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19. 예수께서 죽으시다

[요한복음] 19. 예수께서 죽으시다

 

저녁노을의 글

2022-10-11 07:21:59 조회(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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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은 제18장에 이어서 제19장에서도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으시는 예수님에 대해 보도한 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과 무덤에 묻히시는 장면을 보도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십자가 아래에 서서 지켜보던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맡겨드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함께 처형된 두 죄수는 십자가형에 수반되기 마련인 호흡곤란 통증으로 고통을 받을 뿐 해 지기 전까지 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병사들이 다리를 꺾어 숨을 거두게 했으나, 재판 직후 극심한 매질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병사들이 다리를 꺾기 전에 이미 숨을 거두셨으므로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죽음을 확인했는데, 여기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19.1. 예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다(19,1-16)

191.1. 빌라도 앞의 예수(19,1-8)

  “교회가 서 있는 반석을 빌라도가 돌기둥에서 잘라 냈다(로마누스). 예수님께서 채찍질당하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가 내주기 전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 마땅한 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부당한 채찍질을 당하셨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나무 관은 피 흘림 없이는 말씀에 다가갈 수 없다는 상징이요 암시다(클레멘스). 그대가 감히 쓰고자 하는 그분의 왕관은 가시나무와 엉겅퀴로 엮인 것이다(테르툴리아누스). 그 관에 우리까지 가시를 보태서는 안 된다(오리게네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자주색 옷이다(테르툴리아누스). 그들은 조롱의 뜻으로 그분께 왕관을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혔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선택된 임금의 겸손에 존귀함의 왕관을 씌워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했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창조계의 임금님께 군사들이 한 짓거리에 하늘의 천사들이 경악했다(저자 미상). 이 세상의 우두머리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했으니, 이는 그 자신과 사람들이 불법적인 채찍질을 가했다는 뜻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두 번째 아담으로서, 동료 인간들을 파멸에 떨어지게 한 첫째 아담의 죄를 이기리라는 것을 나타낸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유대인 지도자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이미 유죄 선고를 받은 재판관에게 진정한 ‘재판관’을 내준다(로마누스). 그들의 목적은 예수에게 수치를 주고, 그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하게 해 금방 사람들 머리에서 잊히게 하는 것이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악마에게는 예수님께서 사람들 모르게 돌아가시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고 믿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18장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요한복음 19,1-2 본문의 주해인데,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알았으면서도 빌라도는 병사들을 시켜 채찍질을 하고 조롱하게 했으며 뺨까지 치게 하였다. 명백히 권력을 남용한 행위이다. 소심한 권력자가 비겁함을 넘어 약자에게 불법을 자행하는 치졸함까지 선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빌라도는 상황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바리사이들의 조언에 따라 성난 군중을 달래기 위해 과도한 조치를 명령했을른지도 모르겠다. 채찍질과 조롱 행위는 전혀 불필요한 재판 절차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당당해 보여도 속으로는 부패한 로마군의 기강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붙은 죄목을 조사해 보았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미 죄수 취급을 하며 끌고 왔음에도, 빌라도는 그분께 죄가 없다고 선언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들조차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들이 붙인 죄목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그분께 유죄 선고를 내리는 대신 그분을 섬겨야 마땅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자 빌라도는 유대인 지도자들보다 더 큰 관심을 보인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어쩌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신들 가운데 하나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복음 19,4-8의 본문에 대한 주해인데, 앞에서 재판이 수상하게 진행되는 데 대해 추리해 본 대로, 유다인 지도자들은 주저하는 빌라도 총독의 손을 빌려 기어코 예수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분의 무죄를 확인하고서도 섣불리 석방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빌라도의 속셈을 간파한 그들은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빌라도가 총독의 위신도 내팽개친 채로,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소.”(요한 19,4ㄷ) 하건, “자, 이 사람이오.”(요한 19,5ㄴ) 하고 채찍질과 조롱으로 모욕을 당하신 예수님의 초췌해 진 몰골을 보여주며 이만 풀어주자는 제안을 하건, “여러분이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겠소.”(요한 19,ㄴ) 하건 간에 상관없이, 그들은 사전에 짜 놓은 각본대로 기어코 로마 제국의 권력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악을 썼다. 재판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9.1.2. 서로 다른 두 나라(19,9-16)

  “빌라도가 계속 묻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침묵(아우구스티누스)은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다(오리게네스). 말씀께서 말씀 없이 서 계셨다(로마누스). 그런 침묵 앞에서 빌라도는 권력의 지팡이를 휘두르려 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러나 국가의 권력은 하느님에게서 온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높은 곳에서 오는 권능에 의지하신다. 그 권능이 빌라도가 그분을 죽음에 처하는 것을 허락한다. 실로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오리게네스). 빌라도가 권력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사용해야 했던 것은 아니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께서는 권능을 지니고 계셨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대신 우리를 위해 당신을 고난에 내주는 길을 택하셨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을 넘긴 자들의 죄가 더 크지만, 빌라도에게도 예수님의 죽음에 공모한 죄가 없지 않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임금을 자처했다는 유대인들의 암묵적인 비난은 루카 복음의 기사와 일치한다(아우구스티누스).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빌라도는 더 자세히 조사했어야 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그자는 황제의 원수가 되기보다 전능하신 분의 원수가 되는 편을 선택했다(로마누스).”

 

  이상 요한복음 19,9-11의 본문 주해에서, 교부들은 사정없이 빌라도의 무능함과 포악함을 비판하면서도 무기력하게 총독의 폭력을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의 침묵과 순종 속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하느님의 섭리에서 찾고 있다. 사실 “당신은 어디서 왔소?”(요한 19,9)라든가,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요한 19,10ㄴ) 하는 질문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으므로, 권력의 무능함과 포악함을 견디실지언정 대꾸조차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을 것이다. 피고로 고발되신 예수님의 묵비권조차도 버겁게 느껴서 하나마나한 질문을 던지고 혹시나 그 대답이 나오면 그 빌미로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 보려고 하는 빌라도의 처신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총독의 권력이 아니라 재판을 끌고 가고 있던 유다인들의 배후에 있는 사탄과 총대결을 하고 계셨던 것으로 보인다. 사탄은 자신에게 굴종하기를 요구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침묵으로 버티고 계셨을 것이다. 교부 오리게네스의 주해처럼, 하느님의 뜻이 이 긴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셨는지가 제일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 요한은 사건의 시간과 순서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는데, 그 결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문제가 발생했다(테오도루스, 아우구스티누스, 이그나티우스,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우리 주님께서 파스카 축제 준비일에 희생되신 사실에서 우리는 파스카가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참파스카에 길을 내어 주는 예형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알렉산드리아의 페트루스). 요한은 그날과 시간을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요나의 예언을 이루셨음을 밝힌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은 사건의 순서에 대해 먼저 이야기한 다음,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그들의 임금이라고 표현한 사실을 기록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임금을 물리치고 황제를 택한다(이레네우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빌라도는 그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주었기에, 빌라도에게도 유대인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죄가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19,12-16의 주해인데, 빌라도는 뒤늦게서야 예수님을 풀어 줄 방도를 찾아보지만 이미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이 기울어 버렸다. 빌라도는 재판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작된 여론에 대해 구걸을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만약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 주면 군중은 로마 황제에게 제소할 기세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군중의 여론에 굴복하고 말았으니, 요한은 이 역사적 판결의 때를 특별히 기록하였다. 파스카 축제 준비일, 그러니까 축제 전날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라는 것이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하는 판결이 이러하였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요한 19,16). 이레네우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같은 교부들은 당시 유다인들이 – 사탄의 계략에 빠져서 그랬건, 사주를 받아서 그랬건 간에 –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를 물리치고 황제를 택한 어리석음을 질타했거니와, 교부 페트루스는 이 사건, 즉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삼아 돌보아주신 이스라엘이 정작 자신들을 위해서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려 드는 이 희한한 역사적 수수께끼 속에서도 당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 배후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헤아리고 계셨음을 부각시켰다. 즉 요한은 이 일이 파스카 축제 준비일에 벌어졌음을 기록했으며 그리하여 사탄의 계략이나 악인들의 소행이 아니라 하느님의 깊은 구원계획에 따라서 참된 파스카의 어린양으로 희생되신 그분을 독자들이 알아보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19.2. 죽임을 당하시다(19,17-42)

  군중의 성난 여론에 떠밀린 빌라도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신 다음, 숨을 거두신다. 메시아로서 받으신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대목의 본문에서 한 문장으로 간추려진 말씀이 이것이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예수님의 최후 순간을 전해 주는 이 대목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 통으로 짠 속옷 – 어머니를 부탁하시다 – 숨을 거두시다 – 준비일과 예수님의 시신 – 묻히시다」의 순서로 살펴보기로 한다. 

 

19.2.1.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19,17-22)

  “요한은 예수님께서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고 알려 준다. 우리는 다른 복음사가들의 글을 통해, 이 십자가를 나중에 키레네 사람 시몬이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테오도루스), 마지막에 가서는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진다(오리게네스). 아브라함은 기꺼이 자신의 아들 이사악을 바치고자 했고, 이사악은 번제물인 자신을 태울 땔감을 직접 지고 갔으나 그 제물을 바치도록 불리지는 않았다. 우리의 거룩한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에게도 우리를 위한 자신의 희생에 사용될 나무를 몸소 지고 가게 하셨지만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로마누스, 클레멘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발 더 나아가, 이사악이 면했던 일을 마저 치르시어(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가시나무 관과 십자가에 붙들린 채 희생되는 숫양의 예형을 완성하신다(테르툴리아누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것이 아니라 마땅히 우리의 것인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 구원자께서 몸소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알렉산드리아의 킬릴루스). 십자가는 예수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왕홀(王笏)이며, 그분께서 지고 가신 승리의 전리품이다(大 레오). 예수님께서 해골 터에 이르셨다. 히브리 전통에 따르면 – 그다지 신빙성이 있진 않지만 – 그곳은 아담의 육체가 묻힌 곳이라고 한다(오리게네스, 히에로니무스). 이로써 두 번째 아담의 피가 첫 번째 아담의 죄를 씻었다(히에로니무스). 그곳의 이름이 해골 터인 것은 실로 예언적이다. 참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머리의 역할을 시작하신 곳이 이곳이기 때문이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대단히 영성적으로 본문을 주해하고 있는 교부들의 안목이 돋보인다. 공관복음사가들이 키레네의 시몬 이야기를 전해준 바도 곁들여서 상기시키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즉, 이미 제자들에게 누누이 강조하신 바(마르 8,34; 마태 16,24; 루카 9,23)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닥친 수난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직접 짊어지셨다는 것이고(요한 19,17), 그러나 기진맥진하여 세 번이나 넘어지시자 로마 군사들이 마침 이 광경을 구경하던 키레네의 시몬에게 대신 짊어지게도 했다는 것이다(마르 15,21; 마태 27,32; 루카 23,26).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말해주는 영성적 교훈은 지금도 세상의 죄를 없애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짊어지고 계시며 따라서 또 다른 시몬처럼 우리 믿는 이들이 그분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는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치욕스럽게 만들려 하지만 오히려 그분께 불명예 대신 영광을 가져다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는 미래의 심판을 예시하는 그분을 가운데 둔(아우구스티누스)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의 예형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 머리 위의 명패는 그분께서 죽음을 맞아야 했던 이유, 곧 그분께서 유대인들의 임금이시기 때문임을 알려 준다(오리게네스). 유대인들은 그분께서 자신들의 임금이신 사실을 죽음으로도 지울 수 없었다(아우구스티누스).”

 

  복음사가들처럼 교부들도 ‘강도’라고 소개한 이들은 사실 바라빠처럼 로마 제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고자 테러를 일으켰던 혁명당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열성적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즉, 자신들이 고대하는 하느님 나라와  로마의 통치는 양립될 수 없다고 믿은 나머지 무력 항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이들을 열성당원이라는 뜻으로 ‘젤로데’(Zealots)라고 불렀다. 반면에 로마인들로서는 자신들의 제국이 시행하는 식민 통치에 대항하고자 했던 그들의 혁명 이념을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강도’라고 불렀을 뿐이다. 그 당시 십자가형은 아무에게나 내리는 형벌이 아니었고 오직 정치범들에게만 내려졌던 가장 가혹하고 끔찍한 형벌이었던 역사적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일반 식민지 피지배민들에게 경종을 울리느라고 높은 곳에 매달았던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서서히 숨이 멎어가는 고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복음사가들까지도 이들을 ‘강도’라고 잡범 취급하며 기록한 보도에서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형에 대해 억울해하는 심정을 읽는다. 정치범도 아니시려니와 도무지 아무런 죄도 없으셨던 분이 십자가형을 받고 저런 강도 같은 테러범들과 같은 취급을 받으셨다는 데 대한 분노를 읽게 되는 것이다. 

 

  바리사이를 비롯한 악질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낙인찍으려 했던 ‘유다인들의 왕’이라는 죄목이 십자가 명패로 남았으나, 교부 오리게네스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 이름이 그분을 제대로 본 것이라고 주해하고 있다. 다음의 주해도 이런 견해에 덧붙인 부연(敷衍) 설명이다. 

 

  “빌라도는 십자가에 이 명패를 붙임으로써 예수님의 승리와 무죄를 선포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 시대 가장 널리 사용되던 언어들로 적힌(아우구스티누스) 매우 공적인 이 기록(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만 아니라 모든 민족과 언어를 다스리라는 선언과 마찬가지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수석 사제들은 유대인들의 임금이라는 칭호에 반대하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의 임금이시며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묘사로 남았다(아우구스티누스). 빌라도가 명패를 그렇게 쓴 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다른 민족인 동방 박사들이 그분을 증언했듯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도 다른 민족인 빌라도가 그분을 증언했다(아우구스티누스).”

 

19.2.2. 통으로 짠 속옷(19,23-24)

  “예수님의 옷이 네 몫으로 나뉜 것은 복음이 세상의 네 모퉁이, 곧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감을 상징한다(시리아인 에프렘). 그러나 그분의 속옷은 군사들 손에 찢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남았다. 우리도 교회 안의 분열로 갈라지지 않고 이처럼 되었으면(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의 교회를 나누고 가르는 이는 그리스도의 옷을 온전한 채로 소유할 수 없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교회의 일치라는, 통으로 짠 옷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애로 짜고 자애로 입는 옷이다(아우구스티누스). 통으로 짠 옷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를 상징하기도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런 악행에 이처럼 아름다운 상징이 담겨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고문의 도구인 십자가가 어떻게 하느님 은총의 상징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19.2.3. 어머니를 부탁하시다(19,25-27)

  “군사들이 당신 물품을 나누어 가지는 동안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당신 어머니에 대한 보살핌이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은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마리아가 그 앞에 있었음을 알려 주는 유일한 복음사가다(암브로시우스). 마리아는 마음 한구석에서, 아들이 왜 어머니에게 고통을 남길 십자가를 서둘러 맞으려는지 의아히 여겼을 것이다(로마누스). 그 순간 마리아의 영혼을 덮친 폭풍에 대해 이미 오래 전에 시메온이 예언한 바 있다(大 바실리우스). 사도들이 모두 달아난 그때(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리아는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히에로니무스), 요셉의 동기인 클로파스의 아내와 함께(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그곳에 계셨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다른 여인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 大 바실리우스가 상기시킨 시메온의 예언은 이러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신기하게도 시메온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많은 아나빔들을 일어나게도 했지만 또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등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이 꿰찔리는’ 현장을 이 19,25의 본문이 묘사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그분의 부활을 믿을 것인지 믿지 못하겠는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동정 어머니를 동정인 제자에게 맡겨 예수의 어머니로서 필요한 보살핌과 보호를 받게 하심으로써 사랑하시는 제자를 영예롭게 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존자 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사시듯 요한 안에 사시므로, 어머니에게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상 당신을 가리킨 것이다(오리게네스). 예수님께서 카나에서 마리아에게,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신 시간이 지상의 어머니에 대한 이 배려 안에서 지금 왔으며, 카나에서 보이신 냉정한 태도가 여기서 호의와 사랑으로 바뀐다(大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는 어느 정도 자신을 대신할 아들을 마리아에게 주신 것이며(아우구스티누스) 어머니에 대한 보살핌을 확실히 한 점에서 넷째 계명을 실천하신 것이기도 하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래서 요한은 올리브 산에서 가까운 자기 부모의 집에 마리아를 모셨으며(『마리아의 승천』), 에페소 공의회 문서가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나중에 에페소로 모셨다. 요한은 자신의 주님과 주님의 어머니께 봉사하기 위해 재산만 아니라 대사제와 알고 지내던 사회적 신분도 버렸다(히에로니무스).”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맡겨 드렸다는 일화는 그분에게 친동생이 없었으며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 평생 동정으로 부부생활을 했음을 알게 해 주는 근거가 된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러 출가하시고 나자 유다인들의 오랜 대가족 관습에 따라서 마리아께서는 친척 형제들에게 몸을 의탁하셨고 그 형제들은 친척이면서도 집안 어른으로서 홀로 되신 마리아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형제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고 그래서 그분에 대한 악소문이 들려오자 확인해 보지도 않고 마리아를 부추겨 쫓아온 적도 있었다. 군중에게 가르치시다 말고 어머니와 함께 당신을 붙들러 온 듯한 친척 형제들을 보시고 그분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당신의 가족이며 그런 가족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냉랭하게  선언하신 적도 있었다. 그런 형편이니 그분이 십자가형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한들 그들 친척 형제들이 나와 볼 리도 없었고 죽어가는 임종의 순간을 지켜볼 리도 없었던 것이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요한 4,4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오게 된 삶의 자리에 고향 나자렛에서 살던 이 친척 형제들이 있었다. 존경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정받지도 못했던 이 슬픈 현실은 친척 형제들이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알고 지냈던 탓에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에 일어났을 것이다. 고향의 다른 이웃 사람들은 이들의 영향으로 덩달아 배척하게 되었으리라. 동시대인들은 예수님께 있어서 그 친척 형제들처럼, 인간적으로 잘 안다는 선입견을 지니게 되지만 사실은 그 선입견에 가려져서 생긴 편견 때문에 진정한 면모를 못 보는 수가 많다. 

 

19.2.4. 숨을 거두시다(19,28-30)

  “예수님께서 심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계시는데, 그분의 원수들은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을 목말라하셨듯이, 지금 십자가에서도 당신을 물리친 이들의 믿음을 목말라 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께서 목말라 하신 사실은 그분 인성의 증거다(다마스쿠스의 요한). 그러나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분께서 목말라하실 때 그분께 주어진 것은 신 포도주뿐이다. 감미로움이요 희망이신 분께서는 신 포도주의 쓴맛을 없애신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시게 변한 포도주는 예수님의 상황이 곧 갑작스럽게 변화할 것임을 암시한다(디오니시우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스라엘에 심으신 포도나무의 열매로 빚은 것을 청하시지만, 받으시는 것은 불신을 나타내는(아우구스티누스)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뿐이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당신 포도밭에서 난, 시어 버린 포도주를 맛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이 끝났다고 선언하신다. 이는 성경 말씀이 다 이루어졌으며(大 레오) 죄가 용서되었다는(예루살렘의 키릴루스)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보여 주셨다(아우구스티누스). 죽음은 자기가 받은 권한만 지녔을 뿐이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머지않아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완수하고자 기다려 오신 모든 것을 다 이루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숨을 거두신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당신을 차지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셨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이 죽음이 단지 죽음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아다만티우스). 예수님의 뜻이 아닌데도 영을 빼앗기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숨을 거두셨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은 당신의 죽음을 스스로 정하시며 ‘사자처럼’ 잠드셨다(아우구스티누스). 착한 목자는 실로 양 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19.2.5. 준비일과 예수님의 시신(19,31-37)

  “예수님께서 심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계시는데, 그분의 원수들은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을 목말라하셨듯이, 지금 십자가에서도 당신을 물리친 이들의 믿음을 목말라 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께서 목말라 하신 사실은 그분 인성의 증거다(다마스쿠스의 요한). 그러나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분께서 목말라하실 때 그분께 주어진 것은 신 포도주뿐이다. 감미로움이요 희망이신 분께서는 신 포도주의 쓴맛을 없애신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시게 변한 포도주는 예수님의 상황이 곧 갑작스럽게 변화할 것임을 암시한다(디오니시우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스라엘에 심으신 포도나무의 열매로 빚은 것을 청하시지만, 받으시는 것은 불신을 나타내는(아우구스티누스)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뿐이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당신 포도밭에서 난, 시어 버린 포도주를 맛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이 끝났다고 선언하신다. 이는 성경 말씀이 다 이루어졌으며(大 레오) 죄가 용서되었다는(예루살렘의 키릴루스)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보여 주셨다(아우구스티누스). 죽음은 자기가 받은 권한만 지녔을 뿐이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머지않아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완수하고자 기다려 오신 모든 것을 다 이루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숨을 거두신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당신을 차지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셨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이 죽음이 단지 죽음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아다만티우스). 예수님의 뜻이 아닌데도 영을 빼앗기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숨을 거두셨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은 당신의 죽음을 스스로 정하시며 ‘사자처럼’ 잠드셨다(아우구스티누스). 착한 목자는 실로 양 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파스카 축젯날을 정하여 그 식사를 최후의 만찬으로 삼아 제자들과 함께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만찬에서 빵을 당신 몸으로, 포도주를 당시 피로 앞당겨 축성하신 대로, 죽임을 당하셨다. 일반 유다인들이 숫컷 어린양을 제물로 삼아 파스카 축제의 음식으로 삼는 관습을 배경으로 한 이 사건을, 요한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예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 

 

  “군사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것은 자비의 행위로 볼 수 있으며, 적어도 편의상 행한 일이었다(오리게네스). 피는 대체로 엉겨 붙는데(오리게네스), 주님의 경우엔 육체가 죽었는데도 거룩한 피와 물 안에서 온 세상으로 생명이 쏟아져 나왔다(히폴리투스). 우리를 위하여 바쳐진 파스카 제물의 옆구리에서 밀물처럼 쏟아져 나온 피와 물이 우리를 씻어 주었다(암브로시우스 찬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생명을 이어 갈 수 있게 해 준 바위이신 그리스도께서 새 계약의 신선한 물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오리게네스). 모세가 피와 물로 활동을 시작했듯이, 예수님께서 순교라는 두 번째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같은 식으로 당신의 활동을 마무리하신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당신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요한 7,38)이라는 그리스도의 예언이 여기서 이루어진다(루피누스). 지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활동은 물과 함께 시작되고 물과 함께 끝난다(히에로니무스). 십자가는 창에 찔린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통하여 세례를 열었으며, 그리하여 그것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하와 대신 생명의 어머니가 된다(야코부스).”

 

  “노아는 동물들을 구하도록 방주의 옆면에 문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문은 구원을 가져온, 그리스도의 옆구리에 난 열린 문을 예시한다(아우구스티누스).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생겨났듯이, 교회는 세례와 성찬의 신비 안에서 쏟아져 나온 피와 물을 통하여(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시리아인 에프렘). 요한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온 것을 모든 사람이 보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넌지시 비추는 한편, 자신의 증언이 참됨을 확언한다(테오도루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로마 병사들이 창으로 찌르고, 거기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요한의 보도는 교부들이 주해하고 있는 대로 이 ‘피와 물’로써 성체성사를 탁월하게 상징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군사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기 때문에 그분의 다리를 부러뜨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모세가 예언한 대로 흠 없는 속죄 제물이 되셨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창에 찔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은 창세기 49장과 스스로 죽음을 맞는 불구가 된 황소에 관한 예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히폴리투스).”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분의 죽음은, 제18장과 제19장에서 보도된 대로, 유다의 밀고와 수석 사제들을 앞세운 대사제 한나스와 카야파의 협잡 그리고 빌라도의 직무유기 재판과 군중의 부화뇌동 행태에 의해서 결정된 부당한 운명이었다. 물론 여기에다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비겁한 방관 내지 도피 행위도 한 몫을 하였다. 하지만 악인들의 악행과 제자들의 비겁한 행위에 의해 강요된 운명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 때문에가 아니라 그 수난 속에 담겨져 있다고 믿으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순명하셨다. 그 섭리란 에덴 동산에서 첫 사람들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저지르는 바람에 들어온 죄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리심으로써 인류를 하느님 나라에로 구원하시는 것이었다(W. Kasper).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그 섭리의 계기요 발판이었을 따름이었다. 

 

19.2.6. 묻히시다(19,38-42)

  “모두 다 안전하게 홍해를 건널 때까지 모세가 팔을 쳐들고 있었던 것처럼, 십자가 위 예수님의 팔도 저녁이 될 때까지 활짝 벌린 채 있다(유스티누스). 경건하고 자격 있는 아리마태아의 요셉(테르툴리아누스, 존자 베다)과 니코데모(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예수님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진다. ‘요셉’은 ‘늘어났다’는 뜻이며, ‘니코데모’는 ‘승리’와 ‘백성’이라는 뜻이 합쳐진 말이니, 둘 다 그리스도의 활동을 묘사하는 데 적절한 이름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을 묻은 것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예수님을 처음 만난 뒤 거듭 그분을 찾아왔던 것으로 보이는 니코데모(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마태아의 요셉인 점에 주목하라(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사야가 영광스러운 안식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무덤(히에로니무스)에 예수님의 영혼이나 신성이 묻혔다고 생각하는 이가 없도록, 복음사가는 그리스도의 육체가 어떻게 모셔졌는지 독자가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기록했다(테오도루스).”

 

  “요한은 예수님의 시신이 한 장짜리 천이 아니라 아마포에 감싸였다고 기록한다(아우구스티누스). 그 이후로 성찬식 때 은실이나 금실로 짠 천이 아니라 깨끗한 아마포 위에서 주님의 몸을 축성하는 것이 교회의 관습이 되었다(베다).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기를 바란다면, 더러운 모든 것을 버리고 의로움이라는 깨끗한 아마포에 감싸여 새 무덤으로 들어가야 한다(오리게네스). 그리스도는 말하자면 깨끗한 새 무덤에 안장된 금방 죽은 사람이다. 새로운 삶 안으로 묻힌 그분의 매장은 그분의 순결한 동정 탄생과 같다(오리게네스). 새 무덤은 그 안에 담긴 새 생명을 기다리는 새로운 태와 같다(히에로니무스,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매장이 당신 부활에 대한 고백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셨다. 두 사건의 진실성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 정원에 묻히신 것은 창세기의 낙원에서 일어난 일을 되새기게 한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참포도나무가 정원에 심겼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묻힐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땅에 심기며 우리는 그분과 함께 되살아날 것이다(오리게네스).”

 

  예수님의 죽음은 위에서 열거한 악인들이 저지른 악행과 죄인들도 가담한 죄로 말미암은 것이거니와, 이제 무덤에 안치되신 그분의 시신은 좀 더 차분하게 그분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찾아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교부 예루살렘의 키릴루스도 창세기의 첫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이 수난 사건을 대비해 보도록 권하고 있거니와,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 나무의 열매를 허락하시고 선악 나무의 열매를 금하시며 이르시기를,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창세 2,16-17)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뱀의 꼬임에 빠져 실제로 그 선악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받은 벌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는 것이었다(창세 3,23). 하느님과 함께 살던 동산에서 추방당하여 하느님과 단절되어 버린 운명을 사는 것이 하느님께서 내리신 ‘죽음’의 벌이었던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순명에 의한 수난과 죽음으로 첫 사람의 불순명으로 인한 원죄가 비로소 극복되었다. 그리하여 이 죽음은 부활로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파스카 신비인 바, 이 신비를 믿고 자신들의 삶을 이 신비 안에서 영위하는 신앙인들도 원죄는 물론 세상의 죄에서부터 해방된 부활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에 담긴 신앙의 신비를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진술하였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0-22).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역사 안에 태어난 영원한 생명의 씨앗은 그리스도 교회였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9. 예수께서 죽으시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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