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23. 요한의 권고: 사목 서간

[요한복음] 23. 요한의 권고: 사목 서간

 

저녁노을의 글

2022-11-28 18:07:37 조회(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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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이 저술한 복음서, 서간, 묵시록을 합쳐서 요한계 문헌이라고 부른다. 요한은 예루살렘에 머물며 아직 소아시아에 가기 전에, 바오로의 뒤를 이어 에페소 공동체를 사목하던 티모테오로부터 이단 신앙인들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려고 부탁을 받고 100년경에 서간 세 통을 써 보냈다. 그래서 교회 원로로서 초빙되어 간 요한이 요한계 문헌에서 제일 먼저 쓴 글이다. 

 

23.1. 요한 서간의 배경

  요한의 서간이 쓰여진 배경은 이러하였다(참조: 정양모, ‘요한서간집 해제’,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요한복음에서 유다인들과 예수님의 신성을 놓고 논쟁을 벌인 데 비해, 요한의 서간에서는 그리스적 사유방식에 영향을 받아 강생의 신비를 부인하며 정통 그리스도 신앙을 훼손하고 있던 이단자들과 대적하였다. 그 이단자들은 교회를 떠났으며(1요한 2,18-19), 성실한 교우들을 유혹하고 있었다(1요한 2,19; 2요한 10). 그들은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22; 4,3; 2요한 7), ‘거짓말쟁이들’(1요한 2,22), ‘거짓 예언자들’(1요한 4,1), ‘속이는 자들’(2요한 7)이다.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태어났으며, 속이는 영의 인도를 받고 있다(1요한 4,5-6). 이들은 영지주의의 이분법적 사조에 물들어 그리스도론과 윤리와 종말론에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론적 오류이단자들은 예수님의 강생을 부인하였다. 신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는 강생하지도 않았고(1요한 4,2-3; 2요한 7), 죽임을 당한 적도 없다(1요한 5,6)는 것이다. 영지주의자 체린투스는 예수와 그리스도는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역사상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지 않았고 여느 사람들처럼 보통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세례 때 초월적 그리스도가 예수에게 내려와 머물다 수난 전에 떠나갔다”(이레네우스, 이단반박 1,26,1). 또 가현설 영지주의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요한 세례자에게서 세례를 받지도 않았으며,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그러는 척 환각작용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 스미르나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 4,2). 요한은 이 이단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하였다(1요한 2,22; 4,2-3.15; 4,15; 5,1.5.6.; 2요한 7). 

 

윤리적 오류요한 서간집의 이단자들은 하느님의 신비를 깨쳐 죄많은 세속을 초탈한 것처럼 처신했다. 요한1서의 다음 구절들에 그들의 사상이 잘 드러난다. 

  • 1,6: “우리는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
  • 1,8: “우리는 죄가 없다.”
  • 1,10: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다.” 
  • 2,4: “나는 그분(하느님)을 알고 있다.” 
  • 2,6: “그분(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다.” 
  • 2,9: “빛 속에 있다.”
  • 3,6: “그분을 보았다.”(참조: 3요한 11) 
  • 4,20: “하느님을 사랑한다.”

요한 서간집 필자는 초탈한 도사처럼 행세하는 이단자들을 상대로 윤리를 강조한다. 필자는 그리스도처럼 처신하라고 충고한다. 그리스도 모방 훈계는 요한 1서의 다음 분단에 잘 드러난다. 

- 2,6: “그분(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거니신 것처럼 그도 그렇게 거닐어야 합니다.”

- 3,3: “그분(하느님)께 이런 희망을 걸고 있는 모든 이는 저분(그리스도)이 깨끗하신 것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 3,7: “어린 자녀 여러분, 아무도 여러분을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분(그리스도)이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일을 행하는 이도 의롭습니다.” 
  • 3,16: “그분(그리스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 4,17: “사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그분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서간집 필자는 이처럼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충고하면서 아울러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한다(1요한 2,3-4). 하느님의 계명은 구체적으로 말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1요한 2,9-10; 3,11-23; 4,7.11-12.20-5,3; 2요한 5-6). 여기서 형제란 요한계 공동체의 교우들을 말한다. 요한계 공동체를 떠난 이단자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것도 없고, 인사하거나 영접해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니 대외적인 사랑을 실천하기에 앞서 교우들간의 사랑이 우선임을 강조한 셈이다. 이는 요한복음의 사랑관을 계승한 것이다. 

 

종말론적 오류영지주의에 물든 이단자들은 현재적 구원에 심취한 나머지, 미래 종말 구원을 부정한 것 같다. 그래서 요한은 현재적 구원과 함께 미래 종말 구원도 강조하였다. 장차 역사의 종말에 일러서야 결정적으로 실현될 축복들이 잠정적으로나마 이미 이루어졌다는 ‘실현된 종말론’(先取된 구원) 사상은 요한 1서의 다음 단락들에 잘 드러난다. 

  • 1,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1,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 2,5: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 2,8-10: “어둠이 사라지고 참된 빛이 이미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이는 빛 속에 머물러 있으며 그는 걸려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 2,13-14: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에게 써 보냅니다. 여러분은 그 악한 자를 이겼습니다. …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어 여러분은 그 악한 자를 이겼습니다.” 
  • 3,1: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 4,15: “누구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그런가 하면 이렇듯 이미 ‘실현된 종말론’의 바탕 위에, 장차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서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미래적 종말론’ 사상을 표명하는 대목들도 있어서,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과 균형이 팽팽하다. 

  • 2,28: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 3,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3,18-19: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 열거한 세 가지 오류, 즉 그리스도론적이고 윤리적이며 종말론적인 오류들은 모두 예수님의 강생의 신비와 신성을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서간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 주제에 집중하여 논증하고 설득하며 타이르는 내용이 주된 권고가 되었다. 

 

23.2. 요한 서간의 본문 주해

23.2.1. 영원한 생명(1요한 1,1-4)

  [가톨릭] 서간들 가운데에서 요한 1서에만 인사말이 없다. 대신 이 서간은 넷째 복음서와 비슷한 식으로 시작하는데, 이 점을 근거로 교부들 대부분은 요한 사도가 이 두 작품의 저자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문학상의 이유로 이 점을 인정하지 않는 이(이쇼다드)도 있었다. 

이 서간이 강조하는 점은 하느님 아들의 육화와, 육화를 목격한 자야말로 참된 사도라는 것이다. 이 서간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사랑이다(아우구스티누스). 생명의 말씀께서 육으로 나타나셨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죽으신 그 육으로 부활하셨다(안드레아스). 그분께서 육화하시어 인간 모습을 취하심으로써 눈에 보이고 우리가 만질 수 있게 되었다(베다, 세베루스). 언제나 존재하시던 분이시나 육화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졌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첫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분은 한처음에 계시던 그분이었다(디디무스). 우리는 여러분이 예배 공동체 안에서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기 위해,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선포한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친교다(아를의 힐라리우스, 안드레아스, 베다). 듣기는 했으나 보지는 못한 이들 – 뒷세대의 제자들 – 도 첫 세대 사람들과 같은 기쁨을 누린다(아우구스티누스, 안드레아스, 베다, 테오필라투스). 

 

  편지체의 글인데 서두에 인사말이 없다는 것은 인사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서로 잘 아는 사이라는 것을 뜻한다.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나타나듯이, 요한1서의 서두에서 이미 요한은 ‘생명의 말씀’과 ‘영원한 생명’에서 발하는 은총의 빛을 경탄하며 바라보고 있으며, 이 은총의 빛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를 가능하게 하리라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이,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8)는 복음의 진술이 나왔을 것이다. 

 

23.2.2. 빛 속에서 살아가다(1요한 1,5-10)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그분의 빛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느님은 빛이시다(오리게네스, 디디무스). 그러나 그 빛은 우리 육체의 눈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빛이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디디무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밝음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시메온). 어둠의 지배자가 이긴다는 마니교도들의 생각은 터무니없다(베다). 진리는 빛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이레네우스, 아를의 힐라리우스, 안드레아스, 시메온). 빛은 본성에서 하느님과 닮았으며, 그분을 묘사하는 유비(類比)로 사용될 수 있다(시메온). 

 

  믿음을 확증해 주는 적극적인 선한 행실 없이 단지 믿음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순박한 믿음과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면 선한 행실 또한 아무런 가치가 없다(베다). 작은 잘못은 위증한 죄와는 다르지만(카시아누스), 죄 없는 이는 없다(아우구스티누스, 안드레아스, 베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우리의 죄 때문에 죽게 하셨고 그의 피가 우리를 씻어 우리가 하느님과 손잡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자기 노력으로 완전함에 이를 수 있으며 이 세상에서 어떤 죄도 저지르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믿는 펠라기우스 같은 이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베다). 회개하는 죄인만이 하느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머무르신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며 그분 피의 성체를 받아 모실 때,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며 그분께 우리를 용서해 주십사고 청할 때 나날이 겸손하게 우리의 잘못을 그분께 고백한다(아를의 힐라리우스, 베다). 하느님은 성실하시며(오이쿠메니우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키프리아누스). 우리 죄와 잘못을 위해 기도하라고 우리를 가르치신 분께서는 아버지의 자비도 약속하셨다(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빛은 태양에서부터 비친다. 그러나 우주 공간 안에서는 태양의 그 밝은 빛도 한 자루 촛불처럼 거대한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이것이 물리적인 빛의 실상이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에 비유하며 거대한 어둠조차도 밝게 비출 수 있는 존재로 소개하고 있다. 지구에 비쳐지는 태양 빛은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 낮과 밤이 교차되어 나타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치어오는 진리의 빛은 “어둠이 전혀 없다”(1요한 1,5ㄴ). 이러한 사색으로부터,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거나,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는 복음서의 진술이 나왔을 것이다. 

 

23.2.3. 그리스도인의 생활(1요한 2,1-17)

  죄는 할 수 있는 한 피해야 하지만, 설령 죄를 지었다 해도 우리에게는 우리 죗값을 치러 주셨으며 아버지께 우리를 변호해 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는 확실한 증거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교부들은 이 언명(言明)이 두 가지 차원을 지닌다고 풀이했다. 

 

  첫째 단계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육화하셨다는 정통 교의를 신봉함을 의미한다. 이는 실천적인 면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악의 힘과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암브로시우스) 보호자이시듯이(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그분께서 승천하신 뒤 보내신 성령 또한 우리의 변호자이시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우리의 심판자께서 몸소 우리의 변호자가 되신다(아우구스티누스, 토리노의 막시무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는 물론 우리 죄를 몸소 짊어지시는 적극적인 연민 행위로도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죄인들을 위해 탄원하고, 그분의 신성은 그들의 죄를 지워 준다(베다). 

(둘째 단계에서,) 하느님을 안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분의 계명들도 지켜야 한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디디무스, 안드레아스).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안다는 확실한 표시다(디디무스, 아를의 힐라리우스, 베다).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으로(大 레오, 아를의 힐라리우스), 그리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름으로써(베다) 하느님 안에 산다. 타락의 어둠은 지나가게 되어 있으며, 하느님께서 세워 놓으신 계획에 따라 믿음의 빛이 우리 안에서 작용한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하느님의 계명들은 하느님과 관련해서는 새롭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인간의 견지에서 보면 새 사람을 사랑의 빛 안으로 데려오는(베다, 안드레아스, 아를의 힐라리우스), 태초부터 창조주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였다(아쇼다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은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있어 온 계명이라는 점에서 옛 계명이지만(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디디무스, 안드레아스), 새로운 빛에 대한 갈망을 우리 마음에 쏟아붓는다는 점에서 새 계명이기도 하다(베다). 교회 안의 여러 연령 집단에게 쓴 요한의 글을 교부들은 하나같이 영적 의미로 풀이했다. ‘자녀’는 새로 개종한 사람들을,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여전히 죄와 싸우는 이들을, ‘아버지’들은 성숙한 신자들을 가리키며, 신체의 나이와는 상관없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베다, 안드레아스, 오이쿠메니우스). 

 

  다른 신자를 미워하는 마음을 지닌 채 세례나 주님의 만찬에 오는 이는 자신이 하느님께 비추임을 받았다고 생각할지라도(베다, 안드레아스) 회개하고 돌아서서 사랑하기 전에는(아를의 힐라리우스) 여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이다. 같은 본성을 지닌 이들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은 자연에서 유래한 법칙이다(테오필락투스). 형제를 미워하는 이는 이미 사랑의 등불을 꺼 버린 이며 따라서 어둠 속을 걷고 있다(오리게네스). 이 길은 결국 지옥에 이르는데, 그런 사람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빛을 떠나기 때문이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악마가 그런 사람의 내면의 눈을 감겨 버린 것이다(베다, 안드레아스).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을 적대하는 세력은 ‘악한 자’, ‘세상’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지만 그 명칭들은 실제 의미에선 별 차이가 없다. 악마는 ‘이 세상의 우두머리’이고, 이런 명칭들은 그의 유혹들과 그가 우리를 자신의 지배 아래 들도록 꾀는 데 사용하는 수단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악마와, 또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려고 그자가 하는 모든 짓에 대항하는 영적 싸움이다. 하느님의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은 세상과 세상의 것들에 대한 사랑에서 돌아서야만 한다(디디무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세베루스, 시메온)필요한 때는 세상을 이용하되 무절제하게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베다). 그것은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아를의 힐라리우스). 눈의 힘을 오류에 넘겨주지 말고 빛에 모으도록 하라. 그 힘은 생명을 누리라고 주어진 것이니, 죽음을 불러오는 것에서 돌아서야 한다(에우케리우스). ‘육의 욕망’은 우리의 육체적 욕구와 관계된 것인 반면,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영혼의 악덕과 관계된 것으로서, 지나친 자기 사랑 같은 악덕은 아버지가 아니라 악마에게서 온다(아를의 힐라리우스). 이 짧은 구절에 온갖 종류의 사악함에 대한 묘사가 들어 있다(베다). 자신의 육체를 거슬러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육체를 지어 주신 창조주께 버림받는다(아우구스티누스). 세상의 욕망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새로운 창조 안에는 그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베다, 안드레아스, 오이쿠메니우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요한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그분의 이러한 참 모습을 알아보았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그분은 죄 외에는 모든 점에서 인간과 똑같은 실존 조건에서 살아가셨기 때문에, 인간의 현실을 잘 아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현존해 계시는 지금,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단지 숭배와 신앙의 대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그분처럼 세상의 죄를 없애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본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1요한 2,6) 하고 권고하였다.  

 

  죄를 없앨 수 있는 힘은 사랑뿐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힘이며,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다. 이것이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없을,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하느님의 계시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세상의 모든 죄와 이 죄를 저지르게 하는 모든 악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바야흐로 창조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요한은 사랑이라는 계명 자체야 예로부터 있어 온 것이라서 옛 계명처럼 들이기도 하겠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에 기준을 둔 것이라서 새 계명이라고 강조하였다(1요한 2,7-8). 이 진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들이나 온갖 주장으로 가리는 이단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적’이다(1요한 2,22ㄷ). 

 

23.2.4. 그리스도의 적과 싸우다(1요한 2,18-29)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 마지막 때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요한은 여기서 이 낱말을 복수로도 쓰고 단수로도 쓰는데, 주로 이단자들을 겨냥하여 사용한 것이 확실하다. ‘그리스도의 적들’이란 한때 공식적으로 교회에 속했으나 그 정신을 함께 나누지 못하다가 결국 자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며 떠나간 사람들이다. 그런 주장들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온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부들은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의를 부정하는 사상은 유대교를 시작으로 4-5세기의 이단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가 있었음을 알려 주지만, 그들의 구체적인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이단자들의 교리가 혼란스럽고 모순되는 것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엇을 주장했든, 사도들이 전해 준 믿음에서 떠나갔다는 사실이다. 

 

  어린양이 저녁 때 제물로 바쳐지듯이, 주님께서는 종말 때 돌아오실 것이다(히에로니무스, 안드레아스)그때 세상은 악이 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한때 그리스도인이었던 자들의 신성모독(디디무스)이 그 전에 일어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끝까지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의 적들’은 실제로 우리에게 속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베다, 오이쿠메니우스). 그들이 진정 성실한 이들이라면 우리와 계속 함께 했을 것이다(안드레아스). 사랑과 보편 교회의 일치에서 떨어져 나간 모든 이는 적이며 ‘그리스도의 적들’이다(키프리아누스). 

 

  이와는 반대로, 성실한 이들은 세례로(안드레아스), 또 그들을 모든 진리로 이끄는(오이쿠메니우스) 바로 그 성령에 의해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았다(세베루스). 여러분 모두는 그 진리를 안다. 세례 때 고백한 믿음의 규정들을 통해 그것을 받았기 때문이다(아를의 힐라리우스). 절대 거짓말을 하지 마라(아우구스티누스). 어떠한 것이든 거짓말은 그리스도께 낯선 것이다(베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안드레아스)이야말로 가장 큰 거짓말이다(베다). 그리스도는 참하느님이 아니며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오이쿠메니우스).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다가갈 수 없다(아를의 힐라리우스, 안드레아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과 말과 행위로 그분을 고백해야만(베다) 아버지와 아들, 두 분 모두와 친교를 나눌 수 있다(안드레아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한 분이신 참하느님과, 그분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테오필락투스). 그대 안에 사시는 성령께 가르침을 받았다면, 새롭게 뜯어고친 것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배울 필요 없다. 요한이 말하는 ‘기름부음’은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 안에 쏟아부어진 하느님 사랑 그 자체를 뜻한다(베다). 교회 안에 있는, 성령으로 가득 찬 이들은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가르침에 관해 더 배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 가르침과 달리 행동하게 하려는 온갖 유혹과 유인물들에 흔들리지 않고 그 가르침대로 따라 살도록 격려와 훈계는 필요하다. 믿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확신하는 이, 교만에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늘 마음을 쓰며 자신을 창조하신 분 외에는 누구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완전한 의로움을 이룰 수 있다(베다). 아들과 아버지를 아는 이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확신을 지니고 있을 것이며 부끄러워 움츠리거나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안드레아스, 베다, 오이쿠메니우스). 

 

  요한이 살던 초대교회 시절이나 복음화 제3천년기의 초입인 21세기인 지금이나, 우리는 세상을 죄로 지배해 온 마귀의 시대를 끝장내는 ‘마지막 때’(1요한 2,18)에 살고 있다. 이것이 시대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의 적들은 쫓겨나지 않기 위해 선으로 위장하고는 집요하게 신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요한 8,3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적들로부터 당신 자녀들을 보호하고 영원한 생명의 기운으로 양육하시기 위해서 성찬례 때마다 ‘재림’하신다. 그러므로 미사에서 성찬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사랑의 계명을 기억하고 의로운 일을 실천하기로 다짐해야 한다(1요한 2,28). 우리도 세례성사 때에 그분의 이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1요한 2,20). 

 

23.2.5. 그리스도인의 정체성(1요한 3,1-24)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는 않았지만, 회개하지 않은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희망으로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우리에게 부과된 기본적인 요구 사항은 우리 자신의 사악함을 씻고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함으로써 이 새로운 탄생에 걸맞게 사는 것이다. 우리 창조주의 은총은 너무나도 위해해서,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을 뿐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 자녀가 아버지를 사랑하듯이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셨다(베다, 안드레아스, 오이쿠메니우스)믿는 이들은 이제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랑받도록 준비되었다(세베루스). 그분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미 성령의 첫 열매들을 받았다. 이미 상속자의 자격을 얻은 우리는 마침내 그때가 와서 완전하게 영원한 아들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디디무스). 

 

  우리는 우리의 한계와 피조물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그분과 다른 채로 남아 있는 지금도 이미 하느님 안에서 복 받았다(아우구스티누스, 베다, 고백자 막시무스). 우리는 각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 따라 하느님과 닮은 모습이 되는 영광을 희망하도록 배우며(안드레아스), 힘닿는 한 하느님의 순결한 거룩함을 본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베다, 테오필락투스). 우리의 의로움이시며 거룩함이신 그리스도 안에 꾸준히 머무르는 이는 죄를 짓기로 선택하지 않는다(디디무스, 아를의 힐라리우스, 베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우리의 의로움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과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을 보는 것만큼 다르다(베다).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악마에게서 태어난다(안드레아스). 성경은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죄가 없다고 하지 않고, 그런 사람이 의로움의 길을 따라 걸을 때에만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디디무스). 죄를 짓는 것은 악마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파멸시키러 오신 악마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죄는 본디 인류 안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본디부터 그 안에 있는 것이라면, 죄 없는 인간에 의해 뿌리 뽑힐 수 없었을 것이다(디디무스, 베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믿음에 의해 다시 태어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닮은 모습으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 안에서 더 일하셔야 한다(고백자 막시무스).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 새 탄생의 은총을 보존하고 있는 한, 그들은 예전에 저질렀던 것 같은 식으로 죄를 지을 수 없다(세베루스). 믿는 이들 안에는 하느님의 씨, 또는 가르침이 머물러 있다(안드레아스, 이쇼다드, 베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궁극적인 잣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자라면서 완전하게 되는 사랑 또한 하느님에게서 나는 새로운 탄생에 속한다. 그런데 그것은 줄곧 우리 마음의 법과 싸운다(아우구스티누스). 사랑은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손들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고,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악마의 자녀다(베다, 예루살렘의 키릴루스).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지만, 이렇게 새로이 나지 않은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디디무스, 안드레아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듯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베다, 안드레아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을 지니지 못한 이는 죽음 안에 남아 있다(디디무스). ‘형제’는 여자들에게도 해당되는 포괄적인 용어다(아우구스티누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반항의 원형은 자기 동생을 살해한 카인이다. 마음에 미움을 품고 있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그의 의향 때문에 이미 살인자로 여기신다(베다). 참사랑을 보여 주는 것은 살해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이나 소유를 바치는 자기희생이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 형제의 의로운 행실로 시샘할 것이다(베다). 요한이 말하는 ‘세상’은 하늘이나 땅 또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을 뜻한다(아우구스티누스, 베다).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위해 당신 생명을 내어 놓으셨듯이, 남을 위하여 그대의 생명을 내줄 수 있어야 한다(테르툴리안무스, 아우구스티누스, 베다). 곤궁한 형제에게 마음을 닫지 마라(키프리아누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형제를 위해 죽을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못하다면,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만이라도 그와 나눌 수 있어야 한다(아우구스티누스, 베다). 좋은 말과 의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베다). 기꺼운 태도와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를의 힐라리우스). 

 

  그렇게 한다면 양심의 찔림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펼쳐 주신 길을 걸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분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동으로 또 진실로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 마음이 지고한 진리의 빛 안에서 확신을 지닌 것을 발견한다(베다, 오이쿠메니우스). 우리가 설교하는 것을 실천한다면, 우리가 바른길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 마음과 양심이 알아줄 것이다(베다, 오이쿠메니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받으려면 그분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大 그레고리우스, 테오필락투스). 우리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보다 위대한 하느님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다(베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을 수 없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없다(베다, 테오필락투스). 

 

  요한 사도는 3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권고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직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죄와 사랑이다. 죄를 멀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죄를 지을 때마다 악마에게 사로잡히는 것이요 사랑을 실천할 때마다 그 악마의 시대에 종말을 앞당기는 것이다. 사랑의 진정한 모습은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하는 데 있다 :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7),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이렇게 되기까지 죄를 멀리하고 사랑 안에 머무르는 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안에 머무르시며 사랑할 기운을 북돋아주신다. 

 

23.2.6. 완전한 사랑(1요한 4,1-21)

  세상에는 많은 영이 있지만, 믿어도 좋은 영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육화하셨다고 고백하는 영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부인하는 이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 안에 계시는 영께서는 이미 모든 부인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며 우리 적수들의 논리를 반박하기 때문이다. 거짓 예언자들이 많은 까닭에(베다)영들을 철저히 검증하는 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영의 식별’이라는 성령의 은사가 필요하다(요한 카시아누스). 그 식별을 통해 우리는 어떤 영들을 믿어야 하고 어떤 영들을 거부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디디무스). 하느님에게 속한 이는 모두(오이쿠메니우스) 자신의 행동을 통해(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계시면서도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육으로 오셨다고 고백한다(디디무스). 이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증거다(폴리카르푸스, 아우구스티누스, 안드레아스). 그리스도의 신인(神人) 일치를 인정하지 않고 순수한 ‘하느님의 말씀’은 실제로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다(디디무스, 오이쿠메니우스). 

 

  ‘그리스도의 적’은 자기 안에 사탄을 모시고 있으면서, 신이라 불리는 모든 것 위로 자신을 높이는 사람일 것이다(테오필락투스)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힘은 우리에게 해를 입히려는 악마의 힘보다 언제나 세다(아를의 힐라리우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안드레아스) 믿음으로써 우리는 이미 악마를 이겼다(베다). 거짓 예언자들은 믿는 이들을 슬프게 만든다(테오필락투스). 세상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을 가르치는 이들은 언제나 추종자들을 발견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테오필락투스, 안드레아스). 세상은 그들에게 귀 기울이지만, 그들은 영적인 정신을 지닌 마음들을 믿음의 단순함에서 떼어 놓지 못한다(베다). 육적인 사람은 하느님의 영에 속하는 것들을 듣지 않으며(디디무스) 그것을 어리석음으로 여겨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베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으며(안드레아스)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사랑하도록 불렸다(디디무스, 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베다). 사랑은 진정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하느님’으로 불리기까지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 사랑할 때 우리는 부활의 공기를 마신다(시리아인 이사악). 사랑하지 않는 이는 하느님을 모른다(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입증하셨다(오이쿠메니우스, 베다). 우리의 많은 죄로 인하여 우리가 아직 그분을 찾을 수 없었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 죄를 속죄하도록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어(요한 카시아누스),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용서를 베풀고 우리가 다시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르게 하셨다(베다). 

 

  우리가 서로에게 보이는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오이쿠메니우스, 베다)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디디무스, 안드레아스). 그분 안에 있는 신성의 충만함을 파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베다). 그대 자신의 마음을 깊이 살펴보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을 그대에게 주셨는지 안 주셨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느님의 영께서 그대 안에 계신 것이다(베다, 오이쿠메니우스).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그분을 단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분으로 고백하는 것이다(디디무스, 베다). 삼위일체는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 사랑의 관계 안에서 드러난다(아우구스티누스). 사랑하는 이 안에는 하느님께서 계시다(키프리아누스, 大 바실리우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僞-디오니시우스). 

 

  사랑이 하느님이라 진보도 퇴보도 있을 수 없다면, 사랑은 그대가 하느님을 본받으며(아를의 힐라리우스, 안드레아스) 사랑에서 진보하는 만큼만 그대 안에서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니 마지막 날에 대해 확신을 가져라(베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며, 심판 날이 와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다. 그것은 모든 두려움을 없애 준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싶다면, 그대에게 두려움을 문 밖으로 쫓아낼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이 있는지부터 살펴보라(아우구스티누스, 大 레오, 베다). 믿는 이임을 드러내 주는 완전한 표현은 사랑이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며(아우구스티누스) 우리를 위해 당신을 내주셨고(베다) 우리를 정확하게 이해하셨기 때문이다(안드레아스). 그리스도의 육화와 속죄가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일이 없었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가 그 면전에서 언제나 기쁨을 누리는 불변하시는 분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이 끊임없이 사랑으로 강화되어야 한다(아우구스티누스). 

 

  사랑의 기준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이러한 확신으로 요한은 이 4장에서 주옥같은 사랑의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썼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7ㄱㄴ.8ㄴ.10-11,16ㄴㄷ). 이러한 사색과 깨달음이 사랑의 계명으로 열매맺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23.2.7. 구원에 대한 확신(1요한 5,1-21)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아드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셨음을 우리와 함께 믿는 모든 이도 사랑해야 한다. 이를 더 잘 실천하려면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성령으로 가득 찬 이들에게 이는 쉬운 일이다. 요한은 곧바로 사랑을 믿음에 연결시킨다. 사랑 없는 믿음은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는 이들은 덕을 실천함으로써(베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요 벗이 되었다(안드레아스). 부모인 하느님을 사랑하면 자녀인 이웃도 사랑한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테오필락투스). 자신을 지어 주신 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베다, 오이쿠메니우스). 하느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대가 사랑한다면, 그대의 행동은 올바르게 마련이다(아우구스티누스). 모든 종류의 불신을 떨쳐 버린 이들에게(테오필락투스) 하느님의 계명들은 조금도 힘겹지 않다(안드레아스, 베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증언하는 세 가지가 있다. 세례의 물과 속죄의 피, 그리고 이것들의 힘을 증언하는 성령의 내재(內在)가 그것이다. 믿는 이는 누구나 그 안에 이 증언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믿음으로써 구원에 대한 확신에 차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죄를 씻기 위하여 물로만이 아니라 당신 수난의 피로도 오셨다(안드레아스, 오이쿠메니우스). 그분께서는 이로써,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이쇼다드) 구원에 합당하게 되도록(베다), 우리의 세례성사를 축성하셨으며 우리를 위해 당신 피를 바치시고 당신 수난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생명을 주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과, 구원하는 피, 다시 나게 하는 세례의 물, 이 셋은 하나다(大 레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성령은 우리가 ‘자녀 되는 자격’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거룩한 샘의 물은 우리를 씻어 주며, 주님의 피는 우리를 구원한다(베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한 분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일치 안에서 이루어진다(이쇼다드). 예언자들의 증언이 위대하고(아를의 힐라리우스)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하느님의 증언은 더더욱 그러하다(베다, 안드레아스). 하느님은 거짓말쟁이일 수 없다. 그분은 진리의 본질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 그는 하느님의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아를의 힐라리우스). 아드님을 공경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베다). 

 

  지금은 우리가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지상에 살고 있지만, 죽어서 하느님 곁으로 가면 그 약속대로 다 받을 것이다. 요한은 ‘아드님 안에는 생명이 있다’ 정도가 아니라 ‘아드님은 생명 그 자체’라고 한다(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따라 청하는 이들이 바라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디디무스, 베다). 그분께서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신다면,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 기도하고 있음을 안다(오이쿠메니우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는 것을 청해야 하며,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베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도 알 수 있으며, 우리가 기도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께서 다 들어주시리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령 안에서 기도했다면, 우리는 청한 것을 이미 받았다. 

 

  사랑의 기준이 하느님이 사랑이듯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기운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다. 요한은 이처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믿음이라고 불렀다. 이 힘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이기는 하느님의 힘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는 진술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믿음을 가로막고 흐리는 것이 우상이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상을 조심하십시오”(1요한 5,21)라는 권고로 첫째 편지의 결론을 맺었다. 

 

  사도 요한이 이토록 강조하여 권고한 이 믿음을 받아들인 소아시아의 신자들은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제국의 박해에 맞서 고귀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바쳤고, 이를 250여 년 간 지켜본 로마인들은 마침내 이 믿음을 받아들이고 박해를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국교로 승인하였다. 

 

23.2.8. 원로의 인사(2요한 1-3)

  초기 교회 시대에는 여기서 말하는 ‘원로’와 ‘선택받은 부인’이 누구인가를 놓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후대로 오면서 점차 ‘원로’는 복음사가이자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테오필락투스)이고 ‘선택받은 부인’은 교회를 의미한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이를의 힐라리우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지만, 고대에는 이 두 견해 다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다. 여기서 ‘원로’로 불리는 또 다른 요한이 있었다고 여긴 이들도 있었고(오이쿠메니우스), ‘선택받은 부인’은 자기 집에 교회 공간을 내준 어떤 여인이라고 믿는 이가 많았다(안드레아스). 우리에게 특별히 흥미로운 점은 본디 ‘원로’presbyteroi는 ‘감독’episcopoi과 같은 것이라는 점이 확인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요한은 ‘감독’이라는 자신의 위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당시 이단자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참된 아드님이심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는 인간의 방식으로 태어났을 뿐이라고 우겼기 때문에, 당연히 요한은 그분께서 아버지의 아드님이심을 되새겨 준다(베다).

 

  첫째 편지에서 영지주의 이단사상에 물든 ‘그리스도의 적’에 대해 경고하면서 신자들에게 올바른 신앙에 대해 권고했던 요한은 이 둘째 편지에서는 신자들이 올바른 신앙으로 진리 안에서 더욱 성장하기를 바라면서 쓰고 있다. 그래서 이 편지의 수신인으로 나오는 “진리 안에서,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2요한 1)이 그 신자들이다. 첫째 편지의 수신인이 소아시아 공동체의 신자 전체라면, 이 둘째 편지의 수신인은 그보다는 한층 걸러진 진성(眞性) 신자층인 듯하다. 발신인인 그는 소아시아의 여러 공동체들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로부터 ‘원로’(2요한 1)라는 경칭(敬稱)을 받고 있다. 

 

23.2.9. 진리와 사랑(2요한 4-6)

  요한의 글에서 특징적인 것 한 가지는 진리와 사랑이 늘 함께 거론된다는 것이며, 이 둘이 함께할 때 그것은 이단자들의 공격에 대한 가장 훌륭한 반격이 된다. 교부들은 이 서간이 쓰인 시기가 다소 이르긴 하지만, 마르키온파 같은 이단의 나타남을 염두에 둔 글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맞서 싸워야 할 다른 종류의 심각한 분열이 있었을 가능성도 크며, 그 이단이 어떠한 종류이든 그 싸움을 위한 영적 무기는 같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성장하는 이를 보는 것은 언제나 기쁨을 가져다준다(아를의 힐라리우스, 오이쿠메니우스)요한은 자신이 지금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이미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베다, 오이쿠메니우스).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계명이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오이쿠메니우스). 

 

  그래서 요한은 인사말에 이어 바로 편지의 주제로 들어가는데, 그것은 진리와 사랑이다. 이는 두 가지 명제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려주신 계시라는 점에서 진리이며, 실제로 신자들이 실천하는 내용상으로 보면 그 진리가 사랑이다. 요한은 이것이 낯선 계명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가르치신 계명이어서, 교회로서는 이미 오래된 계명임을 강조하였다. 

  

23.2.10. 믿음을 지켜라(2요한 7-11)

  순수한 믿음 고백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중상을 일삼는 속이는 자들이 많이 나왔다(폴리카르푸스, 베다)그릇된 교의들이 등장하는 것은 종말의 표지이며,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진리와 사랑 둘 다를 적대하는 ‘그리스도의 적’이 하는 짓이라 여겨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오실 것임을 믿지 않으면서 성인들에게 주어지는 충만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오이쿠메니우스). 요한은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라거나 아버지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반박하고 있다(베다, 오이쿠메니우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로 육으로 오셨음을 아는 이는 누구나 다시 오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믿는다(오이쿠메니우스). 올바른 교의와 깨끗한 삶은 동전의 양면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다는 물론 하나라도 없는 이들은 멀리해야 한다. 거짓 교사들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테르툴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아를의 힐라리우스). 하느님에 대해 그릇된 말을 하는 자들과 사귀거나 나아가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이들은 자기를 지으시고 먹여 주시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大 바실리우스). 그런 이들과 말싸움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그런 자들과는 인사하는 시간도 아깝다(이레네우스, 디디무스). 

 

  요한이 진리로서 강조하는 사랑의 계명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내보내신 예수님을 통해 알려진 것이고, 또 예수님께서 몸소 당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진리임을 증명하신 것이므로, 사랑의 계명은 강생의 신비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강생의 신비를 부인함으로써 예수님의 신성도 부인하는 이단자들은 결국 사랑의 진리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의 적이다. 

 

23.2.11. 끝인사(2요한 12-13)

  이 서간은 머지않아 직접 만나 당면 문제들과 분열을 바로잡을 때를 기다리며 임시로 쓴 간략한 지시 사항이다. 맨 끝 절의 인사는 이 서간이 한 공동체에서 다른 공동체에 보낸 것임을 확인해 주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공동체들이 구체적으로 어느 공동체인지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원로가 가면, 편지로 쓰기 어려웠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오리게네스, 오이쿠메니우스)이 서간의 저자는 공동체들에게 이야기하며 그들을 믿음 안에서의 ‘자매’(베다, 오이쿠메니우스)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로 부른다(아를의 힐라리우스). 

 

  이 둘째 편지는 첫째 편지에 이은 글이기도 하고, 또 자주 만날 수 있는 처지에서 주고 받는 편지인 까닭에 길지 않다. 그래서 직접 만나서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쓰면서 맺었다. 

 

23.2.12. 가이오스가 베푼 친절에 대한 감사(3요한 1-8)

  이 가이오스는 모범적인 교회 지도자로서, 코린토에서 바오로 사도를 환대한 가이오스와 같은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그는 손님 환대의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 주었으며 그의 따뜻한 대접을 받은 이들이 가는 곳마다 그의 이름을 퍼뜨렸다. 가이오스는 필레몬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는 유일한 평신도이기에, 그가 보여 준 본보기는 각별히 중요하다. 그처럼 말할 수 있는 자력(資力)을 가진 이는 누구나, 직무를 수임하거나 특별한 영적 은사를 받지 않았어도 그의 행실을 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이오스는 바오로 사도를 포함하는 “온 교회의 집주인”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집 문을 열어 주었다(베다). 요한은 가이오스가 하고자 하는 선행들을 모두 다 이루기를 기도한다(아를의 힐라리우스). 복음을 들은 이들이 삶의 태도를 통해 그것을 실천해 나가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베다). 영적 은사를 받은 이는 상대적으로 적은 반면, 이 세상의 것들에서 부유한 이들은 많다. 이런 부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성도들을 위로하는 데 쓴다면, 그들의 영적 부유함을 나누어 받는다(大 그레고리우스). 가난한 성도들이 그대에게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들을 찾아 나서라(안드레아스). 

 

  이 셋째 편지는 가이오스 한. 사람에게 보낸 편지이다. 첫째 편지보다는 물론, 둘째 편지보다도 수신인의 범위가 좁아진 것이다. 가이오스는 진성 신자 중에서도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을 아낌없이 베풀어, 신자들에게 선행을 실천하였다. 사도 요한은 그를 일컬어, ‘진리의 협력자’(3요한 8ㄴ)라고 부른다. 

 

23.2.13. 교회 안의 악인에 대한 경고(3요한 9-12)

  디오트레페스는 가이오스와 반대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원로의 권위를 무시하고 방문자들을 쫓아냄으로써 교회 안에 말썽을 일으키곤 했다. 교부들은 그의 행실에서 이단의 냄새가 풍긴다고 보았으며(베다), 원로가 그를 다루는 확고한 태도에 큰 감동을 받았다. 디오트레페스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겸손히 따르는 대신 색다르고 새로운 내용을 전도함으로써 교회에서 주도권을 잡고 싶어 했다(베다). 우리가 폐해를 바로잡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거기에 물들 것이다(아를의 힐라리우스, 베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우리가 바로잡아야만 한다(오이쿠메니우스). 악을 행하는 이는 하느님을 뵙지 못한 사람이다(디디무스). 하느님을 바라보며 자신이 바라보는 것을 이해하는 이는 하느님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느님의 어떤 면을 본 것이다(僞-디오니시우스). 디오트레페스와 완전히 반대되는 데메트리오스는 가이오스와 비슷한 인물이었으며, 그래서 비슷한 칭송을 받았다(아를의 힐라리우스, 안드레아스, 오이쿠메니우스). 

 

  밀밭에는 가라지도 섞여 들어오는 법인지, 당시 소아시아 공동체들에는 가이오스와는 반대로 악행을 저지르는 자도 있었다. 그는 디오트레페스인데, 사도 요한은 직접 가서 그가 하는 행실을 지적하여 고쳐주겠다고 경고하였다. 

 

23.2.14. 끝인사(3요한 13-15)

이 서간은 끝인사가 요한 2서와 똑같은 양식이다(아를의 힐라리우스)이는 두 서간이 같은 사람이 쓴 것(오이쿠메니우스)일 뿐 아니라 같은 시기에 같은 교회에 보내졌음을 알려 주는 중요한 증거다. 헛된 승리를 좋아하는 자들이 일으키는 말다툼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모든 불화를 없애기를 바라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끝인사가 둘째 편지와 똑같은 양식이라는 것은 편지의 발신인과 수신인이 쉽게 만날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서 지내고 있음도 나타낸다. 그럼에도 굳이 편지를 쓴 이유는 공동체에서 돌려 읽으며 신자들 안에서 공유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23.3. 요한 서간과 요한계 문헌

  이렇게 세 통의 편지를 쓴 요한은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순교하고, 티모테오마저 에페소에서 순교하자 본격적으로 에페소 공동체와 인근 공동체들에 대한 선교와 사목의 책임을 맡았다. 그러다가 요한도 황제숭배를 강요하던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를 받아 로마로 압송되어 갖가지 형을 받았으나 신기하게도 요한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그러자 로마 당국은 요한을 파트모스 섬으로 귀양 보내어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을 하게 했는데, 요한은 이 중노동을 하면서 틈틈이 그 섬의 동굴로 가서 기도하던 중 성령의 계시를 받았고 이 계시에 따라서 묵시록을 써서 아직도 박해 중에 있던 에페소와 여섯 공동체의 신자들에게 보냈다. 96년에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에 그 유배에서 풀려나와 말년에 요한은 복음서를 썼다. 그러니 집필 순서로 보면, 요한의 서간(에페소) – 요한 묵시록(파트모스) – 요한 복음서(에페소)의 순서가 된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를 잘 이해하려면 앞선 두 문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는 요한의 서간에 대한 주해와 묵상은 ‘요한의 권고’로, 요한 묵시록에 대한 주해와 북상은 ‘요한의 증언’으로 제목을 붙였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23. 요한의 권고: 사목 서간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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