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어린양의 심판과 새로운 백성(묵시 14,1-20)
묵시자에서 예언자가 된 요한은 제12장에서 여인과 용의 싸움을, 제13장에서는 용의 하수인인 두 짐승과의 싸움을 전한 다음, 이제 제14장에서는 용과 짐승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심판하시는 장면을 전한다.
우리는 여인과 용의 싸움에서 신앙과 우상숭배 간 대결에 대해 묵상하는 한편, 아시아 대륙의 현실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사회악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선의 원리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아시아 주교들은 이를 위해 사회교리를 도입하고 있음도 소개하였다.
또한 두 짐승 이야기에서는 문명과 야만에 대해 묵상하는 한편, 아시아 대륙에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악 현실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공동선 조건에 대한 아시아 주교들의 성찰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사회교리에서 제시하고 있는 복음화 목표가 사랑의 문명임을 소개하였다.
제14장에서 전해주는 주제는 우상숭배와 야만에 대한 심판이다. 심판은 종말의 필연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이 종말의 심판은 예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과정의 또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빛이 비치어 어둠을 몰아내는 것과 같이, 예수님과 그분의 백성이 신앙을 증거하는 실존이 신앙을 박해하는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고백과 증거가 지닌 영적이고 사회적인 위력이 이러하다. 그리하여 심판의 주제는 새로운 교회에 대한 묵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린양으로서 지휘하시고, 그분의 백성인 초대교회 신자들이 ‘십사만 사천 명’의 무리로 등장한다. 이 숫자는 ‘12(이스라엘의 지파의 수) X 12(예수님의 제자의 수) X 1000(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 기간의 햇수)’을 상징한다. 부활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선택된 무리를 인류로부터 분리시켜 속량하시고 시온 산 위로 모으셨다. 그 때 어린양의 승리를 찬양하는 새 노래가 천상에서 울려나온다. 십사만 사천 명만이 이 승리에 힘입어 구원의 새 노래를 배워 부른다. 이 ‘새 노래’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역사에 직접 관여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위업을 칭송하는 것이므로, 새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구원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예절을 배척하고,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깨끗하며, 어린양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가서 운명을 같이 하고,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해 흠잡을 데 없이 축성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이 무리가 축성되는 과정이 박해자들을 심판하는 과정과 겹친다. 이 박해자들은 하느님을 경외하고 영광을 드리며 창조주로 경배하기를 거절한 자들이다. 이를 대표하는 ‘대바빌론’은 로마제국으로서, 부도덕한 욕정에 이끌려 하느님 대신 황제를 신으로 섬기고 종속국들도 이 욕정에 빠지게 했다.
묵시자 요한은 예언자의 안목으로 로마제국의 멸망을 미리 내다보았다. 초강대국으로 행세하며 자기 종교와 문화와 가치관을 강요하면서 하느님을 무시하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로마제국과 그 추종자들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분노의 술을 마시고 불과 유황으로 영원히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 심판과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자 박해받고 살해된 이들에게 영원한 행복과 안식을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다 익은 곡식을 수확하듯이 또는 포도를 확에 넣어 밟듯 심판을 집행하신다. 이와 동시에, 십사만 사천 명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어린양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데 열정을 쏟았다.
요한이 교회의 예언자로서 묵시적 언어로 알려준, 신앙과 우상, 문명과 야만, 그리고 종말의 심판과 교회 창조 등에 관한 이 모든 흐름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파스카 과업이었다.
34.1. 어린양의 백성(묵시 14,1-5)
로마인들이 십자가의 광기로 인해 고대의 도성 예루살렘을 황폐화시켰지만(오이쿠메니우스), 그리스도께서 시온 산 위에 서 계신 것이 보인다. 종말에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올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소유로 만드시어 당신께로 데려오실 것이다(빅토리누스, 오이쿠메니우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새 도성 위에 서 계신 것일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이 그분과 함께 있는데,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믿고 안팎으로 다 정결하게 산 이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과 마음과 영혼과 생각을 다 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다(베다).
교회에서 성도들의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것은 거룩하고 듣기 좋은 곡조(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로 그리스도의 고투를 기리며 본받고 찬미한다(베다). 그들의 노래는 많은 수금이 어울려 내는 소리 같다. 그들이 악과 욕망을 육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수금을 타며 입을 모아 함께 시편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베다). 그들이 부르는 새 노래는 덕을 배우고 정결하고 순수하여 합당하다고 인정된 사람들만 부를 수 있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 노래는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된 사람들만 배울 수 있으며(오이쿠메니우스), 그들의 행동과 선의에 따라 이 노래에 관한 지식이 주어진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 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육신을 깨끗하게 지키고 다른 선민들 앞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기뻐하는 사람들이다(베다). 십사만 사천 명은 어디를 가나 그리스도를 따른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셨을 때 당신의 육신을 동정성 안에서 깨끗이 지키심으로써 교회의 첫째 동정인(Archvirgin)이 되셨다(메토디우스). 교회는 정통 신앙의 규범을 지키며 이단자들과 불의하게 섞이지 않는 이들 안에서 영적인 동정성을 지닌다(루스페의 풀겐티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교회는 또한 혼인의 순결성을 지키는 이들과 헌신적인 과부들 안에서도 영적인 동정성을 지닌다(아우구스티누스, 루스페의 풀겐티우스). 그러나 성적인 결합으로 자신의 육신을 더럽힌 일이 없는 사람들 안에서 교회는 더한층 충만하고 완전한 동정성을 얻는다(루스페의 풀겐티우스). 그래서 육신의 동정성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만이 부를 수 있는 새 노래를 부른다(아우구스티누스).
이런 동정인들은 맏물이며, 그 다음은 과부들과, 혼인은 했으나 금욕하는 이들이다(히에로니무스, 아우구스티누스). 참된 동정인은 어린양을 완벽하게 본받음으로써 그를 따르고,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나 따라간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어린양을 따른다. 그런즉 동정인들은 더한층 복된 기쁨과 더한층 달콤한 주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들은 내세에 그분을 더 가까이에서 보는 기쁨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베다). 순교자들 또한 각별히 어린양을 본받음으로써 그를 따른다. 그러나 동정인들이나 혼인한 사람들 그리고 과부들은 자신의 소명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위하여 고통받으셨고, 그분의 정원에는 순교자들의 장미뿐 아니라 동정인들의 백합과 혼인한 사람들의 담쟁이 덩쿨 그리고 과부들의 제비꽃도 있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악마를 이기시고 당신의 부활로 지하 세계를 열어젖히신 분께서 승리자가 되어 하늘로 돌아가셨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기 때문이다. 더럽혀지지 않은 양 떼가 더럽혀지지 않은 그들의 우두머리를 따라 그 숭고한 자리로 갈 것이다(토리노의 막시무스).
34.2. 심판의 예고(묵시 14,6-13)
환시자가 한 천사가 하늘 높이 나는 것을 본다. 이 천사는 선포자로, 아마도 엘리야일텐데, 그리스도의 적의 나라가 오기 전에 그의 선포가 있을 것이다(빅토리누스). 이 천사는 교회 안에서 영원한 삶에 관해 설교하는 많은 설교자들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프리마시우스, 베다). 이 설교자들은 영원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로 표현되는데, 그들이 영원한 구원을 고대하며(프리마시우스), 그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마음을 그 나태한 상태에서 들어 올릴 영원한 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다(베다). 이 천사는 특별히 고결하고 고귀하며 숭고한 본성을 지녔을 것이며(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하느님을 본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그 머리와 하나 되게 인도하는 중개자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는 육신은 죽이지만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적보다 심판의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영원한 가르침을 선포한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구원자의 겸손한 오심은 성도들이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누릴 영원한 보상을 예시하며 그것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의 완성이었다(오리게네스).
‘바빌론’은 ‘혼돈’이라는 뜻이며 현세 삶의 예측 불가능한 시련과 떠들썩한 혼란을 가리킨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또한 바빌론은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악을 행사하는 악마의 도성이나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죄와 우상 숭배에 빠진 이 도성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티코니우스). 우상 숭배로 격앙된 사람들은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나무와 돌을 섬기며, 그들을 영원한 불에 떨어지게 할 하느님의 분노를 부르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실로 모든 죄는 만취와 정신착란의 한 형태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짐승 같은 그리스도의 적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적처럼 불경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심판의 잔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가 담겨 있지 않은 그 잔은 하느님의 분노 아래 놓인 이들에게 암흑과 광기를 불러올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사악한 교의를 믿음으로써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이단자들과 도덕을 팽개친 생활을 하는 이들, 그리고 어린양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유대인이 그런 자들이다(프리마시우스). 천사들과 성도들은 이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구원자께 그분의 자비에 대해 감사를 바칠 것이다(프리마시우스). 악행을 저지른 이들이 자유롭게 선택한 악이 다양한 만큼 이 잔이 가져오는 벌도 다양할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하느님의 선하심은 그분의 분노보다 몇 배나 크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의 의로운 진노를 견뎌 낼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행사하실 때면 그분의 자비가 그것을 에워싼다. 그러므로 이들이 겪는 영원한 고통은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이 결여됨이다(오이쿠메니우스). 그래서 이들의 울음과 한탄이 연기처럼 영원무궁토록 타오른다. 성도들은 사악한 자들이 결국 어떤 벌을 받는지 알고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지 않을 것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 굳건히 남아 있으라는 훈계를 듣는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들은 이 일시적인 고통을 견뎌 냄으로써 짐승과의 영원한 동반자 관계에서 벗어날 것이며(프리마시우스), 그들을 박해하던 자가 영원한 벌에 처해지는 것을 볼 것이다(베다). 불경한 자들은 결코 휴식을 얻지 못하는 반면, 순교자들과 세상에 대해 죽은 모든 이는 죽음의 순간부터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베다).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성실히 일한 사제들과 주교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프리마시우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권세들과 싸우며 끝까지 견뎌 내야 하는 까닭에, 끊임없이 하느님께 ‘제 마음을 당신께 기울게 하시고, 헛된 것을 보지 않게 눈을 돌려주소서’ 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34.3. 마지막 수확(묵시 14,14-20)
그리스도께서 당신 육신의 ‘구름’ 위에 앉아 계신 것이 보인다(프리마시우스). 하느님의 어머니는 ‘구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분은 순수하고 결백하시며 단 한 점의 죄도 그분을 짓누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그리스도께서는 또 당신 자신의 몸 위에 앉아 계신데, 그 몸은 박해로 희게 된 교회다(프리마시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그리스도께서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시어(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지금은 그 본성과 지위에서 숭고하고 고귀한 천사들 위에 앉아 계시지만(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사악한 자들이 자신들이 찌른 이를 보도록(베다), 당신의 신성을 당신 육신의 구름으로 가리시고 심판하시러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는 권능들과 보이지 않는 권능들을 모두 다스리시며(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당신 나라의 영광을 관으로 쓰고 계시다(오이쿠메니우스). 교회 또한 열두 사도를 관으로 쓰고 있는데, 교회는 처음부터 이들의 설교를 보존해 왔다(프리마시우스). 육신으로 오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한 권한도 가지고 계시며(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분의 심판을 통해 불경한 자들과 경건한 이들, 그리고 이단자들과 정통 신앙인들이 나뉠 것이다(프리마시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베다). 그때엔 풍성한 수확이 있을 것이며, 왕겨와 같은 인간들은 모두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교회 또한 영적인 싸움을 끝내고 나면, 누가 참된 신자이고 누가 아닌지 보다 분명히 판별하게 될 것이다(프리마시우스). 변하는 것들이 불변하고 영속적인 것들에게 자리를 내줄 이 분리의 때가 오기를 하늘의 천사들은 기도한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종말 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밭이자 당신의 포도원인 교회 안에서도 수확을 하실 것이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베다). 그분은 또한 당신의 시중을 드는 천사들의 도움을 받으실 터인데 그들은 가장 사악한 자들을 잘라 버리는 일을 할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열렬히 소망하며 나날이 기도한다. 사악한 자들과 죄가 다 차면(베다), 그때 불경한 자들과 중한 죄인들은 악마와 그의 천사들이 가도록 마련된 장소에서 마귀들의 분노에 맡겨질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 죄인들은 변호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여겨져 곧장 추방당할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정욕으로 가득 차고 죄를 열망하는 말과 같아져 버린 이들에게는 그들의 억제할 수 없는 격정에 버금가는 고통이 덮칠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와 마찬가지로, 악마와 그의 공범자들도 그들이 흘리게 한 성도들의 피와 이단자들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벌을 받을 것이다(프리마시우스). 최후의 심판을 이행하는 천사들도 ‘그들이 피에 흠뻑 젖었다’고 비유되는 응징을 가할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심판은 쓸모없고 헛된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나 부패하지 않는 것들은 가치있는 것임을 드러낼 것이다(프리마시우스). 그러나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와 불경한 자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 죄인들에게는 교회 안에서도(프리마시우스) 천상 예루살렘에서도 상이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정의에 의해 벌 받는 이들이 성도들의 축복을 망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34.4. 복음의 증인들
아시아 주교들도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 성령께서 이룩하실 사랑의 문명에 이르는 도정을 파스카 과업으로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쇄신되어야 할 아시아 교회에서 새로운 '십사만 사천 명'의 무리가 복음의 증인으로서 투신할 선교사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 복음의 증인들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선행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아시아 주교들은 아홉 가지 선행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전제해야 할 명백한 진리는 이것이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개봉한 두루마리의 메시지를 요한이 받아 전해준 바 역시, 파스카 과업이었다. 파스카란, “예수의 강생과 죽음, 부활을 통해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하느님이 인간 역사 안에 온전히 들어오신 그날부터 인간 역사에 내재된 구원과 해방의 역동성”(R.Fabris, 「새로운 성경신학사전」)이다. 초대교회 시절에 소아시아에서 신자들이 계승한 이 파스카 과업을 이제 복음화 제삼천년기의 초입에 아시아 대륙에서 계승하려는 역사적 계기가 무르익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 역사의 징표를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파스카 과업은 아시아의 온 교회가 수행해야 할 과업(선교교령, 2, 35항)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시아 각국의 교회가 파스카 과업을 위해 쇄신되어야 할 선교적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과 일치된 삶의 증거를 해야 하는 선교적 책임이다. “첫째가는 증거의 모양은 새로운 생활 모습을 나타내는 선교사와 그리스도교 가정과 교회 공동체의 생활 자체이다. …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은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으면서 증언할 수 있고 또 하여야 한다. 이러한 증거는 많은 경우에 신자가 선교사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교회의 선교사명, 42항).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특히 우리 시대에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스승보다 증거를, 주장보다 경험을, 이론보다 실천을 더 믿기”(교회의 선교사명, 42항)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시아 복음화를 포함한 선교적 지향을 지니고 신앙의 증거를 사는 교회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아시아의 상황에서 분명한 사실이다(아시아 교회, 42항).
세 번째로는, 사목자들은 양성 과정에서부터 성무 집행에 이르기까지 선교야말로 자신들의 존재이유임을 명심해야 한다(아시아 교회, 43항).
네 번째로는, 봉헌 생활회들과 선교회들 역시 선교 활동을 위해 영감과 힘을 주는 특별한 원천으로서 설립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탐구, 형제적 친교 생활 그리고 이웃에 대한 봉사는 오늘날 아시아의 민족들에게 매력적인 그리스도교의 증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봉헌 생활의 세 가지 특징이다. 아시아의 수많은 종교 전통들 속에서 관상 생활과 금욕 생활에 헌신하는 수도자들과 선교사들은 큰 존경을 받으며, 그들의 증거는 복음화에 있어서도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도생활 선교회들이 존재하지 않는 아시아의 각 지역 교회 안에 이 단체들을 설립하는 일은 ‘민족들과 외방 지역과 생명을 향한’ 선교에 특별히 투신하는 일이다(아시아 교회, 44항).
다섯 번째, 모든 평신도는 선교사로 부름받았다. 평신도들의 선교 영역은 사목자나 수도자 그리고 선교사들과 달리, 정치, 경제, 산업, 교육, 매체, 과학, 기술, 예술 그리고 스포츠 등 광대하고 복잡한 영역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 안에서 평신도들은 이미 진정한 선교사로 활약하고 있다.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복음을 증언함으로써 평신도들은 불의와 압제를 뿌리 뽑는 데 고유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아시아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들로서 선교 과업에 투신할 수 있는 평신도 선교사를 양성할 센터를 설립해야 한다. 이 평신도 선교사 양성에 있어서는 여성들의 참여가 특별히 장려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교회의 사랑과 봉사의 사명을 수행하는 여성 선교사들의 존재는 아시아인들이, 특히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이 치유하시고 화해를 이루시는 연민에 가득 차신 예수님을 발견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기 때문이다(아시아 교회, 45항).
여섯 번째, 가정은 젊은이들이 인격적이고 사회적으로 성숙하는 일상적 장소이다. 아시아의 모든 문화와 종교 전통에서 노인들에 대한 효도와 병자들에 대한 배려,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과 같은 가정적 가치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시각에서 볼 때에도 가정은 ‘집안 교회’(교회헌장, 11항)로서, 단지 교회로부터 사목적 배려를 받아야 할 대상일 뿐만 아니라, 가장 효과적인 복음화의 매개체들 가운데 하나이다. 자녀들은 어린 시절에서부터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가족과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부모로부터 묵상하는 습관을 들이며 신앙을 배움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고 이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는 복음적 열의를 체득하게 된다(아시아 교회, 46항).
일곱 번째, 아시아의 모든 교구에서는 젊은이들을 영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사도직을 제공하여야 한다. 젊은이들 역시 가정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사목적 배려의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랑과 봉사의 사도직의 주체들이며 협력자들임을 명심해야 한다(아시아 교회, 47항).
여덟 번째, 아시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현대 매체들의 새로운 문화를 활용해서 복음 메시지를 알릴 필요가 있다. 매체의 광범위한 영향력과 엄청난 효과를 생각할 때, 가톨릭 신자들은 다른 교파의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 그리고 또한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함께 매체 안에 영적이며 도덕적인 가치들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홉 번째, 아시아의 선교 역사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고 박해하는 자들 앞에서 신앙이 인간 누구나 추구해야 할 진리임을 증거한 선각자들이며, 비인간적인 박해를 당하면서도 인간다운 아름다움을 보여준 영웅들로서, 우리가 이룩해야 할 사랑의 문명을 미리 보여준 성인들이기 때문이다(아시아 교회, 49항).
이런 아홉 가지 선행조건을 충족시키는 가운데, 이 파스카 과업에 먼저 초대된 복음의 증인들은 신앙이 쇄신되어 복음을 증언하는 교회에서 선발된 ‘십사만 사천 명’이다.
24.3.10.5. 새로운 노래, 새로운 백성
<계속>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34. 어린양의 심판과 새로운 백성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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