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 요한이 예언자로 임명되다

저녁노을의 글
2022-12-31 17:20:22 조회(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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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요한이 예언자로 임명되다(묵시 10,1-11,14)

  이제 전체 22장으로 구성된 요한묵시록의 중반에 이르렀다. 이제까지만 해도 묵시적 비밀 언어가 다수 등장했고 또 종반에 이르도록 그와 비슷한 양의 비밀 언어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전체적인 맥락을 놓칠 수 있다. 그러니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묵시록의 전체 맥락에 대한 중간 점검을 하도록 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묵시 1,1)인 이 묵시록은 본래 박해 상황에 놓여 있던 소아시아의 일곱 공동체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편지로서 작성되었다(묵시 1,4). 그러니까 이 묵시록의 본론은 이 일곱 공동체를 ‘교회’라고 높여 부르며 써 보낸 대목(묵시 2,1-3,22)이다. 이 모든 공동체를 사목적으로 돌보던 원로인 사도 요한은 여러 가지 사목적 지시사항을 이 대목에 담았다. 

 

  하지만 실제 소아시아에는 이들 일곱 공동체말고도 콜로새, 히에라폴리스 같은 공동체들이 더 있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소아시아 지역을 넘어서는 훨씬 더 많은 신자들과 공동체에도 어김없이 해당되는 진리였기에 요한은 이 일곱 공동체에 직접 해당되는 박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모든 공동체들과 후대의 공동체들이 겪게 될 박해의 예상 상황은 물론 박해의 본질에 대해서까지도 자신이 받은 계시를 전하고자 더욱 보편화시켰다. 그것이 지금까지 살펴본, 천상 전례(묵시 4장), 봉인된 두루마리(묵시 5장), 그 상징들에 대한 언급(묵시 6,8,9장)이었다. 이 흐름에서 요한은 악의 종말이 지니는 징벌적 성격에 대해 알려주었으며, 이와 함께 의인들이 지닌 신앙이 정화되는 고통스런 의미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고 알려주었다. 이것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보편적으로 받들어야 하는 두루마리의 메시지였다(묵시 7장). 

 

  이제 제10장부터는 제20장에 이르기까지 선과 악의 대결적 상황에 대해서, 요한이 두 번째로 알려주는 계시가 펼쳐진다. ‘어린양’이신 예수님만 뜯을 수 있는 두루마리를 요한이 받게 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계시에 포함된 종말의 징표들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러고 나서 제21장에 가서 두루마리의 메시지가 다시 나온다. 이제는 종말에 관한 메시지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말씀, 즉 창조에 관한 메시지로 바뀐다. 여기서 ‘새 하늘’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새 땅’은 박해와 시련으로 정화되어 ‘새 예루살렘’을 이룩할 새 하느님 백성인 교회이다. 

 

  요컨대, 두루마리의 첫 번째 메시지가 악이 종식되는 종말의 상황과 의인들이 시련으로 정화되는 과정에 관한 메시지라면, 두루마리의 두 번째 메시지는 정화된 의인들의 교회가 ‘새 하늘’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새 땅’을 이룩하리라는 창조적 전망에 관한 메시지이다. 그래서 묵시록의 결론이, “아멘! 오소서, 주 예수님!”(묵시 22,20)이다.  

 

31.1. 두루마리를 든 천사가 내려오다(묵시 10,1-7)

  예언자는 주님을 큰 능력을 가진 천사의 모습으로 본다. 주님은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파견하셨고 하늘에서 내려오신다. 주님은 당신의 부활과 심판의 표징들을 지니고(빅토리누스) 구름 모양의 옷을 입고 오신다. 그 옷은 당신의 거룩한 육신이며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다. 주님은 당신께서 당신 교회에 주신 구원의 약속과 인내의 상징들을 지니고 오시며, 성도들이 앞으로 받을 광명을 당신의 얼굴로 보여 주신다(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이 ‘위대한 경륜의 천사’가 펴 든 두루마리는 당신의 사도들이 온 세상에 전하는 신약성경의 은총을 드러낸다(빅토리누스, 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만물이 주님의 발 아래 놓여 있지만(빅토리누스), 그분께서 최종적으로 오시기 전에 많은 이가 그분의 이름으로 순교할 것이다(프리마시우스). 교회의 구성원 가운데 이들은 박해의 공격을 견디는 강한 이들이다(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그러나 아직 신앙의 인장을 받지 못하고(티코니우스) 엄청난 위험으로 시험당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견디지 못할 정도로 유혹받게 두지 않으실 하느님께서 시련을 면해 주실 것이다(프리마시우스). 

 

  이 참회의 시기에 교회는 예언자들을 시켜 구약성경을 해석하며(빅토리누스) 듣는 이들의 수준에 맞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 뜻을 선포한다(프리마시우스). 그러나 교회는 자격 없는 이들과 신심 없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사악함 안에 남아 있도록 그 신비를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티코니우스). 그리고 참회를 촉구하는 선포의 시간이 끝나면, 죄인들에겐 희망이 없을 것이다(빅토리누스). 그러나 이제 성도들은 더 이상 시험도 정화도 없는, 박해가 모두 끝난 영구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티코니우스). 

 

  예언자가 불경한 자들과 참회하지 않는 이들을 벌주려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를 본 것일 수도 있는데(오이쿠메니우스), 천사들의 무형성과 비가시성, 그리고 천사의 본성에서 나오는 광명과 덕을 상징하는 것들이 그와 함께 보인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천사는 작은 두루마리를 가져오는데, 그 두루마리에는 땅과 바다에서 죄를 지은 사악한 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천사는 불경한 자들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데, 그를 비롯한 천사들은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판결이 의롭고 정당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이 대부분은 종말에 모든 것이 분명히 풀이될 때까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땐 일시적인 조처 같은 것은 없으며 하느님께서 섬김 받고 찬미받으시는 영원이 시작될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31.2. 요한이 두루마리를 받다(묵시 10,8-11,2)

  펼쳐진 두루마리를 통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명확히 드러난 율법서와 예언서의 진리를 받는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율법의 끝이시기 때문이다(프리마시우스). 이 진리는 입에 단데, 지고한 가르침과 구원의 약속, 하느님의 정의, 그리고 미래의 일들에 관한 지식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이 진리를 선포하는 이들은 이 진리가 복음의 계명을 지키며 인내하는 청중에게는 물론 그들 자신에게도 쓸 수밖에 없음을 고통을 통해 깨닫게 될 것이다(빅토리누스, 베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거룩한 법에서 기쁨을 찾는 경건하고 영적인 이들에게는 달지만, 배를 신으로 섬기며 그리스도의 설교자들을 증오하는 불경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쓰다(아우구스티누스, 프리마시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거룩한 심판을 선포하는 것은 신심 깊은 이들에게도 한편으론 쓰라린데, 그들이 쓰라린 참회를 통해 더 나은 삶으로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프리마시우스). 그런데 요한은 거룩하고 정결한 사람이어서 사람들의 죄가 얼마나 쓰라린 것인지 알지 못했다. 요한은 중죄인들의 이름과 죄목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먹음으로써 죄와 그 결과의 쓰라림에 대해 일종의 영적 체험을 했다(오이쿠메니우스). 그리스도의 사람들도 거룩한 심판으로 벌을 받는 이에 대한 연민으로 쓰라릴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교회는 종족과 언어와 민족들 가운데서 진리를 선포하기를 그친 적이 없으며, 온 세상이 그 선포로 가득 찰 때까지 계속해서 그리할 것이다(티코니우스). 요한은 그의 복음서와 가톨릭 서간들, 그리고 이 묵시록으로 특별히 종말에 대해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다(빅토리누스, 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실로 요한은 그리스도의 적에 대항해 선포를 하기 위해 종말에 다시 올지 모른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요한은 그가 남긴 글을 통해 교회에게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예배에서 사탄의 여러 이단적 분파들을 배제할 수 있는 판단 기준, 곧 신앙의 ‘잣대’를 주었다(빅토리누스). 그러나 교회와 교회의 신앙 바깥에는 유대인들과 믿지 않는 이민족들(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밖에 있는 이들이 있다(티코니우스). 그러나 신약성경의 교회는 구약성경의 이스라엘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 교회는 민족을 초월하며 옛 계약의 그림자가 현실이 된 곳이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도성의 주민이 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오이쿠메니우스), 그 시간은 위선자와 이단자, 유대인, 그리고 그리스도 적들의 공격과 박해로 가득 찬 시간이 될 것이다(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31.3. 요한의 두 증인이 그리스도의 적과 싸우다(묵시 11,3-10)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모습으로 오심을 세례자 요한이 알렸듯이, 그분께서 아버지의 영광 안에 오심을 엘리야와 에녹이 알릴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그러나 어쩌면 종말에 요한이 엘리야와 에녹과 함께 돌아올지 모르며(僞-히폴리투스), 엘리야와 예레미야가 돌아와 주님의 오심을 알릴 지도 모른다(빅토리누스). 선구자들을 보내는 것은 인류에 대한 주님의 호의와 도덕적 죄를 범한 이들에 대한 그분의 염려를 보여 준다(僞-히폴리투스). 선구자들을 통하여 인류는 그리스도의 적이 쓰는 속임수와 하느님의 분노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며(僞-히폴리투스, 티코니우스, 오이쿠메니우스), 선구자들은 죄인들에게 참회하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티코니우스). 

 

  두 증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도구인 두 성경을 상징하기도 한다(티코니우스). 증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즉, 마음속에 존재하는 사적 증인과 모두에게 드러나 보이는 공적 증인이다(프리마시우스). 두 증인은 두 올리브 나무로 또 두 등잔대로 지칭되는데, 이 두 증인이 지식의 기름을 교회에 쏟아 부어 주는 두 성경의 빛을 받으며 [유대인과 이민족이라는 두 백성으로 이루어진(오이쿠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하나의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이다(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누가 교회를 해치고자 하면, 그들을 바로잡거나 벌주기 위해 교회는 기도로써 그들을 태워 버릴 것이다(티코니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교회를 위해 하신 모든 것을 교회에 주셨다. 따라서 교회는 묶고 푸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지상에 내리는 축복의 비를 멎게 할 수 있다(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또한 종말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두 예언자에게 엄청난 권한을 주실 것인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적이 거짓 표징들을 이용하여 기만과 어둠이라는 목적을 이루어 가는 동안 표징과 기적으로 진리와 빛을 퍼뜨릴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두 증인의 설교는 스스로를 추켜올리며 하느님처럼 으스대는 그리스도의 적으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을 것이다(僞-히폴리투스). 많은 문헌이 그리스도의 적은 하느님의 허락 아래 나라 중의 나라에서 황제들 가운데서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한다(빅토리누스). 그러나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적은 단 지파에서, 곧 유대인들의 간악한 마음으로부터 나올 것이라고 한다(티코니우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적은 죄스러운 우리 인간 본성의 불안정한 본질에서 생겨나리라는 설이 더 설득력 있다. 어느 설이 맞든, 그는 짐승처럼 사납고 잔인하고 피에 굶주려 있을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적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들을 살육하고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이들을 영적으로 살육할 것이다(티코니우스, 베다). 또한 그자는 예언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예루살렘에 자신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티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리스도의 적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조상인 다윗을 흉내낼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적이 다스릴 예루살렘은 소돔이나 이집트 같아질 터인데, 그 도성이 그리스도의 종들을 노예로 부리고 학대하며 방종으로 악명을 떨칠 것이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소돔과 이집트에는 신앙의 빛도 고백하는 소리도 없을 것이다(베다). 그곳에서는 사악한 자들이 의인들의 죽음을 기뻐할 것이며(오이쿠메니우스) 교회를 파괴하여 세상에서 없애 버리려고 애쓸 것이다(프리마시우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을 바로잡기 위해 주어지는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고 기뻐하는 자들과 달리, 응징이 내릴 때면 우리 구원의 주님께 의지하여 영원한 벌을 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31.4. 두 증인이 살아나 승천하다(묵시 11,11-14)

  사흘 반이 지난 뒤에 두 증인이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살아났다. 그들은 일어나 주님의 구름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들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일어날 만인 부활을 상징하며,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은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 떨 것이다. 두 증인의 부활은 의인과 불의한 자들이 분리됨을 나타내기도 한다(티코니우스). 종말에 실제로 지진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죽을 지도 모르나, 묵시록이 이야기하는 이 일들은 세상의 실체가 더 안전하고 안정된 것으로 변화한다는 사실과 현세의 삶에 애착을 끊지 못하고 살던 이들이 받을 영원한 심판의 상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또한 이 말씀들은 교회의 시간 전체를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는데, 교회는 언제나 박해라는 지진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악한 교의라는 타락을 겪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는 건물이 둘 있는데, 하나는 반석 위에 서 있고 다른 하나는 모래 위에 서 있다. 모래 위에 세워진 건물은 현세의 위험이라는 폭력에 무너지며 벌을 받도록 넘겨진다. 반석 위에 세워진 건물은 벌받는 고통을 겪지 않음을 기뻐하며 계명을 더욱 성실히 지킨다(티코니우스).

 

31.5. 사도 요한, 묵시자에서 예언자로!

  이 대목(묵시 10,1-14)은 일곱째 두루마리 봉인이 열렸을 때 상징으로 나온 일곱 나팔의 소리 중에서 여섯째 나팔 소리와 일곱째 나팔 소리 사이에 삽입된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이는 이미 사도였던 요한의 역할이 단순히 환시를 보고 그 안에 담긴 계시를 단순히 전달해주는 묵시자의 처지에서부터 두루마리를 받아 읽고 나서 자신의 언어로 선포하는 예언자의 처지로 그 역할이 더욱 중요시되는 전환 과정을 강조하고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소아시아의 초대교회를 위한 사도의 역할에서부터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한 예언자로 부르심 받았음을 기록한 것이다. 

 

  이 같은 신분 상승(?)은 모세와 엘리야로 추정되는 두 증인이 등장하여(박찬용, 참조: 묵시 11,6) 요한을 예언자의 반열로 인정해 주는 대목(묵시 11,3-14)으로 뒷받침된다. 이 두 증인은 사명을 다 마치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로 나온다. 이 두 증인을 모세와 엘리야로 추정하는 근거는 이러하다. 엘리야가 승천했다는 것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2열왕 2,1-11). 모세의 승천에 대해서는 엘리야만큼 분명한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승천의 영광을 입은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대로, 그 역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을 완수하고 천수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묵시 11,6)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명백히 모세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참조: 탈출 7,14-10,29). 

 

  그래서 이 두 증인과 요한은 공통적인 생애를 보인다. 즉, 박해를 받아 순교하는 운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기간까지 천수를 누리다가 승천하거나 영광 속에 선종하는 운명을 맞는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순교 행위로 신앙을 증거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특별한 소명을 완수해 내어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협조하는 데 있었다. 

 

  모세는 비록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백스무 살의 나이로 그 땅을 바라보며 요르단 강 건너편 느보산에서 자신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안수를 하고 눈을 감았다(신명 34,1-12). 또한 엘리야는 바알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물들었던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표징을 전해 준(1열왕 8,24) 다음, 가르멜산에서 벌어진 대결에서 우상 예언자들을 물리치는 한편(1열왕 18,20-40), 마지막 임무로 후계자 엘리사에게 자신의 직무를 넘겨주고 나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불 말이 끄는 불 병거가 나타나서 하늘로 올라갔다(2열왕 2,11). 

 

  사도 요한의 죽음에 관해서는 신약성경의 관련 기록이 없으나, 교회 전승에 의하면 이스카리옷 유다의 자리로 뽑힌 마티아까지 포함하여 열한 사도가 모두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으나 요한만이 서기 100 년경에 94세의 나이로 선종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도 내내 로마제국의 박해 중이었으나, 아마도 박해가 일어나면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피신해야 했기에 순교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묵시록이 전하는 두 증인의 승천은(묵시 11,14-17) 사도이자 예언자인 요한의 죽음이 지니게 될 품위를 예견하는 듯하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초대교회 시절부터 신자들 사이에 퍼져 있다가 2천 년 가까이 전승되어 온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이해하고자 한다. 교황청에서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대한 교의(1854년)와 함께 ‘하늘로 오르신 마리아’에 대한 교의(1950년)도 신자들의 신심을 이끄시는 성령께 대한 순명 차원에서 반포되어 확정된 바 있는데, 이 두 경우에만 교황의 무류지권이 발동된 바 있다. 승천의 신비에 대한 성경과 성전(聖傳)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섭리에 협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인간이 그에 맞갖은 소명에 충실하게 응답한 경우에 하느님께서 천상적 품위를 부여하신다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모세나 엘리야든, 요한이나 마리아든. 

 

  아울러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신앙의 대표적 두 인물이 사도 요한의 증인으로 등장함으로써, 그리스도 신앙이 대적해야 하는 사탄의 무리들은 그리스 다신교와 로마 황제숭배 등 서방 문화에서만 유래되지 않고, 유다교를 위협해 온 우상숭배 풍조도 포함됨을 요한은 암시하였다. 그리스도의 적은 사방에 있다.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바빌론’만 멸망할 운명에 놓인 것이 아니라, 이미 로마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도 새롭게 세워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묵시록의 무대가 점치 넓혀진다. 파트모스 섬(1장), 일곱 공동체가 속해 있는 소아시아(2-3장), 하늘나라(4-5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전 우주(6-10장)로 확대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하에서는 소아시아의 교회들을 1차적인 수신인으로 하여 작성되었으나 모든 교회를 보편적인 수신인으로 하여 발송된 이 묵시록에서 싸움과 징벌과 승리를 묵시 언어로 보도하는 11장 이하의 본문에 대하여 교부들의 주해를 기본으로 삼고 아시아 주교들의 가르침인 문헌 「아시아 교회」의 권고를 소개함으로써 묵상하고자 한다. 이는 아시아의 복음화를 향한 파스카 과업, 즉 Exodus Paradigm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묵시록의 두루마리가 요한에게 달기도 하고 쓰기도 했던 것처럼(묵시 10,9-10), 파스카 과업을 수행하고자 길을 나서는 아시아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해방의 메시지를 실천하려는 관점에서 묵시록을 해석하고자 하며,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따라서 해방되어야 할 백성, 즉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렇게 볼 때, 문헌 「아시아 교회」에 담긴 교황권고는 요한묵시록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메시지를 아울러 담고 있는, ‘Exodus, a Lasting Paradigm’은 아시아 복음화라는 희망찬 희열과 함께 복음적 쇄신이라는 쓰라린 자기정화의 아픔도 함께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모세와 엘리야가 요한의 증인으로서 이 영적인 싸움에 참전하여 그리스도의 적과 싸웠듯이(묵시 11,3-10),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한 이 과업에 있어서도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증인과 사도 요한 및 성모 마리아 등 묵시록에서 일러주는 성인들과 영적 통공을 통하여 전구와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다. 티코니우스를 비롯한 교부들이 묵시록 본문을 주해해 주고 있다시피, 이 성인들은 아시아 복음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적들과 함께 싸워줄 것이며 또한 이 싸움에 참전한 모든 이들을 하늘로 들어올려 데려가 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날 통공의 신비는 타볼산에서 일어난 거룩한 변모 사건을 연상시킨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등 세 제자만을 따로 데리시고 타볼산에 올라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 대화를 나누심으로써, 장차 이루실 일 즉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해 세 제자에게 확신을 심어 주신 바 있었다(마르 9,2-10). 그러므로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부르심 받은 아시아 그리스도인들도 확고한 부활 신앙을 지녀야 할 것이다. 요한이 사도로서만이 아니라 예언자로서 모든 교회에 보편적으로 전해준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들기 위해서 그러하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31. 요한이 예언자로 임명되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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