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윤 수녀님 /제21회 역사비평적 방법론 개요

은총댁 2017/09/10 오전 05:36 (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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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윤 수녀님 성경 여행 스케치 

 

제21회 역사비평적 방법론 개요

 

신약성경을 보시면 공감하시겠지만 구약성경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부분을 인용하면서 

러니 이것이 나자렛 사람 예수 안에서 실현됐다라는 것을 해석해 주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신약은 구약에서 계속해서 예고되었던 어떤 사건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이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번에 제가 성서 해석에 대해서, 해석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해석과 관련돼

서 저한테 또 가르쳐 주신 부분이 있어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전부 다 한국말을 쓰고 있

는데요. 어떤 때는 제가 쓴 말이 분명히 한국말인데도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러니까 분명히 저는 A라는 의도로 이야기를 했는데 그쪽에서는 전혀 

다른 의로로 받아들이는 그런 경우.

 

예를 들어서 뭐 이런 거죠. 어떤 상황에서 제가 봤을 때는 '아, 저분이 저런 거 하실테면 너무 

어려우시니까 그럼 제가 할께요.'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본인 입장에서는 타인을 배려한 그런 

'제가 할게요'인데 또 다른 분들이 봤을 때는 '쟤는 욕심이 많은가? 왜 저렇게 항상 자기가 한

다고 하냐?' 이렇게도 볼 수가 있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항상 이렇게 한 가지 말에 대해서 굉

히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 

 

그게 이상하다라고 볼 게 아니라 차라리 그걸 당연하다라고 봐야 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

을 하고 보통 이제 그렇죠. 저 사람이 어떤 스타일인지를 알아서 '제가 할께요' 이렇게  딱 얘

기 했을 때 배려인지 아니면 자기 욕심인지 이런 게 그 사람 스타일을 전제해서 판단을 하게 

되는데 어떤 경우는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앎이 있기도 전에 먼저 내가 그냥 그렇게 생각을 

해버리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옛날에 우리 북한 사람들 한 번도 본 적이 없잖아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그들

에 대해서 정확하게 검증된 상황을 아는 것도 아닌데 옛날 초등학교 때나 이럴 때는 북한 사람

이러면 다 '나쁜 사람'이렇게 됐었고, 또 성서에서도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스라엘 사태를 

좀 설명을 드렸지만 그렇게 알기 이전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나 착한 사람들, 유다인들은

항상 선민으로서 아주 바른 길만 간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했었고,

 

그들과 그러므로 대적 관계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무조건 폭동들이고 이렇게 아주 폭력

을 하고 테러리스트들이 대부분인 이런 쪽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 이미지가 형성이 됐는 게 아니라 어떤 부분은 외적인 부분에 의해서 이미지가 

형성돼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줄만한 그런 기회

조차 박탈당한 채 나쁜 사람으로 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저희들 안에서 굉장히 많이 일어나는 일들 중에 하나인 것 같애요. 저도 그걸 잘

아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니까 그거에 대한 믹음과 희망으로 사실 오해나 이런 것들을 견디게 

되는데 예수님 같은 경우도 높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분명히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

느님을 깎아 내리는 그런 사람이라고 판단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들의 판단이 굉장히 폭력스러운 판단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죄목 때문에 돌아

가시게 되는 이런 상황인데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 타인에 대한 선입견이 저희한테 얼마

나 큰 폭력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특히 어떤 분이 잘못을 많이 

하시냐 하면 똑똑하다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분들이죠. 그런데 그들의 판단이 틀렸음에도 불

구하고 그들은 자기네들 판단이 옳다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저 사람이 눈 멀었다' 이러는데 사실은 '자기네들이 눈 먼 것을 모르는 것. 이게 더 큰 

죄인이다.' 이런 말씀도 하고 그러는데, 그래서 살다보면요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는 이런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래요 나는 요렇게만 이야기 하면 

대가 다 알아주겠지. 요런 생각을, 기대를 하는데 이건 저는 제가 왜 요렇게 얘기하는지를 

그 맥락을 다 알거든요. 

 

내가 과거에 이랬었고 그래서 나도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이렇게 얘기를 하면 이건

이런 뜻이야. 이건 제가 이해한 저의 스토리인데 타인이 저의 스토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고 말마디만 이해해서 더군다나 이분이 굉장히 부정적인 경우일 때는 저의 그런 말

마디 하나가 굉장히 큰 오해와 그리고 그 오해가 서로 풀기 전에 어떤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이전에 어떻게 돼냐하면 고착돼 버리는 거죠. 

 

어떤 기회가 왔을때 '아 저 사람은 그런 사람' 이렇게. 우리가 살면서 하느님 안에서의 해석이 

얼마나 필요한지 이런 것들 많이 생각을 해 보게 됐었고요. 또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선입견으

로 대하는 여러 가지들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좀 성찰해 봐야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좀

해 봤습니다. 그래서 나오게 되는 게 소위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대인 관계 안에서도 해당 되지만 소위 인문학이라는 것이 시작되면서는 하나의 문

(文)도 그 문(文)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의 사건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도 역시 그 전체 맥락을 봐야 되는 해석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제가 여기서 이

렇게 지금 물을 먹어야 되는데 물을 이렇게 여기다 부었다고 합시다. 굉장히 이상한 행동이지

만 요 행동만 가지고 그 사건을 해석할 수 없다라는 거예요. 이해할 수 없다라는 거죠. 

 

전체적으로 왜 저 사람이 저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를 알아야지만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

했다라고 본다는 거고, 대인 관계, 사람 안에서도 그에 대한 정확한 어떤 해석이 필요하게 되

는 겁니다. 그래서 소위 슈나이어 마커라는 사람이 해석학이라는 걸 철학에 도입을 하게 돼요.

그런데 이 철학적 해석학이 이제 신학 안에서도 신학적 해석학으로 들어오게 되고 또 성서 해

석학으로도 들어오게 되는데, 이유는 뭐냐하면 성서 자체가 이미 해석이다. 여기에서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 왜냐하면 신약성경을 보시면 많이들 공감하시겠지만 신약성경에서 이렇게 이야가 한 부분

  을 인용하면서 그러니 '이것이 나자렛 사람 예수 안에서 실현됐다'라는 것을 해석해 주는 거

  거든요. 그러니까 '신약은 구약에서 계속해서 예고 되었던 어떤 사건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

  의 해석이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이 또 성서가 완전히 마무리 된 다음에는 교부들을 비롯해서 소위 성전이라

고 하는 거죠. 이 성전도 다른 어떤 것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계시로 주어진 구약성경과 신약

성경에 대한 해석이라고 보시면 돼요. 교부들의 그 학문 활동도. 그 이후에도 스콜라 시대, 중

세시대를 거치고 현대까지도 학자들이 하는 것이 그냥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지 소위 해석학의 일환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하게 되는 해석의 필요성 이런 부분들이 학문 안에도 

도입이 되는 거고, 이 학문 안에서도 철학적 해석학, 신학적 해석학이 자리를 잡으면서 성서

도 바로 그런 것들을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연결이 된 거고요. 그런 성서 해석학의 가장 클

래식한, 가장 전통적인, 아주 고전적인 방법이 있다면 역사비평적 방법론이라고 말씀을 드렸

습니다. 

 

* 역사비평적 방법론 : 하나의 어떤 문헌을 볼 때 이 문헌이 이야기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

  려면 그 문헌 뒤에 있는 역사적 배경으로 우리가 찾아가야 한다는 이론 

 

예를 들어서 구약성경에 보면은 세상 창조를 이야기할 때,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지구

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지구가 동그랗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평평한 어떤 이런 우주관을 이야

기하는 것을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죠. 이해가 안 되지만 '아, 그때 사람들은 우주관이 저

랬다.' 이걸 이해했을 때는 이해가 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서를 볼 때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으로 가고 또한 비평적으로 한 번 보자.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성서에서 이상한 부분,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 충돌되는 부분, 삼중 본

문들이 굉장히 많은데 이거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니까 그 전까지는 아 성서는 믿음으로 무

조건 글자 그대로 믿어야 된다. '믿지 못하겠는데요.' 이러면 '아, 그게 신비 아니냐? '이러면

서 강요를 했었는데 이제는 좀 19세기 말부터는 그렇지 않다. 조금더 학문적인 방법으로, 과학

적인 방법으로 소위 비평 부분을 교회가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는 할 수 있다. 이게 역사 비평

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론으로 제가 본문비평, 문헌비평, 전승비평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어요. 본문비

평이라는 건 뭐냐하면 최초의 어떤 문헌을 문서화하기 시작했던 그 파피루스 내지는 그 양피

지는 이미 다 유실되어서 없기 때문에 저희는 사본을 통해서, 사본들의 대조 작업을 통해서

원문을 재구성한 것이고 가장 원문에 가까울 것이다라고 추정되는 본문을 가지고 있는 이런

상황인데 이런 모든 과정이 본문비평이라고 말씀을 드렸고요. 

 

문헌비평이라는 것이 문헌가설, 모세오경의 문헌가설과 연결이 되는데, 그러니까 좀 읽다보

면은 아 요기서부터 요기까지는 이상하게 하느님 이름을 야훼라고만 하더라. 그리고 하느님

을 설명할 때 친구처럼, 마치 인간을 대하는 것처럼 신인동형이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얘기

를 하더라. 그런데 다음 부분으로 가면 하느님 이름을 엘로힘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대할 

때 굉장히 초월적인 하느님, 인간하고 이렇게 쉽게 산책도 하고 얘기도 하고 이런 게 아니라 

동떨어져 계신 그런 내용들이 나와 있다. 

 

그래서 모세오경이나 아니면 구약성경이나 다른 신약성경을 이렇게 보시면 한 사람의 작품

이라고 보기보다는 하나의 어떤 문헌들이 들어와 있다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균열이 없는 최소한의 어떤 문학 장르로 잘라보자라는 것이 문헌비평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전승비평이라는 게 있었는데 전승비평은 뭐냐 하면,

 

* 전승비평 : 어떤 문헌이 완성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커다란 전승이 혹은 작은 전승도 완

  성이 되어 있고 그 전승 자체가 어떤 덩어리로 들어온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신약성경 같은 경우에 보면은 마태오나 루카 같은 경우는 마르코를 전제로 해

지고 이렇게 쓰게 되잖아요. 그러면 마르코나 혹은 Q 어록이라는 하나의 전승은 이미 있는

것이고 마태오나 루카의 저자는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전승을 가지고 와서 거기에서 자기 

공동체에 맞게끔 재해석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재구성해서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 마르코나

마태오나 루카가 어떤 전승을 공유하지만 조금 다를 수 있는 이런 것들이 전승비평이고요.

 

구약 같은 경우에서도 많이 있죠. 홍수 이야기 이런 것들도 이미 그들이 알고 있었던 어떤 

홍수와 관련된 스토리라인이 형성되어 있는, 전승이 있는 건데, 그것을 가지고 와서 최종 편

집할 때 가져와서 쓴다고 보시면 돼요. 이렇게 쭉 읽어 보시다가 아 요거는 이미 완성된 전승

이구나. 그걸 가지고 와서 인용하고 있구나. 이런 것들을 밝혀 내는 게 전승비평입니다. 

 

그다음에 양식비평이라는 거 설명을 드려야 되는데 이거는 제가 성경 여행 스케치 맨 처음에

설명할 때 강조해서 드렸던 부분인데 사실은 요 양식비평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뭐냐하면 좀

읽다보면은 성서 안에서 굉장히 독특한 문학 양식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를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오경 같은 경우는 앞 부분에 설화라는 양식이 굉장히 많이 뭉쳐져 있고, 탈출기 중반

부, 후반부부터 신명기까지는 법조문이라는, 

 

그러니까 굉장히 어떤 독특한 문학양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를 볼 수가 있는 거거든요. 

이유는 뭐냐하면 당시 사람들이 그 문학 양식으로, 소위 문명권에서 문학한다라는 사람들이

그런 양식들을 많이 도용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을 보는 게

양식비평인데 예를 들어서, 

 

* 시편 같은 경우도 그 시대에 시라는 독특한 양식이 굉장히 많이 사람들 안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있었고 그래서 시라는 양식으로 된 문헌들을 모았는데 여기서는 왜 이런 문학 양식들

  이 모여졌느냐?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노래(찬양)를 드릴 필요가 있는데 그러면 그 찬양

  에 필요한 노래들이 수집되어야 했었고 그래서 '시편'이라는 양식이 그 양식이 모아진 자리

  는 전례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삶의 자리라는 짙은 내면이라는 표현 많이 들으셨을 거 같은데 조금 어려운 내용이

될 거 같아서 여기서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아무튼 양식비평이라는 게 그런 거라는 거 말

씀을 드리고요. 이게 제 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가르침이다라는 걸 알려드리기 위해서 

제가 공의회 문헌에서 '계시헌장'이라는 문헌에서 몇 가지를 좀 발췌해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것도 몇 번 말씀을 드렸는데 소위 시노드나 아니면은 공의회나 이런 것들이

형성이 되고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 회의를 할 때는요 시대적으로 뭔가 패러다임을 정리를 

하고 갈 필요가 있다라는 그런 위기 의식이나 이런 것들의 결과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래서 잘 아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특징은 뭐냐하면은,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65년) : 교회의 신학 혹은 신앙의 흐름을 굉장히 성경적

   이고 사목적인 시각에서 논함 

 

그 이전의 공의회와는 상당히 달리 성경을 굉장히 강조하는 거예요. 사실 가톨릭에서는요 

성경을 그다지 강조하기를 꺼려했었어요. 왜냐하면 개신교에서 워낙 성경 공부들을 많이 하

시다보니까 저희는 옛날에는 그렇게 많이 강조를 안 했다라는 거죠. 그런 어떤 흐름 안에서 

'아니다, 계시의 원천은 워낙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으로 돌아가야 된다'라는 것을 가톨릭에

서도 강조하기 시작했던 공의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고,

 

그리고 그냥 이렇게 무슨 상아탑에 갖혀서 실질적인 우리의 삶과 관련있는 이런 교회가 아니

라 우리 삶과 동떨어진 교회만을 강조하는 거 이거 벗어나야 된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보다

목적으로 나가야 된다. 신자분들께서 정말 하느님을 만나실 수 있게끔. 그래서 성경적이고 

사목적인 이런 방침을 굉장히 많이 강조하시면서 이루어진 공의회입니다. 

 

그래서 성서를 매우 중요시 여기다보니까 아주 중요한 헌장이 나오게 되는데 '계시헌장'이라

는 이 헌장에서 굉장히 성경에 대한 가르침을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 이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계시헌장'과 함께 '교회헌장'이라는 게 있어요. 두 헌장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가장 어떤 아름다운, 가장 중요한 이런 문헌으로 지금 간주가 되고 있는데

 

* 그래서 '계시헌장'이나 '교회헌장'은 단순히 선언이나 교령이라고 부르지 않고 '교의헌장'이

  라고 불리우며 도그마라고 하잖아요. 다른 어떤 문헌들과는 차별성을 띠게 됩니다.

 

여기에서 성경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를 하시냐 하면 특별히 계시헌장 12장을 많이 참조하시

면 좋겠는데 거기에서 몇 가지 제가 따 왔기 때문에 읽어보겠습니다.

 

* 계시헌장 12항 : 하느님께서 성서에서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방식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서 해석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성서 

  저자들이 정말로 뜻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말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연구해야 된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그냥 성서가 그냥 하느님이 글자 하나하나 이렇게 박아주셔 가지

고, 불러주셔 가지고 받아 적어서 된 거라고 보지 않는 거죠. 그렇다기 보다는 하느님이 분명

히 성령, 그러니까 당신의 스피리트를 주입시켜 주시지만 인간의 언어로서 그리고 그 저자의

어떤 주변 환경이라든가 그 시대의 시대 정신이라든가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무시

할 수 없다라는 이런 상황입니다. 

 

* 그러므로 성서 해석자들은 성서 저자가 제한된 상황에서 그 시대의 문화의 여러 조건들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인 문학 유형들을 이용하여 표현하고자 하였고 또 표현한 그 뜻을 연구

  해야 된다. 성서 저자가 글로써 주장하고자 한 것이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널리 

  쓰이던 그 지방 고유의 사고방식, 언어방식, 설명방식 그리고 사람들이 상호교류해서 관습

  적으로 사용하던 방식을 면밀히 고려해야 된다. 

 

  성서 저자들의 저술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문학 유형들을 고려

  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문에서 역사적, 예언적, 시적 양식 또는 다른 화법 등 여러 

  문학 양식으로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제가 필을 받아서 당시 사람들이 쓰던 그런 문학 양식을 가져왔다. 이렇게 말씀 드
렸는데 사실 우리 제2차 바티칸 문헌에서는 이걸 조금 더 학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거죠. 그

리고 양식비평과 전승비평과 문헌비평 이런 것들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 다음에 설명드려야 하는 건 편집비평인데요. 편집은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성서 저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수집해서 서술하고자 했을 때 여러 전승들을 가지고 오는데 전승들을 연결 시

켜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소위 편집을 하게 되는데 이 편집의 어떤 흐름들도 한 번 봐야 

된다라는 게 편집비평입니다. 

 

그래서 그 역사 비평적 방법론들, 지금 말씀드린 문헌비평, 전승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을 

통해서 주로 저희들이 도출할 수 있는 결과가 있다면, 문헌이 이렇게 있으면 탈출기 1장 1절

에서 2장이 이렇게 있다면 여기에서 요 부분은 굉장히 오래된 1차 편집으로 이루어진 1차 자

료다. 가장 오래된 자료다. 그 다음에 요기서부터는 요거는 2차 자료다. 뭐 이렇게 저희 성서

안에서 가장 오리지널 한 부분과 그다음 시대의 부분과 그 다음에  또 첨가된 어떤 부분들을

밝혀내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이제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의 한 부분이었다면 많은 분들이 한 1970년대부터 이걸 어떻

게 분석해 가지고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겠냐? 우리가 성서를 쭉 읽을 때 성서에서 이게 가장 

오래된 단어다. 왜냐하면 쓰인 단어라든가 쓰인 어떤 문장 스타일이라든가 이런 게 굉장히 고
대 것이기 때문에 1차 자료고, 여기는 후대의 단어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외래어가 들어와

있다거나,

 

예를 들어서 여러분 인터넷, 이런 말이 나오는 문헌이 있다면 이건 분명히 1980년대 이후의 

문헌이예요.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인터넷이라는 게 아예 없죠. 그 이전에 나온 문헌 중에는

이런 신종 외래어가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성서에서 이렇게 봤을 때 아 이거는

페르시아어인데 페르시아어는 바빌론 유배 이후에 들어오는 거잖아요. 그러면 아 이거는 굉

장히 후대 문헌이구나. 

 

예를 들어서 아가서라든가 또 욥기에 나오는 여자들의 장신구 있죠? 귀고리, 향유 이런 것들.

아 이런 단어들은 옛날에는 없었던 거기 때문에 후대 문명이거든요. 그래서 1차 자료, 2차 자

료, 3차 자료를 구분한다 한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겠냐? 이런 비판들이 또 많이 나오게 되

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적인 방법 비평론이 19세기부터 성경 해석학의 아주 독보적인 위상을 갖고 있다

가 그 다음에는 이 방법과는 다른 좀 다르게 접근해야 되겠다라는 새로운 대안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게 공시적 방법론이라는 저희 교재 123페이지부터 나와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니

까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저희가 다른 말로 통시적 방법론이라고 합니다.

 

* 역사비평적 방법론 = 통시적 방법론

 

그러니까 시간을 관통해서 보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헌을 볼 때 이 문헌에 흐르고 있는

역사적인 상황들을 관통해서 봐야되겠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비평론을 다른 말로 하면 통시

적 방법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론의 약간의 반작용으로 나오게 된 공시적 방법론은

뭐냐하면, 시간성을 보지 말고 그냥 문헌 자체만 한 번 보자는 거에요. 

 

여기 문헌이 이렇게 있으면은 여기에서 이 말이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을 보게 되는 게 통시

적 방법이라면 공시적 방법은 그냥 이 본문 자체만을 가지고 분석해 보는 겁니다. 이런 방법

들이 나오게 됐던 이유는 뭐냐하면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포스트 모더니즘은 제가 한 번 설명드린 적이 있는데 모더니즘이라는 게 중심이 중요하고 주

변부가 그다음에 중요하고 그다음에 아주 변두리 세력 이런 것들로 모든 것이 그렇게 구별되

는 거죠. 사람도 그렇게 구별되고, 그림 안에서도 중심 구도가 있고 배경이 되는 게 있고 또

원근법으로 중요하지 않게 처리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고 이런 게 일반적인 저희들의 어떤 논

리방식이 아닙니까? 이게 모더니즘이라면,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건 뭡니까? 주변이 중심이 되는 거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래서 항

상 절대권력 체제가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기득권 세력이 있고, 그다음에 평민들 뭐 이런 대

중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던 시대가 모더니즘이라면 포스트 모더니즘에서는 대중이 전체를

끌고가는. 그래서 최고의 통수권자라 하더라도 대중의 대의를 무시하고 나갈 수가 없는 게 

포스트 모너니즘이죠. 

 

그리고 예를 들어서 그 이전에는 예술이라고 할 수 없는 거. 음악이 있다면은 아 이렇게 감

미로운 노래들이 나오고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에는요 소음인지, 노래

인지 음악인지 구별 못하는, 그런데 그것도 음악이다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거예요. 사실은요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요. 이런 어떤 흐름이 인문학에도 들어가게 되는 거고, 그러면서 특별히 

많이 관심을 가졌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게 '구조주의'라는 거예요. 

 

이거는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그 말하고 연결되기 때문에 제가 설명을 드릴께요. 그러니까 

우리가 뭔가를 이렇게 이야기할 때 말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만

약에 '나 밥 안 먹어' 이랬다고 합시다. 그러면은 '나 밥 안 먹어' 요건 개별적으로 있는 말이지

만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얘가 때가 됐는데 밥을 왜 안 먹는다고 그러는지 전체적인 틀 

안에서 봐야된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는 말과 언어를 구별을 합니다. 이(말)게 불어로 빠로리(parole)라고 하고요,

여기(언어)에서는 랑드(langue)라고 하죠. 그러니까 보통 우리들이 성서에서 예를 하나 드릴

께요. 예수님께서 '자, 일어나 가자' 이게 각 교구마다 자주, 종종 슬로건으로 삼으셨던 그런 

표현인데요. '자, 일어나 가자' 요 말 한마디는 빠로리예요. 그런데 이게 언제 나온 얘기냐 하

면 예수님이 밥 다 드시고 밥 다 먹었으니까 '자, 일어나 가자' 이러신건지, 아니면 또 잠자러 

가야 되니까 '자, 일어나 가자' 이러신건지. 

 

전체적으로 그 '자, 일어나 가자'는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당신께서 최후의 만찬을 다 하시고

수난하러 가시기 전에 나온 말이예요. 그러니까 빠로리는 그거지만 랑드 즉 언어는 뭐냐하면

지금 극도로 고통 속에서, 극도의 두려움도 있으신 거고요. 이런 거 안에서도 굉장히 담담하게

내가 해야 될 일을 이제 정점을 향해서 나가는 담담하면서도 결연하면서도 이런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봐야된다라는 거죠. 그래서 제가 

'밥을 안 먹는다' 이랬을 때 배가 안 고파서 그런지, 아니면 전체적 구조 안에서 엄마한테 지금

반항을 하는 건지. 이런 언어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라는 이런 겁니다. 그래서 성서를 그냥

볼 때도 말 한마디 한마디만 가지고도 굉장히 풍요롭게 나갈 수가 있는데 사실 요 말마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구조, 소위 맥락이라고 하죠.

 

아, 지금 요 본문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는 본문인지 요걸 이해하실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라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이런 부분들에 집중하는 것이 '구조주의'라고 볼 수 있고요. 그다음에 

또 공시적 방법에서 많이 쓰고 있는 게 저희 바티칸 교황청립 성서 대학원에서 주로 많이 쓰는

것은 '언어 문법적 분석'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 같은 경우도 박사 논문을 쓸 때, 그러니까 한 세 절 가지고 500페이지 논문이 

나오는 거거든요. 세 절을 가지고 쓰는데 요 세 절이 히브리 본문, 그다음에 70인역 본문, 그

다음에 시리아어 본문 이렇게 해가지고. 왜냐하면 구약성서니까 70인 역 번역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요기에서 이거를 이렇게 번역했을 때 그럼 이 번역본은 어떻게 이것을 해석한 것인

가? 요걸 번역을 통해서 저희가 살펴보는 거예요. 

 

그리고 시리아 번역에서는 또 어떻게 보고, 왜냐하면 같이 동종 언어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런 걸 다 분석을 하면서 아 문법적으로 요 부분은 좀 맞지가 않다. 지금 저도 '문법적으로 맞

지가 않다' 이 표현이 문법적으로는 맞는 표현이 아니잖아요. 틀린 말이잖아요. 그런데 그냥

우리가 사용하죠. 그러니까 성서 안에서도 보면 의도적으로 문법을 벗어나는 '탈문법적'인 문

장들을 만드는 경우가 있고,

 

아니면 이 사람 스타일이 그러면 어디에서 영향을 받은 건가? 이게 아람어에서 영향을 받은

건가? 뭔가 이렇게 문법적이고 언어 분석적인 부분들이 이렇게 들어가는, 아무래도 가톨릭 

측의 성서 주석이 다른 데 보다 조금 강한 부분이 있다면 이런 언어 분석적인 부분이 굉장히

강하다는 것. 고대 언어들을 저희들이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게 있고요. 

 

세 번째로 또 강조하고 싶은 비평법은 뭐냐하면 '정경비평'이라는 비평법입니다. 정경비평은

무슨 얘기냐 하면은 성서 전체를 카논이다, 정경이다. 그래서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에서는 카

논을 막 분석을 해서 1차 자료, 2차 자료 나오고, 그 다음에 특별히 신명기계 역사에서에 보면

굉장히 자주 보여지는 방법 중에 하나인데요 부록을 항상 달아놔요. 

 

그래서 신명기에서도 마지막 부분이 부록이고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전부도 마지막 

부분에 부록을 담아 놉니다. 그러면 역사비평적인 방법에서 봤을 때 부록은 정말 중요하지 않

은 것처럼. 왜냐하면 그냥 덤으로 이렇게 들어온 것처럼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라는 거죠. 

런데 그 이후의 정경비평에서는 정반대로 접근을 해요. 부록을 담아놨다면 이게 중요하지 않

아서 부록으로 처리한 게 아니라, 중요하니까 부록으로라도 담아 놓은 것이다. 

 

그래서 성서는 전체가 카논이기 때문에 글자 하나 만이라도 경시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라는 

거죠. 모두가 다 카논의 위상을 가지니 1차 자료가 더 중요하고 부록이라서 안 중요하고 이런 

의식을 버려버리자라고 하면서 전체가 다 믿음의 책으로 강조하는, 영국에서 많이 강조됐던 

그런 비평법입니다. 그래서 현재 그러면은 소위 성서학자들이 논문을 쓰거나 성서를 접근할 

때 어떻게 쓰냐?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은 다 갔으니까 그럼 요즘엔 이런 거만 쓰냐? 그렇지 

습니다. 그게 아니라, 

 

* 딱 봤을 때 아, 요 부분에서는 역사비평론적인 방법이 반드시 필요하겠다. 그 시대의 사회,  

  정치, 외교적인 상황들을 반드시 봐야지만 이해가 되는 본문이다.' 이러면은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을 가져와야죠. 그리고 만약에 '문헌을 잘라보니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또 다른 

  전승이고 여기서부터는 또 다른 전승이다.' 할 때 전승비평 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양식

  이 굉장히 독특한 잠언이라는 독특한 양식으로만 되어있다 아니면 무슨 노래같다' 이랬을

  때 양식비평 해야 되는 거고, 그래서 지금까지 학자들의 연구와 또 교황청에서의 여러 가지 

  지침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옛날 것은 나쁘고 현재 것은 좋고 이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거죠.

 

옛날 거에서 강조하셨던 부분들도 저희들이 지금도 굉장히 소중한 방법론으로 사용하고 있는

거고요. 그다음에 최근에 들어서도 여러 가지 비평법들이 나오게 되는데 그런 부분들도 저희

들이 도입해서 쓰고 그런 상황이라는 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한 가지

를 더 말씀드려야 되는데 이제 저희가 7장 마지막 부분을 봐야 되거든요. 저희 교재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서 지금 비평법하고도 연결돼서 말씀드려야 되는 부분인데요. 

 

저희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최근에 1993년에 제가 로마에 유학 갔던 그 해인데요. 이때 

'교회 안의 성서 해석'이라는 문헌이 발표되게 됩니다. 이거는 무슨 상황이냐 하면요 성서를

대할 때 역사비평론적 방법론도 오고, 그다음에 굉장히 다양한 방법론들이 들어오는데 교회

가 비판 없이 그 어떤 방법론도 다 수용하지는 않겠다라는 입장이예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성서를 볼 때 제일 중요한 게 어떤 부분이냐  하면요 이거 먼저 설명을

드려야하겠어요. 소위 인문학과 성서 신학과 차이가 있다면요 이런 차이입니다. 제가 어떤 분

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굉장히 유명하신 분이세요. 제가 굉장히 존경하고 아주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하시고 이런 분인데 그분이 이런 얘기를 하세요. 농담으로 하신 얘긴데, 물론 신

학자는 아니시고 일반적인 학자이신 분인데, 

 

그분이 "강의가 혹시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는 내용들이 나올

수 있지만 여러분들이 원한다면 내가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내가 말을 지어서라도 하겠다.

이렇게 재미있는 얘기를 하겠다." 이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저게 바로 성서 주

석과 일반 인문학의 차이구나. 

 

그런데 이제 성서 주석이라는 건 뭐냐하면 우리가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어떤 내용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절대로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만 끌어내는 거지 우리의 바

람이 주입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라는 거에요. 소위 주석을 저희가 엑세지세스라고 하거

요. exegesis 그런데 여기 ex라는 말은 희랍어에서 나왔어요. ex라는 말은 영어로 번역하

자면 from 이예요. 

 

그러니까 성서 주석이라는 주석은 뭐냐하면 본무이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거기서부터만 

from 해서 얘기를 끌어내는 거지. 그런데 보통 우리가 어떤 식으로 성서를 자꾸 읽으려고 하

느냐 하면요 주입하실려고 하는 거에요. eisgesis 여기서 eis라는 말은요 역시 희랍어인데요

into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즉 성서을 읽을 때 제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바람으로

성서를 그냥 이해하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주체는 exegesis는 본문이 이야기하는 거 요것만을 끌어내는 거고 주체는 당연히

본문입니다. 텍스트고요. 그런데 eisgesis 는요 사람이 주체예요.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대

로 해석하고자 하는 거니까. 그런데 이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이제 이런

경우예요. '아, 나는 예수님이 너무 미남이시길 원해' 이러면서' 예수님 눈은 파란 눈, 예수

님 머리 색깔은 금발, 키는 한 180cm 넘어야 되고' 이렇게. 그런데 그런 해석을 하시는 분

들, 꿈속에서 보셨다 이러면서. 그런데 이건 이제 틀린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 '우리는 성서가 이야기 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른다'가 정답이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키가 몇이었는지 성서가 이야기하지 않거든요. 그러면 모른다가 정답입

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꿈에서 183 정도 된데' 이거는 정확한 답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

까 그걸 몰라서가 아니라 성서 본문의 고유성과 성서 본문이 가지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구별돼야 되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굉장히 

철저한 교회에서의 통제가 있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1993년에 나온 이 '교회 안의 성서 해석'이라는 부분은 교회 학자들이 여러 가지 방

법론들을 다 내어놓게 되는데 교황청에서, 바티칸에서 이렇게 보니까 이거는 주석이 아니라

나름대로 우리들의 어떤 섭입견 내지는 편견 아니면 판단이 들어간, 주입딘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안 된다라고 하는 게 몇 가지 있어요. 제가 구체적으로는 말씀을 안 드리겠습니다. 

 

저희 교재 각주 24번에 한국말로 번역되어 있어요. 정태현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부분이 있어
서 직접 읽어보시면 더 좋을 거 같애서 제가 몇 가지 바티칸에서 요런 부분은 문제있다라고 

이야기한 문제는 다 언급하지 않고 한 가지만 언급을 한다면 근본주의적인 해석이죠. 여기에

대해서도 이제 그 문헌을 직접 보실 수 있는 분들이 많이 없으실 거 같아서 제가 몇 가지만 

읽어보겠습니다. 

 

* 근본주의 해석의 근본 문제는 성서 계시의 역사적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강생의 진

  리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이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는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의 긴밀한 관계를 다 회피하려고 한다. 근본주의는 

  '하느님의 말씀이 영감을 받아 하느님의 영감 아래서 그 말씀을 기록하였다라는 것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근본주의는 성서 본문을 성령께서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불러주시는 대로 받아

  적은 기록처럼 다루려고 하여 '하느님 말씀이 다양한 시대에 속한 언어의 유형으로 형성되

  었다'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근본주의는 성서 본문에서 나오는 세부 사항들의 무류성

  을 부당하게 주장하는데 특히 역사사건들과 관련된 혹은 과학적 진리와 관련된 사항에 대

  해서도 그러하다. 근본주의는 흔히 역사성을 내서을 수 없는 그런 자료를 역사화 시키고자 

  한다. 

 

그러니까 왜 꼭 이렇게 어떤 거는 역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죠. 전에. 하느님이 

당신을 계시하기 위해서 역사라는 장르를 가져왔다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이 어

떻게 해서 왕이 됐는지 서로 다른 본문들이 이야기하고 있어도 성서 저자들이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았던 이유는 다윗이 주인공인 책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인공인 책이라서 그런 것들. 

 

제가 지금 성경 여행 스케치 2가 아마 곧 나오거든요. 거기에는 이 부분들을 다 적어 놨습니다.

그래서 참조하시면 될 거 같애요. 저희 교재 129페이지로 가겠는데요. 그러면 교회가 이런 

eisgesis 를 견제하기 위해서 교회가 어떤 노력들을 하셨는지를 보도록 하겠는데 요거는 다

음 시간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아까 해석의 필요성 그러니까 우리가 가장 큰 폭력이 어떤 폭력이냐 하면요 자기가 지금

저 사람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데 남들이 다 뭐라고 하니까 나도 돌을 던지는 거. 이게 가장

큰 폭력적인 거 같아요. 한나 아렌드라는 여성 철학자죠. 이분이 악이 어디에서 오냐 하면요,

'굉장히 보편적인, 평범한 사람이 오히려 더 악인이 될 수 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통 이렇게 좀 평범하고 단순한 사람은 남들이 다 '저 사람 문제 있다'라고 이러면

검증해 보지도 않고 자기가 더 앞장서서 더 미워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악이 가지고 있는 굉

장히 교묘한 성질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보편성을 이용해서 평범한 사람들을 이용해서 앞잡

이를 시키니까. 

 

그런데 그게 제가 할 때는 모르는데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한 번 당해 볼 필요가 있는 거 같아
요. 그러면 이렇게 억울한 거구나 그리고 남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 하는 게 얼마나 그 사람

에겐 치명적인 어떤 것이 될지를 체험하는 아주 복된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걸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쓴 게 좀 있어서 읽어보겠습니다. 

 

* 생손앓이 中

시도해 보지 않고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지혜다. '그곳에는 보물이 없다'라는

정보는 지도를 확인해 가며 그곳을 샅샅이 찾아 본 사람만이 갖게 되는 지혜이다. 정직한 시

간과 생명을 바침으로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저 사람 나뻐' 이랬을 때는 조건이 있어요. 그만큼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애

썼는지, 그렇지도 않으면서 '나뻐'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내가 나쁘다는 거죠. 그리고 한 가지

더 읽어볼까요? 보통 나는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나를 이해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실

은 그 사람은 전혀 나와 다른 언어를, 한국말을 써도 다른 언어 속에서 있기 때문에 나를 이해

하지 못하는, 부딪치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각오해야 될 부분이라는 그런 내용을 조금 써 놨습

니다. 

 

* 생손앓이 中

신문지상에 연일 보도되는 연쇄 살인사건은 일상의 작은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폭력을 야기

시키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르드카이를 향한 하만의 분노는 사실 각박해져만 가는 우리

의 일상 생활 안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부딪침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은 언제나 나와 다
르기 때문에 내편에서는 크고 작은 분노와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결국 타인과의 관계는

언제나 낯설고 불편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뻔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결국 이를 극

복할 대안은 하나뿐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그의 다름을 능동

적으로 존중할 것.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그저 무거움과 감당할 수 없는 속박으로 다가올 뿐

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랑 다르다고 해서 잘못됐다, 틀렸다. 나보다 못하다. 이렇게 하는 게 폭력이라는

거죠. 그게 아니라 나랑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 사람은 또 다른 스토리가 있거든요. 

그래서 나와 다름을 존중해 주는 사회 이게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될 사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김혜윤 수녀님 성경여행 스케치 다시보기

 

http://web.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list.php%3Fprogram_fid%3D3778%26menu_fid%3D3779&program_fid=3778&menu_fid=3779&cid=&yyyy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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