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두루마리 봉인의 상징들(묵시 6,1-17; 8,1-9,21; 11,15-19)
요한은 어린양이 희생으로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승리하신다는 선교 경륜이 담긴, ‘어린양 환시’의 두루마리를 예수님께서 펼쳐 보이신 환시를 전해준다(6,1-9,21; 11,15-19). 그 내용은 ‘어린양’과 함께 그분께 충성을 다짐한 백성과 함께 치르실 ‘혼인 잔치’로서(묵시 19,9), 하느님께서 의인들을 박해하는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당신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신다는 ‘Exodus Paradigm’이다. 봉인된 두루마리는 모두 일곱 개인데, 각 두루마리마다 상징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부터 넷째 두루마리의 상징은 모두 말인데 그 빛깔이 제각기 다르다. 즉,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푸른 말이다. 다섯 째 두루마리는 순교자들의 외침이요, 여섯 째 두루마리는 하느님의 진노이며, 일곱 번째 두루마리는 일곱 천사에게 주어진 일곱 나팔과 향로이다. 이 두루마리는 세상 종말에 실현될 하느님의 숨은 계획에 대한 예언을 상징한다(박영식). 그래서 예수님께서 봉인된 두루마리들을 여셨을 때, 악의 세력이 하느님께서 내리실 심판의 결과로 겪게 될 재앙을 알려주는 것들이 이 각각의 상징들이다(박찬용).
예수님께서 첫 네 봉인을 뜯으실 때 네 마리 말을 시켜 모든 죄인들에게 각기 특유한 심판을 일으키게 하신다(묵시 6,1-8). 말을 탄 기수들이 난공불락으로 여겨진 로마제국을 정복하고, 전쟁과 살육이 일어나며, 기근과 생활고, 질병과 죽음 등이 상징적으로 서술된다. 다섯째 봉인을 뜯으시자 순교자들이 악한 박해자들이 정의의 심판을 받게 해 달라고 청원한다(묵시 6,9-10).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순교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며 그 뜻으로 흰 옷을 입혀 주면서 세상 종말이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위로하신다(묵시 6,11). 여섯째 봉인을 뜯으시자 요한이 본 환시는, 하느님께서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으로서 여러 재앙을 내리시는 모습이다(묵시 6,12-17). 묵시 6,9-11에서 순교자들이 청원한 바를 감안하여 하느님께서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악의 세력을 응징하시는 응답으로 보인다. 일곱째 봉인을 뜯으시자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았고(묵시 8,2), 이에 대한 환시 기록(8,6-9,21)과 연결된다. 일곱 개의 나팔이 부는 소리는 결국 묵시문학적 필치로 묘사된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적이고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묘사된 표현이다. 하지만 일곱째 봉인의 메시지가 알려주는 그 심판의 본질은 시대의 간격을 뛰어넘어 현대의 상황에도 적중하는 바가 있으니,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랑을 외면한 결과로 이기심에 사로잡혀 이웃을 멀리하고 고독과 소외를 겪는 현실, 이 자체가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박영식).
여기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신성을 체험시키고 알려주며 증거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현안 과제임을 드러난다. 2천 년 전 소아시아에서뿐만 아니라 21세기 아시아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종말의 상황에 대해서도, 창조의 전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두루마리에 적힌 이 계획은 종말에 걸맞게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 상황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악이 저지른 박해를 이겨낸 의인들과 함께 실현하는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에 대한 창조 상황이기도 해서 제7장에서는 이 창조의 공동 주역이 될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계시가 기다리고 있다.
29.1. 첫째 봉인의 상징: 흰 말(묵시 6,1-2)
봉인된 책은 죄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를 상징하는데, 어린양께서 책의 봉인을 뜯으심으로써 이 상태가 반전되기 시작한다(오이쿠메니우스). 구약성경의 예언들이 밝혀지고 종말의 일들이 알려짐에 따라, 인류가 신앙으로 초대된다(빅노리누스, 프리마시우스). 우리가 자유롭게 태어나도록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심으로써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자유로운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하였다(오이쿠메니우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아버지께로 올라가시어 성령을 보내셨고, 성령께서는 사도들과 그들의 뒤를 이은 설교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악마와 공중의 영들, 그리고 인간의 불신을 정복하기 시작하셨다(빅토리누스, 오이쿠메니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베다). 하느님의 말씀이 마치 활에서 발사된 화살처럼 사람들의 가슴을 뚫자 민족들이 그리스도께 회심하여(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믿음의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프리마시우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의 화관을 받으셨듯이(베다), 사도들도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고문을 받고 죽었을 때 승리의 화관을 받았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마찬가지로,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모든 설교자에게도 화관이 기다리고 있다(빅토리누스, 프리마시우스).
29.2. 둘째 봉인의 상징: 붉은 말(묵시 6,3-4)
그리스도께서는 악마의 유혹을 이기심으로써, 우리의 수치 또한 정복하셨고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회복시켜 주셨다. 한때 노예로 있었던 인류가 이제는 악마를 노예처럼 끊어 버릴 수 있게 되었지만(오이쿠메니우스), 악마는 여전히 악하고 잔인한 세력이며, 그에 대해 교회는 이미 주의를 받았다(프리마시우스). 악마는 땅 위에 많은 피가 흐르게 할 것인데, 그가 사악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공격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티코니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또한 악마는 불의한 이들을 부추겨 그들 사이에서도 끝없는 분쟁과 불화를 일으킬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서로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그러나 그런 분쟁을 통하여 사악한 공동체, 곧 죄 많은 인류는 산산이 찢어지고 그들의 우상 숭배는 무너질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전쟁이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빅토리누스). 이 사악한 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복음을 가르치고 퍼뜨린 이들이 순교당하고 하늘의 제단에서 제물로 바쳐지도록 허락하실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내내 교회는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남겨 주신 영원한 천상의 평화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티코니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29.3. 셋째 봉인의 상징: 검은 말(묵시 6,5-6)
인류는 의지를 함부로 사용함으로써 죄로 떨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죄에 끌리고 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슬픔 속에 살며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에서 멀리 있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교회 안에도 어둠의 일을 하며 동료들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 형제들이 있다(베다). 하느님께서는 그 벌로 지금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적이 맹위를 떨치는 시기에도 인류에게 기근을 내리신다(빅토리누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거짓 예배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우리를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려놓으셨다. 주님께서 악마를 꾸짖으시고 우리를 대신해 의로운 심판을 하셨기에 악마는 슬픔과 수치로 떨어졌다(오이쿠메니우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보다 더 큰 공로를 쌓은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그리스도의 피라는 하나의 대가로 구속되었으며(티코니우스, 베다), 모두 다 불멸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다(프리마시우스). 그러니 우리는 어둠의 행실로 우리 형제를 성나게 하지 말고(베다), 오히려 그들이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의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위로의 술과 연민의 기름을 그들에게 가져다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복음을 가르치는 일이 드물어지고 하느님 말씀을 듣기 어려워지는 때가 올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가르침을 멸시하는 이들조차도 언젠가는 하느님의 외아들의 가르침에서 기쁨을 얻게 될 가능성이 있다(오이쿠메니우스).
29.4. 넷째 봉인의 상징: 푸른 말(묵시 6,7-8)
그리스도께서 매를 맞으심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더욱 가까워졌다. 불순종과 쾌락과 죄에 이끌림으로써 저주받았던 우리가 예수의 순종과 고통으로 해방되었다(오이쿠메니우스). 그러나 이교인들과 거짓 형제들, 이단자들, 그리고 열교자들 안에서 악마는 여전히 세상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티코니우스). 악마는 이들을 통해 교회의 몸과 영혼에 전쟁을 걸어온다(티코니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그러나 선민들의 완전한 수는 이런 공격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한결같이 유지될 것이다(티코니우스). 하느님께서는 신심 깊은 이들의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이며, 불경한 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노하셔서 그들의 영혼을 삼켜 버리실 것이다(빅토리누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파멸에 책임이 있는 사악한 마귀들에게 죽음과 파멸을 내리실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자기 안에 죽음을 지니고서, 영적으로 죽은 이들을 영원한 벌로 인도하는 아리우스 같은 이단자들은 필경 그런 파멸을 운명으로 맞을 것이다(베다). 신심 깊은 이들과 불경한 자들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생겨나는 흑사병은 역사에서 보듯 실제로 인류가 경험한 바 있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29.5. 다섯째 봉인의 상징: 순교자들의 부르짖음(6,9-11)
예언자는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는 것을 본다. 이는 영혼들이 형체를 지녔으나 오직 영적인 눈에만 보임을 암시한다. 제단 아래서 쉬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피라는 열쇠로 부활 전에 낙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된 특별한 존재, 순교자들이다(테르툴리아누스). 그러나 요한이 지상의 ‘제단’ 아래서 육신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의로운 망자들을 본 것일 수도 있다(빅토리누스). 거룩한 말씀 때문에 고통받은 옛 계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채찍질당하시는 것을 보고 항의하며 부르짖는다(오이쿠메니우스). 이제 교회의 성도와 순교자들이 찬미를 바치고(베다), 옛 계약의 성도들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쉬며 희망 속에서 기다리는 것을 영 안에서 본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또한 그들은 사람들을 망치는 마귀들이 파멸하고(오이쿠메니우스), 죄의 왕국이 끝나며 자신들의 육신이 부활하기를 기원한다(프리마시우스, 베다). 그들이 자신의 의로움을 심판으로 증명해 주시기를 애원하는 것은 복수심에서가 아니라(프리마시우스, 카시오도루스, 베다) 세상의 완성을 위해서이고(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바라서인데(프리마시우스, 베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원하는 바다(테르툴리아누스). 이제 자신들이 정당했음이 육신으로 입증될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의 영혼은 표현할 길 없는 천상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프리마시우스, 베다) 성령의 위로를 받고 있다(빅토리누스). 성도들은 기다리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인내심 있으시며 징벌과 복수의 때를 미루신다(루스페의 풀겐티우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순교의 용기를 지닌 이들이 그들에게 합당한 관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며(오이쿠메니우스), 선민들의 전체 수가 완전히 채워지도록 하기 위해서다(프리마시우스). 아무도, 순교자들조차도 죄의 용서와 하느님 심판의 때를 앞당길 수 없다(키프리아누스).
29.6. 여섯째 봉인의 상징: 하느님의 진노(묵시 6,12-17)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인류의 정복자를 어좌에서 내쫓았으며,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인류는 죽음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여섯째 봉인이 뜯어지자 십자가 처형 때 일어났던 표징들이 보였다(오이쿠메니우스). 이 표징들은 그리스도의 적이 오기 전에 교회에 닥칠 박해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티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때 그리스도의 권능은 감추어지고, 진리의 가르침도 가리워진다(티코니우스). 이전에 듣도 보도 못한 시련과 박해가 닥칠 것이며(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교회는 많은 피를 흘릴 것이다(베다). 강한 듯 보였던 이들조차 덜 익은 과실이 흔들리는 나무에서 떨어지듯 교회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티코니우스). 혹심한 유혹을 경험하거나 필요한 은총을 받아 보지 못한 이들도 악마의 바람에 쓰러질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때 교회는 분별의 영에 힘입어 스스로를 숨기고 신중하게 박해를 피할 것이다(티코니우스). 예수님이 학대당하는 것을 차마 지켜보지 못했던 하늘의 천사들도(오이쿠메니우스) 믿음에서 멀어진 이들을 두고 슬퍼할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리스도의 적이 맹위를 떨치는 시대인 이 엄청난 투쟁기에는 교회에서 직책을 맡고 있는 이들과 세상의 권력자들을 비롯한 선한 이들은 도피할 것이다(티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악한 이들은 그 심술궂은 마음으로 인하여 더욱 사악해 질 것이다(티코니우스). 하지만 거만한 마귀들과 어리석어 허영에 빠진 이들은 패배하고 말 것이다. 속임수로 인류를 억압해 온 죄 많은 마귀들은 그들에게 내리는 그리스도의 벌을 피할 길을 갈구할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땅에서는 부자였으나 하늘에선 가난하고 쉽사리 불이 옮겨 붙는 나무 그루터기 같은 믿음을 지녔던 땅의 주민들도 숨을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성도들은 피난처와 보호를 교회에서 얻을 것이며(아를의 카이사리우스), 나약한 이들은 그곳에서 본보기와 충고, 격려와 기도를 통해 굳건한 이들을 보고 힘을 얻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분은 당신의 교회가 벌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중재와 하느님의 자비로 신앙 안에 굳건함을 보시게 될 것이다(베다).
29.7. 일곱째 봉인의 상징: 나팔과 향로(묵시 8,1-9.21; 11,15-19)
그리스도께서 여섯째 날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듯이, 교회는 엄청난 환의 시기를 겪은 뒤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베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오진 직전의 시기는 짧을 터인데, 일곱째 봉인이 뜯기는 것은 현세의 도성이 소멸되고(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영원한 안식이 시작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티코니우스).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일지는 천사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분께서 오실 때 모든 초자연적 권능을 지닌 존재들은 창조계의 임금이신 분의 너무나도 굉장한 영광에 놀라 침묵할 것이다.
그분의 재림으로 육화의 목적과 의도가 성취될 터인데, 그땐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이자 완전한 영광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나팔은 중요한 일을 알릴 때 사용되기에, 죽은 이들을 깨울 그 나팔이 천상 임금의 오심을 알릴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이 임금은 교회가 마치 강력한 나팔처럼 그에 관해 설파해 온 임금이시다(티코니우스). 성령을 받아 열의에 불타게 된 교회는 권능의 말씀을 전파했고, 세상의 허식과 그리스도의 적이 다스릴 나라를 예리코의 성벽처럼 짓부수어 버린다(빅토리누스, 베다).
주님의 이 영광스러운 오심은 그분께서 죄 없고 흠 없는 당신 몸을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첫 번째 육화 때에 준비되었다(티코니우스, 베다). 불을 가득 담은 향로처럼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듯이(베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아버지의 뜻을 완수할 수 있도록 당신 몸인 교회를 영으로 가득 채워 주셨다(티코니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다운 사제직에 함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눈물 젖은 기도를 기꺼운 희생 제물로 하느님께 가져다 드리고, 성도들은 자신들의 몸을 살아 있는 제물로 바침으로써 하느님께 완전한 예물을 봉헌하기 때문이다(티코니우스, 베다). 성도들의 기도는 시중드는 천사들의 협조로 더욱 향기로워진다(오이쿠메니우스). 모든 대사제는 이런 천사와 같다. 그들은 사람들의 청원을 하느님께 전해 드리고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내려오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제적 성격은 그리스도의 제단에서 순교자들이 바치는 희생에서도 드러난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29.7.1. 첫째 나팔(묵사 8,6-7)
첫째 나팔 소리가 울리자 불경한 자들이 받을 전면적인 심판에 관한 교회의 선포가 울려 퍼진다(베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 같은 이 선포는 지옥에 있는 불경한 자들을 삼켜 버릴 하느님의 분노에 대해 이야기한다(티코니우스, 베다). 이 심판은 종말이 오기 전에도 이루어지며, 야만족 침략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살육의 형태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심판이 시작되면 불경한 자들은 고통 속에서 지상에 남아 성도들이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을 보며 비탄과 깊은 슬픔에 빠질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거룩한 심판의 고통은 인간만 아니라 어떤 피조물도 피해 갈 수 없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심판을 통해 거짓 형제·이단자·열교자들을 참된 신심을 지닌 이들과 갈라놓으시어 당신께 속한 이들과 악마에게 속한 자들이 구별되게 하실 것이다(티코니우스).
29.7.2. 둘째 나팔(묵시 8,8-9)
둘째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악마가 하늘에서 세상의 ‘바다’로 던져지는 것이 보인다(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악마는 그곳에서 인간들에게 하느님을 적대하는 육의 지혜에서 오는 영적인 죽음을 초래함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파괴한다(프리마시우스, 베다). 그러한 지혜는 나아가 삼위일체를 모독한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죽음을 담고 있는 쓸모없는 가르침은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영적인 죽음을 옮긴다(티코니우스). 그러나 많은 이가 자신의 죄로 인하여 바닷물처럼 짜고 쓴 세상의 ‘바다’에서 더러워졌으며,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살면서 저지른 짓을 두고 회한에 빠지나 소용이 없다. 이 환시는 땅의 일부인 바다가 지금은 노예 상태로 묶여 있으나 부패로부터 해방되고 정화되어 새로워질 것임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오이쿠메니우스).
29.7.3. 셋째 나팔(묵시 8,10-11)
셋째 나팔이 울리자, 악마가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티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악마는 쾌락을 통해 사람들에게 파멸을 가져오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건강하고 세상과 더불어 유죄판결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들과 영적인 삶을 사는 교회 안의 사람들도 때로은 별처럼 자신의 지위에서 떨어지고 동물처럼 세속적인 것들에 기운다(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이단자들도 악마와 마찬가지로 교회를 떠나 성경의 강물을 오염시키고 성경의 가르침을 사악하게 모방함으로써 많은 이에게 쓴 맛을 주입하고 타락하게 만든다(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베다). 사악한 가르침이 그것을 듣는 이들을 쓴맛이 들게 하는 것처럼 재세례에 사용되는 물은 그것에 몸을 담근 이들을 죽은 이로 만든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마지막으로, 나오미가 사나운 팔자 때문에 ‘마라’(‘쓰라리게 하다’라는 뜻)로 불렸듯이, 죄인들도 영광 중에 있는 성도들을 볼 때 그처럼 쓰라린 신세가 될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29.7.4. 넷째 나팔(묵시 8,12-13)
넷째 나팔이 울리자, 교회는 타격을 받아 어두워졌다(티코니우스, 베다). 교회는 별처럼 빛나지만, 변절한 거짓 형제들에 의해 어두워지기 때문이다(베다). 마찬가지로, 악마의 사람들은 죄로 넘겨질 때 어두워진다(티코니우스). 그러나 하느님은 선하셔서 세상 종말 때도 완전한 파멸을 가져오시기 전에 모든 이를 회개로 부르시고자 당신의 심판을 미루실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세속적인 것들을 경멸하는 교회는 현세에서도 하늘에 살며(프리마시우스), 교회의 설교자들을 통해 이단들과 그리스도의 적, 그리고 다가올 종말의 재난들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이 널리 선포된다(티코니우스, 베다). 성령은 일부 사람들만이라도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이런 선포를 통해 임박한 분노에 대해 경고하신다(빅토리누스). 하늘의 천사들도 하느님을 따라, 땅에서 고통을 겪는 이들, 특히 그 고통이 자신의 회개를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슬픔과 자비의 눈으로 바라본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29.7.5. 다섯째 나팔(묵시 9,1-12)
다섯째 나팔이 울리자 별똥별처럼 반짝이는 한 천사가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 천사는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셨을 때 묶어 놓은 사악한 악마들을 구렁에서 꺼내 주는데, 이는 그들이 영원한 저주를 받기 전에 그들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은 악마와, 이단과 불경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그의 추종자들을 다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베다).
악마가 자기 가슴의 구렁과 추종자들 가슴의 구렁을 열면 그들의 죄가 연기처럼 교회의 신앙이라는 해와 성도들의 의로움이라는 해를 어둡게 하여, 성도들 가운데 일부도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된다(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구렁에 던져진 이들은 반드시 벌로 어둠 속에 들 것인데, 그들이 더 이상 대기와 해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온갖 종류의 사악한 힘들이 악마와 그 추종자들과 함께 메뚜기 떼처럼 날아다니며 인류를 해치도록 풀려난다(티코니우스). 이단자들 또한 높이 올라가고자 하지만 곧 흩어져 사라지고 마는 연기와 같다(프리마시우스). 이런 죄인들은 영혼이 벌레의 먹이처럼 끊임없이 갉아먹히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탄의 군대가 선민들을 해치도록 두지 않으실 터인데, 선민에는 아직 어린 이들과 지금 자라고 있는 이들, 성숙한 이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프리마시우스). 그렇지만 교회는 현세 내내 영원한 축복보다 세속적인 것을 더 좋아하게 만드는 유혹과 이단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베다). 이 공격에서 악마는 꼬리로 독을 쏘는 전갈 같은 것인데, 그가 죄를 통해 독을 주입하여 많은 이가 자신의 욕망에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겸손되이 참회로 인도될 것이며(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세상에 대해 죽기를 간구할 것이다(티코니우스).
박해와 이단의 공격은 갑작스러울 것이다(티코니우스). 이단자들은 진리인 척 가장하고 사악한 교의를 퍼뜨리며 교회를 흉내 내면서 그들의 입과 방탕한 윤리로 줄곧 파괴를 자행할 것이다(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이단자들은 전쟁터의 말처럼 날뛰며,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가르침의 설교자로서 덧없는 명성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 많은 이를 파멸시킬 것이다(프리마시우스). 이런 모든 일에서 이단자들은, 우리에게 전쟁을 걸어오고 사치와 음란에 대한 욕망으로 우리를 정복하려는 사악한 마귀들과 같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단자들은 독이 든 교의를 통해 거짓을 배가하고 더욱더 많은 사람을 속여 넘긴다(티코니우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감추어져 있으나 의로운 심판을 통해 그런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지배자 임금을 주신다(프리마시우스). 자기를 따르는 이들을 파멸시키는 악마는 이런 까닭에 파괴자 또는 몰살자로 불린다(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종말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의 치명적인 결과를 보게 될 터인데, 악의 종말은 영혼의 죽음이기 때문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교회는 죄인들이 현세의 벌로 정화되어 영원한 고통을 피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그러나 현세에서 엄한 벌을 받은 죄인들은 나중에 덜 심한 벌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오이쿠메니우스). 어쨌든 하느님께서는 환난의 쓰라림을 통해 죄인들이 자기 고통의 원인인 죄를 미워하게 만드신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29.7.6. 여섯째 나팔(묵시 9,13-21)
여섯째 나팔 소리와 함께 세상의 여섯째 시대가 시작된다. 그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적과 그의 거짓말,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 대항해 설교자들을 내보낼 것이다(티코니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적이 하는 말과 명령을 경멸하며 그리스도의 적을 따르려 배교한 자들과 관계를 끊을 것이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이 시기는 극심한 시련의 때가 될 터인데, 하느님께서 사악한 자들이 교회를 박해하도록 그들을 풀어 주라고 명령하실 것이기 때문이다(티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이 사람들은 사탄의 화신이 되어 그의 뜻을 수행할 것이며, 에사우가 야곱을 박해했듯이 교회를 공격할 것이다(티코니우스). 악마와 그의 사악한 사자들은 교회를 박해하고 인류에게 죽음을 가할 준비가 늘 되어 있고 그러기를 열망하기 때문이다(프리마시우스, 베다). 이 사악한 무리는 불경한 임금들과 세속적인 고위 성직자들이 조장하는 이단을 이용하여 박해할 터인데, 악마는 이런 것들로만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이런 이단자들이 늘어날 것이며, 이들은 자기들한테 교회의 성사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부정한 관계를 맺어 남자와 결합하는 첩처럼 그들은 오직 힘을 행사하고 인간의 찬사만을 듣기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안에 벌을 지니고 있다(프리마시우스). 거짓말하는 이단자들이 악마의 소속이듯이, 이교인들은 사악하고 믿지 않으므로 악마의 소속이다. 그들 또한 죽을 것이다(베다).
종말에 천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천사가 사악한 자들을 벌하기 위해 복된 하느님 면전을 떠나 땅으로 파견될 것이다. 이 응징하는 천사들은 무시무시한 존재이며 그들이 임무를 수행할 때면 아무도 이겨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를 사는 동안 우리 죄를 고백하고 진심으로 참회하며 선으로 돌아서야 한다. 미래의 삶에서는 신중한 선택을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는 자신이 산 삶에 대한 응보를 받을 뿐이다(오이쿠메니우스). 또한 그때는 그리스도의 적과 마귀의 무리들도 하느님의 명령으로 민족들을 괴롭히기 위해 풀려날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서로를 공격하기도 할 터인데, 이 싸움에서 어떤 이들은 잘 익은 밀처럼 성실하고 자격이 있음이 드러나고 어떤 이들은 겨처럼 사악하며 참회의 마음이 없음이 드러나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마귀들은 재빠르며, 사악한 인간들을 통해 자신들의 더러운 일을 수행할 것인데, 사악한 자들은 사악한 기수에게 말처럼 부림을 당하고 이리저리 이끌린다. 자기 마음의 열매들이 마귀의 공격에 의해 사라지도록 둔 죄인들은 하느님의 우주적인 분노를 자초하는 자들이다. 거룩한 분노는 우상 숭배, 살인, 간음, 도둑질을 저질러 내리는 것이다. 이런 악덕들이 민족들에게 덮칠 때의 끔찍함은 야만인들이 도시를 불 질러 파괴하고 살육을 자행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29.7.7. 일곱째 나팔(묵시 11,15-18)
일곱째 나팔은 심판 날이 왔음을, 영원한 안식일이 왔으며 참된 임금이 지배하게 되었음을 알린다(베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임금이시고 만물을 만드신 분이시지만, 이제 지상에서 사람이나 마귀에 의한 지배가 모두 끝났기에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하느님께서 임금이심을 선포한다(오이쿠메니우스).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오셨을 때, 민족들은 격노했고 사악한 자들은 반항했다. 그러나 일곱째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느님께서 성도들에게는 그들의 덕에 따라, 그리고 사악한 자들에게는 그들의 행실에 따라 응보를 내리시는 거룩한 분노의 날이 왔다(티코니우스, 베다). 지금까지 하느님께서는 믿지 않는 민족들을 인내로써 참아 주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친절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심판 날에 이들과 작은 성도들, 그리고 뛰어난 성도들에게 상벌이 내린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일곱째 나팔이 울리자, 교회와 천상의 무리가 바치는, 거룩한 삼위를 끝없이 찬미하는 소리가 들린다(오이코메니우스, 티코니우스).
29.8. 일곱 두루마리의 상징이 뜻하는 의미
우리는 요한묵시록에 담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교부들의 주해를 기본 바탕으로 삼고, 성서학자들(박찬용, 박영식)의 연구 자료를 참고하여 묵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문헌 자료와 병행하여 초대교회 시절의 역사적이고 사상적인 상황도 참고함으로써 입체적인 묵상이 되고자 하였다. 또한 이 묵시록이 공관 복음서의 종말 설교를 알고 있으며, 요한 서간을 저술한 후에 그리고 요한 복음서를 저술하기에 앞서 저술된 점도 고려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 서간에서 강조된 강생의 신비는 물론, 요한 복음서의 기본 메시지인 창조 신앙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당연히 고려하고 있다.
창조의 현상은 종말이요, 종말의 본질은 창조이다. 빛이 비치어야 어둠이 사라지듯이,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교회를 창조하시는 현상 또한 악이 선을 정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가지의 표징으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는데, 이를 믿는 이들이 소아시아에서 부활신앙과 공동생활 양식으로 초대교회를 이루자 안팎의 어둠이 몰려왔다. 초대교회의 공동체들은 에페소를 위시해서 그 주변의 여러 공동체들이 세워졌다. 또한 외부적인 어둠으로는 참이스라엘을 자처한 그리스도인들을 시기한 해외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밀고와 황제숭배를 강요한 로마제국의 박해가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유다인으로서 개종한 이들이 물든 입양설 및 가현설 등의 이단 사상과 그리스인으로서 개종한 이들이 물든 영지주의 이단 사상이 있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안팎의 시련을 겪으며 위에 언급한 대로, 봉인되었던 일곱 두루마리를 뜯어 펼치신 예수님으로부터 이 시련들이 신앙을 정화시키기 위한 종말의 과정이라는 계시를 받아서 기록하였다.
로마제국 시대에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는 적군의 진영을 돌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최신식 무장이었다. 사도 요한은 마치 4륜전차가 로마제국의 진영으로 돌격하여 무너뜨리듯이 말씀이 지닌 힘이 박해세력의 사악함을 드러내리라는 환시를 보고 기록해 놓았다. 그래서 마지막 봉인의 상징으로서 등장한 나팔 소리가 이 메시지를 모든 희생자들과 신자들에게 알리는 환시까지 기록해 놓았다. 하지만 악의 어둠은 선의 빛이 비치어 올 때에만 사라진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믿는 하느님께 대적하는 것이었으므로, 로마제국이 가하는 박해를 받으며 이단주의자들이 초래하는 내분도 겪어야 했던 초대교회 시절에 사도 요한이 받은 환시에서도 초점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제 요한묵시록 6, 8, 9장과 11장에 나뉘어 기록된 본문 즉 요한이 받은 두루마리에 대해 교부들이 주해한 내용과 성서학자들이 주석한 내용을 기반으로 오늘날의 현실에 대해 묵상해 보기로 한다. 그리스도교 제삼천년기를 맞이한 아시아 교회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시대가 달라졌고 국제정세도 달라졌지만 예수님의 신성이 관건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
아시아 주교들이 숙고한 이 대륙의 현실은 이러하다. 아시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대륙이고, 세계 인구의 3분의 2 가량이 거주하고 있는 땅이며, 그 가운데 중국과 인도는 지구 전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인류 문명들이 아시아에서 태동되었으며,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래된 종교들이 출현하였고, 영적인 다양한 문화가 숨쉬는 대륙이 아시아이다. 이미 아시아에서는 문명과 종교와 문화의 힘으로 서로 공존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지혜와 윤리를 갖춘 아시아적 정신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들 종교를 창시한 성현들은 신격화되어 있으며 또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러 온 서양 선교사들이 예수를 서양인의 이미지로 소개한 까닭에 정작 그리스도교가 전하고자 하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갈망이 없다(아시아 교회, 6항).
경제 사회적 현실과 관련하여 아시아의 가장 큰 특징은 엄청나게 가난한 이들이 많다는 것과 국가 간에나 국내적으로 빈부격차가 갈수록 커져가고 있어서 좀처럼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시아 주교들은,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기울인 그 사랑과 헌신적인 돌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가 증거한 생명 봉사의 모범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있다(아시아 교회, 7항).
정치적 현실도 매우 다양해서, 아시아 대륙에는 민주주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신정정치체제를 보유한 국가도 있고, 군사독재정부가 통치하는 국가도 있으며, 무신론적 사상체계가 지배적인 국가들도 많다. 부정부패가 만연되고 있으며, 불공정한 사회구조를 개혁하려는 요구가 증대되고 있다(아시아 교회, 8항).
초대교회 이래로 그리스도 교회가 기울인 주된 복음화 노력은 서방으로 향했으나, 아시아 대륙을 복음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대와 근세 이래로 아시아를 복음화시키려던 선교 노력은 대체로 실패하였다. 특히 18세기 이후에 동아시아에서는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서 많은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치명하였다. 그 까닭은 아시아에 전통적으로 뿌리를 내려온 종교들이 구원론 체계를 완비하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교의 선교 노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또한 근세 이래로 아시아에 선교하러 온 서양 선교사들은 마테오리치와 같은 일부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서양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전하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예수님도 서양의 성현 정도로 비치어졌다. 이러한 서양식 선교방식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식민정책과 맞물려 아시아적 가치를 보전하려던 현지 정부와 지식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성찰과 반성 위에서 아시아의 주교들은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가 수행한 선교 방식이야말로 아시아에 꼭 필요하면서도 예수의 신성을 애덕으로 증거했다는 점에서 탁월한 선행 지표가 된다고 보았다. 이를 근거로 판단해 보건대, 종교적 제국주의 방식으로 선교하려던 노력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며 이웃 사랑의 투신으로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려는 노력이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과 가톨릭 사회교리에 따르면, 이러한 이웃 사랑의 선교 방식은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목표로 나타난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일이 아시아 복음화에 있어서 최대의 과제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유일신을 알고 또 믿어 왔으나 정작 그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헀던 이스라엘에서 당면하셨던 상황 및 과제와 동일하다. 또한 다신교 풍습과 황제숭배 정책으로 박해받으며 동시에 내부의 이단사상에도 휘둘려야 했던 상황 및 과제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성과 신앙을 회복하고 알려주는 과제가 아시아에서 추구되어야 할 Exodus Paradigm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29. 두루마리 봉인의 상징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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