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3. 두 짐승 이야기

저녁노을의 글
2023-01-04 18:10:00 조회(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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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두 짐승 이야기 - 문명과 야만(묵시 13,1-18)
  묵시록 제12장에서 여인과 용의 싸움을 묘사한 요한은 이제 제13장에서는 두 짐승의 이야기를 전한다. 여인은 성모 마리아인 동시에 초대교회의 공동체들을 중의적으로 표현한다고 해석했는데, 이는 용이 초대교회를 박해한 로마제국을 상징한 사탄이기 때문이었다. 하느님께서 이 용을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뜨리시자 두 짐승이 교회를 박해하러 나타났는데, 한 마리는 바다에서 올라왔고 또 다른 한 마리는 땅에서 나타났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로마제국의 황제들을 상징하고, 땅에서 나타난 짐승은 로마제국에서 임명한 ‘아시아의 지방 장관들’(사도 19,31)을 상징한다. 황제들은 자신들을 신격화시켜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숭배하게 했으며, 대리인들은 황제신격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므로 두 짐승 이야기는 여인이 용과 대결한 싸움에서 이어지는 후속편이요 본론과 같다.

  로마제국의 황제를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전통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콘스탄티투스 황제 시대까지 60명의 황제 중에서 36명이 신격화되었다. 본디 황제신격화 정책은 종교적인 뜻보다 정치적인 뜻이 우선이었다. 종교와 문화, 인종과 역사가 제각기 다른 여러 나라 민족들을 로마제국의 깃발 아래 묶으려니 황제를 구심점으로 충성서약을 받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종교적인 색채까지 띠게 되었다.

  이 황제신격화 정책에 불응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경제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묵시 13,17) 하는 내용이 이 뜻이다. 이 상업활동 금지령의 원조는 티아디라였다(묵시 2,20). 본시 지역 특산물이 빈약한 탓에 인구가 적었던 티아디라에 부임한 로마 관리는 신전도 세웠지만, 장사 수완이 좋은 유다인들을 끌어 들였다. 그런데 이들은 동업조합을 만들고 신전에서 행해지는 황제숭배예절에 참여하면서 자신들끼리 상거래의 이익을 나누는 대신에, 이 예절에 참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상거래를 금지시켰다. 티아디라 출신 리디아가 필리피까지 가서 자색옷감 장수를 하다가 바오로를 만나자 마자 자신의 집을 선교처로 내어놓을 만큼 그리스도교에 호감을 느끼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필리피 선교와 사도 바오로의 선교활동을 후원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참조: 사도 16,14-15).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은 황제를 대신하여 해마다 제국의 중요한 두 관구인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올 때 배를 타고 왔으므로, 로마제국의 억압을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그 통치자들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묵시 13,1)으로 여겼는데, 이것이 첫 번째 짐승이다. 또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은 “뿔이 둘이었는데 용처럼 말을 했다”(묵시 13,11)고 했는데, 뿔이 두 개인 이 두 번째 짐승은 뿔이 열 개인 첫째 짐승(묵시 13,1)인 로마제국에 속한 종속국의 대리인임을 암시한다. 구약성경에서 뿔은 힘과 권위(예레 48,25; 에제 29.21; 다니 8,8), 강한 민족들(즈카 2,1-4)을 상징한다(박영식).

 

  로마제국의 황제들이나 그 부하들을 묘사한 첫째 짐승은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었으며(묵시 13,1ㄴ)표범의 얼굴과 곰의 발에다가 사자의 입을 가지고 있었다(묵시 13,2ㄱ)고 요한은 썼다. 로마제국에 종속된 나라들의 지방장관들을 묘사한 둘째 짐승은 뿔이 둘이고 용처럼 말을 하였으며(묵시 13,11), 첫째 짐승의 악행을 따라서 집행했고(묵시 13, 12), 하늘에서 땅으로 불을 내려오게도 했으며(묵시 13,13), 첫째 짐승의 상을 세웠고(묵시 13,14), 그 표를 모든 사람이 받게 하여 그렇지 않고는 모든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묵시 13,16-17)고 요한은 썼다. 

 

  스스로 신이라 자처하며 황제숭배를 강요했던 로마제국의 황제나, 그 수하가 되어 백성들을 악행으로 괴롭힌 지방장관들을 흉측한 짐승의 모습으로 묘사한 요한의 묵시록 표현은 다니엘 예언자의 영향을 받았다(다니 7장)신격화 조치와 황제숭배 정책으로 로마제국은 ‘문명’임을 자처하고자 했으나, 다니엘이나 요한이 보기에 한낱 짐승에 지나지 않는 ‘야만’이었다. 

 

33.1. 바다에서 올라오는 첫째 짐승(묵시 13,1-10)
  종말에 하느님께서는 빛을 피하고 하느님을 멀리했던 사람들을 속일 인간을 그리스도의 적으로 보내실 것이다. 모든 배반이 그 안에 응집되어 있는 이 배반자는(이레네우스) 이 세상의 거칠고 불안정한 삶으로부터 생겨날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는 교활한 술수와 속임수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할 것이며(오이쿠메니우스), 그의 신성 모독은 율리아누스와 발렌스 같은, 그리스도를 비방한 로마 황제들에게서 볼 수 있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그의 신성 모독과 배반은 악마의 추종자이며 몸인 모든 불경하고 사악한 자들 안에서도 볼 수 있다(티코니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그러나 바다에서 올라온 이 짐승은 아버지가 사탄인, 악마라 불리는 마귀일 수도 있다. 악마가 계략을 꾸미는 데는 표범처럼 재빠르고 속이는 일에는 곰처럼 끈질긴 것은, 사탄이 그의 스승이며 그의 행실을 낳는 자이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적도 사탄의 권능을 지닐 것이며, 로마의 왕으로서 거짓 표징과 이적들로 나라들을 파괴할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리스도의 적이 통치하는 나라는, 악의와 광기가 본성이며 피에 목말라하는 민족들의 집합체일 것이다(빅토리누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전에 이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교회를 황폐화시키는 이단자들 안에서 지금도 우리는 그의 세력을 본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그러나 이단자들은 보편적인 신앙고백과 성경의 증언에 의해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불경을 저지르며 거기서 다시 힘을 얻는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마귀는 그들 안에 어좌를 두고 다스림을 행하는데, 그가 그들을 시켜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고 예배를 바치도록 유혹하기 때문이다(티코니우스). 그리스도의 적이 오면 그는 마법사 시몬 때 일어났던 일처럼 마법을 통해 죽은 이들을 되살릴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리스도의 적이 할례와 율법을 옹호하는 그리스도라고 자처하게 되면 유대인들까지도 그에게 넘어갈 것이다(빅토리누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적을 섬김으로써, 과거에 자신들의 경건한 예배로 악마에게 입힌 상처를 낫게 할 것이다. 악마는 자신을 따르고 섬기는 이들을 중상 비방을 발하는 입으로 삼는다(오이쿠메니우스). 그런즉 악마가, 육신이 되신 말씀(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과 성도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과 거룩한 천사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을 모독하는 것은 이단자들과 배교자들을 통해서다. 그러나 이민족들과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더러는 경건하고 깨끗한 삶의 방식을 지킴으로써 악마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파멸을 가져오는 악마의 지배 아래 자신을 두는 사람들은 악마의 노예가 되고 악마의 칼에 의해 영혼의 죽음을 맞을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동안 교회는 악마의 적의로 인해 계속 고통을 받을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이 당신께 힘을 휘두르도록 두셨던 것처럼 교회도 하느님의 허락 하에 일시적으로 교만에 굴복할 것이다(프리마시우스).

33.2. 땅에서 올라오는 둘째 짐승(묵시 13,11-18)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근원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적이다(오이쿠메니우스). 또는 이 짐승은 그리스도의 적의 시종으로서 마법과 속임수로 그리스도의 적의 길을 준비하는 거짓 예언자다(빅토리누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는 세속적이며 천박한 삶의 양식에서 일어나 나올 것이며(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임금이라고 내세울 것이다(히폴리투스). 그가 처음에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서(빅토리누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자신이 마치 어린양인 것처럼 두 성경을 인용할 것이나(티코니우스), 나중에는 자신이 악의로 가득 찬 사기꾼이며 속은 늑대처럼 잔혹한 자임을 드러낼 것이다(히폴리투스, 빅토리누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자는 악마도 그리스도도 아니면서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악마의 짓거리를 한다(오이쿠메니우스). 세례자 요한이 믿는 이들을 구원자께 인도했듯이, 이 거짓 예언자는 많은 이를 속여 그리스도의 적을 하느님으로 믿게 만들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또한 그는 어린양의 몸을 공격하고 자기가 속인 이들을 진리에서 멀리 쫓아버릴 것이다(티코니우스).

  거짓 예언자는 마법사같이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빅토리누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그것은 어린양의 교회를 흉내 내는 것일 뿐이며, 불꽃 모양의 혀로 사도들에게 내려오신 성령은 오직 교회에만 있다. 성령은 모세에게 대적했던 마법사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 거짓 예언자를 꺾으실 것이다(프리마시우스). 하지만 짐승의 유혹하는 능력은 대단하여, 사람들의 몸과 영혼을 다 파멸에 이르게 하고(티코니우스) 많은 이단자가 그릇된 예배에 빠져 교회를 떠나도록 만든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그의 통치는 굉장하고 화려할 것인데, 그가 아우구스투스처럼 다스리고(히폴리투스) 네부카드네자르가 했던 것처럼 성전 안에 그리스도의 적의 상을 세울 것이기(빅토리누스)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들에게는 모질게 굴고,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의로운 유대인들을 고문했던 것처럼 믿는 이들을 살해할 것이다(히폴리투스). 그런데도 많은 이가 그에게 속아 마치 한 도성처럼 똑같은 말로 그리스도의 적을 고백할 것이다(프리마시우스). 이 짐승은 속임수와 모방으로 사는 혼돈의 도성 바빌론을 나타낸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파라오의 마법사들과 마법사 시몬에게 속은 이들처럼 마법에 넘어간(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 도성의 주민들은 비록 정통 신앙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신실하지 못하며 불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거룩한 책에는 그리스도의 적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진실한 사람에게는 시간과 경험이 그 이름의 뜻을 드러내 줄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육백육십육이라는 수는 성취와 완성을 암시한다. 세상이 엿새 만에 완성되었기 때문이다(베다). 노아의 이야기와 네부카드네자르가 세운 상(像)에 관한 이야기가 말해 주듯이, 이 사악한 인간은 모든 배반과 사악함과 속임수를 자기 안에 응집시켜, 그의 모든 배반적 권능이 불의 못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이레네우스). 한편 그리스인들의 계산법에 따라 그 이름을 알아낼 수도 있을 법하다(프리마시우스). 많은 수치스러운 이름과 직함이 이 수에 해당하지만(오이쿠메니우스), ‘테이탄’은 이 수에 각별히 들어맞는 듯하다. 그리스도의 적은 흉포하며 자신이 왕의 존귀함을 지녔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이레네우스). 그리스도의 적은 하느님의 몫인 영예를 탈취하고 참그리스도를 부정할 것이므로, ‘안테모스’나 ‘아르누메’ 같은 이름도 이 수에 해당한다(프리마시우스). 어쨌든 그리스도의 적은 수치를 모르는 자여서 사악한 이름들로 불리는 것을 매우 좋아할 것이다.

33.3. 아시아 복음화의 사회악과 공동선
  초대교회 시절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주범이 로마황제요 그가 박해한 방식이 황제숭배 강요 정책이었다면, 21세기 아시아 대륙의 복음화에 있어서 이를 가로막고 있는 사회악 현상과 여기에 결핍된 공동선의 조건들은 다양하다.

  아시아의 주교들은, 생명경시풍조를 초래하는 죽음의 문화(아시아 교회, 35항), 기본적인 의료 혜택에서 배제된 병자들과 장애인들(아시아 교회, 36항), 문맹을 퇴치하고 문해 능력을 함양시킬 뿐만 아니라 신앙을 토착화하고 개방성과 존중의 길을 가르치며 종교 상호 간의 이해를 증진시켜야 할 교육의 현실(아시아 교회, 37항), 평화를 염원하며 맞이한 대희년 이후에도 전장터가 되어 버린 아시아의 여러 지역들에서 대량 살상무기가 동원되어 파괴한 평화(아시아 교회, 38항), 가난한 이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세계화 현상(아시아 교회, 39항),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짊어진 외채의 무거운 짐과 이를 부채질하는 국내적 부패구조(아시아 교회, 40항), 그리고 심각한 환경 훼손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가난한 이들의 현실(아시아 교회, 41항) 등을 복음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로 관찰하고 판단하였다. 이것이 현대판 아시아의 ‘용과 짐승들’인 셈이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면, 오늘날에는 가난한 이들이 현대판 용과 짐승들이 강요한 가난 때문에 삶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사회교리에 따르면, 사회악 현상을 관찰하고 공동선 조건을 판단한 연후에 필요한 조치는 지속적으로 행해야 할 사도직 활동에 투신할 선교사를 양성하고 파견하는 것이다. 아시아 주교들은 막대한 수에 이르는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이 겪고 있는 참상을 그대로 두고서는 하느님께 참다운 예배를 드릴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아시아 주교들의 이러한 메시지는 요한의 묵시록 메시지에 비추어 대륙의 영적인 상황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요한이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로마제국의 황제들과 그 하수인들을 흉한 몰골의 짐승으로 묘사한 것처럼,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 힘으로 억압하는 세력은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며, 이는 현대 아시아를 비롯한 물질문명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문명’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믿고 이룩하고자 하는 교회는 현재 비복음적인 사회악 현상에서도 ‘짐승’같은 야만을 본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에게 공동선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느님께 참다운 예배를 드리고자 선교사를 양성하고 파견하려는 아시아 주교들의 결의는 단지 좁은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선교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의미에서 문명을 이룩하시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행위이다. “빛은 동방에서” 비치어 오리라던 서양의 오랜 격언이 바로 여기에 적중하는 것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33. 두 짐승 이야기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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