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20.6. 거룩함을 향한 열망, 사기지은

[요한복음] 20.6. 거룩함을 향한 열망, 사기지은

 

저녁노을의 글

2022-10-22 19:55:24 조회(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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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1. 평신도 성사조직이 생겨난 경위

  1785년 7월, 문중박해를 받은 이벽이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중심이 흔들렸던 조선 천주교회는 이듬해 봄 지도급 인물들이 모여 교회 재건 방안을 모색하였다. 교리교육과 고해 및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위한 조직을 꾸린 것인데, 처음에는 이승훈을 책임자로 세워 이벽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미사 전례와 견진성사를 집전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1786년 가을에는 교세가 나날이 확장되면서 각 지역의 신자들을 관리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역할을 담당할 성사 담당자를 이승훈이 직접 임명하였다. 교회사에서는 이를 ‘가성직제도’라 하는데 이때 가(假)는 ‘가짜’가 아니라 ‘임시’라는 뜻이다(정민). 하지만 그들은 성직자로의 ‘신분’을 가지려 한 적이 없었고, 오직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성사를 받고자 했던 것이고 그 기간도 기록에 따라서 2년 또는 4,5년 남짓으로 짧은 기간이어서 ‘제도’라 부를 수도 없음을 감안하면, 이는 오늘날의 성직자제도의 관점에서 붙인 ‘가성직제도’가 아니라 ‘임시성사조직’이라 해야 정확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사가들이 붙인 이 이름은 거룩함에의 갈망에서 나온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선각적인 움직임에 대해 지나치게 차갑고 율법적인 평가라고 생각한다. 

 

  이 임시성사조직을 공동으로 운영한 이들은, 달레가 쓴 ‘조선천주교회사’에 의하면,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승훈 베드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최창현 요한, 그 밖의 여러 사람이 신부로 선출되었다.” 달레의 이 기록은 정약용이 쓴 ‘조선복음전래사’에서 가져온 것인데, 정치적 논란을 피하고자 정약용은 교회 초창기부터 핵심적으로 활약한 인물들 가운데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빼 놓았다. 그래서 10명으로 알려진 이들 중 나머지 5명의 이름을 정확히 다 알 수는 없으나, 교회사가들은 아마도 이 여러 사람 가운데에 정약전, 정약종, 윤지충, 홍낙민 등은 확실하다고 추정한다(조현범). 그 근거는 조상제사금지령과 함께 이 임시성사조직의 활동이 독성죄에 해당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품고 성사 거행을 중단한 이후에, 각 지역에서 선교 책임자로 활동한 교회 핵심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양근 지역에 권일신, 광주 지역에는 정약전과 정약종, 포천 지역에 홍낙민, 내포 지역에 이존창, 전주 지역에 유항검과 윤지충 등이 중심이 되어 주변 인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이 임시성사조직이 시행되어 조직적으로 선교 활동을 하게 되면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비신자들이 교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늘었을 뿐 아니라 고해와 성체와 견진 성사 등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훈의 서한에 의하면, 1789년에 신자들의 수는 1천여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비망기’에 따르면, 임시성사조직의 일원이었던 최창현이 성사와 집회를 위한 장소로 쓰기 위하여 별도의 집을 마련하였다. 두 곳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한 곳은 남인 선비들이 많이 살던 회현동과 다른 한 곳은 성균관 유생들이 자주 다니던 길목인 명륜동이었다(유항검이 이승훈에게 보낸 편지). 이 두 곳에서 교리서를 보급하고 전례를 거행하는 등에 대한 모든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정민).

하지만 교리서들을 면밀히 검토하던 중 1789년에 유항검이 ‘성교절요’(聖敎切要)를 읽고 나서, 사제로 서품되지 않은 평신도가 성체를 축성하는 행위는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문제를 제기하자 이 임시성사조직은 즉시 성사 집전을 중단하고 북경 교구 주교에게 윤유일을 파견하였다(조현범). 그리고 북경의 구베아(Gouvea, Alexander de, 1782∼1808) 주교는 임시성사조직을 해산할 것과 조상제사를 금지할 것 등을 명시한 사목서한을 보내왔다. 그 결과,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었고,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모친상에서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룬 윤지충과 권상연의 진산 사건이 1791년에 발생하여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20.6.2. 교회직무에 대한 신학적 성찰

  우리는 거룩함을 향한 열망에서 평신도 지도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 한국교회의 임시성사조직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더욱 면밀하게 성찰해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교회사가들에 의해서 이에 대해 이루어진 역사적 평가가 신학적으로 매우 미흡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제직무를 직무사제직과 보편사제직으로 구분하면서 보편사제직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하여 이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교회직무를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성찰한 스힐레벡스(E. Schillebeckx)의 견해를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교회직무론: Ministry: Leadership in the Community of Jesus Christ, 1981). 

 

 

20.6.2.1. "지도자 없는 교회공동체란 존재할 수 없다"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일은 사제로 서품받은 성직자의 의무이자 권리이다(교회법, 276조 2항; 900조 1항). 그러니 평신도가 성체성사를 주례하는 일은 독성죄이며 따라서 불가하다는 것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래 근세와 현대 교회의 ‘교회법적 판단’이지, 고대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제기 자체가 잘못이다(E. Schillebeckx). 스힐레벡스가 집필한 ‘교회직무론’(Ministry: Leadership in the Community of Jesus Christ, 1981)에 따르면, 지도자 없는 교회공동체란 존재할 수 없다. “사제 없는 교회 없다”는 히에로니무스 교부의 말은 모든 교회공동체는 사제라는 지도자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고대교회의 통념을 반영하는 선언이다.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 순간에 최후의 만찬을 주재하시면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그리고 함께 자리했던 제자들에게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 하고 명하시며 사도로 임명하셨다. 이후 그분의 교회에서 성체성사는 모든 신자들의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와 함께 ‘사도’라는 직분 또는 ‘사도직’은 예수님께서 신적인 권능으로 제정하신 교회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체성사 거행과 사도직 수행이 예수 추종 내지 계승의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 

 

  성체성사와 사도 직분을 제외하면, 나머지 교회의 직제(職制)는 신적인 기원을 지닐 수 없고 교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당시의 지도자들이 성령의 이끄심으로 정하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기 위하여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정해진 모든 제도는 또한 동시에 성령의 선물로서 인정되어 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럴 경우마다 사도들은 성령께 기도하고 결정을 햇으며 따라서 “성령과 우리의 결정”(사도 15,28)임을 내세웠다. 유다의 자리를 채울 사도의 보궐선거에 마티아가 선출된 일이 그러했고(사도 1,15-26), 일곱 부제가 사도들의 보조자로 임명된 일이 그러했다(사도 6,1-6). 그 결과로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는 결과가 이를 확증해 주었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직무상 수행해야 할 인즉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공동체’이며 ‘예수의 공동체’로서 존속해야 할 공동체들의 사도성을 보전하는 일이었다. 이 ‘예수 추종’이 교회 직무의 윤리인 동시에 영성이었다. 따라서 변화되어 가는 교회의 내외 상황에 따라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교회 직무는 신설될 수도 있었고 폐지될 수도 있었으며, 강화될 수도 있었고 축소될 수도 있었다. 마치 나침반의 빨간 바늘은 우리의 위치가 달라지면 바뀌지만 변함없이 북쪽을 가리키기 위해 움직이는 이치와도 비슷하다. 이 ‘성령의 나침반’은 교회라는 피라미드의 상층부에서만이 아니라 하층부에서도 얼마든지 북쪽을 향해 움직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교도권에 의해 이루어진 교회의 정당한 직무 행사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이루어진 성령의 선물이라고 해서 모조리 원래부터 예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신적 기원과 권위를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삼위가 일체이시라고 해도 그것은 본성으로 일체이시라는 것이지 역할은 다르기 때문이다. 성자의 역할은 성부의 본성을 반영하시어 인간 역사에 구체적으로 드러내셨다는 데에서 기준이 되시는 것이고, 성령의 역할은 이 성자께서 하신 구체적 기준을 보편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성자와 성령의 역할은 다르다. 교회는 성자의 가르침과 처신을 기준으로 하되 이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도록 목표로 해야 한다. 

 

  더구나 교황과 주교단에서만 전유물(專有物)처럼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수신자이기 때문에, 평신도 지도자들이나 대중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보인 직무 행사 역시 성령의 선물일 수 있음을 교도권이 부인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오히려 이를 면밀히 검증한 후 추인해 주어야 하는 역할이 그들이 맡은 ‘베드로의 직무’이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교도권의 직무 행사 역시 평신도들과 심지어 세상 일반 사람들의 반응과 호응 여하에 의해서 성령의 선물 여부가 평가될 수밖에 없고, 그 선교적 효력이 그 판단 잣대가 된다. 이처럼 성령의 이끄심 앞에 온 하느님 백성이 평등하다. 

 

  신약성서의 직무발전사 전체에 걸쳐 두드러진 점은, 직무가 성찬례라는 전례에서 생겨났던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복음을 선포하고 성장하기 위한 과정에서 생겨났고 발전되었다는 사실이다. 공동체가 직무와 전례보다 우위에 있었다. 누구든지 공동체를 지도할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이 성찬도 주례하였다. 공동체의 직무는 예수 추종의 사도성에 대한 봉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직무란 하나의 신분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의 기능이었다. 그래서 이 중대한 명제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셨지만 성찬을 주례하는 직무란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원한다기 보다는 후대에 성령의 이끄심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이런 뜻에서 공동체 안에서 성찬을 주례하는 사제는 공동체의 정체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신약성서 시대에 세워지고 발전한 교회들에서 공동체의 직무를 이해하고 실천한 바에 따르면, 이 교회들은 신약성서에 터하여 자신의 사도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사도성’이란 우선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예언자들’이라는 기초 위에 건설되고 있음을 의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이 공동체들이, 예수의 인격 자체에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던 예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삼았던 신앙인들의 공동체였다는 뜻이다. 결국, 자신들의 공동체는 예수의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를 계승하고자 했던 ‘하느님의 공동체’라고 의식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공동체는 지도자를 가질 사도적 권리가 있었으며,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근거하여 성찬례를 거행할 교회론적 은총의 권리도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사제라는 공동체 지도자의 직무구조와 직무호칭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채로, 예수 추종의 사도성을 공동체가 이어받게 하는 것만이 타당한 고려의 대상이었다. 직무의 사도성은 공동체의 사도성, 즉 예수 추종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사도성을 발휘해야 할 ‘예수 추종’의 판별 기준의 우선적인 사도적 표지는 선포와 전례와 봉사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제자들에게 사도로서 당신을 기억하여 행하라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분부하셨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공동체는 공직자를 가질 사도적 권리가 있으며, 예수님께서 주신 신약의 위임(“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에 의하여 성찬례를 거행할 권리도 있었다. 그리고 이 공동체들은 독립된 단위들이 아니라 서로 사랑을 결합되어 있어서, ‘베드로의 기능’에 의해 사랑의 유대로 일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사랑하여라.” 하는 명령에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 안에서 예수를 추종하기 위한 모든 사도적 직무는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봉사요 성령의 은사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행하신 대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과 연대하여 함께 고통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직무의 사도성을 나타내는 본질적 표지였다. 그러니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사도적 권리가 공식교회가 정한 사제선발요건보다 앞선다.  

 

  이러한 스힐레벡스의 견해를 듣고 있자면, 1천년 대와 2천년 대로 이어지는 동안 가톨릭교회의 교회직무상의 변천과정에서는 예수님 면전에서도 스승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던 제자들의 시행착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스카리옷 유다의 배신만큼은 아니지만 베드로의 부인에 비견할 만한 짙은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시며 3천년 대의 교회에서 능히 복음적인 면모를 일신할 것을 믿고 계신다. 이것이 사도적이고자 하는 공동체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공동합의적인 교회이며, 복음에 기원을 둔 가톨릭교회이다.

 

20.6.2.2. 칼케돈 공의회의 증언

  교회 역사의 첫 천년 동안에 이루어진 교회직무에 대해서는 5세기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451년)의 제6조 규정에 잘 나와 있다. 교부들의 신학에 바탕하여 고대교회의 견해와 실천을 법적 형태로 훌륭하게 정리해 놓았다. 이 규정은 모든 형태의 ‘절대 서품’, 즉 특정 공동체와 무관하게 지원자를 축성하는 일을 단죄할 뿐 아니라 무효로 선언하였다: “누구든지 절대적 방식으로 사제나 부제로 ‘서품’되어서는 안 된다. …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순교자묘에서든 수도원에서든, 그에게 명백히 한 지역공동체가 지정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경우에 “그의 ‘서품’은 무효이며, … 따라서 그는 어떤 기회에라도 직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거룩한 공의회는 결정하는 바이다”(칼케돈 공의회, 교회법, 제6조). 

 

  고대교회에서도 공동체는 지도자를 가질 권리가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음이 이 칼케돈 교회법 제6조가 입증해 주고 있다. 지역교회의 공동체가 자신에게 사도성에 봉사할 교역자를 지명했고, 그 교역자는 공동체의 사도성을 위해서 성찬례를 주례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와 직무의 상관성이다. 직무는 교회적으로 규정되는 것이지, 교회구성적 맥락과 상관없이 교역자 자신의 존재론적 자격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도성을 위해서 공동체는 지도자를 가질 권리가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고, 공동체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교회에서는 공동체와 그 지도자들이 하도 힘차게 결합되어 있어서, 원칙적으로 다른 공동체로의 전임(轉任)이란 불가능할 정도였다. 

 

  칼케돈 공의회 교회법 제6조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중요한 결론은, 어떤 이유에서든 한 교역자가 한 공동체의 주도자 구실을 그만두게 되면 그 사실 자체에 의하여 이미 글자 그대로 평신도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교역자란 교회 내 신분이 아니었고 공동체에 봉사하는 기능을 맡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교회 초기의 평신도 성사조직에 대해 해체령을 내렸던 구베아 주교는 칼케돈 공의회의 법령을 모른 채 트리엔트 공의회의 법령만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 

 

20.6.2.3. '교회' 이념의 퇴색과 사사화

  동서방 교회가 분열된 뒤 서방의 라틴 교회 중심으로 열린 두 차례의 공의회, 곧 1179년에 열린 3차 라테란 공의회와 1215년에 열린 4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 중세 유럽 사회의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공동체적 전통이 살아있던 ‘교회’ 이념이 퇴색하고 제국교회적 성향이 강화되어 가는 터에 사제의 교역도 제국의 공직자처럼 하나의 특수한 신분으로 규정되는 사사화(私事化)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즉, 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칼케돈 공의회의 관점을 파기해 버렸는데, 아무도 “생계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지 않는 한” 서품될 수 없다는 봉건적 관점을 취한 것이다. 뜨내기 성직자들이 숱하게 많던 당신의 경제사회적 여건에서 그들의 생계문제는 과연 절박한 문제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신학적으로가 아니라 사회복지적으로 풀고자 했던 이 3차 라테란 공의회의 시도가 퇴색된 교회 이념을 현실화시키고 사사화된 사제 신분을 앞당겨 현실화시켜 버렸다. 봉건 제도가 마치 새로운 혁신인 것마냥 여겨지던 중세에 ‘교회’란 고대교회 시대에까지 살아있던 공동체가 아니라 흔히는 ‘사유(私有) 교회’를 가진 세속 권력자의 지위를 드러내는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를 이런 봉건제도의 질곡에서 해방시키려는 ‘중세적 복음운동’의 일환으로 사제 신분의 사사화를 시도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 이후에 생겨난 가톨릭교회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열린 트렌토 공의회에서는 고대교회의 공동체적 전통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루타의 직무관을 다분히 정치적으로 반대하기 위해서라도 라테란 공의회의 사사화된 직무관은 오히려 영성적으로 강화되어 버렸다. 사제는 공동체와 상관없이도 서품 때에 ‘인호’를 받는다고 규정해 버린 것이다(트렌트 공의회, 교회법, DS 1771-8조). 

 

20.6.2.4. 사제인호와 '가성직제도'

  조선에 복음이 들어온 직후인 1786년부터 1789년에 운영된 이른바 ‘가성직제도’, 정확히는 ‘임시성사조직’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유항검이 근거로 찾은 조항도 트렌토 공의회의 교회법에 따른 성사생활 지침서인 ‘성교절요’(聖敎切要)에 기록된,  신품성사의 ‘사제인호’였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서 이전의 공의회들과는 달리 초대교회로 돌아갈 것을 지향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의식적으로 고대교회의 신학적 직관들을 되살렸다. 평신도들의 보편 사제직을 강조하면서 사제들의 직무 사제직이 이에 봉사해야 함을 적시하였다(교회헌장, 10항; 평신도 사도직 교령, 25항; 사제 교령, 9항). 이에 비추어 보면, 조선 천주교회 초기의 ‘가성직제도’는 복음을 전하고 입교한 신자들에게 성사를 받게 해 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사도성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독성죄’를 범한 일이었다고 단죄하기보다는 오히려 평신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성사생활을 함에 있어 자발성을 발휘하여 교회를 활성화시킨 ‘임시성사조직’으로써 본받을 만한 일이었다. 

 

  이런 자발적이면서도 사도적인 노력을 본받아, 아시아인들의 심성과 문화 그리고 문화 속에 이미 개입하신 하느님의 신성을 발견해야 하고, 아시아의 종교인들에게 공동선 증진 노력을 통해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해야 하며, 무신론과 세속화에 물든 아시아인들에게도 최고선을 증거하는 노력을 통해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신성을 증거함으로써 하느님께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사도성을 견지하기 위하여 성사생활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하여 발휘되었던 자발적 노력이다. 

 

  조선 천주교회 초기에 이 자발적 노력으로 나타난 임시성사조직에 대하여  ‘가성직제도’라 하고 사제로 서품되지 못한 평신도가 성사를 집행했으므로 독성죄를 범했다고 간주했던 유항검과 이승훈 그리고 구베아 등의 판단은 라테란 공의회 교회법의 관점이었고, 다분히 종교사회학적인 관점이었다. 그 당시에 고해성사와 성찬례를 행했던 이들은 사제가 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성사생활을 하고자 했던 것이었고, 사제로서의 신분이 아니라 사도성을 계승하기 위한 사제직 기능이 중요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실천이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즉시 그 실천을 멈추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였다. 

 

  그러므로 고대교회의 칼케돈 공의회 교회법과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법의 관점에서는 그들의 임시성사조직은 성사생활을 위해 자발적으로 발휘된 보편 사제직의 실천으로서, 오늘날에도 평신도들이 본받아야 할  역사적 모범으로 보는 것이 사도성을 위한 신학적인 관점이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받기 위한 사도성을 계승하기 위하여 성사생활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6.3. 평신도 성사조직의 성서적 의미

  이상 그 역사적 경위와 신학적 의미를 살펴본 평신도 임시성사조직은 성령께서 한국교회를 창립한 선비들에게 민족을 복음화시키기 위해 베푸신 놀라운 은총이었다. 성령께서 이벽을 부르시어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교회를 창립하게 하신 오묘한 섭리와 마찬가지로 그가 조직한 강학회 선비들로 하여금 그의 사후에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사명감과 성사의 힘을 자각하게 하시고는 자발적으로 조직하도록 이끄셨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사기지은’, 즉 네 가지 놀라운 은총이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 사건으로 교회를 시작시키신 역사 개입에 대하여 사도 바오로가 진술한 대목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양식인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이다. 바오로 자신도 로마식 교육을 받아 익숙한 논리-분석적 사유방식으로 역시 이 사고방식에 익숙한 코린토인들에게 도무지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활의 신비를 설명하느라고 도입한 개념이다(1코린 15장). 그리고 후대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리한 이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며”(impassibilitas, 손상되지 않음),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claritas, 빛남), 또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나며”(agilitas, 빠름),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subtilitas, 예민함)는 것인 바, 사도 바오로가 처음 시도하고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리한 이 같은 그리스적 사유 개념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영혼과 육신, 현세와 내세를 나누는 이원론적 요소가 다분하다. 그래서 이 사기지은의 교리는 이를 배우는 신자들이 도저히 체험할 수 없고 입증할 수도 없는 비현실적이고 공허한 개념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교회보다 예수님께서 위에 계시고 교리보다 성서가 앞서는 법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부활에 대한 후대 교회의 이해를 초월하여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현존하시고 은총을 베푸셨다. 그래서 이후 교회의 역사에서도 예수 부활과 발현 체험, 그리고 이로 인한 하느님의 개입은 어김없이 나타났으며 이 현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사기지은이 위력적으로 발휘되어 왔으며, 한국교회의 초창기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동아시아와 특히 한국에서 두드러지는 사유방식인 직관-종합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기지은의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지평이 환히 드러난다. 

 

- 사기지은 중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예민함(subtilitas)의 은총으로 해석될 수 있는 현상이 무신론적인 성리학 일색의 조선 사회에서 이벽이 단연 한역서학서들을 통해 그리스도 신앙을 깨달아 신앙생활을 하다가 한국교회를 창립한 업적을 들 수 있다. 그의 신앙적 깨달음이 얼마나 예민했는지는 천진암 강학회에서 동료 선비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을 전해 주고자 지은 「성교요지」가 선교사요 신학자였던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를 능가하는 통찰이 담겨 있는 것만 보아도 입증된다. 이것이 은총인 이유는, 대표적인 한역서학서인 「천주실의」을 읽은 선비들은 이벽 이전 150년 동안 수도 없이 많았지만 신앙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남인 학자들 중 이익과 이가환 같이 실학을 받아들인 선비들조차도 신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거부했는데, 오직 한 사람 이벽만이 신앙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선비들과 민중들에게까지 적극적으로 전파하고자 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 또한 그가 문중박해로 세상을 떠난 후, 남은 강학회 출신의 선비들은 충격을 딛고 대책을 수립하여 이벽의 역할을 계승해 나가기로 결의하고는 즉시 임시성사조직을 10명의 선비들로 꾸려 나갔다. 그 결과 놀라운 선교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는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나는” 빠름(agilitas)의 은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민하게 빠른 조치는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컸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들도 이벽과 같은 문중박해가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문중은 물론 유림 일반으로부터의 박해마저도 감수할 각오로 이런 기민한 조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진정성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결정이 현실화될 경우 입교자가 늘어나면 유림의 반대가 충분히 예상되던 상황이었고 유림의 반대는 조정의 박해로도 나타날 것이 명약관화한 상황에서도 그 선비들은 신생 교회의 지도자 임무를 떠맡았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천주교의 교리대로 조직을 운영해 나갔다. 그리고 과연 조정의 박해가 실제로 가해지자 그들은 일반 양반 신자들이 쉽사리 교회를 이탈한 것과는 달리 신앙을 고백하며 치명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 그리고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빛남(claritas)의 은총은 이벽과 10명의 임시성사조직 지도자들이 모두 문중에서나 조정에서 박해를 당하여 사교를 퍼뜨렸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했으나, 정작 당대의 민중은 후속 치명의 위험을 각오하고서라도 그들이 전한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받아들여 입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입교 현상으로 나타났다. 하도 그 속도와 규모가 빨라서 조선 왕조 역사 이래 보기 드문 하나의 민중운동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조광, 노길명). 박해의 위협 속에서 입교한 신자들은 천주교 교리가 가르치는 인간 존엄성의 진리와 천당 복락이 그야말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복음이었다. 이미 왕조 차원의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작된 마당에, 죽기를 무릅쓰고 천주교에 입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느님 신앙과 이로 인한 은총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손상되지 않음(impassibilitas)의 은총은 위의 세 가지 은총의 종합적인 결과로, 향후 백 년 동안 전국에 189군데의 심산유곡에 교우촌들이 세워졌으며 여기서 당시 조선 사회와는 대조적인 신앙질서가 실천되어 한국의 문명을 앞당긴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들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이 발각되어 체포되고 고문당하다가 치명한 순교자들이 구전상으로 2만 명이 넘으며, 이들 중 기록이 확실한 순교자 103위는 성인품에 올랐고, 124위는 복자품에 올라있다. 

 

  이 네 가지 역사적 현상 모두 자연스럽거나, 논리적이거나,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고 하느님 신앙을 부인하는 무신론적 사조에 저항하여 신앙적 가치에 순응하며, 거룩함의 가치를 성사로써 구체화시켜 선교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당시 사회의 권력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실천된 데다가, 서구 사회에서나 아시아에서 발견되지 않는 이례적인 현상인 까닭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신 사기지은의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 창립과 성사조직에 나타난 사기지은은 그 결과 단기간에 천 명이 넘는 입교자들을 불러 모을 만큼 폭발적인 선교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들이 주교로부터 합법적인 서품을 받지 않고서는 성사를 거행할 수 없음을 알게 된 후에는 자발적으로 이 조직을 해체하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이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자생적인 교회 창립과 더불어 자발적인 조직을 결성하여 선교할 정도로 성사에 대해 열망한 움직임 역시 세계 교회역사상 이례적인 현상이요, 평신도 사도직으로서 주목할 만한 역사 현상이다. 

 

20.6.4. 평신도 성사조직의 교회론적 의미

  성사조직을 조직하여 교회를 운영한 그들은 모두 평신도 유학자들이었다.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열어 천주학을 공부한 연후에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인 선비들은 이벽의 제안으로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어 세례를 받아 오게 하였다. 그리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돌아온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은 강학회 선비들은 이벽의 주도로 교리를 가르치는 모임과 함께 세례 성사와 고해성사 그리고 성체성사를 베풀었다. 처음에 수표교 이벽의 시작된 이 움직임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명례방 김범우의 집으로 옮겼다. 그런데 우연히 포도청 포졸들에 의해 이 모임이 적발되면서 최초의 박해가 닥쳤다. 주도자 이벽이 문중박해를 받게 되어 세상을 떠났다. 

 

  강학회 선비들은 이승훈의 주도로 이벽 사후의 대책을 수립하였으니, 그것은 공동으로 지도자 조직을 꾸려 교리 교육과 성사 거행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10명으로 구성된 이 성사조직은 커다란 선교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이 교리 교육과 성사에 대한 갈망에서 자발적으로 조직을 운영한 일은 한국교회 초창기의 지도자들이 진정성 있게 신앙을 진리로 받아들였음을 알게 해 주는 동시에, 그들이 얼마나 거룩한 가치를 열망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즉, 천주교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당시 사회 현실에서 벗어나 거룩한 진리에 맛들이게 하고, 세례 성사로써 거룩한 진리를 실천할 각오로 새로운 삶을 출발시키며, 고해 성사로써는 속된 세상에 물들어 저지른 죄를 깨끗하게 씻고 거룩함에로 귀의하고, 성체 성사로써는 거룩하신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게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성사(聖事)’로서 거룩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발생한 바오로의 사도직을 연상케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그들의 신앙을 불타오르게 하여,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 전하며 그분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성사를 베푸려는 열의로 가득차게 하였던 것이다. 선교사가 도착하기 10 년 전이요, 한국교회에 교구가 설정되기 40년 전에, 당시 조선 사회의 엘리트인 젊은 유학자들이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사명감을 느끼고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베푼 이 선도적 움직임은 당시 한양 선비 천여 명을 입교시킬 정도로 매우 효과적인 선교방식이었으며, 이 무렵에 각 지방의 명망있는 선비들을 다수 포섭한 결과 향후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국에 퍼질 수 있게 만든 매우 조직적인 선교방식이었다. 

 

  그리고 이 매우 이례적인 선교열 현상에 나타난 자발성, 평신도 주체성 그리고 성사적 갈망이 향후 민족 복음화 과업에서는 물론 아시아 복음화 과업에서 매우 중요한 성령의 이끄심이 될 것으로 본다. 이 평신도 성사조직은 사상과 글로 그리스도 신앙을 토착화시키기 시작한 한국교회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신앙을 조직화시킨 진전된 토착화 조치로 볼 수 있다. 

 

  앞서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을 아시아에 토착화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아시아인들의 심성과 문화 그리고 종교 속에 이미 개입하신 하느님의 신성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야 이미 오랜 종교적 전통을 지니고 있는 아시아인들에게 그들의 종교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화의 세속적 풍조에 물들어 가고 있는 아시아인들에게 서구적 문명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인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려는 사회교리에 따라서 서구 세계와 아시아 세계가 다 함께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려면, 세상에서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직업활동을 하는 평신도들의 각성과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이 땅에 그리스도 신앙을 들여온 선각자 선조들은 신앙을 추구함에 있어 지성적 면모를 보이는 한편, 신앙에 대한 박해가 닥치자 이에 저항하는 의지로 순교를 감행하고 이를 순교 정신으로 계승하였다. 그 배경이 된 원동력이 있었으니, 그것은, 앞서 최양업이 보고하는 바와 같이, 신분차별적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회악 현상에 대한 저항 의식을 발휘하는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백성에게 하느님 신앙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갈망이 그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무속으로 취급되어 오면서 잡신과 뒤섞인 전통적 하느님 신앙에 대해서 그리스도 신앙에 의한 식별 작업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토착화 작업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선조들은 한국의 전통적 하느님 신앙의 기반 위에 그리스도 신앙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흔적은 이벽의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 그리고 정약종의 ‘주교요지’,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 그리스도교의 천주와 유교의 상제를 동일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간신앙에서 찾는 하느님의 성격과 유사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묘사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김웅태). 

 

  우리는 이미 제1장에서 제12장까지의 복음서 본문 해설의 부록에서 전통적 하느님 신앙의 흔적으로 추적해 왔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아시아의 동방으로 불러내셨으며,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을 계시해 주셨음을 확인하였다. 이 계시에 대해 한민족의 선조들은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이념으로 하느님의 뜻을 자신들과 주변 민족들에게 전하고자 하였으며, 8조법금과 홍범9주의 질서로 모범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묘한 섭리로 그리스도 신앙이 우리 민족에게 전해지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를 ‘신관의 토착화’라 부를 수 있다면, 신앙 선조들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으로 성사조직을 창안하여 운영한 일은 ‘교회 조직의 토착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신도들의 성사조직을 ‘가성직제도’로 평하는 교회사가들도 그 조직이 이룩한 성교적 성과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 최초로 체계화된 연구 훈련을 받아 교회사 연구를 시작했던 최석우는 “한국교회는 토착화된 교회인가?”라는 물음을 필생의 화두로 삼아 연구했는데, 이른바 ‘가성직제도’에 대해,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활기찼던 시기”라고 평가하였다. 이벽과 이승훈이 주축이 되어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던 활동은 처음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사람이 늘어나자 중인 출신으로 의원을 하고 있는 명례방 김범우의 집으로 옮겨서 계속되었다. 이 활동이 추조적발사건으로 중단될 때까지 한양 선비 천여 명이 입교하였다. 

 

  이 사건 이후 이벽이 천주교 모임의 지도자로 알려지자 이벽의 집안에서 일어난 문중박해로 이벽이 세상을 떠나자, 강학회 선비들은 대책회의를 열고 이승훈을 주축으로 모두 10명의 선비들이 명륜동과 회현동, 두 군데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푸는 활동을 은밀히 계속하였다(정민). 추조적발사건에서 교훈을 얻은 이 선비들은 그때부터는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양반 선비, 중인, 상민과 천민을 신분별로 구분하여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편, 경기(양평, 포천), 충청(내포), 전라(진산, 전주) 등 각 지방으로도 이 모임이 퍼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 4천여 명이 입교하는 선교 성과를 거두었다. 

 

  그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이미 약속한 대로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를 1795년 1월경에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주 신부는 1797년에 명도회(明道會)라는 신자 조직을 조직하여 남자 회장에 정약종, 여자 회장에 강완숙을 임명하여 가동한 결과,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만여 명에 이르는 신자를 얻을 수 있었다(방상근). 

 

  이상의 역사적 사실만 상기해 보아도, 이들 평신도 지도자들이 성직자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사를 갈망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성직자의 성사 거행이 실현되자 열심히 교리를 가르치고 교리를 배운 이들을 성사에 참여시켜 커다란 선교적 성과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는 성사 활동이 얼마나 선교적 위력을 발휘했는지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 ‘독성죄’ 논란은 이 사태와 현상의 본질을 한참 비껴간 논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당시의 교회법과 성품성사 규정에 무지했을 뿐이며, 그것을 지적받자 즉시 자신들의 성사 거행을 중지하고 성직자 영입운동에 돌입했으며, 그러다가 정식 성직자가 파견되어 오자 성사 거행에 전심으로 협력함으로써 놀라운 선교 성과를 거둔 것만 보더라도 충분히 정상을 참작할 수 있는 사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오늘날 평신도 사도직에 있어서 성사적 갈망을 회복해야 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역사적 모범 사례로 규정지어야 한다고 본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20.6. 거룩함을 향한 열망, 사기지은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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