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16. 성령께서 하실 일

[요한복음] 16. 성령께서 하실 일

 

저녁노을의 글

2022-09-26 19:34:20 조회(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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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16장은 제13장부터 제15장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바를 통하여 후대의 교회에서 성령께서 하실 역할에 대해 알려주는 내용이다. 구도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발씻김으로 형제애를 실천하라고 계명을 남겨 주신 제13장의 내용을 제15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다시 강조하듯이, 제14장에서 당신의 떠나감과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에 이어 성령의 이끄심으로 다시 오심 즉 현존을 약속하신 대화 내용을 제16장에서 되풀이함으로써 쐐기를 박듯이 다시 다짐하고 계시다. 

 

그런데 제16장은 필립보와 유다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졌던 제14장을 단순히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계승할 제자들 전체를 상대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관점에서 전략적으로 풀이해 주고 있다. 즉, 선악의 구도를 전제하고 선은 삼위일체적으로 나타날 것이지만 악은 성삼위의 각각에 대해 대립각을 세우며 방해하려 들 것임을 이해시키고자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전개하실 구원 경륜과 성삼위 각각에 대해 악마가 펼칠 계략은 이렇다.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이끄심으로써 당신의 구원 경륜을 세상에서 펴실 것이지만, 악마는 사악한 계략으로 이 구원 경륜을 박해하려 들 것이다. 또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성찬과 섬김의 세 가지 양식으로 현존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악마는 이 현존에 관한 계시를 흐리려고 교회 내부에서도 암약하여 현존 양식에 충실하려는 노선을 훼방놓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세상의 박해와 교회의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 구약의 역사에서 소수의 아나빔과 암하레츠들이 그러했듯이 – 소수의 충실한 신자들을 불러 모으시어 복음화를 이루고자 하실 것이나, 악마는 –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에서와 이어진 교회 복음화의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 복음화를 지연시키려 할 것이다. 이를 내다보신 예수님께서는 장차 제자들에게 다가올 박해를 미리 경고하셨다. 

 

16.1. 다가올 박해에 대한 경고(16,1-4)

  “예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하시면서 제자들을 환난에 대비시키신다(테오도루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 때 그것이 잘못된 열정임을 알고 견뎌야 한다(베다). 그리스도의 경고는 제자들이 결국에는 성공하리라고 예고한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자들은 그 봉사를 하기 위해 ‘자신들을 깨끗이’ 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오리게네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들에 의해 회당에서 쫓겨날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받아들였더라면, 그리스도의 교회와 회당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이들은 박해가 우리를 시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키프리아누스). 파견받은 이들을 박해하는 자들은 보내신 이도 박해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들의 인내에는 궁극적인 보상이 마련되어 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우리도 시험 받을 때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떠나시려 할 즈음에 이 위로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앞서도 그들에게 예고하신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더욱 구체적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 미리 내다보신 대로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워낙 만연해 있어서 교회에 도전이 되고 있는 박해의 상황은 근세의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양상에 비해서는 간접적이면서도 문화적이다. 세상에서는 하느님을 믿기보다는 풍요로운 물질의 소유와 소비를 지향하는 현세적인 가치관이 팽배해 있고, 교회에서는 복음화 사명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신앙의 활력이 사라져가는 현실이 그러하다. 영적인 삶에 대한 무관심이 교회 안팎으로 만연하다보니 신앙조차도 현세적 구원의 도구로 삼으려는 기복신앙의 기운이 복음화 기운을 압도하는 듯한 형국이다. 

 

군사적으로 표현하자면, 전반적으로 전선이 교착되어 있는 답답한 상황인데다가 일부 전선에서는 적군이 아군 진지 깊숙이 침투하여 암약하고 있는 위험한 상황인 것이다. 이 상황을 알려주는 표징이 반종교적이면서도 반생명적인 문화가 범람하고, 찰라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풍조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으며, 물질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 행복의 척도인 양 간주하는 물질지상주의 현상이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2)고 경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여전히 현재진행중인 것이다. 키릴루스 교부의 말대로, “파견받은 이들을 박해하는 자들은 보내신 이도 박해한다.” 현 시대의 반종교적이고 반생명적인 문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것이다. 또한 키프리아누스 교부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이들은 박해가 우리를 시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향후 시대에도 같은 성격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내다보시고 성령을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셨다. 

 

16.2. 성자의 가심과 성령의 오심(16,5-11)

  예수님께서 떠나심에 대해서 교부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승천을 가리킨다(베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제 안 계실 것이라는 사실과 그들을 기다리는 고통스러운 일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의 말씀이 알려 주듯, 그분의 부재는 눈으로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믿는 축복을 누릴 이들 안에 믿음이 생겨나게 한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께서 이곳에 남아 계시면 성령께서 오시지 않을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아들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당신을 낮추지 않으셨기 때문에, 종의 모습을 한 분이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져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굴욕 속에 계신 것을 그들이 목격한 분 그 이상의 존재라고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은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고(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성령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이가 되도록(테오도루스) 하기 위해서다. 그 일은 죄가 치워질 때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초대교회 시대에 제자들과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에 대해 충격을 받고 극도의 무기력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그 후 한 세대 동안 이 ‘부재의 충격’에 대해 묵상하던 그들은 평소에 예수님께서 이러한 상황을 미리 예고하셨던 가르침을 곰곰이 숙고하고나서 ‘자기비허의 신앙 고백’을 함으로써 비로소 정신적 안정을 차릴 수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교부들은 이 위에 한 가지 더 뚜렷한 신앙 고백을 해야 함을 일깨워주었다. 예수님의 ‘자기비허’는 십자가상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공생활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또 당신이 가심으로써 성령께서 오시어 그분을 메시아로 믿는 이들이 각자 자기의 시대와 지역에서 그분이 가셨던 길을 갈 수 있도록 보편화, 현재화, 현장화시키는 원리로서 역할하실 것임을 깨우쳐 준 것이다. 성자께서 가셔야 성령께서 오실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삼위일체적인 신앙 고백으로 정식화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성령을 보내시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적 양식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게 되는데 이에 대한 교부들의 주해가 이러하다. 

  “예수님께서 보내실 보호자는 당신 제자들과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베다). 우리를 거룩한 본성과 결합시킬 임무를 띤 성령을 알리기에 가장 어울리고 적당한 때는 우리 구원자께서 하늘로 떠나시는 순간이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의 떠나심은 믿음이 그리스도의 육을 넘어서도록 돕는다(아우구스티누스). 그로 인해 육체적 시각이 영적 시각에 길을 내주며(大 그레고리우스) 종의 모습이 하느님의 모습에 길을 내주게 되기(아우구스티누스) 때문이다. 또한 그분의 떠나심은 우리 안에 삼위일체의 삼중적·영적 현존이 자리 잡게 한다(아우구스티누스).”

 

  성령께서 오셔서 세상의 그릇되게 생각하는 세 가지 죄를 심판하실 역할에 관한 교부들의 주해는 이렇다. 

  “성령께서 내려오시면, 당신께서 삼중 심판을 통하여 죄인들을 드러내는 권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실 것이다(암모니우스).  성령께서는 죄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밝히시는데,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모두가 죄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크게 다르다(아우구스티누스). 성령께서는 세상이 단죄한 구원자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심으로써 의로움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암브로시아스테르). 아버지께서 당신께로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맞으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증해 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우리의 희망이 이루어지거나 달성되는 때는, 부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의로움이 완전하게 입증되는 때다(아우구스티누스).”

 

  “믿는 이들과 똑같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 믿음 없음 때문에 의로움의 면에서 유죄를 선고받는다(베다). 보지 못한 분을 믿는 것은 우리의 의로움이며, 이 의로움이 세상에게 의로움 없음의 죄를 선고한다(아우구스티누스). 성령께서는 이 세상의 지배자가 심판받을 때 그 판결을 확인해 주시며, 그럼으로써 성령께서는 악마에게 억압받는 모든 이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신다(오리게네스). 오순절과 그날에 드러난 성령의 놀라운 권능 때문에(테오도루스) 악마는 자신의 패배를 목격한다. 그 영혼들이 지옥 대신 하늘로 가는 것을 바라보는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암브로시아테르). 세상의 창조주 대신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잘못된 방식으로 다스리는 사탄(베다)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를 속여 일컫는 자일 뿐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테오도로스 교부의 말대로, “오순절과 그날에 드러난 성령의 놀라운 권능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은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해 진리의 영으로서 성령께서 밝혀 주실 바는 말씀과 성찬과 섬김의 세 가지 현존 양식을 잣대로 한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과 성찬과 섬김의 현존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죄이며, 이 현존 양식에 충실하게 머무르는 것이 의로움이고, 이 죄와 의로움을 가려주는 심판이 성령께서 하실 역할이다. 이렇듯 성자와 성령께서 성부 안에서 일치하시고 복음화 과업에 있서서 상호 보완하시는 관계가 복음화 과정에서 역동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다만 여기서 ‘의로움’은 세상에서 말하는 철학적인 정의의 개념과 다름에 유의해야 한다. 즉,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라고 전제하신 예수님께서, 세상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요한 16,10)이라고 하셨는데, 이 ‘의로움’은 그리스어 원문의 표현으로는 ‘δικαιοσυνη(dikaiosune)’로 신약성경에 92번 나온다. 그중 50번이 바오로의 편지에 들어있다. 바오로는 이 ‘δικαιοσυνη’를 사회적 차원의 정의라는 의미로서보다 개인 구원 차원의 정의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요한은 이 ‘δικαιοσυνη’를 두 번 사용했는데, 요한 역시 불의와 대립되는 정의라는 의미로 사회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죄와 대립되는 개인적인 의미로 썼다. 불신이 죄요, 믿음은 정의라는 말이다(김근수). 

 

좀 더 엄밀한 신학적 잣대로 풀이하자면, 이 ‘의로움’은 수평적으로 볼 때 개인 대 개인이라는 사회적 차원의 정의가 아니라 수직적으로 볼 때 하느님 대 개인이라는 실존적 차원의 정의라는 뜻이겠다. 세상의 철학적 개념으로는 정의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바오로와 요한이 말하는 정의란 하느님에게서 우리가 먼저 생명을 받고 삶을 시작했으니 그분을 믿는 것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되겠다. 그래서 위의 16,10도 ‘의로움’을 ‘믿음’으로 바꾸어 읽어도 뜻이 통할 뿐만 아니라 문맥에 더 어울린다. 사실 개별 인간이 하느님께로부터 생명과 자비를 먼저 받은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으면, 하느님과의 관계는 물론 다른 개별 인간과의 관계의 기초가 온전히 자리잡지 못한다. 사회적 정의는 영적 정의에 기반하고 있다. 이를 실존적으로나 관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의로움’인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정리하면, 요한의 ‘의로움’ 즉 믿음은 말씀과 성찬과 섬김이라는 세 가지 양식 안에서 성령으로 재림하시리라는 약속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는데, 이 현존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 즉 의로움이라는 뜻이다. 만일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으면 이 세 가지 현존 양식을 통한 그분의 재림을 거부할 것이고 이는 바로 죄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죄는 성령께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결과로 심판하시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제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14장에서 꺼내신 말씀, 즉 재림과 현존 약속을 잊지 말고 알아보도록 제자들을 단도리하듯이 다짐하셨다.

 

16.3. 성령의 선물(16,12-15)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에게 보내주실 성령께서 주실 선물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하셨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기에 스승으로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바에 대해서 아둔하여 알아듣지 못하던 바를 제자들이 뒤늦게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리라는 것과, 더 나아가서는 뒤늦게 알아들을 귀가 열린 제자들도 이제는 용감하게 예수님처럼 진리를 추구하도록 이끌어주심으로써 성자를 영광스럽게 하시리라는 것이다. 교부들의 주해를 보자. 

 

  “성령께서는 장차 드러날 거룩한 신비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도들의 무능함을 고쳐 주실 수 있다(오리게네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시지 않고 남겨 두시지만, 전혀 알려 주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드러내 주시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성령의 신성도 장차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그러나 여전히 가려진 채 남아 있는 것에 관한 말씀은 하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내적인 귀와 눈을 밝히는 영적 빛과 말씀으로 인간의 마음을 가르치실 것이다. 이는 우리가 완전한 지식을 가지게 되리라는 뜻은 아니다. 영원의 세계에 들어가서야 밝혀지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성령이 주어지기 전에 제자들은 여전히 율법의 그림자에 매여 있는 노예였으나, 성령께서 내려오신 뒤 성령의 가르침과 단련으로 보든 진리로 인도되었다(디디무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심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영이 무엇을 듣고 받는다는 것은 영에게 추가로 지식이 주어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아폴리나리스). 성령은 주님의 빈자리를 대신한다(테르툴리아누스). 성령은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고 삼위일체의 뜻을 말하기 때문이다(디디무스, 암브로시우스). 성령께서 들으시는 것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성령께서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 아님을 알려 준다. 다른 존재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분은 아버지뿐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성령의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처럼 성령께서 제자들을 진리에로 이끌어주시고자 하실 역할은 철두철미하게 삼위일체적이다. 성부에게서 들은 것을 성자를 통해 받으신 후에 제자들에게 전해주신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복음 진리를 선포할 때에도 자신들이 성령을 대신해서 전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는 이들이 성령께로부터 전해 받을 수 있도록 유의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복음 선포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을 수 있는 신앙 감각을 일깨워주는 일부터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리 유창하고 달변의 논리로 복음을 전한다 하더라도 깨달음이 전달될 수 없다. 복음 선포자와 교회의 가신성이 이래서 중요하다. 어줍잖은 말재주에 불과한 언변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던 사도 바오로의 고백(1코린 1,17)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에 관한 교부들의 주해를 더 들어보자. 

 

  “예언자들은 차례로 자신들이 성령께 들은 것을 말했다(디디무스). 이제 믿는 이들이 하늘의 기쁨과 자신들이 삶에서 성령의 선물을 받음으로써 걱정 근심에서 해방되었음을 선언한다(베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의 마음에 사랑을 쏟아부어 그들을 영적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이 전에 육으로만 알던 아들이 아버지와 동등한 분임을 알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아들의 영광을 선포한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의 말씀은 삼위일체의 위격들 사이의 긴밀한 결합 상태를 알려 준다(테르툴리아누스). 삼위일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주고받음은 주는 이나 받는 이를 작거나 열등하게 만들지 않는다(디디무스, 아우구스티누스).”

“진리의 영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시지만, 그 사실이 영이 아버지와 아들의 소유물이라는 것은 아니다(디디무스). 아버지와 아들은 모든 것을 서로 나누는 관계에 있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따라서 아들에게서 받는 것과 아버지에게서 받는 것은 같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가르치신 바를 깨닫게 하고 후대의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시대와 지역에서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바를 행하게 기운을 주시는 것이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 안에 전무후무하게 개입하시어 예수님의 공생활로 보여주신 공적 계시 사건이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사람에게도 보편적으로 가능성으로서 열린다. 그리고 이를 믿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을 통해서 실제로 현재화, 현장화시켜 주시는 원리가 성령이신 것이다. 

 

테오도루스 교부가 “예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하시면서 제자들을 환난에 대비시키신다.”고 증언했듯이, 프란치스코 교황도 성령께서 주시는 신앙 감각으로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예수님의 공생활에 주어진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계시에 주목할 것을 환기시키며 이에 따라 스승이 제자들을 발을 씻어주시며 당부하신 상호 섬김의 형제애를 공동합의성의 구조를 갖춘 교회 건설로 대비시키고 있는 이것이야말로 현대 가톨릭교회에 주어지고 있는 성령의 선물이다. 이는 복음이 주는 기쁨이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직후인 2013년에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자신의 고유한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그것이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이다. 

 

16.4. 제자들의 근심과 기쁨(16,16-2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금 있으면’ 일어날 일은 당신께서 배반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되어 묻히시는 일(베다)만 아니라 부활도 암시한다(아우구스티누스). 이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께서 부활하신 미래의 상태로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이 말씀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알쏭달쏭하기도 한데,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곧 겪게 될 두려움을 당분간 잊게 하시고자 했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박해가 닥쳐오는 이상 근심을 피할 길은 없으나 이길 방법은 있으니, 그것은 부활의 기쁨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은총을 누리는 기쁨이야말로 수난을 담대한 믿음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해 주는 비결이다. 

 

  “제자들이 슬픔을 겪고 곧이어 기쁨을 누렸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주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현세를 두고 마땅히 탄식하며 슬피 우는 사람들도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베다). 수난은 눈물의 때이지만 부활은 웃음의 때가 될 것이다(디오니시우스). 세상에 속한 자들은 지금은 웃을지 모르나(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나중에 세상이 탄식할 때 기쁨을 누릴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테르툴리아누스).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더불어 하늘로 태어나는 믿는 이들을 내다보시며(베다) 이런 현세적 고통을 출산의 고통에 비유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기쁨보다 훨씬 오래 간다(키프리아누스). 그 기쁨은 장차 올 삶에서 완성에 이르는 기쁨이다(아우구스티누스).”

 

이렇게 십자가의 고통을 능가하는 부활의 기쁨을 강조하여 전해 주었던 고대교회 교부들처럼, 프란치스코 현 교황도 현대의 교부로서 「복음의 기쁨」을 교황권고로서 신자들에게 알린 것이다. 

 

16.5.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께 청하라(16,23-28)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이 승천하신 후 성령을 받아 사도들로서 독립할 수 있도록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도를 알려주셨다. 작별을 위한 마지막 수순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 씀씀이에는 제자들에 대한 애틋하기 그지없는 스승으로서의 사랑이 담겨 있는 듯 보인다. 후대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회로서도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에 대해 교부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때에는, 우리의 모든 갈망과 의문이 답을 얻을 것이므로 더 이상 당신께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이곳에 사는 동안 우리의 청원은 중요하며,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아들을 제쳐 놓고 아버지께만 기도드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오리게네스).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변호해 주시는 그리스도가 계시니,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키프리아누스). 그분의 이름에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무엇인든지’ 청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이든지’는 복된 삶과 구원에 관계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베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를 당신의 모상대로 지으신 삼위일체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누리게 될 때 완전해진다(아우구스티누스). 우리는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을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아우구스티누스). 그 기도는 아들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우리는 하느님께서 물총새를 보살펴 주시듯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시리라 기대해도 된다(大 바실리우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되, 반드시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알려 줄 때가 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밝아져서(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때를 가리키거나(아우구스티누스) 세상 종말 뒤에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보게 될 때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버지와 당신의 동등함이 드러나는 것을 암시한다(大 그레고리우스). 청하는 이들의 기도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들으시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는 사람이시기에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고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시므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다(테오도루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당신께서 사랑하실 수 있는 그 무엇을 우리 안에 창조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청을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듯이 여기시며 스스로 채무자가 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렇게 교부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기도를 바치되 특히 성자를 통하여 바치면, 그 기도는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첫째로는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임을 가리키고, 다음으로는 당신의 육화를 가리킨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리스도는 창조가 아니라 ‘남’의 방식으로 아버지에게서 나셨다(다마스쿠스의 요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떠나셨다가 또 우리를 떠나시는 셈이지만, 두 경우 다 진실로 떠나신 것은 아니다(알렉산드리앙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므로 아버지에게서 오셨고, 당신의 세상에서 육체적 현존을 거두시고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아버지께 돌아가신다. 그러나 그분은 지금도 여기서 세상을 다스리신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들의 믿음이 헛되지 않으며 여전히 당신의 보호 아래 있게 되리라는 것을 확인해 주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 우리의 인성도 하늘로 가져가신다(베다).”

 

16.6. 고난과 승리, 용기와 평화(16,29-33)

  대화가 막바지에 이르자 드디어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런데 이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고난을 피하여 배신하리라고 예고하셨다. 그리고 고난이 닥칠 때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셨다. 고난의 용기가 승리를 가져와서 평화를 누리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신다고 말하지만,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예수님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르치기 위해 질문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의 행위가 그분의 근원을 증거한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는 믿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들이 내적으로 아직 어리석다는 사실을 뚱겨 주는 말씀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배반을 예고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들은 육체로 그분을 버릴 뿐 아니라 믿는 마음도 버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지만 결코 아버지와 떨어지신 적이 없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시는 말씀은 고난을 겪게 되더라도 용기를 잃어버리지 말라고 격려하시려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가르치시어 믿음을 간직하게 된 제자들이 일시적으로 믿음이 흔들려서 배신하더라도 이는 나약한 인간 본성 탓임을 잘 알고 계셨고,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면 얼마든지 믿음을 회복하리라고 믿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육은 고통과 죽음과 부패를 이길 수 있다(기적가 그레고리우스). 믿는 이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악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오직 그 이름 때문이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제자들에게 평화는 환난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을 때 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세상을 자기 밖에 둘 때 그들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게 될 것이다(大 그레고리우스). 그들이 흩어짐과 더불어 환난이 시작되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와 그분 안에 머물며 그분과 함께 평화를 누릴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스승이 승리할 것이니 용기를 내고 마음에 평화를 지니라고 말씀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실, 이 대목의 말씀은 모두 제자들의 근심 어린 마음과 생각에 평화를 가져다주려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이 말씀들은 위로와 사랑의 말씀이며, 이것을 가지고 교의 논쟁을 벌여 말씀의 의미를 빛바래게 해서는 안 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싸움에서 혼자가 아니며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만큼만 힘을 쓸 뿐이라는 사실을 알기 바라신다(오리게네스). 하느님과 하나 됨에서 오는 덕을 지니고서 싸울 때, 우리는 세상과 세상의 모든 반대를 이긴다(막시무스).”

 

16.7. 뿌리에서 올라오는 교회

이상 제16장의 본문을 요약하자면, 성령께서 제자들 안에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승께서 남겨 주신 세 가지 현존 양식에 충실할 믿는 이들 안에서 하실 일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유언이었다. 당신이 가시고 나면 성령께서 말씀과 성찬과 섬김의 현존 양식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진리를 밝혀주시리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용서 받지 못할 죄라면(마태 12,32; 루카 12,10), 말씀과 성찬과 섬김의 양식 안에 현존하실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것이 죄를 짓지 않고 의로워지는 길 즉 믿는 길이며, 이 죄와 믿음에 대해 성령께서 심판하시리라는 뜻이다. 이는 포도나무의 비유로도 뒷받침되고 있으니, 세 가지 현존 양식에 충실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성령으로부터 버림받으리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 시대에 세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어두운 징표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자리잡고 있는 불안한 징표들 역시 성령께서 행하신 심판의 결과임을 식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복음화의 과거 역사와 미래 전망 역시 그러하며, 아시아와 한민족의 역사적이고 정신적이며 사회적인 상황과 토착화의 노력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요한복음을 통해 복음화의 역사를 회고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한편,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우리 교회의 사명을 진단하고자 하는 이 글의 지향도 결국 제16장의 본문이 일러주는 바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심판에 대해 깨어있고자 함이다. 특히 이 제16장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현실에 반영하고자 제기하는 질문 겸 응답인 기초교회공동체의 건설을 통한 새 복음화도 그러하다. 

 

한편 이러한 성령의 역할은 믿는 이들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를 다시 만나 뵈옵게 해 주는 기쁨을 선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시는 진리의 영으로서, 믿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더 많은 지역에서 더 많은 이들을 상대로 계속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믿는 이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현존 하실 세 가지 양식을 통해 이끄시는 성령께 순종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지를 내다볼 수 있다. 

 

이러한 성령의 역할이야말로 복음화의 주역이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역대 교황들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복음화에 대하여 식별해 왔으며,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에 대해 ‘새 복음화’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이 ‘새 복음화’는 뿌리에서 올라오는 나무처럼 근본과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새로이 시작하는 교회를 세우려는 노력이다.

 

16.7.1. 새 복음화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근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낸 두 문서(「신앙 감각」, 「공동합의성」)는 전임 두 교황이 시작한 ‘새 복음화’의 과업을 이어받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한 교회 쇄신의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펴낸 것이었다. 

 

‘새 복음화’란 무엇인가? 본시 이 용어는 1983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아이티의 프로 토 프랭스에서 개최된 제19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 총회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복음화를 위해 ‘새로운 열의, 새로운 방식, 새로운 표현’으로 이루어지는 ‘새 복음화’를 강조한 데서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부터 이 용어는 기존의 선교, 복음화와는 구별되는 개념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으며, 베네딕도 16세에 의해서는 유럽 재복음화를 겸한 의미로 이어지다가 현 교황에 이르러서는 다시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포괄하는 교회 쇄신 여정의 마무리로 규정되기에 이르면서 선명한 색채가 입혀진 것이다. 

 

왜 새삼스럽게 ‘새 복음화’를 말하는가? 그 배경은 오늘날 이미 오래 전부터 복음화가 진척되었지만 실망스럽게도 신앙의 활력을 잃은 현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끈덕지게 위협하고 있는 세속주의와 물질지향적 가치관이 급격하게 기승을 부리는 변화로 인해 생긴 영적인 삶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반종교적이면서도 반생명적인 문화가 범람하고, 온통 찰라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풍조가 만연하는가 하면, 물질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 행복의 척도인 양 간주하는 물질지상주의가 일반화되어 가는 현상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국가들 안에서 영적 활력을 잃게 만드는 요인으로서 교회가 직면해야 할 도전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새 복음화’는 이미 복음이 전해진 곳에서 새롭게 신앙의 쇄신과 영적 활성화를 촉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새 복음화’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복음화와 다른 복음화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래의 복음화로 돌아감으로써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가치를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던 바로 그 가치와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복음화’를 위하여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인 베네딕토 16세는 2010년 6월 30일 교황청 평의회 안에 ‘교황청 새 복음화 촉진평의회’를 신설하였고, 2012년 10월 11일부터 2013년 11월 24일까지 ‘새 복음화’ 촉진을 위한 ‘신앙의 해’로 지낼 것을 선포하였다. ‘신앙의 해’ 개막일을 2012년 10월 11일로 정한 이유는 이날이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1962.10.11) 50주년 기념일이면서, 동시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반포(1992.10.11)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신앙의 해’를 각 지역 교회가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 신앙교리성을 통해 2012년 1월 6일 ‘신앙의 해를 위한 사목 권고를 담은 공지’를 발표하였는데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과 “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결실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깊이 연구하는 것이 핵심적인 실천 사항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교황청의 움직임의 영향으로 한국교회 안에서도 ‘새 복음화’는 핵심 이슈로 다루어지고 있다(박정우).  

 

그 후임인 현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2013년에 즉위하자마자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2013)을 반포하고, 곧 바로 이어서 교황청 국제신학연구위원회를 통해 「교회 생활 안의 신앙 감각」(2014)과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의 공동합의성」(2018)을 펴 낸 취지도 이 ‘새 복음화’의 흐름에 따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한 교회 쇄신의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새 복음화’는 기존의 전통적인 복음화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등장한 용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열의, 새로운 방식, 새로운 표현’으로 예수의 복음화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이는 교회의 뿌리를 찾자는 의미이고, 그 뿌리란 결국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교회로 쇄신하자는 것이다. 부활 신앙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바, 그리스도 교회의 기반이고 그리스도 신앙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본시 복음화란 부활 신앙을 증거하는 일이다. 복음화 과정에서 참됨의 가치로서 진리를 추구하고, 옳음의 가치로서 정의를 구현하는 노력은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희생을 초래하게 되어 있고 이 희생이 십자가인데,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힘이 바로 부활 신앙이다. 진리 추구와 정의 구현의 노력은 자유를 수호하고 평화를 실현하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 왜냐하면 진리와 정의, 자유와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최고선이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가치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정의 구현 노력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것이고, 사회의 공동선을 수호하고 증진시키는 일은 자유 수호 노력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겨레의 역사에 깃든 신성을 이해하는 일은 진리 추구 노력의 범주에, 그리고 민족 복음화에 투신하는 일 역시 평화 실현 노력의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이제까지는 교회가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이런 가치들을 세상에서 실현하는 데에는 미흡했다고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새로이 복음화를 해야 한다고 깃발을 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간의 평가에 대하여 공의회는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하여 복음화의 엔진에 해당하는 교회의 신앙 감각과 공동합의성이 취약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 셈이다. 이는 요한 복음사가가 제13장을 보도하면서 덧붙여 기록해 놓은 두 가지 실패, 즉 이스카리옷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 예고가 암시했던 교훈이기도 하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발을 씻어줌으로써 세상에 빛을 비추면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아볼 것이다. 그러나 짠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소금처럼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요한 13,35; 마태 5,13.16) 하고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말씀도 이에 적중한다. 

 

사실 무신론이 만연한 세상에서는 종교 일반에 대해 세상의 나라 살림이나 개인 인생에 영향을 비치는 가치와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다. 종교가 신앙적 가치 추구에 있어 무능하게 비쳐온 까닭이다. 하지만 가치를 실현하는 윤리 영역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의 영역이 구분되거나 분리될 수는 없다. 이것이 새 복음화의 절박한 배경이자 엄중한 취지이며 이는 예수의 복음화, 즉 교회의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교회의 뿌리는 첫째로 성서적으로 볼 때 예수의 복음화이다. 모든 교회가 시작된 뿌리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현대 교회의 뿌리는 사회적으로 볼 때에는 예수님께서 우선적으로 선택하셨고 공의회가 다시 환기시킨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며 이들은 사회의 뿌리 즉 밑바닥에서 살고 있다. 셋째, 우리 교회의 뿌리는 역사적으로 볼 때에는 아시아인들과 한민족이 살아오는 동안 하느님의 빛이 비치기 시작한 역사의 처음을 밝히는 일이다. 이는 역사적 진리를 추구하는 일인 동시에, 문헌 「아시아 교회」에서 제시된 복음화의 시사점에 따라서 우리 교회가 민족 복음화를 시작으로 아시아 대륙 복음화에 기여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세 가지 범주, 즉 성서적이고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신앙 감각으로 생기를 얻고 공동합의성으로 뼈대를 삼아 교회의 새 복음화를 이룰 수 있는 교회 모형을 현대 가톨릭교회의 교도권과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민중 신자들이 찾아냈으니, 그것이 기초교회공동체이다.  

 

16.7.2. 기초 교회 공동체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도 16세 그리고 프란치스코, 이렇게 세 교황이 연달아 추진한 ‘새 복음화’는 공의회는 교회헌장과 사목헌장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한 노선을 뒤따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다. … 교회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의 궁핍을 덜어 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교회헌장, 8항).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는 그리스도인들의 기쁨과 희망이요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사목헌장, 1항). 

 

본시 공의회 초기에 채택된 선교 교령에서는, “교회로부터 파견된 복음의 전파자들이 온 세계에 가서 복음 전파의 임무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부식(扶植)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독특한 사업을 선교(宣敎. Missiones)라고 한다.”(6항)고 대단히 보수적으로 정의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공의회를 마친 후 바오로 6세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주교들과의 공동합의성 구조를 통해 논의하고자 주교 대의원 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였고, 1974년에는 복음 선교를 주제로 열었다. 그리하여 이에 관해 주교 대의원들이 결의한 바를 받아들여 바오로 6세는 1975년에 교황권고 「현대의 복음선교」 문헌을 반포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선교 교령과는 달리 선교를 새로이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 새로운 선교 개념을 이미 공의회 직후부터 실천하여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던 기초교회공동체를 공인함은 물론 전 세계 교회에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며,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이 복음 선교의 전부라고 정의해서는 안 된다”(복음 선교, 17항).

 

“복음 선교는 인류를 내부로부터 변혁시켜 새롭게 하는 것으로서,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활동, 그들의 생활과 구체적 환경을 변혁시키는 것이다”(복음 선교, 18항).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더 더욱 넓은 지역에서 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상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 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데 있다”(복음 선교, 19항).

 

“기초 공동체들은 집단화되고 익명화되기 쉬운 대도시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하느님 공경과 믿음에 대한 깊은 연구, 형제적 사랑의 실천, 기도 생활, 사목자들과의 일치 등 종교적이고 영성적인 문제에 관하여 적은 사회 단체나 마을 같은 단위에 확대해 나갈 수가 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과 성사 배령, 사랑의 일치를 위하여 연령, 교양, 직분 또는 사회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인 부부, 청소년, 직장인의 단체들을 집합시키려고 한다. 또한 정의를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인간 발전을 위해서 뭉쳐진 사람들을 결속시킬 뿐만 아니라 사제가 부족하여 정상적인 본당 생활 운영이 잘 안 되는 경우 신자들을 결합시키기도 한다. … 교회적 기초 공동체는 복음 선교의 못자리가 되고, 더욱 큰 공동체 특히 지역 교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

 

  • 기초 공동체는 하느님 말씀에서 그 양식을 구해야 하며,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말아야 한다. 
  • 기초 공동체는 그가 속하고 있는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에 굳게 일치하여야 하며, 사목자들과 교회의 교도권에 진정한 일치를 보존하여야 한다. 
  • 기초 공동체는 날로 신심과 포교적 열성에 대한 책임 의식이 발전하도록 하여야 한다”(복음 선교, 58항). 

이상과 같이, 바오로 6세와 주교 대의원들이 공동합의한 교회 쇄신의 길이 기초 공동체를 통한 복음 선교로 제시되었다. 선교 개념의 혁명적 변혁을 불러온 이 문헌은, 구체적으로 1968년에 콜롬비아 메델린에서 열렸던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의 메시지에 대한 교황청의 응답이자 메아리였는데 이는 1979년에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열린 제3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더욱 공식화되기에 이르렀다. 

 

푸에블라에 모인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은, “교회는 다양한 수준과 다양한 역사적 형태로 복음화 봉사와 친교생활을 표현하는 하느님의 백성”(푸에블라 문헌, 618항)임을 전제로, 성직자에게 다소 편향되었던 위의 문헌(「현대의 복음 선교」)에서와 달리 평신도의 편에서 기초 공동체의 현실을 사목적으로 관찰함으로써 균형을 맞추고 있다. 즉,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직자가 평신도의 활동에 마음의 문을 더 활짝 열고, 사목상의 개인주의와 자기 만족을 극복하는 일”(이하 푸에블라 문헌, 623항)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실제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는 긍정적인 현실 덕분으로서, “특별하게 우리가 목격해 오고 있는 사실은 기초 공동체가 더 인격적인 상호 관계와 하느님 말씀의 흔연한 수용, 자기 삶에 대한 재검토, 복음의 빛에 따른 현실 고찰 등을 실현시키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기초 공동체의 평신도들은 “가정과 자신의 작업장, 이웃, 지역 공동체에 투신적인 참여를 강조한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의 주교들은 “확산하고 있는 기초 공동체들을 우리 시대 특유의 중요한 교회적 사건이요 ‘교회의 희망’(「현대의 복음 선교」, 58항)으로 제시하면서 기쁨을 느낀다.” 

 

 교리적으로 판단하더라도, 이 기초 공동체들은 “믿음을 통하여 새로운 인격 간의 관계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더 깊이 탐구하며, 성체성사에 더 온전하게 참여하고 지역교회의 사목자와 친교를 나누며,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 속에서 정의에 보다 열정적으로 투신하는 가운데 성장하게 된다”(푸에블라 문헌, 640항). 이러한 기초 공동체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우선, “기초 공동체들은 가정들, 어른과 젊은이들을 신앙에 기초한 긴밀한 인격 간의 관계로 결합시킨다. 교회적 실재로서 기초 공동체는 하느님 말씀을 경축하며 성체성사에서 자양분을 얻는다”(푸에블라 문헌, 641항). 또한 하느님 말씀을 생활 속에 체현하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한 투신과 연대 활동을 하는 사회적 실재로서 기능한다. 그리하여 “민중 속에서 더 복음적인 형태의 삶을 영위하고자 노력하고, 사회의 이기적이고 소비주의적인 원인에 공동으로 대처하고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와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과업”(푸에블라 문헌, 642항)에서 신앙을 성취한다. 

 

이렇게 하여, 바오로 6세는 「현대의 복음 선교」 문헌을 통해 선교 활동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선교사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부식(扶植)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독특한 사업이 선교라고 정의하고 말았던 공의회 초기의 전통주의적 견해를 과감하게 수정함으로써, 교회헌장 8항과 사목헌장 1항의 가르침을 선교 활동에 관철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이룩한 기초교회공동체를 공식적으로 승인했으며, 이러한 바탕 위에서 푸에블라에 모인 주교들은 장차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유용한 사목적 창안으로서 이 기초 공동체를 교회적이고 사회적인 실재로 부각시켰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선교 방식을 극복하여 새 복음화의 추진 방식으로 공인된 기초교회공동체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푸에블라의 주교들은 최고선의 가치로서 자유와 진리, 정의와 평화를 위한 해방과, 공동선의 가치로서 인간 존엄성이 존중되는 사회 건설이 기초교회공동체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설정하였으며, 가톨릭 사회교리로써 이 해방과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는 복음화의 기본 지침을 삼아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해방과 인간 향상을 위한 자체의 노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한다면, 각 나라와 지역교회는 전진적이고 적절한 유기적 조직체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적인 사목 노력을 체계화할 것이다”(푸에블라 문헌, 478항). 

 

여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 각자와 인류 전체에게 주신 지상 재화의 사용과 소유에 관한 가르침이 핵심으로 작용한다. “모든 사유재산에는 사회적 담보권이 설정되어 있다”(요한 바오로 2세, 푸에블라 총회 개막연설). 그런데도 이를 무시한 채 무제한적인 소유를 추구할 때 재화는 우상으로 변하여 하느님 나라에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푸에블라, 493항). “이런 유형의 우상숭배는 동일한 뿌리를 가진 두 가지 상반된 형태로 농축되고 있다. 그 하나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마르크스주의적 집합주의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형태 모두를 ‘제도화된 불의’라고 부를 수 있다”(푸에블라 문헌, 495항). 푸에블라의 주교들은 가정과 본당 이외에도 교회의 핵심 가치를 안고 있는 기초교회공동체를 다양한 수준과 역시 다양한 역사적 형태로 복음화를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부르심으로 주목하였다(푸에블라 문헌, 617-618항). 요컨대, 기초교회공동체는 교회적 실재로서는 하느님과 기도와 말씀으로 소통하는 신자들의 교회 공동체요, 사회적 실재로서는 사회교리에 따라서 소외 계층과 지식 계층이 소통하고 가난한 이들의 현실에 신앙인들이 메시아적 백성으로서 투신하는 기초 공동체이다. 그래서 푸에블라 회의를 개막하면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역설한 대로, 이 공동체는 ‘사랑의 문명’을 위해 주어진 새로운 복음화의 씨앗이요 밀알이다.

 

16.7.3. 사랑의 문명, 그 정체성과 복음화 전망

이제 우리는 제16장의 주해와 묵상을 마무리하면서, 서로 섬김으로써 형제애를 발휘하고 이를 통해 세상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을 드러내야 하는 제자들의 임무와 더불어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영원한 생명과 파스카 과업이 안고 있는 정체성 의미와 복음화 전망의 지평을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열어젖힐 수 있게 되었다. 그 지평은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는 과업에서 열리는 것이며, 기초교회공동체를 통한 교회 쇄신과 사회 복음화에서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가 수렴될 수 있게 된 데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 섭리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 섭리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 교도권이 마련한 길잡이, 문헌 「아시아 교회」가 제시해 놓은 시사점들을 간추려 상기해 보자(12.8.2.). 

 

풍요로운 문화, 다양한 경제 정치 상황: 역사적으로 하느님 말씀의 뿌리는 아시아에 있다. 그런데도 아시아의 복음화는 근세 이래 서구 교회에 의한 복음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요원한 과제로 남아 있어서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소명의식이 요청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 대륙에는 다른 대륙과 달리 종교적이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문화가 남아 있으며 매우 다양한 경제 정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 이는 복음화의 가능성이자 동시에 도전이 되고 있다. 

 

신성 증거의 필요성: 아시아 대륙을 복음화하고자 함에 있어서 가능성은 아시아인들은 이미 오랜 옛날부터 종교적 심성을 지니고 심오한 정신 문화를 추구해 왔다는 데에 있다. 또한 도전의 위기는 예수님도 하느님이 아니라 아시아 종교에서 공경하는 여러 성현들과 같은 반열에 놓인 인물로 간주한다는 점과 매우 다양한 경제 정치 체제 하에서 가난한 이들이 매우 많이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가능성을 디딤돌로 삼고 도전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복음화를 해야 하며, 그 초점은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데 있다. 이렇게 아시아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고 둘째, 방대한 규모를 차지하고 있는 아시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며 셋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면서 이미 복음을 선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아시아에서 이들 종교들과 대결하거나 경쟁하기보다 공존하면서 이 종교들 모두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최고선과 공동선에로 지향되도록 함으로써 각 종교들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토착화되어야 할 선교: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려는 목표를 견지하되 예수님과 그리스도교를 서구적 이미지로 선교하다가 실패한 전철을 밟지 말고 이 목표를 아시아의 문화에 뿌리내린 방식으로 이룩함으로써 복음의 토착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아시아 교회의 전례는 아시아인들의 종교적 감수성을 감안하여 개혁되어야 하고, 성경 말씀이 아시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의식도 교육되어야 한다. 공의회가 제시한 방향에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본래 전통을 되살려 하느님 백성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전례를 개혁하고(전례헌장, 14항), 강론을 통하여 말씀의 뿌리의식을 되찾음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서구적 이미지를 벗고 아시아의 옷을 입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아시아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아시아의 복음화에 투신할 선교사를 양성해야 한다. 

 

사랑의 문명 건설과 사회교리 적용: 아시아 복음화의 목적은 아시아 대륙에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데 있으며 이는 보편적이며 전인적인 형태로 이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반성 원리와 판단 기준 그리고 행동 지침을 제시하고 있는 사회교리를 아시아 복음화의 확고한 지침으로 활용해야 한다. 사랑의 문명으로 이룩되어야 할 최고선의 가치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가치이며, 증진되어야 할 공동선의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에 따라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아시아의 가톨릭 신자들이 복음의 가르침과 일치된 생활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신자들이 믿는 예수님의 신성이 증거될 수 있을 것이며 신자들의 부활 신앙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사목현장에서 신앙 감각과 공동합의성이 구현된 기초교회공동체를 건설하는 일: 문헌 「아시아 교회」에서 언급되고 있는 아시아 복음화의 시사점 중 마지막에 언급된 복음의 가르침과 일치된 생활 방식이란, 최근의 교도권 문헌이 제시한 메시지로 해석하자면, 신자들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고 교회의 구조에 공동합의성을 활성화시키는 일이라고 알아들을 수 있겠다. 특히 이는 성직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교회의 행정구조 즉, 교황청과 교구청 그리고 본당 사목협의회 등의 의사결정 구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이 자리잡고 있는 현장 즉 신자들의 가정들이 연합한 지역에서와 직업과 사회활동이 이루어지는 사회현장에서 이룩되어야 할 신자들의 기초교회공동체에 적용될 때 더욱 요긴하게 복음화가 촉진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시사점들을 지침으로 삼아 한민족 복음화 역사 초기에 드러난 섭리적 현상을 해석해 보기로 하자.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6. 성령께서 하실 일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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