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27. 천상 전례

 

[요한복음] 27. 천상 전례

 

저녁노을의 글

2022-12-13 19:17:53 조회(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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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천상 전례(묵시 4,1-11)

  요한은 육신을 지닌 채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 곧 교회로 들어가는 문을 여시는 것을 본다(티코니우스). 그곳에서, 구약성경을 여는 신약성경에 관한 설교가 이루어지고(빅토리누스), 신자들 또한 영적으로 배우고 그들의 마음이 성령의 신비들을 향하도록 그리로 올라오라는 초대를 받는다(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영에 사로잡힌 요한은 심판의 어좌에 앉아 계신 위엄 가득한 주님을 보는데, 주님은 벽옥과 홍옥 같으시다. 벽옥의 빛나는 초록색은 식물을 통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기르시는,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본성(오이쿠메니우스)과 그리스도의 죄 없는 육신의 신적인 권능을 나타낸다(아프링기우스). 홍옥의 불처럼 진한 붉은 색은 엄격히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무시무시함(오이쿠메니우스)과 순수하고 겸손한 동정녀로부터 받은 그리스도의 깨끗한 육신(아프링기우스)을 나타낸다. 이 두 가지 색은 하느님의 두 가지 심판, 곧 예전에 일어난 물에 의한 심판과 종말 때 일어날 불에 의한 심판의 색을 나타내는데(빅토리누스), 홍옥보다 벽옥이 먼저 언급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본성상 은혜롭고 온화하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를 바라시며, 오직 우리 죄 때문에 주님으로서 우리를 엄격히 대하심을 나타낸다(오이쿠메니우스).

 

  어좌 둘레에는 취옥처럼 초록색인 무지개가 있다. 이 무지개가 자연의 무지개처럼 여러 색이 아니고 단 한 가지 색인 것은 천사들의 무리가 주님의 선하신 행실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시사한다(오이쿠메니우스). 주님은 당신께 다가간 성도들의 영혼에 빛을 비추는 태양이시다(프리마시우스). 어좌 둘레에는 또한 열두 성조와 열두 사도가 온 교회를 대표하여 앉아 있는데(티코니우스, 빅토리누스, 아프링기우스), 하느님의 거룩한 가르침이 그들을 통하여 발설되었기 때문이다(아프링기우스). 그래서 이제 교회의 지도자들과 일반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어좌에 앉도록 불리는데, 교회는 그분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 안에 앉아서 열두 지파를 심판한다(티코니우스). 스물네 원로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많은 성도를 뜻하는 존재이기도 하다(오이쿠메니우스).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어좌에서 시작되어, 마치 번개처럼 마음을 밝혀 주고 천둥처럼 영적인 귀에 내려앉는 설교자들의 목소리와 표징의 기적을 통하여 퍼져 나간다(프리마시우스, 아프링기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어좌 앞에 유리 바다가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수정처럼 순수한 거룩한 영의 무리에게 둘러싸여 계시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또한 어좌 앞에는 세례 때 일곱 가지 선물을 주시는 성령이 계시다(프리마시우스). 세례는 매끈한 바다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순수함과 의로움이라는 확고한 선물을 주기 때문이다(빅토리누스, 아프링기우스). 하느님 면전에 있는 이 바다에서 세례를 받지 않는 한, 사람은 파멸하게 되어 있다(프리마시우스). 

 

  그리고 어좌 주위에는 사자와 황소, 사람, 독수리 같이 생긴 네 생물이 있다. 이 생물들은 육화하신 하느님 아들의 섭리, 곧 아버지로부터 나온 그분의 거룩한 기원(起源), 예언의 영이 예고한 그분의 오심, 다윗의 후손인 그분께서 임금의 혈통이심과 그 권위, 그리고 그분의 사제다운 희생적 죽음을 선포하는 네 복음서를 나타낸다(이레네우스, 빅토리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프링기우스). 교회도 이 네 생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며 하늘 높은 곳으로 가게 되어 있는 교회도 임금의 고귀함과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겸손한 연약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프리마시우스). 네 생물은 하느님의 섭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섭리는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며 모든 피조물을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네 생물에게는 저마다 날개가 여섯 개씩 달려 있는데, 이는 구약성경이 신약성경을 통해 날아올랐고(빅토리누스), 이제 교회가 두 성경이라는 날개에 의해 현세적 애착 저 위로 들어 올려졌기 때문이다(티코니우스). 이 생물들은 끊임없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하고 외치는데, 이는 하나이며 나뉘지 않는 삼위일체(아타나시우스)와 만물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그리스도(루피누스)를 쉼 없이 찬미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교회도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며(프리마시우스), 신자들은 이생에서 교회의 삼성송(三聖誦)을 통해 장차 영광을 누리기 위한 의무를 배운다(테르툴리아누스). 

 

  끝으로 요한은 원로들이 어좌 앞에 엎드리는 것을 본다. 교회는 자신의 모든 순수함과 고귀함을 오직 하느님께 돌리기 때문이다(프리마시우스). 또한 교회는 창조계에서 하느님의 숨겨진 지혜를 알아보고(티코니우스),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했음을 알기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크게 기뻐한다(빅토리누스). 

 

  사도 요한은 묵시록 제4장에서 천상 전례에 대해 쓰고 있다. 그가 이 환시를 본 배경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소아시아 교회의 신자들이 다신교 풍습과 황제숭배를 강요하고 있던 로마제국으로부터 당한 박해의 상황이었다. 자신도 파트모스 섬에 갇혀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는 처지에서 그는 신앙 진리를 증거하는 이러한 희생이 지니는 영적인 가치에 대해 환시를 보았다. 이러한 희생은 그 자체가 값진 제물이고, 하느님께 바쳐진 제사로 이어진다. ‘어좌’(御座), ‘벽옥과 홍옥’, ‘흰옷’, ‘금관’ 등은 신앙인들이 당하는 박해와 바치는 희생을 제사로 받으시는 하느님과 천상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들로서, 성령을 상징하는 ‘하느님의 일곱 영’이 어두운 박해 상황을 하늘에서 ‘일곱 횃불’을 밝히고 면밀히 지켜보고 계심을 요한은 환시로 보았다. ‘유리 바다’는 솔로몬이 왕궁을 지을 때 만든, 어마어마하게 큰 바다 모형을 연상시킨다(1열왕 7,23-26). 천상성전은 지상왕궁보다 더 화려하다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신앙인들의 값진 희생을 통하여 증거한 가치는 진리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유래된 것이다. 복음은 네 복음사가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요한은 자신도 복음서를 구상하고 있는 처지에서 그 가치를 익히 알고 있으며, 이레네우스를 비롯한 여러 교부들이 증언하다시피, 이를 네 가지 상징적인 생물로 보았다. 이 네 생물이 어좌 둘레에 앉아 있는 스물 네 명의 원로들보다 더 어좌에 가까이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어좌 둘레에 있는 이들보다 하느님의 주권에 더 가까이 참여한다는 뜻으로서(박영식) 복음서가 증언하는 진리의 품격을 말해준다. 

 

  이레네우스를 비롯한 교부들의 주해에 따르면, 천상전례를 묘사해 주는 네 생물은 네 복음서를 뜻한다. 사자는 날쌘 짐승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역동적인 메시아로 묘사하고 있는 마르코 복음서를 뜻한다. 황소는 인간에게 친숙하여 그 당시에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제사의 제물로 쓰이던 짐승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희생 봉헌을 강조한 마태오 복음서를 뜻한다. 사람은 유다인 선교를 넘어 이방인 선교를 강조함으로써 인류 전체에게로 복음이 퍼져나가기를 지향한 루카 복음서를 뜻한다. 그리고 마지막 생물인 독수리는 아주 높은 창공에서 지상의 먹이를 꿰뚫어보며 날쌘 동작으로 창공을 날아다니는 날짐승으로서, 향후 요한이 쓰고자 작정하고 있는 요한 복음서에서 요한이 마치 독수리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진리를 꿰뚫어보고 유다이즘과 영지주의 등 온갖 이단 사이에서 자유자재로 진리를 기록할 것을 뜻한다. 

 

  교부들의 주해와 성서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좀더 이 천상 전례 본문의 뜻을 묵상해 보자. 아시아 대륙에는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연륜을 지닌 고등 종교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들 종교는 제각기 진리를 담고 있다고 자처하는 경전들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종교들은 훌륭한 성현으로서 각 종교를 창시한 인물들의 깨달음과 고상한 사색을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그 성현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반열이지 하느님은 아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다르다. 이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으로 계시로 기록해 놓은 경전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복음화에 있어서는 복음서들이 담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이 더욱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서도 복음적 가치에 따른 선교 활동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이 결의안이 교황권고로 나오는 동안에 다듬어지고 한 번 걸러진 표현으로서 에둘러 설명하는 내용이 여러 군데에 나온다. 즉,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가 그곳에 존재하면서 수많은 사도적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교회는 여러 지역에서 여전히 아시아와는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사실 대중의 마음속에 교회는 자주 식민지 세력과 연합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아시아 교회, 9항)든가, “많은 아시아인들이 예수님을, 그분께서 아시아 땅에서 태어나셨음에도 그분을 아시아인이 아니라 오히려 서양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역설이다. 서양 선교사들의 복음 선포가 자기 출신지의 문화에 깊이 영향 받았음은 불가피한 일”(아시아 교회, 20항)이었다고 변호하는 내용 등이 그렇다. 어쨌든 이로써 근세 이래의 정복주의적 선교, 유럽 교회를 모델로 한 부식 선교, 종교적 제국주의를 연상시키는 교세신장 선교 행태는 분명히 포기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순교 정신으로 계승해야 할 복음화 과업은 박해가 종식된 평화적 상황에서 개인들의 능력과 교회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토착화 실현과 공동선 증진의 노력으로 이어진다. ‘예수의 선교’로 본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려는 희생이 또 다른 천상 전례로 봉헌될 것이다. 

 

  박해받던 상황에서 성전 건물을 지을 수 없던 처지라서 변변한 전례를 올릴 수 없었던 요한이 전례적이고 천상적이며 복음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천상 전례’에 관한 환시를 보았음을 감안하면,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서는 묵상의 진도를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시절 소아시아 교회들이 받은 박해는 황제숭배를 강요하던 로마제국에 의해 벌어진 것이지만, 근세 이래 동아시아 교회들이 받은 박해는 전통적인 조상공경으로 행해지던 제사를 우상숭배로 단죄한 선교사들과 교황청이 내린 제사금지령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교회가 받은 박해는 현지 정부가 아니라 선교사들과 교황청이 자초하였다. 이것이 ‘전례 논쟁’(1742~1939)이었다. 그래서 아시아 주교들은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아시아적 가치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전례가 토착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아시아 교회, 21-22항). 아시아 복음화 과업에 있어서 요청되는 토착화 작업, 그 중에서도 전례의 토착화 작업에 있어서는 이 같은 역사적 선교의 전철을 밟지 않고 아시아 종교들과 문화에 대한 이해와 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27. 천상 전례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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