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12. 두루마리의 메시지 I(묵시 17,1-18,24)
요한은 예언자로서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큰 능력을 지닌 다른 천사’(묵시 10,2)의 손에 들린 작은 두루마리를 받으라고 하는 명령을 들었다. 이 두루마리는 세상 종말에 실현될 하느님의 숨은 계획에 대한 예언을 상징한다(묵시 10,11). 이제 그 메시지가 제17-18장에서 ‘바빌론에 내릴 심판’으로, 제19장에서 ‘승리의 노래’로 밝혀진다.
24.3.12.1. 대탕녀 바빌론(묵시 17,1-5)
옛 로마는 탕녀였다. 하느님을 배반했고 다른 민족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우상 숭배를 따라 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뿐만 아니라, 도미티아누스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이르는 로마의 황제들과 원로원은 성도들의 피를 흘리게 한 죄를 지었다(빅토리누스). 그러나 옛 로마는 예전의 세력을 잃었고, 앞으로 옛날의 지위를 되찾는 일은 없을 듯하다. 그러므로 이 탕녀는 종말에 단죄를 받을 지상의 나라들을 총칭하는 말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타락한 이들의 무리를 ‘탕녀’라고 이르는 것은 참으로 적절한데, 그들은 마귀가 자신을 강탈하도록 내버려두었으며 창조주께 버림받았기 때문이다(프리마시우스, 베다). 그들은 사악함으로 인해 더럽고 불경에 빠져 미쳤으며, 그 저지른 죄가 엄청나 ‘대탕녀’라고 불린다(프리마시우스). 그러나 믿는 이들은 한 남편과 약혼한 사람들이며 깨끗한 신부로서 그리스도께 바쳐진다(베다).
그 여자가 마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살인자인 것(빅토리누스) 그리고 역시 살인자이며 성도들의 피로 진홍색인 마귀를 타고 있는 것(오이쿠메니우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언제나 어린양과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는 짐승을 탄 그 여자는 주제넘은 오만에 빠져 우쭐대는 자로서 그 위에 앉아 있으며(프리마시우스), 악마와 마찬가지로 피를 좋아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에서 악마의 협력자가 된 자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낙원에 들지 못한(프리마시우스) 그 여자는 광야에 있는 것으로 목격되는데, 이는 하느님께 버려지고 영혼이 죽은 자들과 그가 함께 있다는 뜻이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짐승은 자신이 세상의 지배권을 지니고 있다고 내세우며 그래서 믿는 이들을 드러내 놓고 공격하고 거짓 진리로 그들을 유혹하려 한다. 그리스도의 적이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며 모방과 거짓과 사기로 인류를 유혹하는 것보다 더 이 나라의 가짜 권세를 드러내 주는 것은 없다. 자만에 빠진 이 더러운 영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성령, 곧 지혜와 식별과 지식과 하느님을 경외함의 영을 주신다(프리마시우스). 악마와 그리스도의 적의 나라는 마치 부요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듯 보석과 금으로 치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가짜다. 그 나라는 겉치레와 눈속임 장식물(티코니우스), 우상 숭배와 더러움(오이쿠메니우스)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 탕녀는 자기의 불륜을 퍼뜨리고 싶어 하며, 자식들을 낳아 어미가 됨으로써(오이쿠메니우스), 하느님께서 역겹게 여기시는 죄들을 낳는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베다). 그러므로 정결하고 정숙한 처녀들은 탕녀 같은 꾸밈과 탕녀 소굴의 표지인 화려한 장식물들을 멀리함으로써 자신의 신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키프리아누스).
24.3.12.2. 세상의 모든 권세를 차지한 짐승(묵시 17,6-18)
살해와 유혈을 좋아하고 세상 나라의 권세를 지닌 모든 도성은 이런 탕녀와 같다. 이는 옛 로마와 새 로마, 그리고 페르시아에도 해당하는 말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런 도성들은 교회를 적대하며 한뜻이 되어 안팎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한 몸의 부분들이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악마인 짐승은 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그가 ‘있었다’는 것은 세상이 생기기 전 그가 아직 하느님을 거슬러 오만하게 행동하지 않았을 때이고, 그의 불경과 종말 때 그를 불속으로 보낼 하느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 그는 ‘지금은 없는’ 존재다(오이쿠메니우스). 그는 그가 강력했던 때인 십자가 이전 시대에도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 그는 ‘없다’. 그가 권한과 권세를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베다). 필경 악마는 이 현세의 삶이라는 지하에서 그리스도의 적이 그 깊은 죄를 짊어지고 일어나 나올 종말(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적에게 속아 넘어간 자들이 부정한 경배로 그를 찬양할 때(오이쿠메니우스) ‘올라올’ 것이다. 한편 악마의 도성도 ‘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세대가 오고 가는 동안 사악한 자녀들이 사악한 부모의 뒤를 이어 그 행실을 따라 하기 때문이다(프리마시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종말에 짐승이 올라오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을 알지 못하는 많은 이들은 악마가 예전의 힘을 되찾은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짐승이 파멸로 떨어지면, 그를 믿었던 자들은 그가 권능을 빼앗기고 갑자기 무너진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이들은 짐승이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놀라움 속에서 우리의 그리스도야말로 참된 재판관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프리마시우스). 악마가 올라오면 그분의 심판이 뒤따를 것이므로 지혜와 영적 분별이 요구된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짐승의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다. 이는 로마를 나타내는데, 로마가 일곱 언덕에 자리 잡은 도성이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일곱 산은 니네베의 아시리아인로부터 새 로마의 왕권까지 이어져 온, 특출나게 강력한 나라들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일곱 머리는 또 일곱 임금이다. 이는 안식의 일곱째 주가 뒤따르는 현세의 여섯 주간을 가리킬 것이다(히폴리투스). 그러나 일곱 임금은 세상 주권이 지속되는 기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는데, 그리스도의 적인 시대인 마지막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베다). 일곱 임금은 또 실제의 임금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일곱 임금은 갈바로부터 네르바에 이르는, 묵시록이 쓰인 기간에 다스렸던 일곱 황제(빅토리누스)이거나, 박해를 특히 심하게 했던 일곱 명의 로마 황제(오이쿠메니우스) 또는 아시리아로부터 새로운 로마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일곱 왕국의 첫 임금들을 가리킬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우리는 이 짐승이 마치 임금처럼 우리의 오감을 좌우하고 다스리며, 악령이 최후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인 지금 많은 이를 오류 속에 가두어 놓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프리마시우스). 짐승은 일곱 임금과 한 부류다. 모든 박해자 뒤에 숨은 조종자가 바로 그이며(오이쿠메니우스), 그들과 악을 함께 나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프리마시우스). 한편 짐승은 여덟째 임금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그가 세상을 속이고 황폐하게 만들기 위해 이 일곱 임금의 뒤를 이어 나올 것이며(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들 누구보다 더 큰 위선을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프리마시우스).
짐승에게 난 열 개의 뿔도 열 임금을 상징한다. 이 임금들은 종말에 그리스도의 적과 맞서기 위해 일어날 것이다. 그들은 로마를 향해 동쪽에서 진격해 올 소생한 네로에 맞서 로마에서 진격해 나올 것이다(빅토리누스). 그러나 이 임금들은 아주 짧은 기간만 다스리게 될 터인데, 그들이 곧 그리스도의 적에게 항복할 것이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이 짧은 기간 동안에 세상 나라들의 오만과 허세는 더욱 맹위를 떨칠 것이다(프리마시우스, 베다). 열 임금은 ‘임금으로서’ 권한을 차지한다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항하기 때문이다(베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선민들 안에서 지금도 승리하고 계시듯이(프리마시우스),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으로서 소유하고 계신 나라를 당신의 선민들과 함께 나누시기 위하여(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열 임금을 그리스도의 적에게 내주어 죽게 하실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놀랍게도, 이 탕녀는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임금들과 그리스도의 적에 의해 황폐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악마와 그의 추종자들을 당신 응보의 도구로 사용하시어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불경한 자들의 마음에 알려 주실 것이며(프리마시우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버린 그 도성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아마도 로마는 전쟁의 참화로 황폐해지고 승리의 전리품으로 넘겨지고 말 것이다(오이쿠메니우스).
그러나 지금도 많은 이가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 방종에 빠지고 욕정에 가득 차며 성도들에게 박해를 가함으로써 삶을 망치고 있다. 이런 사악한 사람들은 세상을 황야로 만들며(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그들은 황폐한 도성의 폐허와 같다(베다). 물이 술에 합해지듯 지금 성찬의 잔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우리를(키프리아누스) 저 위 예루살렘에서 우리와 함께 기대어 먹고 마실 분께서 구해 주시어, 우리가 그런 무서운 일을 당하지 않게 되기를!(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24.3.12.3. 바빌론에 대한 심판(묵시 18,1-24)
하늘의 거룩한 존재들은 별보다 더 빛난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하늘에서 온 이 천사는 그 자신이 곧 ‘빛’이며, 그의 도래는 그 지혜의 참빛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거짓 지혜를 물리친다(프리마시우스). 이 지혜가 지금 교회의 설교자들을 통해 땅을 환히 밝힌다(베다). 천사가 공개적으로 바빌론의 파멸을 선언한다(오이쿠메니우스). 전에 이사야가 바빌론이 키루스에게 멸망당할 것을 예고했듯이(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베다), 지금 이 천사는 거만하고 방종하며 사악한 모든 자가 사는 도성의 멸망을 고지한다(아를의 카리사리우스). 악마의 도성인 바빌론(베다)은 온갖 불순한 영과 더러운 영혼으로 가득 차 있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자기 죄의 무게에 눌려 무너진 바빌론(프리마시우스)은 인간을 미워하나 인간의 피는 좋아하는 마귀들의 소굴이 된다(오이쿠메니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무너진 도성은 온갖 죄, 특히 탐욕과 방종과 폭음폭식의 죄가 만연한 곳이다(프리마시우스). 그곳에서는 많은 이가 만족을 모르는 탐욕과 돈에 대한 사랑으로 타락한다(오이쿠메니우스). 일시적 풍요를 위해 자기 영혼을 파는(프리마시우스) 그 도성의 주민들은 죄에서는 부유하나(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몰인정하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오래 전 롯이 죄 많은 소돔에서 달나났듯이(오이쿠메니우스)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세상의 죄에서 달아나야 한다(오이쿠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땅의 것만 사랑하는 바빌론에서 달아나는 것은 방탕하고 사악한 삶의 방식을 버리는 것이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그리스도의 소박하고 고요한 구유를 찾아 세상의 부와 아첨을 버리는 수도승과 동정녀들이 바로 그렇게 하는 이들이다(히에로니무스).
하느님께서 당신의 선하심으로 인하여 참회자가 받아야 할 벌을 줄여 주신다면, 그것은 이중 축복이다(오이쿠메니우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이교인의 도성은 자기 행실에 대해 갑절로 벌을 받는다. 그 도성은 교회를 박해했지만 지금 그 도성의 우상들은 깨져 나뒹굴고, 질책의 말씀이 과거에 그 우상들을 섬겼던 자들을 슬픔으로 몰아넣는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자만에 빠져 회개하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은 마치 ‘하루 사이에’, 갑자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아프링기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한때의 기쁨에 목을 맨 죄로(프리마시우스, 베다) 그들의 육체와 영혼은 영원한 고통에 처해질 것이다(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베다). 이런 운명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다. 그분은 강력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이들을 그런 재앙에서 지켜 주고 싶어 하시기 때문이다(오이쿠메니우스, 프리마시우스,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러나 육욕적이고 육감적인 이 세상의 쾌락이 끝날 때(아를의 카이사리우스, 베다), 죄인들은 갑작스런 변화에 무서워 떨 것이며(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자신들의 희망이 무너지고 다른 이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빠질 것이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그때 불경한 자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참회뿐이다(베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슬픔에 잠겨 울며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할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통회하는 이들은 결실 있는 속죄를 통해 신앙에 귀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회개한 이들은 기쁨에 찰 것이며(프리마시우스)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원수가 응징받을 때 모든 의로운 이의 영혼(오이쿠메니우스)과 모든 천사와 함께 환호할 것이다(아프링기우스, 오이쿠메니우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세상 종말이 오면 기뻐하라고 가르치셨다(베다). 그래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사악한 자들이 응징받을 때 기뻐하지만, 그것은 죄인들이 고통받아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죄에 종지부를 찍으셨기 때문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그런즉, 카인이 자기 동생의 피로 세웠고 종말에 성도들을 박해했던 탕녀 도성(아를의 카이사리우스)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돌이 눈앞에서 사라지듯 갑자기 사라질 것이다(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스, 베다). 교회는 유혹과 박해의 온갖 파도를 이겨 내며 무거운 돌처럼 굳건하게 안정되어 서 있다(베다).
협동조합 가톨릭 사회교리 연구소 | [요한복음] 36. 요한의 증언 13: 두루마리의 메시지 I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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