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17. 대사제의 기도

[요한복음] 17. 대사제의 기도

 

저녁노을의 글

2022-09-28 21:56:04 조회(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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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은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전에 스승으로서 당신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며 상호 섬김과 형제애라는 계명과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시는 생애 마지막 가르침을 제13장에서 제17장까지에서 전해주고 있다고 했는데, 그 마지막 장인 이 제17장은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바치신 긴 기도문이다. 이어지는 제18장부터 제19장까지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긴박한 보도로 이어지고 그 다음에 나오는 제20장과 제21장으로 부활 후 발현 사건 보도가 나오며 이로써 요한복음이 마무리되기 때문에, 이 제17장이 파스카 만찬 가르침의 결론인 동시에 요한복음 전체의 핵심으로서, 제1장의 서문에서 요한 복음사가가 증언했던 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요한 1,14)을 드러내신 대목이다. 그래서 이 대사제 기도 첫 머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하고 기도하셨다. 

 

  이제까지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라든지(요한 1장),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키셨거나 또는 우연히 맞닥뜨리신 사건들을 겪으시는 가운데 제한적으로 발설하신 말씀으로(요한 2장-11장)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시는 메시지를 밝히셨다면,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에서 당신 생애에서 지향해 오셨던 가장 귀한 뜻을 직설적으로 진솔하게 하느님 앞에서 기도로 밝히셨다. 그분께서는 우선 당신 자신을 위해서, 그 다음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는데 그들이 하나가 되도록, 그러기 위해서 그들이 진리로 거룩해지도록 기도하시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통해 당신을 따르게 될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이 범주에는 당연히 지금의 신앙인들인 우리도 포함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신앙인들로 기대되는 인류 전체도 포함된다. 그만큼 포괄적으로 열려진 기도이다. 또한 이 기도는 이제까지의 모든 공생활에서의 희생을 망라하면서도 십자가 희생을 염두에 두시고 이 모든 희생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자 하셨던 바를 몸소 밝히신 기도이기 때문에 이 기도를 ‘대사제의 기도’라고 부른다. 

 

17.1. 당신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다(17,1-5)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대사제로서 바치신 기도의 첫 말씀(요한 17,1ㄴ)을 해설하면서 이 기도의 큰 뜻에 대해 이렇게 풀이해 주었다.

  “우리는 시련을 맞으면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기도해야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고 기도할 때면, 먼저 아버지께 영광을 바치는 기도를 한 다음에 우리 일을 말씀드리는 게 옳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의 기도는 그분의 강화만큼이나 듣는 이의 정신을 함양시키는 효과적인 도구다(아우구스티누스). ‘때가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께서 행하셨거나 사람들이 당신께 행하도록 당신께서 허락하신 모든 일이 당신의 계획에 따른 것임을 나타낸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사고 청하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제 누리실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이며, 그분의 굴욕은 영광과 다름이 없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할 때, 그분의 기도가 이루어졌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예수님께서 수난 때 영광스럽게 되셨다고 하지만, 부활 때에는 훨씬 더 영광스럽게 되셨다(아우구스티누스). 영광을 주고받음과 공통의 신성을 보여 주심으로써 아들은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신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대사제의 기도에 관한 큰 뜻을 풀이한 다음에 교부들은 기도의 첫째 주제이며 임박한 십자가 수난의 의미이기도 한 영광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상세히 풀이하고 있다.   

  “아버지의 영원한 영광은 더 커지거나 늘어나는 것이 아니지만, 세상 안에서 드러나는 그분의 영광은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감에 따라 더 커진다(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사는 예수님의 청은 새로이 영광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미 당신에게 주신 영예를 드러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테오도루스). 아들의 자발스러운 복종과 영광스러운 행위는 그분의 아버지를 잘 반영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신 분이며, 아들이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누림에 따라 우리에게도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시다(디디무스). 생명의 희망은 아버지와 아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성령에게 있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청하시는 영광이란 세상에 오시기 전에 성부께서 이미 주시기로 되어 있는 것이라는 교부들의 주해는, 이 영광의 신적 연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미 그분께서 이룩하신 공생활에 비추어보면 이는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수난의 영광으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합작으로 신성의 품위를 드러내는 영광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어서 교부들은 이 영광이 지니는 성격, 즉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권한(요한 17,2)에 대해 풀이해 주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권한을 주셨으며, 그 권한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의 육이 우리 육을 회복시키기 때문이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는 권한을 받은 사실로 그분의 신성이 손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주신 분이 아버지라는 사실과 받는 이의 신성을 확실히 밝혀 준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아들은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아들은 그 일을 언제나 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다른 민족들을 포함시켜 ‘모든 이’라고 하신다. 믿지 않은 이들이 있는 것은 교사의 잘못이 아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버지를 모르는 것은 죽음이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그러나 참으로 그분과 아들을 아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성찬 안에서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으로 옮겨 가며, 그 믿음은 마침내 우리를 ‘나는 있는 나다’라고 하신 위대한 분을 바라보며 사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그러면 불사의 존재로 변화하여 영원한 세상에서 살 때 우리는 우리 믿음의 대상을 보게 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이렇듯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신다.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정의하시는 말씀(요한 17,3)에 대한 주해가 이어진다. 

 “영원한 생명은 ‘홀로 참하느님이신’ 분을 아는 것이며(오리게네스) 그리하여 장차 사도들이 파견될 다른 민족들의 가짜 신들과 그분을 구별하는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버지 ‘홀로 참하느님’이시라는 말은 아들의 신성과 영광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며(아타나시우스), 이 말 때문에 두 분이 공통된 속성을 지녔음을 의심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행위로 신성의 속성들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창조가 그 예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사실상 당신의 신성을 분명히 말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인성에 관해서는 아버지와 연관시켜 말씀하지 않으신다(노바티아누스).”

 

  “하느님에 관한 지식이 영원한 생명이다. 그분에 관한 지식이 자라날수록, 우리는 하느님을 더없이 영광스럽게 하는 삶을 향해 더욱 가까이 간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의 이름은 이미 하늘에서 천사들의 섬김으로 영광스럽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함으로써 인류를 섬기기 위해 지상에 오셨을 때 완전하게 영광스럽게 되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할 바를 다하고 이제는 당신의 일이 다 이루어졌을 미래를 내다보고 계시기에 ‘일을 완수했다’고 하신다. 또는 열매를 맺을 뿌리가 이미 심겼음을 나타내신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 선언하듯이 가르치신 바(요한 17,3)를 교부들도 부연하여 강조하고 있으니,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을 아는 것이요, 그 앎을 통해서 그분과 관계를 맺고 그분과 소통하며 그분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앎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는 깨달음이며 또한 이는 기껏해야 백 년을 넘기지 못하는 인간 수명을 그 이상을 늘리는 일이 아닌 것이요, 또는 죽어서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영원히 산다는 그런 물질적인 차원의 양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하느님과의 관계에 초점이 있는 영적인 차원의 질적인 개념이다. 현세와 내세를 모두 다스리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달라지는 참생명을 겨냥하는 개념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사고 청한 것은, 당신의 신적 지위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들어 올리신 것이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말씀께서 언제나 지니고 계시던 영광을 그분의 인성이 받았기 때문이다(디디무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의 것이던 영광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성을 이제 다시 회복시키려고 한다(시리아인 에프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영광스럽게 되는 것의 순서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곧, 아들이 지상에서 민족들에게 아버지에 대해 가르침으로써 아버지께서 먼저 영광스럽게 되신 다음, 아버지께서 아들을 당신 오른쪽에 앉히심으로써 아들이 영광스럽게 된다(아우구스티누스). 아들은 영광스럽게 되도록 세상이 생겨나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으며, 당신께서 아버지 오른쪽에 앉으실 때 그 영광이 완성되기를 지금 기도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이 대목에서 교부들의 주해가 빛을 발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당신의 공생활을 통해서 땅에서 드러내셨다는 것(요한 17,4)과 당신이 천지창조 이전부터 누리던 영광을 다시 누리게 해 주시기를 청하셨을 뿐인데(요한 17,5), 교부들은 그분이 지니신 인성 덕분에 그분이 영광을 누리시게 되면 인간으로서 같은 인성을 지닌 제자들과 믿는 이들도 영광스럽게 되도록 회복되리라고 보는 것이다(시리아인 에프렘).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신 분이셨고, 그 인성을 지니신 채 영광을 누리시게 되면 우리도 영광을 누릴 가능성이 열린다. 그리고 이 가능성은 우리가 그분을 따라 십자가를 짊어지는 믿음을 발휘하게 된다면 실제로  구원의 효력으로 나타날 것이며 이는 엄청난 은총이 아닐 수 없다.

 

17.2.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다(17,6-10)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되, 제자들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데 집중하셨다. 이로써 밝혀진 바 제자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은, 그들이 이미 하느님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 중대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필요했던 일은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고 믿게 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신원과 자신들의 신원이 같으며 그 정체성이 하느님의 사람임을 깨닫게 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었고, 사도로 양성하기 위한 목표였다. 여러 교부들도 이 점에 대해 상세하게 주해하고 있다.

 

  “이제 아들이 아버지의 새 이름이다(테르툴리아누스). 그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서만이 아니라 아버지로서도 드러내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버지께서 혼자 영광을 누리지 않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도 믿기 바라실 만큼 친밀하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믿게 될 모든 이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라는 말은 어떤 것을 아버지는 가지고 계시고 아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아우구스티누스).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는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낳으셨을 때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는 나약함과 배고픔 같은 우리 것을 취하시고 대신 우리에게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선물을 주신다(僞-아타나시우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서 아버지에게서 오셨음을 깨달았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때 제자들은 이것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나중에는 믿음에 확신을 가질 것을 내다보셨다(아우구스티누스).” 

 

  사실 제자들만 자신들의 신원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다른 유다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은 지니고 있었지만 하느님의 사람들로서 인류 전체가 그 신원과 정체성을 알게 해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까지는 지니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이며 따라서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기본이다. 또한 구세주 강생과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당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활동 목적 등 신원을 드러내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하느님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기도 형식을 통해서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 역시 신적 기원을 지닌 존재임을 일깨워주시고 계신 것이다. 이는 그 기도를 듣고 있던 열두 제자에게만 해당되는 신성의 비밀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 장차 믿는 이들 모두는 물론 인류를 대표하여 인류의 신적 기원에 대한 계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요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고조선 이래 한민족이 지녔던 제천의식(祭天儀式)과 천손의식(天孫意識) 또한 이 중대한 계시가 흘러들어온 흐름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의식이 인류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인간 존엄성의 위대한 근거로 받아들여야지, 엉뚱하게도 비신자들이나 다른 종교 신봉자들이나 다른 민족들을 배타적으로 대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편협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착각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편협한 선민사상은 명백한 오류였다. 그들은 원래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먼저 선택하신 도구였을 뿐이었다. 메시아를 위해 예언되었다고 알려진 주님의 종의 노래 두 번째 대목에서,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는 대상은 메시아를 위해 주어진 예언이기 이전에 메시아적 백성이 되도록 부르심 받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해 주어진 예언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판 천손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모두의 아버지이시다. 심지어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까지도 그분이 지으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의식과 신앙은 헬레니즘 시대에 세계 시민의 뜻으로 주창되던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을 양산해 내던 무신론적인 사해동포주의로 귀결될 수는 없다. 인류는 어디까지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형제자매들로서 하느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로 대표된 인간의 신적 기원에 관한 예수님의 계시적 기도를 잘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을 따라서, “우선 인간이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구원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하느님 자신이 인류에게 명시해 주셨음을 선언하는 바이다. 우리는 이 유일한 참 종교가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교회 안에 있음을 믿는다.”(종교자유 선언, 1항)고 선언할 뿐, 다른 모든 종교들과 학문들도 이 진리에 초대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서로가 함께 이 진리의 최고선과 공동선의 길로 협력하여 나아가기를 바랄 뿐이지, 중세에 가톨릭교회가 다른 종교들과 다른 민족들을 이단시하거나 야만시하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들 안에서 성령께서 이룩하신 거룩함의 보화를 발견하려 애를 쓰는 것이 옳은 태도이며 그에 대해서는 마땅한 존경으로 대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심지어 무신론을 오류로 규정하면서도 무신론자들의 주장 속에는 하느님께 대한 더 큰 갈망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고자 하였다(사목헌장, 21항).

 

17.3. 제자들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시다(17,11-13)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신다. 그 하나됨의 기준은 그분이 ‘우리’라고 부르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 당신이 성자로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나 되어 누리시는 기쁨을 제자들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하시는 것이다.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가 아니라 당신께서 세상을 떠나실 일을 내다보시고 하신 말씀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영혼은 육체 안에 살지만 육체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당신께서 성체를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머무르게 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십사고 청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가 틀림없이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셨기에, 위험이 다가오는데도 겟세마니 정원에서 제자들이 잠에 빠지도록 두신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이 기도는 마치 후대에 교회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 역사를 미리 내다보시고 계신 듯하다. 힐라리우스 교부의 주해에 따르면, 이 기도는 공관복음사가들이 보도하고 있는 대로,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셨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이 위험에도 아랑곳없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신다. 이 기도 말씀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사랑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치 안에서 발견되는 것 같은(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본성의 비슷함과 의지의 일치(오리게네스)를 말씀하신 것이라는 해석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하나는 조화를 통하여 많아진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런데 아리우스파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예수님과 아버지가 우리와 그분이 하나인 것 같은 식으로 하나라는 뜻이라 우긴다(아타나시우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은 ‘그 아들’로서가 아니라 ‘아들들’로서이며, 우리는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지 하느님이 되는 것이 아니다(아타나시우스).” 

  이 대목은 이미 교부들 시대에 아리우스 이단 논쟁으로부터 시작해서 에페소 공의회(431년),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공식적으로 확정한 후에도 그 실천적이고 사목적인 의미에 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아우구스티노 이래로 피오레의 요아킴, 토마스 아퀴나스, 라너, 몰트만 등을 거치면서 매우 사변적인 삼위일체론 논쟁이 지루하게 전개된 바 있다(심상태). 그런데 20세기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이를 ‘다양성 안의 일치’로 명쾌하게 정리하였다(사목헌장, 24항; 참조 일치교령, 2항).

 

  그런데 교부 아타나시우스의 말대로, 제자들이 빚어내는 다양성이 성삼위의 다양성과 같은 수준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이것이 동서방 교회 간에 그리고 서방 교회 내 교파 간에 분열했다가 화해하고 재일치를 위한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일련의 역사적 흐름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는 고리가 된다. 

 

  공의회 이후 이어지고 있는 교파 간 일치 노력은 분열되어 있던 동안 이룩된 역사적 발전을 되물리고 분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님은 이미 일치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교파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다. 사실 분열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각 교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도 다양한 카리스마를 부여하셨으니, 동방 교회는 고유한 전례 의식과 수도 전통을 발전시켰으며(동방교회 교령, 6항), 개신교파들은 성서에 대한 뛰어난 열의(일치교령, 21항)를 보여주었다. 이는 전체 그리스도교에 주어진 풍요로운 영적 자신으로서 가톨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존경의 마음으로 힘써 배워야 할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크게 보지 말고 오히려 서로의 장점을 배워가다 보면, 교부 히에로니무스가 내다본 바처럼,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힘으로 가까워질 것이다.

 

  “멸망을 향하여 가고 있는 유다로 말미암아 시편 제109장의 예언이 이루어진다(아우구스티누스). 그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제자들 가운데 속한다고 헤아려졌지만 끝까지 견뎌 내지 못했다(아우구스티누스). 어떤 이들은 견뎌 내고 어떤 이들은 그러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만 아시는 신비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당신 안에 머물라고 강요하지는 않으실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기쁨을 위해서도 기도하신다. 그 기쁨은 현세에서 드러나는 일치와 그리고 장차 올 세상에서 그들의 것이 될 평화와 복됨 안에서 이루어질 기쁨이다(아우구스티누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하느님이시므로, 육체적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그들을 보살펴 주셨듯이 그들을 떠나셔도 늘 그들과 함께 계시며 보살펴 주시리라는 것을 그들이 알기 바라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유다를 두고 떠올린 시편 109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제 찬양의 하느님, 잠잠히 계시지 마소서. 그들이 저를 거슬러 사악한 입과 음험한 입을 벌려 거짓된 혀로 제게 말합니다. 미움의 말로 저를 에워싸고 까닭 없이 저를 공격하며 제 사랑의 대가로 저를 적대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직 기도드릴 뿐“(시편 109,2-4). 삼위의 하느님께서 일체이신 것이 신비인 것처럼, 그에 버금가는 수수께끼가 어떻게 예수님의 직제자 가운데에서 유다 같은 배신자가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후대의 역사에서도 제자들의 일치를 깨는 제2의 유다들은 출현했고, 지금도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원칙을 예수님의 계시이자 기도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3의 유다들은 여전히 활약 중이다. 그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뿐이셨듯이, 교회도 그분 안에서 기도할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 

 

  하지만 교부 키릴루스의 증언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므로, 육체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그들을 보살펴 주셨듯이 그들을 떠나시어 승천하신 이후인 지금에도 늘 제자들을 통해 교회에 들어온 믿는 이들과 함께 계시며 보살펴 주실 것이다. 교회는 그분의 함께 하심과 보살피심을 성령을 통해 알고 있고, 성찬의 양식을 통해 성령으로 현존하심을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갈라진 교회의 일치라는 목표 역시 성찬의 현존 양식 안에서 추구되어야 할 문제이다. 공의회의 교부들도 이렇게 선언하였다: “교회 안에서 요긴한 일에는 일치를 보존하며, 각자에게 맡겨진 임무에 따라 여러 가지 영적 생활과 규율이나, 전례의 다양성이나, 더욱이 계시된 진리의 신학적 탐구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마땅한 자유를 존중해야 하며, 만사에 사랑을 닦아야 하겠다”(일치교령, 4항). 성찬 안에서 예수님께서 현존하시겠다고 몸소 약속하시고 성체성사를 세우셨으니만큼 이는 성자의 신적 제정으로서 후대의 교회가 변경할 수 없는 ‘요긴한 일’에 속한다. 후대 교회의 역사에서 부제 직무의 신설이나 사제 독신제도 등 성령의 이끄심으로 교회가 제정한 일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성자의 신적 제정과 교회의 제정은 그 차원이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7.4.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해지기를 기도하시다(17,14-19)

  이 대목에서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께 속하는, 거룩함이 관건이 되고 있다. 세속적 가치에 물들지 않고 하느님께 속하자면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하는데, 사람도 역시 속된 피조물인지라 스스로 자신을 성화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오는 거룩한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고 청하시고 나서 당신 자신도 그리고 제자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그 진리란 하느님의 말씀이다. 

 

  “제자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도 당신처럼 기도하라는 촉구다(『디다케』).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들이 거룩함 안에서 더욱 자라기를 기도하시며(아우구스티누스), 그들과 우리가 하늘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도록 준비시키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당신처럼 덕성스러운 이가 되라고 촉구한다(아타나시우스). 이 기도는 우리에게 성령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께서도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성령의 선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참되고 올바른 교의를 지키게 하신다는 뜻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진리인 아버지의 말씀은 그분 자신의 ‘말씀’이며 우리가 믿는 외아들이시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시기를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7ㄱ) 하셨다.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이 스승인 당신처럼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말씀으로 거룩해지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해 오기는 하셨어도 그들은 믿음이 굼떴으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에 둔감해서 쉬이 알아듣지도 못했었다. 그러니 이제 당신 생애의 최후 순간이 임박한 순간에서 장차 당신의 사명을 계승할 제자들을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 드리는 비장감이 감도는 기도를 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우나 고우나 앞으로는 제자들의 역할에 당신이 시작하신 복음화가 좌우될 수밖에 없는 형편인 것이다. 

 

  “제자들을 죄에서 거룩하게 하신(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갖추어 주신 다음 세상으로 파견하신다(테오도루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거룩한 제물로 바치신다(테오도루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주님의 성화는 우리의 성화이며(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주님의 지체인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동시에 인간으로서 당신 자신도 거룩하게 되신다(암브로시우스).” 

  교부 테오도루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언급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나서 당신이 하실 수 있는 마지막 본분으로 삼으신 일은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는 대사제의 직분이었다. 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은 이렇게 학문적인 지식의 차원만이 아니라 인격과 삶을 바치는 봉헌으로서 종교적인 차원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래서 앎으로 그치지 않고 그 앎에 따라 삶을 봉헌할 수 있어야 진리가 인간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17.5. 믿는 이들의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시다(17,20-26)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하나됨이란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것을 공의회 교부들을 통해 현대 가톨릭교회가 깨달은 이상, 제자들을 통해 당신을 믿게 될 후대의 신자들이 이루게 될 일치 또한 문화는 다양해도 그 구심점은 하느님이시라는 같은 패러다임으로 전개될 것이다. 

 

  “모든 믿는 이의 일치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에서 우리는 교회 안의 일치를 촉구하는 간곡한 훈계를 보며(키프리아누스), 인류가 한때 하느님과 누렸던 일치로 회복될 때를 고대하게 된다(오리게네스). 그러나 그것은 본성의 일치가 아니라 은총에 따른 일치다(히에로니무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로 묶는 의지의 일치에 대해 말씀하신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교회의 일치는 삼위일체의 일치를 본받은 것이다(히에로니무스, 암브로시우스). 주님께서 성령과 그분의 선물에 참여할 때 다양함 가운데 일치를 가져오실 수 있는 것처럼 믿는 이들은 신앙과 고백에서 하나 될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평화와 일치는 세상에 대한 강력한 증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본성이 높이 들어 올려져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그것을 취하심으로써 영광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셨다(아타나시우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그리고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주셨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리스도께서는 나중에, 당신의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그들에게 이 영광을 주셨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이 영광은 인간 본성이 나중에 그리스도께 받을 그분의 불사(不死)로 이해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성사 안에서 우리와 당신을 결합시키심으로써 얻어지는, 당신과 아버지와 우리의 완전한 하나 됨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우리는 우리를 갈라놓는 죄에서 깨끗하게 됨으로써 성령에 의해 우리의 유일한 중개자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융합된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서 당신의 친아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녀 되는 권한을 주시어 우리를 아들딸로 부르신다(암브로시우스). 아버지께서는 자녀로 받아들이신 우리를 친아들처럼 사랑하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맑은 날 밝은 해를 바라보는 이들이 그 햇살을 누리듯,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을 바라볼 때 우리가 보는 것에 의해 영광스럽게 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다양한 문화 속에서도 같은 하느님을 믿게 되는 일은 인위적으로 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그분의 은총이 바탕이 되어야 이룩될 수 있는 현상이다. 아울러 서로 안에 역사하셨던 성령의 작용을 식별하려는 안목과 이를 배우려는 노력이 진지하게 경주될 수 있다면, 상호 배움과 공동선을 위한 협력으로 가속화될 수 있는 교파 간 일치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교부들은 이런 노력이야말로 인간 본성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높이 들어 올려지는 것이고,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임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있는 곳에 우리도 있게 해 주십사고 아버지께 비신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시는가가 아니라 그분 계신 곳에 우리도 있게 되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우리가 그분과 완전하게 하나 될 장차 올 시대에는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고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이런 것들을 타락시킬 어떤 악도 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오리게네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나누는 것을 허락하신다(이레네우스). 우리가 최근의 박해 때문에 고투하는 만큼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영광이다(키프리아누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당신께서 인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 가운데로 내려오신 덕분에 우리의 것이 된 이 미래의 영광(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에 대해 알지 못하는 세상에 실망하셨음을 나타내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셨으며, 우리가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계속해서 그분의 이름을 알리기를 기대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듯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을 때, 우리 안에는 사랑이 있다(아우구스티누스).”

 

  이상과 같은 교부들의 주해대로, 교파 간에 이루어질 일치는 상호 간의 노력도 변수가 되겠지만 가장 큰 변수는 각 교파들이 그리스도와 얼마나 가까워지느냐의 노력일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그리스도교를 넘어선 다른 종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니,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는 노력이 진지할수록 종파 간 이해와 협력도 촉진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 이치로, 사회의 모든 학문들이 진리에 대하여 진지하게 접근할수록 그 구도정신과 진리 자체의 힘에 의해서 종교와 학문 간 대화가 활발해져서 우리 사회가 이룩하고자 하는 문명이 더욱 인간화의 방향으로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17.6. 천주학 강학회: 최고선의 진리를 탐구한 지성적 노력

  결국 예수님께서 바치신 ‘대사제의 기도’를 보도한 제17장의 결론은 진리로 거룩해지고, 진리 안에서 일치하기를 바라신 그분의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복음화를 위한 전망 하에서 아시아의 문화적·경제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 때 먼저 살펴보아야 할 현상은 조선 교회의 지성적 접근 노력이다. 

 

17.6.1. 사회악에 대한 인식

   “온 나라가 온갖 재앙 때문에 흔들리고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 가난한 자, 부자, 천주교 신자, 비신자, 양반, 서민, 강자, 약자,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항상 입으로는 ‘평화, 평화!’라고 외치면서 줄곧 놀이와 음주, 못된 구경거리로 자기 자신과 백성들을 다 망치고 있습니다. 왕이란 이름뿐이고 아무 힘도 없습니다. 고관들에게 보다 돈을 많이 바친 자만이 지방으로 나가게 됩니다. 지방관들은 벼슬을 얻느라고 진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친족을 살찌게 하고 자기들의 은인을 위해서만 일합니다. 그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습은 왜 이다지도 비참합니까!”(최양업 신부, 1853.10.23. 주중공사이자 홍콩총독인 바우링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 편지는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올 무렵의 사회상에 대한 최양업(1821~1861)의 관찰을 소묘한 편지글이다. 그는 1844년에 김대건과 함께 부제로 서품되었다가, 같은 해에 사제로 서품된 김대건이 치명한지 3년이 지난 1849년에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1849년에 조선에 들어와 12년 동안 충청도 배티에 거점을 두고 교우촌들을 백 군데가 넘도록 순회하며 사목활동을 벌이다가 과로로 숨을 거두었다. 위 편지는 그가 한창 교우촌을 순방하던 1853년에 교우들로부터 들었거나 직접 목격한 조선 사회상을 적은 것인데, 주자학을 국교로 숭상한 조선 사회의 정치 경제 상황이 그려져 있고 그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의 삶도 나타나 있다.

 

17.6.2. 공동선과 종교

  조선시대에 주자학적 유교는 학문을 숭상한다고 하면서도 사회적 신분차별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주자학적 국가체계에서는 오로지 양반 계층만이 인간 존엄성을 누릴 수 있었을 뿐, 중인 이하 상민과 노비 등의 신분 계층에서는 매우 제한된 인권만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에 평등을 기치로 내걸고 개인들이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창하는 천주교가 들어와 양반 선비층과 민간에 퍼지자 극력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백 년 동안 지속된 이 박해 과정에서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가 최고선에 속함을 알지도 못했던 조선 왕조는 인간 존엄성과 같은 공동선의 진리에 대해서도 무지한 나머지 탄압일변도로 억누르고자 했다. 

 

  그러나 백성과 나라의 통치를 맡은 권력층과 지식층이 주도하여 종교를 도입하는 경우에는 불교가 도입된 삼국시대에도 – 신라에서 이차돈이 순교한 것 이외에는 - 유학이 도입된 고려시대 말기에도 저항이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시아 여러 나라에 자리잡은 종교들도 백성과 나라의 선에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도입될 당시에는 아무런 마찰이나 저항이 생겨나지 않았다. 풍요로운 종교 문화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경제 정치적 제도들도 각 나라의 국민들과 지도층이 나름의 필요와 판단에서 도입한 것이다. 하지만 공통의 목표는 공동선을 증진하고 최고선을 실현하는 데 있을 것이지만 현재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종교들이 자리잡고 있었음에도 현재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 사정은 최고선과 공동선의 수준에 있어서 다양하면서도 복잡하다. 이것이 “아시아의 다양한 상황들의 복잡성에 대하여 깊이 숙고하고 또한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에페 4,15) 교회가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아시아 교회, 20항) 이유이다.

 

  무릇 종교는 태초부터 악에서 벗어나고자 한 인류가 선을 추구한 결과로 생겨난 문화양식이다. 이는 민족과 시대와 나라별로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크게 보면 악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술이나 기복적인 양상으로 길흉화복을 점치는 인습적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하고, 집단적으로는 국가 통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여 민중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쓰이거나 또는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운 국가 간 전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당신의 존재와 뜻을 계시하셨으니, 이 계시 진리에 따른 종교의 존재이유와 역할은 인류와 개별 인간들의 최고선과 공동선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 선의 가치로부터 사물과 세상, 인간과 하느님께 관한 진리를 깨닫고 인식하는 학문이 생겨났다. 계시 종교든 자연 종교든 이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를 얼마나 실현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종교가 참된 종교인지 한낱 통치 수단이거나 사상통제수단인지 여부가 드러날 것이고 또 존재할 이유는 물론 그 동안 수행해 왔던 역할과 앞으로 수행해야 할 역할이 평가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두 아시아에서 발원하였고 지금까지 오랜 역사적 전통을 자랑하며 아시아인들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종교들, 즉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유다교 등에 관한 입장과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이렇게 천명하였다. 공의회는 이들 종교들이 “고금을 통하여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사물의 변화와 인생의 역사 속에 현존하는 심오한 힘을 어느 정도 느껴 오면서, 최고의 신을 긍정하는 바탕 위에서 인생 문제에 해답을 주려는 노력한다. 가톨릭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고 전제함으로써, 무릇 모든 종교가 최고선의 가치를 위해 생겨났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아시아의 여러 종교들과 함께 가톨릭 그리스도들은 교세를 두고 경쟁할 필요가 없다. 근세 이래 뼈저리게 겪은 시행착오의 전철을 또 다시 밟아서는 안 된다. 이는 종교 본연의 역할과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즉, 아시아의 가톨릭교회는 최고선을 수호하거나 공동선을 증진하기 위해 전통 종교의 신봉자들과 협력을 해야 할 처지이다. 이미 새 복음화에 관한 언급에서도 밝혔거니와 가톨릭교회 역시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 실현을 중심으로 교회를 쇄신하고 있는 중이며, 이는 앞으로도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령께서 인류를 이끄시는 길이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또한 인간 존엄성의 관점에서 종교 자유가 허용되어야 함을 촉구하면서, 이는 “종교적 예배의 자유가 헌법으로써 공인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으로 하여금 종교신봉을 멀리하게끔 또 종교단체의 생활을 극히 곤란 또는 불안케 하는 정부도 없지 않으므로, 인류 사이에 평화적 관계와 화합이 확립되고 강화되기 위해서는 지상 어디서나 종교의 자유가 법적 보호를 받고, 사회에 있어서 종교생활을 자유로이 하는 인간 최고의 의무와 권리가 준수될 필요가 있기”(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15항)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내지 윤리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기”(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를 바라면서, 특히 이슬람교 신자들에게는, “모든 이에게 사회정의와 윤리선과 나아가서는 평화와 자유를 공동으로 옹호해 주고 촉진시켜 주기를”(비그리스도교 선언, 3항) 희망하였다. 

 

  아시아의 고등 종교들의 신봉자들이나 가톨릭 신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의회는 종교 활동에 관한 보편적인 원칙을 이렇게 상기시켰다. “인간이 보다 완전히 보다 용이하게 자기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사회의 생활조건의 총화가 사회의 공동선이고, 또 이것은 특히 인격의 권리와 의무가 보호되는 곳에 있으므로 시민이나, 사회적 단체나, 속권이나, 교회나 기타 종교단체나 공동선에 대한 각자의 의무를 따라 고유한 방법으로 종교자유에 대한 권리를 위해서 배려할 의무가 있다”(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6항).

 

 이는 아시아의 다른 종교들에 대한 존중과 함께 가톨릭을 포함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맞갖은 존중을 요구하는 것이며, 동시에 공동의 목표를 최고선과 공동선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요한 14,6) 그분 안에서 사람들이 종교 생활의 풍족함을 발견하고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과 화해시키셨음을(2코린 5,18-19) 교회는 선포하고 있으며 또 반드시 선포해야 한다”(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고 무릇 모든 종교들이 추구해야 할 최고선의 목표를 확인하는 동시에, 모든 나라의 정치권력은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사목헌장, 74항) 이 공동선이란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이는 것이라는 진리를 확인하고 있다(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1항). 

 

17.6.3. 최고선과 공동선 진리를 추구하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11.8.5.),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역사에는 중국이나 일본 같은 주변 민족들은 물론, 세계 천주교회사에서 찾아보아도 전무후무하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이 세 가지 발견된다. 신앙 도입의 지성적 면모, 신앙 박해에 순교로써 저항하고 이를 순교 정신으로 계승하는 가치 실현의 의지, 이 지성적 면모와 가치 실현의 의지에 작용한 평신도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민족 반만년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기적으로서, 그 결과로 찾아낸 한민족의 정체성은 사실 그리스도교가 보전해 온 복음 진리의 정체성을 구현한 것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것이기도 하다. 이 모두가 신자들의 신앙 감각이 집단지성으로서 발휘된 결과이다. 

 

  첫째의 정체성은 조선 시대 후기에 한민족은 그리스도 신앙을 도입하게 된 동기와 과정에서 보여지는 독특한 지성적 면모이다. 이는 서양이나 동양에서 앞서 복음이 전해진 다른 민족들과는 뚜렷하게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공인령(313)과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국교령(395)이었고, 게르만인들은 클로비스 황제의 개종(496)에 의해 강제로 집단 개종하였다. 중국 명 왕조는 서양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천문 지식과 관측 기술 그리고 수학 지식에 매료되어 그들을 종교적 직분이 아닌 궁궐의 천문관측 담당 관리에 임명을 했는가 하면, 일본 막부는 서양인들의 무기가 탐나서 개항을 하였을 뿐 천주교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막부는 천주교 신자들이 늘어나서 막부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느닷없이 금교령을 내려 박해를 했던 것이고, 전례논쟁이 벌어져 조상제사를 교황청이 금지시키자 청 왕조 역시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선교를 금지시켜 박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그분의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까지 받아서 초대교회를 이룬 신자들이 믿게 된 경위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는 중국에 온 이태리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쓴 ‘천주실의’와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판토하가 쓴 ‘칠극’이 전해지자 이 교리서와 함께 들여온 실학 서적들에 대한 지적 호기심에서 강학회가 열렸다. 그리고 천진암에서 열린 이 강학회에서 이벽이 해박한 교리 지식과 앞선 신앙적 수련의 교양으로 천주학 강학회로 전환시킬 수 있었으며 이것이 천주교 신앙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조선 시대에 무신론적 풍조가 극성을 부리는 상황에서 하느님을 진리로서 갈망했으며 그리하여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한역서학서들을 읽고 토론하는 것만으로도 믿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 앞선 민족들의 경우에 비해서 신앙의 동기가 훨씬 복음적인 동시에 매우 지성적인 노력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천진암 강학회에서 향후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조선 사회를 개혁시킬 저작들이 저술되거나 배태되었다. 이벽은 성교요지와 천주공경가를 썼고, 정약종은 주교요지를 썼으며, 정약용은 이 강학회에서 얻은 해석학적 기제를 바탕으로 유배지에서 여유당 전서 5백여 권을 저술했다. 그 중 조선의 행정 개혁을 역설한 목민심서와 정치 경제 개혁을 역설한 경세유표가 돋보이고, 특히 경세유표는 동학교도 전봉준에게 전해져 동학혁명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 배경에는 위에서 인용한 최양업의 편지에 나와 있는 대로, 조선 사회의 부패상을 초래할 정도로 공동선은 물론 최고선의 가치가 짓밟히고 있었기에 이 가치들을 새로이 밝히고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불교나 유교, 이슬람교 등 현재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종교를 들여오거나 허용할 때의 상황은 각국이 문명을 이룩하기 위해 종교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시아 대륙의 여러 나라들에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종교들도 그 오랜 역사를 통하여 근세에 들어서기까지 아시아와 조선에서 최고선을 충분히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하기 짝이 없는 경제 정치 체제들도 그들 나라 백성들의 공동선을 충분히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던 열악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선교 현지의 이러한 문명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시도된 근세 이후 가톨릭 선교는 저항과 박해를 받았고, 박해가 종식된 이후에도 가톨릭 교세는 극소수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독보적인 역사적 사실은, 근세 조선에 그리스도 신앙 진리를 들여온 조선 천주교 신자들은 지성적 접근으로 최고선과 공동선을 추구함으로써 장차 이룩될 ‘사랑의 문명’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천주교가 수용된 후 백 년의 박해를 겪었고, 또 그 후유증으로 망국과 일제강점, 분단과 전쟁에다가 민간독재와 군부독재 등 혹독한 시련을 또 다른 백 년 동안 겪었지만, 이때 놓은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가 해방 직후 제헌헌법에 반영되었고 여러 번의 고비마다 헌법을 지키려는 국민의 민주화 의지가 분출하여 산업과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지금의 대한민국이 주요 선진국 대열에 들 수 있었다. 또한 이 저력이 여러 분야의 한류에 담겨져 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로 확산되는 중이다. 

 

  역사상 한민족에게 영향을 미쳤던 여러 나라들의 힘들은 군사력과 경제력 같은 패권에서 나오는 ‘하드파워’였던 데 비해서, 이 한류 현상은 산업화와 민주화에 바탕하되 국제 간 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하는 문화의 매력에서 나오는 ‘소프트파워’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한민족은 지난 2천 년 동안이나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하드파워로 인한 패권 때문에 고통을 받아 왔다. 이렇게  하드파워들은 그 패권적 경향 때문에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했어도 국제 평화를 실현하기보다는 무한갈등을 유발시켜온 반면에, 이 소프트파워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 간 소통을 촉진키시고 국제 연대를 통해 인류 평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대단한 경제적 성공과 성공적인 민주주의의 결합은 한국 소프트파워의 원천이 되었다”(Joseph Samuel Nye, Jr, 2021). 복음화를 위해서 지성적으로 최고선과 공동선을 밝히고 자발적으로 신앙을 수용하는 일이 이토록 중요하다. 인류 역사상 유례 없이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에 담겨 있던 선한 영향력이 그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에서 알 수 있듯이, 신앙 진리에 입각하여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서도 이 대륙의 풍요로운 문화적 상황과 다양한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하여, 최고선 가치와 공동선 가치에 대해 규명하는 지성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사회적 상황에 대한 윤리적 성격이 규명될 수 있고, 따라서 사람들이 일치될 수 있는 거룩한 진리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7. 대사제의 기도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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