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 공동체들은 요한이 쓴 복음서뿐만 아니라 서간 세 통과 묵시록도 함께 엮었다. 그들은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발설하신 말씀들이 실제로 현실화되는 체험 속에서 이 문헌들을 엮었다. 즉 적대세력들에 의한 박해를 겪었으며,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은총이 주어짐을 겪으면서 요한이 쓴 서간들과 묵시록을 엮었다[출전: U. Vanni, 새로운 신약성경사전]. 그러므로 이하에 간추려 적은 요한계 공동체의 지리적, 역사적, 사상적 상황과 실상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뒤를 이어 소아시아에서 전개된 초대교회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22.1. 지리적 상황
요한계 공동체들은 소아시아로 불리는 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 해안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아나톨리아 반도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인류의 역사의 오래 전부터 수많은 문명과 국가들이 자리잡았으며, 이들 사이에 문화적 교류와 충돌이 잦았다. 이 반도의 삼면은 북쪽의 흑해, 서쪽의 에게해, 남쪽의 지중해와 접하고 있고, 북쪽과 동쪽에는 험한 산맥으로 막혀있다. ‘아나톨리아’라는 지명은 그리스어 Anatole(태양이 솟는 곳)에서 유래되었으며, 여기서 ‘아시아’라는 이름도 나왔다. 지금은 아시아 대륙의 서남부에 위치해 있지만 고대에는 이곳을 아시아라고 불렀고, 점차 아시아 대륙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소아시아’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요한계 공동체들이 요한계 문헌을 엮을 당시에 이 소아시아 지역은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영토였다. 그 이전에는 해양 식민 활동을 활발히 하던 그리스의 영향력이 닿아 있었다. 그리하여 소아시아로 불리면서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그리스적 사유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따라서 그리스의 다신교 풍습과 로마의 황제숭배 풍습에 물들어 있었다.
요한계 공동체들의 중심은 에페소였고, 그 주변에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그리고 라오디케이아 등 일곱 공동체가 있었고, 그밖에도 콜로새 등 몇몇 작은 공동체들이 있었다.
22.2. 역사적 상황
로마 제국은 이스라엘 백성이 살던 유다와 갈릴래아 지방을 속주(屬州)로 편입시키고 총독을 파견하여 기원전 63년부터 다스렸다. 로마식 식민통치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데, 폼페이우스(기원전 106~48년)가 집정관으로 다스리던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본시오 빌라도 총독 치하에서 십자가형으로 죽임을 당하셨는데, 이때는 티베리우스(재위 14~37년) 황제 치세였다. 그 후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고(313년) 국교로 선포되기까지(395년), 로마 제국 통치 시대에 황제들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당한 박해는 이 시기 동안 간헐적으로 모두 열 차례 있었다. 그러니까 요한계 공동체들은 언제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속에 처해 있었고, 따라서 요한계 문헌들에는 이 박해의 상황에 따른 위기감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로마 제국의 박해는 그들이 그리스 문화로부터 물려받아 신봉하던 다신교 풍습에 따른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우상들은 사람으로서 신이 된 존재들이었는데, 이에 따라 황제가 선정을 베풀면 죽어서 신이 된다고 믿는 사조가 생겨났고, 나중에는 황제가 살아 생전에 신으로 추앙받고자 하는 신격화와 황제 숭배를 강요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을 받음으로써 박해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빌라도가 예수를 사형 선고하고 십자가형에 집행한 최초의 박해에서도 근본적으로 원인이 된 것은 신성이었다. 그 후 로마제국이 강요한 우상숭배와 심지어 황제숭배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신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이것이 우상과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려던 로마제국의 박해를 불러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점에서는 그리스나 로마의 다신교가 부질없는 우상숭배로 보이고 황제숭배는 더욱 더 터무니없는 우상숭배로 보이지만,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의 눈에는 한낱 사람이었던 예수를 신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조롱의 대상이었으므로,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굶주린 짐승의 먹잇감으로 내어주거나 십자가에 매달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함으로써 그리스도 신앙을 말살하고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부인하였다.
처음에 예수의 신성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유다인들로서 아나빔들이었고, 그들은 오랫동안 하느님을 믿어왔지만 율법에 매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옛 이스라엘과는 다른 참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하였다. 로마 제국 영토 곳곳에 흩어진 디아스포라에서 유다교 신앙을 신봉하던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은 예수를 거짓 예언자로 보았던 바리사이들의 전통을 따라 그리스도인들과 대립하였고, 다신교를 신봉하며 황제까지도 숭배하던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하여 로마 제국이 가한 박해의 배후가 되었다(Ernst Dassmann). 다음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로마 황제들이다.
네로의 박해(54~68년): 64년에 로마시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흉흉해지자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여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때 굶주린 맹수들의 먹잇감이 되어 죽거나 십자가형에 처해져 순교한 그리스도들 가운데 사도 바오로와 사도 베드로가 있다.
도미티아누스의 박해(81~96년): 그리스 다신교 숭배사상을 물려받은 로마 제국은 황제가 선정을 베풀면 죽은 후에 신으로 추앙된다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는 이를 앞당겨 생전에 자신을 ‘주님이신 하느님’(Dominus et Deus)으로 부르게 하는 신격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런 황제숭배 강요 정책에 저항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고, 이 때문에 사도 요한도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되어 채석장에서 중노동에 종사하는 형벌을 받았다.
트라야누스의 박해(98~117년): 그는 황제숭배를 강요하던 정책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종교적 모임도 금지하는 한편 법조문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박해를 가하였다. 이때 시메온이 십자가형에 처해져 순교했고,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가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게 찢겨 순교했다.
하드리아누스의 박해(117~138년): 그는 125년에 칙령을 발표하여, 할례는 물론 안식일에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도 금지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 터에 쥬피터 신전을 세워놓고서 경배하기를 강요하였다. 이때 요한의 제자로서 스미르나의 주교였던 폴리카르푸스가 순교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박해(161~180년):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실현했다고 자랑하는 로마 황제정 시기에 5현제 중 하나라고 불리는 그는 치세 후기에 미신을 믿는 점성가들에게 빠져 그리스도교를 미신으로 취급했으며 국가의 중요 행사를 치를 때에는 반드시 우상을 숭배하는 희생제사를 드렸는데,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아들여 희생제물로 삼았다. 이때 유스티누스가 순교했고, 리옹에서도 50여 명이 순교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박해(191~211년): 북아프리카 출신 군인으로서 황제가 된 오른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박해를 일으켰다. 이때 이레네우스, 페루페투아, 펠리치타스가 순교하였다.
막시미누스의 박해(235~288년): 폭군이었던 그는 로마 제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신전에 나와 희생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였으며, 이러한 우상숭배 제사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유형과 투옥으로 박해하였다. 이때 힙포리티스와 폰티아누스, 히폴리투스, 우르술라가 순교하였다.
데키우스의 박해(240~251년): 그는 모든 총독들에게 칙령을 내려 신전에 제사를 지낸 사람들에게 증명서를 발급했으며, 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이때 오리게네스, 파비아누스, 바빌라스가 순교하였고, 키프리아누스는 박해를 피해 은둔생활을 하였다.
발레리아누스의 박해(253~260년): 그는 황제가 된 후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했으나, 로마 제국에 국난과 흉년이 지속되자 예수를 신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다신교의 신들이 분노를 한 것이라고 여겨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종교 집회를 금지시키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처벌을 명문화하는 칙령을 발표하였으며(258년), 성직자들을 사형시키고 그리스도교에 고용된 신자들을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냈다. 이 박해에서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 스페인 타라고나 주교 투루투어스가 순교하였다.
디오클레시아누스의 박해(284~305년): 그는 뛰어난 행정력과 조직력을 발휘하여 기울어가는 로마제국을 살리기 위하여 제국을 4분할하고 군대를 강화하며 경제를 개혁하고 그리스도교에 대하여도 관용정책을 베풀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폴로 신전 제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하였으며 이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성경을 압수하고 성직자를 투옥시켰다. 그러나 그의 후임인 콘스탄티누스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박해를 중지하는 칙령을 내렸다(313년, 밀라노 칙령). 이로써 250여 년 간의 박해가 공식적으로 종식되기에 이르렀다.
22.3. 사상적 상황
로마제국의 박해가 종식되자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교외의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바에서 나와 공개적으로 모여서 미사를 거행하기 시작하였으며, 황제가 살던 라테란궁을 교회에 기증함으로써 라테란 대성당이 로마 주교좌 성당으로 축성되었다(324년).
로마제국에 의해 박해를 당하던 시기에도 유다교인들로부터는 물론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예수의 신성을 둘러싼 그리스도 신앙의 성격에 관하여 논쟁이 일어났으며(에비온), 박해가 종식된 후에는 구약성경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계 및 로마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리스적 사유에 영향을 받아 영육이원론적 관점에서 예수의 신성을 이해하려는 시도까지 생겨났다(아리안).
유다교에서 유래한 이단은 구약성경의 유일신 신앙에 바탕하여, 하느님을 성부로 이해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수난과 죽음으로 성자의 자리에 입양되신 분으로 이해하는 입양설(入養說)이나, 성부 하느님께서 잠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가현설(假現說)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스 사상에서 유래한 이단은 영혼과 육신, 영과 물질을 구분하는 이원론에 입각하여, 하느님은 불변하는 영적 존재이시므로 육신을 지닌 인간이나 물질 같은 피조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시기에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첫 피조물로서 ‘로고스’를 창조하였다고 보았다. 따라서 로고스인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하느님과 동등하지도 않고 영원으로부터 계시는 분이 아니며, 죄악에 물들어 부패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영지(靈知)를 지니신 분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를 주장한 아리우스의 영지주의 사상(Gnosticism)은 광범위한 호응을 얻기도 하였으므로 입양설이나 가현설 등의 유다교에서 파생된 이단보다 훨씬 심각한 이단 논쟁을 야기하였다. 그리하여 신자가 된 로마 황제들의 주선으로 니케아(325년), 콘스탄티노플(381년), 에페소(431년), 칼케돈(451년) 등지에서 그리스도 신앙 고백 정식을 확정하는 공의회를 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공의회들에서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삼위일체이심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 정식이 확정되기까지에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 공동체들에서 치열하게 사색하고 확신에 차서 선교를 하며 목숨으로 증거하는 순교 행위 등의 신앙 고백이 있었으며, 그 결과가 요한복음서를 비롯한 요한 묵시록, 요한의 편지들 같은 요한계 문헌들로 나타났다. 위에 언급한 공의회들에서 신약성경의 정경 목록에 포함된 이 요한계 문헌들이 형성되고 엮여지는 과정에서 예수의 신원과 하느님의 구원경륜, 세상의 영적 본질과 인간의 역할 등은 이러한 사색과 선교 그리고 순교의 열매로 밝혀진 하느님의 계시 진리였다.
따라서 예수의 신성과 삼위일체 하느님 같은 그리스도 신앙의 주요 정식을 여러 이단과의 논쟁을 거쳐 이끌어낸 단초는 요한계 문헌이었으며, 이단 논쟁과 공의회 과정은 이단적 주장과 이를 담은 외경(外經, Apocrypha) 문헌을 걸러내고 정통 신앙과 정경(正經, canon)을 확립하는 과정이었다(397년 카르타고 공의회).
서기 33년 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신 후 한 세대만인 66년과 70년 두 차례에 걸쳐 로마 제국에 대항한 이스라엘 독립전쟁이 혁명당원들의 봉기로 일어났다. 그러나 이를 진압하기 위한 로마군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유다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신앙 공동체와 신자들 역시 이스라엘 땅 안에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르코, 마태오, 루카 등 모든 사도들이 지도하던 신앙공동체들이 해외 디아스포라를 형성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바오로가 소아시아의 에페소 등지에 세운 공동체들이 초대교회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바오로가 순교한 후 티모테오가 물려 받았다가 그가 당시 원로였던 사도 요한을 초빙하여 넘긴 에페소 공동체가 초대교회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이룩한 신앙의 현실과 선교 활동의 실제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역시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복음 선포의 여정이 소아시아를 거쳐 로마에로 향하고 있다. 특히 성령을 받은 체험(사도 2,1-13), 공동체 생활(사도 2,42-47; 4,32-37) 사도들이 일으킨 기적(사도 5,12-16)과 박해(사도 5,17-42), 그리고 사도행전 후반부에 진술되고 있는 사도들의 놀라운 선교 성과 등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곳곳에 흩어져 존속하던 초대교회 공동체들의 일반적인 상황 보고로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사도들의 이 같은 행적은 네 복음서가 보도한 제자들의 행태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비겁한 제자들은 용감한 사도가 되었고, 미심쩍었던 믿음은 담대한 믿음으로 변화되었다. 그 사도들 또한 예수님처럼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게 되었다. 단,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실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시켜 활약하신 바를 뒷받침한다. 발현 체험 때 확인된 사기지은이 유감없이 사도들 안에서 발휘되었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는 루카복음서와 함께 예수님의 공생활에 이어서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기록하였고, 그가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에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오로를 수행하면서 보고 들은 바를 담았다. 안티오키아 출신인 그는 50년에 사도 바오로가 2차로 선교 여행을 할 때부터 바오로를 수행하다가, 57년까지 바오로가 필리피에 공동체를 세울 때 도와주었다. - 바오로 사도가 제2차 선교 여행을 출발할 때에 실라스와 티모테오를 동반하였다.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기록하면서 복수 3인칭으로 이야기하더니, 필리피 선교가 시작되는 16,10부터는 복수 1인칭으로 서술하였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도 실라스와 티모테오와 함께 필리피로 갔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다(주석성경 필리피서 입문) - 그는 3차 선교 여행에도 바오로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된 후 61년부터 63년까지 수감된 바오로 곁에 있었다. 그러고 나서 66년에 바오로가 치명한 후에 그리스로 건너가서 루카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가 이 책들을 집필한 연대가 루카복음서는 70년 이후 90년대 초반 이전에, 그리고 사도행전은 1세기 말엽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 사도행전에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에 대해 기록하기까지 루카는 근 15년 동안 사도 바오로를 수행했으며 그 후에 혼자서 활동한 기간까지 더하면 거의 40년 가까이 초대교회의 실상을 관찰하고 경험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 2장과 4장의 공동생활은 예루살렘에서만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예루살렘의 공동체들을 포함하여 당시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에까지 로마 제국 영토 안에 널리 퍼져있던 공동체들의 실상을 종합적으로 보고한 글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참고로, 예루살렘 성전에 쥬피터 신상을 세워놓고 경배를 강요할 만큼 심한 박해를 가하던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에 아리스테데스라는 로마인이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박해를 보다 못하여 그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오, 황제여!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두루 찾다가 발견하였으니, 우리가 그들의 성서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그들은 여느 백성들보다 진리와 정확한 인식에 가까이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을 알고 있으며 그분을 만물의 창조자요 직공장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 그분에게서 그들은 계명을 받았으며 그 의미대로 기입하여 놓고 준수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그들은 간통과 음행을 자행하지 않고, 거짓 증언을 제시하지 않으며 맡겨진 재물을 횡령하지 않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않으며,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들에게 친절을 다하며, 판관이면 정의에 따라 판결합니다. 사람 모습의 우상들에게 기도하지 않으며, 남들이 자기들에게 행하기를 원하지 않는 바를 자기들 자신도 남들에게 행하지 않습니다. 우상들에게 제물로 바쳤던 음식은 불결하기 때문에 먹지 않습니다. 자기들을 능멸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친구로 삼으며, 원수들에게 열심히 자선을 베풉니다.
… 노예들에게 남녀를 가리지 않고 … 자기들은 그들을 사랑하고 있으니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권유합니다. 또 과연 그렇게 되면 이 사람들을 차별없이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 그들은 어디를 가나 겸손과 친절을 다합니다. 그들에게는 거짓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과부들을 멸시하지 않으며, 고아들을 학대자들에게서 해방시킵니다. 가진 사람은 못가진 사람에게 아쉬움 없이 내어줍니다. 뜨내기가 눈에 띄면 자기네 집으로 맞아들이며 마치 친형제처럼 반깁니다. 사실 그들은 육이 아니라 영으로 하느님 안에서 서로 형제라고 부르는 까닭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느 가난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을 그들 가운데 누가 보면, 그는 재력대로 장례를 주선합니다. 또 그들 중에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다든가 궁지에 빠져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모두들 그에게 필요한 것을 돌보아주고 될 수 있다면 그를 풀려나게 합니다. 또 그들 속에 누군가 가난한 사람이나 궁핍한 사람이 있는데 자기들에게 먹고 남은 것이 없다면, 이틀이나 사흘씩 단식을 하여서 궁핍한 사람에게 필요한 양식을 마련하여 줍니다.
그들의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그대로 올곧게 성실히 살아감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양심적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 그리고 그들 중의 한 의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들은 기뻐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마치 그가 다만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아간다는 듯이 그의 시신을 장송합니다. … 오, 황제여!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법칙입니다.”
이렇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고매한 인격에 매료되어 신앙의 가치를 알아가는 로마인들이 퍼져나간 결과, 로마제국은 신앙을 공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박해를 겪은 일곱 공동체의 상황은 어떠했을까?(김주찬).
22.4.1. 에페소 공동체
기본적인 선교 상황: 초대교회는 성령 강림 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지만 혁명당원의 봉기로 68년과 70년 두 차례 로마군이 침공하여 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다인들은 흩어졌다. 그 이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313년경까지 250여 년 동안 에페소는 초대교회의 본산이었다. 에페소에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바오로 사도였는데, 그는 50~52년 경에 두 번째 선교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53~58년 경에 세 번째 선교 여행에서 공동체를 세웠다. 바오로가 64년경에 네로의 박해 때 로마에서 순교하면서 티모테오에게 에페소 공동체를 맡겼고, 에페소의 초대 주교가 된 티모테오가 카테고리아 축제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을 광적으로 숭배하던 군중을 향해 이것이 우상숭배라고 비난하자 이 축제에 참가한 군중으로부터 맞아서 97년에 순교했다. 그러자 이미 티모테오의 초대를 받아 와 있던 요한이 그 뒤를 이어 에페소 공동체를 맡았다.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예루살렘을 떠날 당시에 이미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집압하려던 로마군의 침공을 받아 이스라엘은 멸망당했다. 요한은 에페소를 중심으로 소아시아의 일곱 공동체와 콜로새, 히에라폴리스 등을 사목적으로 돌보다가 황제숭배를 강요하던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를 받았다. 그가 암살되자 파트모스 유배에서 풀려나온 요한은 요한복음서를 집필하고 나서 100년경에 94세로 임종하였다. 이는 티모테오의 초대로 에페소에 머물던 시절에 이단 사상에 물든 신자들을 위하여 쓴 서간들, 파트모스 유배 중에 쓴 묵시록에 이어서 예수님의 공생활과 부활에 대한 증언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그러니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대교회는 에페소로 이어지게 되었고, 복음이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와 전 영토에 전파되는 전진기지가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사도 바오로가 개척하고, 그분이 가장 사랑하신 제자인 사도 요한이 지켜낸 에페소는 구약성경에 보전한 신앙의 전승이 향후 교회시대에 서구 복음화의 미래 전망으로 펼쳐지던 곳이었다.
부수적인 사회적 상황: 에페소는 로마 제국이 아시아 속주의 중심으로 삼았던 경제수도였다. 로마 제국이 다스리던 동방 세계에서 수탈한 물산들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에 모였다가 그리스 코린토 항구와 에페소 항구를 거쳐 로마로 수송되었으므로, 에페소는 교역이 발달하였고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이 있었다. 로마보다 더 번성하는 도시로서 에페소에는 2만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 겸 원형경기장, 체육관과 음악당 및 대형 목욕탕에다가 도서관과 학교 등을 갖추고 있었고, 특히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한 신전이 있었으며 해마다 봄에 큰 축제가 열렸다. 에페소 시내를 굽어보는 코레소스 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축조되어 있었고 그 끝자락에 사도 바오로가 갇혔던 돌감옥이 있었다.
참고적인 사상적 상황: 바오로 당시에는 네로 황제가, 요한 당시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다스렸다. 사도 바오로는 네로의 박해로 치명했고, 에페소 주교 티모테오는 아르테미스 여신 축제에 참가했던 광분한 군중에게 폭력으로 치명했으며, 사도 요한은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로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어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는 박해를 받았다. 이처럼 당시 에페소 공동체에는 외부적으로는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의 박해와 여신 숭배 비판으로 말미암은 위협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유다인이었다가 개종한 이들이 퍼뜨린 입양성과 가현설 등의 유다이즘 이단과 그리스인이었다가 개종한 이들이 퍼뜨린 영지주의 이단이 신자들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는 나머지 여섯 공동체들도 공통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으나, 바오로와 티모테오와 요한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종가로서 그리고 초대교회의 새로운 본산이 된 소아시아에 세워진 공동체들의 맏이로서 인근 공동체들과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파급될 ‘첫 마음’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22.4.2. 스미르나 공동체
바오로가 소아시아에 복음을 전할 당시에 이미 스미르나에도 유다인들의 디아스포라와 회당이 서 있었다. 바오로로부터 전해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다인을 ‘옛 이스라엘’로 간주하고 자신들을 ‘참 이스라엘’로 자부하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감은 대단하였다.
또한 스미르나를 정복한 로마인들은 기원전 195년에 신격화된 황제를 위해 신전을 짓고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풍습을 이곳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로마인들은 그밖에도 그리스의 신들, 즉 제우스, 디오니소스, 키베레 등을 위한 제단들을 만들어 숭배케 하였다. 또한 스미르나는 로마제국 시대에 과학과 의학의 중심지였고, 양질의 포도주로 유명했으며, 에페소와 페르가몬과 경쟁할 정도로 부유하였다. 이에 대한 자부심에서 스미르나 시민들은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자진하여 황제 숭배에 적극적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당국에 고발한 사람들은 유다인들이었다. 그들도 황제 숭배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지만 하느님 신앙의 정체성을 둘러싼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반감이 더 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 유배당할 당시 스미르나 공동체는 요한의 제자인 폴리카르푸스가 맡고 있었고, 요한도 유배가 풀린 다음에는 이곳 스미르나에 와서 머물렀다. 폴리카르푸스가 요한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신앙을 가르치고 증거하였으므로, 스미르나 공동체의 신자들은 스미르나 시민들이 로마에 충성하듯이 그리스도 신앙에 충실하였다. 그래서 폴리카르푸스를 비롯한 스미르나 신자들이 화형을 당하여 치명하였는데, 이를 보면 이곳 공동체 그리스도인들의 충실함이 유다인들의 반감이나 스미르나 시민들의 황제 숭배에 대한 충성심보다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22.4.3. 페르가몬 공동체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에 복음을 전하며 공동체를 세울 무렵, 지형상으로 천연 요새인 페르가몬은 로마 제국이 소아시아를 통치하기 위하여 세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중심지였다. 그런 만큼 그리스의 여러 신들을 위한 신전과 황제를 숭배하기 위한 신전 등이 세워져 있었고, 소수의 페르가몬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 숭배를 강요받고 있었다. 전투로 날이 새고 해가 지는 그 당시의 페르가몬에서는 우상과 황제에 대한 숭배 강요 역시 전투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오로지 선이고 정의로 간주되는 세상이어서 우상과 황제 숭배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도 반역으로 취급하는 호전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을 충실히 증거하다가 치명한 안티파스가 있는가 하면, 변절한 예언자 발라암과 같은 자도 있었고, 영지주의 이단에 빠진 니콜라스 부제를 따르는 자들도 있었다.
22.4.4. 티아디라 공동체
티아디라는 소아시아의 행정 수도였던 페르가몬을 수비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다. 비옥한 평야와 푸른 초원이 주변에 펼쳐져 있어서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기에는 좋았지만, 방어를 위한 지형조건이 불리했기 때문에 중무장한 강력한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이곳에 이주한 유다인들은 농업이나 목축업에 종사하는 대신 제조업과 국제 교역을 일으켰다. 특히 국제적으로 유명한 자주색 옷감이 유명했다.
인공 염료가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 자주색을 내는 천연 원료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보통은 지중해 연안에서 많이 잡히는 소라/고동에서 채취한다. 또 다른 방법은 꼭두서니(Madder) 나무의 뿌리에서 얻는 것이었다. 이 뿌리를 물 속에 오래 담그어 두면 자주색 물이 우러나오고, 그 물에 실이나 천을 넣어 물을 들일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소라/고동이나 꼭두서니 나무 뿌리를 많이 채취해야 하기 때문에 인건비가 많이 들지만, 한 번 물들인 자주색은 물이 빠지지 않고 오랫동안 채색과 윤기를 유지하기 때문에 귀족이나 왕족 등 부자들만 자주색 옷을 입을 수 있었고, 따라서 이 색깔의 옷은 부와 권력과 지위를 과시하는 사치의 상징이어서 옷감 중 제일 비쌌다.
티아디라 출신의 자주색 옷감장수인 리디아는 필리피에 가서 바닷고동으로 자색 염료를 얻어 옷감을 염색한 다음 고급 옷감을 교역하는 일을 하다가 바오로를 만나 필리피 공동체 건설은 물론 사도 바오로의 선교 활동의 주요한 협력자요 후원자가 되었다.
당시 티아디라에는 옷감 염색 외에도 수비대 군인들을 위한 철모를 주석으로 만드는 수요가 많았고, 면직, 모직, 가죽세공, 제빵, 질그릇 제조 등의 산업에다가 노예매매업까지도 번성하였다. 각 업종들은 조합을 이루어 조합원들 간 결속력이 상당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도시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생활 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시민으로서 혜택을 누리려면 조합에 가입해야 했다.
조합들은 일종의 계 조직 형태로 운영되었는데, 이 도시에 성행하던 우상 숭배 신전들과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계 조합원들은 신전의 후원조직이 되어서 계돈의 일부를 신전에 바쳐야 했고, 곗날이 되면 신전에 모여 제사를 드렸다. 술을 마시고,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었으며, 신전의 여사제들과 음행을 했는데, 이 모두가 이교의 제사로 간주되었다.
22.4. 5. 사르디스 공동체
난공불락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사르디스는 기원전 6세기 경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다. 부와 철학과 법률과 음악의 도시로 알려졌으며, 모직공업과 염색업, 보석세공업이 발달하였고,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가 성행하였다. 사르디스를 끼로 흐르는 팍토루스 강에서 흘러 내려오는 사금을 채취하여 녹여 만든 금과 은으로 동전을 만들어 유통시켰는데, 이는 세계 역사상 최초의 금화와 은화 주조업으로써 리디아 왕국과 사르디스는 커다란 부를 쌓았다. 그러다가 기원전 546년에 페르시아군이 침공하여 도시가 약탈당하고 파괴되면서 쇠퇴하였다. 사르디스 공동체도 우상 숭배에 저항하여 치명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고 그들로 인해 한때 신앙이 뜨거웠으나 사르디스의 부유함과 사치스러움에 물들어 차츰 신앙이 식어버렸다.
22.4.6. 필라델피아 공동체
1세기 당시 필라델피아는 사르디스, 페르가몬, 트로이를 거쳐 로마로 가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지진이 잦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은 이곳에 도시를 세웠다. 이곳에서 신앙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소수였고 유다인들에게 핍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신자들 덕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이 생겨났다. 지진이 잦았던 탓에 그 도시의 건물들은 매우 튼튼하게 기둥을 세웠는데, 이 필라델피아 공동체는 소아시아의 일곱 공동체 가운데에서도 ‘기둥’으로 여겨졌다.
22.4.7. 라오디케이아 공동체
라오디케이아는 인근 히에라폴리스에서 연원한 파묵칼레 온천을 끼고 있고, 에페소에서 시리아로 가는 대로상에 위치해 있어서 교통의 요충이었으므로 상업적으로 큰 번영을 누린 도시였다. 목축과 목화 재배가 활발하여 모직과 면직이 다 함께 발달하였고, 의학과 제약업도 융성하여 특히 고약과 안약이 특효약으로 소문나서 치료차 방문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온천수가 라오디케이아에 이르면 식어서 미지근해진다. 이곳 공동체는 바오로의 제자인 에파프라스가 인근의 콜로새, 히에라폴리스 등과 함께 복음을 전하였다(콜로 4,12-13).
라오디케이아 공동체는 이단의 위협을 받지도 않았고, 유다인들의 핍박도 받지 않았으며, 로마 황제의 박해도 심하지 않았다. 또한 우상 숭배에 물든 자들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도시가 부유했던 까닭에 공동체 역시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는 했으나, 그만큼 영성은 빈약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처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22. 요한계 공동체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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