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15. 현존 체험의 역사적 위력과 교회적 은총

[요한복음] 15. 현존 체험의 역사적 위력과 교회적 은총

 

저녁노을의 글

2022-09-25 20:55:18 조회(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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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증언하는 요한복음서 제2부 <영광의 책> 안에서 제15장은 주님의 현존 체험이 지닌 역사적인 위력과 교회적인 은총을 심판과 축복으로 알려주고 있다. 이를 위해 요한이 착한 목자의 비유(요한 10,1-21)에 이어 두 번째로 보도하는 이야기가 포도나무의 비유이다. 요한복음에는 비유 말씀이 이 두 가지밖에 없다. 

 

  요한은 마르코와 마태오 그리고 루카가 수록해 놓은 비유들을 요한복음서의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모두 생략하고 그들이 빼놓은 예수님의 비유들 가운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긴 비유를 이 두 비유 이야기로 보충해 놓았다. 따라서 요한이 소개하고 있는 착한 목자와 비유나 포도나무의 비유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관복음사가들이 수집해 놓은 예수의 비유들에서 나타난 비유의 일반적 특징을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의 비유들은 하나같이 청중에게 익숙한 다양한 소재를 통해 전달되었으며 ‘목자’와 ‘포도나무’라는 소재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소재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비유로 표현된 이야기의 초점은 단 한 가지에 집중되게 되어 있었는데, 포도나무의 비유에서는 그 초점이 심판이냐 축복이냐,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요구였다. 이도 역시 축복에로 초대하고 심판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는 비유의 일반적 기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5.1. 포도나무의 비유(15,1-8)

  “그리스도께서 당신 육의 신비 안에서 당신의 마지막 수난의 성사를 이행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앉아 계시던 식탁에서 급히 일어나신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우리를 위해 십자가 나무에 걸쳐져 있는 포도나무 가지처럼(암브로시우스), 다윗의 참포도나무(아우구스티누스)가 십자가의 포도 확에 던져졌다(가우덴티우스). 예수님께서는 당신 핏줄에서 나온 체액이 성체 안에서 우리 슬픔의 해독제(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가 되어 포도나무 가지들을 지탱하게 하신다(클레멘스). 포도나무이신 그분은, 당신께 달려 있으며 당신에게서 힘을 받는 가지인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당신을 우리의 본성에 결합시키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포도나무는 열매가 자라게 하고 농부는 땅을 기름지게 함으로써(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교회라는 밭을 일군다(아우구스티누스). 우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르신다(아우구스티누스). 예루살렘이 열매를 내지 못해 가지치기를 당한 것은(이레네우스) 영적 열매는 행동이 따를 때 완전해진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자연적인 가지치기도 일어나는데, 포도나무에 바람이 불어 교회의 포도를 시험하는 것이 그런 예다(시리아인 에프렘). 영적 할례가 육체의 욕정을 가지치기하듯이(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말씀께서는 우리 마음의 충동을 가지치기하신다(클레멘스). 박해도 교회를 가지치기하여 죽은 나무를 잘라 냄으로써, 교회와 그리스도인 양쪽이 더욱 잘 자랄 수 있게 한다(유스티누스, 요한 크리스소스토무스). 예수님의 말씀에는 정화하는 힘이 있다(大 바실리우스). 양날을 지닌 그 말씀은 우리 영혼을 가지치기하며(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물과 연관성을 지니는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를 정화한다(아우구스티누스).”

 

  “포도나무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결합 안에 머무름으로써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의 자양분(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에 관한 실물 비유다(암브로시우스).   이 결합은 포도나무보다 열매에 더 유익하다(아우구스티누스). 십자가라는 포도나무는 해골산에 심겼지만, 그 가지들은 성령에 힘입어 사도들과 교회라는 가지들을 통해 그곳으로부터 멀리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익명). 구약성경에서 야고보는 자기 아들 납탈리 안에서 이 포도나무가 퍼져 나가는 것을 예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포도나무와 퍼져 나가는 그분 교회를 예시해 주었다(암브로시우스). 포도나무인 그리스도의 육체는 우리 육체의 부활과 구원의 뿌리 역할을 한다(테오도레투스).”

 

  “우리의 나약함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포도나무와 떨어져서는 아무런 선도 행할 수 없다(막시무스). 우리는 겉보기만 좋은 잎사귀들 같은 우리 선행을 믿어서는 안 된다(프로스페루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오직 은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무엇인가 선한 일을 했을 때, 우리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떠올려야 한다(은수자 마르쿠스). 농부이신 아버지는 경작자이자 재판관이시다(테오도루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에는 아무것도 모자람이 없으므로 먼저 말씀 안에 머물고 그런 다음 청하라고 이르신다(클레멘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달라지며(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을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도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다(아우구스티누스). 사랑은 이런 삶을 살고자 하는 열의를 불러일으킨다(大 바실리우스).” 

 

 

  예수님께 있어서나 교부들에게도 포도나무는 매우 친숙한 소재였다. 포도는 지중해 연안과 서아시아의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식물로서, 구약성경에도 가장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포도나무가 처음 등장하는 대목은 대홍수 이후 노아가 포도원을 만들어 포도나무를 재배하였고 포도주까지 만들어 마셨다는 내용이다(창세 9,20-21). 그리하여 이스라엘에는 포도나무가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열두 아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면서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는, “그는 제 어린 나귀를 포도 줄기에, 새끼 나귀를 좋은 포도나무에 매고 포도주로 제 옷을, 포도의 붉은 즙으로 제 겉옷을 빤다.”(창세 49,11)고 축복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겪어야 했던 노예살이를 마치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자 했을 때에는 이 땅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땅임을 나타내는 표현이 ‘포도밭과 올리브밭’이었고, 이 때문에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되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을 너희에게 주시려고, 너희를 그곳으로 데려가실 것이다. 거기에는 너희가 세우지 않은 크고 좋은 성읍들이 있고, 너희가 채우지 않았는데도 이미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 찬 집들과, 너희가 파지 않았는데도 이미 파인 저수 동굴들과, 너희가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밭이 있다. 거기에서 너희가 마음껏 먹게 될 때,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여라”(신명 6,10-12).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 축복의 상징이었던 포도나무는 첫째, 다산(多産)을 상징하였고 둘째, 쉼과 평화도 상징하였으며 셋째, 고귀함도 상징하였다. 

 

  포도나무는 한 송이에 적게는 50알에서 많게는 160알 정도, 한 그루에는 5천 알에서 7천 알 정도가 열린다. 그래서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축복과 다산의 상징이었다. 

 

네 집 안방에는 아내가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네 밥상 둘레에는 아들들이 올리브 나무 햇순들 같구나(시편 128,3).

이스라엘은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 열매를 잘 맺는다(호세 10,1)

 

  또한 포도나무는 넝쿨식물이면서도 잎이 많아서 햇볕을 가려주는 그늘을 제공한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쉼과 평화의 상징이었다. 

 

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유다와 이스라엘에서는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마음 놓고 살았다(1열왕 5,5).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지내리라(미카 4,4).

너희는 서로 이웃들을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하리라(즈카 3,10). 

 

  그리고 포도나무는 고귀함의 상징이기도 했다. 지중해 연안 지방에서는 포도나무와 함께 올리브 나무도 많이 자생했는데, 올리브 나무처럼 포도나무도 포도열매를 내고 그늘을 제공해 주며, 포도주의 원료가 되는 등 사람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귀한 식물로 여겼다. 

 

  이렇듯 흔하면서도 유익하여 쉼과 평화, 다산과 축복, 고귀함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포도나무를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 빗대어 이렇게 노래하였다.

 

내 친구를 위하여 나는 노래하리라, 내 애인이 자기 포도밭을 두고 부른 노래를.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 

자 이제, 예루살렘 주민들아 유다 사람들아 나와 내 포도밭 사이에 시비를 가려 다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이제 내가 내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울타리를 걷어치워 뜯어 먹히게 하고 담을 허물어 짓밟히게 하리라. 

그것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어 가지치기도 못 하고 김매기도 못 하게 하여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올라오게 하리라. 

또 구름에게 명령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 흘림이 웬 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이사 5,1-7). 

포도나무의 노래는 시편에서 결론을 만난다. 

만군의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당신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하나를 뽑아 오시어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자리를 마련하시니 뿌리를 내려 땅을 채웠습니다. 

산들이 그 그늘로 덮이고 드높은 향백나무들이 그 가지들로 덮였습니다. 

그 줄기들은 바다까지, 그 햇순들은 강까지 뻗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그 울타리들을 부수시어 

길 가는 사람마다 그것을 잡아 꺾게 하셨습니까? 

숲에서 나온 멧돼지가 먹어 치우고 들짐승이 뜯어 먹습니다. 

만군의 하느님, 제발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살피시고 이 포도나무를 찾아오소서(시편 80,8-15), 

 

  이러한 포도나무 표상에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당신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셨으니,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시오, 당신은 참포도나무이시며, 제자들과 공동체는 그 가지로 그려졌다. 그때까지 이스라엘이 차지하던 포도나무(예레 2,21) 자리를 예수님께서 대신하신다(김근수). 

 

  이에 대한 예수님의 정서는 제 때에 열매를 맺지 못하여 저주하신 무화과나무의 이야기에 잘 묻어나 있었다(마태 21,18-21). 그러므로 이제 새로 심겨지는 포도나무에서는 당신의 현존 안에 철저하게 머무름으로써만 열매를 잘 맺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가지치기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키릴루스와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의 말처럼,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잘 자라도록 함께 해 주실 것이며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는 땅을 기름지게 하심으로써 교회라는 밭을 일구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유스티누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교부의 눈에는 박해도 일종의 가지치기 작용을 한다. 신앙이 식어버려 고난을 이겨낼 수 없는 약한 가지와도 같은 거짓 신자들을 잘라낼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많이 맺은 가지를 그 다음 해에는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깨끗이 손질하는 것처럼 신앙을 증거한 신자들의 신앙이 정화되기 때문이다. 

 

15.2. 비유의 교훈: 심판과 축복의 기준인 계명(15,9-17)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그분처럼 되며(이레네우스), 우리가 계명을 지키면, 사랑하라는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데서 오는 안도감을 누리게 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삶의 시련을 맞을 때 당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과 당신께서 주신 은총을 통해 우리에게서 느끼시는 기쁨에 대해 말씀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의 자애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키프리아누스). 이것이 우리가 그분께서 내리신 사랑의 계명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이유다(大 바실리우스).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실제로 지키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사랑은 다른 모든 계명을 포함하기 때문이다(시리아인 에프렘).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이 얽히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사랑하게 만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그대가 원수를 사랑할 때(大 그레고리우스),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위해 돌아가실 때 그러셨던 것처럼 그대는 친구를 얻기도 한다(아우구스티누스). 이것이 평화로울 때 사랑의 덕을 더욱 키워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혼란의 때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大 그레고리우스).”

 

  “친구들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따르는 반면 원수들은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클레멘스). 우리는 단지 종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친구이자 자녀가 되도록 불렸다(카시아누스). 친구이자 자녀인 우리는 두려움에서가 아니라(아우구스티누스) 자발적으로 섬긴다(이레네우스). 지혜는 두려움의 속박을 끊고 사랑의 단계로 올라선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만드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친구들에게 영광의 관을 주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높은 지위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大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는 우정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떠올려 주시며 참된 친구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자세히 설명하신다(암브로시우스). 예수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이시기에, 미래의 일들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므로,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친구가 된 것은 은총 덕분임을 보여 주신다(大 그레고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우리의 영광은 우리가 그분을 따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을 따름으로써 그분에 의해 영광스럽게 된다는 데 있다(이레네우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은 우리가 맺는 열매가 영속하는 열매임을 보증해 주며(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오래가는 그 열매를 위해 일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로운 일이다(大 그레고리우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당신께 간청하기 바라시며, 아들께서는 우리가 믿음의 기도로 다른 이들이 축복을 받도록 돕는 가운데(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아버지께 간청하기 바라신다(암브로시우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거듭된 촉구는 사랑의 모든 구체적인 형태를 행동으로 보이라는 촉구다(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 사랑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며, 아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길이 되어 주셨고 진리를 가르치셨으며 생명을 나누어주셨다. 따라서 이 사랑이 제자들을 통하여 세상에 퍼져나가기를 바라셨으며, 이것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새로이 창조하시는 길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의 방향성에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하고 말씀하신 것이고,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마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계명을 본격적으로 가르치시는 문장의 구조도 똑같다. 즉,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또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어 오신 사명을 충실히 완수하셨다. 이제 남은 것은 그분의 제자들이 받은 사명에 충실하는 일뿐이다. 그분은 사도가 되어 이 사명을 수행할 당신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그분의 현존 약속은 말씀과 성찬과 섬김의 생활양식으로 약속되어 있거니와 이 약속은 틀림없이 지켜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신성의 권위로 남겨주신 약속이기 때문이다. 남은 문제는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고 마귀의 상시적인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제자로서 실행해야 할 사명의 준수 여부이다. 그래서 앞에서 살펴본 포도나무의 비유는 조건부로 발설되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4-6). 

 

  이 조건부 비유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실제로는 서로 섬기라는 계명이 주어지고, 이 계명의 실행 여부에 따라서 축복을 받거나 심판을 받으리라는 교훈은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과 직결되어 있다. 즉,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새로이 창조하고 완성하는 기준이며, 따라서 예수님의 사명은 일단 완결되고 제자들에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에게 그 사명이 넘겨졌으니 축복과 심판 앞에서 책임 있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임이란 세상의 복음화와 인류의 구원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앞에 세상의 복음화와 인류의 구원이 자신들에게 맡겨져 있다는 이 엄중한 책임을 의식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으로 증명되고, 행동은 믿음에서 힘을 얻는다(김근수).

 

15.3. 박해의 효과: 가지치기(15,18-27)

  “예수님께서 자신의 경험을 일러 주시며 제자들을 박해에 대비시키신다(키프리아누스). 복음 선포가 늘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으며(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이는 저주받은 세상이 박해하고 하느님과 화해한 세상이 박해받는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아우구스티누스). 세상이 어떤 이를 미워하는 것은 그가 선한 이라는 증거이며 세상의 칭찬은 사악함의 증거일 가능성이 많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 세상은 우리를 손아귀에 쥐고 있지만 우리를 묶어 둘 수는 없다(암브로시우스). 하느님과 하느님의 원수들 마음에 다 들 수 있는 사람은 없다(大 그레고리우스). 제자들은 이 사실과, 예수님께서 겪으신 굴욕을 자신들도 맞이할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에서 우리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다스린다. 우리는 우리만이 말씀의 씨앗을 뿌리도록 부렸다는 사실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박해자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 그들이 공격하는 대상은 그리스도다(아우구스티누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었다. ‘그들’이 아직 이성의 나이에 이르지 못한 이들을 가리킨다고 믿는 이(오리게네스)도 있고, 이 말씀에는 당신께서 육화하셨으므로 이제 더 이상 몰랐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으며(암브로시우스) 예수님께서 날카롭게 세상에게 불신의 죄를 묻는 것이라고 풀이하는 이(아우구스티누스)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느님을 ‘내 아버지’라고 표현하시는 것은 당신께서 아무도 주장할 수 없는 유형의 아들임을 분명히 말한 것인 동시에 당신을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당신의 아버지도 미워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신 말이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예수님께서 바로 조금 전에, 유대인들은 당신의 아버지를 모른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이 실재 – 아들과 그의 행위들 안에 분명히 드러나는 실재 – 에 바탕하지 않는 아버지상을 만들어 낸 것을 볼 때 아버지에 대한 그들의 증오는 지금도 여전하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는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증명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당신께서 ‘일찍이 다른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들을’ 하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하신 일의 넓이와 범위가 이전의 그 어떤 일보다 큼을 나타낸다(아우구스티누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구원의 가르침을 당신을 모욕한 이들에게까지 펼치시는지 눈여겨보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러나 그분의. 적수들은 다른 민족들에 관한 예언에 무지와 분별없음을 드러내며(테오도루스)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이 주어진 사실을 부정하는 고의적이며 계획적인 죄까지 저지른다(大 그레고리우스).”

  

  키프리아누스 교부의 말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박해를 당하신 경험을 토대로 제자들도 박해를 당할 수 있으니 대비하라는 뜻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 15,18). 보편 교회도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았고 한국 교회도 조선 조정의 박해를 받았는데, 이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이었다. 박해의 효과는 가지치기였다. 떨어져나간 가지야 말라 버릴 테니까 불태워버리면 그만이려니와, 열매를 맺는 가지도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ㄴ). 과연 박해를 받는 중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핍박과 죽임을 당하였지만 신앙이 정화되는 은총도 입었다. 

 

  하지만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깨끗한 손질은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얻은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 자유를 바탕으로 신앙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의지가 살아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박해 이전에 놀라운 토착화를 이루어냈었다. 민중의 심성 속에 자리잡고 있던 하느님 신앙에 힘입어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인 교세 증가를 경험하기도 하였고, 이를 내다본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민중의 심성 속에 그리스도 신앙에 의한 신관을 깨우치는 한편 무질서한 전통적 신관의 영적 식별 작업도 행해졌었다. 

 

  예를 들어, 정약종이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참고하여 순 한글로 지은 <주교요지>에는 천주실의에 따라 우리 민족의 무교의 전통에서 보전해 온 ‘천’(天)의 인격적 신관을 수용하면서도 이 신은 한민족이 오래 전부터 믿어 온 ‘하느님’이심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만 불교와 유학에 의해 천시되어 온 결과 공적 기능을 상실하고 사사로운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주술과 역술로 전락한 미신(迷信)에 대해서는 배척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민족의 오랜 역사 안에서 이미 이른 시기부터 개입하셨던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고자 했던 노력이었다. 그 흔적은 천손의식을 나타내는 ‘천’(天) 신앙의 공적 기능이었다. 이는 또한 그리스도 신앙에 의해서 주술과 역술로 미신화되어 버린 전통적 신관을 식별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천손의식으로 민족의 역사를 이끈 신성이 아니고서야 그리스도 신앙이 그토록 오묘한 섭리로 전파되기도 어려웠으려니와, 또한 그 오랜 동안 억압받은 결과로 사사로운 주술과 역술로 전락한 무교를 그리스도 신앙에 의해 식별하는 영적 안목이 아니고서는 그에 동화되지 않고 백 년이라는 오랜 박해를 견디어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박해가 종식되고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교회에서 서구화와 성직자화 일변도의 경향이 두드러져서 박해 이전에 민족의 역사와 민중의 심성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고자 치열하게 이루어지던 토착화 노력은 오히려 중단되거나 후퇴하고 말았다. 

 

  하여, 이제부터라도 박해 이전의 토착화 노력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민족의 역사와 민중의 심성 안에 개입하신 신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아시아 대륙의 복음화 과업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단군왕검 이래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계시하신 진리, 즉 ‘홍익인간’의 이념이나,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의 정신 등은 한민족을 위해서만 주어진 은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엄중한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 민족은 편협한 선민의식에 빠져서 정작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유다 민족의 전철을 또 다시 밟는 것이 된다. 이를 위해서도 예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의 이끄심을 식별하고 또 이에 순명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15.4.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시다(15,26-27)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호자’라고 부르신다. 이. 이름은 슬픔을 덜어줄 뿐 아니라(예루살렘의 키릴루스) 기쁨으로 채워 주는(디디무스) 성령의 직무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아들은 중재자로서 우리의 보호자이시며, 성령은 위로를 주시므로 우리의 보호자시다(오리게네스). 성령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을 주는 물로서 무수한 마른 밀가루 입자인 우리를 하나의 덩어리 빵으로 만드신다(이레네우스).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며(『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아들 안에서 쉬신다(다마스쿠스의 요한). 성령께서는 아들과 같은 방식으로 나시지 않으며(디디무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그 발생 방식으로 삼위일체 안에서 구별되나 그. 방식은 장소와는 관계없다(암브로시우스).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신 말씀에게서 나오신다(아타나시우스). 따라서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며(아우구스티누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성령을 보내신다고 말할 수 있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성령을 보내신다는 사실은 성령이 신성 안에서 어느 면에서도 열등하지 않음을 입증한다(암브로시우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스도께서 성령이 아버지에게서만 나오는 것처럼 표현하신 것은, 그분은 늘 당신께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이 모든 것을 받은 아버지께 돌리시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아버지와 아들과 똑같은 지식을 지닌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에 관해 증언함으로써 우리 영혼이 성덕으로 흘러넘치게 하신다(암브로시우스). 성령이 주어진 오순절에 이 지식이 믿는 이들에게 주어졌다(테오도루스). 성령께서는 사도들의 증언에 힘을 실어 주며(테오도루스), 그들의 증언은 교회의 삶에서 큰 역할을 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상과 같은 교부들의 증언에 의해서 보더라도, 성령께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같은 길을 걸어가게 하시며, 그분이 선포하셨던 같은 진리를 선포하게 하시고, 그분이 얻어 누리셨던 같은 생명을 보편적으로 나누어줄 수 있게 인도하신다. 그리고 성령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시는 생활과 활동의 양식은, 말씀과 성찬 그리고 섬김임을 이미 앞에서 레르카로와 함께 확인하였다. 이 때의 섬김이라는 활동 양식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라는 생활양식을 낳게 되며 이 공동체에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도록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사실도 앞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현 교황 프란치스코는 앞장에서 다룬 바 있는 「신앙 감각」 문서와 함께 「공동합의성」 문서를 통해 온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이 다 함께,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시작한 교회 쇄신의 여정을 걸어가자고 촉구하였다. 예수 현존의 체험이 지닌 역사적인 위력과 교회적인 은총은 심판과 축복으로 판가름날 것인 바,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기준을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일과 ‘공동합의적 교회’를 이룩하는 일이라고 제시한 것이다. 아시아 대륙의 복음화를 향하여 민족의 복음화를 이룩하는 일이 열매라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을 수 있는 조건이 이 두 기준이라는 뜻이다. 일찍이 예루살렘이 열매를 내지 못하여 멸망하였고, 5백여 년 전에는 서구 라틴 교회도 아시아 복음화에 있어서 열매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 교회는 열매를 맺어야 할 엄중한 사명을 받고 있다. 

 

 

15.5. 공동합의성을 이루는 교회

  이상 요한복음 제15장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상호 섬김으로 형제애를 이룩하여(제13장) 신성을 증거하는(제14장) 교회를 이룩하는 일에 있어서 축복과 심판의 선택을 제자들에게 제시하는 한편,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현존하실 수 있는 신적 통로로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으로 마무리되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인도하시는 보호자로서, 세 가지 현존 양식 안에서 제자들의 교회를 이끄실 것이다. 첫째, 사도가 된 제자들이 이룩한 교회와 후대의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계시를 식별하여 진리로 만방에 전하게 하시는 일이다. 둘째, 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새기고 그분과의 일치를 확인하게 하시는 일이다. 셋째, 이 두 가지의 현존 양식이 가리키는 바에 따라서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공동체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아보게 하시는 일이다. 이 세 번째의 현존 양식을 통한 신성 증거야말로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현존 체험의 진정성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자리에서도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이 예고되어 있었던 데에서도 나타나듯이 후대 역사의 교회에서도 이 세 가지 현존 양식에 충실하려는 노력은 줄곧 악마의 유혹과 계략에 노출되어 왔다. 그래서도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해야 한다는 조건은 특정한 시대와 지역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룩하고 그 지체로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제자들이 성령께 순종하는 공동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룩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예수님께서 몸소 모범을 보여주신 대로,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것이다. 이 상호 섬김을 크고 작은 실천 단위에서 세상에 존재케 하는 이 중차대한 과제가 가톨릭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로서 공동합의적 구조로 쇄신하는 일이다. 

 

  봉건적 군주제를 졸업하고, 현대의 민주주의제에서 성취와 좌절을 동시에 맛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볼만한 매력을 지닌 가톨릭 민주제를 세우는 이 일에 우리 교회의 명운(命運)이 걸려 있다. 복음화 역량을 함양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버려지고 말라 버려서 불쏘시개가 되고 말 듯이, 예수의 섬김을 본받지 않는 그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복음화하기는커녕 세상의 걱정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 감각이 교회의 얼이라면 공동합의성은 교회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만드는 뼈대이다. 인체에서 얼과 뼈대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형식으로서의 공동합의성은 신앙 감각에 의해 뒷받침되고 내용으로서의 신앙 감각은 공동합의성으로 표출되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살아있게 한다. 그래서 공동합의성이란 성령의 피조물로 역사 안에 태어나 파스카의 길을 걷는 하느님 백성이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가 서로의 직분에 주어진 카리스마를 존중하며 다 함께 성령의 이끄심을 받으려는 질서로서, 교회의 기본 구조이자 영적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동합의성이 교회의 본질적 차원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공동합의성의 여정은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의 교회에 바라시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공동합의성, 1항). 사회의 정치학적 용어로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교황과 주교들에 의해 군주제로 운영되어 오던 가톨릭교회가 신부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들 모두에게 주어진 신앙 감각으로 말미암아 민주제로 운영되어야 함을 천명한 셈이다. 이러한 맥락과 토대는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천명된 바 있으나 중세 이래로 강고한 관성으로 유지되어 온 군주제적 성격은 좀처럼 변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공의회의 교회 쇄신 여정을 마무리하고자 반포된 이 문서의 성격이 시의적절할 뿐만 아니라 중차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구와 본당 운영의 구조와 체질을 개혁하고자 하는 이 문서의 위력도 짐작할 만하다.

  

  공동합의성은 ‘하느님 백성’의 교회론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원리이다. 이 교회론은 세례 받은 모든 이의 공통된 품위와 사명, 그리고 그들의 은사와 소명, 직무의 질서 있는 풍요로움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이룩되는 하느님 백성의 친교는 교회의 신비가 얼마나 심오하고 그 사명이 다양한지를 잘 드러내주며, 그 원천이며 절정은 성찬례 모임 즉 미사이다. 미사 안에서 하느님 백성의 친교는 우선 백성 전체가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루는 수직적 친교로 나타나며 그 다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백성들 사이의 수평적 친교로 나타난다. 이러한 친교의 우선순위와 특성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공동합의적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 역시 하느님과의 친교 위에서 백성 간의 친교로 나타나야 함을 알려준다. 이 모든 요소는 하느님 백성이 함께 길을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6항).

 

  전통주의자들이 선호해 오던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교회론이 지닌 특성과 이를 비교해 보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론이 지닌 차이와 교회 쇄신에 대한 파장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신비체 교회론 모형은 피라미드형이다. 교황과 주교단과 사제단의 성직자 계급이 맨 위 상단을 차지하며, 그 아래가 수도자들, 그리고 맨 아래가 평신도들이다. 이른바 ‘완전 사회’라고 자부하는 이 교회 모델에서는 교회 내 직분이 계급과 동일시된다. 그리하여 성직 계급은 평신도 계급을 통치하고 교도하며 성화시키는 특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한다. 성령 안에서의 소통과 친교보다는 수직적 순명을 통한 소통이 선호된다. 성찬례인 미사에서도 주인공은 사제직을 수행하는 성직자들이며 미사에 참례하는 평신도들은 이들이 집전하는 제사에 초대된 사람들로서 부차적인 지위만을 차지한다. 

 

  하지만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론에서도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가톨릭적인 특성, 즉 사도적 보편성을 중요시하기에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만인사제설에서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평등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고 보지는 않는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과 친교를 맺기를 원하신 방식은 그분이 몸소 제자로 부르시어 사도로 양성한 이들을 당신 현존의 제도로 삼으시고 그 제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친교를 맺기를 원하신 교계적 친교로 나타난다. 이 교계적 친교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단의 단체성이라 일컫는다(7항). 

 

  교회적 친교는 주교단도 예수님의 복음과 선임자들이 이룩해 놓은 성전(聖傳)에 모두 충실해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각 교구 안에서는 그들의 주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평신도들이나 수도자들을 배제시키는 성직주의로 변질되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복음화를 위한 능동적 주체로 나아갈 수 있는 신자들의 신앙 감각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중요함을 교회 헌장이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따라서 “교회의 공동합의성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참여하는 선교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필수적인 전제이다”(9항). 이것이야말로 가톨릭적인 교회 친교이다.  

 

 

  제1천년대의 교회에서 이 공동합의성을 실천한 바에 대해서는 3세기 카르타고 교구의 주교였던 치쁘리아누스가 유명한 규칙으로 정리해 놓았다. “지역 교회 안에서 ‘주교 없이는 아무것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제들과 부제들의 조언 없이 그리고 백성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25항). 말하자면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일반 상식이 교회에서도 적용되어야 함을 재천명한 것인데, 이는 로마 제국의 박해 상황에서 초래된 주교 중심의 교회관으로부터 성체 또는 성령 중심의 교회관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규칙은 세상의 상식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이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 안에서 백성과 그 대표자인 주교가 서로에게 대하여 거부권을 인정하는 상황에서, 다만 내부적으로는 동의와 거부의 의사 표현에 있어서 정해진 절차와 질서에 따라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주교를 통해서 백성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한다는 조건이 달려있는 셈이라 할 것이다. 이는 내부의 민주주의를 보장하면서 동시에 주교직의 대표성이 지니는 권위를 인정하는 형식이다. 여기서 절차의 공정함과 과정의 투명성이 보장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이룩한 민주주의 성과에 대해서도 빛이 될 수 있는 복음적 민주주의라 하겠다. “이처럼 교회적 일치의 과정과 절차로 이루어지는 공동합의적 행위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려는 것”(27항)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공동합의성을 이루는 일이 가톨릭 교회의 쇄신은 물론 세상의 복음화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하는 의미이다. 

 

  동서방 교회가 분열되면서 동방 교회에서는 제1천년대의 공동합의적 전통이 계승된 반면에 서방 교회에서는 교황권과 주교단의 권한 사이에 다툼이 진행되어 이 전통이 퇴색하자 이를 빌미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갈라져 나가는 분열상 속에서 내부 단속용으로 계급사회적인 교회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말았다(35항). 그리하여 이에 저항하려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세 교파(루터교회, 장로교회, 성공회)가 공동합의성에 있어서 가톨릭 교회보다 더 성서적이고 민주적으로 발전시켰다(36항).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는 교황의 수위권과 교도적 무류성의 교리를 승인하기까지 하였다(37항). 전통주의가 더 강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교회 안에서 예언자들이 출현하였다. 19세기에 요한 아담 묄러(1796~1838), 안토니오 로스미니(1797~1855), 존 헨리 뉴먼(1801~1890) 등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면서, 가톨릭 교회 안에서 공동합의의 관습을 되살릴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들은 제1천년대의 교회 시대처럼, “성경과 성전의 규범적 원천들을 상기시키면서, 성서학과 전례학 그리고 교부학 등에 근거하여 질서 있는 공동합의의 관습을 내포하는 친교의 차원을 강조”하는 한편, 제2천년대의 후퇴를 방지하기 위하여 “주교와 교황의 특수한 직무와 내적으로 본질적 관계를 맺고 있는 신자들의 신앙 감각을 중시하였다”(38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전 수십 년 동안 형성되어 온 예언자적 여론을 받아들이고 공동합의성을 성전에 비추어 다시 제 자리로 돌려놓았다. 예를 들면, ‘교회 헌장’에서는 가톨릭교회만이 그리스도 교회의 정통성을 독점한다던 과거의 표현을 지양하고 교회의 정통성이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교회헌장, 8항)는 더 완화된 표현으로 정통성을 내세우는 다른 교파와의 친교 및 대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또한 ‘주교 교령’에서는 개별 교회의 주체성을 강조하면서도 주교들이 사제단과 친교를 이루고 사제 원로 회의 또는 사제 평의회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에게 맡겨진 교회에 대한 사목적 돌봄을 행할 것을 촉구하며, 각 교구에서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사목 평의회를 구성할 것을 권고하였다(40항). 

 

  이는 이제껏 교구 운영은 물론 사목 및 선교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평신도의 참여가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형식상 구색 맞추듯이 참여하는 평신도 평의원의 경우에도 교구장의 임명을 받았을 따름이지 전체 평신도들을 대표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며 그들이 교구의 공동합의성 구조를 위하여 평신도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공식적 장치도 전혀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2천년대의 시행착오를 수정하기 위하여 교회 상층부 – 교황과 공의회, 교황과 주교단, 대륙별 또는 국가별 주교회의 – 차원에서 더 이상의 역사적 후퇴를 막고 제1천년대의 수준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 하느님 백성 전체의 공동합의성을 구조적으로 마련하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공동합의성 문서 25항에서 언급한, 치쁘리아누스의 규칙 즉 지역 교회 안에서 우선적인 권한과 책임으로 막중한 직무를 수행하는 주교와, 그리고 다른 한편에 자리잡고 있는 사제들과 부제들과 백성이 상호 거부권을 가져야 한다는 공동합의성의 규칙이 실현되기에는 아직 요원한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말해주는 교회적 징표는 교회 상층부를 쇄신시키는 같은 원칙이 교회 하층부의 쇄신 작업에도 관철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평신도들의 조직화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과제를 의미한다. 이 과제는 공의회 이후 제기된 복음 선교를 주제로 한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1974) 건의하고 바오로 6세 교황이 받아들인 사도적 권고에서 기존의 선교 방식에 대한 반성과 함께(현대의 복음선교, 17-19항) ‘기초교회공동체’를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같은 문헌, 23항 및 58항). 

 

  여기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주안점은 교회 상층부의 쇄신에 있어서 사도적 교회라는 원칙이 고수되어야 하는 것처럼, 교회 하층부의 조직화에 있어서 성령의 이끄심이라는 원칙에 따라 평신도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도적 교회 원칙보다 더 상위에 있는 원칙인 바 이 질서가 관철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성령의 피조물로 창조된 교회가 사도들에 의해 이어져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설립된 것이니만큼, 성령의 주도권은 존재와 직결된 목적 가치이고 교회의 사도성은 본질을 구현하려는 수단 가치 내지는 절차적 가치이다.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계적 친교를 위한 주교단의 단체성을 절차적 가치로서 존중해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평신도들의 신앙 감각에 따른 자발성과 창의성에 의한 참여를 더 상위의 가치로 강조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공동합의성이 교회의 뼈대요 본질적 요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교구와 본당 단위에 조직되어 있는 평신도 단체들이 조직력에서 우수한 실적으로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공동선과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는 저조한 실적으로 내고 있는 현상에서 나타나듯이, 평신도들의 조직화에 있어서도 성직자들이 주도하면 교계제도가 지닌 경직성의 한계 때문에 자발성과 창의성의 생명력은 상실될 수밖에 없고 공동합의성의 원칙 역시 퇴색될 수밖에 없다. 

 

 또한 불의에 대한 저항의식과 정의감에 기초하여 현장 사도직을 위해 조직되었던 가톨릭 신자들의 사회 단체들이 사회의 공동선과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에 대한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이지 못하고 사회적 영향력도 미미한 채로 사라져버린 현상에서 나타나듯이, 평신도들의 조직화에 있어서 신앙 감각에 바탕하지 않거나 사도성에 입각한 교회적 친교의 요소를 배제한 채 평신도들의 자발성과 창의성만을 앞세우면 단체와 조직의 교회성 자체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경과 성전의 가르침은 친교가 본질인 교회에 있어서 공동합의성이 교회의 그 본질적 차원에 속함을 증언한다. 공동합의성이 구현되지 않고는 친교라는 교회의 본질도 구현될 수 없다는 말이다(42항).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이다(43항).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케리그마를 경청하고 받아들인 모든 이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참조: 요한 20,22; 사도 2,11), 이 성령이 공동합의성을 교회가 이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44항).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친교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여정 안에서, 성령의 활동은 공동합의성의 원리이다(46항). 주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 백성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시어, 그 백성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고, 성체성사로 그 백성을 기르시며, 공동합의적 친교 안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신다(48항). 

 

  교회의 본질이 친교라면 그 본성은 선교인데, 공동합의성은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가 그 사명에 봉사하고자 무수한 시행착오를 통해 터득한 역사적 교훈이기도 하다(53항). 사실 공동합의성은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요한 13,14) 하고 당부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비롯하였다. 이는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하는 가르침을 실질적으로 실천하는 행동 강령이었다. 교회 내부의 사목 활동에서나 교회의 대외적인 선교 활동에서나 서로 섬기려는 봉사의 행동만이 사랑의 표현일 수 있었다. 사목이든 선교든 봉사적이지 않으면 존재 목적을 망각하는 것이다. 또한 공동합의성의 활력이 쇠퇴하면 성령의 기운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사목활동에서든 선교활동에서든 교회의 활력도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동합의성은 그 본질이 친교인 교회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길이다(58항). 이렇기 때문에 게르하르트 로핑크가 갈파한 것처럼, 교회가 세상의 복음화를 지향하면서 세상에 봉사하고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예수님께서 복음서에 설계해 놓으신 대로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길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공동합의성의 주체는 교회 안의 모든 이들이다. “교황, 주교들, 신부들 같은 모든 사제들과 부제들처럼 교계제도에 속한 신앙인들을 비롯하여, 평신도 신앙인들, 수도자들 등 모든 신앙인들이 공동합의에 이르는 여정의 동반자들이다. 또한 이 신앙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직무적으로나 보편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성령께서 베풀어 주시는 다양한 은사를 받아 공동선을 위하여 능동적으로 봉사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는 주체들이다. 이 신앙인들 모두가 공동합의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서로 친교로 결합된 교회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서로의 자유를 존중함으로써 서로 다른 주체들로 구성되었지만 하나가 된 교회를 증언하는 것이다”(55항). “모든 신앙인들은 세례성사로 받은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예언자, 사제, 왕의 직분에 참여하는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으로서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증언하고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신앙인들이 세례성사 때에 받은 은총은 성령의 도유로 말미암은 것이며 이는 신앙 감각으로 나타난다(56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와 사제 등 성직자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주체성을 신학의 기본 원리로 강조하고 그 근거를 신앙 감각으로 강조하였다. 공의회가 제시한 이러한 교회론적 전망을 받아들이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동합의적 교회의 모습을 ‘역삼각형’으로 그려 내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에 그 정점에 사도단을 두셨고, 그 안에서 베드로 사도는 ‘반석’(참조: 마태 16,18)이며 믿음 안에서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하는(참조: 루카 22,32)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 안에서는, 마치 역삼각형처럼, 그 정점이 밑변의 아래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권위를 행사하는 이들은 ‘봉사자’라고 불립니다. 이 단어의 본디 의미에 따라, 그들은 이 모든 이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57항). 중세와 근세에 이르기까지 과거에 피라미드형 삼각형이 공동합의성과 동떨어진 전통적 신비체 교회론의 모형이었음을 생각하면, 교황과 주교들이 군주가 아니라 종임을 상기시키는 이 역삼각형 모형은 가히 혁명적이다. 

 

  보편교회에서나 지역교회에서나 일치의 중심은 ‘베드로의 직무’에 있다. 교회의 사도성을 드러내는 이 직무는 “정당한 다양성을 보호하고 또 동시에 개별 요소들이 일치에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일치에 이바지하도록 감독한다”(61항). 그러므로 이에 배치되는 독선적이고 비민주적인 직무 태도는 교회의 보편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사목과 선교 활동의 활력을 좀먹게 된다. 공동합의성에 의한 베드로의 직무야말로 세상의 민주화를 선도하는 교회의 복음적 민주성으로서 공적으로 맡겨진 사람들이나 업무를 다양하게 통합시킬 수 있는 원만한 인격을 요청한다(안승길). 그리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적 전망 안에서 공동합의성을 신학적으로 이해하려면,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적 소명은 무엇인지, 개별 교회와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의 차원에서 공동합의적 구조는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공동합의적 절차를 주도해야 할 다양한 주체들은 누구인지에 대하여 숙고해야 한다(공동합의성, 제3장, 72-102항). 

 

  요컨대, 공동합의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백성에게 요청되는 것은 성령 안에서 담대한 용기를 갖추는 것이다. 서로를 신뢰하고 솔직하게 대화하며, 하느님의 넓은 지평 안으로 들어가, 세상 안에 일치의 성사가 있으며 그래서 인류는 추방당하고 길을 잃을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121항). 이는 인류에게 가톨릭교회에 대해 기대를 걸어도 좋으며, 가톨릭교회가 수행할 복음화의 전망에 대해서 희망을 두어도 좋다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우리 한국 가톨릭 교회는 이 전망에 있어서 그 대열의 선두에 서 있다. 좋으나 싫으나 우리 교회가 놓인 처지가 그렇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을 올곧게 계승하는 일이, 그래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이 일이 오히려 혁명적인 것이 되어 버린 이 시대에서 우리 교회의 사명이 막중하고 특히 현장에서 앞장서야 할 평신도들의 사명이 막중하다. 포도나무의 비유가 웅변하듯이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축복과 심판으로 역사적 위력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예리코 맞은쪽,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맥의 느보 산으로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소유하라고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너의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간 것처럼, 너도 네가 올라간 산에서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가야 한다. 그것은 너희가 친 광야에 있는 므리밧 카데스 샘에서,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를 배신하였고,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땅을 멀리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가지는 못한다”(신명 32, 49-51).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5. 현존 체험의 역사적 위력과 교회적 은총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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