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30. 두루마리의 메시지 I

 

[요한복음] 30. 두루마리의 메시지 I

 

저녁노을의 글

2022-12-30 19:21:49 조회(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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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두루마리의 메시지 I(묵시 7,1-17)

  하느님의 계시가 쓰여져 있어서 비밀스럽게 봉인되었던 두루마리가 열리고, 일곱 두루마리의 상징들이 지닌 뜻이 밝혀짐으로써 진리와 신앙을 박해하는 악의 종식을 고하는 종말의 과정이 또한 밝혀지는데, 제7장은 이 종말의 심판에서 징벌을 받게 될 악인들과 달리 상급을 받게 될 의인들에 대한 메시지로서, 사실상 두루마리의 적힌 첫 번째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묵시자(默示者) 요한은 유다 민족 출신으로 “인장(印章)을 받은 이들”(묵시 7,4)과 모든 이방인 민족 출신으로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묵시 7,14)이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를 이루는 환시를 보고 기록하였다(박찬용, 박영식). 

 

30.1.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묵시 7,1-8)

  하느님의 심판이 닥칠 때 땅과 인류가 겪을 고통은 고대 네 왕국의 폭정을 피해 시사된 바 있다(베다). 그러한 고통은 최근에는 로마인과의 전쟁에서 유대인이 겪은 수난으로도 목격되었다(오이쿠메니우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은 그리스도의 적이 오고 창조계의 바른 질서가 붕괴될 때 더욱 극심할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이 일이 일어나기 전, 엘리야가 내려와 다른 민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믿음으로 유대인들을 부를 터인데(빅토리누스), 그것은 구원에 합당한 유대인들이 복음의 빛을 통해 입증되어 죄인들과 같은 운명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런 일은 로마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자 그리스도를 믿었던 유대인들이 피신했을 때도 어느 정도 일어난 바 있다. 그렇게 구원받은 유대인이 상당히 많았는데(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어떤 이유에서였든 그리스도께 대한 음모에 가담하지 않고 나중에 그리스도를 믿어 신앙의 인장을 받은 유대인들도 그 가운데 들어 있었을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적이 맹위를 떨치는 시대에 모든 신자는 생명을 주는 십자가의 인장에 의해 불신자들과 구별되며, 창조계 또한 정화되어 그 괴로움에서 해방될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주님께서는 육으로 태어나실 때 하늘에서부터 이 십자가를 가지고 오셨다. 십자가는 모양부터가 그분 나라의 보편성과 온 교회의 완벽하고 충만한, 셀 수 없이 많은 수를 나타낸다(베다). 교회에는 다른 민족 사람도 있고 유대인도 있는데,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믿었더라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았을 것이며, 다른 민족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히에로니무스). 이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똑같이 열렬한 마음과 단일한 신앙을 지니고 있으며(오이쿠메니우스), 교회를 고백과 믿음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오른손으로 가게 하는 덕들을 지니고 있다(베다). 교회가 지상에 머무는 동안 가는 이 길은 영적인 눈과 선행의 길이며 축복과 기도의 길, 다가올 일들에 대한 희망과 순명의 길, 고통을 견디는 힘과 영원한 삶으로 가는 은총의 길이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은 선민들의 교회가 걷는, 그리스도 오른손의 지복(至福)으로 가는 이 길을 상징한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베다). 

 

30.2. 선택된 이들의 무리인 교회(묵시 7,9-17)

  요한은 복음이 먼저 선포되었던 이스라엘의 지파들에 속한 십사만 사천 명을 보고 난 다음(베다), 모든 민족과 언어권에서 나온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를 본다. 이들은 구원을 받고 아버지 어좌 앞의 자리를 배정받은 무수한 이민족이다(오이쿠메니우스, 베다). 요한이 본 이 무리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거룩한 수가 나타내는 사람들, 곧 선민의 무리일 수도 있다. 다른 민족 출신인 이들은 복음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되었고, 그래서 마땅히 아브라함의 아들들로 불린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뿌리에 접붙여졌기 때문이다(프리마시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아마 이 무리는 오래 전에 고투(苦鬪)했고 종말까지 고투할 모든 지파의 순교자일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들은 세례로 성령의 옷을 입었고(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영을 통해 받은 사랑의 옷을 입었으며(프리마시우스) 그들 삶의 순수함이라는 옷을 입고 있다(오이쿠메니우스). 순교자들은 또한 자신의 피를 흘림으로써 자기 행실의 옷을 희게 하며(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들은 부활을 통해 영광스럽게 된 육신을 돌려받는다(베다). 이들은 모든 영적 원수와의 싸움에서 십자가의 승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며,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받은 그들은 모든 것을 선행을 통해 견디어 낸다(오이쿠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특히, 그리스도 수난의 동반자들인 순교자들은 천상 예루살렘으로 받아들여지고, 그곳에서 그들은 마귀에게 승리를 거두도록 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한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베다). 

 

  무리는 지극한 헌신과 그침 없는 찬미로 한 본성의 권능 안에 한 어좌에서 다스리시는 거룩하신 삼위일체를 찬양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이 된 이들이 지니게 된 일곱 가지 덕을 삼위일체께 돌리며(프리마시우스), 이들이 찬미를 바칠 때 거룩한 천사들과 천상의 모든 존재들도 그들 나름의 끝없는 찬미를 보탠다(오이쿠메니우스). 

 

  요한에게 이 무리가 누구인지 더 자세히 설명하고(오이쿠메니우스), 신자들이 자신들이 앞으로 받을 보상을 알게 하려고(프리마시우스)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았다”고 이야기한다. 분명 순교자들은 세례로 깨끗하게 된 육신을 자신의 피를 통해 눈부시도록 희게 하고 불멸의 빛에 합당하게 만든다(테르툴리아누스, 프리마시우스, 베다). 그러나 세례 받은 이는 모두 그리스도의 피로 죄의 더러움을 완전히 닦아 내고(오이쿠메니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내적인 품성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순교자가 되었다. 의인들의 영혼은 지혜의 자리인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사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프리마시우스),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기억한다(오이쿠메니우스).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받음으로써 그치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즐겁고 흡족한 직무를 떠맡았다(베다). 번영할 때나 역경에 처했을 때나 하느님을 경배한 그들은 의로움의 태양의 빛을 끝없이 받을 것이며 천상의 신비들을, 쉽게 얻어지는 것이나 깊이 숨겨진 것이나, 다 받게 될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하느님께 대한 이런 예배는 영에 의해 새로워지고 있는 창조계 전체에서 이루어지며, 특히 영의 선물을 간직한 이들에 의해 바쳐진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승에서 성사의 힘에 의해 유혹의 열기로부터 보호받은 그들은(티코니우스) 하느님 어좌 앞에서 한없는 축복을 누리며 모든 유혹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세례를 통해 성령의 즐거운 삶으로 인도되며(티코니우스) 하느님의 모습을 봄으로써 거룩한 가르침의 샘이 된다(베다). 부활 후에는, 영혼과 몸의 고통으로 인하여 우리가 쏟아내는 한탄과 한숨은 그칠 것이며(테르툴리아누스), 우리는 충만한 성령의 냇물을 마시며 썩지 않는 몸과 완전한 지식을 지니고 무한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30.3. 아시아 교회가 나아갈 길

  요한이 환시 속에서 본 교회는 선택된 이들의 무리였다. 이들은 이제 유다 민족 출신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묵시 7,9ㄴ) 이들이고, “큰 환난을 겪어 냈으며,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한”(묵시 7,14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두 가지 시사점을 준다. 첫째, 이제 하느님의 선택은 모든 민족에게로 열렸다. 유다인들의 편협한 선민의식은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본시 유다인들이 부르심을 받았던 것도 만민에게 하느님의 빛을 전해 주라는 보편성을 전제한 것이었다(참조: 이사 60,3).

둘째, 열려진 구원 가능성 위에 보태진 것은 진리를 위한 희생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구원의 진리는 이스라엘을 부추긴 사탄의 세력에 의해서 십자가 희생으로 이어졌지만,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어린양의 희생제물로 받으시고 영광스럽게 부활시키셨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묵시 7,14)란 진리를 위한 희생이요 구원의 보증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전통적으로 연중 가장 큰 축제로 지내던 파스카 축제일에 당신의 희생제사를 하느님께 바치셨다. 그리고 제자들과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으셨다(마태 26,28; 루카 22,20). 유다인들이 이집트에서 히브리인으로 불리며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이 노예 처지를 해방시켜 준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으로 결정적이었던 재앙이자 기적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불칼을 든 죽음의 천사가 지나가게 된 일이었다(탈출 12,7). 이 ‘지나감’이 파스카의 뜻이었으며, 히브리 노예들은 이로써 구원과 해방을 얻고 이스라엘 즉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전승 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어린양’이 되시어 피를 흘리신 것이며, 이 피로 당신 교회와 계약을 맺으신 것이다. 요한이 환시 속에서 본 선택된 무리들은 바로 이 피의 계약을 지킨 이들이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다. 요한이 내다보는 소아시아의 교회는 이제 유다 민족의 탯줄을 끊고 모든 이방인들을 향하여 나아가면서도, 우상숭배에 물들지 않고 진리를 위한 희생으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고자 하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다.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아 주교들은, 아시아의 복음화를 향한 전망 하에서 새로운 아시아 교회를 내다보고 권고한 바는 이 두 가지 시사점을 충분히 충족시켜준다. ‘자본’이라는 현대판 우상이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구조적으로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을 통찰하면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큰 환난을 겪어 냈으며,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한”(묵시 7,14ㄴ) 사람들이 되어 바야흐로 ‘어린양의 피’로 해방될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되기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헌의 메시지를 실천하려는 관점에서 묵시록을 해석하고자 하며,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따라서 해방되어야 할 백성, 즉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렇게 볼 때, 문헌 「아시아 교회」에 담긴 교황권고는 요한묵시록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메시지를 아울러 담고 있는, ‘Exodus, a Lasting Paradigm’이다.

 

30.3.1. 예수의 신성을 증거함 

  아시아 대륙의 복음화를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아시아인들에게 기여해야 할 최대의 공헌은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은 새로운 생명을 생명의 충만함을 찾고 있는 아시아의 모든 민족에게 제공하기를 바라며, 그것은 그들이 아버지와 그분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의 능력 안에서 같은 친교를 누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아시아 교회, 10항). 아시아 주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숙고하게 되면 아시아 민족들이 자신들의 희망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며, 자신들의 품위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현재 자신들이 절망을 느끼고 있는 상황도 극복할 수 있는 등 가장 어려우면서도 당면한 현안들에 대해서도 해답을 찾게 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하였다(아시아 교회, 14항). 

 

30.3.2. 성령의 도우심과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그런데 교회가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아시아 교회, 17항). 성령께서는 일찍이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선언하셨던 바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루카 4,18) 분이시다. 또한 같은 성령이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에게도 내리시어, 그들이 서로가 한마음이 되어 자기가 가진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게 하셨다(참조: 사도 2,44-45; 4,34-35). 그러므로 이러한 공동생활 양식으로 말미암아 교회 역사의 시초부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참조: 갈라 2,10), 성찬례와 함께 예수님의 사명을 계승하는 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성령강림이요 부활신앙의 증거가 되었다.

 

30.3.3. 진정성 있는 봉사와 대화

  “타 종교들에 대한 교회의 접근은 진정한 존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아시아 교회, 20항)고 할 때, 종교 간 대화는 교리와 관련된 것이기 이전에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을 함께 도우려는 대화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벗을 위해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이웃 사랑(참조: 요한 15,13)으로 진정성 있게 다가가서 토착 종교인들과 협력하여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종교인들과 가난한 이들은 과거 서양 선교사들이 전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의 신성을 비로소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선교의 진정성에 관련해서 예수님께서는 밀알의 비유로 이미 말씀해 놓으신 바가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아시아의 종교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종교의 창시자와 비슷한 성현 반열로 여길 뿐인 이유 역시,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려던 이들이 생명을 바치는 진정성과 가난한 이들을 돕는 밀알 정신을 갖추지 못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참조: 아시아 교회, 20항).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 지지하는 군중 앞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가르치셨지만 오로지 복음을 믿고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려는 이들 열두 명만 제자로 받아들이셨듯이, 교회가 아시아에 그리스도 신앙을 전함에 있어서도 교세 확보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현지의 종교인들과 시민단체들과 협력하고 연대하면서 그들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진정으로 돕는다면, 생명을 바치는 이웃 사랑에 의한 밀알 선교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이미 캘커타의 데레사 성녀가 보여준 모범이 이 선교의 선행 지표로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30.3.4. 토착화

  근세 이래 서양 선교사들이 아시아에 선교한 방식을 반성해 볼 때, 가장 절실하게 개선되어야 하는 점이 바로 이 토착화 방식에 의한 선교이다. “교회는 토착화를 통하여 교회 자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지가 되고 선교의 유효한 도구가 된다”(아시아 교회, 21항)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이 이미 서구적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의해 교리 정식이 확립되어 있음을 자각해야 하고, 아시아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윤리적 가치와 사고방식 등 아시아적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는 신학적 고찰, 전례적 양식, 사제와 수도자 및 평신도 선교사 양성 과정, 평신도 교리 교육, 전반적 영성 등에 두루 미쳐야 한다(아시아 교회, 22항). 이러한 토착화 사명을 공신력 있게 추진할 수 있는 좋은 방식은 아시아의 복음화에 진력하려는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복음적인 교회를 이룩하는 일이다. 즉,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로 그치지 말고(The Church for the Poor),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며(The Church with the Poor), 가난한 이들이 수혜자로서만이 아니라 교회의 논의구조에 공동 주체로 참여하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The Church of the Poor)로 쇄신되는 일이 토착화의 지름길이다(아시아 교회, 34항). 예수님이나 초대교회에서는 교회의 존재 이유로서 당연시 되었던 이 일이 교회 역사 2천 년 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 선교 실패와 교회 활력 침체의 주된 요인임을 아시아 주교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교들이 상기시킨 바, ‘예수의 선교’를 계승하기 위한 세 가지 표지 즉 말씀과 성찬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음을 재확인한 것으로서, 이것이 묵시록 제7장에 기록된 바 봉인되었던 두루마리에 적힌 계시 진리에 적중한다고 볼 것이다. 

 

  왜냐하면 아시아에서 태어나신 말씀이 2천 년 넘도록 아시아인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사정, 또한 그 말씀에 의한 복음이 절실히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사정 그리고 광범위한 가난이 아시아인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사정 모두가, 아시아인들에게나 아시아 교회에게나 심판적 상황이었는데 문헌 「아시아 교회」에 가득 찬 성찰과 결의로 비로소 밝혀지고 해결될 서광이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30. 두루마리의 메시지 I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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