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오복음 9장 17절에서 주님께서 일러주신 권고는 우리 삶에 고착되고 굳은 사고와 행동의 방식을 벗어버리라는 권고입니다.
정작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지 못하도록 걸림돌이 되는 편견과 선입견의 유혹이 얼마나 큰지요?! 자신의 시야에 갇혀 있으면 그 안에 깃든 참된 진리에는 정작 눈이 멀고 맙니다. 본질을 이해할 수 없는 탓이지요.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는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는, 사실 그들 곁에 오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는 마음이 닫혀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비우시고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자, 참 하느님이란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데서 흘러나온 질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에, 절망에 빠져 침통한 표정으로 단식을 해야만 한다는 당위(當爲) 에 스스로 묶여있는 것이지요.
저는 ‘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리키면 사람들이 정작 달은 보지 않고 그의 손가락만 본다.’는 격언에 깊이 동감이 됩니다.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히는 달의 영롱한 빛을 보기보다, 그것을 가리키는 그 사람의 손가락이 휘었다거나 예쁘지 않다는데 주목하면 그는 결국 달을 보지 못하겠지요.
실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관례나 문화적 관습을 넘어서서 당신 사랑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오늘 창세기 27장 28절에서, 자신을 속이는 아들 야곱에게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을 내려 주시리라.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하며 모든 축복을 내려주는 장면은 사실 인간적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렵고 부당하게 여겨질 만큼 모순된 장면이지요.
그러나 인간의 실수와 잘못의 과정을 통과하더라도, 결국은 모든 것을 짜맞추시듯 이루어가시는 하느님의 거대한 섭리를, 우리가 새로운 지혜를 얻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제 금요일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고,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파격적인 모습 가운데 당신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하게 여겨왔던 고정관념과 관습을 덜어내고 새로운 의식과 호흡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은 실로 고통스러운 여정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지닌 자존심을 깎아내리고, 자존감마저 하락하는 것을 감수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오래도록 영혼 깊은 곳에서 썩어 도려내어야 하는 상처라면, 기꺼이 그렇게 해야지요. 그래서 주님 보시기에, 또 우리 자신에게도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축복을 얻어야지요.
주님, 우리를 위하여 더욱 가난한 모습으로 모든 것을 비우신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과 같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 딸로 새로 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