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19.3. 이벽과 정씨 삼형제의 죽음

[요한복음] 19.3. 이벽과 정씨 삼형제의 죽음

 

저녁노을의 글

2022-10-17 08:00:10 조회(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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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 한국교회의 창립

  예수님께서 죄도 없이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는 유다인들 특히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등 당시 유다교의 지배층이 그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고 비우신 이유는, 공생활 동안 당신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실현되는 길을 닦기 위해서였다. 과연 십자가 죽음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소에 가르치신 바를 다시 상기시켜 주시고 믿음을 굳세게 해 주신 다음, 성령을 보내시어 사도로 거룩하게 변화시키셨다. 그 사도들이 교회를 이루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분의 성령이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구세경륜(救世經綸)이라 한다. 그런데 구세경륜의 정점인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이룬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보자면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주와 인간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만민의 하느님이시다.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말씀하셨고, 모든 민족은 다양한 종교 양식으로 이 말씀을 알아듣고자 하였다. 하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그분의 부르심을 인격적인 양식으로 알아들은 인물은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고향을 떠나 낯선 가나안 땅에 정착하였으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믿고 그 믿음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이 후손들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불리웠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의 시조인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공경한다. 단지 혈통상으로 시조이기 때문에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준 위인으로 공경하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고 있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탈출시켜 다시 가나안 땅으로 해방시키셨다. 그리고 이 탈출과 해방의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계명을 지키라고 분부하셨다. 이 계약과 계명이 이스라엘 민족을 하느님 백성으로 조직되게 한 본질이었고 또한 하느님과 그분 백성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핵심이었다. 모세의 역할은 아브라함이 전해준 믿음을 율법으로 구체화시켜 백성을 조직화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을 물려주는 역할을 주셨고, 모세에게는 하느님 백성을 모으는 역할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시대가 마쳐갈 무렵 메시아의 때가 되었을 때,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닦게 하셨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한민족에게는 광암 이벽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모세와 요한의 역할을 모두 맡기셨다. 그래서 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이벽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강학회 선비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교회를 창립하였다. 또한 이승훈과 함께 명례방 집회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성사 활동을 통하여 많은 이들에게 선교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신앙 공동체 설립 이후 오랜 세월에 걸친 박해에도 불구하고 중국 천주교회처럼 퇴화하지도 않았고, 일본 기리스탄 교회와 같이 지하로 숨어 들어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박해가 거듭될수록 신앙심이 심화되고 교세가 확대되었다”(이장우)

 

 이벽은 한민족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천주교를 통해 그리스도 신앙을 진리로 받아들인 구도자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동료들을 규합하여 한국교회 자생적으로 발생시킨 주역이요 한민족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길을 닦은 겨레의 예언자였다. 마치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한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 요한처럼 이벽은 한국교회의 길을 닦았다. 그가 길을 닦은 덕분에 한국교회는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는 자랑스러운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나 보편교회 역사에 있어서 유례가 없는 일로서, 저절로 일어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섭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기적이었다. 

 

19.3.2. 이벽이 그리스도 신앙을 믿게 된 경위

  무릇 신성의 모든 흔적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반영하고 이는 하느님께서 몸소 일하신 결과이다. 사도 바오로가 필리피 공동체의 신자들에게,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필리 4,8) 하고 권고한 것도 이 모든 선한 것들이 하느님, 특히 성령께서 이끄신 결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우선 인간이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구원되고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을 하느님 자신이 인류에게 명시해 주셨음을 선언하는 바”(종교자유선언, 1항)라고 천명하였고, “여러 고등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고 천명하였다. 그러므로 한민족 역사의 시초에 하느님께서 이끄신 흔적을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 및 재세이화의 이념이나 제천의식 및 천손의식의 사상으로 볼 수 있는 견해(이대근)도 이 같은 성령의 이끄심에 근거하는 것이고, 조선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선비들이 보유론적 관점에서 효의 가치와 하느님 신앙의 가치를 갈등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유가적 그리스도인들을 이끄신 성령 덕분이다(심상태). 

 

  더욱이 이벽이 18세기 조선에 전래된 마테오 리치와 판토하의 한역서학서에서 원시유학 경전에 나오는 ‘천(天)’을 자연의 하늘로만 해석하지 않고 인격적인 하느님으로 해석한 바에 주목하여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 선비들 역시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종교적 심성 속에 하느님을 알아보는 신앙 감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 또한 성령의 이끄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벽(1754~1785)에게 먼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역사의 시초부터 하느님의 선하심에 이끌린 한민족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하도록 부르심 받았기 때문이다. 「천주실의」(1584년)나 「칠극」(1614년) 같은 한역서학서들은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입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명청 교체기부터 조선으로 과학 기술 서적들과 함께 꾸준히 유입되었는데, 이벽과 그 동료들이 천진암 강학회에서 이 서적들을 본격적으로 논하기 이전에도 1614년에 「천주실의」를 처음으로 인용하여 천주교의 기본적인 정보와 교리를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소개한 이수광을 비롯해서 근 2백 년 동안에 이 서적들을 읽어 본 조선의 선비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벽을 제외하고는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다. 천주교 서적 한 두 권을 읽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리스도 신앙이 생겨났다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앙은 하느님의 주도권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이다. 그분이 부르시고 나타내셔야, 그리고 이를 알아들어야 생겨나는 것이 신앙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문난적의 올가미에 얽매여 학문의 자주성이 상실되고 추호도 독자성이 용납되지 않던 당시 사상계의 분위기 탓에 이벽은 이미 어려서부터 이 서적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학 서적들을 독서하며 지식의 경지를 넘어 홀로 신앙을 깨달아 수양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사상적으로 가깝고 정치적으로도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녹암계 선비들이 서학의 서적들을 읽으며 강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이벽이 합류하여 이 서적들에 담긴 서학을 논할 수 있었고 천주교 신앙 공동체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창설 주역이 되었던 천진암 강학회 선비들 가운데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 배경은 이러하다. 그의 5대조 이경상은 인조 때 병자호란으로 인질로 심양에 잡혀간 소현세자(1612~1645)를 8년 동안 수행한 서장관(書狀官)이었다. 소현세자가 북경에 머물던 1644년 9월부터 11월까지 70여 일 동안 아담 샬 신부(Johann Adam Schall von Bell, 1591~1666)과 친분을 나누었는데, 조선으로 귀국할 때 천주교 서적들과 성물을 다섯 궤짝이나 가지고 왔다. 아담 샬 신부는 마테오 리치의 요청으로 파견된 독일 출신 예수회 선교사로서 천문과 역법에 밝아서 명 왕조에서 천문대장 직을 맡기도 하였다. 그가 소현세자와 이경상에게 준 천주교 서적들 중에서 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귀국한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임을 당한 후 이경상은 자신도 받아서 가져온 서적과 성물을 일체 보거나 만지지 말라고 유언을 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 후 5대가 흐르는 동안 유언은 무색해지고 이벽은 어려서부터 천주교 서적들을 자유롭게 읽으며 자라났다(변기영). 그가 17세 되던 1770년에는 천진암에 들어가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 등과 함께 1783년까지 13년 간 서학과 천주교 교리에 매진하기도 하였다(Longford). 이렇게 보면 그간 천진암 강학회가 열린 시기가 1777년 주어사에서 열렸다는 주장(최석우, 조광)과 1779년 천진암에서 열렸다는 주장(변기영), 그리고 주어사와 천진암을 장소로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차례 열렸다는 주장(주재용, 유홍렬, 김옥희, 이원순)이 엇갈려왔었는데, 이 모든 시기가 다 강학회 시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실 주어사와 그 암자인 천진암은 포천에 살던 이벽과 마재에 살던 정씨 삼형제들이 어려서부터 서로 만나서 독서하며 어울리던 익숙한 장소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알 수 있었던 바는 이벽이 천주교 교리에 해박하였고, 신앙의 경지에서 다른 선비들을 가르쳐 줄 정도로 강학회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벽의 신앙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는 이유가 있다. 그는 단순히 천주교 교리를 다른 선비들보다 많이 또 일찍 알았기 때문에 한국교회를 창립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벽의 생애에 대해 연구하는 교회사가들(조광, 차기진)도, 민족 사학자(이덕일)이나 다산학자(박석무)도 이벽이 어려서부터 주자학은 물론 양명학까지도 섭렵하는 등 유학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서학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학문적 지성으로 신앙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이익의 직계후손으로서 서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당대 천재 소리를 들었었고 같은 남인 소속으로 가까운 학문적 벗이었던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이 이벽과 사흘 동안 논쟁을 벌인 끝에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고 승복을 하고도 신앙인이 되지 못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가환은 남인의 영수(領袖)로서 1795년 충주 목사가 되자 고문 형벌 중에서도 너무 악독하여 시행하지 않던 주리를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들에게 시행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벽과의 토론 이후 이가환도 천주교 신자라는 혐의를 입게 되었는데, 도리어 이 혐의를 벗고자 천주교 신자들에게 더욱 악형을 가하여 자신의 혐의를 벗으려고 했다는 말이 있다(정병설). 

 

  게다가 이벽의 노력으로 신앙인으로 입교한 선비들 가운데에서 교황청의 조상 제사 금지령이 전해지고 조정의 박해가 시작되자 떨어져 나간 양반 신자들 또한 학문적 지성과 신앙적 의지가 반드시 함께 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한문으로 된 서학 서적을 읽을 수 없었고, 한글로 된 「주교요지」를 읽었거나 전해들은 중인 이하 계층 가운데에서, 여성들이나 천민들은 박해가 시작되었어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계속 늘어서 19세기 후반 병인박해 무렵에는 신자의 대다수를 이루었고 이들 중에 치명자가 가장 많이 나왔다. 이 현상은 또 어찌 설명할 것인가?

 

  결정적으로 이벽이 천주교 신앙을 전할 목적으로 당시 학문적 명성이 뛰어나 전국에 제자를 두고 있던 권철신(權哲身,1736~1801)을 찾아가 열흘 동안이나 설득하여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열었는데, 그 열여덟 살이나 연하였던 이벽(1758~1789)이 좌장이 되어 실학 강학회를 천주학 강학회로, 다시 천주교 신앙공동체로 성격을 전환시키고,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벋고 돌아와 강학회 선비들에게 세례를 줄 때에도 이벽이 먼저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 다음에 권철신이 암브로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이후 불어 닥친 박해에서 지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 치명하기까지 한 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모든 사실들은 학문적 지성 이전에 이를 도구로 삼는 하느님 신앙이 더 중요하며 이는 단지 인간적 의지나 노력의 결과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이요 부르심이다. 

 

  신앙을 깨달은 이벽은 학문도 뛰어났다. 그가 학문적으로 교류했던 남인계 유학자 가운데에서만 보더라도, 실학자 성호 이익의 계보를 잇는 녹암(鹿庵) 권철신을 찾아가 열흘 동안이나 토론을 거듭하여 기어이 천주교에 입교할 의사를 얻어냈고 이는 그가 전국적으로 명망이 높은 실학자로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녹암계 선비들이 천진암 강학회와 천주교 신앙 공동체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또한 당대 최고의 천재로 일컬어졌던 이가환과도 사흘 동안 공개 토론을 진행하여 승복을 받아 냈으며, 그리고 조정의 요직으로서 실력을 가장 인정받은 관리들만 등용될 수 있는 홍문관(弘文館)에 무려 8대째 출사한 명문 가문이어서 ‘옥당(玉堂)’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불리었던 나주 정씨 가문에서 사돈지간이기도 했던 정씨 삼형제 등이 이벽의 학문 수준에 수긍하여 천진암 강학회에 참가하고 신앙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그의 학문 수준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특히 정약용은 이벽의 사후에 그를 추모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저술 곳곳에 그의 높은 학문 수준을 회고하는 글을 적어 놓았다. 18세기 조선의 대실학자로 평가받은 그가 이벽의 학문에 자신은 도저히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자평해 놓은 것이다. 이벽이 1754년 생이요 정약용이 1762년 생이니 두 사람은 불과 8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사이요, 이벽이 약용의 이복 매형 간이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정약용은 이벽을 스승으로서 깍듯하게 모셨다. 원시유학과 성리학을 꿰뚫어보는 안목이나 실학과 서학에 눈을 뜨게 해 준 스승으로서만이 아니라 신앙의 스승으로서 이벽이 죽은 후에도 그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학문을 연마하며 사숙하였다. 유배지 강진에서 저술한 여유당 전서 5백여 권에 담긴 다산의 사상은 천진암 강학회에서 이벽으로부터 배운 가르침의 열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조상 제사 금지령을 내린 제도교회에 반발하여 배교하였으되, 이벽을 통해 전수받는 천주교 신앙과 그 학문에 있어서는 철저한 제자였고, 신학 토착화에 앞장선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자였다. 

 

19.3.3. 이벽의 메시지: 성교요지

 이벽은 실학 강학회를 서학 강학회로 전환시켰고 다시 천주학 신앙 공동체로 창립했으나,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 이듬해에 추조적발사건 이후 문중박해로 숨을 거두어야 했으니 그 기간은 겨우 1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어려서부터 천주교 서적에 접하고 신앙에 이끌려 거의 10여 년 이상 수양을 하다가, 강학회 동료 선비들을 만나서 지은 「성교요지」와 ‘천주공경가’에는 그가 발견한 한민족의 신성 즉 하느님의 부르심이 담겨 있으며, 그가 강학회의 동료 선비들과 동시대의 신자들 더 나아가서는 겨레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 메시지에는 그가 글을 배우며 유학의 경전들과 천주교의 서적들을 읽는 동안에 목격한 18세기 조선 사회의 사회상이 고스란히 배경으로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무릇 하느님과 그분의 신성에 관한 메시지에는 그것을 보내는 이의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이 담겨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이시며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보편적 진리이신 하느님께서는 히브리 민족에게서처럼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셨고 그들의 역사에 개입하시어 이끌고 계신다. 다만 유독 히브리 민족 안에서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그 후대의 예언자들만이 하느님 신성에 응답하였고 그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 그것이 신구약성경이다. 

 

  그런데 히브리 민족은 독선적이고 편협한 선민의식에 빠져 정작 자신들 안에 오신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으므로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히브리인들 중에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히브리, 참 이스라엘로서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가 전하는 복음이 18세기 조선에 기묘한 섭리로 전해졌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되, 이스라엘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한민족을 이끄신 신성의 흔적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이벽은 처음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본 인물이다. 

 

  한국교회 안에서 처음으로 1970년대에 이벽의 서학사상을 연구한 김옥희는 학문적 경지를 담고 있는 「성교요지」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한 바 있다.

 

  「성교요지(聖敎要旨)」는 광암(曠菴) 이벽(李蘗)이 지은 것으로서 서교(西敎)를 수용(受用)·이해(理解)하는 초기에 나타난 최초(最初)의 한국(韓國) 기독교적(基督敎的)인 사상적(思想的) 사료(史料)이다. 또한 조선후기(朝鮮後期)의 서학의식(西學意識) 구조(構造)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作品)이다. 

 

  한편 유례(類例)없는 큰 박해로 대부분 분실(紛失)·소실(燒失)된 조선서교관계서(朝鮮西敎關係書) 가운데서 현존(現存)한 가장 초기적인 국내본(國內本)으로 주목(注目)된다. 특히 공서파(攻西派)의 벽위적(闢衛的) 입장(立場)에서 서학배격(西學排擊)을 위한 척사서(斥邪書)와 역이단관계(闢異端關係) 사료(史料)들이 수다함에 반(反)하여 서학수용(西學受用)에 나섰던 남인신서파(南人信西派)들의 저작(著作)·문집(文集)으로 전(傳)하여지는 것이 극히 희소하여, 전연 그 전반적(全般的)인 양상을 이해(理解)할 수 없었다는 점(點)에서 광암(曠菴)의 성교요지(聖敎要旨)의 발견(發見)은 한국(韓國) 최초(最初)의 서학이해(西學理解)와 그 종교적(宗敎的) 내면성(內面性)까지 엿볼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사료(史料)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攻西派(공서파)란 서교 신자들을 공격하는 무리라는 뜻으로서, 이는 정조가 즉위하여 노론(老論)을 견제할 목적으로 천주교를 믿고 있던 남인 학자를 비호·육성하자, 이들을  신서파(信西派)로 부르며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론과 손을 잡고 천주교를 공격하던 목만중(睦萬中)·홍낙안(洪樂安)·이기경(李基慶)·박장설(朴長卨)·홍의호(洪義浩) 등 남인 학자들을 말한다. 이 무렵부터 천주교는 노론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의 실제적인 빌미가 되었다. 즉 명분은 천주학이 성리학에 위배되는 사학이어서 탄압한다고 명분을 삼았으나 실제로는 남인 선비들을 권력으로부터 몰아내기 위해 박해하였다. 

 

  또한 闢衛(벽위)란 조선 후기에 정통 유학자들이 주축을 이룬 천주교 배척 사상을 말한다. 벽위는 벽사위정(闢邪衛正)에서 온 말로, 사도(邪道)·사학(邪學)인 천주교를 배척하고 정도(正道)·정학(正學)인 성리학을 수호한다는 뜻으로, 한말의 위정척사 사상의 연원이 되었다. 斥邪(척사)도 좀 더 강하게 비슷한 뜻이다. 

 

  성교요지(聖敎要旨)의 서술 형식(形式)은 필자 소장(所藏)의 원본(原本)인 한문본(漢文本)은 본문(本文)과 이벽(李蘗) 자신(自身)의 주기(註記)가 붙여져 있다. 본문(本文)은 고대(古代) 중국종교문학(中國宗敎文學)의 효시(嚆矢)인 시경(詩經)의 형식(形式)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內用)은 신구약(新舊約) 성서(聖書)의 내용과 그 성서사상(聖書思想)에 입각한 저자(著者) 자신(自身)의 정도관(正道觀)을 읊은 한문(漢文) 정형시(定形詩)이다. 즉 고대(古代) 시경(詩經)의 형식(形式)을 따온 한국(韓國) 최초(最初)의 기독교성서(基督敎聖書)를 주제로 한 시(詩)라고 할 수 있다. 또 한편 시대적(時代的)인 의미(意味)로는 흔히 조선시대(朝鮮時代)의 교훈문학(敎訓文學)으로서 지식층 유학자(儒學者)들 사이에 널리 유행되었던 명(銘)·잠제문(箴祭文) 등의 형식(形式)으로 된 운문체(韻文體)에 속한다. 

 

  그러니까 이벽은 당시 지식인들인 유학자들을 겨냥하여 최고의 격식을 갖추어 시경 형식에 성경 내용을 담은 한시로 「성교요지」를 쓴 것이다. 이는 이벽이 「천주실의」에 담긴 천주교 교리의 기초적 내용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경에도 해박한 경지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가 유가적 가치를 존중하는 동시대 지식인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하려는 간절한 지향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교훈문학(敎訓文學)과 같이 성교요지(聖敎要旨)도 역시 문학적(文學的) 작품(作品)으로서 가치보다 교훈적(敎訓的) 의미(意味)가 짙은 것이 특징이고 본문(本文)의 한시(漢詩)도 역시 그와 같은 부류(部類)에 속한다. 전체적(全體的)인 구성(構成)으로는 정형(定型)을 취했으나 그 내용을 중심(中心)으로 하여 한 가지 내용(內容)을 서술한 뒤에 반드시 그 내용(內容)에 대한 저자(著者)의 주기(註記)가 붙여져 있다. 이 주기(註記)에 광암(曠菴)의 서학사상(西學思想)의 함축을 보여 주는 중요(重要)한 내용(內容)들이 담겨져 있어 실상 이 주기(註記)가 성교요지(聖敎要旨)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部分)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本文) 위에 난해한 한자(漢字)까지도 하나하나 주(註)를 붙여 놓았다. 

 

  이 성교요지(聖敎要旨)의 내용(內容)이나 사상(思想)을 검토해 볼 때, 광암(曠菴)도 그의 진유사상(眞儒思想)인 수사학적(洙泗學的)인 정신체계(精神體系)를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사상(基督敎思想)의 수용(受容)이라는 사상사적(思想史的)인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點)을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한문학(漢文學)에 대한 해박한 지식(知識)을 관찰할 수 있는데, 당시(當時)의 유학자(儒學者)들 가운데 뛰어난 작품(作品)으로서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신(自身)이 한자(漢字)에 대한 주해(註解)를 달아 놓지 않았다면 해석(解釋)하기 극히 난해했을 것이다. 

 

  성교요지(聖敎要旨)가 자발적인 한국(韓國) 최초의 서교(西敎)의 성격이나 기독교사상(基督敎思想)의 토착화(土着化)의 가능성을 제시한 점(點)이나 선교사(宣敎師)의 도움 없이 받아 들여진 초기(初期) 한국(韓國) 기독교(基督敎)의 정신세계(精神世界)를 보여주고 있는 점(點)에서 그 사료적(史料的) 가치의 비중이 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옥희와 함께 우리는, 이벽이 지은 「성교요지」는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보다도 더 수준 높은 신학 저술로서, 한국인이 지었다는 점에서 신앙 토착화의 진도에 있어 한 걸음 더 나아간 성취임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성서적 내용을 시경 형식의 한시에 담았으면서도, 자신이 지니고 있던 서학사상에 의한 주기(註記)까지 붙였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천주학 서적들을 섭렵했던 덕분에 동시대의 선비들은 물론 실학파 선비들에 비해서도 천주교 교리와 성서에 밝았던 이벽은 천주학 강학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던 1779년 열흘 동안의 강학회에서 동료들을 위해 「성교요지」를, 그리고 일반 서민을 위해서는 성교요지를 순한글로 간추리고 4·4조로 읊은 ‘천주공경가’를 지었다. 이때 이벽은 「천학초함(天學初函)」과 「성경광익(聖經廣益)」을 주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천학초함」은 중국 천주교회의 신자로서 명(明)나라 말기의 석학(碩學)인 이지조(李之藻, 1571 ~ 1630)가 서학서(西學書)를 모아 1629년에 간행한 책이다.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천주실의」를 출간한 이래, 반세기간에 걸쳐 예수회원들에 의해 한역서학서가 속속 간행되자, 자연 서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어 이에 이러한 학문적 열의에 부응하기 위해, 중요한 서학서들을 손쉽게 대할 수 있도록, 이미 출간된 서학서들을 체계적으로 모아 전집(全集)으로 발간한 것이다. 또한 「성경광익」은 중국 북경에서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이야(Mailla, 馮秉正, 1669∼1748)가 주일과 축일의 복음을 한역(漢譯)하여 1740년에 간행한 한역서학서이다. 이를 보면, 이벽은 이미 그 당시에 천주교의 교리와 신구약 성경 내용에 대해 밝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사항은 이벽이 천주교의 교리와 신구약 성경을 강학회 선비들은 물론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유학자들에게 소개하면서, 마테오 리치나 이지조 그리고 마이야 등 서양 선교사나 중국 유학자들이 견지했던 보유론을 기조로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더욱 뛰어넘어 한민족 전통의 하느님 신앙을 십분 활용하여 토착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벽은 그의 한시 「성교요지(聖敎要旨)」를 하느님의 존재로 시작해서 하느님의 흠숭으로 끝낸다. 그러나 이것은 말과 행동이, 인식과 실천이 항상 병행해야 한다는 한국 사람들의 올바른 사고방식에서 자연스레 나온 것으로, 이미 하느님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그분을 흠숭하고 공경해야 함은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이벽은 세상 사람들보다 하느님이 먼저 계셨다는 말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존재를 이야기하지 그 하느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 존재는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더듬어 올라갈 때 어쩔 수 없이 다른 어떤 존재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역사와 생활의 현실 속에서 그 어떤 초월적인 존재를 단순하게 받아들인 것이 고대 동양 문화의 특징이었던 것이다(이성배).

 

   이성배에 의하면, “하느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려고 하”는 방식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비롯된 서구 스콜라 신학의 방법론이다. 한민족에게는 하느님의 존재가 이미 직관적이고 경험적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녹아들어 있다는 점에서 「성교요지」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서구 신학을 보유론적 관점에서 한문으로 번역해 놓은  「천주실의」보다 더 동양적이요 아시아 문화적이고 할 수 있다. 「성교요지」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김동원).

 

  제1편 성경의 이해: 제1편은 구약의 창세기부터 신약의 요한묵시록에 이르기까지 핵심이 되는 흐름을 간추려 소개하였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도 지으셨으며 첫 사람이 하느님의 금령을 어겨서 저지른 원죄도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이야기를 통해서 죄악이 퍼져 나가게 된 인간 세상의 불행과 고통의 원인까지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 같이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 사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내셨으며,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소개하고 그로 인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소개하고 있다. 

 

  제2편 경서의 가르침: 이벽은 이 같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하느님의 창조하심에 기초한 새로운 우주관을 제시하면서, 신앙의 진리에 따르는 인생관과 구원의 은총으로 살아가기 위한 도덕수양론을 아울러 제시하였다. 그는 보유론적 관점에 따라서, 원시유학에서 「중용(中庸)」에 나오는 성(誠)의 정신을 근간으로 하여 「대학(大學)」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단계에 따라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을 흠숭해야 하는지를 역설하였다. 

 

  제3편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노래함: 마지막으로 이벽은 성경과 교리의 핵심으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노래하는 경지로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길을 찾도록 매우 현실적인 가르침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음을 소개하였다. 그래서 자연 안에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업적을 신앙의 눈으로 발견하며 찬미해야 하고,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현실 생활 가운데에서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종말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함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간곡히 권유하였다. 이렇게 제3편을 음미해 보면, 앞선 제1,2편은 성서나 교리에 대한 학식으로 지을 수 있는 글이라 하겠으나 이 제3편은 학식만으로 지을 수 있는 글이 아니라 신앙과 학식이 어우러지고 나서야 나올 수 있는 한국판 시편이다. 

 

  ‘천주공경가’는 「성교요지」를 순한글 4·4조의 가사체로 간추린 것이다. 한문에 익숙한 유학자들이 아니라 한문을 알지 못하되 한글은 이해하는 민중을 위한 배려라 할 것이다. 이 노래에서 그가 이미 보유론을 취하면서도 여기에 머물지 않고 민중이 이미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전통적인 하느님 신앙에 호소하고 있음을 더욱 뚜렷이 알 수 있다. 

 

  이렇게 이벽은 천주교를 소개하는 두 글을 지어 본래 강학의 좌장이었던 권철신 대신 좌장이 되었으며, 서학을 연구하던 데에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앙 공동체로 성격을 전환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부친이 동지사로 가게 된 이승훈을 설득하여 이 기회에 북경에 가서 교리를 더 배우고 정식 세례를 받아 오도록 함으로써 1784년에 한국교회가 창립될 수 있었다. 이벽은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받아 온 이승훈에게서 처음으로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나서 강학회 선비들에게도 세례를 받도록 권유하는 한편, 자신의 수표교 집에서 신앙 모임을 시작하다가 인원이 늘자 중인 출신으로 의원이었던 김범우의 명례방 집에서 신앙 모임을 하다가 1785년에 포졸들에게 적발되는 바람에 문중박해를 받게 된 것이었다. 

 

19.3.4. 이벽 문중의 박해와 그의 죽음 논란

  한국교회 창설을 주도했으며 초석을 놓은 선구자요 주역이었던 이벽의 천주교 활동이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 일명 명례방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자 이벽의 경주이씨 문중에서는 그 부친을 불러 추궁하며 아들 이벽을 배교시키지 않으면 문중에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겠다며 압력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부친 이부만은 아들을 설득해고자 하였으나 이벽은 완강하게 거부하였으므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끝내 자택에 감금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함은 물론 음식도 일체 들여보내지 않아 보름만에 이벽은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이벽의 사망 시기와 원인을 두고 여러 논란이 있었다. 심상태는 한국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관계 사학자와 연구자들의 입장을 두루 검토한 끝에 이와 같이 정리하였다. 

 

 이벽의 사망시기는 다산이 이벽의 죽음을 애도하여 작성한 만사(輓詞)가 1785년에 작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벽의 부친과 형제들이 생존 중에 작성한 「경주이씨족보」에도 1785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볼 때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나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기록처럼 1786년이 아니라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했던 1785년 늦은 봄이거나 초여름이 분명하다고 본다. 

 

  또한 사망 경위에 대해서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사망시기를 특정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제껏 그는 배교자로 낙인찍혀 왔었기 때문이다. 이벽의 죽음 현장에 있지 않았으면서도 순전히 전언에 의해서 그의 사망경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록했던 다블뤼 주교와, 또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만 의지하여 조선에 와 보지도 않고 이벽을 배교자로 기록해 놓은 달레 신부 등 외국인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이벽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다산과 같은 불세출의 경세사상가들로부터 이벽은 학덕이 출중하며 고매한 인품을 지닌 까닭에 신선 같은 귀인으로 추모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그리고 그의 사후에 반서교(反西敎) 유학자들이 작성하여 돌린 상소문에서 그를 천주교의 수괴로 지목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가 가족의 위협에 굴복하여 그리스도교를 배반한 허약한 인물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앙을 증거한 신앙인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견해가 역사적 진실에 해당된다고 본다. 

 

  이렇게 사망시기와 사망 경위에 대해 정리하면서 심상태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이면서 비약적 성장을 이룩한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던 이벽으로부터 배교자의 누명을 벗겨내어야 할 뿐 아니라 증거자, 더 나아가 순교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시급함을 강조하였다. 이벽은 한국교회가 자생적으로 창립될 수 있게 치열하게 노력한 주역이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아보고 신앙을 처음으로 지녔던 선각자로서 아브라함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행한 역할을 수행한 한민족의 예언자였다. 그로 인해서 단군왕검 이래 하느님 신앙을 간직해 온 한민족이 삼위일체로 계시된 하느님을 온전히 믿을 수 있게 되었으며, 세상에 오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온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과 그리고 한민족 사이에서도 차별없이 소통할 수 있게 한 공로가 이벽의 몫이다. 

 

19.3.5. 한국교회 창립이 지닌 역사적 의미

  일찍이 예수님께서도 같은 의미를 당신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확인해 주신 바 있다. 요한복음이 전해주는 대사제의 기도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당신이 하나임을 계시하시는 한편, 제자들과도 하나가 되기를 염원하셨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지향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요한 17,4) 하고 기도하셨다. 그 다음으로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요한 17,6) 하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상호 간에도 일치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17.21).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이 같은 예수님의 지향과 기도를 담아 교회의 사명으로 삼았다. 

 

교회, 그리스도의 성사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모인 이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며(참조: 마르 16,15), 모든 사람을 교회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 주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이므로, 앞선 공의회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교회의 본질과 보편 사명을 자기 신자들과 온 세상에 더욱 명백하게 선언하고자 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다양한 사회적 · 기술적 · 문화적 유대로 더욱 가까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하여야 할 교회의 이러한 직무는 현대의 상황에서 한층 더 절박해지고 있다(교회헌장, 1항).

 

  그리하여 공의회 교부들은 하느님과 이루는 결합에 바탕하여 온 인류가 이루어야 할 일치를 향하여 교회의 사목적 지향을 이렇게 선언하였다.

 

온 인류 가족과 교회의 긴밀한 결합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모인 그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를 향한 여정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여야 할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는 인류와 인류 역사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사목헌장, 1항).

 

  이렇듯, 하느님과 소통하고 백성들 사이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이벽을 비롯한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은 치명으로써 신성을 증거하며 신앙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향후 신자들 사이에서나 그리스도교의 갈라진 형제들 안에서, 또 민족과의 일치를 위해서나 주변 민족을 비롯한 인류와의 일치를 위한 기반은 진리에 있으니, 예수님께서도 진리가 일치의 기반임을 기도로 밝히셨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7.19)

 

  이벽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시대에 신성을 증거하기 위하여 지키고자 했던 진리가 백성 간의 평등과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소통이었다면, 박해가 종식되었지만 민족이 분단된 이 시대에 요청되는 진리는 평등과 자유에 이어지는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아시아의 복음화 전망에 있어서도 오늘날 조명되고 계승되어야 할 매우 중요한 한국 천주교회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순교를 하면서까지 신앙을 증거하려 했던 그 가치 실현의 의지이다. 이 가치 실현의 의지는 좁게는 종교적 진리를 수호하려는 것이지만, 넓게는 옳다고 믿는 정신적 진리를 증거하려는 노력이다. 아시아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드리워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고 그 안에 담긴 신성을 증거하려는 노력 역시 동일 궤적에 속해 있다. 

 

  조선 후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당했던 박해와 감행한 순교는 조선 역사 5백 년 안에서 최대의 사건이었다(조광). 그 박해가 백 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그 기간 내내 신자들은 순교로써 저항하였고, 그 후 박해가 종식된 이후 지금까지도 한국 천주교회와 그 신자들은 순교 정신으로 계승하고자 순교자 현양 사업을 하고 순교자 성월을 지내고 있다. 

 

  사실,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물론 아시아 대륙에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종교의 역할이 필요하며, 그 길은 현재 아시아의 풍요롭고 오랜 전통의 종교들이나 다양한 경제 정치 체제들이 실현해야 할 과제로 상정하고 있는, 최고선과 공동선을 실현해 냄으로써 신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고등 종교들의 가르침과 규율 그리고 예식과 수행 전통은 최고선을 향하고 있어 존경스러우며 이는 가톨릭 교회 신앙인들도 배울 가치가 있음을 공의회는 이미 천명한 바 있다. 

 

  하지만 오늘날 전 세계에 만연되고 있는 무신론 풍조와 물질주의 사조 때문에 종교도 오염되고 있으니,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현세적인 길흉화복을 점치는 주술로 인식하거나 현세에서 보장하지 못하는 내세의 복락을 염원하는 심리적 투사로 간주하는 등 종교에 대한 이해와 신앙의 실천이 저급한 형편이고 이러한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이 아시아인들에게 드리워져 있는 숨김없는 정신적 현실이다. 이러한 종교 몰이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여 체험시켜 주어야 한다. 그 신성 증거의 실체는 최고선과 공동선의 실현 여부가 될 것이다. 

 

  이렇듯 근본적인 관점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이유는 아시아 대륙에서 보이는 종교 현상이 종교와 신앙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인간은, 하느님을 믿게 되는 경위에 있어 공리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 믿음의 공리란 하느님을 체험하지 않고는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 체험의 정식은, 그분이 몸소 가르치셨고 또 보여주신 삶에 따라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부활의 은총을 누리고 이 십자가와 부활의 총체적인 체험으로써 하느님께 받아들여졌음을 깨닫는 은총이다. 

 

  어디에서나 그렇지만 아시아에서도 예수의 신성을 증거한다는 것은 아시아인들에게, 그들의 종교적 소속이나 신념과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체험의 공리를 스스로 체득하고 또 체험시키는 길 외에는 복음화의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 

 

  이는 기복신앙 차원을 넘어 예수의 신성을 믿을 정도로 신앙이 성숙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의 투신에 맡겨진 일이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신 예수님을 하느님이시오 메시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5대륙 가운데 가장 넓은 아시아 대륙에서 그토록 거대한 규모로 많은 가난한 이들이 구조적인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고 있음을 안다면, 더구나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수많은 선교사들과 활동가들 안에 현존하여 계시면서 앞장서서 복음을 선포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예수의 신성은 이 복음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증거될 일이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영성과 자세가 있으니, 그것은 예수의 신성을 체험하고 증거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찾아주는 데에 집중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낮아지고 비우는 것이다. 자기비움과 낮춤의 영성과 자세로 예수의 신성을 증거해야 아시아 복음화는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자비와 섭리로 이룩될 수 있을 것이다. 

 

  천주교가 전하는 그리스도 신앙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지성적 면모로 자발적으로 수용한 일도 조선 천주교회가 보여준 독특한 특징이거니와,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백 년 동안이나 순교로 저항하고 그 후 또 다른 백 년 동안 그 순교정신을 지속적으로 현양하며 계승하고 있는 현상도 현재의 한국 천주교회가 유일하다. 

 

  흔히 민중 저항의 시발점으로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동학혁명을 잡고 있으나 천주교의 백 년 비폭력 저항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주학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쓴 저술 특히 경세유표와 목민심서가 혁명의 도화선이자 교과서로 활용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최익한)

 

  복음화를 향한 가치 실현 과정에서 유념해야 할 역사적 교훈이 있다. 바로 기득권을 지키고자 최고선과 공동선을 짓밟은 세력과 대결하되,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근세 조선 후기에 천주교를 박해한 세력은 노론 세력이었는데, 동학교도들이 일어났을 때 취약한 민비정권을 움직여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이고 결국 천진조약에 따라 들어온 일본 군대에 의해 몰살시킨 세력도 노론이었다. 

 

  “노론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서면서 권력을 향유했다. … 노론 이데올로기와 식민주의 학문 체계는 해방 후 단 한 번도 해체 과정을 밟지 않고 학문 권력을 틀어쥐었다. 일제 청산 좌절과 분단, 전쟁, 독재와 천민자본주의, 신자유주의를 거치며 사유 없는 지식, 통찰 없는 이성으로 왕성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이주한). 이것이 오늘날까지 기득권 카르텔을 공고하게 형성하고 있는 ‘노론 300년 권력’이다. 한국 사회의 공동선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이 기득권 카르텔에 대해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그리고 순교자들이 신앙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보여준 순교 정신에 따라서, 공동선을 위한 가치 실현 노력에 집중함으로써 대결할 수밖에 없다. 이 대결은 무릇 모은 악은 악으로써가 아니라 선으로써 이겨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박해 중에 있던 로마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당부한 바 있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 여러분이 선에는 지혜롭고 악에는 물들지 않기를 바랍니다”(로마 12,21; 16,19).

 

  신성을 증거하기 위한 노력은 부활 신앙을 최고선과 공동선 실현의 노력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아시아인들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실 것이며, 그 결과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최고선이 결과적으로 실현될 것은 물론 방대한 규모를 차지하고 있는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의 처지도 공동선을 증진할 때라야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존엄성에 바탕을 둔 사회 공동선은 재화의 보편목적 원리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명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가톨릭 신앙에 의해 움직이는 수많은 활동가와 신자들이 아시아의 도처에서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이들의 활약 자체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그들 안에 현존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계시다는 방증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시아의 풍요로운 문화 속에서 다양한 경제정치적 상황에 대해 지성적인 접근으로 아시아인들이 누려야 할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 조건을 알아낸 바탕 위에 이루어져야 할 것은 그 가치 조건을 실현하는 데 진력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게 될 것이며 당사자들은 부활 신앙으로 새로운 복음화와 파스카 과업을 이룩하는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조선 천주교회의 박해 역사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로써 이 가치를 실현한 전통이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벽과 함께 한국교회를 공동으로 창립한 주역들이 천주교 박해에 희생된 경위를 살펴보아야 예수의 신성 증거에 실질적인 길이 열릴 것이다.  

 

19.3.6. 조상 제사 금령의 문제점과 역사적 돌파점

  무신론적 성리학 질서에서 하느님 신앙을 박해함으로써 신관이 충돌한 것이 조선 박해의 근본 원인이라면, 직접적인 원인은 교황청에서 내린 제사 금지령이었다. 그리고 이벽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공동 창설 주역인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정씨 삼형제가 이로 인해 참수당하거나 유배형을 받았다. 

 

  그 배경은 이러하였다. 이벽은 교회를 창립한 1784년부터 활발하게 선교를 하여 한양 선비들 안에서만이 아니라, 추후 박해가 닥치자 전국으로 복음을 퍼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각 지방에서 성품이 훌륭하고 학문이 뛰어난 선비들을 입교시켰는데, 경기도 양평의 권철신,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 전라도 전주의 유항검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또한 이벽은 중인 신분의 사람들에게도 선교를 했는데 명례방에서 의원을 하던 김범우가 그 대표적이다. 창립 이듬해인 1785년에 김범우의 집에서 명례방 집회를 주관하던 이벽은 포졸들에게 모임이 적발되어, 문중에 그가 천주교 신자요 모임의 주도자임이 알려진 후 혹독한 문중박해를 받아 끝내 집안에 감금된 채 1785년에 죽임을 당하였다. 집회 장소의 제공자였던 김범우도 매를 맞고 유배형을 받았는데, 장독이 도져 유배지에서 1786년에 숨을 거두었다. 명례방 사건으로 인한 이벽과 김범우의 죽음, 이것이 조선 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가해진 첫 박해였고 첫 희생이었다. 

 

  1785년에 이벽이 세상을 떠난 후 정씨 삼형제를 비롯한 천진암 강학회의 동료 선비들 열 명이 조직 재건에 나서 명례방 집회소에서 이벽이 하던 바에 따라 성사를 거행하는 등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자 한양 선비 천여 명이 입교하는 등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정민). 그 무렵 유항검에 의해 평신도가 서품을 받지 않고 성사를 거행하는 일이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자 북경에 이승훈이 편지를 보낸 결과, 1789년에 구베아 주교로부터 교회 발생과 교세 신장에 대해서 크게 격려를 받았지만 성사 거행 조직은 ‘가성직제도’라 하여 단죄받았고 덧붙여 그 40년 전에 중국 교회에 내린 ‘조상 제사 금지령’까지 전달받았다. 그리고 1791년에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모친상을 당하여 이 금령에 따라 제사를 폐하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루자 충격을 받은 조정에서 이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였으니 이것이 진산사건 혹은 신해박해이다. 

 

  그 후에도 노론을 중심으로 한 유림 사이에서 천주교 반대 여론이 크게 일어 신유박해가 일어나서 이 삼형제 모두 고초를 크게 겪었다. 또 이 박해 와중에서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일어난 일도 노론에게 있어서는 천주교 박해를 정당화시켜준 빌미였다. 황사영은 정약용에 의해 입교하였던, 정씨 집안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였기 때문이었다. 삼형제 중 약전과 약용은 유배형에, 약종은 참수형을 당했다. 근본적으로는 무신론적 성리학 질서와 천주교 신앙이 충돌한 결과이지만, 부수적으로는 교황청이 그 40여 년 전에 중국에 내린 조상 제사 금령 탓으로 제사를 둘러싼 마찰도 생겨나서 이 금령에 비판적이었던 약전과 약용이 천주교를 버리겠다고 배교하고 약종은 천주교 교리를 옹호하여 순교하였다. 하지만 이 조상 제사에 대한 태도와 상관없이 조정과 노론 세력은 자신들의 정적이라 여긴 남인 출신의 이 젊고 유망한 세 유학자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천주교 박해가 신관의 충돌과 조상 제사를 둘러싼 갈등이라는 형식적 명분 이외에 실질적으로는 노론에 의한 권력투쟁과 정적 제거 공작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정씨 삼형제의 삶과 신앙 그리고 행적을 살펴보면 한국교회 초기 역사의 핵심 쟁점이 다 드러나게 되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들 삼형제는 천진암 강학회를 통해 「성교요지」와 ‘천주공경가’를 남긴 이벽을 따라서, 약전은 ‘십계명가’를 지었고 약종은 「주교요지」를 지었다. 그리고 유배에 가서도 약전은 「자산어보」를 지었고 약용은 『여유당전서』를 지어 후대에 남겼다. 이 저작들이 그들의 삶과 신앙을 추적할 수 있게 하는 흔적들이다.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심상태는 순교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근본적인 문제부터 제기하였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합법적 종교로 공인되기 이전까지 지중해 연안 일대에 횡횡하던 황제 숭배와 제신 숭배가 정당화되던 당대 서구의 윤리 도덕적 수준과 달리, 서구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던 무렵 이 지역에는 이미 유불도 등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세계적 고등 종교의 심오한 종교 사상과 높은 윤리 의식에 상응하는 개인과 사회의 생활양식과 질서가 이미 정착되어 있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서구 제국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비서구 문화권에서 강력한 전쟁 무기를 동원하여 식민지 건설에 경쟁적으로 뛰어들던 시기의 교회의 선교 활동도 이와 병행하여 진행되었다. 여기서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서 18세기 이후 200년에 걸쳐 거의 공통적으로 박해를 촉발시켜 수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된 박해의 결정적 이유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이들 지역에서 발발한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에 대한 박해의 원인이 초기 교회 공동체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와 같은 성격을 공통적으로 지닌다고 볼 수 있는가? 서구 그리스도교에서 형성된 순교 규정이 비서구 문화권인 동아시아의 비그리스도교의 문화, 종교 풍토에서도 유일한 기준으로 일률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가? 아니라면 이 지역에서 발생한 박해와 순교에 대한 다른 규정이 요청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이러한 문제 제기 하에서 그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박해가 일어나게 된 역사적 경위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추적하였다. 우선 한국교회의 창립 주역들이 천주교 신앙 공동체로서 어떠한 실천을 했는지부터 살펴보았다. 

  

  선교사 입국보다 10년 앞서 한국교회를 자발적으로 일으켜 세웠던 창설 주역들은 당대 조선 사회에서 이미 명망 높은 유학자로서 일가를 이루고 있었던 젊은 선비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대부 가문 출신이면서 18세기 조선 후기 사회를 지배하던 성리학적 유교 이념이 번쇄한 공리공론에 치우친 나머지 심각한 사회 모순을 극복하는 데 한계를 지님을 간파하여 공맹의 원시 선진유학 사상으로 되돌아가 수신치기(修身治己)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실천을 통해 점진적 사회 개혁을 지향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했던 실학 계열의 전도유망한 유학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17세기부터 중국을 통해 조선으로 전해진 서양 과학 기술 문물과 천주교 관련 서적을 접하게 되면서 당대 성리학적 유학과 구별되는 이른바 서학(西學)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데서 출발하여 마침내는 천주교 교리를 구원(久遠)의 종교 진리로 믿고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주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나 판토하(Diego de Pantoja, 1571~1618)의 『칠극(七克)』 같은 한역서학서를 보고 그리스도교 교리의 주요 내용을 파악했다. 마테오 리치 신부는 유교적 중국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보유론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와 선진유학 사상의 동질성을 이론적으로 제시하면서 주체의식이 높았던 중국 문화에 천주교 진리를 전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데 진력했다. 

 

  한국교회의 창설 주역들은 서양 선교사들이 성리학적 주자학을 비판하면서도 선진유학의 주요 사상은 천주교 중심 교리와 근본적으로 합치된다고 보아 긍정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기꺼이 수용하였다. 애당초 원시유학의 경천(敬天)과 충효(忠孝) 사상에 입각하여 윤리의 기본 덕목을 함양하면서 구도적 삶을 추구하던 이들이 성리학에서는 찾지 못했던 인간과 세계에 관한 궁극적 구원 진리를 천주교 교리 안에서 발견한 때문이었다. 

 

  교회 창립의 주역의 실질적 지도자 이벽은 1784년 중국 북경으로 가게 된 이승훈에게 사목 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을 만나도록 했다. 이승훈이 단기간이기는 하나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고 귀국하자, 이벽은 그에게서 세례를 받고 그와 함께 천주교 교리를 믿어 생활하는 신앙 공동체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수표교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모임을 시작했으나, 참석자들이 늘어나면서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으로 옮겨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소수의 신진 유학자들에 의해 설립된 한국교회는 존재가 우연한 기회에 밖으로 알려지면서부터 기존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이질적 집단으로 간주되어 경계 대상이 되다가 즉시 박해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신앙 공동체 집회가 1785년 순찰을 돌던 관헌들에게 적발되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했다. 양반 계층에 속한 이벽과 이승훈을 위시한 지도자들은 훈계 방면되었지만, 집회 장소를 제공한 중인 출신 김범우는 순교의 길로 들어섰다. 

 

  양반이라는 이유로 관아에서는 훈계 방면되었지만 이벽은 문중으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기존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위협하는 천주교 모임을 주도하던 인물이 이벽임을 알게 된 문중에서는 그의 부친에게 그로 하여금 천주교를 그만두든지 문중에서 축출당할 각오를 하는 통첩을 하였고, 부친은 이벽을 설득하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그의 태도가 요지부동인 것을 알고 자살하려는 시도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집안에 감금되어 식음을 전폐당하는 집안박해를 당한 끝에 1785년 말에 세상을 떠났다. 

 

  을사추조적발사건 후 자신의 주도적 역할이 문중에 알려지는 바람에 이벽이 문중박해를 받아 세상을 떠나자, 남은 창립 주역들은 이벽이 수행하던 역할을 공동으로 떠 맡기로 하고 자발적으로 성사를 실천하는 조직을 수행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평신도에 의한 성사 거행에 의문이 생겨 북경 주교에게 질문하고 답변을 받는 동안 ‘가성직제도’ 중단과 ‘조상 제사 금령’ 통보를 받게 되었다. 

 

 신앙 공동체를 주도하던 이벽이 세상을 떠나자 천진암 강학회를 함께 하며 공동으로 한국교회를 창립했던 선비들은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이벽이 주도하던 역할을 10명이 나누어 맡아서 신앙 공동체 모임을 지속하기로 결의하고는 1786년부터 교리 교육과 성사 활동을 통해 주변에 천주교를 적극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문화적이고 학문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던 당시에 새로운 천주교 신앙 진리를 과감하게 수용하는 결단을 내리면서도 개종 이전의 전통적 유교사회의 미풍양속을 보존하고 백성의 종교 심성에 부합하는 표현 양식에 따라 교리를 해설하려고 노력했으며, 이에 동의하여 입교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성사를 베풀었다. 

 

  그런데 그들은 신앙의 교리를 그들이 몸담고 살아가던 조선 후기의 사회 현실에 적응시켜 신속하고 심도 있게 알리려 노력하는 한편, 신앙의 진리를 당대의 강고한 전제 군주적 사회질서를 서서히 개혁하기 위한 실천적 이념으로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조선은 문화와 종교, 정치와 제반 생활규범이 성리학적 유교사상을 따르는 군주제 사회로서 유교 이념에 따라 지배되던 획일적 계급사회였다. 사회에서 노비와 고아, 무당이나 백정 등 천민은 물론 대다수 상민(常民)과 부녀자, 유약자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사회 풍토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경직된 신분의식을 과감하게 초월하여, 만인을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대하고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복음적 인간관을 스스로 생활하며 교리에 담아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벽이 혼자서 하던 역할을 10명의 지도자들이 나누어서 더욱 활발하게 모임을 주최하자 그들의 이러한 포교 노력은 놀랄 만한 결실을 거두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세례 받은 신자가 1788년경에 이미 천여 명에 달했다. 조선 후기에 기적적으로 생겨난 이 신생교회는 교회의 존재 자체가 선교였고, 선교 과정을 통해 존속하고 성장하였다. 

 

  교회 창설 주역들을 위시하여 전국에서 신앙 공동체를 일구기 위해 노력한 초기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권철신의 문도(門徒)이거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신진 유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지도로 입교하게 된 신자들은 사대부 가문에 속하는 양반 남성층에 국한되지 않고 여성과 중인, 상민과 천민까지 아우르는 그야말로 사회의 모든 계층을 망라했다. 한국교회는 단기간에 각계각층을 두루 포괄하는 범사회적 종교 공동체로 발돋움했고, 신자들은 엄격한 반상(班常) 신분 계급으로 유지되는 현실 사회에서는 찾을 수 없던 그러나 대망해 마지않았던 지상천국과 같은 새로운 고향을 새로운 신앙 공동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1789년에 지도자단의 일원이었던 유항검이 교리 서적을 읽다가 성품성사에 관한 대목에서 평신도들이 성사를 집전해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 문제를 제기하자 그에 수긍한 지도자들은 성사 거행 활동을 즉시 중단하고 이승훈으로 하여금 북경에 문의 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북경 주교로부터 사목교서 형식의 답신을 받았는데, 요지는 선교사의 직접적인 포교 활동도 없이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교회가 창립되었다는 기적 같은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평신도 지도자들이 성사를 집전하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즉시 중단할 것을 명령했으며, 아울러 중국 교회에 내려와 있던 교황청의 조상제사 금지령까지 하달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선교사도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한국교회가 로마교황청의 노선에서 벗어난 이단적인 교회가 될까봐 우려하였다. 그러자 지도자들은 윤유일을 다시 북경에 파견하여 성직자를 보내줄 것과 조상제사는 효도의 표현양식이지 우상숭배가 아님을 해명하였지만 교황청에서 이미 결정된 조처는 변경할 수 없었다. 

 

  이미 40년 전에 내려진 교황청의 경직된 방침이 북경 주교에 의해 국내에 전해진 다음, 한국교회는 대혼란을 겪었다. 조상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된 양반 신자들이 대거 이탈하는 한편 교회의 방침을 충실히 따르려던 양반 출신 두 신자의 모친상이 천주교 박해의 불을 당긴 것이다. 이것이 ‘진산 사건’이다. 

 

  그 후 1791년에 모친상을 당한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제사 금령을 따라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사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선 사회에서도 천주교를 무군무부(無君無父) 풍조를 조장하고 패륜난상(悖倫難常)을 조장하는 사교(邪敎)로 낙인찍고 조정이 엄중한 금압정책을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베아 주교가 요청받은 대로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한국교회에 도착한 첫 선교사로서 1795년에 입국한 그는 서울과 지방을 순회하면서 성사를 집전하는 한편, 신앙의 활력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명도회(明道會)를 창설하여 교리교육을 실시하여 많은 신자들을 얻었다. 

 

  그는 물론 조상 제사 금령에 따라 ‘제례는 극히 허황되고 천주교가 금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양반 신자층이 떨어져 나가고 최창현, 최인길 등 중인 출신이 교회의 지도층이 되었다. 주문모는 제사 봉행과는 원래 관련이 없었던 상민과 천민 그리고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선교하였다. 1801년경 교세를 보면, 부녀자들이 2/3로서 대세를 이루었고 나머지 1/3은 천민 계층이었다. 당시에 관직을 포기하거나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층으로 주문모 신부와 접촉하면서 천주교 신앙의 절대성을 믿고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가거나 새로 시작하게 된 사대부 양반 계층이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존재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명도회 회장으로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지은 정약종이다. 양반 계층이 주도하여 창설하고 포교에 나섰던 초기와 비교할 때 신자 구성 면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신자 구성의 변화 속에서 주문모가 입국할 당시 4천 명 정도였던 교세는 그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할 때에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5년 만에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한 것이다. 

 

  1801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 정순왕후에 의해 주도된 신유박해가 발발하였다. 정조의 신임을 받던 남인 선비들이 대거 천주교에 입교하여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노론 세력이 남인 세력을 축출하고자 의도적으로 천주교 박해를 명분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지도층을 위시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잔혹하게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러한 처절한 상황에 직면하여 지도층 신자 유항검과 유관검 형제가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무기를 실은 서양 대형 선박의 방문을 요청하는 이른바 ‘양박청래(洋舶請來)’ 모의가 일어나게 된다. 이어서 황사영이 순교자 신자들의 행적을 자세히 보고하는 한편,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중국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예속시키도록 하거나 수만 명 병사와 대포를 실은 대형 선단으로 조선을 위협하여 선교사를 수용하도록 요청하는 ‘백서(帛書)’가 발각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국가의 도덕적 기반을 와해하려는 데 그치지 않고 외세의 힘을 빌려 국가 전복을 도모하는 반사회적이고 반국가적인 역모 집단으로 간주되면서 박해는 가일층 격화되었다. 그 결과 1만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순교의 길에 들어섰다. 

 

  이와 같이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게 된 경위를 추적하고 나서, 심상태는 '조상 제사 금지 훈령'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하였다.

 

  성리학적 유교사상을 따르는 군주제와 엄격한 신분질서로 통제되던 계급사회였던 조선에서 천주교는 군주를 능가하는 천주의 존재를 신봉하고 천주 앞에 만인이 평등함을 실천하였기에 엘리트 계층과 민중 모두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 충효의 가치로 명분을 삼았으나 또한 엄격한 신분질서로 조선 사회를 지탱해온 조정과 노론 중심의 유림은 지배계급으로서 이 같은 천주교의 출현에 극도의 위기감을 느꼈다. 그런데 ‘조상 제사 금령’에 따라 1891년에 진산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과 노론은 이를 박해의 빌미로 삼아 천주교를 사교로 낙인찍었다. 게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밝혀진 ‘양박청래’ 음모는 기름에 불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조상 제사 금령은 중국으로부터도 동방예의지국으로 존중받던 나라에서 태어나 생활하면서 천주교를 구원의 종교라고 믿고 기꺼이 입교했던 한국교회의 창설 주역들을 위시하여 많은 초기 신자들을 엄청난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천주교 교리가 인륜과 천륜에 상응하는 유가의 사상과 윤리 규범을 폐기하지 않고 보완하여 완성하는 진리라고 여겨 기쁘게 받아들이고 생활하며, 다양한 모순과 갈등 요소를 안고 있던 조선 후기 사회질서를 천주교 진리에 의거하여 서서히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던 중이었다. 그런데 ‘경천’과 더불어 인간의 기본 도리이자 조선 사회를 지탱하는 양대 지주적 가치이기도 한 충효 정신의 보본과 보은의 발로이자 표상으로, 마치 국교처럼 간주되어 준행되던 조상 제사를 송두리째 폐기시키는 금령을 전달받은 것이다. 

 

  천주교 박해에 당쟁과 사상적 갈등과 사회 동요, 그리고 기득권층의 위기감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동아시아 유교사상과 문화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고 서구 문화의 우월성에 입각하여 내려진 교회 당국의 조상 제사 금령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창설 주역들과 그들의 제자인 초기 신자들은 애당초 있어 왔던 유교의 인륜 중시의 기본 관점과 새로 수용하게 된 천주교 교리를 신앙생활 안에서 조화시키려 노력하였다. 이 유가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조상 제사 금령은 대대로 이어온 전통문화와 사회의 정당한 기반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조치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결코 선선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첫 세례자인 이승훈과 지도자들 중의 일원이었던 권철신과 권일신도 진산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패륜행위로 비판하였다. 정약전과 약용 형제도 교회의 조상 제사 금령을 전해 듣고, 이를 분연히 비판하며 교회를 떠나갔다. 

 

  조상 제사 금령이 전해진 당시 조선 사회에서 창설 주역들을 위시한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을 강타한 비상 상황에서 그들이 제기한 물음에 대해 어떠한 신학적이거나 사목적 해명이나 취지도 교회 당국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 없는 처지에서 조상 제사 금령에 대한 심문관들의 물음에 자신들이 늘 보편타당한 진리로 간주하던 유가적 삼강오륜의 관점에서 답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조상 제사의 타당성을 인정한 그들의 법정 발언은 중국에서의 ‘의례 논쟁’(1634년부터 1742년까지 중국에서 조상 제사에 대해 효도의 표현으로 보는 예수회와 우상숭배로 보는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파리외방전교회 사이에 격렬하게 벌어진 논쟁)에서 예수회원들이 정당하다고 인정했던, 유가적 신자들이 지녔던 나름대로의 신앙 표명으로 인정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획기적 자세 변화가 교회 당국에게 마땅히 요청되고 있다. 

 

  요컨대, 한국교회 창설 주역들의 순교 여부를 판별하는 데 있어서 그들이 처했던 당시의 사회 풍토에서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덕으로 기려지는 덕목, 달리 표현하자면 하느님의 나라의 구현 덕목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종 진실하게 준수했는지 여부만을 결정적으로 주요 기준으로 적용하고 있는 순교 개념의 확장이 필요하다. 곧 시종 보편적 덕목으로 부모와 조상 공경, 하느님 섬김을 충실하게 준수하다 생명을 마친 그들의 삶을 존중하는 보편교회의 열린 자세가 요청된다. 서구의 우월주의적 시각에서 발해진 조상 제사 금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들 창설 주역들은 ‘배교’의 누명을 쓰고 시복시성 대상에서 배제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주지된 바처럼 조상 제사 금령은 1939년에 교황 비오 9세의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통해 해제되었다. 당시 교회 당국은 조상 제사 금령이 ‘교의적 규정’이 아니라 ‘기율적 규정’이므로 결정의 번복이 신조와는 상관이 없음을 언급했으나, 150년에 걸쳐 시행된 금령이 신조와 상관하는 사안으로 간주되면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혹한 형태로 진행된 박해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처럼 '조상 제사 금령'의 문제점을 지적한 심상태는 종교적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고 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전향적인 조처를 교황청에 요구하는 한편, 한국교회 당국에도 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능동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제삼천년대를 맞아 세계와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새 복음화’ 정신으로 18세기에 내려진 ‘조상 제사 금령’이 적절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아울러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여 한국교회를 일으켜 세우고 선교에 헌신하여 역동적인 한국교회의 오늘을 있게 한 창설 주역들을 복권시키고 그들의 위대한 생애를 본받는 시복시성 추진을 진행해야 한다. 

 

  아시아 대륙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파가 전체 인구의 3%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지지부진한 배경에는 지난 서구 세계의 식민 통치 역사와 연관이 있다. 아시아는 고대 고등 문화와 종교의 발상지이자 요람으로서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 해석하는 철학적 이론을 형성함으로써 삶과 문화 구조 안에서 합리적 토대를 마련하는 다양한 종교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16세기 이후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가 아시아 국가를 함ㅂ포를 동원한 무력으로 식민지로 정복하거나 위협했다. 서구 세계의 이러한 세계 정복 시기에 병행하여 서구 그리스도 교회의 선교 활동이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에서처럼 아시아에서도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 교황청의 ‘조상 제사 금령’은 어떤 면에서 문화와 종교 차원의 제국주의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었다. 이 금령은 아시아 문화 종교 자산 가운데 진실하고 선하며, 고귀하기까지 한 가치를 이해하고 긍정하기보다는 거의 선험적으로 폄하하고 배척하는 독선적 조치로서 식민지 처지로 전락하지 않은 중국이나 조선,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지역 국가에서 극심한 반발과 함께 무자비한 박해를 촉발시켰던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 탄생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새로운 열의, 새로운 방법, 새로운 표현’으로 이루어지는 ‘새 복음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2000년 3월 12일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참회 의식과 함께 거행된 장엄미사에서 십자군 전쟁, 교회 분열, 종교재판, 유다인 학살 등과 관련한 과오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며 모든 신자가 이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사랑과 평화와 민족과 문화와 종교 권리에 반대되는 행동에 대한 고백, 그리고 여성의 존엄과 인류의 일치를 거스르는 죄까지 고백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오를 인정하고 과실을 고백하는 내용 가운데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선교 활동에 심대한 타격을 끼친 ‘조상 제사 금령조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근세 이해 제국주의적이고 서구 우월주의적인 노선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된 선교 정책으로 말미암아 아시아 대륙에서 그리스도교는 침체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오직 한국교회가 이 비그리스도교 대륙에서 교회 규모와 사회적 위상, 그리고 경제 능력 면에서 복음화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실질적 역량을 보유한 교회로 보편교회와 인접 교회로부터 기대를 모으고 있는 현실을 주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전체의 미래 명운이 걸려 있는 아시아 교회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심각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시아 선교 역사 속에서 발생한 ‘조상 제사 금령조치’에 대한 교황청 당국과 서구 교회 관련 기관의 과오를 인정하고 과실을 고백하며, 한국교회의 창설 주역들의 복권 조치가 이루어진다면, 세계적 종교와 문화의 요람인 아시아 대륙에서 지속된 저간의 침체 상태를 돌파하는 획기적 계기로 작용하면서 아시아 교회에서 펼쳐질 ‘새 복음화’ 과업이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차제에 역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보편교회 당국이 모든 권한을 교황청에 집중시켜온 중세 이후의 관행에서 벗어나 지역 교회로 점진적으로 이전시켜, 지구 도처에 산재해 있는 은총의 결실이거나 흔적으로서의 토착문화에 담긴 가치를 지역 교회 자체가 식별하고 교회로 수렴하여 다양한 문화를 지닌 인류를 하나의 공동체적인 문화로 수렴시킬 수 있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피로 세워진 한국교회는 ‘순교’ 개념을 그리스도교의 신앙 정식을 고백하면서 목숨을 바친 것으로 해석해 온 전통적 관행을 넘어 미래 지향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즉, ‘들숨’과 ‘날숨’의 형태로 젊은 세대의 기개를 살리는 방향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교 도덕의 진의가 무너져 사회 모순이 심각할 무렵 한국교회 창설 주역들은 새로운 천지를 찾아 나섰고 천주교와의 해후로 새로운 하느님 나라를 들숨의 형태로 받아들여 오늘 한국교회의 기초를 쌓았으니, 이제 우리 후손들은 날숨의 형태로 인류를 향해 시대적 사명과 요청에 응답하는 자세로 순교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심상태는 치밀하게 역사를 추적하여 기존 교회사가들도 놓친 중요한 허점을 짚어 내어, 이벽을 비롯한 한국교회 창설 주역들의 공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의해 뒤집어 씌워졌던 누명을 벗겨내었다. 이 과정에서 조상 제사 금령을 둘러싼 역사적 실체도 밝혀내었다. 이를 통해서 그는 토착화 신학에 바탕한 정교한 논리로써 젊은 세대의 활력을 얻지 못하여 일시적 침체 상태에 빠진 현재의 한국교회는 물론 근세 이후 수백 년 간 침체에 빠진 아시아 선교의 탈출구를 모색하고 미래 아시아 교회가 기사회생할 수 있는 방안까지 보편교회 당국에 제시하였다. 2백여 년 전 내려진 조상 제사 금령으로 신생 한국교회가 급소를 맞은 격이라면, 심상태의 제안은 죽어가는 아시아 교회의 급소 경락에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침을 놓은 격이다. 이를 통해 복음화에 눈을 뜬 한국교회가 기여할 아시아의 복음화는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까지 포함한 보편교회 전체의 복음화를 위한 활력을 제공할 혈맥(血脈)이라고 그는 보고 있는 셈이다. 

 

  앞서 이대근이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에 나타난 정신 사상의 흐름을 신관을 주제로 한 종교적 관점에서 조망하여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는 신관의 충돌로 나타난 현상임을 논증해 냈다면, 이 글에서 심상태는 18세기 역사에 집중하되 21세기 이후까지도 내다보면서 박해와 관련된 치밀한 역사적 진실을 추적하고 조상 제사 금령과 관련한 교회 당국의 조치를 정교한 신학적 논리로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복음화의 침체기에 빠진 교회로 하여금 아시아 복음화의 대장정에 나설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그는 유가적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한 하느님 신앙을 옹호하는 한편 제사 금지령으로 박해자들에게 박해의 명분을 제공한 교회 당국의 과오를 시정하도록 촉구하는 한편으로 아시아 복음화 과업에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나서라고 촉구해 온 보편교회에 대하여 그 진정성을 보여줄 것을 촉구하였다. 

 

  이대근의 연구에서 보듯이, 분명히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무신론적 성리학 질서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근본적인 성찰을 전제로 하고 나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령의 이끄심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고귀하고 선한 가치들을 유가적 그리스도인들 즉 이벽과 정씨 삼형제를 비롯한 초기 한국교회 신자들은 깨닫고 있었으며 천주교 신앙과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말하자면 무신론적 성리학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원시유학의 신성적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사실은 원시유학도 그 이전의 전통을 다만 진술한 것일 뿐이라는 공자의 고백도 있고 보면, 공자를 통해 원시유학에 남아 있던 한민족의 신성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안목을 무시한 채 교황청에서는 서구 교회식 신앙고백 일변도의 형식논리로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로 단정하였으며, 따라서 조상 제사로 말미암아 천주교 신앙을 멀리하게 된 – 사실은 교황청 ‘조상 제사 금령’에 반대한 – 신자들을 배교자로 취급하였다. 

 

  따라서 신학자로서 심상태가 제시한 제안은 고언(苦言)이다. 교황청이나 한국교회 당국에만 해당되는 고언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고언이다. ‘들숨과 날숨’이라는 참신한 논리로 그가 제안하고 있는 바는 과거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려던 평신도 젊은 선비들에 의해 개척되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들숨’의 힘으로 서구 문명 속에서 천주교 신앙의 진리를 들여온 젊은 평신도들에 의해 돌파되었다면 지금이라고 해서 침체된 복음화 국면 역시 돌파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상승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운과 이에 발맞추어 전 세계인들의 공감어린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는 한류가 보여주는 선한 영향력 역시 한국교회 초기 젊은 평신도 선비들의 종교적 심성으로 발견해낸 우리 민족의 신성의 한 흔적이라고 볼 때, ‘날숨’의 돌파력으로 다시 한 번 복음화의 저력을 발휘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이 ‘날숨’의 돌파력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그 힘이 나올 수 있는 근원은 바로 우리 한민족의 신성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한민족과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모두 아우르는 일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9.3. 이벽과 정씨 삼형제의 죽음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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