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18.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시다

[요한복음] 18.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시다

 

저녁노을의 글

2022-09-29 17:49:19 조회(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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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은 제17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침과 기도에 담으신 메시지를 마무리하고 나서, 이제 제1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어 대사제와 총독 앞에서 연이어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을 보도한다. 이어서 제19장에서는 빌라도의 재판이 끝난 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이 보도되는데, 이 두 개 장 모두에는 중요한 세 가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즉, 하나는 우선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며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어 오셨는데도 정작 아브라함 이래로 천 년 이상 동안이나 하느님을 섬겨왔다던 당신 백성에게서 어처구니없이 배척을 당하신다는 메시지이며,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구원경륜을 깨달으신 말씀이신 분께서 이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이에 순명하셨다는 메시지이며, 세 번째는 그리하여 파스카의 희생양이 되신 당신처럼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당신을 알아보고 믿게 된 이들에게도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희생을 계승하라고 유언하신 메시지이다.         

 

18.1. 잡히시다(18,1-11)

  “당신 몸과 피의 신비들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뒤(『사도 헌장』)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확실한 죽음을 가져올 정원으로 기꺼이 들어가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것은 낙원의 첫 번째 정원에서 일어난 아담의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은 정원의 이름을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다른 복음서들을 통해 그곳이 겟세마니라는 사실을 안다(아우구스티누스).”

 

  “늑대의 옷을 입은 양처럼(아우구스티누스) 유다가 무장한 군인들과 같이 그곳에 오리라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감옥으로 들어가시듯 그 정원으로 가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시던 곳이었으므로, 유다는 그분께서 그곳에 계시리라는 것을 알았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군사들이었다(아우구스티누스). 유대인들은 전에 그분을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했고, 지금 이 군사들도 주님께서 당신을 넘겨주지 않으면 그분을 잡을 수 없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한편, 그분을 잡기 위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와야 했는지 의문을 가져 볼 만 하다(오리게네스). 굳건함을 지키고 영원한 칼을 맞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당신을 공격하는 칼에도 아랑곳없이 굳건하셨던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유다와 함께 온 군중은 어둠 속에서 걸려 넘어질까 걱정하여 횃불을 들고 왔지만 결국 죄라는 바위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누구를 찾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은 그들이 누구를 찾는지 당신께서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눈멀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사실, 예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보지 못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고 대답하심으로써, 그들이 찾는 이가 당신임을 확인해 주시는 동시에 당신의 신성을 엿보이시어 그 말씀을 들은 이들을 땅에 나동그라지게 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말씀 한 마디가 그들을 넘어뜨릴 수 있는(아우구스티누스) 것은 어둠은 빛 앞에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쿠오드볼트데우스).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써 그분의 뜻을 실행한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붙잡히시면서도 제자들 걱정을 잊지 않으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걱정하신 것은 그들이 영원히 잃은 자가 되는 것이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육체의 생명도 걱정하셨다고 이해한다(아우구스티누스).”

 

  “뒤이은 작은 충돌에 관한 대목에서, 왜 제자들이 무기를 들고 있었는지 의아하게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복음은 복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아니라 스승을 지키려 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복수가 아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싸움 도중에 말코스가 다치자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신 것은 원수 사랑(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자비와 동정, 용서(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인내(테르툴리아누스)를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복음의 자유를 들을 수 있는 새 귀를 주셨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박해를 맞거든, 예수님께서 당신 발로 원수를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칼과 창을 들고 당신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페트루스).”

 

  교부들은 창조 설화를 남겨준 에덴 동산과 수난 사건이 일어난 이곳 겟세마니 정원을 대비시켜 묵상하였다. 그런데 군사들을 앞장세워서 스승을 체포하러 온 유다는 비밀에 붙여진 장소가 겟세마니 동산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정작 예수님의 마음은  몰랐다. 칼과 몽둥이를 든 군사들을 앞세워 스승을 잡으러 온 제자를 보는 그분의 마음은 이미 유다도 자리했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모든 제자들에게 토로하신 바 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 26,24; 마르 14,21). 유다와 군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장면은 충돌 없이 싱겁게 끝났다. 그분이 스스로 나서셨고, 제자들은 스승의 체포를 막아보려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분이 당신 혼자서 체포될 각오를 하시고 제자들은 가게 내버려 두라고 하셨기 때문에 더욱 충돌할 필요가 없었다. 

 

  이상 요한복음 18,1-11의 본문에 대해 교부들이 주해한 바를 소개하였다. 그런데 공관복음사가들이 겟세마니 동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보도한 본문들(마르 14,32-50; 마태 26,36-56; 루카 22,19-53)과 비교하면 뚜렷한 차이가 발견된다. 첫째, 마르코, 마태오, 루카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극도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시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도했는데, 요한은 이러한 예수님의 고뇌 장면은 물론 겟세마니 동산의 이름까지도 생략했다. 둘째, 요한은 체포하러 오는 유다와 군사들을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당신에 대한 박해를 당당하게 맞이하는 모습으로 보도하였다. 셋째, 마르코, 마태오, 루카는 유다가 입맞춤으로 인사를 하여 체포될 스승을 군사들에게 지목했으며 제자들이 모두 달아나버렸다고 보도했는데 요한은 이 두 장면도 역시 생략했다. 그리하여 요한의 보도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의 모습은 갈등하시는 이미지나 도망치는 제자들 같은 어수선한 이미지보다는 당당하게 박해를 맞이하시는 이미지가 돋보인다. 

 

18.2. 한나스 앞에 서시어(18,12-14) 재판을 받으시다(18,19-24)

  요한은 한나스에 관한 보도 사이에 베드로의 에피소드를 끼어 넣었다. 베드로가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 때가 바로 그 한나스 재판 중이었고, 그 장소 역시 한나스의 저택 안뜰이었다. 우리는 한나스에 관한 두 가지 보도(18,12-14.19-24)를 합쳐서 먼저 살펴보고 난 다음에 베드로에 관한 기사(18,15-18. 25-27)는 18.3.에서 다루기로 한다. 

 

  “예수님을 붙잡아 간 자들은 우리의 자유라는 사슬로(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자신들의 해방자를 결박했다(아우구스티누스). 그들은 마치 전리품을 갖다 바치듯 예수님을 한나스에게 데려갔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들이 예수님을 먼저 한나스 대사제에게 데려간 것은 그자가 예수님에 대한 계략을 꾸민 주모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들은 예수님을 카야파에게 데려갔는데, 그는 사람들을 선동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몬 자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한나스와 카야파의 사제직과 관련해 다음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기간은 임기 일 년인 대사제 네 명의 재임 기간에 해당하는데, 한나스 때 활동을 시작하시어 카야파 때 수난을 당하셨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요한복음 18,12-14에 대한 교부들의 해설에 따르면, 한나스는 비록 전직 대사제였으나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 주모자였다. 한나스는 서기 6년 키리니우스 총독에 의해 대사제로 임명되었다가 15년 그라투스 총독에 의해 쫓겨났다. 그는 세력이 막강했던 대사제 가문의 장으로, 그 다섯 아들이 모두 대사제직을 맡았다(김근수). 그 해의 대사제 카야파는 한나스의 사위로서,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신 후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 안에서 그분의 명성이 높아져서 그분을 중심으로 한 민중 봉기가 조짐이 예상되자 최고 의회를 소집하여 그분을 죽이기로 의원들이 결의하도록 선동한 바 있었다(요한 11,45-57; 마태 26,1-5; 마르 14,1-2; 루카 22,1-2). 그런데 예수님을 체포한 군사들이 그분을 카야파가 아니라 한나스에게 먼저 데려간 것을 보면, 한나스가 실세였고 카야파는 행동대장 격으로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체포되신 예수님을 실세인 전 대사제 한나스가 자신의 관저로 먼저 연행하여 신문하였으나(요한 18,13) 빌라도 총독의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내기 위한 결정적 단서를 만드는 데에 실패하자 카야파의 관저로 보냈다(요한 18,24). 이러한 요한의 보도는 카야파 대사제가 예수님을 최고 의회에서 재판하여 메시아 사칭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으로 보도한 공관복음사가들의 보도들(마르 14,55-64; 마태 26,59-66; 루카 22,66-71)을 보충하는 것이다. 아래에 인용해 놓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해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대사제는 예수님을 신문하여 반역의 증거를 찾으려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당신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아무것도 숨긴 것이 없음을 입증한다(아우구스티누스).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는 말은 당신께서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율법의 그림자 아래 가려져 있던 것들이 이제 당신 안에서 완전하게 드러났음을 뜻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친 자에게 다른 뺨을 돌려 대는 대신 왜 치느냐고 대꾸하시지만, 실제로는 다른 뺨뿐 아니라 당신의 몸 전체로 십자가에 못 박힐 준비를 하고 계시다(아우구스티누스). 당신을 신문하는 자가 실로 사제직을 더럽힌 자임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를 사제로 대하신 데서 예수님의 겸손과 인내가 드러난다(키프리아누스). 예수님께서 겪으신 것은 재판이 아니라 음모였던 것이 확실하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만인의 주님 그리스도는 실로 우리에게 겸손과 온화함과 인내의 본보기이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한나스에게 먼저 데려간 것은 한나스가 카야파의 장인인 데다가 그의 저택이 중간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자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카야파에게 보낸다. 카야파는 그해의 대사제로서, 그와 그의 장인이 해마다 번갈아 가며 대사제를 지냈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한나스의 유도 신문에 말려 들지 않으셨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위한 단서를 찾아내려던 한나스의 의도는 실패하였다. 그러자 성전 경비병이 그분의 뺨을 때렸고 이에 그분도 항의하셨다. 이를 두고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마태오가 보도한 산상설교의 가르침(마태 5,39: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을 떠올렸다. 

 

  하지만 폭력을 포기하라는 이 가르침은 교부 오리게네스의 주해에 따르자면, 악에 맞서되 악으로가 아니라 선으로 맞서라는 믿음의 논법으로 이해해야지 악을 용인하라는 말씀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 뜻에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수님께서는 뺨을 맞고 나서 온 몸을 십자가에 내어 맡기심으로써 다른 뺨을 내어주는 것보다 더한 선을 행하셨다고 본 것은 옳다. 이러한 예수님의 처신에 대하여 사도 바오로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라고 가르친 것은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다. 

 

  아무런 단서도 만들어 내지 못하자 할 수 없이 한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카야파 대사제에게 보냈다(요한 18,24). 카야파는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일으키시자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 사이에서 명성이 드높아질 무렵에, 최고 의회를 소집하여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하는  발언으로 의원들의 여론을 몰아가며 그분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자였다. 공관복음의 보도에 의하면 한나스에게서 그분을 넘겨받은 그는 최고 의회에서 위에 언급한 두 가지 혐의를 조작해 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키드론 골짜기에 있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군사들을 앞세운 유다에 의해 체포되시어, 먼저 한나스 관저에게로 가서 신문을 받으셨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자, 결박된 채로 다시 카야파 관저에게로 가서 한밤중에 꼬박 밤을 새워 진행된 최고 의회의 재판을 받으셨다. 이 재판에서 카야파가 재판장이 되어 성전을 모독했다는 거짓 증언(루카 26,61)에다가 예수님께서 메시아를 자처했다는 자백(루카 26,64)까지 얻어낸 상태에서, 성전 모독과 신성 모독의 혐의로 날이 밝자 빌라도 총독의 재판으로 넘겨지게 되셨던 것이다. 

 

18.3. 베드로가 시험에 빠지다(18,15-18, 25-27)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고 계시는 이 엄중한 상황에서 왜 느닷없이 베드로의 이야기가 끼어 든 것일까?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이야기는 요한복음서만이 아니라 공관복음서들도 모두 보도하였다(마르 14,66-72; 마태 26,69-75; 루카 22,55-62). 더욱이 이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미리 예언하신 바 있었고 이에 대해서도 네 복음사가 모두가 보도하였다(마르 14,27-31; 마태 26,31-35; 루카 22,31-34; 요한 13,36-38).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에서 베드로 관련 기사를 편집하는 방식에 차이가 발견된다. 즉, 공관복음사가들은 베드로가 부인한  기사를 별도로 다루었는데, 요한복음사가는 한나스 대사제가 예수님을 신문하는 장면을 보도하는 기사의 중간에 삽입시켰고 게다가 대사제의 신문을 가운데에 두고 나누어 분산 배치한 것이다. 마르코와 마태오, 두 복음사가가 보도한 사실, 즉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제자들이 모두 달아났다는 사실(마르 14,50; 마태 26,56)도 루카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의도적으로 생략하였다. 

 

  그런데 요한이 베드로를 배려한 더 뚜렷한 흔적은 신앙 고백 기사이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 모두 제자들 가운데에서 베드로가 가장 먼저 스승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감격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마르 8,27-29; 마태 16,13-19; 루카 9,18-20). 그런데 복음서를 쓰는 제1목적인 독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신앙을 고백하게 하는 것임에도, 이 중요한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시거나 감사하시기는커녕 함구령을 내리셨다고 공관복음사가 세 사람 모두 기록하고 있다(마르 8,30; 마태 16,20; 루카 9,21). 그런데 요한의 관련 기록은 정반대이다. 예수님의 공생활 보도에서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보도하지 않아서 함구령 같은 언급은 일절 나오지도 않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전처럼 어부로 되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던 일곱 제자들 가운데 끼어 있던 베드로를 구태여 갈릴래아 호수로 찾아가셔서 만나셨음을 기록하였다(요한 21,1-14).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풍어 기적을 일으켜 당신의 신성과 신적 권능을 확인하도록 체험시키신 다음에, 베드로와는 따로 독대를 하시며 세 번에 걸쳐 신앙 고백을 받아 내셨다고 기록하였으며, 이 고백 후에 수제자로 재신임하시며 교회를 맡기셨음을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이다(요한 21,15-19). 

 

  이처럼 분명한 차이를 통해서 우리는 복음사가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만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소개하는 입장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사가들이 기록한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복음서가 다른 성서에서처럼 인간의 죄나 허물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는 그 엄중함에 있어서는 다른 어느 역사 기록보다 진실하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수제자요 초대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의 큰 허물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네 복음서는, 성서의 모든 책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진실하고 정직한 기록이다. 강자와 승자의 관점에서 쓰여짐으로 해서 흔히 왜곡되기 마련인 인간의 역사 기록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전제로 교부들의 주해를 읽으면, 주요 맥락을 놓치지 않고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비참한 대우를 받으신 일에 관한 기록을 베드로의 유혹 이야기로 시작한다(아우구스티누스). 그는 자신도 이야기에 등장시키는데, 이름은 밝히지 않고 삼가는 태도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만 한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시는지 알아보려 한 점에서 다른 제자들과 달리 용감하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은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베드로를 대사제의 저택 안뜰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테오도루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려고 했을 때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었듯이, 지금 예수님께 관한 질문을 받고 그분을 모른다고 함으로써 물에 빠진다(로마누스). 이는 자신의 그리스도 신앙을 부인한 것과 다름없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그가 여기서 경험한 굴욕은 나중에 그가 죄지은 이들을 대할 때 겸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베드로는 나중에 회개의 눈물로 자신의 지위를 되찾는다(오리게네스). 그때는 대체로 따뜻한 시기인 춘분(암브로시우스) 때였는데도 날씨가 차가웠다(아우구스티누스). 베드로의 마음속 사랑의 불이 식은 데는 그 탓도 있었다(大 그레고리우스). 우리 주님께서 수난당하실 때 날이 춥고 어두웠던 것은 사랑이 식고 영적 어둠이 땅을 덮었음을 나타낸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예수님께서 끌려가실 때 베드로는 그곳에 남아 불가에 서 있지만, 예수님을 두 번째로 부인함으로써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을 때 인간 본성이 얼마나 나약한지 보여 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 베드로에게서 우리는, 병든 이의 큰 소리는 그 실체를 드러내는 반면 위대한 의사의 예고는 그대로 이루어짐을 본다(아우구스티누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일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나약한 이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힘 있는 이로 바꾸어 놓으시는지를 보여 주어 우리를 위안하기 위한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일은 모두 의로움의 태양이 떠오르기 전 밤의 어둠 속에서 일어났다(오리게네스).” 

 

  이처럼 수제자 베드로가 스승을 부인한 일은 시간상으로 어두운 밤에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탄의 유혹이 극심한 탓으로 신앙상으로도 믿음의 의지가 나약해 진 영혼의 밤에 겪은 일이었다. 요한 복음사가가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방식은, 비록 공관복음사가들에 비해서는 약화시킨 채라고 하더라도, 후대의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의도였으리라. 직접적으로 베드로의 후계자로 임명받아 활동한 역대 교황들은 물론, 교구와 본당의 사도적 책임을 받아 활동한 모든 성직자들, 심지어는 지도급 평신도들이나 일반 평신도들에 이르기까지 베드로가 받았던 사탄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오히려 교회의 책임이 중하면 중할수록 사탄의 공격은 더욱 집중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소심한 부인 행위를 희화화(戲畫化)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보다는 거울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18.4. 빌라도 앞에 서시어(18,28-32) 재판을 받으시다(18,33-40)

  요한은 빌라도의 재판을 제18장에서 제19장에 걸쳐 보도하였다. 그런데 이에 관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보도를 종합해 보면, 재판을 담당한 대사제가 한나스가 되었건 카야파가 되었건 – 어차피 그들은 한 통속이 되어 예수를 제거하고자 하였던 대사제 집단이었다 – 사두가이의 입장에서 예수를 살해할 음모에는 합의하였으되 사형을 시킬 만한 혐의로는 성전 모독 혐의와 신성 모독 혐의 같은 종교적 혐의밖에 만들어내지 못했다. 물론 이 종교적 혐의도 억지로 거짓 증인까지 동원하여 재판한 결과로서 지극히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었고, 게다가 정치적인 혐의는 전혀 없었다. 

 

  또한 종교적 혐의가 있는 죄인이라도 성전을 공개석상에서 모독한 거짓 예언자로 간주된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인 것을 보면 종교적으로 중대한 범죄 혐의라면 죽일 수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는 하다(참조: 사도 7,48; 즈카 13,3). 하지만 그렇게 예수를 제거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 해도 그 제자들과 지지 세력의 반발 움직임이 문제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는 대사제를 수장으로 하는 사두가이파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영향력을 로마 총독으로부터 거세당할 수 있는 매우 심각한 사태로 발전할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나스가 예수를 신문하며 제일 먼저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어본 것(요한 18,19)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두가이로서는 예수를 종교적 죄인으로 죽이는 것보다 로마 총독 빌라도를 끌여들여 그의 손으로 정치적 반란범으로 제거하는 것이 후환을 뿌리뽑는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메시아를 자처했다는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고발한 것인데, 메시아는 종교적으로 예언자를 뜻하기도 했지만 제정일치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는 정치적인 임금을 뜻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수장으로서의 메시아를 사칭했다면 정치적 반란죄를 저지른 것이고, 이 경우 그 정치범을 사형에 처하는 일은 총독의 고유 권한이었다. 재판의 전후 사정에 대한 교부들의 주해를 보자. 

 

18.4.1. 빌라도 앞에 서시다(18,28-32)

  “요한은 많은 수의 배심원이 예수님의 진술을 듣고 광범위하게 조사를 하고서도 결국 아무 죄도 입증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보내지 않을 수 없었음을 강조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렇지만 그들은 몸이 더러워질까봐 관저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일을 꾸미면서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진정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들의 왜곡된 시각을 드러낸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들은 축제 음식을 먹기 위해 깨끗한 몸으로 남아 있기 원했지만, 그 축제일은 나중에 그들에게 비탄의 날이 된다(테르툴리아누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날에 돌아가시며 사제가 곡식 단을 바치는 수확 주간 첫날 다시 살아나시게 되어 있었다는 성경의 모든 책이 일치한다(클레멘스).” 

 

  이상은 요한복음 18,28의 주해인데, 유다인들의 율법 규정상 이방인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었고, 만일 그렇게 되면 파스카 음식을 먹을 수 없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넘기면서도 자신들은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죄한 사람을 죽이려던 잔인한 음모를 꾸미고 있던 사악한 자들이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자잘한 율법적 성실성을 고수하려는 소심한 모습과, 그리하여 자신들의 정당함을 가장하려는 비겁한 모습을 보고, 교부들은 이러한 사두가이 유다인들을 비판한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사두가이들의 종교적 천박함과 윤리적 위선을 엿볼 수 있다. 

 

  “빌라도는 아직도 그들이 예수님의 죄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묻는 대신, 눈 멀었다가 보게 된 이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들, 더러운 영들에게서 풀려난 이들에게 물었어야 했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구체적인 죄목을 대지 않아도(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자신들의 말과 권위를 근거로 빌라도가 예수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18,29-30의 본문에 대한 교부들의 주해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그저 종교적인 다툼이 일어난 정도로 간주하고 있었으므로, 예수에 대한 정치적 재판을 맡기를 꺼려하였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법에 따라 예수를 재판하라고 지시한다. 한마디로, 예수는 그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테르툴리아누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들이 스테파노를 비롯하여 사람들을 죽인 일이 있음을 생각할 때, 그들의 말은 축제 때 사람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나 살해 방식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당신께서 다른 민족들에게 넘겨지리라고 예언하셨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18,31-32의 본문에 대한 교부들의 주해이다. 사두가이 유다인들의 대답, 즉 자기들은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다는 말은 정치범에 대해서 그렇다는 말이지, 종교적으로 중한 범죄를 저지른 죄인은 스테파노의 경우에서 보듯이 얼마든지 죽일 권한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나름 합리적으로 처신하고자 했던 빌라도의 유권 해석에 부딪치자 사두가이들은 막후에서 다급하게 바리사이들과 야합하여 예수를 종교적 죄인이 아니라 정치적 반란범으로 몰기로 했고, 정치적 범죄로 갇혀있던 바라빠를 석방시키는 조건으로 혁명당원들 즉 젤로데와도 협상하여 빌라도 총독을 몰아붙이기로 모의를 했을 것이다. 차후의 진행과정으로 미루어 볼 때 가능한 추정이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종교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아를 사칭했다는 혐의로,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유다인들의 임금이 되려 했고 이는 이스라엘을 식민 통치하고 있는 로마 황제에 대한 정치적 반란으로 간주될 수 있었으므로, 긴급하게 죄목이 변경된 채 가까스로 빌라도의 재판은 다시 속개될 수 있었는데, 복음서 본문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전후 사정과 맥락을 고려하여 추리해 보면 이런 상황 변화의 주범은 바리사이들로 추정된다. 

 

18.4.2.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시다(18,33-38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신문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이 문제에서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찾지 못할 경우, 그 지역에서 로마 황제의 통치가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분은 세상이 추구하는 지위와 권능을 거부하시며(테르툴리아누스,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진정한 힘이 있는 곳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 세상에 살되 거기에 속하지 말라고 이르신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임금’이라는 잘못된 칭호(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들으시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며 당신의 거룩하고 고귀한 가르침으로 영혼들을 밝히는 그분의 나라는 세상의 통치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이제 빌라도의 재판은 정치적 반란을 꾀했다는 정치범에 대한 재판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증거도 없이 일방적으로 고발해 왔기 때문에 빌라도의 신문도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으며 예수님께서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고 정치적 혐의를 부인하는 대답을 하셨으니 더욱 그러했다. 이러니 고발당한 피고가 재판장인 것처럼 당당하고, 재판장이 죄를 지은 피고인 것처럼 초조해 하는, 우습고도 맥 빠진 재판이 되어 버렸다. 

 

  예수님께서 하신 요한 18,36의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다가왔다고 선포하셨던 공관복음서들의 맥락과 상반된 듯이 보일 수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서에만 나오는 특유의 구절로서, 요한이 이 말을 보도하고 있는 문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요한 17,11.14-16에서 예수님께서 당신과 그 제자들은 이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때, 그 의미는 분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비록 몸은 세상에 살지만 마음은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동조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말을 하는 같은 복음서에서 또한 그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역시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 나라의 가치는 이 세상의 가치와 다르며 대립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그 나라는 어딘가 지상에서 동떨어져 공중에 떠 있는, 또는 사람들의 내면에나 존재하는, 그래서 구체적으로 지각될 만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구조가 없는 추상적인 나라라는 뜻으로 생각할 아무 이유가 없다(A.놀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나라’는 공관복음서에서 ‘하느님 나라’라고 발설되던 나라요, 요한복음서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되던 사회적 실체였다. 힘으로 다스려지는 나라가 아니라 가치로 다스려지는 나라였다. 성전 정화 사건 당시에,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고 하시던 그 ‘성전’과 동일하다. 제자들이 나중에 그 성전이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던 바로 그 성전이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핵심 가치를 두고, 마귀의 하수인들인 빌라도, 바리사이, 사두가이 등과 이들의 사주를 받은 젤로데 등이 야합한 나라와 대결하고 계셨던 것이다. 당신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대결하고 계셨던 이 상황에서 그분이 이해하시던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이해하시기로는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마귀, 곧 악마였다. 이 악마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그분은 줄곧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서 악마와 싸우셨다.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악마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시는 일이었으며, 이는 또한 당연히 악마의 세력을 쫓아내시는 일이었다. 이 일은 현상적으로는 악마의 영에 사로잡혀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던 하수인들, 즉 사두가이·바리사이·빌라도 등과 대결하는 일이기도 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보내신 성령을 받고서야 이 전쟁의 구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전에 예수님께서 싸우시던 광경을 생생하게 기억해 내 가며 그분의 ‘작전’을 계승하고자 진력을 다 했고, 이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악마와 대결하는 영적 전투의 연속이었다.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세운 교회는 그분 나라의 씨앗이었고, 밀알이었으며, 겨자씨였고, 누룩이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나라’인 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선교하고자 했으며 박해가 닥치면 물러서지 않고 순교를 감행하였다. 바로 이 대목이 전해주는 상황에서 스승이신 그분이 보여주신 불퇴전의 태도가 그 사도들을 용감하게 변화시켰다. 부활 신앙의 역사적 위력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증언하시며, 그 진리는 곧 당신이다(아우구스티누스). 시편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진리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하느님의 아들이신 진리께서 땅의 먼지로 만들어진 우리의 육을 취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진리는 본성상 어디에서 유래하는 파생물이 아니다(멜리톤). 진리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거짓의 아비인 죽음의 총독에게 넘겨진다(아우구스티누스). 유대아 총독 빌라도는 진리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물은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복음 18,33-38의 본문이 전하는 대화는 공개적인 재판정에서 나눈 대화가 아니라 총독 관저 안에서 빌라도와 예수님 사이에 독대하며 나눈 대화였다(요한 18,33). 빌라도가 던진 정치적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신학적 답변으로 응수하셨다(김근수). 빌라도가 정치적 반란을 주도했다고 고발된 죄인의 입에서 뜻밖에 진리의 증언자라는 소명 발언을 듣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빌라도에게 있어서 ‘나라’는 정치적 권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세속적인 실체였던 반면에, 예수님께는 진리를 증언함으로써만 다스릴 수 있는 거룩하고도 영적인 그러나 분명히 사회적인 실체였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 하고 빌라도가 되묻는 바람에 살벌한 정치범 재판이 진리를 논하는 토론의 장이 되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께로부터 정치적 혐의를 찾지 못하고 석방하려고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이를 주해하는 교부들은 빌라도 재판에서 나온 진리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 표명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길도 역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교훈적 주해를 남겼다. 

 

18.4.3. 빌라도의 비겁한 질문(18,38ㄷ-40)

  “빌라도가 예수님께 질문을 한 다음 곧바로 자리를 뜬 것은 아직도 예수를 구할 기회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그는 이런 질문에 대답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빌라도가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먼저 밝힌 다음 축제를 위해 예수를 풀어 주자고 제의한 것은 신중한 태도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죄수를 풀어 주는 관습은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기가 쉽지 않지만, 민수기 35장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오늘의 교회에서도 죄를 짓고 피신처를 찾는 사람을 위한 그런 관습을 찾아볼 수 있는지 궁금히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오리게네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항의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유대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른다. 나중에 십자가에 명패가 붙듯이 그 문구가 그의 마음에 새겨진 듯하다(아우구스티누스). 빌라도는 폭도들의 격분을 가라앉히려는 뜻으로 농담하듯 그렇게 말했을른지도 모른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유대인들은 바라빠를 풀어 주기 원한다. 일부 성경 사본에는 바라빠의 이름이 예수의 이름과 비슷하게 표기되어 있어서, 이 둘의 대조점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오리게네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유명한 강도와 한 부류로 취급함으로써 그분의 명예를 더럽히려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오리게네스). 그러나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 분께서는 진짜 범죄자 사탄에게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강도와 우리의 자리에 서셨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빌라도가 자기 관저 안에서 예수님과 독대하는 동안,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그리고 젤로데 등의 유다인들은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풀어주려는 듯한 심경 변화를 눈치채고 바쁘게 움직인 듯하다. 이미 협상해 놓은 대로 군중을 선동하여 혁명당 지도자의 한 사람인 바라빠를 석방시키고 기어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재판이 다시 속개되자, 재판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주도권이 빌라도에게서 위의 유다인 강경세력에게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요한 18,38ㄹ) 하고 예수님의 무죄 선언을 했으면 석방해 버리면 그만이었을 상황에서, 빌라도는 오히려 축제 사면 관습의 명분을 들면서 “내가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원하오?”(요한 18,39ㄴ) 하고 물음을 던졌다. 이 물음은 예수를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려고 달려들던 유다인들이 의도와는 정반대가 되는 엉뚱한 제안이었으니, 빌라도는 스스로 재판 주도권을 포기해 버린,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재판을 자초한 셈이었다. 여기에는 갑자기 성난 군중으로 돌변한 재판 방청자들이 끌고 가는 분위기 탓이 컸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속지(屬地) 팔레스티나에서 불미스런 충돌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는 처지였으므로 치명적인 약점을 잡힌 사람처럼 되어 버린 빌라도는 더 이상 자신의 의도대로 재판을 끌고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축제 사면 관습을 명분으로 한 석방은 바라빠의 몫으로 넘기지 않을 수 없었고 기어코 예수의 사형 언도를 요구하는 이들 강경세력에게 빌라도는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무죄를 확인하고 나서도 사형을 언도할 수밖에 없도록 스스로 몰림을 당하는, 이렇듯 한심한 태도는 전형적인 소심한 인간형의 직무유기였다. 

 

  이상 요한복음 제18장에서 보도된 바와 같이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마치 커다란 죄를 지은 대역죄인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분이 죽임을 당하신 십자가형은 본시 로마 제국에서 정치적 반란죄를 저지른 죄인들에게 가하던 끔찍한 벌이었다. 하지만 예수님께 붙여진 정치적 반란죄목은 바리사이들이 그분을 어떻게 해서든지 죽임에로 몰아넣기 위하여 로마 총독 빌라도를 사주하고 사두가이들과 젤로데들이 동조하여 붙여졌을 뿐, 실제로 그들이 야합하여 그분을 제거하고자 했던 음모의 죄목은 성전 모독과 신성 모독 혐의였고 이 둘 중에서도 큰 혐의는 두 번째 혐의였다. 하느님이신 분이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혐의로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정치적 반란죄요, 실질적으로는 신성모독죄로 그분은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다.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진실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서문에서 예수님의 최후가 지니는 의미를 이미 밝힌 바 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마치 독수리가 드높은 창공에서 매서운 눈으로 드넓은 지상을 내려다보듯이 예수의 죽음이 지닌 근본적인 의미를 통찰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배척했다는 영적인 진실에 대한 통찰이다. 

 

  요한 이전에 마르코 복음사가도 예수님께서 숨지시던 순간을 기록하며 의미를 해석해 놓았다: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에 …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마르 15,33-34.38). 마르코가 기록해 놓은 대낮의 ‘어둠’이나, ‘성전 휘장의 찢어짐’도 요한처럼 예수의 죽음이 지닌 의미, 특히 종교적인 의미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유다교가 선전해 온 신관은 찢어졌고 어두워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태오도(마태 27,45-46.51ㄱ), 루카도(루카 23,44-45) 함께 기록해 놓았다. 마태오는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마태 27,51ㄴ) 고 덧붙임으로써 종교적 의미와 더불어 이를 뒷받침하듯이 지진과 같은 예사롭지 않은 자연현상까지 일어났다고 기록해 놓았다.

 

  사도 바오로는 한결 차분하게 예수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여 필리피 교우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그리스도 찬가’라고 불리우는 이 대목은 사도 바오로만의 고백이 아니었다. 연대를 살펴보면,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충격을 받고 여기서 헤어 나오게 된 한 세대 동안 묵상에 숙고를 거듭한 끝에 내려진 집단적인 성찰로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나타난 신약성경 최초의 신앙고백이었고, 마르코 복음서보다 더 이른 시기에 쓰여진 성서 기록이다. 이는 비움과 낮춤의 결과가 죽음이었으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성임을 뒤늦게 깨닫고 밝힌 신앙고백이었다. 

 

  이렇게 하여 요한 복음사가가 이스라엘 백성의 배척에 뒤이어,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는 진술한 바가 준비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새로운 신성, 그러나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신성이 이제 비로소 드러나서 새 역사를 창조하신다는 뜻이다. 이렇게 부활하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시게 될 역사는 물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천지 창조를 능가하는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의 창조였으며, 이는 영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창조를 위한 어둠으로 보고자 한다. 즉 요한복음 서문의 첫 머리(요한 1,1-4)에 기록된 대로,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 그래서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이 생명과 빛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실 것이었는데, 유다교의 박해를 받아서 당하신 그분의 죽음이나 조선 왕조와 노론의 박해를 받은 한국교회 신자들의 죽음이나 공통적으로 “심연을 덮고 있는 어둠”(창세 1,2)으로서 창조를 위한 하느님의 영이 그 위에 깃들고 있는 형국이라고 보고자 하는 것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8.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시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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