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님의 복음서 여행 : [요한복음] 13. 죽기 전에 부활하는 길을 알려주신 예수

[요한복음] 13. 죽기 전에 부활하는 길을 알려주신 예수

 

저녁노을의 글

2022-09-20 21:03:15 조회(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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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제13장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는 유언을 남기신 대목으로서, 이 유언 말씀이 요한복음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삼일 파스카 전례 중 성목요일 저녁마다 이 장의 상황을 재현하는 전례를 거행하는데, 이를 세족례라 한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유언을 남기기에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이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행동을 솔선수범으로 보여주심으로써 사랑의 실질적인 내용은 섬김이라는 것이라는 행동강령을 그들에게 남겨 주신 것이다. 

 

  요한은 이 제13장을 제11장에서 이어진 대목으로 보도하였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라고 하신 말씀이 예수님 유언의 예고편이라면 그 후속편이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는 말씀인 것이다. 서로 섬기는 사랑으로 희생하는 삶이라야 믿음의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고, 이 공동체에서라야 예수님과 같은 믿음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으며, 이렇게 복음의 증거로 생겨난 공동체들의 연대망에서라야 하느님 나라가 이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감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는 것, 이것이 부활의 은총이다! 요한복음의 주제인 영원한 생명은 이 부활의 은총에서 주어지는 덤이다. 

 

  라자로를 소생시키신 사건은 이러한 부활 신앙을 일깨워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작정하시고 일으키신 기적이었다. 이때 라자로의 동생 마르타도 마지막 날이 부활의 때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고 이것이 당시 평균적인 유다인들의 종교 의식 수준이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굳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요한 11,25-26)이라고 현재형 문장으로 말씀하시고 나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셨다. 마르타뿐만 아니라 당시 제자들을 비롯한 대다수의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인습적으로 남아 있는 막연한 미래형 부활 인식을 본격적인 현재형 부활 신앙으로 일깨워주시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었다. 그 위험의 정도가 당신 목숨을 걸었을 정도이니 그 의도 역시 얼마나 엄중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전까지 보여주신 여섯 개의 표징들이 메시아로서 당신이 지니신 신적 능력을 드러내심으로써 당신의 신원을 보여주신 것이라면, 이 라자로 소생 사건으로 나타난 일곱 번째 표징은 당신의 부활을 알려주심과 동시에 당신을 따르고 믿을 이들 역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일으키신 것이었다. 

 

  이토록 엄중한 사건의 전말을 똑똑히 지켜본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식사에 앞서 그들의 발을 씻어주셨던 것이고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야말로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 유언을 지키는 것임을 당부하셨으니, 서로 발을 씻어주는 세족례는 서로 섬기라는 행동강령이었고, 이 행동강령을 지키는 일이 서로 사랑하는 일이요, 결국 죽기 전에 부활하는 일이라는 뜻인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설사 그 때문에 위험이 닥치더라도 행해야 하는 부활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11장과 제13장은 가치와 절차,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서로 맞물리는 대목이다. 

 

  그 당시에 이 발씻김에 담긴 의미를 제자들은 미처 알 수 없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제자들은 물론 그분을 따르던 아나빔들까지도 혼비백산하여 흩어진 상황과 마찬가지였다. 종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아무 죄도 없이 사형을 언도받으셨으면서도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분의 최후를 아무도 납득할 수 없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을 받고 나서도 거의 한 세대가 흐른 다음에야 이 모든 의미를 ‘자기비허(自己卑虛)의 신성(神性)’이라고 깨닫고 ‘그리스도 찬가’로 알려진 신앙고백을 해 낼 수 있었다(필리 2,6-11). 신자들의 ‘신앙 감각’이 발휘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려고 먼저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으시자 베드로는 극구 사양하다가 워낙 스승의 의지가 강하셨으므로 마지못해 발을 내밀었는데,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도 무책임한 장담으로 스승을 만류하다가 그만 자신의 배신을 예고하는 엄청난 말씀을 듣고 말았다.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라는 말씀이 그것이었다. 베드로가 돌발적으로 저지른 이 두 번의 행동은 그를 계승한 후대의 숱한 베드로들 역시 상호 섬김의 행동강령을 올곧게 지키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될 교회 역사의 의미심장한 암시였다. 

 

  그 당시나 후대에나 또는 지금까지도 이러한 시행착오가 되풀이되고 있는 이유는 부활을 막연한 미래의 사건으로 인식할 뿐 실제로는 현재 여기서 일어나야 할 절박성과 진정성을 갖추지 못해서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예나 지금이나 라자로 소생 사건을 여전히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 의해서 곡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절대로 미래의 막연한 사건으로 미루거나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불안한 미래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 주셨다. 부활을 미래로 미루는 자들은 섬기지 않는 자들이다. 

 

13.1. 세족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13,1-5)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13,1). 

제13장 첫 대목의 시작을 이렇게 시작하면서 요한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생(生)과 사(死),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사람들이 사는 곳과 하느님 계신 곳 사이의 구분을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인식을 그분은 지니고 계셨다. 그리하여 태초의 영원에서 하느님과 함께 계시다가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그분은 이제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셔야 할 때를 아셨다. 따라서 그분에게는 이 세상의 시점이 기준이 될 수가 없었고, ‘생’(生)이라든지 또는 ‘차안’(此岸)이라든지 하물며 ‘사람들’도 그분의 기준은 못되었다. 그보다는 ‘생과 사’, ‘차안과 피안’, ‘사람들이 사는 곳’과 ‘하느님께서 계신 곳’ 모두가 그분의 시야에 들어와 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인간의 길’이심을 전제하면, 생명의 장이 인성의 차원에 국한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만찬 때의 일이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13,2). 

공관복음사가들은 모두 이 만찬 때의 일을 보도하면서,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시며 남기신 말씀을 주로 다루었다(마태 26,17-30; 마르 14,12-26; 루카 22,7-23). 그 준비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다의 배신 예고,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신 성찬례 제정 절차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다룬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이 13,2의 짧은 문장 하나로 이 모든 절차 보도를 대체하고 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을 자세히 보도하였다. 왜 그랬을까? 

 

  요한이 복음서를 쓸 당시에는 이미 공관복음서들이 보급된 지 20년 정도 흐른 데다가 성찬례가 신자들이 모이는 주일마다 관례화되어 가고 있던 때였다. 따라서 요한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성찬례의 절차에 대해 중복해서 기록하기보다는 그 정신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을 더 느낀 것 같다. 그래서 공관복음사가들이 미처 보도하지 못한 사건, 즉 세족례 사건도 보충하여 기록할 겸 성찬례를 제정하신 이유와 스승의 당부를 중점적으로 보도하였다. 미사와 성체성사의 전례적 질서가 더욱 확립되어 있는 지금 이 시대에도 요한이 보도하고 있는 성찬례의 제정이유와 예수님의 당부는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형식 질서가 확고하게 확립될수록 정신 내용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 복음사가가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당신의 인식과 이에 따른 당부를 제자들에게 남기고자 하셨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 상호 섬김과 이 행동에 신비스럽게 감추어진 부활스런 영광의 가치와 의미를 각인시켜주고 싶으셨다. 그 행동 – 상호 섬김의 행동강령에 담겨 있는 공동합의성의 의미 – 이야말로 세상의 죄를 없애는 은총이 담겨 있는 성사임을 일깨우고자 하셨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방식이다. 

 

 상호 섬김의 윤리를 일깨워주는 세족례라는 이 표지가 왜 이토록 중요한가? 이집트 종살이에서 비롯된 파스카는 불칼을 들고 이집트의 모든 맏배를 죽임으로써 파라오가 지은 죄를 벌하시어 없애려던 천사의 지나가심을 뜻하였다(탈출 12,12-14). 천사의 지시대로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 양이나 염소의 피를(탈출 12,5) 문설주와 상인방(上引枋)에 바른 집은(탈출 12,7) 그 피를 본 천사가 거르고 지나갈 표지가 되었다(탈출 12,13).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새로운 파스카의 어린양으로서 자원하시어 피를 흘리고자 하신다. 그리고 파스카 축제의 이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로써 당신 피를 앞당겨 축성하시고는 이 포도주를 마시는 이들로 하여금 당신이 선택하신 이 십자가의 길을 따르겠다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게 하신다. 상호 섬김의 행동이 세상의 죄를 없애는 표지로서 은총의 효력을 지니게 되는 이치는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공동합의성으로 나타날 상호 섬김의 행동이야말로 불칼을 든 주님의 천사가 보고 나서 거르고 지나갈 구원의 표지요 보편적 파스카 신비의 핵심이다. 

 

  이 심오하고 중요한 가르침을 제자들이 잊지 말라고 예수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세족례까지 행하셨다. 이것이 새로운 파스카의 표지가 된 것이고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최후의 만찬 기사를 새롭게 쓴 것이다(요한 13,3-5). 아우구스티노와 대(大) 레오 교부도 이 만찬이 교회에 모일 신자들을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파스카의 만찬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주님의 세족례는 식탁에 앉기 전에 발을 씻는 일반적인 순서와 다른데, 이는 앞으로 일어날 더 영적이며 고차원적인 씻음을 암시한다(오리게네스). 유다가 그 자리에 앉고 함께 식사를 하였음에도 그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유다의 발을 씻어 주셨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의 배반은 그가 탐욕의 잠에 빠진 것처럼(암브로시우스) 하느님의 완전한 군장을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계셨다. 믿는 이들의 구원(요한 크리소스토무스)과 유다를 포함하여(아우구스티누스) 모든 것이 그분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오리게네스). 식사 후에 행해진 세족례는 이차적인 씻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오리게네스).”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먹이시는 분께서 사도들과 함께 기대어 식사하심으로써, 주인이 종들 가운데에서 친히 음식을 드셨다(세베리아누스). 그분의 모든 행동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는 종의 행동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먼저 겉옷을 벗음으로써 영광스러운 말씀의 지위를 내려놓음을 상징하시고는, 종이 하듯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기 시작하셨다 (오리게네스). 우주의 지배자(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께서는 종의 수건(아우구스티누스), 곧 고난의 수건(베다)을 들고 오직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방식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기 시작하셨으며(오리게네스), 뱀이 물어도 아픔을 느끼지 않도록 그들의 발꿈치를 닦아 주셨다(암브로시우스).” 

 

  “복음서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기 시작하셨다고 알려 준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는 더러워지지 않도록 그분께서 그들을 깨끗이 해 주셔야 완전한 씻음이다(오리게네스). 우주의 옹기장이께서 흙덩이인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다(로마누스). 이는 발만 아니라 몸 전체를 씻어 주신 것이며, 그로써 그들의 몸이 성화되었고 죽음이 씻겨 나갔다(이레네우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들 사이에 구분과 분열과 불화를 없애는 겸손을 가르치고자 스스로 당신을 낮추셨다(테오도루스). 이렇게 성화된 발은 피를 흘리거나 악으로 달려가는 데 재빠르지 않으며 오히려 복음으로 달려간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요한 13,3-5에서 교부들은 예수님의 세족례에 대하여,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면서도 스승으로서의 권위를 지닌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고 둘째 당신이 죽음을 당해도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임을 아시기 때문이라고 요한이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세족례는 성주간 성목요일 주님만찬미사 중에 거행되는 파스카 예식으로서 연중 전례 중에서 부활성야미사에 버금갈 만큼 매우 성대하고 거룩한 예식이기도 하거니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미사 봉헌의 의무와 권한을 동시에 수여받는 성직자들이 상호 섬김으로써 세상의 죄를 없애는 파스카 과업에 복무하겠다는 다짐과 그럼으로써 존재이유를 채우는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분의 메시지 그 자체이다. 

 

 이토록 중대한 의미를 지닌 최후의 만찬과 그 자리에서의 예수님에 대해서 교부들은 ‘파스카의 어린양’이 되신 의미를 담담하게 기술하며 부각시킨다. 

 

  “수난 기사는 파스카 축제 전에 시작된다(테오도루스). 파스카는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구하기 위해 바쳐진 파스카의 어린 양 그리스도의 예형이다(아우구스티누스).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온 교회를 위해 중재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그들의 복된 ‘파스카’를 준비하신다(大 레오). 이제 그분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왔다. 육화 때 당신을 비우셨던 그분은 곧 당신 신성의 충만함으로 돌아가실 것이다(오리게네스). 그분은 당신께서 곧 떠나실 이 세상에 남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당신께서 뜻하신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이루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끝’이신 그분은(아우구스티누스),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써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신다(베다).”

 

  요컨대 요한복음사가의 의도는 단순히 공관복음사가들의 성찬례 보도를 보완하는 정도를 넘어서, 성찬례가 형식상으로만 준수되지 않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수 있게 하는 그 정신을 일깨워준다는 의미에서 교회의 사활이 걸려있을 만큼 중요하다. 

 

13.2. 발을 씻어 주신 뜻: 상호 섬김의 윤리(13,6-17)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요한 13,6) 

예수님께서 몸소 삶으로 보여주기도 하셨고 제자들에게도 이를 배워서 계승하도록 발휘하신 평소의 리더십은 섬김의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것이었지만, 그런데 막상 스승께서 종처럼 발을 씻어 주시려는 모습이 영 낯설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13,6의 말씀처럼 이의를 제기했다. 

 

  그 당시에 다윗과 같이 강력하면서도 유능한 정치적 리더십을 예수님께 기대했던 이들은 많았다. 베드로나 나머지 제자들은 물론이요 당시 보통 유다인들도 그러했으며 이들 중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기적을 목격하고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들은 군중 역시 이러한 현세적 메시아관에 푹 빠져있었다(참조 요한 6,15). 그러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려는 스승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베드로를 나머지 제자들도 동조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면서 스승의 반응을 예의주시했을 터였다. 

 

 마르코와 마태오 등 공관복음사가들 역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수난 예고에 대해서 몹시 당황해 했음을 보도하고 있다(마태 16,22; 마르 8,32). 아무리 이 수난이  부활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 부활의 영광 따위는 수난 예고의 충격에 가려져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 같다. 공관복음사가들이 모두 빠짐없이 보도하고 있는 거룩한 변모 기사(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가 수난 예고와 이에 대한 제자들의 당황한 반응 직후에 일어나야 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 거룩한 변모 기사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일어날 현실이 시공을 초월하여 모세도 엘리야도 불려 와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3,7). 베드로의 엉뚱한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이면에 깔려 있는 간단치 않은 심중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발을 씻으려던 손길을 멈추지 않으시고 이렇게 타이르셨다. 그래도 베드로는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요한 13,8) 하고 완강하게 사양하고 나오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ㄴ)고 응수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스승의 발씻김이 황송하기는 했어도 그것으로 사제의 인연이 맺어진다는 말씀에는 화들짝 놀라서, 발뿐만 아니라 온 몸을 다 씻겨 달라는 염치없는 청원까지 주저하지 않았다(요한 13,9ㄴ). 이런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발씻김으로 나타나는 섬김의 표지는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어줄 정도로, 거꾸로 뒤집어 말하면 섬김의 거부는 스승과 제자의 연을 끊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교부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베드로는 육화의 의미를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겸손을 이해할 수 없었다(세베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그러나 발씻김은 교회의 삶에서 계속되는 성화의 신비다(암브로시우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그들의 발을 아름답게 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있게 하셨다(오리게네스).” 

 

  “발씻김을 성급하게 거절한 베드로의 태도는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미 예수님께 발을 맡긴 다른 제자들을 비난한 것과 마찬가지다(오리게네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그를 그 자신에게서 지켜 주신다(오리게네스). 주님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종은 낮은 것들 안에서 영예를 발견하는 신비(플라비아누스)와, 예수님과의 친교를 위해서는 성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주인의 시중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나 발씻김을 강력하게 거부했던 베드로는 그보다 더 강력하게 발을 씻어 주십사고 청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람이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는 한 번의 세례만 필요하고, 베드로는 이미 요한에게서 용서의 세례를 받았으므로 발만 씻으면 되었다(테오도루스). 이 씻김은 겸손과, 말씀을 통하여 정화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처럼 거듭되는 정화는 중요하다. 우리의 발이 이 세상의 오물과 쓰레기를 밟음에 따라 우리가 나날이 더러움을 타기 때문이다(베다). 주님은 창세기가 예언한, 발을 공격하는 뱀의 독을 씻어 주신다(암브로시우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그들 모두가 깨끗하지는 않다고 하신다. 사실 유다 같은 더러운 인간은 갈수록 더 더러워질 뿐이다(오리게네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팔아넘길 자의 발도 씻겨 주심으로써, 유다가 주님께서 씻어 주신 고마움을 십자가의 못으로 보답하여 스스로 벌을 불러올 때까지 오랫동안 그의 잘못을 참아 주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베다 교부의 말대로, 거듭되는 정화는 중요하다. 교회는 끊임없이 쇄신되어야 한다. 그 기준은 섬김의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리더십이다. 섬김으로 쇄신되는 것, 이야말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섬김을 기준으로 교회의 삶에서 계속되어야 할 성화의 신비요, 동시에 부활의 신비이며 생명의 신비임을 암브로시오 교부와 함께 확인한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신 앞에 무릎꿇고 발을 씻어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느닷없는 말씀에 승복하고 발을 내밀자,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다 예수님께로부터 발씻김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이 예식의 하이라이트라 볼 수 있는 다짐을 받으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2.14-15).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주님으로서 종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고 하신다(오리게네스). 스승으로서 그분의 목적은 제자들을 당신처럼 만드는 것이다(오리게네스). 주님이라는 그분의 칭호는 본성상 우주에 대한 권한을 지니신 그분의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주님께서는 먼저 씻어 주신 다음 가르치셨다(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명하시는 씻음이 그분을 따르는 이들 사이에서는 좀처럼 행해지지 않는다(오리게네스). 내가 다른 이들이 더러움을 씻어 줄 때 나 자신의 더러움도 씻긴다(암브로시우스). 발을 씻어 주는 행위는 그 본래의 성격상 겸손을 불러일으키며(아우구스티누스) 우리가 교만의 올가미를 벗어나도록 도와준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우리의 발꿈치를 공격하는 사탄의 교만을 무찌르도록 제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발꿈치를 겸손으로 무장시키신 예수님의 큰 겸손은 모든 이가 열심히 따라야 할 본보기다(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예수님은 아름답게 글자를 써서, 아이들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그 글씨체를 흉내 내게 하는 교사와 같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런 겸손은 매우 큰 힘을 지녔다(키프리아누스). 대부분의 주인이 종들에게 바라는 것과 정반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주인과 똑같이 되기를 바라신다(오리게네스). 예수님은 당신 종들이 한없이 겸손해져서 당신과 똑같아지기를 바라는 사랑 많은 주인이시지만, 종들과 사도들은 자기 처지를 잊고 무리해서는 안 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겸손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겸손은 몸소 실천해야 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당시에는 종이 주인의 발을 씻어주는 관습이 있었다. 그 지방은 기후가 건조한 탓에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샌달을 신고 다닌 발이 더러워져 있기 일쑤여서 위생상의 문제 때문에라도 발을 씻어야 했다. 자기 집을 방문한 손님들에 대해서는 주인이 우정의 표시로 발을 씻겨 주기도 했다(창세 18,4; 192; 24,32; 유딧 19,21). 이 풍습이 정결예식으로 발전하여 성전에 들어갈 때는 물론 사제가 제사를 지내기 전에도 두 손과 두 발을 씻도록 규정되어 있었다(탈출 30,19-20; 40,31). 그런데 이런 관습을 집에서 행할 때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종들이 도맡아 했다. 그런데 스승이신 분이 마치 종이라도 된 것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는 서로 발을 씻어 주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니 상호 섬김의 윤리가 되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이 이루어지던 때는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생애 최대의 중대사를 앞두시고 예수님께서는 아주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제자들과 식탁에 마주 앉으셨다. 그리고는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채로 영락없는 종 차림이 되어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낮출 비(卑). 이 밤이 지나면, 그분은 죄인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는 수난과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비울 허(虛). 이 비허의 수난이야말로 스스로 원하신 바였다. 그래서 자기비허(自己卑虛)를 구현한 모습으로 그분은 당신 생애를 마감하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가슴 속에 숨겨진 뜻이 제자들에게 알려지는 데에는 한참이나 걸렸다. 

 

  하느님께서 지니신 권능으로 숱한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뭇 사람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리셨던 예수님께서 너무나 무기력하게 체포당하시더니 빌라도 총독이 주재한  법정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다가, ‘유다인들의 왕’이 되려 했다는 어마무시하지만 황당하기 짝이 없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물론 그분을 믿고 따르던 유다인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얼마 후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이제는 사도가 되어 공동체를 시작하자 흩어졌던 이들이 모여들기는 했으나, 그분의 무기력한 최후에 대한 기억은 전능할 것 같이 기적을 일으키시던 모습과 좀처럼 겹쳐지지 않았다. 그러기를 십 년인가, 이십 년인가, 거의 한 세대가 흘러서야 비로소 최후의 만찬 식탁에서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주시던 모습과 십자가에 당신 몸을 내어주시던 모습이 합쳐지며 초대교회의 공동체에 모인 신자들은 쇠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깨달음을 집단적으로 얻었다. 그리하여 처음에 사도들에게 내려오신 성령께서 더디고 느렸지만 점점 더  확고하게 그리고 하나 둘씩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대다수 신자들에게도 집단적인 신앙 감각으로 깨달음을 줌으로써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 찬가’였고 자기비허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이었으니(필리 2,6-11), 그리스도교 역사상 집단적으로 나타난 최초의 신앙고백이었다. 

 

  신앙고백의 핵심 내용이 된, 제자들의 발 씻김을 마치고 나서 말씀하신 고별사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이었으니, 서로 섬기는 행동으로 이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당부하신 셈이다. 이 「상호 섬김의 행동강령과 사랑의 가르침」이 성체성사의 기반이 된다. 자기비허의 지향으로 행하신 세족례(洗足禮)는 이를 효과적이고 인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행동의 비유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스승이시면서도 마치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군중을 상대로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고자 일으키신 다른 기적들보다도 더욱 정성을 들여 제자들을 상대로 당신의 계시를 남기고자 행하신 행적이기 때문에, 이에 담긴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보는 일과 함께 그 뜻을 알아듣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상호 섬김으로 서로 사랑하려 하고 그로 인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 이것이 죽기 전에 부활하는 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라자로 소생 사건과 세족례 사이에는 깊은 인과관계가 있다. 죽기 전에 이미 부활하는 신앙을 라자로를 소생시키는 사건적 비유에서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실제로 제자들을 상대로 죽기 전에 부활하는 구체적 방식을 몸소 행동으로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13.3. 제자들 가운데 배반자가 나오다(13,18-30)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고 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 분명히 아셨다(오리게네스). 유다가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것은 그리스도의 잘못이 아니라 유다의 잘못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발꿈치를 치켜들며 그리스도께 대든 자인 유다는 자신을 지으신 분을 찬미할 줄 몰랐다(코스마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일러 주신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이 누구신지 제자들이 알아 그때까지보다 더욱 믿음이 커지게 하기 위해서였다(테오도루스).” 

 

  “예수님께서 보내신 이들이 사도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파견된 이들에게만 사도다. 이 사도들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맞아들이는 것이다(오리게네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보낸 이와 보냄을 받은 이의 본성이 같다는 사실보다 보낸 이의 권한을 강조하는 말씀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께서 마음이 산란하신 것은 유다와 우리 때문이기도 하고, 당신께서 곧 맞이하실 모든 시련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도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마음이 산란해 질 수 있음을 알려 준다(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의 산란한 마음은 당신께서 미리 아신 유다의 배반에 대한 분노로 이해할 수도 있다(테오도루스). 제자들도 마음이 산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심으로서 그들의 불안을 가라앉히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 

 

  이렇게 교부들도 배반자가 끼어 있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던 예수님의 착잡한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 그분이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행동으로 서로 섬기라는 행동강령을 강조하여 가르치셨지만, 그분은 제자들 가운데에도 이 행동강령을 위반하는 배반자가 나올 것을 알고 계셨음을 교부들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시편에 이미 경고되어 있던 말씀이 그래서 인용되었다는 것이다: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시편 41,10). 고대 근동 사회에서 윗사람과 식사를 같이함은 그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뜻으로 행해지곤 했던 관습이 었다(참조: 2사무 9,7.13; 1열왕 18,19; 2열왕 25,29).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같이 불길한 일을 막을 수는 없다고 여기셨는지 마음이  산란하기는 하셨어도(요한 13,21) 그 산란해진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시기보다는 오히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요한 13,19ㄴ)이라고 제자들의 마음을 다독거려주시며 부활하실 당신께서 제자들에게 함께 하실 분임을 일깨우시는 데에 더 마음을 쓰셨다. 비록 배반자가 나올지라도 나머지 제자들이 충실하다면 그 사태를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도 덧붙이셨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ㄴ). 즉, 파견하시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통해 파견된 이들이 이루는 영적 일체감을 통하여 악마가 배반자를 꼬여 획책하는 방해공작은 얼마든지 무산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표명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임박한 사태 – 제자의 배반과 이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할 사건 – 는 물론이요, 앞으로 후대의 교회 안에서 일어날 유사한 사태에 대해서도 영적인 안목으로 상황의 판세를 읽고 계셨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연상하게 된다. 농부라면 밀밭에야 당연히 늘 밀씨를 뿌리기 마련이지만 의도하지 않은 가라지의 씨도 끼어들게 마련이다. 밀밭에 일어나기 마련인 이런 자연현상이 공동체에도 어김없이 일어난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악마의 계략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계셨다. 그렇지만 수확 때가 되면 밀은 알곡을 영글게 하지만 가라지는 쭉정이만 남기 때문에 확연히 구분할 수 있게 되므로, 그때 가서 밀알은 수확하여 곳간에 넣고 가라지의 쭉정이들은 걷어 모아서 땔감으로 쓰면 된다는 가르침이었다(마태 13,24-30). 충실한 제자들은 밀의 알곡이요, 배반자는 가라지 쭉정이다.  

 

  같은 영적인 안목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맥락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즉위 후 반포한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부터 줄곧 기회가 될 때마다 현재 교회의 상황을 관찰한 바로 진단된 ‘영적 세속성’에 대하여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다. 영적 세속성이란 무엇인가? 

 

  “경건함으로 보이는 것 뒤에, 그리고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보이는 것 뒤에도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영광과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을 질책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영적 세속성은 ‘자기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필리 2,21) 교활한 한 방법입니다”(「복음의 기쁨」, 93항). 

 

  영적 세속성은 교회 구성원들을 내적으로 타락시킨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세속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고, 세상의 박해가 극심할 때에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지만, 영적 세속성에 지배당하면 안에서부터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노우재, “공동합의성과 영적 세속성”, 가톨릭평론, 2020 9/10). 그러니 세속화나 세속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이 교회 안에 침투한 영적 세속성 경향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배반자로 이스카리옷 유다의 이름을 거론하시는 과정은 몹시 조심스러워 보인다. 유다를 신임했기에 그가 당신을 배반한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고 그래서 혹시나 다시 돌아올까 싶어 기다리시느라고 그토록 뜸을 들이시다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싶은 결정적인 순간에야 거론하시는 것이라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요한 복음사가가 자신의 동료였다가 배반자가 된 유다의 이름을 자신의 복음서에서 보도하는 맥락은 어떠한가. 

  • 6,70-7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 이는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사실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머지않아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였다. 
  • 12,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 13,2: 만찬 때의 일이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 13,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6장에서는 악마로 소개했다가, 12장에서는 돈에 욕심이 많은 도둑 정도로 다소 완화시키더니, 13장에서는 절충점을 찾은 듯이 악마도 도둑도 아니며 단지 악마의 사주를 받아 하수인이 되어 버린 사람으로 두 군데 모두 묘사하고 있다. 앞뒤가 달라서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아마도 이는 요한이 유다에 대한 진실과 소문이 담긴 여러 전승(‘악마’, ‘도둑’ 등)을 끌어다 쓰면서도 나중에는 악마의 역할에 관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 되었다는 해석(13,18; 17,12; 18,9)을 내리기 위하여 위에서처럼 편집했을 것이다(김근수). 성경의 관점은 악마가 하느님께 적대하기 위하여 유혹을 하고, 욕심 따위로 그 유혹에 넘어간 자는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 하느님의 일을 막아보려 하지만, 이는 의인의 희생을 부르기는 하지만 종국에는 그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의 일을 더 키우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속셈을 눈치 채신 이후에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셨다(13,27).

 

  이 대목의 특징은 이스카리옷 유다라는 한 제자가 제자의 본분을 저버리고 배신 행위를 저질렀음을 기록하는 기능에 국한되지 않는다. 파스카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대단히 중차대한 이 상호 섬김의 과제에 있어서 후대의 역사에서 제2의 유다가 나오지 않도록 경계하는 의도로 썼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영적 세속성’은 이미 교회 안에 침투해 있는, 지극히 유다스러운 배반성향이다. 그렇다면 유다의 배반 행위에 대하여 교부들은 과연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비교해 보자. 

 

 “이 시점에서 요한은 복음 기사에 자신을 등장시킨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에서 이름을 밝히지는 않는다(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한 것은 언뜻 보기에 건방져 보이기도 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베드로는 예수님 가까이 있던 요한에게 고갯짓을 하여 더 자세한 내용을 여쭈어 보게 한다(오리게네스). 요한이 예수님과 더 가까이 있은 것은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은 것은 주님께서 요한을 비롯해 마음이 깨끗하여 하느님을 보도록 허락받은 모든 이를 사랑하고 훌륭하게 여기셨음을 나타내며(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이는 말씀께서 아버지 품 안에 계신 것과 견주어진다(오리게네스). 유다는 그곳에 있었고 빵을 나누어 받았지만 축복은 나누어 받지 못했다(시리아인 에프렘). 그가 받은 빵이 성사의 빵이었는지도 의심스럽다. 루카에 따르면 유다와 제자들이 빵을 받은 것은 성찬 전이었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를 꾸짖으셨지만 소용없었다. 사탄은 다른 이에게 속한 이를 유혹하는 대신 자신에게 속한 존재인(아우구스티누스, 암모니우스),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고 멸망으로 떨어진 유다를 손에 넣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탄은 그 선택을 확실히 해 주었다(테오도루스). 나중에는 유다도 그 선택을 후회했지만 희망을 잃어버리고 용서를 청하지 않았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적수를 싸움터로 불러내듯이 유다(또는 사탄)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하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 유다를 내보내실 때 제자들에게 그 이유를 밝히지 않으신 것은 베드로 같은 이가 그 자리에서 유다를 죽여 버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은 지나가는 투로 유다가 돈주머니를 관리했다고 기록한다. 이는 주님께서 교회가 기금을 마련하여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셨다는 것과 금고를 관리하느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아우구스티누스). 그 기금은 여자 제자들에게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며, 제자들에게도 기금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셨음을 알려 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유다가 나간 것은 그가 스승의 명령을 따른 몇 안 되는 경우 가운데 하나다(오리게네스). 그는 양 우리를 떠나 짐승들 가운데로 간다(로마누스). 유다는 어둠 속으로 서둘러 나가는데, 어둠은 바로 그의 영혼의 표상이었다(오리게네스).” 

 

  교부들은 유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하여 아무런 해석을 내놓고 있지는 않다. 다만 오리게네스 교부가 유다는 어둠 속에 있었다는 직관적 해석을 내리고 있을 뿐이다. 교회 안에서도 이 어둠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 종말 때까지도 어둠은 함께 따라다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진단과 선택에 유의해야 하고, 특히 라자로 소생 사건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각오까지 하시면서 부활 신앙을 일깨우고자 하셨던 그분의 처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13.4. 새 계명: 서로 사랑하여라(13,31-35)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인성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분은 수난과 죽음으로 영광스럽게 되며 그것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다(오리게네스).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 영광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온 세상의 믿는 이들에게 그분의 이름과 그분에 관한 지식이 알려지는 것을 통해 인지되기도 한다. 그것을 알게 된 믿는 이들은 그분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오리게네스). 여기서 유다가 나간 것은 밀과 가라지가 나뉘고 의로운 성도들만 남아 있게 되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때 일어날 일의 예시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성에 영원성이 주어짐을 뜻한다(아우구스티누스).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곧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테르툴리아누스).” 

 

  “예수님께서 영광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이 구절은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영광스럽게 되는 것만 아니라 부활 후 인성이 영원히 신성으로 변모할 때에 인성이 누리게 될 영광에 관한 말씀이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그렇게 볼 때 ‘이제 곧’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분께서 가장 영광스럽게 되시는 임박한 수난을 가리킨다(테오도루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광스럽게 된다는 말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풀이한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 13,31-35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가르침에 관한 한 묶음의 본문이다. 그런데 교부들은 요한 13,31-32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리라는 말씀에 주목하고 있다. 임박한 십자가 수난을 가리키는 이 말씀은 수난이 곧 영광스러운 부활의 관건이기에 나온 말씀이다. 그 수난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 결과로 초래된 것이기에 그러함은 물론이다. 이는 예수님을 본받아 수난을 겪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바, 수난이 영광이라는 것이야말로 수난의 영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수난의 영성에 입각하여, 최후의 만찬 기사에서 미사와 사제직이 제정되었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세족례는 제자들끼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라는 상호 섬김의 행동강령으로 이어지기에 이 상호 섬김이 주는 수난의 효과 내지 의미 역시 부활의 영광으로 빛나게 되리라는 교회 질서로 반영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동합의성의 구조를 기본으로 하는 교회의 질서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예수님의 선언에 비추어, 죽은 후의 부활이 아니라 이미 살아서도 누릴 수 있는 부활의 영광이란 사랑의 수난을 자원하여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자신의 원초적 근원으로 인식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 역시 성령의 선물로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주어졌음을 사도들은 인식하고 있었다(참조: 사도 4,33). 부활은 죽고 난 후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일이었던 것이다. 수난의 겉모습이 십자가의 비천함이지만 그 본질은 부활의 영광이듯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해 주는 상호 섬김의 행동 역시 겉으로는 분명 수난이지만 그 본질은 부활의 영광을 반영한다. 이런 영성적 의미를 전제하신 예수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당신 가르침의 핵심을 이제 전하려 하신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임박한 죽음을 암시하신다(오리게네스). 이에 제자들은 자신들이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더욱 깊이 깨닫는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들은 말씀과 지혜와 진리와 하느님의 권능을 찾듯이 그분을 찾고자 하며 그것들은 곧 그리스도다(오리게네스). 그들은 부활 뒤에 실제로 그분을 찾아 나서 결국 그분을 발견했지만 그때도 그들은 아직 그분처럼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테오도루스).” 

 

  “이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 새 계명은 실로 사랑의 노래에 바탕을 둔 옛 계명의 완성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아들딸들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촉구하신다. 그분 아들의 형제자매로서 우리는 서로를 하느님의 거처로 만들고자 노력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께서 촉구하시는 이런 사랑은 예전의 어떤 계명보다 멀리 나아간 것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 사랑은 의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서로를 더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그분께 속한 사람임을 보여 드리도록 불렸다(테오도루스). 이런 사랑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어떤 기적보다 더 확실히 세상에 보여 주는 위대한 표징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우리가 서로에게 이런 사랑을 표현함에 따라, 우리 안에 당신의 모습을 그리는 하느님의 예술적 솜씨가 환히 빛난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이 대목이 본격적인 고별사이다. 앞의 본문(요한 13,31-32)은 수난을 고통스러운 과정이라거나 목표했던 바의 실패라는 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영광의 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영광의 이유와 의미가 이제 요한 13,33-35의 고별사 본론에서 나온다. 

 

  고별사의 첫 부분은 고별에 따른 부재를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33ㄷ). 하지만 이는 성령으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정하신 섭리적 방식이다. 그래야 육신을 제약하는 시공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믿는 이들과 함께 하실 수 있다. 그리고 성령으로 나타나실  그분의 현존을 위해서도 제자들은 스승이 보여주었듯이 성령의 터전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새 계명으로 주어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ㄴ). 

 

  복음사가 이전에 직제자 출신으로서 요한은 이 점에서 다른 공관복음사가들을 넘어섰다. 왜냐하면 마르코와 마태오와 루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으로 십계명을 간추리고 대체하셨다고 보도하였다. 계명 열 가지가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단지 이 두 계명이 서로 떨어진 관계가 아니라 둘 다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보도함으로써,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단일성을 강조하기는 했다. 그런데 요한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새롭고 유일한 계명으로서 “서로 사랑하여라.”는 가르침 하나만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공관복음사가들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즉 인간 사랑을 형식적으로만 결합시키고자 했다면, 요한 복음사가는 인간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음을 일깨워줌으로써 내용적으로 결합시키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을 세상에 현존시키는 유일한 길임을 덧붙이셨다. 이는 마태오가 산상설교의 첫 머리에서 소개한 바와 일맥상통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5-16). 그저 ‘착한 행실’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아보게 하라던 가르침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아보게 하라는 가르침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요한 13,35). 이는 결국 예수님께서 그 사랑을 가르치신 장본임이심을 전제하면서 또한 사랑이신 하느님과 꼭 빼닮으신 존재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보도(마태 5,13.15-16; 요한 13,35)가 모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되며,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탈출 20,4)고 우상숭배 를 엄히 금지했던 십계명을 넘어서서, 본격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느님을 현존케 해 드려야 한다는 적극적 계명이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여기에 담겨 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교회 질서에 반영하는 공동합의성의 구조가 얼마나 중요한가!

 

13.5.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13,36-38)

  “예수님께서 당신의 떠나심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신  베드로는 따라가려는 마음을 먹지는 못하고, 아직 따라가지 못하는 이로서 묻기만 한다(암브로시우스).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따라 걸을 준비가 된 이들만이 끈기 있게 따라갈 수 있다(오리게네스). 따라서 우리는 가장 극심한 시련에 들었을 때도 그 길을 따라갈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분이신 성령의 권능에 의지해야 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베드로의 용감한 단언은 나중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헛말이 되었지만, 우리를 죽이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도 한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도록 두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베드로는 따라야 할 시점에 이끌려고 함으로써, 자신이 이를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한다(아우구스티누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이 예수님을 지키는 것임은 알았지만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아우구스티누스). 나중에 베드로가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용서받은 사실은 우리가 실수했을 때 위로가 된다(베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함으로써 죽지만 눈물로 살아난다(아우구스티누스). 그 눈물은 그분이 진정 누구인지 깨달은 데서 나온 눈물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말씀은 복음서 여러 곳에 여러 형태로 전해지지만 서로 모순되는 내용은 없다(아우구스티누스, 테오도루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요한복음에는 성체성사 제정에 관한 최후의 만찬 기록이 없다. 그리고 그 까닭은, 공관복음사가들이 모두 최후의 만찬 보도를 통해서 매우 중요하게 성체성사 제정에 관한 기록을 남긴 데 비해(마태 26,17-19; 마르 14,12-16; 루카 22,7-13), 요한복음사가는 이 기록들을 전제로 「사랑의 가르침과 상호 섬김의 행동강령」, 그리고 이를 상징하는 발씻김 예식에 대해서 보도함으로써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의 뜻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그것이 이 제13장인데 이는 아마도 직제자 출신으로서 요한이 기억하고 있던 가르침과 발씻김 예식에 관한 보도로 공관복음사가들의 기록을 보충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또한 이미 요한복음서의 독자들이 공관복음서의 성체성사 보도를 알고 있는 터여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진 그 사실 보도보다는 더 중요하다고 본 그 정신 – 사랑에 대한 가르침과 세족례에 담긴 섬김의 정신 - 을 마땅하게 강조해야 할 필요가 더 있었을 수도 있다. 

 

13.6. 13장의 종합: 섬김과 배신, 가르침과 부인

 

  아무튼 이렇게 제13장을 편집하여 보도하고 있는 요한복음사가의 뜻은 명백하다. 이미 알려져 있는 공관복음서의 보도와 새롭게 보충하고 있는 요한복음서의 보도를 종합하여 볼 때, 예수님께서 생의 마지막에 최후의 만찬을 드시면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뜻은 공생활을 통해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신 활동을 제자들에게 계승시키려 함이셨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네 복음서의 보도를 종합적으로 보아 성체성사에 담겨 있는 신학적인 뜻을 간추려보자면, 그 선결적인 필요조건이란 이 성사를 거행하는 제자들이 서로 섬기는 행동양식을 갖출 것이 요구되는 것이요, 또한 성체성사가 목표로 지향하는 충분조건이란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신앙인 모두가 성령께서 이끄시는 거룩한 변화에 순명함으로써 결국 파스카 과업이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조건에 담긴 함의(含意)와 함께 요한 복음사가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였는데, 이는 성체성사의 선결적 필요조건이나 지향적 충분조건을 채우는 길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제13장의 메시지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ㄱ)이라고 현재형으로 선언하시던 예수님의 생활양식을 따라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도 부활과 생명의 생활양식을 계승하게 하는 영광스러운 초대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사랑과 섬김으로 살아간다면 단지 죽은 다음에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살아 있는 여기서부터도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 이 가르침과 예식으로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메시아만이 전할 수 있는 기쁜 소식이 아닌가!

 

  이제 부활의 관건은 죽었다가 육신이 다시 소생하는 것도 아니며, 죽고 나서 언제인지 모를 종말에 영혼이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가는 것만도 아니게 되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죽기 이전에 영적인 몸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현재화(現在化)」인데, 현재에 일어나는 영적인 몸의 부활이야말로 이 제13장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진리의 발전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죽은 후에 부활하리라는 진리도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확인해 주셨거니와, 이에 그치지 않고 죽기 전에라도 부활의 경지에 들어가서 살 수 있음을 먼저 보여주신 그분이 성체성사를 제정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도 이 「죽음 이전의 부활」이라는 경지를 계승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제자들에게 발현하셨다. 그분의 발현을 체험할 수 있었던 이들은 몇몇 여인들과 제자들을 비롯한 소수의 초대교회 신자들뿐이었고 그 수는 아주 많이 잡아도 오백 명을 넘지 않는다(1코린 15,6). 그리고 이 발현체험은 두 번 다시, 더구나 불특정 다수에게 반복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섭리적 안배로서 예수님의 인성 안에로 하느님이 강생하셨던 그 당시에만 가능했던 특별한 은총이다. 「죽음 이후의 부활」이라는 전통적 신앙 진리가 드디어 예수님으로부터 가능해진 현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은총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 이 신앙 진리를 신약성경이 정경화 작업을 거쳐 모든 사람의 손에 지워져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발현체험 역시 반복될 필요가 없고 그보다는 오히려 「죽음 이전의 부활」이라는 신앙 진리 본연의 가신성(可信性)이 입증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로 하여금 상호 섬김으로 서로 사랑하는 실천과  이를 통하여 파스카 과업을 지향하는 성체성사의 생활양식이야말로, 죽기 전에도 미리 영원한 생명을 사는 부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안배하신 ‘진리와 생명의 길’(요한 14,6)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아무도 부활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부활하시어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신 것이다. 「죽음 이후의 부활」이라는 전통적 신앙 진리가 현실성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과 달리 많은 신앙인들도 이 부활 신앙은 진리로 믿고 받아들인다.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 뵈온 증인들의 증언이 신약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일차적이고 종교적인 복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셨다. 그 걸음이란 그분이 죽기 이전 공생활 당시에 선포하신 메시지에 충실하게 주목하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재에 요청되는 부활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이차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복음이고 단순히 기복신앙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생활로서만은 누릴 수 없고 예수님을 본받으려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에서만 가능한, 그래서 종교생활을 넘어서는 신앙적인 복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 신앙 역시 그분이 나아가신 저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 나라와 영원한 생명이 죽음 이후에 가능해졌다고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다가왔다고 현재완료형으로 선언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살고 있지도 않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도 아니다. 당신이 이미 생생하게 살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펼쳐 보이시고 그 복음을 듣고 있던 군중을 초대하신 것뿐이다. 그 삶이 바로 부활의 생명이다, 죽음 이전에도 이미 가능했던 부활! 이것이 부활 메시지의 현재화이다.  입증되기 어려운 죽은 뒤의 어느 시점으로 미루어두는 것이 아니라(이를 ‘종말론적 유보’라 한다. ‘값싼 은총’이라 자리매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증거되는 부활의 힘(이를 ‘부활 신비의 강생화’라 부를 수 있다. ‘귀한 은총’이라 자리매김해야 한다), 이것이 메시아 신앙이다. 그래서 그분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요한 11,25-26)이라고 말씀하셨고, 이것이 ‘진리’요 ‘생명’이며 모든 이들이 인간으로서 나아가야 할 ‘길’(요한 14,6)이라고 역설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조건이 성체성사에서 선결되어야 할 필요조건과 지향해야 할 충분조건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서로 섬김과 영원한 생명의 파스카 과업으로! 그리하여 살아서도 생명으로 충만한 진리의 삶이 부활의 삶인 것이요, 이는 간단히, 예수처럼 사는 것이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이전에 이미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뜻은, 부활이 죽음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는 것이다. 십자가 죽임을 감행할 수 있는 행동의 동기가 이미 부활해 있는 존재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이런 존재와 그 의식이 아니라면 십자가 죽임을 받아들이는 선택은 감행할 수 없다. 교회의 사목과 선교 활동뿐만 아니라 개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의 성패가 이 부활 신앙에 달려 있다. 죽기 전에 이미 부활을 산다는 것은 죽기 전에도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산다는 뜻이다. 부활이란 하느님 나라에서 거듭 태어나는 삶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그러하셨듯이, 당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기를 가르치셨고 염원하셨다. 그 가르침의 요약이 주님의 기도에 담겨 있다. 실로 하느님 나라의 삶, 부활의 삶은 십자가 죽임을 받아들인 결과로 얻는 보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제자들이 스승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두려워한 까닭은 부활 신앙이 약했거나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었고, 사도들이 스승의 길을 따라 선교와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을 받은 후에 부활 신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앙인들은 세례 때에 영적인 몸이 탄생한다. 그리고 신앙으로 이 영적인 몸이 성장한다. 예수님을 따라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마다 그분을 닮은 모습으로 성숙한다. 그 성숙의 단계적 계기를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로 마련해 주신 것이고, 이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 신앙인들은 부활에 초대를 받는 것이다. 거룩한 변화를 기약하는 부활이요, 성령의 이끄심에 순명해야 이루어지는 거룩한 변화이다. 살아서 이루어지는 이 신앙의 신비를 우리는 미사 때마다 환호하며 미리 경축한다. 그리고 삶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죽으면 그 영적인 몸이 완전히 부활하여 살아서 부분적으로 누리던 영원한 생명에 온전히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생활양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상이 제13장 본문이 제시하는 메시지인데, 형식과 구조로 보면 서로 발을 씻어 주라는 섬김의 윤리에 이어 유다의 배신이 예고되고,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이어 베드로의 부인이 예고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상호 섬김으로써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리로 계시된 데 비해, 후대의 교회 실천에서도 이 진리를 배신하거나 부인하는 엇박자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적 세속성과 권위주의와 같은 성직자들의 일탈 행위라든가, 대량 냉담이나 현실 도피적 경향 같은 평신도들의 일탈 행위에 대한 경고가 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 같은 현상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비추어 보면, 가라지에 해당하는 요소들이다. 따라서 함부로 가라지를 뽑으려 들지 말고 밀을 잘 가꾸어 수확 때에 즉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분의 심판에 맡겨 놓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서도 이 제13장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네 현실에 비추어 새삼 강조할 것은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교회’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잉태한 공동체인 것이다. 

 

13.7.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교회  

그리스도 신앙의 기반이요 핵심은 부활 신앙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주류로 행세했던 바리사이들도 부활 신앙을 지니고 있기는 했으나, 이들의 부활 신앙은 죽은 후에 개별 영혼들이 종말에 다시 살아난다고 믿던 수준이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예수 이전의 부활 신앙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이 제법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전통적인 부활 신앙은 교회의 신앙이라기보다는 개별 신자들의 종교적인 희망사항에 가깝다. 이런 종교 인식의 문제는 이런 개별적인 부활 신앙, 죽음 이후로 미루어두는 부활 신앙은 도무지 입증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런 수준의 부활 인식이라면 별다른 노력이 없이도 이루어지는 자연 현상 같은 것이어서 굳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필요도 없었고, 이것이 그분이 선포하신 복음도 아니었다. 또 다른 문제는 이런 식의 종교 인식으로는 절대로 세상이나 사람이 변화되기 어렵다는 점에 있었다. 죽기 전에 부활하는 신앙이라야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것이고, 이런 신앙이라야 당사자와 세상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어서 말 그대로 복음일 수 있는 것이다. 

 

  상호 섬김의 이 행동강령은 죽기 전에 부활하는 신앙의 잣대가 되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교회 쇄신에 관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연구한 국제신학위원회의 용어로 풀이하면 ‘공동합의성’이다. 그러니까 서로 발을 씻어주듯이 섬겨야 하는 대상은 본격적으로는 예수님을 따라서 교회 바깥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어야 하겠지만, 이를 위해서 우선은 교회 안에서 서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자면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여 공동으로 합의하여 교회를 운영하라는 것이다. 종교적 군주제의 구조로 가톨릭교회를 인식하는 이들이 대다수인 오늘날, 이 같은 봉건적 유습을 타파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사도적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이 공동합의적 구조로 교회를 쇄신하는 ‘새 복음화’에 달려 있다. 

 

  교구나 본당, 또는 수도 공동체나 사도직 공동체든 어디에서나 신앙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공동합의적 구조로 새로워져야 할 교회의 장애가 존재한다. 하나는 주교나 장상, 또는 책임자의 독재로 인해 획일적인 전체주의적 지배가 나타날 수 있는 위험성이고, 다른 하나는 구성원들이 주체적으로 판단하거나 책임있게 행동하지 않아서 수동적으로 맹종할 수 있는 개인주의의 위험성이다. 대개 이 두 경향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되어 있다. 구성원들이 저마다 복음적인 의식과 행동에서 주체적이고 성숙해야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수 있고, 공동체를 위한 섬김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으며, 부활 신앙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실로, 새 복음화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과 가톨릭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다. 즉, 참됨의 가치로서 진리를 추구하고, 올바름의 가치로서 정의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새 복음화인데, 이는 필연적으로 희생을 초래하게 되어 있고 교회는 이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동일한 십자가로 인식한다. 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힘이 부활 신앙이다. 또 당연히,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은 자유를 수호하고 평화를 실현하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 진리와 정의, 자유와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셨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나라의 선으로서 최고선이기 때문이다. 새 복음화는 이러한 최고선의 가치들을 선포함에 있어서 베드로와 베드로들이 저지른 시행착오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공의회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상호 섬김이라는 자기비허의 십자가가 바로 여기에 요청되고 있다. 이것 없이는 공동체가 성립할 수 없고, 공동체 없이는 부활도 하느님 나라도 나타날 수 없다. 

 

  부활 신앙은 죽기 전에 부활하는 신앙이요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힘이 바로 그 신앙에서 나온다. 그래서 부활 신앙은 십자가의 신앙이기도 한데 또한 교회의 신앙이기도 하다. 죽기 전에 부활하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일은 개별 그리스도인들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질 수 없다. 예수님께서 죽기 전에 부활하는 생명이심을 천명하신 상황도, 당신 혼자서가 아니라 제자들은 물론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상황에서였고, 특히 제자들이 당신과 같은 믿음을 지니기를 촉구하시고자 라자로가 위독했을 때 굳이 임종하기를 기다리신 후에 다시 살려내시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고 나서 바로 이 상황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현재시제형 문장으로 선언하신 것이다. 즉, 부활은 개인의 영성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하지만 이와 함께 우리가 맺는 관계와 공동체 안에서도 실천으로 나타나야 할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나타나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13장에서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소생시키시며 제자들과 당시 유다인들에게 일깨워주고자 하셨던 부활 신앙과 그 메시지가 중요한 것이다.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의 권능은 바로 이 부활의 생명에서 나온 신적 능력이었다. 이 메시지를 믿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소생시키셨고, 이로 인해 죽임을 당할 위험까지도 기꺼이 각오하신 것이다. 다행히 라자로의 동생 마르타와 마리아는 이 말씀을 믿게 되었으나,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이 라자로 소생 사건으로 군중이 그분을 메시아로 추대하여 봉기를 일으킬 염려가 커지자 그분을 제거하려 들었고,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은 군중대로 그분을 현세적 메시아로 삼아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기회로만 여겼다. 이에 비해 제자들은 이도 저도 아닌 처지에서 스승을 따랐으나, 결국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그들에게 다시 발현하시고 그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해 주신 연후에야 그 말씀을 믿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유독 제자들에게만 발현하시고 다른 이들에게는 발현하시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고 보인다. 전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군중은 종교심의 발로로써만 하느님을 믿었던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이 종교심을 넘어 부활에 대한 신앙심을 지닐 수 있도록 당신의 생애를 건 모험을 감행하신 것이다. 실질적으로 오늘날 시대의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발현하시는 양식은 성체성사이다. 부활에 대한 신앙심과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영성체를 통해 십자가를 짊어질 기운을 얻으며, 주님과 함께 세상에 나아가 부활한 삶을 증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이전 상태에 머물고 있는 종교심을 넘어서야 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살아가셨던 바를 기준으로 부활 신앙을 살아가도록 신앙인들부터 복음화되어야 한다. 즉, 서로 섬김으로써 증거하는 형제애가 부활 신앙이다. 부활 신앙에 의한 새 복음화 없이는 세상을 복음화시킬 수 없다. 이것이 요한복음 제13장의 메시지인데, 이를 실천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교회 문헌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2014)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삶과 사명에서의 공동합의성」(2018)이다. 이 두 문헌 모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한 교회 쇄신의 여정을 마무리하고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국제신학위원회에 지시하여 수 년 간의 연구와 토론 작업 끝에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제시한 교회의 삶과 사명에 관한 가르침이다. 문헌의 제목이 표현하듯이, 이 두 문헌의 내용은 가톨릭교회의 정체성을 다루고 있다. 이제껏 다룬 요한복음 제13장의 가르침을 빌어 다시 표현하자면, 죽기 전에 부활하는 길을 제시한 가르침인 셈이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13. 죽기 전에 부활하는 길을 알려주신 예수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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