 했던 갈등 상황을 먼저 보도하고 있다(요한 7,1-9). 이 갈등의 원인은 형제들이 제공하였다. 초막절이 가까이 왔는데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지 않고 갈릴래아에 남아계시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시자  그분의 신성을 믿지 않았으면서도 형제들은 그분께 초막절 참석을 권유하였다(7,3-4). 마치 초막절에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 뜻이 떠보는 태도였다(교부 테오도루스). 형제들의 권유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건성으로 둘러대시며 형제들과 그 축제에 동행하기를 사양하셨다(요한 7,6-9). 사실은 축제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다기보다는 형제들과 동행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왜 그러셨을까? 그 형제들은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이 갈등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먼저 제7장의 초막절 이야기가 벌어지는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지리적 배경부터 살펴보자. 제6장의 이야기가 카파르나움 평원과 회당, 그리고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하는데 비해, 제7장의 이야기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마을에서부터 초막절 축제가 벌어지는 유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한다. 그 다음, 제6장에서는 제자들은 물론 군중과 함께 빵의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기적 그리고 생명의 빵에 관한 가르침 등이 나오는데 비해, 제7장에서는 제자들이 나오지 않는 대신에 예수님의 형제들이 등장하고 초막절 축제에 참석한 군중이 나오며 생명의 물에 관한 가르침이 나온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하는 형제들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2,13-22)과 성전 옆 벳짜타 연못가에서 안식일에 앉은뱅이를 치유해 주신 사건(5,1-18) 이후로 예수님께서는 위험한 인물이 되어 주목받고 계셨다. 예루살렘의 주류 유다인들이 감히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한 예수님을 미워한 나머지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방을 피해 갈릴래아 지방에서만 돌아다니시곤 했는데, 이제 더 위험해져버린 예루살렘에서 열릴 초막절 축제를 앞두시고는 제자들은 갈릴래아에 안전하게 있게 하시고 당신 혼자서만 그 축제에 가셨다. 뜻을 함께 하는 제자들과도 동행하지 않는 판에 뜻도 통하지 않는 당신의 형제들과 같이 동행하려 하지 않으심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일종의 연막을 쳐서 그들을 따돌려 놓고 나중에 혼자서 은밀히 올라가셨다. 그 이유와 이 ‘형제들’의 의도에 대해서는 아래에 교부들이 밝혀놓고 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과 함께 주목받고 싶은 마음에,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 축제를 지내기 바란다(테오도루스). 이는 그들이 그분께서 누구인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믿음도 없었음을 드러내 준다(테르툴리아누스). 예수님께서 그들이 생각하는 종류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시기에, 그들에게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장차 올 것을 당신께서 아시는 영광의 때도 굴욕의 때도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아우구스티누스). 훈육을 받을 때 우리가 그러듯이, 그분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꾸지람을 못마땅해 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는 공공연히 축제에 참석하여 눈에 뜨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지금은 축제를 즐길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아폴리나리스). 예수님께서는 거듭 당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시는데, 당신께서는 다음 파스카 축제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루에 끝나지 않는, 영구히 계속될 축제를 개시하실 것이란 사실도 알고 계셨다(아우구스티누스).” 

 

  복음서 본문과 교부들의 주해에 따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의 신성적 존재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르침이나 행적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형제라면서도 믿지 않았던 그들은 누구인가? 과연 그들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의 친동생들이 맞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성서학자들 사이에, 특히 가톨릭 학자들과 프로테스탄트 학자들 사이에는 그 해석 견해가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다. 당연히 가톨릭 성서학자들은 그 형제들이 친형제들이 아니라 ‘사촌’ 형제들로 보고 있고 교도권도 이에 따르고 있다. 그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성서학자들은 이 ‘형제들’을 그분의 친동생들로 보고 있다. 게다가 복음사가들이 특별히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요셉과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인정하지도 않고 있으며 따라서 예수님도 외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톨릭 성서학자들은 초대교회 이래로 요셉과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흔들림 없이 믿어온 신자들의 믿음을 근거로 그 형제들을 사촌 형제들로 본다. 

 

  프로테스탄트 성서학자들은 성서 해석에 있어서 그들의 개조(開祖)인 루터가 천명한 세 가지 구원 명제, 즉 ‘오직 성서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라는 명제에 매여 있다. 더군다나 루터가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사신부로서 정결과 순명과 청빈의 덕행을 지키겠노라고 서원했던 바를 깨뜨리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요셉과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루터가 결혼한 상대는 역시 정결을 서원했던 가타리나(Katharina von Bora, 1499-1552) 수녀였다. 가타리나 수녀는 루터의 저술을 읽고 동료 열한 명과 함께 마리엔트론(Marienthrone) 수도원을 탈출하여 비텐부르크 성에서 루터의 보호를 받다가 결혼했는데, 16살이나 차이가 났던 두 사람은 당시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독신제도에 항의하는 뜻으로 결혼을 감행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사정이 프로테스탄트 성서학자들이 성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 교파 이데올로기와도 같은 일종의 검열 기준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지시기 전에 당신 어머니 마리아를 당신의 형제들이 아닌 제자 요한에게 맡겨드리셨다(요한 19,25-27). 그 ‘형제들’이 친동기간이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아무리 요한이 사랑하는 제자라고 한들 그것은 상대적으로 제자들 안에서의 관계일 뿐이지 친혈육이 있었다면 이를 무시하고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실상 알고 보면 그 당시 같은 지파에 소속된 대가족 제도가 관습으로 되어 있던 이스라엘의 언어 관습상 ‘형제’란 대가족의 친척들에게 두루 쓰이던 용어였다. 이러한 정황을 참작하지 않고 일반적인 성서학적 해석 기준 외에 교파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특정한 사정 때문에 예수님의 형제들에 대한 복음서 본문 해석이 편향적으로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가톨릭교회에서 마리아와 요셉이 평생 동정으로 살았으며 예수님께는 동생이 없었다고 보는 해석은 이에 근거한 것이다. 생명의 빵에 관한 요한 복음 6장의 해석에서도 명백하기 짝이 없는 예수님의 말씀을 한낱 ‘~설’로 격하시킨 개조(開祖)들, 즉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 때문에 후대의 프로테스탄트 성서학자들도 어쩔 수 없이 그 해석을 따라가고 있는 형편도 이와 비슷하다. 

 

  대가족 제도가 엄연히 살아있던 당시 이스라엘 풍습으로, 요셉이 먼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예수님마저 출가하신 후에 홀몸이 된 마리아는 친척 형제들의 부양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그 형제들은 관습상 부양의 의무를 짊어지고자 했을 뿐, 마리아의 믿음은 물론 예수님의 뜻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테오도루스 교부의 주해를 읽다보면, 이 형제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덕을 보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도 품게 된다. 이들은 바리사이들이 기적을 일으키던 예수님께 대하여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라는 식으로 고약한 소문을 퍼뜨렸을 때에도 그분에 대한 믿음도 부족했던 그 형제들은 한 탓으로 그 소문에 휘둘려서 마리아를 부추겨 그분을 말리려고 쫓아오기도 했었다(마르 3,31-35; 마태 12,46-50). 그 형제들의 속마음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시 군중을 가르치고 계시다가 어머니께서 오셨다는 전갈을 들으시고도 나가 맞이하지 않으시고 대신에 이렇게 대꾸하신 바 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8.50). 바리사이들이 퍼뜨린 악소문에 흔들릴 정도로 귀가 얇았던  형제들이 당신을 믿지 못하고 어머니까지 모신 채로 당신의 가르침을 듣고 있던 군중 앞에까지 찾아오자, 그 얄팍한 처신에 불편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묻어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형제들과 동행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칫하면 형제들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처신 때문에 그 ‘위험한’ 예루살렘에서 사두가이들의 음모에 쓸데없이 엮일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7.2. 초막절 축제에서 벌어진 논쟁과 가르침(7,10-24)

 

  이미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방에서건 갈릴래아 지방에서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가 되어 계셨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초막절 축제에 참석하려던 형제들을 따돌리고자 갈릴래아에 잠시 남아 계시던 예수님께서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혼자 조용하게 올라가셨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모인  유다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도 초막절 축제에 참석하러 그 도성에 와 계시리라고 기대하고는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도 보고 싶어 그분을 찾는 분위기였다(요한 7,11). 

 

  하지만 사실 그러는 군중 사이에서는 그분에 대한 평판은 엇갈리고 있었다.  모두가 그분을 호의로 찾은 것은 아니었다(요한 7,12).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에 따르면, 대체로 권력자들은 그분에 대해 적의를 품고 의심하고 있었으며 그분의 행적을 직접 보았거나 전해들은 백성 대부분은 그분에 대해 호감을 갖고 지지하는 편이었다. 이렇게 그분에 대한 평판이 엇갈리는 가운데에서도 일치된 견해는 그분이 성경을 권위 있게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예수님으로서야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기적 사건을 보고서도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유다인들은 그저,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성경을 잘 알까?”(요한 7,15) 하고 감탄할 따름이었다. 이 딱한 정황에 대한 교부들의 주해가 이러하다. 

 

  “초막절의 의미를 알고 나면, 어째서 예수님께서 남몰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이 축제를 완성하셨는지 알게 된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남몰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은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지 않는 한편, 박해 때 우리가 어찌 처신해야 하는지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의 선의를 인정하는 이들이 있은 반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유혹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실제로 유혹하셨다 해도 그것은 사람들을 악에서 선으로 돌려세우려는 뜻이었으며, 이는 본받을 만한 일이다(아우구스티누스). 군중 가운데 일반 사람들은 제대로 판단하여 그리스도의 선의를 알아본 반면, 통치자들은 그분을 사기꾼으로 여겼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백성이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도록 인도하는 대신 그들이 그리스도를 반대하도록 잘못 인도한 유대인 지도자들은 책임져야만 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들은 예수님의 지식이 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그분의 신성한 기원은 알지 못한 채(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 배움이 어디서 왔는지 의아해하기만 했다(아우구스티누스).”

 

  이렇게 엇갈리는 반응이 나오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누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만 하면, 이 가르침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요한 7,16ㄴ-17)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답답한 나머지 정곡을 찌르는 답변을 스스로 꺼내신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 대한 논쟁은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르침을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 가르침이란 하느님이신 그분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암브로시우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이며 지혜로서 당신의 것과 아버지에게 속한 것을 모두 말씀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의 가르침은 곧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그분의 가르침과 아버지의 가르침이 정확히 일치한다. 그분은 아버지의 지혜이시기에 아버지께서 그분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참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아는 이들임을 알려 주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사도들의 제자인 교부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을 가장 닮은 아드님이시며 또한 하느님 자신이시기도 하다는 그리스도 신앙의 삼위일체 계시에 근거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그분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천하시는 행동과 이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풀이해서 알려주시는 그분의 가르침이야말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기준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즉, 성경 해석이란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정신적 작업인데, 이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성경 해석을 시도해야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만 성령의 이끄심을 받을 수 있고 그렇게 성령께서 이끌어주셔야 계시 진리가 담긴 성경의 의미를 인간 이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이 현대 해석학의 기본 전제이다. 역으로, 실천을 보면 해석이 드러난다는 것도 참이다 - 신앙을 부인하는 이성으로는 결코 계시 진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실제로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에 먼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신 다음에야 그 실천 행동에 담긴 뜻을 군중이 알아듣기 쉬운 소재를 동원한 비유 형식을 동원하여 밝히시곤 하셨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을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말씀하시면서,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희 가운데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다. 도대체 너희는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요한 7,19) 하고 묻자, 권력자들 꾸미고 있던 적대적인 음모를 미처 알지 못하던 다수의 군중은 의아한 나머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마귀가 들렸군.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요한 7,20) 

 

  군중으로부터 황당하다는 이런 반응을 초래한 예수님의 물음은 아마도 당신께 호의를 지닌 군중 가운데에도 첩자들이 숨어 들어 있으리라고 짐작하셨기에 던지셨을 것이다. 그 첩자들 중에는 당시의 종교 권력자들이었던 사두가이들의 첩자들은 물론  바리사이들이 보낸 첩자들까지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성전 정화 사건(요한 2,13-22)으로 인해 성전을 관할하던 사두가이들이 예수님을 위험한 인물로 주목하고 있는데다가 안식일에 앉은뱅이를 고쳐주신 일로 인해서 바리사이들도 예수님께 적대적인 감정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요한 5,1-18). 

 

  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 역시 이 사건을 상기시키시는 내용이었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하였을 뿐인데 너희는 모두 놀라워한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 사실 할례는 모세가 아니라 모세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되었다(창세 17,9-10) - 아무튼 너희는 안식일에도 사람들에게 할례를 베푼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어째서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온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준 것을 가지고 나에게 화를 내느냐?”(요한 7,21ㄴ-23). 

 

  그들 유다인들 가운데에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다.”(요한 7,19ㄴ)고 이미 간파하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할례 관습을 문제로 삼으셨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도 할례를 베풀던 그들이 왜 당신이 안식일에 앉은뱅이에 중풍까지 들려 걷지도 못하던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어 준 일을 왜 문제시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본시 그들이 할례를 행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일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으면서 그 징표로 삼기 시작한 할례는 이미 창세기 17,11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고, 모세도 이를 하느님의 법으로 지켜야 한다고 명하였기 때문이다(탈출 12,48). 하느님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하느님을 모르고 섬기지 못했던 죄가 사해지고 따라서 영혼이 깨끗해진다고 유다인들은 믿고 있었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할례를 하여 자신을 주님께 바쳐라. 너희 마음의 포피를 벗겨 내어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의 악한 행실 때문에 나의 분노가 불꽃처럼 터져 나와 아무도 끌 수 없게 타오르리라”(예레 4,4). 그러니까 유스티누스와 이레네우스 교부의 주해가 뒷받침해 주듯이 유다인들에게는 할례 의식도 일종의 치유행위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당신께서 행한 같은 치유 행위를 안식일에 이루어졌다 하여 율법 위반이라고 하느냐 하는 항의였다. 

 

  하지만 유다인들, 특히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는 그 어떠한 생업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내세웠고 예수님의 치유 행위도 일종의 생업에 해당되는 의료 행위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정황상 율법의 근본 취지를 회복시키려던 예수님과, 그보다는 율법의 정신에는 아랑곳없이 자신들이 해석해 놓은 세부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던 바리사이 유다인들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렇듯 평행선을 그으며 팽팽한 긴장을 유발하며 진행된 논쟁 속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르침을 교부들은 이렇게 보고 있다. 

 

  “율법을 만드신 분인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관계없는 것은 가르치지 않으시며 오히려 율법을 저급한 그림자와 같은 문자에서 더 유익한 영적 의미로 변화시키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러므로 그분이 하느님으로부터 당신에게로 사람들의 주의를 돌려놓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그분의 말씀 자체가 그분이 아버지와 뜻에서 일치함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자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고 있다(테오도루스). 그들은 마귀를 쫓아내신 분을 외려 마귀가 들렸다며 비난한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은 안식일은 물론 그들이 보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인데도,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셨다는 이유로 그들은 그분을 고발하기로 선택했다(아우구스티누스). 사실,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자들은 모세마저도 율법을 어긴 자로 만들 것이다(테오도루스). 그러나 안식일의 목적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안식일에 치유를 행했다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자들은 오히려 자기들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셈이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켜 내리신 계명에 따라 그들은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데, 할례도 일종의 치유 행위이기 때문이다(유스티누스, 이레네우스).”

 

  이상에서 언급된 교부들의 주해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닌 일관성이 더욱 분명해졌다. 율법은 애초에 모세가 가르쳐준 대로, 하느님의 뜻을 행하게 하기 위해 제정되었던 그 입법 취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사이 유다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율법 규정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그에 따라 팽팽한 긴장까지 유발되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율법을 해석하는 기준과 권위가 달랐기 때문이고 결국 예수님의 신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하느님으로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으로서는 모세 이상의 권위를 지니신 존재로서 백성을 이끌고자 하셨는데, 바리사이 유다인들은 그 신원이나 권위를 알아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몇 가지 기적 사건을 목격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적들에 담긴 신적 권능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에 거기서 비롯된 긴장이 급기야 그분을 배척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올바로 판단하여라.”(요한 7,24) 하는 그분의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7.3. 예수 가르침의 원천(7,25-36)

 

  이렇게 당당한 소신 발언을 예수님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된 군중 속에서 동요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요한 7,25ㄴ-26). 이제는 군중도 예수님과 사두가이는 물론 바리사이 유다인들 중 최고 의회 의원을 겸하고 있던 이들과 살기등등한 긴장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듯 심각한 긴장 속에서도 용기있게 발언하시는 예수님의 태도와 처신을 보고 마음을 정하게 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직 예수님께 관한 확신이 부족한지 이렇게 서로 물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러자 자기들끼리 주고 받는 이런 군중의 의문을 알아채시고 예수님께서 자청해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있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ㄴ-29). 말하자면 당신 존재의 근원을 밝히심으로써 신원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칙을 세우셨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때는 겉모습이나 지위를 보지 말고 모두를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비난자들에게서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군중은 눈에 불을 켜고 붙잡으려는 사람들을 용케 피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놀랐다. 예수님께서 무탈하신 것은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 개념 때문이라고 군중은 생각했다. 그들은 메시아가 어디에서 오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그런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려 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이 나자렛에서 살았다는 것은 알지만 베들레헴에 대해서나 그분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사실은 알지 못했으며(아우구스티누스) 아버지에 대해서도 참으로 알지 못했다. 그리스도만이 아버지를 아신다. 하느님의 본성에서 태어난 참된 아들로서 그분만이 하느님에게서 왔기 때문이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이것이 그분께서 아버지를 아는 이유다. 가족에 대해서는 가족이 제일 잘 아는 법이다(아폴리나리스). 그리스도께서 어떤 것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분께서 어디에서 오셨으며 누가 그분을 보내셨는지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하신 말씀은 당신께서 강림하시기 전에 하느님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이 대목에서 전반부(요한 7,25-29)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계셨던 당신 존재의 근원을 밝히신 내용인데 비해, 후반부(요한 7,30-36)는 이 세상에서의 생애를 마치신 다음에 이어질 운명에 대해 밝히신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로부터 오셨다는 당신 존재의 근원을 밝히시자 그분께 적대적이었던 유다인들은 그분을 체포하고 싶었지만 지지자들이 그분 주위에 몰려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적대적이고 긴장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운명에 대해서 마저 밝히셨다. “나는 잠시 동안만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또 내가 있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7,33ㄴ-34).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예수님께서 신성의 차원에서 당신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알려주셨어도 그분 주변에 모여 있던 군중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인성의 차원에서 알아듣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저 사람이 어디에 가려고 하기에 우리가 자기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리스인들 사이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에게 가서 그리스인들을 가르치겠다는 말인가? 그리고 ‘너희가 나를 찾아도 찾지 못할 것이다. 또 내가 있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한 7,35ㄴ-36)하고 의아해 했다. 이 상황에 대하여 교부들은 때에 따른 신적인 개입의 힘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리사이들의 분노가 제어당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 거듭 말씀하시듯이, 그분 수난의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에 신적인 힘의 개입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을 수 없었다(테오도루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반대자들이 있었지만, 보통 사람들 가운데서는 많은 이가 그분을 믿었다. 그분께서 행하신 치유와 여러 기적이 메시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하긴 그분의 제자들도 그분께서 당신의 부활과 승천을 예고하셨을 때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테오도루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기회를 잘 이용하라고 경고하신다. 곧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을 다른 민족들을 가르치러 가신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사실 그분께서는 당신 몸의 지체들인 교회를 통해 그들을 가르치신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7.4.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7,37-44)

 

  예수님께서 당신 존재의 원천과 운명을 에둘러 밝히신 다음에야 군중에게 본격적으로 초막절의 가르침을 펼치셨다. 이 대목에서야 제7장의 본론이 펼쳐지는 것이다.

 

  “축제가 끝나갈 즈음 우리 주님께서는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목마른 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마실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들에게는 물을 길을 물동이가 필요 없게 되었다. 생수의 샘이 그들 안에서 솟아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디디무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을 이사야서나 시편에서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정확한 출처가 어디인지 알기 어렵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우리 주님께서는 레위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축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거기서 구해야 하는 시내의 표상을 빌려 말씀하신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당신에 관해 말하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영적으로 목마르게 되는 일이 없다고 하신다(테오도루스). 그들에게서 솟아 나오는 생수는 성령이다(이레네우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수는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하느님 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이다(암브로시우스). 생수는 불사(不死)라는 선물을 준다(오리게네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샘, 곧 영의 생수를 담고 있는 성경을 마시도록 불리었다. 물이 만물을 새롭게 하고 존속하게 하듯이, 성령께서는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이 샘물을 마시는 이들을 새롭게 하고 존속하게 하신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여러 교부들의 주해에서 뒷받침되고 있고 특히 이레네우스 교부가 풀이하는 대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이야말로 초막절에 참석한 군중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받아들이고 깨달아야 할 내용이었으니, 바로 생명의 물 즉 생수에 관한 가르침이었고 예수님께서 보내실 성령에 관한 가르침이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ㄴ-38). 

 

  초막절은 이레 동안 꼬박 열렸는데, 초막을 지어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희생 제물과 제주를 바치다가, 여드레째 되는 날 집회를 열고 화제물(和祭物. 하느님께 속죄를 청하며 화해를 기원하는 제물)을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레위 23,34-38). 이 여드레째 날이 가장 중요한 날이었는데, 이날 예수님께서 작정하셨던 가르침을 군중 앞에서 외치신 것이다. 요한복음 사가는 이 가르침을 풀이하여, 이 “생명의 물이란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39ㄱ)고 주석을 달았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 예수님께서 이 성령을 내려주시면, 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현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의 기운’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이 초막절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지혜는 생명의 샘이며(암브로시우스), 그것은 믿는 이들의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성실한 선포 안에서 발견된다(大 그레고리우스). 그리하여 의로움의 길이 하느님의 선민들이 사는 메마른 광야에 솟아난다(이레네우스). 지금 예수님께서는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다. 물론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기 전에도 줄곧 계셨지만,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오순절에 새로이 쏟아 부어질(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세례의 선물로 주어질 성령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러나 성령의 쏟아 부어짐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후에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때에는 성령께서 인류 안에 완전하게 머무르실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키릴루스 교부의 주해대로, 성령께서 이룩하실 구원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믿는 이들 안에서 일으키실 거룩한 변화를 뜻한다. 사실, 생명의 물에 관한 예수님의 이 같은 가르침은 생명의 빵에 관한 가르침과 짝을 이루어 성체성사의 배경이 되어 주는 한편 이 두 가르침의 결정적인 열쇠인 성령께로 인도한다. 즉,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에서 빵을 당신의 몸이라 부르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당신의 몸과 동일시하시면서 받아먹으라고 하신 후에, 다시 포도주를 당신의 피라 부르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실 당신의 피와 동일시하신 것처럼,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희생적 사랑으로 완성되신 그분의 삶은 생명의 빵과 물이 되어 성령으로 이를 받아 모시는 이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래서 빵을 받아 먹고 물을 받아 마심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모시는 이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아 그분의 기운으로 살아가게 되는 일을 거룩한 변화라 부르는 것이다. 

 

  이로써 충분히 암시되었다시피, 성체성사의 근거로서는 제6장만이 아니라 제7장까지도 함께 언급되어야 마땅하다. 이 성사에서 빵만이 아니라 포도주까지 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시며 축성하신 빵과 포도주에 대해서 똑같이, “받아 먹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빵을 나누어 주시고는 “받아 마셔라” 하시며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도록 돌리셨다. 또한 생명의 빵이나 생명의 물이 모두,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거룩한 변화의 주체 역시 성령의 역할임도 빠짐없이 강조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그분이 보통 사람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지도자들에게 아무런 지침을 받지 못한 그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그분이 나자렛에서 자라셨다는 사실만 알았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이같이 심오한 가르침을 들은 군중은 생명의 빵에 관한 가르침을 들었을 때처럼 또 다시 갈라졌다. 그들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종교적 심성이나 율법 지식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이들은 예언자나 메시아로 그분을 말하기도 하였지만, 또 어떤 이들은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다고 하면서 거부한 것이다. 요한복음 사가는 이를 두고,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기”(요한 7,39ㄴ) 때문으로 해석해 준다. 그렇다. 인간의 종교적 심성이나 이성적 지식이 성령에로 이끌리지 못하면 결코 신앙이나 예지로 도약할 수 없다. 

 

7.5. 가르침을 듣고도 믿지 않는 유다인 지도자들(7,45-52)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그들은 그분께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뿐더러 그분께 크게 감탄했다(아우구스티누스). 군중에게 일어날까봐 바리사이들이 걱정하던 일들이 오히려 그들이 보낸 경비병들에게 일어났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바리사이들이 보낸 이들은, 생명의 물에 관해 예수님처럼 말할 수 있는 이는 살아 계신 하느님뿐임을 깨달았다(아타나시우스). 율법을 모르던 이들은 믿은 반면 율법을 안다고 자처하던 이들은 믿지 않는다(아우구스티누스). 바리사이들이 보낸 이들은 지도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 믿은 이가 없는지 묻는다. 바리사이들은 그런 일은 없다고 대답하지만, 바리사이 가운데도 믿은 이가 하나 있었다. 니코데모가 바로 그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는 바리사이들의 태도가 옳지 않다고 꼬집었다(테오도루스). 니코데모는 이 바리사이들이 그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 같아지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한다면 그들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니코데모의 믿음은 그들이 예수님께 적대적이 되었을 때 그들의 생각을 돌려놓을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테오도루스).”

 

  이상에서 교부들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 대목에서 생명의 물에 대해 설파하시는 예수님의 복음선포적 자기증언을 둘러싼 상황의 모순적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즉, 율법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던 지식인 그룹 바리사이들은 눈뜬 소경처럼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율법을 모르는 무식한 족속으로 경멸당하던 군중이나 경비병들은 오히려 진리를 알아보는 상황이 날카롭게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이로써 메시아를 알아보기는커녕 사태의 진실에 눈이 멀어있을 정도로 고리타분한 바리사이들의 전통적 율법 해석 태도와, 그저 삶의 현실적 요구와 역사적 기대에 충실했을 뿐인 군중의 직관적 믿음도 대비되고 있다. 또한 이 대비 현상을 드러내주고 있는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바리사이들의 명령을 받는 수하(手下)인 성전 경비병들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지 않는다”는 성경 해석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바리사이들의 선입관이 진실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한심한 현실이, 성경을 모를 뿐만 아니라 바리사이들이 수하로서 군중과도 다른 처지에 놓여 있던 성전 경비병들의 사실적 보고로써 폭로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외적인 인물이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로서 최고의회 의원인 니코데모였다. 비록 그 혼자서 대다수 율법학자들의 고집을 꺾어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지난 번 늦은 밤에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세례와 부활의 은총에 대해 토론하고 돌아간 후 믿음이 생겼으며, 그분의 가르침을 알아듣게 된 성공사례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진리의 역사는 왜곡된 신념을 고수하던 다수 율법학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니코데모 같은 예외적 인물을 통해서 계승되게 되었다. 요한 복음사가는 요한복음을 읽는 우리들더러 니코데모들이 되라고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러자면 성령의 이끄심에 대한 안목과 순종이 필수적인데, 이는 우선 우리가 저지르는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로써 나타나며 이것이야말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요한이 제8장에서 보도하려는 내용이 이것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7. 생명의 물, 영원한 생명의 성사 (7.1. - 7.5.) - Daum 카페

  

카카오톡에서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에서 공유하기 페이스북에서 공유하기 네이버 밴드에서 공유하기 트위터에서 공유하기 구글+에서 공유하기 Blogger에서 공유하기

 

 

댓글 쓰기

 
로그인 하셔야 댓글쓰기가 가능합니다. 여기를 눌러 로그인하세요.
 

이전 글 글쓰기  목록보기 다음 글

 
PC버전 홈 |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마리아사랑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