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14. 예수님의 현존 양식

[요한복음] 14. 예수님의 현존 양식

 

저녁노을의 글

2022-09-22 18:23:22 조회(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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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의 후반부인 제2부는 <영광의 책>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보도(제12장) - 고별사(제13~17장) - 십자가 수난과 죽음 보도(제18~19장) - 부활과 발현 보도(제20~21장)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고별사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집중되어 있다. 그 고별사의 첫 머리인 제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상호 섬김으로 형제애를 실천하라는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는 계명을 남기신 데 대해 지난 장에서 살펴보았다. 이어서 지금 다루고자 하는 제14장은 예수님께서 죽음 후에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 하실 지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시는 내용이다. 즉, 장차 교회 안에 현존하실 양식을 수난 전에 예고하신 것이다. 

 

14.1.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14,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필요 이상으로 주님을 걱정하며(아우구스티누스) 당신 자비에 대한 희망과 자신들의 넘어짐(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과 자신들을 기다리는 시련에 대한 두려움 사이를 오가는 것을 보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촉구하신다. 믿음은 그 무엇보다 강력해서(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겁쟁이를 군사로 바꾸어 놓는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는 말은 하느님과 당신의 본성이 일치함을 논증하는 동시에 삼위일체 가운데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위격을 구별하는 말이기도 하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에는 당신 몸의 지체들이 거처할 곳이 많으며, 준비되어 있는 믿음만큼 각자에게 합당한 거처가 주어질 것이라고 하신다(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내리심으로써 지금이 우리 육적인 집들을 거처로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테르툴리아누스). 그분은 거처를 준비하시는 동안 그곳에 살 이들도 준비시키신다(아우구스티누스). 이 많은 거처에는 풍요와 안식이 있을 것이며(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그리스도께서는 그곳을 이미 예약해 두셨다(테오도루스). 그 거처들은 이미 다 준비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가시는 것은 그 거처들을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성이 그 거룩한 거처에 살 수 있도록 하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분은 믿음을 이끌어 내기 위해 당신 제자들을 이곳에 남겨 두실 것이다. 낱말의 정의상, 그분께서 지상에 남아 계셨더라면 믿음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그분은 우리 모두를 생명 있는 곳인 당신 안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그들과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이다. 그분 자신이 곧 생명이며(아우구스티누스) 우리 모두의 목적지로 가는 길(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이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물음은 제자들이 실로 그 길을 알았다는 증거다. 그들은 자신들이 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를 길로 삼고 따르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에게 가면서(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완성을 향해(大 바실리우스)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다(大 레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길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위로받았으나,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지 못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은 진리이기도 하시므로, 그분은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실 것이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사실 그분은 이름만 ‘진리’가 아니라 아버지와 동등한 분으로서 진리 자체이시다(암브로시우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젠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 진리 안에서 믿음에 의지해 걸어야 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또한 우리 주님은 ‘생명’이시다. 주님은 우리가 희망하며 본디 우리를 위해 창조된 불멸의 삶으로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리스도와 영혼의 관계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와 같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그리스도께서는 불사(不死)하시며 그분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아버지는 아들과 따로 떼어 이해할 수 없으며(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리스도의 중개 없이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이는 없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주는 길이요 우리에게 힘을 주는 진리, 활기를 주는 생명이 되어 주시기를…(암브로시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교부의 말대로, 예수님께서는 인간 모두의 목적지로 가는 길을 당신 삶을 통해 개척하셨다. 우리가 따라 가야 할 길로서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가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면 그 길에서 우리는 그분을 언제나 만날 수 있다. 그분의 길은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는 물론,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도, 그리고 악에 대항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우리의 기준이었다. 

  

14.1.1. 예수, 하느님께로 가는 길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다. 요한복음 안에서 그분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횟수만 해도 백 번이 넘는다(123회). 더구나 그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한 10,30) 하는 부자일체적 자의식을 확고하게 지니고 계셨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와 한처음에 계셨던 존재이시기 때문이었다(요한 1,1). 그래서 그분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의 일을 하시며(요한 5,17), 아버지의 뜻을 잘 아실 뿐만 아니라(요한 7,29), 아버지의 나라 사정에 대해서도 자기 집안 사정처럼 가르쳐 주실 수 있으셨고, 그분과 그분의 나라에로 우리 인류를 이끄실 수 있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류가 기준으로 삼아 하느님께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이시다. 

 

14.1.2. 예수, 인간 관계의 기준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동료 인간들, 즉 여러 종류의 이웃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시다. 성인과 의인, 죄인과 악인, 성인과 의인, 죄인과 악인, 그리고 여성이나 가난한 이들 등 사회적 약자에 이르기까지 윤리적으로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을 몸소 겪으시며 우리가 어떤 인간관계를 맺어야 완덕에 이를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셨다. 

 

  14.1.2.1. 성인

  예수님께서 만나신 성인들 가운데 으뜸은 세례자 요한이다. 우리 교회에서 많은 성인들을 공경하고 있지만, 모두 세상에서 죽어서 천당에 오른 날을 기념일로 삼는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탄생일을 기념하는 성인은 단 세 명밖에 없다, 예수님(12.25)과 성모 마리아(.8)와 세례자 요한(6.24). 이는 그만큼 그가 성인 반열에서도 특출한 지위에 올라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에게는 몸소 찾아가시어 고개를 숙여 물로 세례를 받으실 만큼 겸손하셨고(마태 3,13),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하시며 극찬하셨다. 이러한 겸손과 극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준비해 준 예언자에 걸맞는 예우를 갖추신 것이다. 

 

  14.1.2.2. 의인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는 크다”(마태 11,11)고 하시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을 높이 올리셨다. 그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던 청중 가운데에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그 의지를 눈여겨보셨던 이들로서, 이들을  제자로 부르신 후에는 지극한 정성으로 가르쳐주시며, 의로움에 더하여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심으로써 당신의 뒤를 이을 사도로 양성하셨다. 이 양성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일이 생겨났는데, 예수님께서 의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두 가지 일만 들기로 한다. 

 

  우선, 여러 고을로 제자들을 파견하셨을 때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실패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서만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을 때에 크게 기뻐하시면서도 성과에 연연하지 말고 그들 자신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고 다짐을 받기도 하셨다(루카 10,20). 

 

  또한 예수님께서 군중을 상대로 일으키신 기적 가운데 가장 큰 기적이었고, 따라서 군중의 호응도 열광적이었던 사건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열광한 군중은 예수님을 임금으로라도 모시고자 쫓아왔으나 그분은 산으로 기도하러 피하셨는데, 기도하고 나서 다시 만난 군중에게 그분은 빵의 기적이 지닌 의미를 설명해 주시며 당신의 신원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밝히셨다. 그리고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러자 알아듣기 힘들었던 군중 대부분이 실망하여 돌아갔고 제자들도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더 자상하게 설명하시려거나 붙잡으려 하지 않으시고 아주 단호하게 물으셨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이 두 사건 모두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로 양성하시려던 당신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활동의 성과나 세상 사람들의 반응 여하가 아니었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충실성, 이 하나뿐이었다. 그 뜻을 담아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며 그들이 사도로서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의 일을 계승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처신은 흔히 우리가 대인관계를 맺을 때 행동하는 양식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길이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기준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에 대한 충실성을 요구하셨고 이것이 십자가를 짊어짐이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마태 16,24; 루카 9,23). 그런데 세 복음사가가 모두 같은 어조로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요구를 전하고 있어서 엄중함이 느껴지는데, 이에 빈해 요한복음사가는 십자가에 관한 이 말씀을 빼는 대신에 상호 섬김의 요구를 전해주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네 복음사가 모두 강조한 바를 종합하자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자면 ‘십자가’로 표상되는 고난이 필수적이고 이를 감내해야 하는데 그 고난은 외부에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보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려는 ‘의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으로 인한 고난도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14.1.2.3.  죄인

  그 다음, 죄인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태도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사건은, 간음 혐의를 받고 끌려온 무고한 여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자비롭게 용서해 주신 일을 들 수 있다(요한 7,53-8,11). 예수님께는 그 여인이 죄를 지은 정황이 중요하지 않았고, 그 보다는 다시는 죄가 저질러지지 않는 것이 훨썬 더 중요하였다. 따라서 그분은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는 군중과 이를 사주한 바리사이들도 죄를 짓고 있음을 알고 계셨으므로, 여인이든 군중이든 바리사이든 그 누구라도 단죄하는 대신에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하는 말씀이나,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하신 말씀으로 ‘선고’하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베푸신 고해성사는 최후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질 지에 대한 계시이기도 하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제8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시는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며 이것이 진리이다. 그리고 이 진리가 인류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은 자비의 용서이며, 이것이 진리와 자유를 가져다주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14.1.2.4.  악인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배척하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자들”(요한 3,19-20)이며, 구체적으로는 성전 정화 사건에서 드러난 것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관장하던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 총독과 이를 사주한 바리사이들도 포함된다. 이 바리사이들은 평소에도 예수님과 숱한 논쟁을 벌이면서 그분을 죽이려고 들었다(요한 8,40.59; 10,31.39; 11,47.53) 아무리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하셨다고 해도 그런 종교적 이유로서는 사두가이들이나(루카 22,70) 빌라도가 그분을 죽일 만한 명분으로 삼기 어려워지자(요한 18,38; 19,4.12), 이들 바리사이들은 유다인들의 왕이 되어 로마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정치적 반란 혐의를 제기하여 기어코 그분의 사형을 끄러낸 ‘그 유다인들’(요한 19,12)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악인들을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마태 10,28)로 간주하셨으며, 그들의 살해 음모를 아셨으면서도 거부하지 않으시고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나, 그들의 악의에 대해서는 결코 물러섬이 없이 맞서셨다. 사실 악에 대한 선의 입장과 노선을 증거하신, 이 같은 평소의 태도야말로 나무 십자가 이전에 그분이 짊어지셔야 했던 십자가였다. 그리고 이 십자가로 부활하는 처신을 보여주셨다. 십자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선을 견지하셨기 때문이다. 현세적 차원에서 악의 위협과 박해를 받더라도 하느님의 선을 포기하지 않는 이 삶이야말로 부활의 길이며, 따라서 악인들에 대한 처신으로서 우리도 본받아야 할 길이 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며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던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태도는 어떠했던가? 

 

14.1.2.5.  여성

  예수님께서 사시던 시대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였다. 모세 당시에 제정된 십계명에서 아내가 남편의 재물로 취급되던 현실에서 더 나아지지 못했다. 여성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었다. 법정에서 증인이 될 수 없었고, 축복기도도 자녀에게는 할 수 있어도 남성에게는 할 수 없었다.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여성은 성서를 크게 읽을 수 없었으며 주요한 역할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여성 차별적 관행에 비해서는 파격적으로 행동하셨다. 간음 혐의로 붙잡혀온 여성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거니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으로 고생했던 여인에 대해서도 그가 보인 절박하고 간절한 염원을 높이 사서 축복해 주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마르 5,25; 마태 9,20; 루카 8,43). 유다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종교적 혼혈로서 우상숭배자라고 경멸하며 상종도 하지 않던 그 시절에,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대낮에 우물가로 가서 거리낌 없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으며, 그 여인에게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셨고 유다인들의 차별이 사라질 것이며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다가왔음을 선언하시고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성령이 부어져서 참된 예배를 하게 될 것임을 밝혀주셨다(요한 4,23).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낸 것이 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이 처음이었는데, 당신이 “생명이요 부활”(요한 11,25)이시라는 중요한 계시 진리를 처음 밝혀주신 사람도 라자로의 여동생인 마르타였고,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발현하시어 나타나신 것도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이었다(요한 20,11-18; 마르 16,9-11; 마태 28,9-10). 여성 차별적 현실에 맞서 남녀가 동등함과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더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있음을 알려주신 존재가 예수님이셨다(Leonard J. Swidler, 「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 1971). 이렇듯 여성의 존엄성에 대해 깍듯하게 예우하신 예수님의 처신 또한 인류의 길이다. 이것이 요즘으로 말하자면 페미니즘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분을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일도 마뜩치는 않다. 하느님이신 그분으로서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피조물의 어느 한 쪽을 편드셨다기보다는 성차별적인 사회적 불의에 맞서 양성평등과 남녀동등의 차원에서 새로운 인간관계의 현실을 여셨다고 보고 싶다. 

 

14.1.2.6.  가난한 이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셨는데, 고향 사람들 앞에서 전통적으로 메시아의 도래를 내다본 이사야 예언(이사 61,1-2)으로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셨다(루카 4,18-19). 그리고 나서 실제로 당신의 말씀을 들으러 찾아온 온갖 부류의 군중 앞에서 당신의 사명을 염두에 두고 당신 활동의 대주제로서 이렇게 메시지를 선포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 당시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는 아픈 사람들이 많았고 마귀들린 사람들도 더러 찾아왔다. 그분이 일으키신 기적들은 대부분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의 자존심을 한껏 배려하셨으므로, 묻지 않고는 또 동의를 받지 않고는 그 어떠한 일도 간섭하지 않으셨다. 또한 다행히 그들의 원의가 확인되어 기적을 베푸셨을 때에도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기보다는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살렸노라고 하시며 그들의 믿음을 높이 사셨다. 그야말로 하느님을 섬기듯이 그 가난한 이들을 섬기시는 태도였다. 당신 혼자의 노력으로 힘에 부쳐서 열두 명이나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방방곡곡으로 보내서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을 때에도 지혜롭다거나 슬기롭다고 자처하던 당시 엘리트들을 회개시키는 데에는 실패했어도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오히려 그 가난한 이들이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들처럼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로 돌아선 소바한 성과에는 감격하여 성령께 기쁨의 기도를 올리셨다. 그리하여 구약시대에 아나빔이라든가 암하레츠라고 불리던 가난한 이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믿게 되었으므로, 이들이 열두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주류가 되었다. 그분이 가난한 이들의 메시아로서 자처하시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같은 태도를 요구하신 결정적인 사례는 최후의 심판을 가르치셨을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심판의 권한을 받아 관장하실 최후의 심판 때에 가서는 그들에게 베푼 사랑과 자비를 당신에게 베푼 사랑과 자비로 동일시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마태 25,31-46).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받게 될 최후의 심판의 잣대로까지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메시아이셨다(A. Barreiro,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기초교회공동체」, 1982).

    

14.1.3. 악마와 악에 맞선 예수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나, 성인이나 의인이든 죄인이나 악인이든 심지어 여성이나 가난한 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 등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모범을 보여주심으로써 ‘길’이 되어주셨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반드시 겪게 되는 것이 악마 혹은 악과의 대결이다. 악마는 인간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방해할 뿐 아니라 앞서 언급한 여러 부류의 인간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도 방해한다. 그래서 관계를 통해 완덕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다. 예수님께서는 악마 혹은 악과의 대결에 있어서도 ‘길’이셨다. 

   

복음사가들 가운데에서 이 점에 주목한 이들은 마태오와 루카였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유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면서 악마와 대결하신 장면을 매우 극적으로 전해주었다.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겪으신 유혹을 ‘탐식, 허영, 탐욕’으로 정리한 교부는 우리도 악마로부터 유혹을 당할 때 성경, 즉 말씀으로 맞서라는 뜻이라고 풀이해 주었다(大 그레고리우스). 이 유혹은 더욱 근본적인 의미로 알아듣자면 식욕뿐만 아니라 성욕과 소유욕 등 몸의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욕망, 영광이나 명예 또는 사회적 영향력 등 정신적 자아가 인간 관계에 미치는 욕망 그리고 이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거나 더 많은 이들을 다스려 사회적 자아의 힘을 크게 발휘할 수 있는 정치적 권세의 욕망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유다 광야에서만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신 것이 아니었다. 공생활 중에 임금으로 세우려는 군중도 있었고(요한 6,15),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매달린 상황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부터 구원해 보라는 지도자들도 있었다(루카 23,35). 심지어 최후의 만찬을 마친 후 기도하러 오른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자아의 내부에서부터도 십자가를 피해 보려는 갈등에 시달려야 했다(마르 14,36; 마태 26,39.42; 루카 22,42).

 

  이 갈등을 겪으시는 중에 수제자로 임명해 놓은 베드로마저도 수난을 당하시면 안 된다며 스승을 본의 아니게 유혹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하고 호통을 치셨다. 베드로가 왜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는가? 그것은 사탄은 ‘유혹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마만 사탄으로서 유혹하는 게 아니라 사람도 얼마든지 유혹하는 사탄이 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자아도 사탄으로 둔갑할 수 있도록 악마는 파고 들어 준동한다. 

 

  이 모든 악의 유혹에 맞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적하셨다.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에 악마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하고 유혹하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응수하셨다. 그 다음에 악마는 거룩한 도성의 성전 꼭대기에 예수님을 세운 다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하고 유혹하자,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하고 이르셨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 4,9) 하고 유혹하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하고 말씀하셨다. 

 

  악마의 꼬임에 빠져 예수님을 유혹한 지도자들이나 군중, 또는 베드로 등이 예수님을 유혹하였을 때에도 그분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하고 대답하시거나, 기진하신 나머지 대꾸조차 하기 어려운 처지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셨다. 

 

  이렇게 유혹당하시는 예수님께 하느님의 말씀은 악에 대적하기 위하여 선의 기운을 일으켜주는 영적 무기였다. 악의 총체적인 결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을 딛고 부활하셨다. 여기에서 악마와 악에 맞서심으로써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범이 드러났다. 즉, 악마가 저지르는 악은 선의 승리를 위한 발판이다. 하느님의 선 앞에서 악마의 악은 그 선의 힘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어 준다. 예수님의 전략이 이것이었다. 

 

  다만 우리도 악마와 악에 맞서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분의 전술도 따라야 한다. 그것은 악에 물들지 않고 맞서고자 하는 의로움으로부터 시작하되 그에 머물지 않고 거룩함에까지 나아가기 위하여 자기비허(필리 2,7-8)의 가난한 마음(마태 5,3)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함이야말로 하느님의 본성이요, 거룩함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하느님을 닮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완덕의 길이 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이 말씀이 바로 여기에 적중한다. 이른바 의덕과 성덕의 십자가이다. 

  

14.2. 아버지를 아는 것(14,7-14)

  “그리스도께서는 육으로 당신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눈으로 볼 수 없는 아버지에 관한 지식을 드러내 주신다(이레네우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그러나 아버지를 알려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니다. 아버지는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신적 권능과 권한의 증거를 통해 알려지신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제자들은 하느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그분을 아버지로 알지는 못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어째서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볼 수 있는지 아직 깨닫지 못한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사 청한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아직 믿음의 눈이 없었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아들은 아버지의 초상화와 같다(암브로시우스).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살아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그리스도는 당신을 낳으신 분의 모습을 당신 안에서 보여 주시는, 하느님의 완전한 표상이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 모습은 바로 창세기가 말하는 ‘모습’이다(암브로시우스). 그 모습은 육체적 형상이 닮은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두 분에게서 같은 것은 바로 의지다(大 바실리우스). 아버지의 아들의 완전한 유사성은 여기에 있다(테오도루스). 제자들이 예수님과 많은 시간을 보냄으로써 그분에 관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분명 그분에게서 아버지의 본성에 속하는 신성도 알아보게 될 것이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분들은 영광이나 본질에서 조그마한 변화도 없이 온전한 위격을 유지한 채 서로 안에 계시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신 것은 두 분의 본질이 하나이기 때문이다(암브로시아트테르). 여기엔 어떠한 속임수도 없으며, 따라서 하느님께서 어떤 때는 아들인 체 하시고 어떤 때는 아버지인 척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한 분이 다른 분의 목소리로 말씀하신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나뉘고 갈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아버지께서 직접 말씀하셨더라도, 아들과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함께 일하시며(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나뉠 수 없으므로 삼위일체 가운데 한 위격의 행위는 다른 두 위격의 참여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아우구스티누스). 아버지의 모습인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아타나시우스). 여기서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본성과 생각과 덕과 그리고 하시는 말씀마저도 아버지와 똑같음을 알려 주신다(테오도루스). 그리스도의 행동도 본성의 일치를 보여 준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분께서 본질적으로 똑같은 신성을 지니지 않으셨다면, 그분께서 일으키신, 오직 신성만이 이룰 수 있는 기적들을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리스도께서 권한을 주시면 우리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와 아버지 사이와 달리 우리와 그리스도는 본성이 일치하지 않는다(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는 존귀함과 본질에서 아버지와 동등하시다. 그분의 말씀과 행위는 아버지와 그분의 일치를 입증하며, 그분은 우리를 통해서도 같은 행위를 하실 것이다(테오도루스). 그리스도께서 ‘더 큰 일’이라고 표현하신 일 가운데 하나인 우리의 믿음도 그리스도의 행위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더 큰 일’은 사도들이 당신의 권능으로 이룰 기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헤라클레아의 테오도루스). 아버지와 아들은 신성을 함께 나누시므로 우리는 아들에게도 청원할 수 있다(암브로시우스). 그러나 믿는 이들이 청하는 것을 항상 얻지는 못한다. 아들이 그들의 청을 들어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의사와 같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이 유익한지 아닌지 아시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통공을 이루고 계신 신비, 즉 아버지를 닮은 아들로서 존재하시는 원천인 당신의 신성에 대해 계시하셨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4,7ㄱ) 라든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ㄷ) 하는 말씀이 이 계시에 해당한다. 이 부자 간의 일치에 대한 계시 말씀은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고 하시던 전권주장의 말씀과도 상통한다. 힐라리우스 교부의 풀이대로 예수님께서 지니신 신적 권능과 권한을 드러내심으로써 그 신원이 알려지셨으며, 그런데 그 신적 권능과 권한은 바실리우스 교부의 풀이대로 육신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신적 의지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상통하고 통공하심으로써 가능했던 것이고 이로써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닮으셨음을 드러내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계시 진리를 믿음으로써 똑같은 신적 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면,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ㄴ). 사실은 테오도루스 교부의 증언대로, 이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하나이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셔야 그럴 수 있다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ㄷ). 이러한 사실이 교회가. 이룩하는 모든 사목 활동과 선교 활동의 실질적인 근거이다.

 

  이 근거에 바탕하여 우리는 윗 항목에서 “길이신 예수님”에 대해 풀이한 바를 이어서 “진리이신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완덕의 길에 들어있으니, 진리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하느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알아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최고선이시다”(요한 23세, 「지상의 평화」, 38항). 창조주 하느님의 설계에 따르면, 인간 사회를 지탱해 주는 최고선의 가치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이다.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사회의 공동선은 인간의 존엄성 가치를 중심으로 하여 수호되고 증진되어야 한다. 이 최고선과 공동선이 실현됨으로써 진리는 그 빛을 발하고 생명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가 실현되고 생명이 풍요로워지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당신이 이룩하신 일보다 ‘더 큰 일’(요한 14,12)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의 믿음으로 이룩될 수 있는 결과가 그렇다는 뜻이다. 믿음을 전제로 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주시겠다고 되풀이하여 약속하셨다(요한 14,13-14). 그러니 그분의 현존 양식에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렇게 예수님의 현존 양식에 따라서 그분이 가신 길을 걷고, 그분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믿으며, 이 진리가 우리에게 생명을 누리게 하리라는 계시는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이다. 

 

  사실, 그분이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말씀은 길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별도의 속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는 없다. 한자문화권에서는 길이 ‘도’(道)로서 진리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진리는 관념에 그치지 않고 실제 현실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마치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마태 22,37; 루카 10,27)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과 같이 동일한 의미를 되풀이하여 강조하신 어법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마음을 다하는 것과 목숨을 다하는 것, 정신을 다하는 것과 힘을 다하는 것이 동일한 의미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길이신 것과 진리이신 것과 생명이시라는 말씀은 동일한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컨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분은 그분이 가신 뒤를 따라 걸어야 하는 이시다. 또한 그분이 걸어가신 길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주관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단지 위대한 인간의 삶인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하느님으로서 인류가 걸어가야 할 보편적인 진리임을,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일을 통해 입증해야 할 소명을 받고 있다. 특히 역시 위대한 성현을 창시자로 모시고 있는 여러 종교들과 역시 같은 진리를 목표로 삼고 있는 학문에 대해서 그러하다. 종교와 학문이 진리라는 공통 목표를 지니고 있다면, 진리를 향한 구도자로서 동반 관계에 있는 각 종파와 각 학문 분야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에서 수렴될 수 있음을 교회는 증명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에게 대해서는 예수님의 삶이 창조된 목적을 실현함으로써 현세에서나 내세에서 진정한 힘으로 살아 있을 수 있는 생명임을 교회는 그분의 삶을 따라 걷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으로 통하여 증거해야 한다. 그리하여 인류로 하여금 이제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등장한 모든 문명이 하나 같이 추구해 온 이 생명이 예수님의 삶에서 완전함에 이르렀음을 인식으로 깨닫고 체험으로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부활 신앙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인류 전체에게 생명을 주는 보편적 진리이다.

 

14.3.  성령을 통해 현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시다(14,15-24)

   “예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그분의 뜻에 복종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랑의 표현인 순종은 우리 삶에 사랑의 초상을 그리며, 그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성령 없이 사랑은 없으며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공언했으므로 주님께서 여기서 잘라 말하신 것처럼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영을 지니고 있었음이 틀림없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마음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마음에도 성령께서 머무르시도록 지금도 아버지께 청하신다(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안 계시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보호자 성령을 선물로 약속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히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영을 ‘다른 보호자’라고 표현하심으로써(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역시 보호자요 위로자로 불리는 아들(아우구스티누스)과 성령을 사람들이 혼동하지 않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신성도 확인시켜 주셨다(아우구스티누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성령의 행위도 아들의 행위와 똑같은 효력을 지녔음을 안다(大 레오). 성령은 아들과 다른 방식으로 위로하신다. 두 분의 본성이 다르다고 추론해서는 안 되지만, 성령은 중개자라기보다는 위로자다(디디무스). 보호자요 위로자인 성령은 고통받는 이들의 짐을 덜어 주신다(테오도루스).”

 

  “한 본질이신 삼위일체 가운데 셋째 위격인 성령(아우구스티누스)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일을 완성하신다(아타나시우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 불리우시므로 거짓말을 눈감아 주시지 않으신다(헤르마스). 성령께서는 당신을 보내신 분의 진리를 드러내시는 바, 진리는 신성의 특징이다(大 바실리우스). 세상은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기에, 이런 종류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베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이들은 이 세상의 것들을 넘어서는, 세상 안에서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지니고 있다(아폴리나리스).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성령의 다양한 선물 안에서 알아볼 수 있으며(大 그레고리우스), 그 선물은 우리가 사랑하고 계명을 지킬 수 있으려면 우리 안에 반드시 계셔야만 하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어느 정도로 계시는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자식을 두고 떠나가는 아버지처럼 말씀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은 제자들을 강하게 만들고자(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들을 버려두는 대신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도록 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세상은 진리의 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며(大 그레고리우스), 이는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의 나약한 본성을 보여 주는 증거다(大 바실리우스). 자기에게 맡겨진 영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킨 사람들은 아무것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며 우리가 당신 안에 있다고 하신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신성이라는 본성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안에 계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그분께서 육체로 태어나셨기 때문이며, 우리는 성사의 신비 안에서 그 육체에 참여한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치는 단지 서로 간의 사랑으로 인한 결합이 아니라 거룩한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치이며, 예수님께서 당신의 육화로 이를 가능하게 하셨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이 일치는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친밀한 결합이다(테오도루스). 믿는 이는 자기 안에서 셋 – 자기 자신, 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느님 – 을 결합시킨다(아프라하트).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계심을 알고 있었고, 저술을 통해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우리와 결합시켰다(베다).”

 

  “세상을 떠나(은수자 마르쿠스)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라서 그분과 아버지께 사랑받는 이들임을 보여 준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미래의 심판 때 그들은 가장 찬란한 모습의 임금을 보듯(베다) 예수님을 보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테오도루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런 순종적인 사랑은 시건방진 마음을 제어하며(大 그레고리우스) 우리가 마음의 집에서 죄의 더러움을 씻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오리게네스, 大 그레고리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하느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분은 공동 거주라는 신비로운 양상을 띠며 독립적으로 남아 계시지만, 우리 안에 한 분으로서 머무르신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첫 작품인 하늘과 마지막 작품인 우리 안에 사시며(암브로시우스), 그분은 당신 작품 안에 사시는 것을 좋아하신다(아우구스티누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이다(大 그레고리우스). 아들의 말을 물리치는 자는 아버지의 말씀도 물리친다(가우덴티우스).”

 

 이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는 부활 신앙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을 통해 증거될 수 있게 되었다. 성령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존재로서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 행하신 복음선포 활동을 보편적으로 모든 시공간으로 열려진 채로 지속되게 하시며, 이로써 궁극적으로 완성하시는 데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타나시우스 교부의 말대로, “한 본질이신 삼위일체 가운데 셋째 위격이신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일을 완성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에 우리가 얼마나 충실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성령의 이끄심이 다양한 수준과 양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교부의 말대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성령의 다양한 선물 안에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며, 아우구스티누스 교부도 확인해 주고 있는 대로 성령의 선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에 충실한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세상은 진리와 생명의 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현존 양식을 통해 알아뵈옵는 성령의 이끄심 역시 받아들이지 못하리라는 것은 그레고리우스 교부가 이미 예언한 바와 같다. 하지만 그 옛날 예수님 당시에도 그러했듯이, 하느님의 영에 눈먼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성령께서 특별히 개입하시어 눈을 뜨게 해 주시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었다. 박해자였다가 사도가 된 바오로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믿는 이들이 자신들의 노력에만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개입하심을 믿고 하느님의 본성에 제각기 참여함으로써 일치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일치시키신다. 그리고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삼으시어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펼치실 것이다. 

 

  성령을 통해 이루어질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미 하느님의 말씀 안에 기록되어 있다. 말씀이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으로서 첫 번째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씀에 대한 응답의 기준은 성찬이며 이에 담긴 예수님의 응답을 우리가 가야 할 길이요 선택해야 할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 응답과 선택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현존 의식을 지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영적인 기운도 받게 해 준다. 그래서 성찬이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으로서 중심이 된다. 세 번째 현존 양식은 섬김이라 하였다. 이는 형제애의 실천적인 이름으로서, 공동체를 이루는 양식이 되며 특히 세상에서 고통받고 소외당하는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행동에서 실현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현존 양식에 충실한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게 해 주는 것이 이 세 번째 현존 양식의 실천 여부이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바를 서로가 각자 식별할 수 있는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가운데 성령의 이끄심을 공동으로 식별하여 합의할 수 있는 관계 구조와 논의 구조를 실천해야 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14.4.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14,25-31)

  “그리스도께서 육체로는 제자들을 떠나시지만, 당신 말씀 안에 드러난 진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실 것이다(大 레오). 그 진리를 드러내 주는 것은, 제자들과 함께하도록 남겨 두시겠다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평화를 가져다주는 보호자 성령이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령은 ‘보호자’로 불리며, 이는 옹호자와 위로자를 뜻한다. 죄를 두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용서의 희망을 품도록 해 주시기 때문이다(大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 당신의 떠나심과 승천에 대해 예고하신다. 성령을 보내신다는 말씀은 성령강림을 암시한다(가우덴티우스).”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의 이름으로 오신다(디디무스). 듣는 이의 마음속에 계신 성령께서 스승의 말씀이 그의 귀에 들리게 하신다(大 그레고리우스). 아들은 말씀하시고 성령은 가르치신다(아우구스티누스). 성령께서는 계시된 것을 기억하는 데 도움 되는 암시를 주심으로써(아우구스티누스) 우리에게 하느님의 비밀을 알려 주신다(大 그레고리우스).”

 

  “그리스도의 평화는 세속적인 것들에 쉽게 영향받지 않고 두려움에 빠져 걱정하지 않으며 의심으로 괴로워하지 않고 고통에 쉽게 지치지 않는 이들이 보여 주는(암브로시우스) 마음의 평온과 영혼의 평화로움에서 그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우리의 원수를 이기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영구한 평화를 주신다(아폴리나리스). 그 평화는 그분의 평화를 이루는 이라 불리는 이들 안에서 빛난다(키프리아누스). 이것이 평화를 이루라는 그분의 지시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께 의지해야만 하는 이유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은 유다에게 평화의 입맞춤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다(아우구스티누스). 세상이 주는 외적인 평화는 해로운 것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서로 간의 평화는 우리를 더욱 당하게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평화를 지닌 이는 사랑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암브로시아스테르). 평화에 관한 이 말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목자께서 안 계시면 양 떼를 흩어 놓으려고 할 늑대들 때문에 걱정했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들의 주해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뚜렷한 징표가 평화라는 사실이다. 또한 이 대목을 주해하는 교부들의 강조점은 마음의 평온과 영혼의 평화로움에서 평화가 시작한다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에우세비우스). 하지만 이미 평화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부터 세상이 펼쳐 보인 평화와 그분이 주실 평화는 날카롭게 대비되어 있었다. 당장 요한복음 제14장에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평화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모든 인간 관계를 관통하여 민족들의 관계에까지 나타나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숙고하고 논의한 공의회의 교부들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평화는 전쟁 없는 상태만도 아니요, 적대세력 간의 균형 유지만도 아니며, 전제적 지배의 결과도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평화는 정의의 실현인 것이다. …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개인의 복지가 안전하게 확보되고 사람들이 정신과 재능의 자원을 서로 신뢰로써 나누지 않고서는 지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타인과 타국민, 그리고 그들의 품위를 존경하려는 확고한 의지와 형제애의 성실한 실천이 평화 건설을 위해 절대로 필요하다. 이렇게 평화는 정의의 내용을 초월하는 사랑의 결실이다”(「사목헌장」, 78항). 평화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고대 교회의 교부들이 마음과 영혼의 평화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면 현대 교회의 교부들은 고대 교회 교부들의 메시지를 이어 받아 민족들의 차원에서 완성되어야 할 평화로 보충한 셈이다. 

   

  마음의 평화에서부터 인류의 평화에 이르기까지 평화는 성령으로 현존하시어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이자 우리에게 남기신 유산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우두머리’(요한 14,30ㄱ)는 이 평화를 깨뜨리려 한다. 하지만 “그는 아무 권한도 없다”(요한 14,14,30ㄴ). 그가 힘을 쓸 수 있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믿지 못하고 자기 힘을 내세우고자 하는 무리를 자기 수하로 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분이) 한다는 것”, 그래서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을 닮은 아들이심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ㄱ).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에페 2,14) 이시기 때문이다.  

 

14.5. 주님의 현존양식과 신앙 감각

  이상 살펴본 바에 따르면, 요한복음 제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양식에 대하여 네 가지 중요한 말씀을 남기셨다.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1-6)이신 그분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요한 14,9ㄴ)이라고 직설법으로 밝혀주셨고, 당신 제자들과 그들을 따라 당신을 믿는 후대의 제자들을 위해서 “진리의 영”(요한 14,17)이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 영을 따라 당신의 현존 안에 머무르게 되면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그리스도의 평화’(요한 14,27)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앞서 제13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의 계명에 따라서 제자들이 상호 섬김으로 이룩해야 할 형제애는 교회가 세상 끝 날까지 그리고 온 인류에게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생활양식이다. 하지만 제자와 또 그들의 제자인 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본질적으로는 비그리스도인들과 다를 바 없이 나약한 인간성의 보유자들이기 때문에 이 생활양식에 담긴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계명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신성으로 함께 해 주시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분의 현존이 없이 그리스도인들만으로는 도달 불가능한 사명이 상호 섬김의 형제애 실천이요, 또한 이를 바탕으로 이룩할 복음화요 선교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지나간 교회의 역사에서 신앙인들 사이에서 현존의식이 약해졌을 때 정체의식도 약해졌으며, 복음화는커녕 교회를 이식시키는 선교활동조차도 실패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 문제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초창기부터는 물론이고 한 두 세대가 지나서 복음서가 편찬될 당시에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분의 신성을 고백하게 된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양식으로든지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리라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당연히, 예수님의 지상 생활을 겪지 못한 후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신앙생활의 기반으로서 최대의 관심사가 될 이 문제에 대하여 복음사가들은 각자가 기록한 복음서에 이 문제를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었다. 

 

  예를 들면, 마르코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분을 알 수 없다는 메시아 비밀사상을 철저하게 견지했으므로 자신의 복음서 전편을 통해서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 자체가 그분을 만나 뵈옵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런데 마태오는 마르코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종말설교에서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심판의 기준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못 박아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중세와 근세를 통털어 유럽 라틴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쯤으로 이해해 왔다. 이런 관행에 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라틴 아메리카 교회의 민중들과 해방신학자들과 주교들이 메델린 문헌과 푸에블라 문헌에서 공식적으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결국 공의회의 노선에 따라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려던 공의회 이후 역대 교황들의 공식적인 교도권 해석에 의해 이는 자선을 넘어서는 애덕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는 공생활 중에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 대해 보여 주신 태도를 기준으로 해석하자면, 전통적인 이해를 반영하는 자선이나 공의회의 가르침인 애덕의 차원을 넘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섬김으로 더 비중있게 알아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섬기듯이 가난한 이들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들 사이 서로 발을 씻어 주는, 상호 섬김 역시 가난한 이들을 섬기기 위한 기본자세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서들에 나오는 바, 아프고 마귀 들린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자세가 바로 그러하였다. 제자들 사이 서로 발을 씻어 주는, 상호 섬김 역시 가난한 이들을 섬기기 위한 기본자세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태오는 주님의 현존양식에 대해 더 큰 강도로 전해 주었으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고 약속하셨음을 전해 준 것이다. 그런데 루카는 마태오의 신학적 발전을 체계화하여 기록해 놓았다. 즉, 24,13-35에 전해준 엠마오 이야기를 통해서 말씀과 성찬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훨씬 체계적이면서도 매우 인상깊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이렇듯 공관복음사가들이 주님의 현존양식에 대해 각각 특색있게 보도를 해 준 바탕 위에서, 요한은 그분이 제자들과 그들의 교회 안에서, 그러니까 첫 제자들은 물론 후대의 제자들과 함께 하실 현존 양식을 고별사 안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음을 전해주었으니, 그것이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고 말씀하신 계시 진리이고, 이로써 그분은 당신 자신의 신원을 명백히 드러내시는 한편 하느님께로부터 받으신 전권을 주장하셨다. 물론, 이 전권주장(全權主張)에 대해서는 마태오도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는 말씀으로 전해 준 바 있었는데 훨씬 더 명확한 진술을 요한이 전해준 것이다. 요한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요한 14,9)이라는 스승의 말씀을 기록함으로써 한 번 더 전권주장을 뒷받침해 놓았다. 

 

  마태오와 요한이 이중, 삼중으로 보도해 놓은 바, 예수님께서 당당하게 주장하신 이 전권주장에 힘입어 그리스도인들도 당당하게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의 보도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현존양식의 보증이 되실 성령을 약속하셨다는 내용이다. 이 약속은 네 복음서를 통털어 이 대목이 유일하다. 루카는 사도행전의 초반부에서 성령강림 사건으로 보도하였다(사도 2,1-3).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이(요한 14,16) 곧 당신의 오심이라고(요한 14,18) 명백히 밝혔다. 14,9과 함께 이 14,16과 14,18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삼위로서 일체이심을 전제한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주로 성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집중한 나머지, 말씀을 통해서나 섬김의 생활양식을 통한 현존양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하였다. 이를 잘 드러내 주는 것이 미사의 형식과 구조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까지 성찬을 거행하기 위한 제대만 중앙에 배치되어 있었고,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말씀의 식탁 즉 독서대는 제대 아래에 한 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성령보다 성자의 역할이 더 강조되어온 터에, 성찬과 균형을 이루어야 할 말씀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어온 것이다. 이 불균형을 바로잡고자 2백여 년 가까이 전례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 동안 거의 천5백여 년의 공백을 한꺼번에 뛰어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개막미사 후 열린 제1회기에서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온 레르카로 추기경은 이 공의회가 분명하게 선언해야 할 바로서,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에 대해 이렇게 강조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 세 가지 양식으로 현존하십니다. 첫째는 말씀 안에, 둘째는 성찬 안에 그리고 셋째는 가난한 이들과 사랑으로 이루는 공동체 안에 그분은 현존하십니다. 공의회의 주제는 교회 특히 가난한 이들의 교회입니다.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 개인들과 집단적으로 가난한 온 세상의 가난한 백성들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 현존 양식 중에서 한 두 가지 양식만 따른다면 우리는 절름발이로 그분을 뵈옵는 것이 됩니다”(1962.12.6.). 레르카로는 네 복음사가들의 현존 양식 보도를 종합한 위에, 특히 예수님께서 당신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성령께로부터 파견받았노라고 천명하신 나자렛 선언(루카 4,18-19)까지 참조하여 공의회 개막 후 열린 제1회기에서 위와 같이 발언하였다. 실제로 그의 발언은 교회헌장 8항과 사목헌장 1항을 포함하여 여러 군데에서 비중 있게 반영되었다. 

 

  공의회의 가르침을 참조하면, 서로 섬김으로써 형제애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성령으로서 현존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성찬과 가난한 이들과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 이 세 가지 양식으로 함께 하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양식으로 현존하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 감각이야말로 주님을 드러낼 수 있기 위한 능력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0).

 

14.6. 신앙 감각으로 생기 넘치는 교회

  “일어나 가자”(요한 14,31ㄴ)! 

제14장의 마지막 말씀인 이 말씀대로, 신앙 감각은 하느님의 얼이신 성령을 받아 그분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영적인 능력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게 해 주는 능력도 신앙 감각이요, 예수님께서 말씀과 성찬과 섬김의 현존 양식을 통해 성령으로 나타나심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도 신앙 감각이다. 따라서 당연히 평화를 갈망하고 실현하고자 노력하게 해 주는 능력 역시 신앙 감각이다. 신앙 감각이 살아 있다면, 우리는 평화가 위태롭게 유지되거나 또는 아예 사라져버린 상황에서도 용기를 내서 일어나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충격을 받은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렸을 때, 부활하신 스승께서 일일이 그들을 엠마오로나 갈릴래아로 찾아다니시며 한때 잃어버렸던 그들의 믿음과 소명을 회복시키셨다. 이를 발현 체험이라 한다. 이 체험은 누구에게나 일어나지 않았고, 오직 초대교회 당시에, 그것도 열두 제자에게 일어났다. 사도 바오로는 자기 자신과 한번에 5백 명이 넘은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신 적이 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는 그들에게 믿음이 흔들렸고 소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성령께서 강림하시자 더 이상 예수 발현은 일어나지 않았다. 말씀과 성찬과 섬김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 안에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체험하는 자리도 또한 말씀과 성찬과 섬김에서이다. 우리가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말씀과 성찬과 섬김의 생활 양식에서 성령으로 오시는 그분을 체험할 수 있도록 신앙 감각을 살아있게 해 달라는 청원과 같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날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느낀다거나 그 결과 무신론과 우상숭배가 만연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말씀과 성찬과 섬김의 현존 양식 속에서 성령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상 제도상의 교회가 존재하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시키지 못하고 강제로 개종시키려 들었던 시행착오들은 신앙 감각이 약화되었던 데 그 원인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신앙 감각으로 인간의 얼을 형성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얼이신 성령과, 인간의 얼인 이 신앙 감각이 만나고 소통함으로써 영혼이 생기를 얻는다. 그래서 신앙 감각은 인간의 얼인 동시에 혼이기도 하다. 인간은 몸을 지니고 있고 정신도 계발할 수 있지만 영혼을 소유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과 우리의 혼이 소통한 결과로 누릴 수 있는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혼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영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의 모임인 교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받음으로써 역사 안에 탄생하였다. 이 성령 강림 사건은, 물리적인 천지 창조에 이어 ‘새로운 인류’로서의 교회가 태어나는 영적인 창조로서 창조의 완성이다. “창조의 업적을 성부께 돌리기는 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께서 창조의 유일하고 분리될 수 없는 근원이시라는 것 역시 신앙의 진리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316항). 그래서 교회의 창조가 일어나는 성령 강림 사건을 전해주는 사도행전은 ‘교회의 창세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적으로 교회를 창조하심은 성령 강림 사건 때는 물론 지난 2천 년 동안 보편교회를 성장시킨 원리일 뿐만 아니라 무수한 사도직 현장에서 교회적인 공동체가 ‘창조’될 수 있게 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신앙 감각을 중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역사적인 교회 탄생 시에 성령을 받은 이들은 유다의 뒤를 이을 사도를 뽑기 위해 모였던 사도들과 제자들, 모두 합하여 약 120명의 무리들이었는데(사도 1,15), 성령께서 내려오실 때 일어났던 소리를 듣고 더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사도 2,6). 성령을 받고 신앙 감각을 찾은 이 무리가 사도들을 중심으로 공동생활을 하며 초대교회를 이루었다(사도 2,42-47).  

 

  초대교회를 이룬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주축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에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믿음을 고백한 아나빔들이었다. 구약시대에도 아나빔들은 왕국이 분열되고 민족이 포로로 끌려가 유배살이하는 쓰라린 시련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삶의 기초로 두고 구원과 해방을 희망한 이들이었는데, 이들은 권세나 지식을 갖춘 기득권층도 아니었고 숫적으로 다수를 차지한 이들도 아니었으나 하느님께서 주로 상대하셨던 그래서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의 주류였다(김혜윤). 이 밖에 주류는 아니었지만, 바빌론 유배 당시에 앗시리아 군대가 기술과 지식이 있어 보여서 부려먹을 만한 사람들만 추려서 데려갔기 때문에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줄에도 끼지 못하고 그대로 유다 지방에 남은 가난한 이들이 있었다. -  이들을 ‘암하레츠’(amha-aretz, The People of the Land)라고 불렀다. ‘그 땅에 남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 이들도 아나빔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로부터 하늘 나라를 차지하리라는 복음을 들은 이들이었다(루카 6,20-23). 유배 이후 예수님 당시에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등 이스라엘의 지배층이요 지식층이며 부유층이 그분을 배척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맞아들였기에 초대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 모두의 신앙과 하느님의 이끄심이 잘 드러나 있는 책이 시편이다. 이 시편은 유배 중에 편집되어 이스라엘의 경신례 안에 자리를 잡으면서 하느님을 기억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 동시에 이러한 기억을 통해 인내와 희망을 갖게 하는 기능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시편은 전례 안에서 싯구를 가사로 하여 노래로 불리어졌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신앙이 깨어 있던 민중을 의미하는 아나빔과 가난한 이들의 대명사였던 암하레츠들은 시편으로 탄원하고, 희망하며,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래서 시편은 구약 성경이 제시하는 여러 사상의 집대성이며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래로 되어 있는 시편은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형성된 이스라엘의 종교적 심성 전반이 시적 운율 안에서 이루어진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도 아나빔들과 암하레츠들은 이 노래들을 경신례 안에서 부르는 가운데 찬양하기도 하고, 탄원하기도 하며, 감사드리기도 하고, 속죄도 하면서 하느님과 교감해 왔던 것이다. 오늘날 가톨릭교회 안에서 이 시편 기도는 성무일도의 주된 내용을 이루며 매일 미사에서도 응답송으로 쓰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염원했던 가톨릭교회의 쇄신이, 히브리 문명 안에서 아나빔들과 암하레츠들이 예언자들과 교감하는 가운데 하느님과 소통했던 문화적 방식으로, 신자들의 정서와 감성에 먼저 뿌리내리기를 염원한 것 같다. 시와 노래는 음악이라는 문화 장르에 속하고, 이 문화를 통해서 믿는 이들이 서로 교감하면서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 감사와 속죄의 뜻으로 소통할 때라야 교회도 활성화되고 덩달아서 쇄신 작업도 진척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상층부에서 주도하는 정책으로 추진되는 방식으로는 교회의 활성화 과업이나 쇄신 작업이 속도를 내기 어렵다. 밑바닥까지 내려가 뿌리내리는 수준으로 온전하게 쇄신 작업이 이루어지고 교회가 활성화되려면 평신도 대중이 움직여야 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아나빔과 암하레츠 같은 백성과 함께 부대끼며 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징표를 식별하여 예언 활동을 하였던 것인데, 이처럼 평신도 대중의 움직임 속에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는 지식층의 움직임도 중요하다. 이런 역할이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바리사이들이 다른 점이다. 상층부에서 동원하는 방식으로 조직화하는 것보다 평신도 대중에 뿌리를 두고 깨어있는 지식층이 식별하는 방식으로 자발적이면서도 진정성 있게 움직이는 것이 실질적으로 교회를 쇄신시킬 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공동합의성」 문서보다 「신앙 감각」 문서가 더 먼저 연구되고 발표되었을 것이다. 

 

  교회란 본시 “성직자들이나 신학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교리로서가 아니라 성령을 체험한 신자들의 신앙 감각으로 시작된 새로운 삶의 형태로 시작되었다”(송용민). 예수님의 복음을 살고자 시작된 이 교회는 세상을 피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요한복음의 증언처럼, 신자들의 신앙 감각에 따라 세상 한가운데에서 증거의 양식으로 뻗어나갔다. 그들은 더 이상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도록 초대받았음을 깨달았고(참조: 갈라 5,16), 구약 시대 아나빔들과 암하레츠들이 시편으로 남겨준 대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감사하고 기쁨을 누리는 삶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에서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체험하였다(참조: 갈라 5,22). 다음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청 국제신학연구위원회를 통해 2014년에 반포한 문서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을 간추린 글이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시어” 아들을 증언하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요한 15,26)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은 “성실하고 참된 증인”(묵시 3,14)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자 임무에 참여한다. 이리하여 신자들은 올바른 그리스도교 교리와 실천을 파악하고 그에 동의하며 잘못된 것을 배척하도록 해 주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본능 즉 ‘신앙 감각’을 지닌다. 오늘날 교회가 새 복음화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중요한 자산이 이 ‘신앙 감각’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교계 제도는 능동적인데 평신도는 수동적이라거나, 성직자들은 가르치는 교회이고 평신도들은 배우는 교회라는 식으로 수직적으로 구분하는 계급적 교회관을 배격한 공의회는, 모든 세례 받은 이가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 곧 예언자직, 사제직, 왕직에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참여한다고 가르쳤다. 

 

  개별 신자들은 이 신앙 감각으로 어떤 특정한 교리나 실천이 복음과 사도 신앙과 부합되는지 여부를 곧바로 판단할 수 있으며, 선포된 것들 가운데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들을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신자들이 자신의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결심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개별 신자의 신앙 감각’은 개별 신자가 어떤 가르침이나 관행과 그들이 실천하는 참다운 그리스도 신앙 사이의 모든 부조화나 불협화음 또는 모순을 인식하도록 해 준다. 자신의 신앙 감각을 확신한 개별 신자가 권한 있는 목자들의 가르침에서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인식할 수 없다면 그러한 가르침조차 거부할 수도 있다. 그 덕분에 신자는 새로운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올바로 증언하고 더 나아가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감지할 수 있다. 

 

  전체 교회, 곧 평신도와 성직자 모두는 성경과 살아 있는 사도 전승에 담겨 있는 계시를 보호할 책임은 물론 이 계시를 역사 안에서 계속 전달해야 할 책임도 있다. “사도에게서 이어 오는 성전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 안에서 발전한다”(계시헌장, 8항; 교회헌장, 12항,37항; 평신도 교령, 2항, 3항; 사목헌장, 43항). 평신도들은 교도권의 가르침과 신학자들의 설명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활기 넘치고 능동적인 교회의 주체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은 이를 기억하도록 이끌어주신 성령의 은총으로 신자들의 신앙 감각에 의해 사도 전승이 되었고, 이것이 기록되어 전체 교회에 전해지는 성경이 된 것이며, 사도 전승과 성경의 기록에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신앙 감각의 회고적 측면이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역사적 실체이므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고 “앞으로 올 일들”(요한 16,13)에 대해서도 성찬례를 통하여 미리 맛보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동안에 교회와 신자들은 늘 새로운 상황, 지식과 문화의 진보, 인류 역사의 도전을 마주하게 된다. 또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이를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계시 진리가 “언제나 더 깊이 받아들여지고 더 잘 이해되고 더욱 적절히 제시될 수 있도록”(사목헌장, 44항) 하는 데에 신앙 감각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 감각의 미래 지향적 측면이다. 

 

  신앙 감각의 회고적 측면과 미래 지향적 측면을 감안하여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는 과정이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면서 신자 전체, 성직자, 신학자들 모두는 각자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있고,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을 때에는 인내하며 존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신앙 감각이 규명되고, 믿는 이들의 올바른 합의, 곧 ‘목자들과 신자들의 공감’이 이루어진다. 

 

  신학은 신앙을 이해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지성적 봉사이다. 따라서 신학은 교회의 모든 은사와 직무들과 관련된 공감을 통하여 신앙의 내용에 관한 객관적 명료성을 교회에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신학은 필연적으로 ‘신자들의 신앙 감각’의 존재와 올바른 활용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들의 신앙 감각은 신학자들에게 단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대상인 것만이 아니라, 그들 작업의 기초이며 ‘기준점’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신학자들은 신자들이 참된 신앙 감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서 그들이 신앙의 근본적 노선들을 깨닫게 해 주고, 오류나 혼란을 피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신학은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 말씀만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기록된 성경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하느님 백성의 삶이라는 흙에서 자라나는 씨앗이다. 그래서 이 중에 ‘신자들의 신앙 감각’에 맞갖은 것이라고 판단되면, 이를 신학적 연구에 포함시켜야 한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신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백성은 ‘신자들의 신앙 감각’으로 자신에게 계시되는 많은 관념들과 이론들 가운데 무엇이 복음에 올바로 부합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를 직감할 수 있다. ‘신자들의 신앙 감각’은 전례와 대중 신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상징적 언어나 신비적 언어들에 진정성을 부여하거나 인정한다. 신학자는 대중 신심이 표현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지역 교회의 삶과 전례에 함께하여, 오늘의 세계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려고 노력하는 교회와 신자들의 역사적 문화적 실제 맥락을 머리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진지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과 성전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말씀을 잘 경청해야 올바른 신앙 감각이 형성될 수 있다. 하느님 백성의 모든 지체들이 성경과 성전의 증언들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필요한 것은 첫째, 전례에서 들려온 성경 말씀을 주의 깊게 받아들이며 경청하고 응답하며, 신앙의 신비를 기꺼이 고백하는 것이다. 둘째, 이 응답의 실천으로서,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여 그리스도의 현존과 그분의 목소리를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여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새로운 성령 강림으로 공의회 이후 교황들이 요청해 온 새 복음화에 교회가 대처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공의회는 모든 세례 받은 이가 ‘신앙 감각’을 지니고 있고, ‘신앙 감각’이야말로 새 복음화에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된다는 전통적인 생각을 새롭게 강조하였다. ‘신앙 감각’은 역사 속에서 순례의 길을 걷는 믿음의 주체인 전체 교회가 지닌 ‘믿음에서의 무류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령으로 굳건해진 신앙 감각은 교회가 주는 증언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고, 교회의 구성원들이 개인과 공동체로서 주님께 충실하면서 살고 행동하고 말하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식별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신앙 감각은 모든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와 함께 생각하며’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목표를 나누도록 해 주는 본능이다. 신앙 감각은 목자들과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 주며, 그들 각자의 은사와 소명을 바탕으로 하는 교회에 본질적이며 풍요를 가져다주는 대화를 이끈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4. 예수님의 현존 양식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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