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6. 생명의 빵, 영원한 생명의 성사 (6.1. - 6.3.)

[요한복음] 6. 생명의 빵, 영원한 생명의 성사 (6.1. - 6.3.)

 

저녁노을의 글

2022-08-24 07:24:23 조회(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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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장에서 복음사가 요한이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걷게 해 주신 기적 사건을 전해 준 데 이어서, 이제 제6장에서는 카파르나움 근처 평원에서 일어난 빵의 기적 사건과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어난 물의 기적 사건을 전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빵의 기적 사건과 그 의미를 가르치는 생명의 빵 설교 사이에 물 위를 걸어오신 기적 사건이 끼어있는 구도로 짜여 있다. 

 

- ⓵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에게 며칠 동안 가르치시던 중에 끼니때가 되었는데도 먹을 것이 모자라게 되자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 사건을 일으키셨다(요한 6,1-15). 

 

- ⓶ 그래서 예수님의 비범한 능력을 알게 된 군중이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하자, 이를 피해서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사이에 제자들이 탄 배가 위험에 처하는 일이 벌어졌다. 밤샘 기도 중에 이를 감지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구하시러 오셨는데, 급하게 오시느라고 물 위를 걸어서 오시는 기적이 일어났다(요한 6,16-21).

 

- ⓷ 그리고 다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신 예수님께서 다시 카파르나움 땅에 도착하신 것을 알게 된 군중이 몰려들자,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데리고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생명의 빵에 관해 가르치셨다(요한 6,22-71). 여기서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시며  영원한 생명의 성사라고 밝히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과 물의 기적을 연달아 일으키셨는데, 이것이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표징이 되었다. 

 

  빵의 기적 기사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온다. 그런데 공관 복음서에서는 군중을 배불리 먹인 이야기만 나오는데 비해서(마르 6,30-44; 마태 14,13-21; 루카 9,10-17), 요한복음서에는 이 이야기에 더하여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까지 나오고 있다(요한 6,22-71). 요한 복음사가는 공관 복음서 가운데 주로 마르코 복음서에 나오는 기사를 참고하면서도 직제자 출신으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자신이 직접 듣고 간직해 온 기억에 근거하여 공관복음서를 보충하였다. ‘생명의 빵’에 관한 요한복음 제6장의 본문은 성체성사의 연원을 알려주는 말씀이라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6.1. 오천 명을 먹이시다(6,1-15): 넷째 표징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이 빵의 기적 사건은 주님의 수난 일 년 전, 곧 세례자 요한이 참수된 직후의 파스카 축제 기간에 일어났다(베다). 같은 기적을 묘사하는 다른 복음서와 차이를 보이는 내용 가운데 하나는(아우구스티누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빵이 없는 것에 대해 물으시는 것인데, 이는 나중에 필립보가 이 일을 기억하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고백하게 하려는 장치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모든 일은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를 시험하신다(테오도루스). 요컨대 많은 사람을 먹이신 그리스도의 기적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굳게 믿게 하는 예증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제자들은 줄곧 난감해 어쩔 줄 모르지만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엄청나게 많이 늘릴 수 있으시다(로마누스). 이때는 날이 나날이 따뜻해지는 니산 달이어서 들판에 풀이 많았다(테오도루스). 예수님께서는 다른 기적들을 행하실 때와는 달리 군중을 먹일 준비를 하실 때 먼저 기도하신다. 이는 당신의 첫 번째 창조 행위 때에도 함께 계셨던 아버지와 성령께서 당신과 결속되어 계심을 보여 주는 한편(로마누스), 우리도 음식을 먹으려 할 때 하느님께 기도드리라고 가르치시려는 것이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낟알을 창조하신 분께서 그 낟알들이 땅이 아니라 생명을 가져오는 당신의 기름지고 창조적인 손에 맡겨진 듯이 마구 불어나게 하신다. 옛 계약이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부서져 열리듯이, 빵도 떼어 나누어질 때 늘어난다(아우구스티누스). 산에 흩어졌던 빵 조각들이 모아들여져 하나가 되었듯이 세상 각지의 교회들이 모여 하느님의 한 나라가 되었으면!(『디다케』). 이 기적에서 빵이 남았다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주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에프렘). 그리스도께서 그날 당신 사도들을 통해 주신 빵의 선물은 교회의 삶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오리게네스). 고대에 엘리야도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신 빵의 기적과 유사한 기적을 행한 바 있다(테르툴리아누스). 우리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관대히 베풀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것으로도 많은 것을 만드실 수 있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뒤에야 사람들은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세상에 왔음을 깨달았다(에프렘). 그러나 빵의 기적이 창조계에 대한 하느님의 보살피심과 보호 덕분에 나날이 일어나는 기적들보다 더 위대한 것은 아니다(아우구스티누스). 사람들은 그 기적을 보자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그들은 세속의 권력에 매혹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속적 지위를 하찮게 여기시는(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이미 임금이심을 알고 계셨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인 만치 우리도 세속적 영광에서 달아날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우리의 힘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약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암브로시우스). 예수님께서 군중을 피해 산으로 가시어 기도하신 것은, 피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땐 언제나 기도가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으로 네 번째 표징을 보여주셨다. 교부 로마누스의 주해대로, 당신이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존재임을 드러내시는 기적을 네 번째로 일으키신 것이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이미 갈릴래아 지방 여러 곳에서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그 복음을 들으러 모인 이들 가운데 병자들을 보시면 우선적으로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셨고 그러한 기적이 일어날 때마다 놀라워하는 군중을 대상으로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가르치셨기 때문에 군중은 며칠씩이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로 그분의 곁에 머물러있던 참이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물론 군중도 복음선포와 가르침에 열중한 채로 며칠이 흘렀는지라 어느 덧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먹을 식사가 걱정되셨던가 보다.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 하니 전체의 수효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인데, 그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음식의 양이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각자가 애초에 지참했던 음식이 떨어져가고 있어 보여서 가르침이 계속되려면 주최 측에서라도 음식을 마련해 주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물으셨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그곳이 카파르나움 근처의 너른 들판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실제로 빵을 구입하려고 했다기보다는 무언가 복음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실 겸 필립보를 떠보려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6,6). 그분은 이미 비상대책이라도 강구해야 할 상황임을 알고 계셨다(요한 6,6ㄴ).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상황의 한계에 부딪히시자 예수님께서는 이를 계기로 삼아서 당신의 정체를 알릴 기회로 삼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자 필립보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뜻을 눈치 채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대답하기를,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ㄴ) 하였다. 이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이 일년에 이백 일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니, 주5일 근무하는 요즘의 기준으로는 열 달치 노동의 수입에 해당하는 큰 돈이다. 그만큼 큰 돈을 갑자기 마련하기 어렵거니와 설령 마련한다 해도 그 한적한 곳에서 그만큼 많은 빵을 사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주최 측에서 해결하기는 불가능하고 각자 집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이렇듯 난감한 상황에서 안드레아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찾아냈다. 기지를 발휘하여 음식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있다고  보고하기는 했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빵 다섯 개와 물고리 두 마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하고 부연한 것을 보면, 그 자신도 긴가 민가 하면서 보고한 모양새였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물론, 나머지 제자들도 어쩔 줄 몰라 하는 형국이어서 그 중 안드레아의 발빠른 행동이 돋보이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작정하신 듯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요한 6,10) 하고 지시하시고는 아이가 가져온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다. 어찌된 영문인지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감사를 드리셨는데, 이를 나누어주실 때에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는데도 모자라기는커녕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찰 만큼 많이 남았다(요한 6,13).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치유나 구마 행위와는 또 다른 기적이었다. 

 

  이 기적을 본 군중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 하고 경탄조로 말하였다. 여기서 유다인들이 익히 알고 있던 ‘그 예언자’란 누구인가? 그는 일찍이 모세가 예언해 놓은 예언자를 말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 모세의 이 당부는 유다인들 사이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러기에 빵의 기적을 보자마자 군중이 모세가 “나와 같은 예언자”라고 말한 바 있었던 ‘그 예언자’라고 알아본 것이다. 

 

  모세는 다소 막연하게 ‘나와 같은 예언자’라고 소개하면서도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당부한 바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말을 들어야 할 예언자가 나타났다. 바로, 모세가 엘리야가 함께 불려 와서 한자리에 모인 타볼 산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사건에서였다. 

 

이 때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르 9,7). 

 

이 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것으로서, 마르코가 하느님의 계시로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그러니, 예수님은 ‘모세와 같은’ 예언자 반열은 아니고, 그보다 더 높은 신성의 반열에 계신 존재이시니 세 제자들은 물론 유다인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 사람들도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뜻이 되겠다. 

 

  오늘날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미사 중에 사제들이 하는 감사송과 신자들에게 성체를 나누어주는 영성체는 이 빵의 기적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동작에서 연원한 것이다. 오리게네스를 비롯한 교부들이 해석하고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이 빵의 기적 사건을 성체성사의 연원으로 보고 계승하고 있는 교회에서는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성찬의 전례 중에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를 이 빵의 기적 사건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예를 따서 ‘감사송’이라고 하고, 빵과 물고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행위는 ‘영성체’라고 한다. 그래서 영성체의 또 다른 이름이 ‘빵 나눔’(가톨릭교회교리서, 1329항)이다.

 

  그런데 남은 빵 조각을 모은 것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는 빵의 기적이 낳은 믿음의 무리들을 뜻하는 상징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기왕에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제자단에 이어 ‘열두 광주리’가 상징하는 많은 무리가 또 다른 제자들이 되어 그분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열둘’이라는 숫자가 열두 지파가 연합된 체제로 시작된 옛 이스라엘에서 비롯되었음은 틀림없다 하겠으나, 이를 단순히 계승하거나 아예 전혀 다른 성격으로 대체한다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이스라엘을 새로이 소집하신 데에서 드러나듯이, ‘열두’ 제자도 ‘열두 광주리’도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한 참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참 이스라엘로서의 교회 속에 옛 이스라엘은 복음을 받아들이려는 회개 여부에 따라 포함될 수도 있고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운명에 놓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열두 제자의 공동체로 소집된 교회가 빵을 모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성체성사는 그 나눔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해 주는 선교적 결과로 나타날 것임을 암시하는 열쇠 말이 ‘열두 광주리’라고 하겠다. 

 

  네 복음사가가 모두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는 이 기적 사건에 대해, 교부들과 달리  ‘우의적(寓意的)으로’ 알아들으려는 해석이 있다. 군중을 배불리 먹인 기적이지 빵과 물고기를 늘어나게 한 기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군중의 마음을 열어서 나누게 하는 ‘나눔의 기적’을 행하셨다고 보는 것이다(A.놀란)! 그것만 해도 어디냐는 식으로 이 기적 기사 본문의 의미를 축소하는 이런 실용주의적 해석은 오늘날 믿는 이들이 이 빵의 기적의 효과처럼 마음을 열어 서로 나누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을 담고 있기는 하다. 실제로 누군가 먼저 가진 것을 내어놓음으로써 서로의 마음이 열리고 조금이나마 가진 것이 있다면 기꺼이 서로 나누려는 마음이 생겨났을 수는 있을 것이나, 이것이 기적의 본질은 아니며 기껏해야 결과적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복음서의 기록에서 각종 상징과 우의적 뜻을 구석구석 찾아내는 전문가들인 교부들도 이 대목에서는 우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문자적 의미에 충실하게 빵과 물고기를 예수님께서 늘리셨다고 주해하고 있다. 우리는 사도들의 제자로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이 교부들의 주해에 주목해야 하며 섣부른 우의적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듣고 배우기보다는 치유나 구마 또는 소생 등 여러 신기한 기적들에 더 이끌려서 모여든 군중에게 평소에 가르치시던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결정적인 깨우침을 주시려는 의도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이는 다시 말하면, 당신 자신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계시를 보여주신 것이다. 곧 이어 일으키신 ‘물 위를 걷는 기적’ 기사와 비교하더라도 이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예수님께서 불안해하는 제자들의 ‘마음만을 달래기 위해서’ 물 위를 걸어오셨다고 알아들어도 되겠는가? 그분이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실제로’ 구하시러 바삐 오시느라고 물 위를 걸어오신 것이 사실이라고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분이 굶주릴 위험에 처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려고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을 실제로 일으키셨다고 알아듣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이 빵의 기적 사건을 살아있는 비유로 삼아서, 먹고 나서 다시 배고프게 되는 보리 빵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빵’이 예수님 당신이시며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원한 생명이 가능함을 일깨워주시고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생명의 빵에 관한 별도의 설교를 하신 것이다. 이것이 교부들의 권위를 반영한 해석이다.

 

  교부들이 ‘사실적으로’ 이 본문을 주해하고 있는 이유는 요한 복음사가가 마르코를 중심으로 공관사가들의 해당 본문을 참고하면서도 마르코도 미처 기록하지 못한 구체적 장소와 때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장소는 갈릴래아 호수를 기준으로 볼 때 카파르나움의 건너편에 있던 너른 산비탈이었고(요한 6,1.3.10ㄴ.16.24.59), 시기는 파스카 축제가 가까운 무렵 즉 니산 달이어서 날씨가 따뜻하여 풀이 많이 자라있던 때였다(요한 6,4.10ㄴ). 여기서 니산(Nisan)이란 히브리어로 ‘움직인다’, ‘길을 떠난다’, ‘출발한다’는 의미로서 니산 달은 춘분이 들어있어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는 때이다. 그래서 니산 달은 바빌론 달력에서도 첫째 달이며, 유배 이후 유다인의 역법으로는 1월이었다(느헤 2,1; 에스 3,7). 이는 고대 가나안력으로는 첫째 달 아빕(Abib)이었고 태양력에서는 3~4월에 해당한다.  그래서 장소와 시기에 대한 정보를 합쳐서 보자면, 빵의 기적 사건은 니산 달 무렵에, 그 첫째 날 낮 늦은 시간에 카파르나움이 바라보이는 호수 건너편 산비탈 언덕 위에서 일어났고,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사건은 그날 밤 호수에서 일어났으며, 생명의 빵에 관한 가르침은 이튿날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행해졌다. 이렇듯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들을 사용한 요한의 보도 태도는, 공관복음서에서는 다만 ‘외딴 곳’(마르 6,31-32; 마태 14,13.15ㄴ), ‘푸른 풀밭’(마르 6,39) 또는 ‘황량한 곳’(루카 9,12ㄷ)에서, ‘늦은 시간’(마르 6,35)이라거나, ‘저녁때’(마태 14,15)에,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루카 9,12) 이 일이 일어났다고 일반적인 표현으로 보도하고 있을 따름인 것과 대비된다.

 

  이런 장소 시간 정보와 함께 매우 사실적인 정황 정보도 눈에 띤다. 마르코나 마태오도 이 빵의 기적 사건에 이어 물 위를 걸어오신 기적 사건(마르 6,42-55; 마태 14,22-33)을 보도하고는 있으나 이 두 사건을 별개로 취급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은 이 물 위를 걸어오신 기적 사건을 빵의 기적 보도와 생명의 빵 가르침 사이에 넣어 연속 사건으로 보도함으로써, 물 위를 걸으신 ‘사실’과 마찬가지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사실’도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알아듣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으로서 보도하고 있다. 요한으로서는 이 일을 직접 겪은 직제자 출신으로서 미흡해 보이는 공관복음서의 보도보다 역사적 사실에 더 부합되게 알리고자 했을 것이다. 요한에게 중요했던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요한 6,33.41.48)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요한 6,53-58)는 그분의 말씀을 ‘사실대로’ 믿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군중 가운데 섞여 있던 제자들 중에서 그 말씀을 사실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있어서 제법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는데(요한 6,66), 이 사실을 명백하게 기록하여 남기는 것이 요한에게 매우 중요했던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빵의 기적 사건 보도에서 빵과 물고기가 늘어났다는 사실에 대한 보도가 없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보기보다는 ‘우의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은, 앞에서 해설한 바와 같이 이 관점이 기적 기사의 본질을 전적으로 오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밖에도 다른 기적 보도와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치유나 구마를 다룬 어떤 기적 기사에서도 기적이 일어나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본문은 단 하나도 없다. 성령 잉태를 보도하는 기사는 물론이고, 기적 기사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부활 기사에서도 육하원칙(六何原則)에 따라서 기술되어 있지 않으며, 순전히 목격 증인들의 증언으로 성립되고 있다. 

 

  기적을 보도하는 기사의 가신성(可信性)은 일차적으로 기적의 취지를 알리려는 행위자와 보도자의 진실한 신앙과 인격에 달려 있는 것이지, 기사 자체의 구체적 사실 보도 여부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육하원칙을 담은 분명한 사실에 근거한다 해도 그 일부만 인용하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 활용함으로써 본 취지를 왜곡하면 가짜 뉴스가 된다. 사악한 의도로 예수님을 모함했던 바리사이 유다인들이 흔히 쓰던 수법이 이것이다. 기사도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야 하거니와 이를 보도하는 보도자가 행위자의 진실한 의도까지 담아서 보도해야 비로소 믿을만한 기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 기적일진대 그 일이 인간의 눈으로 일일이 확인가능한 수준으로 일어난다면 그것이 어찌 기적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한낱 정보일 따름이다. 기적은,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하느님의 신적 권능으로 가능해지는 현실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세상사에 개입하시려 할 때마다 기적이 일어났다. 하느님께서 인간사에 개입하신다는 것 자체가 기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께서 개입하신 흔적과 결과가 모두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놀라는 사람들에게 천사들은 “두려워하지 마라.”고 다독거렸는데,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만 21회, 구약성경에서는 무려 53회나 나온다. 믿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고 확인시키곤 했다. 성령으로 인한 잉태를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알릴 때 이 말씀을 하였고, 부자 청년에게 가진 재물을 나누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놀라는 제자들에게도 이 말씀으로 가르치셨다(루카 1,37; 마르 10,27; 마태 19,26; 루카 18,27). 

 

  이 빵의 기적을 일으킨 예수님의 뜻과 기대는 ‘열두 광주리’에 담겨 있거니와, 그제나 지금이나 그 뜻과 기대는 흔히 오해되곤 한다. ‘열두 광주리’에 담긴 예수님의 뜻과 기대는 거룩한 변화이다. 예수님의 삶 전체에서 이룩된 거룩한 변화는 성사적인 거룩한 변화를 거쳐서 신자들의 거룩한 변화를 겨냥하고 있다. 이런 삼중의 거룩한 변화가 ‘열두 광주리’에 해당하는 선교적 성과를 낳는 것이다. 단순히 열둘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거룩한 변화가 초래하는 매력이 거룩한 변화와 ‘열두 광주리’의 핵심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 기적을 우의적으로 해석하여 경제적 나눔의 기적으로 축소시키려는 이들이 있지만,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기적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그 결과에 열광하여, 그분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하였다(요한 6,15).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는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듯이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한 현세적 예언자였던 것이다(요한 6,14). 

 

  이런 실용주의자들에게 적당한 경구가 있다. “For those who believe in God, no explanation in necessary. But for those who do not believe in God, no explanation is pessible(Frantz Werfel)”.  이 경구(警句)는 영화 ‘베르나데트의 노래’(1943년 작)를 만든 헨리 킹 감독이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말을 영화의 첫 장면에 띄운 자막에 나온다. 체코에서 태어난 유대계 작가 베르펠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파리에 살고 있었는데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남쪽으로 6백 여 km나 떨어진 루르드로 피신하여 숨어 있었다. 그는 그에게 호의를 베풀며 숨겨주던  마을 사람들로부터 90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한 소녀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바로, 1854년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교의가 발표되었는데도 이를 도무지 믿지 못하던 당시 프랑스 신자들을 위하여 루르드의 시골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1858년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의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루르드 마을 사람들에게 약속한 대로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자신이 전해들었던 그 비밀스럽고 신비스런 이야기를 소설로 출간했고 곧 이어 영화로까지 제작하여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 책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그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가 이 경구인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지만,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하다.” 생명의 빵과 성체성사에 담긴 진리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과 하느님과의 부자 관계를 계시하셨던, 앞선 세 가지 표징과 비교해 볼 때, 이 네 번째 표징은 이제 당신을 믿는 백성들에게도 당신께서 받고 있는 하느님의 기운을 나누어주시려는 표징이라는 뜻에서 고유한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6.2. 물 위를 걸으시다(6,16-24): 다섯째 표징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과 그 뒤에 이어진 일에 관한 요한의 기록도 다른 복음사가들의 글과 조금씩 차이가 있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기적이 불러일으킨 사람들의 기대를 식히려고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제자들은 어둠 속에 풍랑을 만나 뱃길을 잡지 못해 어쩔 줄 모른다. 날은 어둡고 높은 물결이 일었지만 (삶의 풍랑을 만나는 이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진짜 위험은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이 풍랑은 많은 점에서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처하는 위험을 상징한다(아우구스티누스). 이런 풍랑을 견디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언제나 기도다(이사야스). 그리스도께서는 곧바로 제자들을 도와주지 않으시고 그들이 물가에서 멀리 떨어져 환난의 풍랑 속에 어쩔 줄 모르게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있는 나’이신 (또는 ‘나 홀로 존재하시는’) 분께서 그때 그들에게 오시어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신다(베다). 그리스도께서는 배에 오르지도 않고도 단박에 제자들의 마음을 안심시키시며, 호수 한가운데 있던 배를 순식간에 물가에 닿게 하는 또 다른 기적을 행하신다(테오도루스). 그분께서 물에 내리신 명령은 모세가 내린 명령보다 훨씬 위대한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났음을 암시하는 증거가 충분히 있는데도 여전히 믿으려 하지 않았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뜻밖에 빵을 배불리 먹게 된 군중은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나타내 보이려던 표징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빵을 많게 하는 범상치 않은 능력의 보유자로간주하고서는 그분을 억지로라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들었다. 여기에서도 확인될 수 있거니와 예수님께서 단지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가진 것을 나누게 하여 모두가 배불리 먹게 하는 정도의 일을 하셨다면 사람들이 그분을 억지로라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빵의 기적은 빵을 많게 한 기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기적의 능력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에 대한 인기와 명성을 높였다.

아마 이같이 군중 안에서 폭발한 인기와 명성 탓에 그분의 적대자들이 나중에 그분을 처형할 죄목으로 ‘유다인들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혐의를 뒤집어씌울 만한 꼬투리가 되었을 것이다. 적대자들이 보기에, 예수님께서도 군중의 이러한 움직임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가셨더라면 우발적 폭동이든 계획적 반란이든 어떤 형식으로든지 충분히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기적 사건을 통해 신적 권능의 표지임을 알리려던 예수님으로서는 참으로 실망스러운 반응이 아닐 수 없었으므로 남감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호수 건너편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먼저 가라고 하시고 당신은 열광하던 군중의 흥분을 가라앉혀 돌려보내신 다음 혼자서 기도하러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5; 참조 마르 6,45). 혹은 몇 마디 말씀만으로는 가라앉히기 힘들었을 군중의 들뜬 처지를 감안하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심으로써 군중을 따돌리고 나서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당신 혼자 다시 내려 산으로 오르셨을 수도 있다.

평소에도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을 집중적으로 하신 후에는 밤이나 새벽에 외딴곳으로 찾아가서 기도하시곤 하는 일상이 예수님의 생활방식이었다(참조 마르 1,35). 공생활 초기에 요한과 안드레아가 세례자 요한의 추천으로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으로 찾아가 보았던 것도 바로 이 생활양식일 터였다(요한 1,39). 그분이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이(마르 6,31) 바쁘고 피곤하게 일하시고도 또 그뿐만 아니라 적대자들의 반대에 시달리면서도 다시금 하느님께로부터 기운을 충전하시던 비결이 여기에 있었고, 이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멍에를 가볍게 해주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안식을 제자들로 하여금 와서 배우라고 권하시던 비결이 또한 이것이었다(참조: 마태 11,28-30).

그러다가 한참이 지나고 어둠이 짙어진 한밤중에도 제자들은 큰 바람이 일어나는 바람에 뱃길을 잡을 수 없어서 호수 건너편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호수 한가운데에서 풍랑과 싸우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홀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이 제자들이 환난의 풍랑에 빠질 때까지 일부러 기다리셨던 것일까?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그분은 늦은 한밤중에나 이른 새벽녘에 기도하곤 하시던 평소의 생활리듬대로 행동하셨을 뿐일 것이다. 다만 기도하시던 중에 감지하신 대로, 그대로 두었다가는 제자들이 진짜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하러 곧바로 움직이셨다고 본다(키릴루스).

사실 제자들이 처한 위험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북쪽 헤르몬산에서 불러 내려오는 찬 바람과 서쪽 지중해에서 낮에 더워진 바람이 불어와서 호수 한복판에서 부딪치면, 아무리 갈릴래아 호수에서 잔뼈가 굶은 노련한 어부라도 꼼짝없이 노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바다같이 넓은 호수 위에서 배는 가랑잎처럼 가벼웠다. 더군다나 때는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한밤중이었다. 자칫하면 배가 뒤집어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임을 기도 중에 감지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구하러 움직이셨다. 이런 정황이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연출하시게 된 배경이었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물과 바람이라는 자연을 대상으로 기적이 일어나게끔 상황이 자연스럽게 흘러간 셈이다. 기적 같은 일은 더 있었다. 그분이 배에 오르시어 그 어떤 말씀이나 행위가 없이 존재 자체로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신 것도(참조: 마르 6,51), 또 마찬가지로 배를 금새 카파르나움 쪽 호숫가에 가 닿도록 배를 움직이신 일도(요한 6,21) 그분의 능력이었다. 물의 기적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이런 일들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도로써 마음의 주파수가 하느님의 주파수와 일치되고 나면 일부러 의도하지 않아도 필요한 많은 일들이 기적처럼 일어난다. 우리를 도구로 삼아 성령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오관이 미처 감지하지 못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이 기적도 요한이 보도한 대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적 정체성을 드러내신 다섯 째 표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 담긴 사실성이, 앞선 빵의 기적에 담긴 사실성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의 보도는 두 기적 사이의 관련성을 긴밀하게 연결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다섯 째 표징 보도에서 요한이 예수님의 초능력을 강조하지 않고 마치 일상적인 행동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보도하고 있는 자세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모든 기적이 다 표징으로서 충분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다섯 째 표징의 특징은 하느님의 기운을 나누어주려는 네 번째 표징에 더하여, 당신을 믿는 백성이 당신처럼 누군가를 돕기 위하여 즉 사랑의 동기로 사도직을 행할 때 자연을 비롯한 환경 여건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셨다는 데 있다.

 

6.3. 생명의 빵(6,25-71) 

 

  제6장에서 이 대목은 빵의 기적 사건이라는 표징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예수님께서 직접 밝히신 부분이라서 교부들도 크게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주해의 분량도 많거니와 내용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교부들의 주해에 따라서 소주제별로 나누어 해설한다. 본문은 ‘군중과 빵’, ‘나는 생명의 빵이다’, ‘생명의 빵에 대한 군중의 반응’,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 ‘많은 제자가 떠나가다’ 등의 소제목들로 구분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과 흐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생명의 빵’이라는 표징에 대해서는 다른 표징들과 달리 요한 복음사가가 사건과 함께 말씀으로도 강조해서 깨우쳐주고 있다는 점이다. 

 

6.3.1. 군중과 빵(6,25-34)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내고는, 그분이 어떻게 그곳에 오셨는지 놀라며 그분을 임금 삼으려고 했던 일까지 잊어버린 것 같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혼자 산으로 물러가셨던 분께서 이제 또 다른 종류의 양식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배불리 만들어 주시려고 다시 군중 속에 섞이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사람들이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생각보다 무엇을 얻을 생각에 그분을 찾는 것처럼(아우구스티누스) 그들의 마음도 아직은 육체의 양식에만 쏠려 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일은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일의 목적 또한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람들의 몸을 배불리 먹이신 것은 그들이 덧없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양식을 추구하게 하려는 뜻이었을 뿐임을 사람들이 알기 바라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영적 음식을 주실 수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인정받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아들이신 그분은 거룩하신 분의 인장(印章), 곧 날인(捺印)이시기에 우리는 아버지를 볼 수 있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인장을 받으며(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 인장은 우리 안의 사랑과 완전함의 표시다(암브로시우스).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아들을 믿는 것이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러나 그 믿음조차도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일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도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군중은 아직도 믿음이 모자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또 가르치신다. 당신께서 금방 말씀하신 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밝히며(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군중의 생각을 덧없는 빵과 포도주에서 서서히 당신의 참된 몸과 피로 돌릴 기회를 찾아내신다(에프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신 그분은 우리의 유일한 생필품이다(테르툴리아누스). 그분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와 생명을 주는 유일하게 참된 빵이시며, 만나는 예시였을 뿐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사실마저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신 분을 가리킨다(에우세비우스). 베들레헴은 ‘빵의 집’이라는 뜻이다(베다). 내려온 빵은 그분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약속하신 물이 그녀의 구원을 보장하듯 먹는 이를 새롭게 하고 계속 살아가게 해 준다(아우구스티누스).” 

 

  6,25-29의 본문은 빵의 기적과 물 위를 걷는 기적 이야기를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과 연결해 주고 있다. 군중은 빵의 기적에 열광하여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려고 그 다음 날까지 돌아가지 않고 기다렸다가 쫓아온 것이었다. 그들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그 기적으로 많아진 빵에 열광할 것이 아니라 그 기적에 담긴 뜻을 생각해 보라고 진지하게 요청하셨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6,27). 먹어도 다시 배고파질 보리 빵에 대해서가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해 주는 생명의 빵에 대해서, 육신만 먹이는 음식이 아니라 영혼까지 영원히 살게 하는 음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라고 촉구함으로써, 삶의 자세를 전환하는 근본적인 회개를 요청한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진리가 밝혀지고 있는데도, 이 말씀에 이어지는 6,30-34의 본문에서는 이 회개의 내용에 대한 대화가 군중과 예수님 사이에 오가기는 하는데, 동문서답도 이렇게 엉뚱할 수가 없다. 이미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시며,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주고자 하는 것임을 밝히셨고, 그래서 당신을 믿을 것을 요청하셨는데도, 군중은 빵의 기적 사건으로는 전혀 성에 차지 않아서인지 당신을 믿게 할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려 들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6,30ㄴ). 

 

  새로운 표징에 대한 요구를 하는 군중의 머릿속에는 시나이 광야에서 사십 년을 사는 동안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먹인 모세의 표징이 떠올랐다(요한 6,31). 모세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하여 백성을 먹인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인데, “나자렛 사람이여, 당신은 무슨 표징의 능력으로 우리를 먹이고 믿게 할  것인가?” 하는 반문이 함축되어 있거니와, 단 한 번 일으킨 빵의 기적만으로는 어림없다는 식이다. 

 

  ‘만나의 기적’은 시나이 생활 시절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는 가장 큰 사건으로서 구약성서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데(탈출 16,15; 민수 11,7; 21,5; 신명 8,3; 지혜 16,20), 요한 복음사가는 이 기록들에 관한 회상(시편 78,24; 느헤 9,15)을 자유롭게 인용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군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 만나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려주셨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2). 

 

  그런데도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군중은 계속해서 억지를 부렸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 그러니까 빵의 기적을 통해 배불리 먹은 군중에게 이 사건은 만나의 기억 수준에 머물러있는 것이다. 단 한 번 배불리 먹여준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과 ‘물’을 두고 이루어졌던 평행선 대화를 연상케 하듯이, 서로 다른 차원의 ‘빵’을 두고 이루어지는 평행선 대화였다. 그래서 다음 단락에서 이 ‘생명의 빵’에 관한 본격적인 가르침이 나오게 되는데, 이는 성체성사의 본질을 이해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군중의 이해 수준을 반면교사로 삼게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빵의 기적에 있어서 군중은 늘어난 빵에 주목했다. 그 결과 자신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나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체험과 잘 하면 앞으로도 먹고 살 걱정 없이 잘 지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열광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늘어난 빵이나 군중의 배불림보다는 그들의 굶주린 상태에 대한 당신의 연민과 이 연민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려는 사랑의 믿음이 그 기적을 만들 수 있었음을 강조하고자 하셨다. 그리고 빵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게 된 군중이 당신 자신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생겨나기를 염원하셨다. 그러니까 과정이나 결과보다 원인이 더 중요하고, 빵이라는 물질이나 열광하는 반응보다 연민의 마음과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려는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체성사에 있어서도 성체가 영혼에 생명의 기운을 주는 ‘하늘의 만나’(가톨릭성가 157번)일 수 있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요한 6,33) 존재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 자신이심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성체성사가 믿는 이들을 예수님처럼 살게 하는 거룩한 변화의 기적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변화는 예수님의 삶에 기반하여 성체의 성사적 변화를 통하여 신자들의 변화를 겨냥한다. 이 세 가지 요소(첫째는 기반이 되는 예수님의 삶이요, 둘째는 이에 근거한 성사적 변화이며, 셋째는 신자들의 변화이다)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소홀히 하게 되면 거룩한 변화는 온전히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존재와 삶에 대한 믿음, 성체성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변화에 대한 믿음 그리고 우리 자신도 예수님처럼 살아야겠다는 결심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데 대한 믿음, 이 모두가 합해져야 믿음은 온전할 수 있는 것이다.

 

6.3.2. 나는 생명의 빵이다(6,35-40)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양식은 하느님의 빵이다(이그나티우스). 본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우리 인간은 이제 이 생명의 양식을 먹음으로써 죽음을 이기는 힘을 얻는다. 우리가 성찬례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양식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몸이 썩지 않게 지켜 주기 때문이다(헤라클레이의 테오도루스). 그러나 통교를 갈망하지 않고, 지나치게 자주 성찬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바른 신심이라 주장하는 것은 함정이며 잘못된 행동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리스도의 빵은 오늘날에도 성도들의 양식이다(암브로시우스). 그 양식은 아직 오지 않은, 우리가 더 이상 감각을 배불리는 지상의 음식에 의존하지 않게 될 부활 때의 잔칫상을 미리 맛보게 해 준다(헤라클레이의 테오도루스)”. 

 

  “아버지께서 믿는 이들을 아들에게 주셨다는 사실은 믿음이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이 아님을 알려 준다(요한 크리소소토무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이들을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쫓아내는 것은 교만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그분처럼 겸손히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 그들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겸손하신 하느님을 본받는 겸손함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으나 그 뜻은 당신의 뜻과 다르지 않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당신의 뜻으로 삼으셨다면, 우리도 그처럼 아버지의 뜻에 의지해 살아가야 한다(테르툴리아누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 받은 인성을 포함하여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것은 물론 길을 잃었거나 병든 양을 포함하여 당신께 맡겨진 양 떼 가운데 한 마리도 잃지 않으실 것이다(히에로니무스). 이들은 파멸하는 일 없도록 하느님의 틀림없는 섭리가 미리 정해 놓은 이들이다(아우구스티누스). 이는 아버지의 뜻일 뿐 아니라 아들의 뜻이기도 하다(아우구스티누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믿으며 그에게 의지하는 모든 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았지만 믿지 않았고 우리는 그분을 보지 못했지만 믿으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이 세상에서 믿는 이는 부활 때 올 삶에서 완전하게 될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충실하게 믿는 이에게는 부활이라는 상이 기다리고 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때 아버지께서는 믿는 이들을 아들에게 데려다 주시고 아들은 그들을 받아 죽지 않는 삶을 살도록 되살리실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두 가지 부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첫 번째 부활은 사람이 믿음에 들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것이고, 두 번째 부활은 마지막 날에 되살아나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앞선 대목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대화를 통해서 일단 군중이 육신의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는, 그래서 먹어도 다시 배고파지는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빵에로 관심이 옮아가자, 예수님께서 드디어 본론을 꺼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ㄴ). 생명의 빵에 관한 가르침은 이 대목에서 절정에 달한다. 영원히 살게 하는 빵,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빵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래서,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요한 6,35ㄴㄷㄹ)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결정적인 조건이 언급되는 이 대목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 교부는 이를 두 가지 부활로 풀이하였다. “첫 번째 부활은 사람이 믿음에 들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것이고, 두 번째 부활은 마지막 날에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다시 태어나는 사건이 영원한 생명에로 넘어가는 첫 번째 부활이고, 두 번째 부활은 세례 이후 예수님처럼 살고자 노력한 삶이 이 세상에서 끝나는 죽음의 때에 맞이하는 되살아남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성체성사는 이 첫 번째 부활에서 두 번째 부활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와도 같은 것이다. 첫 부활이 없으면 이 징검다리를 건널 수 없고, 이 징검다리를 건너지 않고서는 둘째 부활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다. 제대로 준비되고, 올바르게 참여한 성체성사에서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보증을 거듭 확인받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의 선물이고 귀한 은총이다. 정상적인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영성체를 통해서 일상의 작은 부활을 체험한다.  

 

  그래서 세례 때 듣는 첫 번째 복음선포가 이미 살아있는 여기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기쁜 소식’인 것이며, 그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생명을 살기 위한 노력이 성사가 되어 죽을 때에 온전하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분이 하느님을 가장 닮으신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믿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따라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게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알아보지 못한 유다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6,36). 빵의 기적을 눈앞에서 목격하고서도 그들은 그분의 신적 능력에 기대어 혜택을 더 얻을 궁리만 할 줄 알았지 신적 능력을 지니신 그분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존재임을 알아보아야 했다. 이 기가 막힌 비극이자 불행은 비단 카파르나움에서만이 아니라 그분의 공생활 내내 지속되었다. 그래서 요한은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0-11)고 서문에 썼던 것이다. 

 

  하지만 이어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맞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한 1,12)고 쓴 대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초대하셨다. 그분은 이들을 가리켜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이라고 부르셨다. 사람이 자기의 자유의사로 믿음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불러일으켜 주신다고 예수님께서는 생각하셨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요한 6,37)이라고 약속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 사명을 천명하시기를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요한 6,38)이라고 밝히셨기 때문이다.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요한 6,39)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경륜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다. 이 세상의 창조를 완성하시는 이 과업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강생하신 목적이요 우리가 믿는 궁극적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사명이 재차 강조된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요한 6,40)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이다. 이 ‘마지막 날’이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람들 각자의 삶이 마지막을 맞이하는 죽음의 날이며, 둘째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간 모든 사람이 죽은 후 세상이 하느님 나라로 완성되는 때에 모두의 영원한 운명이 공개적으로 밝혀지는 공심판의 날이다. 이것이 교부들도 부활의 신앙으로 확인하고 있는 하느님의 정의인 것이다. 

 

6.3.3. 생명의 빵에 대한 군중의 반응(6,41-51)

 

  “내적 인간의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아우구스티누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두고 수근거린다. 그분 말씀의 뜻을 영적으로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 부르는데, 그분의 신비스러운 탄생에 대해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수군거림이 배고픔을 느끼지 못해서임을 아신다. 그들이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며, 이것 또한 신비다(아우구스티누스).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아들에게로 이끌어 주시며, 아들은 나중에 아버지께 나라를 바치신다. 이는 종속이 아닌,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보여 준다(암브로시우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 이끌고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께로 이끄신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우리는 아버지께서 주신 믿음의 선물 덕분에 그리스도께로 오며, 따라서 겸손해야 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이는 강제로 끌려 온 이가 아니라 진리를 갈구하듯 그분을 알고자 갈망하며 그리스도의 계시를 본 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나는 생명의 빵’이라고 선언하신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생명의 빵’임을 강조하시는 것은, 죄도 자기만의 고유한 빵, 곧 ‘죽음’을 가지고 있고 그분은 죽음과 대립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빵을 먹는 자들은 자기 죄 속에서 죽는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주시는 한없이 만족시키는 빵을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다(아타나시우스).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우리를 합쳐 하나의 빵 덩어리로 만들기 위하여 당신의 몸을 반죽하시며(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 결합을 통해 부패와 그 안에 숨어 있는 죽음을 파멸시키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성찬의 살아 있는 빵은 만나보다 훨씬 위대하다. 그 빵은 영원한 생명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몸을 주기 때문이다(암브로시우스, 에프렘). 누구든지 이 빵을 먹는 이는 합당히 생명을 지닌다(아우구스티누스). 이 빵은 곧 죄의 용서이기 때문이다(암브로시우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 하고 예수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의 영적 신원을 밝히셨는데, 그분의 육신적 신원에 대해서만 그것도 겉으로만 알고 있던 군중은 바로 그 때문에 오히려 동요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한 6,42ㄴㄷㄹ) 

 

  군중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서 나신 분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분의 출생 비밀을 그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알게 된 강생의 신비 역시 복음서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지 그분이 발설하신 내용이 아니며, 당대의 군중은 물론 제자들에게도 그분은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없다. 오직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아서 당신을 믿기를 요청하셨을 뿐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군중 없이 제자들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시는 가운데 필립보와의 대화에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9ㄷ.11)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그분이 당신의 신적 기원을 직접적으로 밝히기보다 하느님과 함께 계신 존재로서 하시는 일을 보아서라도 당신을 믿으라고 요청하신 후에, 정작 그분이 강조하셨던 사실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밝히신 것과 그들이 이 ‘믿음’으로 그들 또한 – 육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릴 수 있다는 특권을 부여하신 것이다. 이 부활과 특권의 복음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빵’이라는 것이며 이는 예수님 자신인 것이다. 그것이 빵을 살과 피로 표현하시는 예수님의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0-51) 하고 단언하실 수 있었다. 성체성사 신학에서 가르치는 ‘실체 변화’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 빵이, 즉 성체가 그저 상징이 아니라 ‘참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이 되시는 신비가 성체성사인 것이요, 단지 우리의 지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께서 생명의 실체를 주시는 신비가 성체성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에 관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을 이렇게 부연하여 가르친 바 있다. 

 

  부활로써 그 정점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미사에서 성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실체 변화라는 매우 특별한 현존과 관계됩니다. 바오로 6세의 말씀에 따르면, “성체 안에서의 현존이 ‘실제적인 것’이라 불리는 것은 마치 다른 현존 방식이 ‘실제적’이지 않다는 배타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워낙 탁월하게 실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의심 없이 총체적으로 또 온전하게 하느님이며 인간으로서 현존하시게 되는 곧 본체적인 현존 방식입니다”(바오로 6세, 신앙의 신비, 39항). 이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영구적이고 유효한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은 빵의 전 실체를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전 실체를 그분의 피의 실체로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거룩한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실체 변화라고 적절하게 불러 왔습니다”(제13회기,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 제4장; 신앙 규정 편람, 1642). 참으로 성체성사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 거룩한 성사에 관한 교회 교부들의 교리에서 흔히 설명되듯이,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이며 오직 신앙으로만 얻을 수 있는 신비입니다.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은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단지 자연적인 요소로서만 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그것들은 당신의 몸과 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다르게 받아들이더라도, 신앙이 그것을 여러분에게 확신시켜 줍니다”(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15항).

 

6.3.4.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6,52-59)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그들에게 줄 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우리의 머리로도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성사 안에서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다는 사실을 믿음이 그대에게 확인시켜 주게 하라(예루살렘의 키릴루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불사(不死)의 약이며(이그나티우스) 믿는 이들을 이롭게 한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살이 생명을 주는 이유는 육이 되신 말씀께서 성령과 함께(필륵세누스)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이 빵은 우리가 그것을 먹을 때 우리의 속된 육을 신적 육과 결합시킴으로써(아폴리나리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므로(이레네우스) 현세적인 것인 동시에 천상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비유나 수수께끼가 아니며 우리는 진짜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바라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렇게 실제로 먹으면 실제로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아우구스티누스). 우리가 성사 때 그분의 참된 살과 피를 먹으면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밀랍 두 조각을 붙이면 하나가 되듯, 그리스도의 살을 받아먹는 이는 생명을 먹고 마시는 것이므로 그분과 하나가 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아버지의 살아 있는 모상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다고 하신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이 말씀은 당신은 아버지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시간이 생기기 전 모든 원인이 생겨나기 전에 아버지에게서 아버지의 본질을 받으셨다는 뜻이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을 계속하시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겠지만, 그리스도를 먹을 때 우리는 생명을 먹는다. 그분은 생명이시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이 먹는 행위 안에서 우리의 본성이 그분의 본성과 결합되기 때문이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통해 생명만 주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도 주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알고 계셨으며, 그래서 당신의 ‘말씀’ 안에서(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고 우리에게 거룩한 불사의 빵을 주는 성사 안에서(로마누스) 생명에 대한 약속을 자주 하신다.” 

 

  앞선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요한 6,51)이라고 하시더니, 이제 이 본문에서는 “나의 살과 내 피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요한 6,53-58)이라고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하늘의 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인데(요한 6,32),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온 존재이시며(요한 6,51), 그분의 몸과 삶 즉, 인성 자체가 그 빵이시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살과 피’라는 비유적 소재를 동원하는 형식을 띠었으되 비유가 아니라 직설로써 당신의 신원을 공개적으로 밝히시는 말씀이다. 

 

  존재(‘나’)가 인성(‘살과 피’)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표현의 변화로부터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때부터 이미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고 계시다는 것과 최후의 만찬에서 이 살과 피로써 제자들과 후대의 믿는 이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당신의 생명을 얻어 누리게 할 성사를 제정할 구상이심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십자가 사건에서 당신의 살이 세상의 죄를 없앨 희생물로 바쳐지고 당신의 피가 흘려지기 때문이고, 최후의 만찬에서 이 살의 희생을 앞당겨서 파스카 만찬의 빵과 일치시키시고 이 피의 희생을 앞당겨서 파스카 만찬의 포도주와 일치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만큼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인데, 그 의미를 알 길 없었던 군중 안에서는 말다툼이 벌어지고 큰 혼란이 일어났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 하는 의문이 그 말다툼과 혼란의 단초였다. 사실은 열두 제자도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였겠으나, 평소에 스승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떠나지 않고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반신반의(半信半疑)하던 그들의 의문은 최후의 만찬 때에 가서야 비로소 풀렸다(마르 14,22-26; 마태 26,26-30; 루카 22,14-20). 

 

  이 경위를 풀어보면 이렇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22ㄴ) 하고 말씀하셨고,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는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7ㄴ) 하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 무엇인지, 또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주실 것인지가 밝혀졌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축성하신 빵과 포도주였다. 오늘날 성체성사의 재료가 이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전부가 밝혀진 것은 아니다. 빵의 기적 사건에서 이렇게 거의 암시를 해 놓으신 예수님께서 굳이 최후의 만찬은 예루살렘에서, 그것도 파스카 축제 당일에 제자들을 불러놓고 격식을 갖추어 하신 까닭은 그 이틀 후에 명백히 밝혀진다.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의 몸, 그리고 그 십자가에 달리신 채 흘리실 당신의 피를 앞당겨 빵과 포도주와 동일시하시어 축성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은 예수님의 인성을 의미하면서 또한 동시에 그 인성은 십자가 죽음을 불사할 정도의 희생적 사랑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여 제자들에게 나누어지시면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29ㄷ)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다. 이에 따라 교회에서 사제들이 예수님께 대한 기억으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신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영적으로 끌어당겨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와 이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통해 일치시키는, 이 같은 성령의 역할이야말로 성찬례의 핵심 부분이요 요소이다.

 

6.3.5. 많은 제자가 떠나가다(6,60-71)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제자들이 그럴진대 예수님의 원수들은 오죽했겠는가?(아우구스티누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떠날 구실을 찾으려는 마음도 있은 듯하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 위격의 일치에 따라 한분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다(아우구스티누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영과 육을 대비시키시지만, 이는 육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분은 성령이심을 드러내는 말씀이다(테르툴리아누스). 육은 영과 결합되어 있기만 한다면 매우 가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말씀께서 우리 가운데 사시기 위해 육이 되셨을 리가 없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는 영의 샘이시며, 영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다(암브로시우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영이다. 다시 말해, 영적이며 영에서 비롯한 말씀이다. 육은 말씀의 성전으로 이해되고 그렇게 믿어지며, 따라서 성화와 생명의 통로다.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육과 하나 되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렇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는 당신 원수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계셨으며 우리의 생각도 아신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아버지께서 때때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셔야 하듯이,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선물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듣기 거북한 것이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히에로니무스). 그러나 그것은 진정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이와 믿는 척할 뿐인 이들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며, 요한은 첫째 서간에서 이들에 관해 쓴 바 있다(테르툴리아누스). 많은 제자가 예수님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가 어떤 뜻으로 당신 곁에 머무르려 하는지 식별하기 위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들에게 머물라고 강요하지 않으신다(아타나시우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이 제자의 수가 아니라 그들의 성실함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베드로는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는 주님의 물음에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자신들의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과연 있을 수 있냐는 뜻이다. 이는 이스라엘도 깨달았던 바 그분을 따를 때 그들은 안전했고, 그분을 떠났거나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갔을 때는 길을 잃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베드로도 부활이 일어나기도 전에 부활을 고백하며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고 고백한다. 이는 주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기에 할 수 있는 대답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살과 피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었고, 그러자 확실히 알게 되었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내가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하고 물으시는데, ‘열둘’이라는 수는 유다의 배반 후에 그의 자리를 다른 이로 채워야 할 만큼 중요하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은 유다의 행동을 폭로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유다가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당신이 아신다는 사실을 유다에게 알게 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일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왜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는지 신중히 돌아보도록 만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처신에서 우리는 악의에서 비롯된 일도 하느님께서는 좋은 일로 바꾸어 놓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아우구스티누스).” 

 

  결국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ㄴ) 하면서 떠나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흔들리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남아 있으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나머지 열두 제자에게도 독촉하듯이 물으셨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이런 말씀은 마치 갈테면 가라는 투로 들릴 수도 있었다. 그만큼 이 생명의 빵에 대한 이치를 믿느냐 혹은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 매우 중대한 문제였던 것이다. 실상 성체성사와 관련된 이 진리는 예수님의 신원과 직결되어 있어서 믿든지 아니면 떠나든지 해야 하는 양자택일(兩者擇一) 문제이다. 적당히 양다리를 걸칠 수가 없는 것이다. 해당 본문의 맥락이 정확히 그러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ㄴ-69). 이때 나머지 제자들의 발언이나 태도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지만 맥락으로 보아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적극적으로 부인하거나 떠나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체포되신 후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으실 때  베드로는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나머지 제자들도 죄다 도망간 것을 감안하면, 이 당시의 고백은 그리스도께 대한 확고한 신앙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스승에 대한 인간적 신의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네 번째 표징으로 당신의 신원을 알리고자 하셨던 일은 대다수 군중에게 대해서는 실패하셨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제자들에게는 일단 성공하셨다고 볼 수 있다. 단, 이스카리옷 유다에 대해서만은 이미 이때부터 명시적으로 지목하지만 않으셨을 뿐 실패한 경우로 내다보고 계셨다(요한 6,70-71).

 

  이 네 번째 표징과 관련하여 알 수 있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이 표징이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 그 정통성의 판단 척도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개별 교단들 사이에서 그러하고, 다른 하나는 가톨릭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그러하다. 

 

  우선 가톨릭교회와 갈라진 교단들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공식적으로 교회의 정통성 판별 기준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가 여부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나오는 대로 교회에 대한 신앙 고백, 즉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를 믿는가의 여부로 되어 있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의 진정성을 실질적으로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생명의 빵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빵으로 계시하신 터에 이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고백하느냐의 여부가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교회가 ‘실체 변화’로 가르치고 실천하는 성체성사에 대해서 성찬은 단순한 상징이자 기념이며 친교의 잔치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성사로서의 효력을 부인하였다.

 

  특히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성체성사 교리를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다고 주장한다고 알아듣고는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ation)이라고 이름을 붙여놓고  ‘미신행위’라고 규정하였다. 그 자신은 자신의 입장을 일컬어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함께 존재한다는 설)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데 루터가 일단 성체성사 교리를 비판하며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자  이 해석에 반발한 교파들이 분열해 나가면서 교파별로 차이를 보였다. 즉, 공재설을 주장한 루터를 비판하면서 칼뱅은 영적 임재설(靈的 臨在說. Real Spiritual Presence: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존재한다는 설), 츠빙글리는 상징설(象徵說. Symbolic Reprentation: 그리스도의 신성에 바탕하여 신자들의 이해를 통해 상징적으로 빵과 포도주 안에 존재한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나마 7성사를 보전하고 있는 성공회에서도 위의 주장들을 융합한 성사적 임재설(聖事的 臨在說. “그리스도의 몸은 이 성찬에서 오직 천상적이고 영적인 방법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며 받아서 먹는 것이다. 주님의 만찬의 성사, 즉 성체와 보혈은 그리스도의 제정에 따르면 보존하거나 여기저기 들고 다니거나 들어 올리고 경배하는 대상이 아니다.” 영국 성공회 신조 제28항)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저런 설(說)로 격하되어 버린 셈이다. 

 

  그 다음 가톨릭교회 내부를 들여다보자면, 이른바 ‘종교개혁자’들에게 교회 분열의 빌미를 제공한 자들은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둘러싸고 과도한 모금을 추진하며 소위 ‘면죄부’를 판매한 성직자들이었다. – 사실은 죄를 면죄하는 것이 아니라 고해성사를 주임신부에게 보아야 한다던 당시 교회법 규정을 면제하고 고해성사의 보속을 자선헌금, 특히 베드로 대성전 신축헌금으로 대체해 준 재량행위였다. - 이 타락한 성직자들이 성체성사를 미사 중에 거행하면서도 ‘실체 변화’를 내세웠으니 그 인효성에 의문이 가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는데(요한 13,1-20), 이는 당신께서 제자들을 섬기신 것처럼 제자들끼리도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특별 주문이었다. 이는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ㄴ; 15,12)는 계명으로 남기실 만큼 제자의 신원으로서 가장 중요한 본분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대사제의 기도’(요한 17,6-26)를 바치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공관복음사가들이 예수님 공생활 활동의 결론으로서 반드시 기록해 놓은 ‘최후의 만찬’ 기사 대신 요한 복음사가는 13장에서 17장에 이르는 긴 대목을 할애하여 성체성사의 정신을 강조해 놓은 것이다. 그것은 섬김과 일치였다.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둘러싼 이 스캔들은 요한이 전하고 있는 바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님의 당부를 크게 어긴 것이었다. 자격은 물론 함량까지도 성체성사를 거행할 사제의 수준에 미달한 이른바 ‘성직주의자’들이 교회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성체성사에서 이룩되어야 할 거룩한 변화의 필요조건은 이를 거행함으로써 교회 일치에 봉사해야 하는 사제들의 섬김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이룩하신 본래의 거룩한 변화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이끄심이다. 

 

  그리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분열을 초래한 그 당시 성직계의 중대한 과오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거론하면서 그 책임을 흔쾌히 인정하였다(일치교령, 3항). 2000년에는 대희년을 맞이하여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로 하여금 성찰과 참회의 문서(‘기억과 화해: 교회의 과거 잘못들’)을 발표하게 하였으며, 이에 바탕하여 용서의 날에 온 인류 앞에 용서를 청하였다. 이 문서 안에는 지난 2천 년 동안의 역사에서 교회의 구성원들이 저지른 잘못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는데, 교회 분열을 초래한 잘못도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계시를 선포함에 있어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계시선포자로서 마땅한 품위를 갖추고 처신했어야 할 교회 구성원들이 저지른 잘못들이었다. 

 

  이 ‘기억과 화해’를 위한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 성직주의의 폐해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로 인해 유럽과 서구 사회에서 신앙이 거부되거나 조롱받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섬김의 자세를 계승함에 있어, 심히 유감스럽게도 “가톨릭교회는 200년 뒤처져있다”(Carlo Maria Martini). 마르티니 추기경의 이 유언을 최근 교황청 꾸리아(Curia. 고대 로마의 행정단위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교황청 각 성(省)과 위원회의 실무를 맡은 고위급 관료들의 회합을 의미한다)에서 상기시킨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를 다시 매력적으로 만들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2019.12.22.). 이 말은 성체성사의 거룩한 변화가 지향하는 바대로, 성체를 영하는 가톨릭신자들의 인격과 신앙, 관계와 처신이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복음의 매력은 거기서 풍겨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사에 참여하고 영성체를 하면서도 입으로만 ‘아멘’이라고 대답할 뿐, 아무런 변화를 이룩하지 않는다면 공재설이니 영적 임재설이니 상징설이니 하고 진리를 한낱 ‘설’로 깎아 내리면서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함으로써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오늘날의 군중’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지만 계시와 계시 선포자를 구별해야 하고 계시의 정당성이 계시선포자의 과오로 가려져서는 안 된다. 또한 가톨릭교회와 개별 교회들의 관계 역시 구별되어야 하는데, 그리스도를 추종함으로써 하나인 교회 안에서 갈라진 개별 교회들의 다양해진 카리스마를 존중함으로써 일치를 추구해야 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역사상 저질러진 교회 구성원들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가 선포해온 그리스도의 계시에는 오류가 없으며 이는 성체성사의 진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계시와 신학도 구별해야 하는데, 신학은 계시의 내용에 대해 인간 이성을 통해 해설하는 도구이지 계시 자체를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만일 신학이 계시를 흠집내려고 하면 이는 명백히 그 본령을 벗어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계시로서 성체성사 신학을 통해 교회 구성원들과 인류가 하느님의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게 하는 길에 대해 밝혀져야 한다. 그런데 교회 분열 이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이를 바탕으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의 행위를 ‘실체 변화’로 해설하고자 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노력을 한낱 ‘화체설’로 격하시키고, ‘공재설’이니 ‘영적 임재설’이니 ‘상징설’이니 하는 학설로 계시를 흠집내고 있는 ‘오늘날의 군중’은 여전히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듣기 거북하게 느끼고 투덜거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종교를 개혁시키거나 교회를 일치시키는 길이 아니며, “내 살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6,51ㄷ.55)라고 명백하게 계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도 아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6,56)는 예수님의 계시-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알아듣기 쉽게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는 따로 풀이까지 해 주시는 자상함을 보이셨지만, 이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에 있어서는 당신 자신의 신원에 직결된 계시인지라 자상함은커녕 냉정하고 살벌한 어조로 말씀하셨음을 기억하라: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67). 다시 강조하건대, 성체성사의 진리에 관해서는 믿는지 떠나든지 양자택일해야 하는 문제이지 이런 저런 ‘설(說)’을 궁리해 내어 왈가왈부 논할 문제가 아니다.

 

  요컨대, 요한복음 6장에서 핵심적인 가르침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 나를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드러내는 교회의 행위가 성사로서 거행된다. 구체적으로는 성체성사에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가 신자들을 영원히 살게 해 주는 생명의 양식이다. 그러나 이 성사적 질료(質料)에 담긴 의미는 예수님 자신이시오 성령이시다. 또 달리 말하자면, 하느님의 기운이시기도 하고 얼이시기도 하다. 이로써 누리의 모습이 새롭게 창조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원한 생명의 빵은 생명과 창조의 기운으로 가득 찬 하느님의 얼로서 성령 그 자체이시다. 하느님의 얼이신 성령을 인간의 얼인 ‘혼’이 받아야 ‘영혼’이 생기를 얻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과 인간의 소통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6. 생명의 빵, 영원한 생명의 성사 (6.1. - 6.3.)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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