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32. 여인과 용의 싸움

 

[요한복음] 32. 여인과 용의 싸움

 

저녁노을의 글

2023-01-01 20:32:15 조회(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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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여인과 용의 싸움- 신앙과 우상(묵시 11,19-12.18)

  묵시록 제12장에서 전해주는 ‘여인과 용의 싸움’은 마리아의 개인 생애와 초대교회 공동체의 실존과 역사 그리고 운명까지를 겹치게 묘사하는 중의법(重義法)적 표현을 구사하고 있는데, 그 흔적이 네 군데에서 나온다. 

 

  첫째, 여인이 ‘열두 개 별로 된 관’(묵시 12,1)을 썼다는 것은 이 여인이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는 열두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유다인들, 특히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한다.

둘째, 그녀가 낳은 아기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묵시 12,5ㄴ)인데 “그 여인의 아기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다”(묵시 12,5ㄷ). 이렇게 메시아의 생애를 기술하지 않고 탄생에서 승천으로 건너뛴 이유도, 이 대목이 메시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어머니를 통해 메시아를 믿는 백성인 초대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여인과 용이 대결하는 무대가 지상이 아니라 하늘이다. 용으로 묘사된 악마는 여인을 돕는 하느님의 천사 미카엘과 그 부하들에게 패배하는데, 남은 기간(‘삼 년 반’: 묵시 12,14) 동안 최후의 발악으로 여인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주려고 날뛴다. 그래서 악마는 그 여인을 삼키려고 쫓아갔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여인이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묵시 12,6,14). 여기에서도 ‘여인’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한다. 여인이 겪는 투쟁의 실존 역사가 곧 초대교회 공동체가 겪고 있는 박해와 저항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 무대가 지상이 아니라 천상이라는 뜻도 이러한 관점이 인간의 눈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본 것이라는 뜻이다. 요한은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아직도 박해가 남아 있으며 지금까지보다 더 심해질 수도 있지만 머지않아 종식될 것임을 알려주고자 이 대목을 써서 보냈다(박찬용). 

 

  넷째, 이 이야기는 마리아의 운명처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운명도 악마의 공격을 받지만 승리하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메시지는 교회를 ‘천상 예루살렘’(묵시 19,7-8; 21,9-10)으로 만드심으로써 실현하실 것이며, 여인이 “태양을 입듯이”(묵시 12,1ㄴ) 교회도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현존 속으로 들어 올려질 것이고, 또한 여인이 “발밑에 달을 두듯이”(묵시 12,1ㄴ) 세월의 흐름을 이기고(시편 89,38) 천상 신분을 영원히 보존하리라는 약속으로 이어진다(박영식).

 

32.1. 아기를 밴 여인과 불을 뿜는 용(묵시 11,19-12,6)

  그리스도 주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하느님의 성전이 열렸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빅토리누스, 티코니우스, 베다)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오시어 새 계약의 궤를 계시해 주셨는데(티코니우스, 베다), 그것은 곧 복음 선포와 죄에 대한 자비다(빅토리누스). 복음 선포는 교회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 안에 그리스도 육화의 궤를 지니고 있다(티코니우스, 베다). 성전이 열리면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성도들을 위해 마련된 축복도 계시된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또한 그때 하늘에서는 그리스도 신앙에 타격을 입히는 무법자들을 우박처럼 부수어 버릴 천둥과 번개가 처벌로 떨어진다(티코니우스, 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하늘에 계신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분은 영혼과 육체가 다 순결하시며 하늘에 계시기에 합당하고 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정녀께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온전히 인간이시며 당신 태에 품으셨던 영적인 태양을 옷처럼 입고 계시다(오이쿠메니우스)교회 또한 천상의 영광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교회가 빛나는 말씀을 입고 있기 때문이며(히폴리투스, 메토디우스), 영광으로 가는 부활의 약속과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빅토리누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교회는 자신이 세례로써 타락에서 정화해 준 이들의 신앙 위에 서 있다(메토디우스). 교회는 확고부동한 선을 고수하며, 그래서 모든 가변적인 것을 사랑으로 극복한다(프리마시우스). 교회는 열두 사도라는 관을 쓰고 있으며(히폴리투스, 티코니우스) 모든 이단자(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와 위선자, 그리고 배교한 신자들(아를의 카이사리우스)은 그 발 아래 있다. 육화하신 하느님의 지혜를 그 안에 지니고 있는(프리마시우스) 교회는 믿지 않는 세상에 말씀을 선포하는 일(히폴리투스)과 이방 민족들을 한데 모으는 일(티코니우스)을 결코 그치지 않는다. 또한 교회는 물과 성령을 통해 많은 이를 영적으로 새로 나게 하며(티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유산되어 버린 태아처럼 참된 빛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과는 관계를 끊는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마리아도 그 나름 괴로움을 겪었다. 거룩한 천사가 요셉에게 그녀 태의 아기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밝히기 전까지 자신의 임신에 너무나 놀랐고 요셉에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적하는 사탄은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로서 잔인하게 살인과 억압을 자행하는 자다(빅토리누스, 오이쿠메니우스)헤로데의 질투를 타오르게 한 것이 사탄이며(티코니우스), 그는 언제나 영과 율법을 적대한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사탄은 많은 천사를 자신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게 만들었으며(빅토리누스, 오이쿠메니우스), 지금은 많은 사람을 그들이 받은 세례의 빛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메토디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런 사람들은 거짓 예언자가 되어 순진한 이들을 타락시키거나(티코니우스), 삼위일체 교리를 왜곡하는 이단자가 되거나(메토디우스), 사람들이 두 번째 세례를 받게 하는 오류에 빠뜨린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태초부터 흉악했던 사탄은 아기 예수를 죽이라고 헤로데를 부추겼고(티코니우스, 오이쿠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예수를 유혹하여 죽음에 빠뜨리려고 했다(빅토리누스).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소행으로 고통당하였듯이, 지금 그분의 교회도 그 머리가 겪은 대로 겪고 있으며(티코니우스), 그리스도 또한 당신 교회의 고통 안에서 계속 고통당하신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교회는 세례라는 거룩한 씻음을 통해서 그렇게 하듯이, 이런 고통을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드러낸다(티코니우스). 그리스도를 낳으신 마리아께서 그 후로도 동정으로 남아 계셨던 것처럼, 세례로 생명을 낳는 교회도 그 지체들이 고통당하는 중에도 온전하게 남아 있다(쿠오드볼트데우스). 아버지의 섭리로 아기 그리스도가 헤로데에게서 살아났듯이(오이쿠메니우스), 성도들은 고난에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유혹의 와중에서도 지켜진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교회는 그리스도의 승천에도 함께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어 민족들을 다스리시듯이(빅토리누스)교회는 거룩한 임금들을 낳고 민족들의 교사가 되기 때문이다(히폴리투스). 교회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과 기상을 지닌 자녀를 낳는다(메토디우스). 이들은 악마에게 승리하며(티코니우스) 헛된 욕망으로 나약해지지 않는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교회는 천상 처소에 앉아 있으며(프리마시우스), 그리하여 불경한 전갈들과 거만한 뱀들을 짓밟는다(티코니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처소는 덕의 정원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교회는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한 완전한 지식 안에 산다(메토디우스). 예전에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신함으로써 헤로데의 손길에서 벗어난 것처럼(오이쿠메니우스), 교회는 수도승들을 사악한 인간들과 마귀들의 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하여(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사막으로 보낸다

 

32.2. 하늘에서 벌어지는 전쟁(묵시 12,7-12)

  사탄이 하느님께 대항하여 자신을 높이고 다른 이들을 모반에 끌어들일 계획을 세우자 미카엘과 다른 천사들이 그를 자신들의 무리에서 추방하였다. 오만방자한 그의 교만과 자만심을 참을 수 없었던 천사들이 그를 하늘에서 내던졌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 후 사탄이 그리스도께 싸움을 걸어왔을 때,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시중을 들었고 유혹이 끝난 후엔 그분을 도왔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지금도 사탄은 교회에 싸움을 거는데, 교회는 하느님의 조력자인 미카엘의 보호를 받고 있다. 신자들이 사탄을 부인하고 더는 그의 뜻을 행하지 않을 때, 사탄은 다시 하늘에서 내던져진다(프리마시우스). 용과 배반한 모든 천사는 종말에 또다시 하늘에서 내던져질 것이다(빅토리우스). 거룩한 지위를 박탈당한 사탄은 더 이상 영적인 실제 안에 살지 못하고 세속적인 생각을 지닌 존재로 추락한다(오이쿠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 사탄은 더 불경해졌으며 덕과 덕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까지 비방한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래서 덕 높은 성도들한테 쫓겨난 사탄은 세속적인 것을 사랑하고 소망하는 이들 안으로 들어간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사탄이 추방되자 천사들은 승리의 찬가를 부른다. 비난자가 성도들과의 싸움에 져서 그들에게서 떠나갔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효험 있는 피로 용을 정복하였고,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이제 천사들도 그들을 ‘형제들’이라 부른다(오이쿠메니우스). 그리스도의 승리는 베드로를 통해 묶고 푸는 열쇠는 받은 교회에 권위를 준다. 그리고 천사들이 하느님의 은총과 심판을 기뻐한다. 구원받은 이들 안에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그리고 영벌에 떨어진 이들 안에서는 그분의 공평함과 심판을 보기 때문이다(프리마시우스). 사탄이 땅으로 떨어졌을 때 당연히 많은 이가 해를 입었다. 그러나 현명하고 진실한 이들에게 시련과 유혹은 훈련을 통해 사람들을 쇠처럼 강건하고 실하게 만드는 체육 교사와 같다. 반면, 게으르고 나약한 이들은 아믕이 쉬 흔들려 사탄의 휘둘림에 넘어간다(오이쿠메니우스).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천사들은 이런 이들을 애도하며 한탄한다(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32.3. 여인이 용의 손길에서 벗어나다(묵시 12,13-18)

  천사의 지위에서 떨어진 악마는 인류의 구원자를 낳은 동정 마리아를 박해했다. 그가 인류를 시기한 것은 자기는 하늘에서 추방되었는데 인류는 하늘로 올라갈 터이기 때문이었다(오이쿠메니우스). 그래서 그리스도와 사도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악마의 증오는 끝 간 데 없다(프리마시우스). 속된 생각이라는 먼지를 먹도록 저주받은 악마는 그리스도의 기운을 받아 정욕에서 해방된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더욱 기를 쓴다(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마리아는 사탄에게 쫓겼지만, 요셉에게 이집트 광야로 피신하라고 알려준 천사 덕분에 살아났다(오이쿠메니우스)마리아의 동정성은 실로 어떤 악도 욕망도 존재하지 않는 광야를 상징하며, 모든 참된 동정녀들이 그것을 본받고 그리하여 덕의 관을 받는다(메토디우스). 마리아는 육체관계를 맺은 적이 없으니 아마 죽음도 벗어났을 것이다(에피파니우스). 그리고 이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세속적 생각과 욕망에서 벗어나는 교회의 표상이다(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두 성경의 가르침을 받은 교회는 그 사랑의 정신과 육욕 없음, 그리고 깨끗한 마음 안에 하느님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세상을 벗어난다(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베다). 땅이 그리스도의 몸을 가져갔다가 다시 돌려주었을 때 마리아의 마음이 기뻤던 것처럼(오이쿠메니우스), 교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그 생명의 충만함으로 죽음을 삼켜 버린 그분 인성의 승리를 통해 확신을 얻는다(프리마시우스). 지금도 수도승들은 겸손과 신실한 마음을 통해 악마의 유혹을 삼켜 버린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육화하신 주님을 죽이는 것도 사도들의 확신을 무너뜨리는 데도 실패한 악마는 지금은 세상의 폭군들을 이용해 마리아의 자손들을 박해한다. 믿는 이들이 마리아에게서 난 아이를 하느님으로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베다). 

 

32.4. 복음화는 영적 대결이다

  소아시아에 있던 초대교회만이 아니라 지금 아시아 대륙에 있는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도 복음화를 앞두고 영적인 대결 상황에 놓여 있다. 사탄이자 악마를 상징하는 용의 세력은 지금도 여전히 아시아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화는 영적 대결의 양상을 피할 수 없다. 

 

  아시아의 주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아시아에서 ‘인간 발전을 위한 봉사’로서 교회의 사회교리를 도입하여 적용해야 함을 강조하였다(아시아 교회, 32항)‘인간 발전’이란 용어는 바오로 6세가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사용한 이래 ‘인간 구원’이란 용어를 현대적으로 번역한 용어로 쓰여져 왔다. “인간 발전은 결코 단순히 기술적 경제적 문제일 수 없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적이며 도덕적인 문제인 것”이다. 아시아 대륙에서 비인간적이며 반생명적인 풍조를 조장하고 있는 악의 세력을 직시해야 함은 그래서이다. 사회악 현상을 관찰하되, 그 안에 결핍된 공동선 요소를 판단해야 하고, 이 공동선을 사도직 활동을 통해서 실현하고 증진할 수 있는 행동 지침 전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교회의 사회교리이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아시아의)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인간 발전을 위하여 행동하도록 행동 노선을 제시할 것이며, 인간의 인격과 인간 활동에 대한 거짓된 개념들에서 그들을 해방시킬 것”이다. 

 

  아시아 주교들이 아시아 대륙 여러 나라들의 현실에서 관찰한 바, 가장 기본적인 범주는 인간 인격의 존엄성 현실과 가난한 이들의 현실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누구나에게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공동선 원리이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권력과 이념, 경제력과 억압적인 정치제도, 과학기술주의와 대중 매체의 과도한 개입 등으로 인하여 인간의 존엄성은 가장 비인간적으로 착취되고 남용되고 있으며, 가난과 소외로 고통당하고 있다고 아시아 주교들은 관찰하고 있다(아시아 교회, 33항). 인간 존엄성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경우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피해를 입는 당사자들은 가난한 이들이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존엄성의 위기와 가난한 이들의 문제는 사실상 같은 현실에서 빚어진다. 말하자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아시아는 풍부한 자원과 위대한 문명들의 국가이지만 몇몇 국가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이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결핍과 가난 그리고 착취로 고통 받고 있는 곳이다. 이를 위해서는 아시아의 교회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아시아 교회, 34항). 

 

  이상 아시아 현실을 하느님의 눈으로 관찰한 결과,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한 Exodus Paradigm에서 초점을 선명하게 맞출 필요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이다. 최고선과 공동선이 소홀하게 취급되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희생단하는 이들이 가난한 이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복음화되는 과정이 사회의 인간화가 이룩되는 과정이 된다. 

 

  그리하여 아시아 복음화의 과업으로 이 대륙에 세워질 '사랑의 문명'은 첨단의 물질문명이 확산되어 비인간화가 더욱 촉진되는 것이 아니라 서구 교회와 서구 자본주의 문명도 실패한 목표, 바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실현하는 일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전통적인 아시아적 가치가 지배하던 시절이나 서구적 가치를 받아들여 산업화된 오늘날에도 여전 가장 큰 희생을 치루고 있는 피해자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하느님께서 가장 크게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가난한 이들 안에 현존하여 계시며 믿는 이들을 부르고 계신다. 이것이 '갈릴래아 영성'이다. 그러자면 이 목표는 자연히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가로막아온 장애와 맞설 수밖에 없으며, 이런 성격의 대결에 있어서는 북이스라엘의 가르멜산에서 바알 우상의 예언자들과 홀로 맞서 치열한 대결을 펼쳤던 엘리야로부터 천상 전구를 청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가르멜 영성'이다. 우리는 ‘갈릴래아 영성’과 ‘가르멜 영성’의 맥락에서 "여인과 용의 대결" 대목을 묵상하고자 한다.

 

  도날 도어(Donal Dorr)는 교황청 사회문헌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의 관점에서 비평한 책을 펴냈다(1983년). 그는 최초의 사회회칙인 「새로운 사태」(레오 13세, 1891년)에서부터 「노동하는 인간」(요한 바오로 2세, 1981년)까지 백 년 간에 반포된 역대 교황들의 회칙을 중심으로 분석하면서, 주교 대의원회의의 결의문을 기초로 한 교황권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흐름, 그리고 예외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제3차 총회 결의문인 「메데인 문헌」까지 주요한 맥락을 비평하였다. 그가 펴낸 이 역작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사회교리의 초점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점이 부각되었다. 사실 이 명제는 메데인 총회에서 제기되어 푸에블라 총회에서 확정됨으로써 교황청과 전 세계 교회에 알려지게 된 명제이다. 이 명제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부각시킬 수 있었던 도날 도어의 공헌 역시 공관복음서의 파스카적 구도에 기인한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 등 공관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복음의 우선적인 수취자(受取者)가 가난한 이들이라고 전해준 바 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 내리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며(루카 4,18),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루카 6,20). 가난한 이들은 두 부류였는데, 한 부류는 질병이나 장애로 고통받는 이들이었고(마르 2,5; 3,5; 6,56; 7,35; 8,25; 10,52), 다른 부류는 정신적으로 고통받거나(마태 9,25; 루카 7,11-15) 마귀들린 이들이었다(마르 5,8; 9,25). 예수님께서는 이 두 부류의 가난한 이들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좋은 이웃이 되어 주셨고(루카 10,29-37), 몸소 복음을 전하실 때나 제자들을 통해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에게 믿음이 발생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되면 크게 기뻐하셨다(루카 10,21; 마태 11,25-27). 

 

  초대교회 시절에 예수님의 이러한 모범을 계승한 것이 성찬례와 공동생활 양식이었는데, 사도들과 신자들은 이 두 가지 양식으로써 그들이 예수님과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고자 하였으며, 이것이 부활신앙의 증거요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되었다. 

 

  묵시록 12장에서 여인을 해치려 하고 대결하는 환시는 초대교회 시절에 이러한 두 가지 양식의 예수 추종을 반대하려는 악의 세력을 묘사하는 것이었고, 이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모두 사악한 유다인들에 의한 중상모략과 살해음모 등으로 이미 나타났던 것이었다. 

  이렇듯 성모 마리아의 실존 생애에서 나타났던 섭리를 바탕으로 요한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집단적 역사를 설명하려 하였고 궁극적 승리의 운명을 확신하며 쓰고 있듯이, 아시아 교회의 운명도 사회악과의 대결을 거쳐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는 승리로 귀결될 것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32. 여인과 용의 싸움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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