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묵시 1,1-9)
하느님의 아들이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받은 것들을 성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을 ‘종’이라 부르심으로써 당신께서 그들의 창조주이심을 일깨우신다(오이쿠메니우스). 그리스도의 계시는 인간의 지각으로는 알 수 없는 천상의 비밀을 드러내 보여준다(아프링기우스). 묵시록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삶이 완성에 이르는 종말까지의 과정을 알려 주신다(베다). 요한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실상 모든 시대 모든 교회 앞으로 썼다는 뜻이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현세의 삶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아프링기우스). 이 교회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성령에 의해 자랑스러운 인류에게 전해진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요한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낸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일곱 영은 그리스도의 대행자들인 일곱 천사다(오이쿠메니우스). 일곱 영은 일곱 가지 은총을 내리시는 성령을 뜻한다(아프링기우스).
또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들에 인사를 전하기도 하는데, 그리스도는 당신의 인성으로 당신의 신성을 성실하게 증언하신 분이며 당신의 피로 우리 죄를 씻어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아프링기우스). 그리스도교의 순교자들은 이 성실한 증언을 증거하는 이들이다(에우세비우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의 맏이로서 죽음을 무너뜨리셨고, 우리 구원의 원천이자 본보기가 되셨다(이레네우스, 아타나시우스). 그리스도께서는 맏이로서 육화 이전에 살았던 이들에게까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주셨으며(베다), 모든 이가 부활하는 문을 여셨다(오이쿠네미우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와 같은 육신으로 다시 오시며(루스페의 풀겐티우스), 그때 ‘구름’으로 불리는 당신의 천사들이 함께 올 것이다(오이쿠네미우스).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알파요 오메가”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당신께서 창조주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종말에 만물이 당신 안에서 태초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테르툴리아누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가리켜 ‘전능하다’고 하신 것은 당신께서 아버지와 더불어 한 분 하느님이심을 뜻한다(아타나시우스). 요한이 계시를 본 때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세(아프링기우스)였거나 도미티아누스 시대(베다)였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서를 쓰기 전에 이 요한묵시록을 썼음을 감안하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그 선재성과 초월성에 대한 확신은 서간을 쓰면서 사색하는 과정을 거친 후 이 요한묵시록 서문에서부터 분명히 나타났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묵시 1,1ㄱ)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서문이 그 근거이다.
그래서 장엄한 첫 머리에 이어 이렇게 기록되었다: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묵시 1,1ㄴ). 무릇 계시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진리이다. 선재성과 초월성은 당연히 하느님께만 속한 고유한 속성이다. 또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당연히 알려져야 하고 또 실현될 진리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묵시 1,4ㄱ) 하는 취지의 말은 현대의 모든 교회에 보내는 말이며 특히 아시아 교회에 보내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시아 대륙은 말씀이 태어나셨고 초대교회가 자리잡은 곳이었지만, 아직도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또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묵시 1,4ㄴ- 5) 하는 요한의 인사말은 오늘날 아시아 교회에게는 여전히 절실히 들리는 소망스런 인사말인 것이다.
25.2. 요한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다(묵시 1,10-20)
인간의 본성은 나약하지만 인간인 요한은 하느님의 신비를 보도록 들어 올려졌다(아프링기우스). 그는 성령 안에서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이 일곱 교회는 하나인 보편 교회를 나타내며, 이 교회의 이름들은 세상 종말까지 교회 안에서 전개될 진리와 오류의 싸움을 신비적으로 시사한다(빅토리누스, 아프링기우스). 요한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낸다(이레네우스). 그리스도께서 일곱 등잔대 한가운데를 걸으시는 것은 그분께서 빛이시며 교회의 빛은 그 빛에 의존하기 때문이다(아프링기우스). 그래서 교회들은 빛이 아니라 등잔대로 불린다(오이쿠메니우스).
그리스도를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라고 한 것은 그분께서 지금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시어 성령과 결합하셨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게다가 이 말씀엔 그분의 두 본성이 암시되어 있으며(오이쿠메니우스),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가 암시되어 있다(프리마시우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육신을 옷처럼 입고 계시며(빅토리누스) 가슴에 띠를 두르고 계신데, 이는 두 계약(아프링기우스), 곧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양분인 두 성경을 뜻한다. 띠를 허리가 아니라 가슴에 두르신 까닭은 복음이 율법의 계명들을 심화하기 때문이며(히에로니무스), 대사제이신 분의 자비가 하느님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때문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리스도의 머리가 흰 것은 하느님께서 그분의 머리이심을 나타내며(빅토리누스), 그리스도께서 순결하고 자비로우시다는 것(아프링기우스)과 복음의 신비는 역사가 깊음을 나타낸다(오이쿠메니우스). 흰 머리털은 그리스도의 양인 새로 세례받은 이들을 뜻하며, 눈처럼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뜻하기도 한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그리스도의 발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빅토리아누스)을, 또는 신적인 본성에 의해 정련된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낸다(아프링기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불에 의해 정련된 발은 또한 환난으로 시련받을 종말의 교회를 가리키기도 한다(베다).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큰 물소리 같은 것은 하느님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시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기 때문이다(이레네우스, 오이쿠메니우스). 그분의 입에서 나온 칼은 율법과 복음(빅토리누스), 성령(루스페의 풀겐티우스), 거룩한 가르침의 문자와 영(히에로니무스), 심판(오이쿠메니우스)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그리스도의 얼굴이 태양에 비유되는 것은 그분께서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빅토리누스). 그리스도와 하나 된 교회 역시 태양처럼 빛날 것이다(베다).
그리스도를 보자 요한은 경외심과 겸손한 마음에 엎드렸다(아프링기우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를 일으키셨는데, 그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돌아가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일곱 별은 종말까지 존재할 교회를 나타내며(아프링기우스), 등잔대는 한결같은 믿음과 가르침을 통하여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교회를 뜻한다(이레네우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보여주시는 계시를 받은 요한은 이를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전하라는 소명을 동시에 받았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묵시 1,11ㄴ). 그러므로 요한이 받아서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일곱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즉, 이 계시가 겨냥하고 있는 본래의 수신인은 ‘교회’라는 뜻이다.
일곱 교회가 소아시아에서 처한 상황에 대해서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신앙 공동체를 이어 받은 초대교회였다. 역사성으로 볼 때 첫 교회로서 전체 교회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거니와, 또한 의미상으로 볼 때에도 ‘일곱’은 칠진법의 완전수이므로 일곱 교회란 ‘모든’ 교회를 뜻한다. 따라서 요한묵시록은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모든 교회에 보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계시이다(아프링기우스, 박영식).
일찍이 요한의 동료인 마태오는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시절에 ‘교회의 복음서’를 썼다. 마르코가 먼저 복음서를 쓰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알아야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다는 취지를 알렸기 때문에, 마르코를 이어 받아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에서 만날 수 있는 길을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주요한 가르침을 다섯 설교에 모아서 소개하였다. 산상설교(마태 5-7장), 파견설교(마태 10장), 비유설교(마태 13장), 공동체설교(마태 18장), 종말설교(마태 24-25장)가 그것이다.
이제 요한은 마태오의 종말설교를 이어받고자 하였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시기에나 또는 알 수 있던 시기에 생겨난 유다 묵시문학에서 환난과 박해를 물리적인 의미로 세상의 종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비현실적이고 비계시적인 묵시적 종말 이해에 대하여 요한은 본격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묵시문학을 전개하기로 하고 요한묵시록을 썼다. 따라서 당연히 요한묵시록은 마태오가 보도한 예수님의 종말 이해를 반영한다.
소아시아의 초대교회에서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종말과도 같이 보이는 고난을 겪고 있지만, 이 종말은 세상의 끝이 아니며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바야흐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임을 설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점은 오늘날의 신앙 현실에서도 대단히 민감한 주제이다. 종말이나 박해에 관한 묵시록의 말씀을, 물리적 말세로 부풀려 위협과 공포를 자아내어 사람들을 현혹시키려는 이단사상가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라 명성을 얻어 조직을 키워서 현세의 이익을 탐하는 데 있다. 성경 안에서도 유난히 이 요한묵시록으로써 종교적 사기를 치는 자들이 많다.
하지만 마태오에게서도 요한에게서도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공동체였다. 박해를 받는 초대교회 시절에 번듯한 건물 하나 없어도 그들의 교회의식은 살아있었다. 사도들에게서도 신자들에게서도 교회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었던 것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25. 요한묵시록 서문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