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5 성주간 화요일 강론

작은눈물의 글
2025-04-15 12:36:08 조회(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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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5 성주간 화요일

 

Homily (http://facebook.com.jamesinpater)

 

여러분은 최선을 다한 삶의 끝에 어떤 보상을 바라십니까? 때로는 어떤 것으로 충만하게 채워졌다고 느끼며, 또 어떤 것으로 그렇지 못하다고 실망하실 때가 있습니까? 또 어떨 때 가장 여러분의 자존감이 높아졌다고 느끼십니까? 어쩌면 이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우리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도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생물학적 용어에 ‘역치(?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물체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강도를 표시하는 수치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 강도가 최대치에 도달하게 되면, 더 이상의 자극이 느껴지지 않게 되지요. 비슷한 차원에서 경제학적 용어로 설명하면,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동일한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함에 따라 느끼는 주관적인 만족도 혹은 필요도가 점차 감소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배고파도 처음에 먹는 빵이 가장 맛있는 법이듯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보이는 것을 추구할 때는 결국은 이런 한계에 맞닥뜨립니다. 물질적인 부유함이나 사람 사이에 얻는 비교우위의 만족감도,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위치와 권력을 가졌다는 자부심도, 사실 그 이상의 기쁨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만으로 만족합니다.”라고 했던 단순한 고백에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차지하기에 인간의 눈으로는 초라하고 가난하게 보이나, 세상의 그 무엇이 채워줄 수 없는 영적 기쁨과 하느님 자녀로서의 행복으로 인해, 그야말로 빛나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서 49장 5절에서,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요한복음 13장 32절에선,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성주간을 통해 부활로 나아가는 최종적인 고비를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충만한 사랑과 영광으로 빛나며 얻는 형상이 십자가 형틀 위에 고통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모순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참사랑’의 빛이 바로 그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찬란히 드러날 것이라는 섭리를 믿음으로 끌어안아야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 주님께서 받아들이신 영광은, 이 세상의 한계가 명확한 영예로움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구원에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모든 여정이 다한 끝자락에, 당신의 영을 아버지께 맡기시며 온전히 당신 자신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순종이 여기 있는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것만이 주님께서 하느님의 사랑과 일치하여 차지하신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도 유한(有限)한 우리 삶의 여정을 통해 바라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지는 자녀로서, 힘이 되어주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힘이 되어주시는 하느님으로 인해 성실하게 삶의 여정을 기쁨으로 일구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사랑으로 증언하는 선포가 되고, 충만한 보람으로 새겨지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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