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영은 살아있는 생명으로 교회를 이끄십니다. 이 미사를 통하여 새로이 종으로 불림받은 교황님을 중심으로 교회가 이 시대에 필요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그 뜻에 맞갖게 세상을 향해 봉사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Homily (http://facebook.com/jamesinpater)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진정 우리의 지력을 뛰어넘어 완전한 사랑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섬세하신 섭리 앞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낮추어 시편 118장 23절의 이와 같은 고백을 되새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그저 초라해 보이는 한 사람을 통해서도, 당신은 얼마나 큰 역사의 흐름을 이끄시는지요?! 사실 주님 당신께서 먼저 초라한 구유에 몸을 누이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가난한 삶으로 몸소 침묵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오셨지요. 그런데 그 길 위에 놓인 십자가를 맞이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으로 멈춘 그곳이 또 새로운 시작이 될 줄은 또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복된 부활의 시기를 보내면서, 마치 한계가 주어질 때마다 그 벽을 부수시고 다시 그 너머를 보여주시며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봅니다. 인간의 세운 형틀과 ‘죽음’이라는 ‘미지(未知)의 운명’이 던지는 두려움으로 인해, 영적으로 갇혀버린 다락방의 견고한 문을 열어젖히도록 부어주신 성령의 역사도 바라봅니다.
마치 가두어졌던 저수지의 둑이 벌어진 틈새로 흘러든 물길이 점차 거세어져 결국 봇물이 터지듯 와르르 무너지듯이, 두터웠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사랑으로 녹여 흘러드는 성령의 역사도 결코 막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에서, “교회는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라고 일러줍니다. 교회는 가시적 규모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정의되었듯이, 첨예하게 민감한 사람의 영혼과 영혼의 만남으로 성장하고 지탱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더욱 성숙하게 하는 길은, 살아있는 사랑, 생명의 양식을 얻고 마르지 않는 샘을 마실 수 있는 덕분입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과 68절에서, “영은 생명을 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을 바라보고, 주님 걸음을 좇는 공동체에서, 말씀을 통해 영혼의 양식을 얻고,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이 치유될 때, 어찌 교회가 그대로 머물러 있겠습니까? 우리도 영의 생명으로, 주님께서 주신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성숙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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